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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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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31 Mar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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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네크
협업 참여 동의



“멈추십시오.”


침을 삼키며, 나는 말했다. 방패를 뱃가에 걸쳐 중무장했음을 알리는 노르튼의 침략선이 수십척. 단순히 계산해도, 수백명의 장정이 칼과 도끼를 갈고서 날 노려보고 있는 셈이다.

내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글쎄. 그저 등 하나와 검 한자루를 들고 그들을 멈춰세운 초병에 불과하지.


“지금으로부터 스물두번의 겨울 전에, 핏빛 두개골과 팰그림 왕의 이름 아래 노르튼과 케식스가 맺은 평화조약에 따라, 메들렌 강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고 합당한 세금을 바치십시오.”


실수하진 않았겠지? 몇년이고 반복해서 외워온 문구였으니까 말이 꼬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선두의 뱃머리에서 날 내려다보는 선장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지팡이마냥 기댄 칼도 내려놓지 않고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하게 돌아가긴 힘들겠군.


“다시 알립니다, 핏빛 두개골…”

“알아 들었다, 난쟁이야.”


선장이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이름이 무어지, 반쪽아?”

“리비드입니다.”

“소식이 느리구나, 리비드. 핏빛 두개골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나는 노르튼 엘프의 진정한 후계, 복수자 아르셀리의 딸 네카네로다. 미련한 에베와 바그람이 맺은 협약따위, 내가 신경쓸 성 싶더냐? 여봐라, 이 반쪽이를 붙잡아 묶어라. 길잡이로 써야겠구나.”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뭐? 싸울 생각은 아니다. 칼을 뽑아 바다 속에 던져넣고는, 손을 머리 뒤로 두었다.

여기서 반항하면 미친거라고. 전역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순순하구나.”

“쓸데없는 반항만큼 부질없는게 없으니 말입니다.”

“엘프의 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팰그림 왕국에 상주하는 엘프가 있습니다. 저에게 엘프어를 가르쳐 주었지요.”

“겨우 초병에게? 에베의 친척들은 잔머리만큼은 좋다더니, 너도 하플링이랍시고 말은 잘 배웠구나. 적어도 머리를 밸때 무슨 욕을 할지 궁리할 일은 없겠군.”


선장의 말에 노잡이들이 크게 웃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지만 말이다.

선원에 의해 묶이는 사이 갑판을 슬쩍 돌아보았다. 선원의 구성은 들었던 것처럼 다양했다. 숲 엘프와 비슷한 노르튼 엘프는 오히려 수가 몇 되지 않았다. 많은 수가 하플링과 수인들이었고,  키는 비슷해 보이지만 나와는 체형이 확실히 다른 드워프도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노략질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쳤다는 소문다웠다.


“마지막으로 켄팅엄 땅을 밟았던 때로부터 이백년은 훨씬 지나 소식에 감감한데, 지금 케식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일러보거라. 노잡이들은 손을 멈추지 말고 노를 저어라!”


큰 소리로 노잡이들이 대답하고는, 이내 길다란 노가 방패 사이에서 뻗어져 나왔다. 위에서 본다면, 배가 커다란 날개를 펼친듯 보이리라. 수십마리의 새 때가, 메들렌 강을 무리지어 가는 모습일테지.


“켄팅엄은 더이상 수도가 아닙니다. 팰그림과의 전쟁에서 함락된 뒤로 버려진 도시가 되었죠. 지금의 수도는 강을 거슬러 이틀을 올라가면 나오는 랭버리입니다. 십칠년 전에 현왕 레오니드께서 즉위하시고서 정한 일이지요. 그는 마들렌강 유역을 모두 되찾고 케식스를 하플링 왕국 중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일전에 당신들이 포위하고서 비굴한 조약을 체결했던 나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지금이라도 무장을 해제하시고 합당한 세금을 바치시길 바랍니다.”

“초병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네 경고는 오히려 희소식이구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털어먹을 것도 많다는 뜻이니 말이야. 머리를 잘 쓴다면, 포위할 필요도 없고 싸움을 걸 필요도 없이 금은보화만 가져가고 끝일 일이야. 그래, 그렇게 귀향하면 네녀석은 내가 노예로 다스려주마.”

“오만도 거기까지입니다. 곧, 저희 케식스의 자비를 구하시게 될테니까요.”

“하!”


선장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부웅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런 젠장.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날이 갑판에 박히는 소리.


“통역을 그리 쉽게 죽일 것 같더냐? 하하!”


주저앉은 엉덩이가 지끈거렸다. 주위 노잡이도 나를 보고 비웃음을 감추고 있지 않았다. 그럴만도 하지. 한숨을 쉬었다. 이 놈의 인생이란.

노가 물을 헤쳐가르는 소리가 조용히 주위에 울려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샌가 동이 터 지평선 너머에서 하늘을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일어나 수평선을 바라보자, 갓 떠오른 태양 아래에, 짙은 안개가 하구를 가리고 있었다. 이거, 좋지 않군.


“우리의 조상, 복수자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안개를 방패 삼아 반쪽이들의 심장을 훔치리라!”

“와아!”


노르튼의 함성 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가 듣는다면 무서운 일일 테지만 거리를 생각하면 그럴 일은 없을 테지. 한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자, 안개는 우리도 집어삼켰음을 금새 깨닿고 말았다.


“노를 저어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숙련된 선원들의 노 실력은 대단했다. 특별한 구령 없이도 한 시에 물에 들어가 한 시에 튀어나오는 모습은, 이들이 얼마나 오래간 배 위에서 함께 해왔는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한마리의 생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이대로라면, 이틀이 아니라 한나절만에 랭버리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뛰어난 선원들이로군요. 부러울 정도입니다.”

“선원이자, 가족이지. ‘왕’ 운운하는 네놈들은 결코 모르겠지만 말야.”

“그렇긴 합니다. 왕의 자질에 꼭 필요한 마음가짐은 아니니 말입니다.”

“무슨 소리지?”


선장은 기분이 상한 말투였지만, 칼을 겨누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위협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당신은 왕의 그릇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왕이 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어디 들어나 보지. 어째서인가?”

“묻겠습니다. 당신이 이 출정을 성공시켜 막대한 번영을 모으면, 그 부를 어디에 쏟는게 현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족을 먹이고, 씻기고, 무기와 갑옷을 늘리고, 배를 만드는데 쓰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부가 모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장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건 그게 모이고서야 생각해도 괜찮아. 그런 자네는, 레오니드가 그런 부를 모으는데에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렇지요. 마들렌 강은 숲 엘프의 보물과 드워프의 강철, 마족의 지식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를 차지한지 십어년, 팰그림의 안개왕도 꿈꾸지 못했을 부가 지금 케식스에 있습니다.”

“그 부를, 케식스는 어디에 쏟았다는 것이지?”

“곧 보시게 될 겁니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나는 조용히 말했다. 선장은 인상을 찡그리다, 이내 주위의 이변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선원들의 웅성거림이 커져갔고, 노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선장은 품에서 일장석을 꺼내 하늘을 뒤졌다. 하지만, 불투명한 돌 사이에서 태양빛이 비추는 일은 없었다.


“무슨… 태양이 보이지 않잖아?”

“저희 케식스는, 과거 수도를 포위했던 노르튼의 공포를 잊지 않았습니다. 언제고 바다 너머에서 당신들이 쳐들어올거라 의심치 않고 있었죠.”

“도대체 무슨 수작이지?”

“당신들이라면 꿈꾸지 않을 꿈입니다, 길게 사는 이여.”

“모두 방패 들어! 똑바로 말해라, 초병.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해가 비추는 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강을 타고서, 아침의 차가운 칼날 바람이 바닷내를 흩어 없애고 있었다. 초병 일은 언제나 고되지만, 아침이 되면 그런 노곤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나는, 순전히 이 아침을 위해 근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도대체 무얼 만든거야?”


안개가 옅어져갈수록, 어둠은 진해져만 갔다. 새벽 직전의 어둠만큼은 아니었지만, 있을리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그보다 더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웃었다.


“대답해!”


선장이 검을 뽑아 내 턱 밑에 가져다 대었다. 여지간히 날카로운지, 따끔함이 느껴지자 마자 뜨거운 물이 턱 밑을 적시는 느낌이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보십시오! 이것이 레오니드 왕의 다리입니다! 메들렌 강으로 나뉜 이 땅을 하나로 이으며, 바다로부터 당신들을 지키는 다리!”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노르튼의 배를 둘러싼 거대한 석재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과 같은 다리였다. 선두인 우리는 이미 다리 아래에 들어왔는데도, 출구까지 꽤 거리가 있을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다리를 올려다 본 적은 없었다. 아치를 이룬 기둥과 기둥 사이는 수십척이 지나갈 수 있는 폭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둠을 드리워 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리? 하… 그거라면…”


선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크기에 압도되었지만, 다리라고 하면 큰 위협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스물두번의 겨울 전에, 핏빛 두개골과 팰그림 왕의 이름 아래 노르튼과 케식스가 맺은 평화조약에 따라, 메들렌 강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고 합당한 세금을 바치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멍청한 소리, 다리에 무서워할 것 같으냐! 전원, 노를…”

“쏴라!”


나는 크게 외쳤다. 그러자, 기둥에 파인 구멍들 사이로 수십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내가 있던 선박을 제외한 선두의 해적들은, 반응할 새도 없이 화살에 꿰뚫려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앞의 참사를 목격한 뒤의 배들은, 부랴부랴 들고있던 방패를 치켜들고는 화살을 막아내었다. 뛰어난 실력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노가 멈추었다. 거센 물살이, 배를 뒤로 몰아내었다. 죽어버린 선두의 배가 물살에 못이겨 뒤의 선박을 몰아넣었다.


“발리스타! 위치로!”


호령에 맞추어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사슬로 연결된 발리스타가 출구 앞에서 내려와, 굴다리 밑의 해적들을 겨누었다. 거대한 화살이 날아들어 배를 부수었다. 비명과 함께 해적이 물살에 휩쓸려갔다. 꽤나 돈을 들였지만, 결과는 만족 그 이상이었다. 무리해서 마련한게 정답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 돌아가라! 모두 돌아가라!”

“선장! 불가능합니다! 배의 잔해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젠장, 젠장! 너, 하플링! 어떻게 살아나갈지 알고 있겠지? 당장 대답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진정 하시지요, 복수자 아르셀리의 딸, 네카네 선장. 투항하십시오. 그렇다면 목숨만은 건져드리지요. 가족들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들을 더 이상 죽게 할수야 없지 않습니까.”


선장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는 노여움에 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네가 대체 무엇이길래? 한낱 초병 아닌가?”

“’가장 높게 사는 이는 가장 낮은 이를 위해야 한다.’ 경전의 한 구절입니다.”

“반쪽이들의 종교엔 관심이 없다. 대답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초병입니다. 레오니드 왕의 적자이자 케식스 왕국의 왕위 계승자, 그리고 메들렌 다리 초병대의 대장, 리비드지요.”









[끝]


————




숲을 나온지 하루, 해안을 따라 언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자, 어느샌가 메들렌 강 하구에 다다랐다. 멀리서 바다 위에 세워진 다리 기둥들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엮인 나룻배들의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이곳에 다리가 있었다면 정말 편했겠어. 센 누나하에서 헬른으로 올라올때 하구를 돌아서 갈 필요가 없을테니 말야.”

“그런가? 어짜피 배를 이용하면 상관 없잖아?”


울피나의 말에 난희가 되물었다.


“이 윗쪽은 뱃길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플랑드르 섬에서 배를 징발하기엔 노르튼 엘프를 믿기가 좀 그렇기도 하고. 여러모로 육로로 옮기는게 이득이지. 나룻배로 광석이나 목재를 옮길수도 없으니, 믿음직한 다리가 있는 편이 교역에는 좋았을거라고 봐.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다리를 지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모르겠군.”

“그 시절엔 마족이나 드워프나 협조적이었을테니까.”

“아니면 하플링이 정말 협상을 잘했던 걸지도 몰라요.”


페트리샤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럴까? 그 고집불통들과 말을 트려면 보통 말재주로는 안될텐데 말야.”

“하지만 한때는 이 땅을 지배했던 종족이잖아요? 그만한 이유는 있었겠지요.”

“지금은 멸종해 사라진 종족이기도 하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거고 말야.”


난희가 말했다. 울피나와 페트리샤는 대꾸하지 않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한때 그 시야를 가렸을, 거대한 다리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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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

네크

티-스토리 applejack.tistory.com

트위타 @nec092

게임 리뷰하는 팟캐스트 우물파는 게이머들의 리뷰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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