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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감기 전쟁(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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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04 Jun 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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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칸나기



글씨체 변경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음.



코감기 전쟁(War) 

- 부제 : 전쟁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느낀 감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어딘가 멍한 정신으로 침대 선반 위를 더듬다가 간신히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침 7시 30분. 덤으로 액정 위의 자그마한 달력이 가리키고 있는 날짜는 12월 16일.

몸이 무겁다. 두툼한 이불로 누에고치마냥 온 몸을 둘둘 감싸고 있는데도 묘하게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어째서일까.

계절은 한겨울. 그래서 그런지 내 방에도 한 겨울에 걸맞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 채워져있다. 그렇게 두꺼운 이불을 낀 채로 멍하니 이불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같은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무리다. 학교에 가야하니까. 이대로 있으면 안되…는데.

그런데도 몸은 천근만근, 물먹은 솜 같은게 되어서 도저히 움직여주질 않았다. 어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하고 3초 정도 고민하는 사이.

"엣취."

코에서 성대하게 끈적끈적한 샛노란 액체가 튀어나왔다.

──그런가. 나는 지난 17년간의 경험상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단번에 떠올렸다.

그건──

"열 나네."

나는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아침부터 몸이 무거운 이유가 있었다. 코감기였다. 아니, 그냥 코감기가 아니다. 엄청난 열을 동반한 코감기였다. 뭐, 그래서는 코감기가 아니지 않아?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아마 열 때문에 머리의 성능이 30% 저하 된 것 같다.

아니─ 내 머리는 30% 성능 저하 디버프에 걸린 것만으로도 사고능력이 이정도로 저하되는 걸까.

조금 슬퍼지는데….

하여간,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자, 방안의 공기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춥다. 비단 감기에 걸려서 추운 것만은 아니리라.

우리집의 가훈은 "모든 일에 필사적으로"라는, 조금은 시대정신에 있어 포인트가 엇나간 것 같은 바보스러운 가훈이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 필사적으로. 그것은 절약이라는 행위에도 적용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집의 보일러는 지금껏 한 번도 틀어본적이 없다.

이래서는 보일러의 존재이유가 의심스러워진다. 실제로 이 세상에 보일러는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혹시 보일러는 타키온 같은게 아닐까?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방안 전체를 훈훈하게 덥혀준다는 보일러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의심스럽다.

분명 그 보일러라는 것은 인간들의 희망으로 가득찬 가설상에서만 존재하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일 것이다. 그런 천상의 도구가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런게 있었으면 내가 감기에 걸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니,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건 이쯤으로 해두자. 몸은 여전히 무겁고, 코에서는 연신 콧물이 흘러나오고, 머리는 둔한 아픔으로 가득차서,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잘 알수 없는 상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죽을 것 같다─라고 하면 되려나.

으으, 못참겠다.

결정했다. 오늘 학교는 쉬도록 하자. 이대로 병원에 가는 거다.

비록 우리집이 보일러와 타키온 입자를 동일시하는 집안이긴 하지만, 아들이 아프다면 학교를 빠지고 병원에 가는 것 정도는 인정해주시겠지.


"안돼."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어, 어째서요?"

나는 딱히 오늘 수학쪽지시험이 있어서 학교를 빠지고자 하는게 아니다. 수학쪽지시험 대비라면 확실하게 해뒀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수학쪽지시험을 보지 못하는게 분할 정도였다. 대체 내가 지난 일주일간 만들어놓은 직경 가로세로 3cm짜리 초미니사양 컨닝페이퍼의 존재가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니, 앞에서 한 말은 농담이다.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난 단순하게 성실한 학생으로써 내 개인의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빠지는 사실 자체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런데, 왜 안된다는 거지?

"방금 동생이 돈을 타갔으니까. 오늘 더이상의 지출은 할 수 없어."

뭐, 뭣이?

그렇게 놀라고 있는 내게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가하듯

"정 병원에 가고 싶으면 네 돈으로 가렴." 이라고── 뭐, 뭣이이이?!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돼. 안된다. 내 돈으로 병원을 가라니, 난 그렇게나 잔인한 짓은 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나에게는 사고 싶은 앨범이 있다. 그건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인디밴드가 이번에 새로 낸 3집 앨법으로 내가 사주지 않는다면, 메이저를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인디밴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된다.

그 인디밴드를 알게 된 건 3년 전 어느날. 내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우연히 듣게 된 하나의 샘플 노래 덕분이었다. 거기서 나와 그 인디밴드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나는 매번 그 인디밴드가 공연을 하거나, 앨범을 낼때마다 꼬박꼬박 팬으로써 참가하고 사온 것이다.

그 기록을 이제와서 깰 순 없다. 그랬다가는 그 인디밴드의 팬으로써 실격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슬슬 그 인디밴드가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눈에 들어 메이저로 데뷔할 것 같은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는데.

이럴때에 그 인디밴드의 원로팬인 내가 3집 앨범을 사지 못한다면, 이후에 그 인디밴드가 유명해지더라도 후에 붙게 될 신입 팬들 앞에서 "하! 나는 너희들보다 3년 먼저 이 가수들의 팬이었다고! 우매한 것들!"하고 우월감을 과시할 수 없게 된다…!

"콜록."

헉. 방금 입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순간 피를 토해버린 건가?! 하고 놀랐지만, 콧구멍 너머로 넘어간 콧물이었다. 다른 말로는 가래라고도 한다.

"……어쩔 수 없지. 병원이나 가자."

아무리 한국 가요계의 발전에 공헌을 하고 싶다해도, 일단 내가 건강해야지 공헌을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을테지. 한국 가요계도 중요하지만 내 몸도 중요하다. 피는 토하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지갑을 챙겨들고 겨울 공기에 대비해 두툼하게 외투를 걸친다음 집을 나섰다.



병원으로 향하며 바라본 거리의 풍경은 꽤나 살풍경했다.

앙상하게 가지 밖에 남지 않은 가로수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는 차디찬 금속제의 자동차들, 겨울의 추운 공기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길거리는 돌아다니는 각종 인파들.

인파 사이에는 교복을 입고 있는 녀석들도 보이는 것이, 그러고보면 지금 시각은 딱 학생들이 한창 등교할 시간대다.

이런 시간에 나 홀로 학교라는 일상에서 일탈해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자니 괜한 우월감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딱히 수학쪽지시험을 보지 않는 걸로 기쁜 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자주가는 병원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적당하게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는 개인병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허름한 상가건물 3층에 위치한, 정말로 보잘것 없는 작고 작은 개인병원. 헌데 어째서 이런 보잘것 없는 병원이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단골 병원인가 하면, 거기엔 총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집에서 가깝다.

집에서 가깝다는 것은 물론 그 병원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된다. 생각해보라. 당장에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은데, 겨우 겉모습이 허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병원을 멀리한다면 그건 병원에게 실례다.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다. 현대사회의 병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이 우리 가족이 이 병원을 자주 찾는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다음으로 둘째. 이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의사가 예쁘다.

이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다. 병원이라해도 결국 그것은 서비스 산업의 일종일 뿐이다. 몸이 아파 찾아가는 환자들은, 다른 단어로 좀더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손님이 되는 셈이고. 손님은 돈을 낸 이상 보다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예쁜, 보다 아름다운 간호사나 의사와 얼굴을 맞대며 하하호호 진찰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이란 말인가.

특히나 이 병원의 원장선생님은 만화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말 그대로의 여의사의 표본(풍만한가슴+잘록한허리+코끝에 걸친듯한 안경+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듯한 섹시한 미소+가슴이 파인 아름답고 선정적인 의상 + 어째선지 갑자기 볼펜을 떨어트린다음 느긋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줍고는 하는 이상한 버릇)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니. 동네 아주머니들은 코에 2천이 들어가고, 눈꺼풀에 3천, 턱에 1천이 들어갔느니 하면서 쑥덕거리지만, 그런 말로 아무리 폄하하려고 하더라도 이 병원의 원장선생님이 병원을 찾는 남자 환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축복이자 행복이다. 과연 미녀 여의사 만세. 외모지상주의 만세다.

하지만 이도 결국엔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집 가족은 4명. 그중 남자는 나와 아버지 뿐이다. 미녀 여의사와 간호사가 있다해도 혜택을 받는 것은 겨우 절반, 50%라는 이야기다. 그럼 그 시점에서 두번째도 병원을 선택하는데 있어 큰 이유이긴 하지만, 진정으로 절대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이쯤에서 나와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 셋째.

병원을 한번 찾을때마다 도장을 찍어준다. 10번 찍으면 한번 진찰은 무료다.

뭔가 법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어보이긴 하지만, 이러한 요인이 바로 우리 가족에게 이 병원만을 찾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주로 어머니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어머니의 절약정신이라는건 법까지 초월하는 초법적인 무언가인 것이다.

부디 국가의 거대권력이 무고한 소시민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뭐, 말이 길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병원이 있는 상점가 건물로 들어섰다. 병원이 위치한 곳은 3층. 

엘레베이터를 타고 3층을 누르자, 얼마 가지 않아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린다.

으으. 몸이 아프니까 빨리 진찰받고 끝내자.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강철상자의 문이 열리고.

그렇게 병원으로 향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딛은 순간.

"아."

"아."

우리들은 서로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래.

뒤늦은 지금에 와서 회상해보자면.

──그것은 절망적일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의 만남이자……

전쟁의 시작이었다.




"뭐야. 어째서 네가 여기있는 거야?"

서로를 발견한 우리 중, 가장 먼저 입을 연것은 상대방. 그러니까 두툼한 갈색 떡볶이 코트를 걸친 채 왠지 모르게 코가 빨개진 상태로 훌쩍거림을 연발하고 있는 여자애였다.

짧게 친 검은색 보브컷, 짙지도 엹지도 않은 눈썹, 무언가 고집스러워보이는─치켜뜬 눈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빛을 띄고 있는 두 눈동자, 비록 빨갛게 물들었지만 여전히 오똑한 콧날과 한없이 보드라워보이는 분홍빛의 입술, 거기에 새하얀 피부가 유난히 빨개진 코를 강조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쁜 여자애"였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이수연,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코를 훌쩍이며 되묻는다. 상대방의 이름은 이수연. 나와 같은 반에 재학중인, 뭐, 그런 여자애다. 

같은 반은 물론 같은 학교 남자아이들에게 인기는 많은 편, 러브레터도 꽤나 많은 양으로 받는 모양이다. 녀석이 다른 남학생에게 러브레터를 받는 장면은 내가 목격한 것만해도 이미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이은진, 내가 먼저 물었잖아. 개새/끼야."

괜히 내 이름을 부르며 신경질적으로 답하는 이수연의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기가 많은 건 알겠다. 얼굴이 예쁜 것도. 뭐 납득 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놈의 지랄 같은 성격이 문제인 것이다.

참고로 나와 이수연은 어렸을때부터 매일을 함께 해온 그런 사이다. 같이 밥을 먹거나, 같은 학교를 다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이번에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까지 줄곧 같은 반이다. 심지어 지난 17년 동안 내 삶이라는 연극에 있어 저녀석이 등장하지 않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말하자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함께. 생일도 같을 지경이니 이정도면 말 다했다.

그런 사이를 어떤 단어로 표현하는지는 굳이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에게 있어 저주의 말이나 다름 없으니까.

생각해보라. 저런 예쁜 얼굴을 한 여자애가 입에 담는 말은 욕설 투성이다. 그냥 욕설도 아니다. 쌍욕이다. 접두사에 꼭 개나 씨/발 같은게 들어간다. 그런 접두사가 없으면 욕을 못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17년간 함께 하면서 난 매년 저녀석과 얼굴을 맞이한 채로 그걸 듣고 있어야 한다고? 뭐야? 고문? 어째서? 내가 전생에 나라라도 전복시킨거야? 그런 거야?

저런 녀석의 외모만 보고 달려드는 남학생들을 보면 솔직히 말해 동정을 금할 길이 없다.

뭐, 내가 동정할 새도 없이 그자리에서 러브레터를 찢어버리는 이수연에게 걸쭉하게 욕을 한바가지로 얻어먹고 깨갱 쫒겨나긴 한다만.

"보다시피 난 감기인데."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답해주자, 이수연은 내게 들릴 정도로 쳇 하고 혀차는 소리를 내더니 한 번 코를 크게 훌쩍였다.

"킁. 나도 감기야. 씨/발."

무언가 짜증내는 말투였지만, 감기에 걸렸다는 불쾌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수연의 표정은 묘하게 후련하고 즐거운듯한 빛을 띄고 있었다.

참고로 나와 이수연은 같은 반이다.

"찬물로 묙욕하고 이불 안덮고 잤지?"

"어,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씨/발. 너 스토커냐?"

깜짝 놀란 얼굴로 양 손으로 몸을 가리며 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이수연 녀석.

"──오늘 수학쪽지시험이 있으니까. 너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건데."

"크, 크으…."

내 말에 속내를 들킨게 분한건지 그런 식으로 으르렁 거리는 녀석. 과연, 진짜냐. 수학쪽지시험이 싫다고 냉탕에 몸을 던지는 바보가 진짜로 있는 거냐.

세상은 정말로 바보가 많은 모양이다. 안타깝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로 잠시간 아무말 없이 그렇게 서있기만 했다. 딱히 서로의 아픈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연민이나 동정 따위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중대한 전투 이전의 긴박한 긴장감을 연상시키는─── 살기(殺氣).

그렇다. 지금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현재 나와 이수연은 동시에 같은 위치 선상에 서서 병원 문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었다.

서로의 위치와 병원문까지의 거리는 약 1m 정도.

우연히도 서로가 서 있는 곳에서 병원문의 거리는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꿀꺽.

자연히 가래로 가득한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훌쩍.

샛노란 콧물이 하모니를 이루며 콧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 극도의 긴장 속에서──.

"타앗!"

먼저 승부수를 띄운건, 역시 저돌적이며 흉폭하기로 유명한 바보, 이수연이었다.

"어딜!"

질 수 없다!

나 또한 몸을 날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녀석의 진로를 가로 막았다.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진찰 때문에 그렇다. 병원의 진찰이란 말하자면 순서번이다. 먼저 들어온 녀석부터 한다. 진찰명단에 먼저 이름을 써 올려,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진찰을 받으면 그 자의 승리.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 자리에 같이 선 순간. 이수연과 나 사이에서는 순식간에 그러한 룰이 세워진 것이다.

17년을 같이 있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하다.

이수연 저녀석은 지금 '상대방에게 지고 싶지 않다. 녀석보다 빨리 진찰을 받고 싶다. 빨리 진찰 받고 병원을 나가며 일그러진 녀석의, 패배자의 얼굴을 보며 소리높여 비웃어주고 싶다! 승리를 만끽하고 싶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씨/발! 꺼져!"

훙 하고 주먹을 날려오는 이수연, 달리는 도중에 날린 주먹인데도 불구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 과연 매일 입에 쌍욕을 달고 다니는 년. 주먹또한 욕에 비등할 정도로 매섭다! 그건 지난 세월동안 이수연을 질투한 나머지 시비를 걸었다가 뒈지게 쳐맞은 다른 여자애들을 보며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이수연의 별명이 괜히 미친개가 아니다. 하지만!

"누가 응수하겠냐! 멍청아!"

나는 고개를 숙이며 땅에 디딘 발에 젖먹던 힘을 주어, 더욱더 힘껏 땅을 박찼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타격 면적을 줄이고 회피를 꾀한다!

이수연과 17년을 함께하면 이정도의 회피 스킬은 기본이다!

"개새/끼! 피할 줄 알았다!"

"?!"

이런! 이수연이 위로 날렸다고 생각한 주먹은 어느 순간인가 아래, 그러니까 어퍼컷을 그리며 내 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길! 페이크였나?! 언제 저렇게 격투레벨이 향상한거지. 저녀석?!

순간 당황한 나머지 빈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 빈틈에 찔러넣든 녀석의 어퍼컷은──!

"?!"

훙. 공기를 가른 소리가 코앞을 스쳐지나간다.

"피, 피했어?"

이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확한 놀람의 빛을 띄고 있는 그 목소리에 나는 피식하고 한껏 녀석을 비웃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놈이 격투스킬의 레벨을 올렸다면. 이쪽은 회피 스킬을 마스터했다!"

저 미친년과 공으로 17년을 마주해온게 아니다! 이쪽도 피하는 것만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고!

자랑은 아니지만!

"후우…"

"크…"

그렇게 공방을 주고 받은 우리는 병원문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잠깐의 작전상 타임을 가졌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벌어진 공방은 평소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배는 몸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정도로 방금의 전투는 치열했다.

"이거, 계속 싸우기만 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군."

"그래. 개새/끼랑 치고 박기만 하는건 귀찮아. 난 빨리 집에가서 동방신기 오빠들 공연을 봐야한단 말이야."

"뭘 모르는 군! 동방신기라니! 그런 메이저한 녀석들을 핥는다고 뭐가 주어지지?"

"그러는 네놈이야 말로 이름도 없는 싸구려밴드나 핥는 주제에!"

고고고고고

우리 사이의 공기가 더욱 가열되기 시작한다.

서로의 인식 차.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사상의 단차. 주변에 흐르는 공기의 온도 차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녀석과 나는 한 하늘을 지고 살아갈 수가 없다.

어떻게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같이 살아온 주제에 서로의 가치관은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이 자리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멱살을 틀어잡고 항의해주고 싶다.

어째서 저놈. 이수연이라는 녀석을 만들었냐고.

그리고 그건 이수연 저놈도 마찬가지이리라.

"좋아…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안나겠어. 실제로 싸우기만 해선 시간 낭비이고 말이지."

일단 내가 먼저 한 걸음 물러나기로 했다. 남들이 열심히 수학쪽지시험을 보며 고뇌하고 있을 동안 탱자탱자 놀 수 있는, 오늘 하루라는 귀중한 시간을 이수연 녀석과 아웅다웅하면서 보내긴 싫다.

"그러니까 이 경우엔 정당하게 승부를 해서 누가 먼저 진찰을 받을지 정하자."

내 제안이 마음에 든 것일까.

"흥. 멍청한 이은진의 의견치고는 옳은 소리로군. 씨/발. 좋아. 그 승부라는걸 말해봐."

이수연의 납득과 함께,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들의──

──전쟁(War)이라는 이름의 사투가.



"일단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가위바위보지. 나도 알아. 등신아."

알면 욕은 하지 말라고. 이년아. 어쨌거나 이수연도 가위바위보라는 승부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욕은 저렇게해도 얼굴엔 만족했다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뭐, 이러니저러니해도 여전히 예쁜 녀석이다. 왠지 짜증이 난다.

가위바위보. 그 유래는 중국의 모 게임이라고도 하지만,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고. 가위바위보는 세상에서 가장 밸런스가 잘 잡힌 게임.

단지 가위와 바위와 보를 내는 것으로 승부를 내는 간단한 확률 게임이다. 방법은 간단하며 심플. 그렇기에 조작따위의 여지가 전혀 없다.

승부를 내기엔 최적의 게임이다!

"그렇다면…"

"시작해볼까?"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준비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간다앗!""

그리 위치며 우리들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미지의 영혼을 불러낼 듯한 기세로 전신 파워 전개! 극도로 집중한 우리 주변의 공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이한 열기로 일렁이기 시작한다!

""오오오오오오오!!""

단 한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우리는 각자의 신념을 담아, 각오를 담아, 이기고 싶다는 승부 그 자체에 대한 집념과 욕망을 담아!

""가위!""

땅에 떨어진 순간

""바위!""

반보 앞으로 발을 내뻗으며!

""보오오오오오!!!""

서로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쾅!

주먹이 상쇄된다.

"크윽!"

"크윽!"

주먹이 부딪힌 충격으로 우리는 서로 한걸음씩 물러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지체할 시간 따윈 없다. 이수연과 나는 물러난 것과 동시에 이미 앞으로 뛰고 있었다.

""가위, 바위, 보오오오오!""

다시 정해진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휘두른다!

콰앙!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격파! 우리가 서로를 향해 내뻗은 주먹은 다시한번 부딪히며 상쇄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가위바위보를 외치며 주먹을 내기를 여러차례.

몇번을 해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허억. 허억. 씨/발."

"승부는…… 나지 않는군."

그렇게 또다시 이수연과 나는 숨을 고르며 휴전의 시간을 가졌다. 서로가 생각하는 건 같다. 즉 저놈도 나도 이번 가위바위보 승부에서는 바위밖에 낼 생각이 없다는 거다.

당연했다.

"씨/발! 가위바위보를 가장해서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려고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노리는 것이 같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수밖에. 제길, 정말 멍청할 정도로 정직하게 남을 패려고 드는 바보다. 이수연 저녀석은.

어쨌거나 결국 가위바위보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는 결론만이 나왔을 뿐이다.

그럼 어쩌지? 다음 승부는 뭘로 하지?

"야. 병/신. 다음은 팔당기기 게임으로 하자."

내가 승부 종목으로 고심하고 있는 사이, 의견을 먼저 타진해온 것은 이수연이었다. 팔당기기 게임?

"뭐야. 모르는 거야? 이거 완전 병/신이잖아."

얼굴 가득 비웃음을 흘려보이는 녀석이었지만, 아니, 알고 있거든요? 뭔 건수만 잡았다하면 비웃음을 짓고 지랄이야. 이 년이.

다만, 팔당기기 게임이라는건 별게 아니다. 단순히 서로가 팔을 잡고 다리를 맞대어 중심을 잡은다음 힘을 겨루는 게임일 뿐이다. 물론 거기엔 힘 말고도 기술이나 페이크를 거는 등 심리전도 들어가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게임의 본질은 힘겨루기에 있다.

즉 여자와 남자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이수연에게 유리한 게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헹. 그래서 왜. 괜히 질 것 같으니까 변명하는건 아니고?"

울컥. 이수연의 비웃는 태도에 나도 화가 치밀었다.

"까짓거 상대해주면 되는거 아냐. 뭐 내가 확실히 이길 수 있다면야 좋은 거고."

비록 미친개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이수연이긴 하지만 딱히 힘이 또래 여자애들보다 비정상적으로 강하다거나 하는 미친 설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 지난 17년간 봐온대로 이수연 저녀석은 단순하게 성격이 지랄 같은 미친년이다. 성격만 병/신 같다. 그거 빼고는 또래 여자애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단순하게 외모가 예쁘다는 거랑 평소 거울을 보고 "넌 어쩜 왜 이렇게 예쁘니?" 같은 말을 지껄인다는 것 정도 뿐이다.

그러니까 힘 경기로 나간다면 질 리가 없다.

"좋아. 해보자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각자의 오른 발을 앞으로 뻗어 서로를 지지했다. 이것으로 경기 준비는 끝.

"그럼 시작해볼까?"

이수연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수연의 손은 쓸데없이 부드럽고 뜨거웠다. 뜨거운건 열때문이라고 치더라도, 부드러운건… 역시 여자애이기, 때문인걸까.

아니, 쓸데없는 잡생각은 버리자.

승부에 있어서 필요한건 어디까지나 집중, 상대를 쓰러트리겠다는 집념. 그래 승리에 대한 집착 뿐이다!

그러니까──!

"시작!"

이수연의 게임 스타트 선언과 함께 동시에 나는, 그리고 이수연은



""죽어라아아앗!""



서로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쾅! 상쇄된다. 그 충격파로 주변의 지반이 떨린다. 하지만 이것으로 멈출 우리들이 아니다.

지지하는 다리를 동시에 서로 왼발로 바꿔치며 다시한번, 킥.

콰앙!

쾅쾅쾅쾅쾅!

몇번이고 걷어찬다.

""우오오오오오오!!""

어디까지나 상대의 다리가 먼저 부서지기를 기도하며 배틀!

하지만 승부가 나지를 않아!

그렇게 얼마나 배틀을 떴을까.

이번 승부도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채 마무리 되고야 말았다.

"헉 헉."

"제, 제길…."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하는 생각이 같을 줄이야.

이번 킥 공격으로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했건만───

"안돼. 씨─발. 가위바위보도 그렇고, 이번 팔 당기기 게임도 그렇고 역시 신체 접촉을 통한 게임으로는 한계가 있어."

언제부터 가위바위보가 신체접촉배틀게임이 되었는지 의문이지만, 나도 동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접촉은 삼가해야 했다.

저도 모르게 이수연과 나는 서로의 급소를 향해 공격을 날리고야 만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대결은 신체를 사용한게 아닌…

"끝말잇기── 어때?"

내 제안에 이수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또 못견디게 예뻤지만, 정신통일. 이 녀석은 지금 나와 전쟁중인 적이다.

"끝말잇기?"

"설마 끝말잇기를 모르는 거냐? 미안하다. 네 지적능력을 고려해줬어야 하는…… "후웅!" 허억?!"

순식간에 눈앞으로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주, 죽는줄 알았어!

이수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끝말잇기정도는 알아. 병/신아."

"그, 그래."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다. 신체적 접촉이 안된다면 끝말잇기로 한다. 끝말잇기 같은 고도의 지적능력을 요구하는 게임으로 승부를 가리면 되는 것이다.

끝말잇기는 서로의 급소를 노릴 필요도 없고 목숨이 오갈 필요도 없다.

거기다가 상쇄된다는 패널티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새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완벽한 승부가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그럼 누구부터 시작하지?"

이수연의 질문에 나는 당연히 녀석을 가리켰다.

"너부터 해."

"나부터?"

그래. 이왕 이런 지적게임으로 들어간 이상, 아무래도 머리가 딸리는 놈부터 해줘야 밸런스가 사는 법이다. 물론 입에 직접 담지는 않았다. 불시에 날아오는 목숨을 노리는 일격은 방금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좋아. 그럼……."

이수연은 고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민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여운 얼굴.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연산작용은 얼마나 단순하고 바보스러울까. 그래. 고민하고 고민해라 어리석은 이여. 네녀석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받아쳐주마.

여기서 꽤나 갑작스러운 설정 발표지만, 끝말잇기 정도야 나에겐 껌이지. 같은 반 20명의 남학생들을 끝말잇기로 물리친 나다.

겨우 네녀석 같은 바보에게 질 것 같으냐!

그렇게 자신감으로 가득차있는 내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이수연은 마침내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해질녘."

"처음부터 승부가 안되잖아?! 이자식?!"

"뭐야. 새끼야. 불만있냐?"

"있고 말고!"

처음부터 한방 단어를 말하라면 어쩌라고!

"거참 불만도 많네. 그럼 새벽녘."

"너 끝말잇기가 뭔줄 모르지?!"

화를 냈다.

이수연은 당황한건지 어물쩍거리면서 양 손을 퍼덕거렸다.

"아, 아냐! 알아! 씨, 씨/발! 그러니까 이건 이기고 싶은 마음의 직접적인 표현이랄까!"

어쩌라는 건데.

그렇게 어쩔줄 모른채로 당황하는 이수연에다가, 녀석의 반응에 또한 당황하는 나 사이에서 결국 끝말잇기 또한 승부는 나지 않은 채로 끝나고야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 뒤에도 몇번이나 승부를 했지만, 그 무엇도 결판이 나지 않은채 시간은 몇시간이나 흘러버렸다.

바보 같다.

그렇다. 전쟁(그렇다 이건 이미 전쟁이다)이라는 것은 이렇게나 바보 같고 소모적이기만 한 행위인 것이다.

새삼 나는 시선을 돌려 이수연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결렬한 전쟁으로 지친건지, 녀석의 얼굴에는 한가득 땀이 맺혀있었다. 덕분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옆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있는게 묘하게 요염해보인다. 헉헉 하는 격렬한 숨소리가 왠지 모르게 야하게 들려온다.

얼굴이 예쁘다는건 진짜 반칙이다. 뭘 해도 그림이 나온다.

나는 조금이지만 망설였다. 이래서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계속 답이 나오지 않는 승부를 하는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진찰을 받고 집에가서 게임을 하고 싶다. 수학쪽지시험을 보고 있을 반의 친우들에게 한껏 비웃음을 담은 문자를 보내주고 싶다.

조금은 클릭미스라는 실수를 가장해 한창 수업받고 있을 친구들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이수연과 계속 이러고 있으면 끝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예전부터 이수연은 매번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해왔다. 태어난 순간부터. 생일이 같은 우리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였다.

함께 자라오며, 함께 밥을 먹고, 함께 학교를 다니며, 어렸을때는 함께 목욕한 적도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흑역사다.

어쨌거나 뭐든지 함께 해오던 우리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이렇게나 충돌하게 된것은……. 어렸을 때는 좀더, 그래 조금 더 이렇게. 러브코미디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쑥쓰러운듯이 서로에게 틱틱대면서도, 그래도 본심은 서로를 좋아하며. 부끄럽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서로에게 주먹을 투탁거렸던 정도로만─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도로만 부딪히며.

그렇게 지내왔던 것 같은데.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수연과 나의 관계는 좀 더 올바른 형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아──."

그때였다. 이수연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고 한 것은.

"수, 수연아?!"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수연이에게 달려가서 수연이의 몸을 받쳐주었다.

수연이의 얼굴은, 그간 여러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던 내 말문을 단번에 막아버릴 정도로 심각했다.

"하아… 하아… 하아…."

잔뜩 열에 들뜬 것처럼, 땀에 젖어 힘없이 축 늘어진 몸 위로 가빠른 숨소리가 울려퍼진다. 방금까지 야하게 생각했다고 한 숨소리가, 더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소리가 되었다.

힘겨운듯한 숨소리. 뭐지, 이 녀석. 왜 이러는 거야?!

"야! 이수연!"

"으─ 은진, 아?"

방금까지 기이하지만, 그래도 예쁜 빛을 가지고 있던 수연이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빛을 띄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수연이의 상태는 위험하다.

"하, 하─ 뭐야. 그런 시, 심각한 얼굴이나 하고. 어울리지 않게──"

"…무슨 소리야."

어울리지 않는건 오히려 네쪽이잖아. 뭐야. 평소처럼 말 끝마다 욕을 붙이지는 않는 거야? 뭘 그렇게 약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고!

"야. 야 이수연. 정신차려. 너 왜 이래. 설마──"

감기가 심해진건가? 진찰은 받지 않고 괜히 이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아픈 몸으로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든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뭐야. 그런거. 그딴 전개 인정할 수 있겠냐고!

"아, 아파── 어떡해. 몸이 아파. 은진아──"

안돼. 더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제길! 의사 선생님!"

위험해. 위험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꺼질듯이 일렁이는 수연이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위태로워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수연이를 껴안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굳건한 병원문을 밀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급박하게 의사 선생님을 찾았다.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미인 간호사 누나의 얼굴이나, 잡지를 읽거나 물을 마시고 있는 환자들이 단번에 우리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런건 전혀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단순히 여기에, 수연이가 위험하니까.

수연이가 아파하니까.

"의사 선생님! 수연이를! 수연이를 구해주세요!"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수연이의 얼굴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지난 17년이라는 인생을 함께해오며,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있었던. 강인한 그 녀석의 얼굴이.

"무슨 일이죠?!"

진찰실 안에서 미녀 의사 선생님이 튀어나온다. 여전히 가슴이 파인 야한 옷에 마냥 예쁘기만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익숙하지 않은 건지 얼굴에는 한껏 당황이 묻어나온다.

아니, 아무래도 좋다.

지금 믿을 수 있는건 의사 선생님뿐.

그러니까 나는 그대로 의사에게 다가가서 수연이를 보였다.

"지금 수연이가! 수연이가 위험해요! 제발 구해주세요! 제발…!"

내 표정에서 상황의 급박함을 느낀 것일까.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당황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알았어요. 울지 마세요. 학생."

울어? 내가?

……어느새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수연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너무나도 무섭고, 너무나도 괴로워서.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자, 어서 안쪽 진찰실로!"

의사 선생님이 주변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안고 있던 수연이를 받아든다. 나는 여전히 우는 얼굴로 수연이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눈물로 물들어 뿌옇게 변한 시야. 모든것의 선이 불분명해지고, 명확히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나는 마냥 울며 수연이의 얼굴을 뒤쫓았다.

제발. 제발 무사해줘. 수연아── 난. 나는…!

그런 내 흐릿한 시야속에서 괴로움에 물들어있는 수연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픈 얼굴로, 심해진 감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짊어진듯한, 그러한 괴로운 표정이────

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순식간에 내 주위의 모든 세상이, 공기가, 분위기가, 존재 그 자체가.

싸늘하게 식었다.

여전히 내 시야는 눈물로 가득해 흐릿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보였다.

수연이의 표정이.



────마치, 승부에서 이겼다는 듯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있는 빌어먹을 년의 표정이.



그때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틈도 없이, 프레임의 저하도 없이, 로딩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임보이 시절의 훌륭한 게임들처럼──

그대로── 이수연의 옆구리에 드롭킥을 날렸다. 

"커억!"

이수연이 그런 목소리를 내뱉으며 병원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아, 아니?!"

그것은 누구의 탄성이었을까. 이수연을 붙잡고 있던 의사 선생의 탄성인가, 옆에서 할인매장 쇼핑메모지를 읽고 있다가 마음에 든 옷이 마침 오늘까지 할인중이라는 소식을 발견한 동네아줌마의 탄성인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내 목표는 오로지 단 하나.

눈앞의 이 년을, 나를 속이려든 이수연 요 년을 쳐죽인다.

그 뿐이다.

"제, 제길! 조금만 더 있었으면 성공이었는데!"

분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를 가는 이수연. 그런 태평스러운 모습에 나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냉정히,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의 손이 빛나며 울부짖는다.

네녀석을 쓰러트리라고 빛나며 외치고 있다!

필살!

"샤이니이이잉 핑거어어어!!"

주먹을 날렸다.

이수연은 가볍게 피했다.

"크으으으!"

통하지 않는 건가! 먹히지 않는 건가! 그렇게 내가 분해하고, 이수연이 실실 거리며 그것도 못맞추냐 병/신. 하고 웃고 있는 그때에.

고고고고 하고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은?!

나와 이수연이 놀라 동시에 돌아본 곳에 서있는 것은 지금까지 당황하며 서 있던 미녀 여의사.

그렇게 우리가 깜짝 놀라 주목하는 사이, 여의사는 사이아인이 초 자가 붙는 녀석으로 변할 정도의 박력으로

"당장. 둘다. 병원에서. 나가세요."

우리에게 윽박질렀다.



"씨/발. 이게 뭐야."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이수연 옆에 선 채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아, 짱나. 진짜 이길 수 있었는데."

"……."

기분이 완전히 다운그레이드다. 최악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최악이었는데. 방금 전의 소동으로 기분은 더욱더 최악의 바닥 끝을 향해 떨어졌다.

이젠 짜증나고 뭐고도 없다. 집에 가서 자고 싶을 뿐이다.

"야. 왜 말이 없어?"

"그런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라고?!"

나도 모르게 폭발해버렸다. 짜증난다. 그 병원은 우리 가족이 단골로 다니는 곳이야! 그런데 여의사한테 찍혔다고! 그 미녀 여의사한테! 어째선지 갑자기 볼펜을 떨어트린다음 느긋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줍고는 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진 여의사한테 말이야!

"슬프다! 더는 그 에로틱한 몸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

그대로 땅에 쓰러져서 울고 싶은걸 간신히 참는 중이란 말이다!

이런 내 반응에 이수연은 기도 차지 않는듯이 바라보았다. 아니,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건 모두 이수연 저놈 탓이잖아? 저놈이 그 '아파 죽을 것 같은 연기'만 안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히히. 그만큼 내 연기가 굉장했다는 거라고. 그런 것에 깜빡 속아가다니. 너도 병/신이네."

얄미운 웃음을 터트리며 역시나 내 속을 박박 긁어대는 이수연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그 상황에서 그런 연기였다.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아아아……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그렇지 않아도 열 때문에 몸은 무겁── 어라?

"응?"

"왜 그래?"

이수연이 물어오지만 대놓고 무시한다. 그보다 말이지. 몸이, 무겁지, 않다?

"몸이 가벼운데?"

그러고보니까 아까부터 코 훌쩍임도 사라졌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 내 몸의 상태는 완전히 최상이다.

이건 마치──

"어. 진짜네. 목도 안아프고. 감기가 사라진건가?"

이수연의 말에 나는 깨달았다. 진짜 온 몸에서 느껴지던 아픈 기운이 싹 날아갔다. 감기가 말끔하게 나은 것이다.

그런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나와 이수연은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에서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전쟁(War)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투를 벌였다.

그정도로 땀을 흘렸으니 감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아… 대체 난 뭘 한 거야…."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을 해서 떨어질 정도의 감기였다면, 차라리 병원에 가지를 말걸. 그럼 이수연 이 녀석과 마주치지도 않았을 거고. 여의사에게 찍히지도 않았을거고. 뭣보다 지금쯤이면 집에서 한창 놀고 있었을텐데.

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이수연을 노려보았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짧은 검은색 보브컷이 바람에 살랑인다.

고집스러운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품고 있다.

"아…."

그 모습을 보자마자 할말을 잊었다.

"후아── 감기도 떨어졌고. 오늘은 재밌었어!"

웃고 있었다. 이수연 녀석은. 그 어느때보다도 밝은 미소를, 아마 지금 학교의 다른 남정네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단번에 이수연 녀석에게 매료되었을테지. 수많은 남학생들이 청춘을 쓸데없이 낭비하게 만들만큼, 지금 이수연의 표정은 아름, 다웠다── 매력적이었다.

아니, 단순히 말해.

"예…뻐."

예뻤다.

"응? 무슨 소리야?"

이수연의 반문에 나는 깜짝 놀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 방금 무슨 소리를 한거냐! 나, 나란 녀석으은?!

이 녀석은 이수연이라고? 17년동안 나랑 부딪혀온 녀석이란 말이다! 근데, 예, 예쁘다니!

"뭐야아? 뭔가 반응이 미적지근한데에?"

괜히 얄밉게 말꼬리를 늘리며 나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하는 이수연.

"떠, 떨어져."

윽.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투가 흔들렸다.

이런 내 모습이 재밌게 비춰진 것일까. 이수연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무언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빛나는, 전형적인 악동의 미소다.

그 미소조차 예쁘다는게 반칙이다.

이번엔 또 어떤 헛소리를 지껄여올까. 하고 잠깐 긴장하는데, 의외로 이수연은 순순히 떨어졌다.

"좋아. 재밌었으니까. 빨리 집에 가자."

"자, 잠깐!"

이수연은 갑자기 내 손을 붙잡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감기가 나았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달리기라니.

"야, 야!"

당황해서 이수연을 부른다.

거기에 이수연은 고개를 돌리며──

"왜?"

웃으며 되묻는 수연이의 얼굴에 나는 결국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예쁘다는건. 반칙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들은 집앞에 도착했다. 수연이는 나보다 먼저 펄쩍 뛰어들어 문을 열어젖혔다. 뭐가 저리 즐거운 걸까.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도 나는 수연이를 따라 들어간다.

여전히 집은 조용하다. 어머니는 아직도 주무시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수연이의 뒤를 쫒아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덜컥 수연이가 멈췄다.

"뭐, 뭐야?"

그런 말을 하며 당황하는 내게 수연이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때였다. 그때, 갑작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수연과 나의 관계는 좀 더 올바른 형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덧없는 생각───

그때 수연이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재밌었어. 그러니까 보답을 해주도록 하지."

라고, 그리고 그대로 달려와 내 팔짱을 껴안더니.

수연이는 자기의 어머니의 성격을 물려받은 그대로 결정타를 날리듯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자, 들어가서 동방신기 공연 같이 보자. 오빠."



──정말 어쩌라는 거냐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연이, 내 쌍둥이 여동생의 이마를 딱하며 손가락으로 튕기고는 답했다.

"내가 인디밴드의 우월함을 알려주마."

뭐, 우리들의 일상은 결국 이런 식이다.

시시한 우리들의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금지어가 있네요?


 욕데레랑 여동생이 좋아요.




Writer

칸나기

칸나기

네. 나기 여신님 귀엽죠. 저도 좋아해요.

comment (4)

싱글러
싱글러 10.06.20. 16:44

부제가 신경 쓰입니다 선생님!

칸나기
칸나기 작성자 싱글러 10.06.20. 18:28

사랑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남매애라는 것도 결국엔 사랑의 한 형태….

그리고 사실 여기서만 말하는 거지만, 수연이와 주인공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반전이 있습니다.

요봉왕 비취 100식
요봉왕 비취 100식 칸나기 10.06.22. 16:44

제목을 보고 떠오른 것은 도시락 전쟁이지만...


쌍둥이 남매라 소연의 첫 등장부터 어쩐지 예상은 했지만, 괜찮은 소재네요.

사소한 일로 싸우는 것은 남매의 일과죠.

다만 전 여동생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네타는 가족사를 궁금하게 만드는군요.

푸른 씨앗 열개 10.06.23. 01:04

쌍둥이 근친이네!했는데 결말보고 건전하게 남매애로 가는구나‥‥‥했는데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반전"이 있다니.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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