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Dear my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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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7 Sep 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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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rook

 

넌 너무 이기적이야.

어느 날 코코넛이 내게 말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요즘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유행하던데, 넌 딱 그 케이스야.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고, 기만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기쁘거나 슬픈 감정도, 고맙거나 미안한 감정도 품지 못하는, 그야말로 인간실격.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지, 너의 경우가 훨씬 더 악질인 게 분명해. 사이코패스들은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멀쩡하게 행동해서 주변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라는 게 통설이지만 넌 아예 그걸 드러내놓고 다니니까, 사람들은 너에 대해 그러려니 하는 거지. 사이코패스형 범죄자들의 무서운 점은 정상적인 면과 비사회적인 면의 갭, 다시 말해 그 이중성에 있지만 넌 아예 가면부터 사이코패스거든. 위선이나 위악, 그 어느 쪽도 아냐. 그냥 악이지.》

난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네가 말했지, 악의는 없다고. 아무렴 그럴 거야. 그도 그럴 게 가식적이고 기만이 가득한 너의 그 가면은 가면인 동시에 너의 본질이기도 하니까. 그래, 네 말대로 너 자신은 아무 생각도,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니 어쩌면 오히려 선의를 가지고 행동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물들여. 너의 그 흐릿한 존재감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 무력함이, 패배감이, 두려움이, 그리고 한 치의 꾸밈도 없는 그 사이코패스적인 광기가 주위의 공기를 자연적으로 흐리고 있어. 너의 주변인들은 너만 없으면 평화롭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이야. 너 역시 그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지. 그래, 그야말로, 말 그대로 넌 그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아. 그저 지켜볼 뿐이지. 물론 스토커와는 좀 다를 거야. 하지만 누군가가 말없이 지켜본다는 것, 보고 있다는 것, 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진 않지만,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 시선이 날 향해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너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미쳐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말야. 마치 물의 온도를 계속 높여도 피하지 않고 있다가 끝내는 익어죽는 개구리처럼. 지금의 넌 도저히 말로는 감당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질이 나빠.》

  그건 지나친 과대평가다, 라고 비뚤어지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대신……

 

 

   00

 

 

친구.

대개의 사람들은 이 단어에서 안정감이나 친밀감, 혹은 든든한 의지 비슷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친구라는 단어에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 이유에는 나의 비뚤어진 성격이 상당부분 차지할 테지만.

내가 친구라는 단어에 호감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내가 말하긴 조금 낯간지럽지만 당시의 난 밝고 활기찬 소년이었다. 뭐든지 열심히 했고 누구보다 더 인기 있었다. 자기소개서에 가장 싫어하는 것을 ‘잠’이라고 적고 다닐 만큼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열심히 놀았다. 그럴수록 부모님을 비롯하여 주위 어른들은 날 귀여워해주었다. 친구들 역시 날 더욱 좋아했다. 선생님들로부터 ‘일등급 악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최고조였다. 절정이었다. 클라이맥스였다.

 

 

01

 

 

운명은, 운명의 신은 혹은 여신은, 여느 때와 같이 소리소문 없이 조용하게, 태풍전야처럼 고요하게, 암살자처럼 살기殺氣 가득한 모습으로, 촌철살인의 붓을 지닌 문예인처럼 날카롭게, 한국 양궁 선수의 일시一矢 와도 같은 정확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느긋하게, 그러나 분명한 운명의 시속으로, 눈치 챌 무렵엔 이미 피할 틈도 없이, 손쓸 틈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평소 조용하게 지내던 같은 반의 B가 쉬는 시간에 대뜸 내게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당시의 나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어땠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 자신은 그들에게 항상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나에게 미움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애초에 난 미움 받을 짓 따윈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은 어린애다.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사람 따위,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그 간단한 세상의 진리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 날의 나란 애새끼는.

B가 시비를 걸어온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너무 나댄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난 정말 대책 없는 철부지였다. 그 정도로 천방지축 까불어댔으면서 누구로부터 미움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그마치 15년, 다시 말해 중학교 2학년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백치였다.

물론 그 때까지 친구들과 단 한 차례도 안 싸워본 건 아니다. 악동이라고 불렸던 만큼,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과 치고 박고 싸웠다. 정말 사소한 일로도 많이 싸웠지만, 또 그만큼 많이 화해하면서 우정을 키웠다. 하지만 정작 미움 받는다는 건, 미움 받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는 것은 그 때까지의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B는 내게 욕지기를 하였고, 화가 치민 난 결국 B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다. 정말이지 뭐랄까… 너무 단순했다, 순진했다, 멍청했다, 현명하지 못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싸움은 거의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치고 박고’의 수준에 머물던 나에 비해 B의 주먹은 정말로 매웠다. 한 대 때리면 세 대 맞는 식이었다.

유명한 복서였던 아버지를 둔 B는 이제는 은퇴한 아버지의 도장에 다니고 있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인도어파였던 B와는 달리 주로 아웃도어파였던 나는 그래서 B만큼은 왠지 쉽게 친해질 수 없는 또래였다. 물론 당시의 나 역시 책을 좋아했지만 분명 인도어파는 아니었기도 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애초에 B는 일부러 날 피했던 거 같다. 눈치를 늦게 챘다 뿐이지 B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미워했던 것이다.

B가 복싱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물론 먼 훗날의 이야기다.

그렇게 내게 있어선 가히 악몽이라고도 생각될 만큼의, 압도적인 폭력의 시간은 계속 되었다.

지금의 나야 타인과의 충돌, 아니 접촉 자체를 극단적으로 피해버리는 성격이지만 당시의 난 승부에 목숨을 거는 열혈소년이었다.

그 덕분에 10차례 넘게 녹다운을 당했지만, 그러고도 난 오뚝이처럼 계속 일어나 덤볐다. 29명의 심판들과 해설위원, 그리고 관객들은 그 때마다 술렁였지만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 대 때리고

세 대 맞고

한 대 때리고

세 대 맞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제 1라운드이자 파이널 라운드의 공을 울린 것은 다름 아닌 담임선생님이었다. 소위 ‘맞장’이라고 하는, 학창시절의 일대이벤트에 교실 앞으로 몰려든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자 선생님이 교실로 올라온 것이다.

B는 겨우 코피를 찔끔 흘리는 수준이었지만 난 얼굴에 피멍이 가득 부어올랐다. 거의 소보루빵처럼. 말 그대로 ‘눈탱이밤탱이’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게 무엇보다 트라우마가 된 것은 단순히 얻어맞았다거나 ‘맞장’에서 져서가 아니었다.

미움 받았다.

미움 받고 있었다.

미움 받고 말았다.

트라우마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어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지금까지 절친했던 친구들은 물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워졌다. 나를 따르던 친구들이, 나를 칭찬해주던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척들이 실은 날 미워하고 있진 않을까. 지금 처음 날 보며 귀엽다고 하는 저 아저씨가, 저 아줌마가, 저 누나가, 저 형이─나를 미워하게 되진 아닐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미움 받는다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B의 눈빛이,

B의 욕설이,

B의 주먹이

그리고

B의 증오가─

과거의 악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겁쟁이가 되어갔다.

처음 겪는 정신적인 고통에 난 어쩔 줄을 몰랐다.

반에서 항상 1,2등을 하던 성적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고 삼시세끼보다 좋아하던 축구도 하지 않게 됐다. ‘삼국지’, ‘마지막 잎새’, ‘소나기’를 즐겨 읽던 문학소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맞장’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나는 그야말로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곧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성격이 되었다. 말수는 적어지고 활동은 줄어갔다. 에덴동산처럼 보이던 현실은 어느 샌가 지옥도地獄道 가 되어있었다.

친한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졌고 부모님과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 입버릇처럼 ‘어디 아프니’, ‘요즘 무슨 고민 있니’라는 말을 하곤 했다.

친구를 믿지 않게 되었다.

부모님을 믿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믿지 않게 되었다.

결국

사람을──

 

   02

 

인터넷.

그 곳엔 많은 유형의 ‘친구’가 있다.

웃긴 친구, 이기적인 친구, 우울한 친구, 재밌는 친구, 활달한 친구, 경쟁심이 강한 친구, 헌신적인 친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 감정표현이 서투른 친구, 말 잘하는 친구, 머리 좋은 친구 등등등….

각자 개성 넘치고 다양한 이 친구라는 개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형인 이유는 당연히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거고.

인터넷의 발달은 나같이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사교성 없는 이들에게도 좋은 사교의 장을 만들어주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아이디, 캐릭터명, 닉네임 등 여러 가지 이름의 가면을 쓰고 무도회에 나간다. 그곳에는 어린 아이부터 직장인, 나이 지긋한 교수,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얼굴은 몰라도 주소를 알 수 있고, 단 한번 만난 적 없어도 성격을 알 수 있다.

맞장 사건 전의 내가 알던 세상은 현실이 아닌 모니터 안에 있었다.

그 곳에서는 미움 받을까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미움 받더라도 가면을 바꿔 써버리면 그만이니까.

난 어느 샌가 채팅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당시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에도 빠져들었다. 중독의 수준에 근접할 때에는 부모님 몰래 안방을 뒤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비록 현금이 발견되지 않아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이 기억은 나로 하여금 자살충동에 가까운 자괴감을 들게 하였다. 난 쓰레기야,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하면서.

심지어는 등교거부를 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미움 받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부모님에겐 학교에 간다고 하고 선생님에겐 몸이 아파 병원에 간다고 했다.

인터넷을 하며, 채팅을 하며, 게임을 하며─

나는, 아니 소년은 인간이 모르는 사람에게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잘 깨달았다. 지금이야 그런 무뢰한들을 소위 ‘초딩’이라고 하면서 인터넷상으로도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상식처럼 되었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런 선견지명까지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모르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모르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고, 모르는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모르는 사람의 부모까지 욕하는 게임 속 ‘초딩’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과 지내는 동안 나 역시 그들과 동화되어갔다.

미약하게나마 옥죄여오던 본능적인 죄의식, 학교에서 배운 도덕, 윤리들은 철저하게 분쇄되어갔다.

미움 받기 싫다고 몸부림치던 한 철부지소년은 그렇게 서서히 죽어갔다. 사라져갔다.

모니터 속의 등활지옥에서 철부지소년은, 나의 유일했던 순수는, 감정은, 그렇게 쉼 없이 죽고, 죽고, 또 죽어갔다.

슈퍼에고는 희미해지고 오직 변절된 에고와 타락한 이드만이 하루하루를 잠식해갔다.

 

03

 

17세, 즉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나는 여전히 인터넷과 채팅, 그리고 게임을 전전하는 ‘폐인’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또래 아이들은 확실히 중학교와는 달랐다. 뭐가 다르냐고 한다면, 그야 다양한 것이 있었겠지만 가장 첫 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저 공이나 차고 책 읽고 가끔 공부씩이나 하던 중학생들과는 달리, 이제는 대학 이야기도 오가고 진지하게 성적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것이다. 취미들도 다양하고 고급화되었다. 이를테면 ‘바람의 나라’에서 ‘스타크래프트’로, ‘야동’에서 ‘AV’로, ‘시디’에서 ‘프루나’로.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었지만 분명히 아르바이트 얘기도 오갔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이나마 불식시키기도 했다.

이 당시의 나에게는 그래도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 남아있었다. 중학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말을 걸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나 역시 고등학교에서 새 출발을 하려는 마음가짐 정도는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위협적인, 잔학무도한 과거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늪지대처럼 서서히, 아주 서서히 나를 잠식시켜갔다. 그 무자비한 악마는 아직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은 친구들, 간신히 새롭게 사귀기 시작한 반 아이들, 그리고 나의 다짐에게까지도─ 그 흉악한 마수를 뻗쳐왔던 것이다.

이쯤에서 별로 내키진 않지만 B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데….

중학교 때의 그 사건 이후 B는 성격이 돌변하였다. 역시나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학교의 유명한 ‘일등급 악동’이자, 비록 ‘짱’은 아니었어도 나름대로 리더 격이었던 날 꺾은 B는 점점 터프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학교의 ‘짱’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삥’을 뜯고 담배를 피우고 훗날 뉴스에서 말하는 소위 ‘일진’으로 분류되곤 하는, 자신의 명령에 수족처럼 움직이는 무리를 형성했다. 그 ‘일진’에는 내가 절친했다고 생각했던 무리들이 섞여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B는 일부러 나와 친했었던 ‘일진’들에게 나를 괴롭히는 명령을 내리곤 했었다.

B는 공부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성적도 점점 상향선을 그렸다. 그리하여 B는 가히 우리 중학교의 엄석대가 되어갔다. 다만 하루에 한번씩은 꼭 또래를 두들겨 패는, 조금 난폭한 성격의 엄석대였지만.

하지만 B는 더 이상 내가 밉지 않아졌는지 아니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장 사건’ 이후로 나에게 더 이상 이렇다할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수족─일진─들을 시켜 아주 가끔씩,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나에게 훼방을 놓곤 했다. 예를 들어 과제물 제출할 때 내 것을 몰래 빼돌려 소각장에서 태워버리거나,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책상에 껌을 붙여놓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느 날 체육시간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갔더니 칠판에 가득히 선생님을 욕하는 글과 함께 내 이름이 손바닥만한 글씨로 적혀있던 적도 있었다.

사태가 이쯤 이르면, 정상적으로는 진지하게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말하여 전학을 상담하거나 B일당의 처벌을 주장해야 했겠지만.

당시의 나에겐 그 때까지 알량하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있었는지, 끝끝내 그들을 일러바치지 않고 졸업한 것이다. 아무런 반항도, 그렇다고 순응도 하지 않는, 알량하고 유치한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싸움인지 처음 깨달은 것도 이 때였다.

어쨌든 그렇게 나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시간들이 흘러, 새 출발을 간절하게 꿈꿔오던 나는 그 장소로 선택한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악몽의 편린, 그 끝자락에 뒷덜미를 붙잡히고야 말았다.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된 B의 수족들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오랜 관습처럼 나를 괴롭혔다. 중학교 때의 일들이 더더욱 악질적으로 발전되어 되풀이되자 새로운 친구는커녕 기존에 사귀어오던 친구들마저도 점차 떠나갔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자 나의 그 알량했던 자존심은 쌍둥이 빌딩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졌고 결국 난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난 지금도 그들의 반응을 잊지 못한다.


너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거다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라

B는 착하고 내성적인 아인데 네가 먼저 해코지한 것은 아니냐

애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네가 이상한 거래더라……


일진들은 집요하게도 나의 친구는 물론, 나와 조금이라도 친해질 낌새가 있거나 심지어 말만 걸어도 그 아이를 괴롭혔다. 그것은 때론 폭행이었고 때론 악성적인 허위고자질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난 드디어 인간관계의 포기라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04

 

 

그녀, ‘코코넛’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과거라는 이름의 마수가 손을 뻗어오기 직전의, 그러니까 고등학교 데뷔가 시작된 4월의 어느 날.

새 출발의 부푼 희망을 안고 난 교실로 들어왔다. 또래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하다가… 하던 중에… 나의 시선은 그만 어느 한 지점에 꽉 붙잡히고 말았다. 시선의 끝에는, 창가 쪽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또래 아이가 있었다. 아니 또래라고 보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고결해보였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표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순수의 결정체였다.

환상의 요정이었다.

동화 속 공주님이었다.

자연스레 무릎 꿇고 싶게 만드는, 또래아이들에게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밉지 않은 긍지와 오만이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조금 다른 각도로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름다웠다.

뽀얀 피부가,

다이아 결정보다 더 빛나는 눈이,

은은한 샴푸향이 느껴지는, 어깨까지 오는 매력적인 보브컷 머리가,

코딱지는커녕 솜털하나도 없을 거 같은 새침하고 귀여운 코가,

귀… 턱… 그리고… 만져보고 싶은, 부딪치고 싶은 새침한 입술이……

“뭐 할말 있어?”

  우아하게 달싹이며 앙증맞은 음성을 냈다. 그녀는 어느 샌가 책에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때─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말이다. 본심도, 가식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친밀감을 높이기 위한 말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신의 장난이라고 해두자─그런 느낌의 말을 한 치의 부끄럼도 없이, 그것도 면전에서 내뱉고 만 것이다.

  “새…….”

  “뭐?”

  코코넛은 의문을 표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뜩이나 귀여운 얼굴인데 아주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갸우뚱거리니 더더욱 귀여웠다. 나의 입은 멈추라는 주인의 명령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그녀에게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색기 쩌네.”

당시엔 아직 ‘쩐다’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나오기 전이었다. ‘색기’라는 단어 또한 당시의 내겐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므로 나는 훗날 당당하게 변명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은 소란스럽던 교실에 일순 정적이 흐르게 하였다.

“……!!”

이윽고… 볼에 홍조의 물감이 번진 코코넛이 벌떡 일어났다.

전광석화와 같은 그녀의 손바닥과 얼빠진 내 뺨은 마주치는 순간 깔끔하고 경쾌한, 통쾌하고 유쾌한, 무엇보다 상쾌한 하모니를 자아냈다.

코코넛은 굉장히 영리한 소녀였다. 아는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열정적이었다. 정열적이었다. 악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정의의 사도였다. 정의의 아군이었다. 정의 그 자체였다.    그녀는 무슨 일에든 느슨한 법이 없었다. 사소한 것부터 철두철미했다. 항상 냉철하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눈치가 빨랐다. 누구보다 매력적이었다. 삼국지를 굉장히 좋아했던 나에게 그녀는 마치 조조와 제갈 공명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난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좋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이 아닌 친구로서의 의미에 한해서였다.

이성으로서의 코코넛 또한 버틸 수가 없는 매력을 지닌, 미소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초超 미소녀에 속하는, 멸종 위기에 처한 몇 안 되는 인종이었지만, 그리고 그녀 쪽에서 유혹했다면 난 아마 곧바로 항복해버렸겠지만, 아쉽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다행히도?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나 또한 내가 먼저 그럴 마음은 전혀…까진 아니어도 거의, 아니 매우…… 없었기에(나는 이후 코코넛과 십년 넘게 교제하며 코코넛과의 우정과 그녀에 대한 사랑 사이를 햄릿처럼 고민해야만 했다).

아름다움, 고결함, 귀여움, 카리스마, 당당함.

백마 탄 초인超人으로서의 요소를 고루 갖춘 그녀의 매력은 순식간에 전교생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그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그녀를 전교회장이라는 위치에 오르게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졸렬한 B일당조차 코코넛에게만큼은 절대 손을 대지 못하였고, 그것은 코코넛이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선포한 ‘그 날의 사건’ 이후로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1학기가 시작된 4월의 어느 날

조례시간 담임선생님과의 간단한 인사 후에 제비뽑기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난 행운의 여신이 있다면 그녀의 발이라도 핥아줄 수 있을 정도로 감격했다.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A-5, 창가 쪽의 전망이 좋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추운 천혜의 자리였다, 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중학 시절부터 공부, 운동, 음악, 예술, 심지어 주먹까지.

그 모든 분야에서 일일이 모두 굴복시킨 뒤 부하로 부리던 만능여걸, ‘과일중학의 마운틴 프린세스’의 명성은, 같은 구라지만 꽤 멀리 떨어진 다른 중학교에 다니던 내게까지 고막에 딱지가 앉을 만큼 닿을 정도였다.

아직 ‘일등급 악동’이었을 당시의 나와 ‘마운틴 프린세스’ 코코넛이 대결하는 것에 대한 내기가 유행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대충 엄청난 여자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지만,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라던 말은 코코넛 본인을 직접 본 순간 내 사전에서 수정되었다.

소문이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별이라면, 코코넛 본인은 그 별 자체라고.

이미 사라진 별이라도 지구에서 볼 땐 아직도 여전히 건재하듯이 말이다. 소문은 그녀의 속도를 언제나 한 발짝 늦게 쫓아갔고, 소문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코코넛은 계속해서 자신의 모든 행적을 전설로 만들어버리는, 어딘가의 만화나 할리우드 영화쯤에서 튀어나올 법한 존재였다.

코코넛은 입학당시부터 모든 학교 구성원들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고교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전학을 오거나 아직 그녀의 소문을 듣지 못한 이들조차 코코넛을 한번 본 순간 다들 그녀의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취미로는 뭘 좋아하고, 로션은 뭘 쓰는지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그녀가 오늘 먹은 아침 메뉴까지, 가만히 있어도 점심시간만 되면 A4용지 3장은 꽉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나 역시 코코넛에 대해 마음속으로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소문은 비유하자면, 기분 좋은 스팸메일이었다.

슈팅스타, 치트키 라이프, 인간 광신자, 복수의 화신, 집념의 광녀, 정의의 악마, 화이트 서큐버스, 마왕녀, 수능 폐지녀 등등등 훗날 셀 수 없는 학교전설을 일으키며 그 못지않은 수의 이명을 갖게 되는.

그런 괴물 같은 여자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반의 또래 남자들은 겉보기에도 눈에 쌍심지를 킨 채 나를 노려보았고 그것은 여자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것은 그야말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노소에 구애받지 않는, 자발적으로 끌리는 자력磁力 과도 같이 비저항比抵抗 아니 무저항無抵抗 하게 만드는 그녀의 매력 때문이었겠지.

‘그 날의 사건’의 그 날에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난 B일당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날의 ‘괴롭힘 메뉴’는 ‘교실에서의 집단린치’였다. 반 아이들의 혐오어린 시선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라는 3중고의 하모니를 맛볼 수 있는 B일당이 추천하는 ‘오늘의 추천메뉴’였다.

하지만 이때의 난 이미 마음속을 구원해줄 수 있는, 진실한 의미의 여신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괴롭힘에도 달관한 상태였다.

“이 새끼, 며칠 전부터 맞으면서 계속 히죽거리는 게 기분 나쁘단 말야.”

나의 변화를 알아챈 B일당 중 B와 같은 복싱 체육관을 다니는 ‘당근’이 내 복부에 주먹을 꽂으며 말했다. 왜 ‘당근’이냐면, 키가 크고 떡대가 벌어졌고 거기에 역삼각형 근육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몸집 자체가 당근처럼 야위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상당한 강권强拳 이었던지라, 그것은 오랜 구타 생활로 익숙해진 내 맷집이 보증하고 있었다. 짱돌보다 강한 위력을 가진 그의 주먹에 나는 이리 고꾸라지고 저리 엎어지는 추행을 반 아이들 모두에게 보여줬던 것이다. 비웃기도 하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나서는 건 아무도 없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어떤 불만이나 원망은 전혀 없었다. 거의나 준準 완벽도 아닌,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전혀’였다.

아마 나라고 해도 누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일이고, 뭔가 잘못을 했으니 맞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겠지. 이기심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니까.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그마한 문제가 아니었다.

반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은 괜찮았다. 얼마든지 보여줘도 되었다. ‘전혀’ 상관없었다.

하지만 학생회 업무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오는 코코넛을 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정작 몸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닥치는 대로 물었다.

“으아아악─?! 이 새끼가 미쳤나!”

물고,

“아악! 이 놈이 내 발가락 뜯어먹네!”

물고,

“끄아아악! 내 귀!”

또 물어뜯었다.

고마워요, 타이슨.

이쯤 되면 난 당연히 학생회장이 되자마자 ‘교내폭력근절’이라는 기치를 강력하게 내세운 코코넛 여왕님께서(진짜로 별명이 여왕님이었다) 어떻게든 날 뜯어말려주실 줄 알았다.

조금 아니 상당한 강도의, 여왕님 특유의 형벌이 기다리겠지만─ 난 그걸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그녀 쪽에서 마다해도 내가 자처해서 받고 싶을 정도였다.

웬걸?

교실에 들어온 여왕님께선 내 예상외로, 예상을 초월해서, 그저 무덤덤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 시선은 B일당이 결국 날 두들겨 패길 포기하고 이리저리 도망 다닐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교착 상태가 되자 그때서야 힘차게 교탁 위에 올라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로 보며.

“이번엔 이 몸의 친구께서 할일을 대신해줬는데, 한번만 더 이런 식으로 싸움이 일어날 시엔 그땐 내가 직접 물어뜯어 버릴 거야.”

송곳니를 내보이는 그 웃음은 몹시 위험해보였지만, 그와 동시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혹적인 미소였다.

“그리고 난 특히 친구를 상당히 아끼는 편이라서. 앞으로 ‘타이슨’을 건들면 문답무용으로 코코넛 특제 교수형에 처할 거야.”

그 뒤로 교내에서 단 한번도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은 뭐 두말하자면 잔소리고 세말하자면 그건 이미 헛소리였다.

그리고 위대하고 위대해서 감히 올려다보는 것도 황송한 코코넛 여왕님께선 소문을 무마시키는 데에 무려 학생회장의 ‘권력’(정확하게 뭔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코코넛 본인이 그렇게 말했을 뿐)을 사용한 것이었다. 실제로 소문은 퍼질 새도 없이 쥐 죽은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날의 선포 이후 여왕님은 정말로 황송하게도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날 농담으로 “황송하게도 제가 어찌 감히 여왕님의 친분이 되겠나이까. 저는 그저 미천한 종이올 뿐이옵니다.” 라고 말했다가 옆자리의 흉수兇手 에게 말없이 40분 넘게 꼬집혔었다. 말이 40분 넘게고, 체감시간은 가히 400분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강도의 꼬집기였다. 피멍이 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코코넛은 때론 오랜 지기처럼 나와 어울려주었고

때론 좋은 호적수처럼 나와 경쟁해주었고

때론 멘토처럼 인생에 대해 유익하고 참신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마치… 코코넛과 ‘친구로서 사귄다’라는, 그 자체의 의미, 그 말, 그 행동들은… 마치 나로 하여금 클라이맥스였던 과거로 돌려보내주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내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정열적이고, 남을 위해 쉽게 화를 내고, 누구보다 더 정의로운 코코넛과의 사귐은 그것 자체로도 감정이입이 될 정도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녀를 아예 동일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코코넛 신드롬에 단단히 걸려버린 것이다.

코코넛이 즐거워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난 그야말로 살인이라도 저지를 기세로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자해도 서슴지 않았다. 멋대로 그녀를 나의 분신으로 착각했던 적도 있다.

그 일련의 행위들은 너무나도 달콤한 선악과였다.

마치 잘못됨을 알면서도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아담처럼……

 

 

05

 

 

《하.》

한참 듣고 있던 코코넛은 경멸과 멸시를 포함해서 원망이나 분노를 비롯한, 그 비슷한 감정들까지 모두 뒤섞인 듯한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임 속 코코넛의 캐릭터가.

《그러니까 네 얘기를 종합하자면, 네가 그렇게 지금처럼 패배감 쩔고 무력하고 나약한 미토콘드리아 같은 성격이 된 데에는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지? 왠지 도중에 열 받는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난 관대하니까 봐주도록 하겠어. 게다가 그런 말은 없었지만 그 뉘앙스를 잘 풀이해보면 그 원인에는 이 몸 역시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렷다? 너의 그 과거를 몰라주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바람에 결국 너의 발전을 저해시킨 이 몸에게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임 속 나의 캐릭터가.

아, 그렇지만 미토콘드리아는 의외로 세다고 코코넛.

코코넛의 캐릭터는 감정표현 ‘분노’와 ‘한숨’을 표현했다.

《난 말이야, 기본적으로 인간을 정말로 좋아해. 좋아하고, 좋아하고, 너무너무 좋아해서 이 이상 좋아했다간 날 싫어하게 될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고. 뭔 소린지 알아듣겠어?》

그녀의 말은 당연하다. 만약 그녀가 인간을 싫어했다면 난 이미 옛날에 자살해버렸을 것이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ㅡㅡ;》라고 이모티콘을 썼다.

  《아…… 열 받아. 부글부글 끓는다끓어. 야, 너 도대체 왜 그러고 사냐? 사람이란 말이지, 더, 생각보다 더, 더더더더! 훨씬 더! 훨씬, 훨씬, 신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진짜로 깜짝 놀라버릴 정도로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난 자기 멋대로 자신의 한계를 그어버리고, 실패를 두려워해서 숨고, 상처받을까봐 벌벌거리는 녀석들이 너무 맘에 안 들어. 짜증나, 열 받는다고! 때를 기다리는 것과 무서워서 숨어버리는 건 철저하게 다른 의미인데, 그걸 혼동하는 사람들이 진짜, 너무 많아. 걱정하느니 행동하고 숨느니 나서란 말야!》

  코코넛은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나의 애간장은 녹아들어갔다.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난 정말… 남에게 폐를 끼칠 일은 아무 것도 안했는데.

  나서기만 하면 멋대로 날 판단하고 멋대로 날 때리고 패대기친 다음에 멋대로 구석에 버리잖아.

  더 이상 버림받기 싫어. 언젠가 버림 받아야 되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친구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아.

《뭐든지 잘하라곤 말 안 해. 좋아하는 거라도 좀 해보란 말야. 니 생각보다 인간은 훨씬 더 대단하다고. 멋져, 아름다워, 귀엽고, 예쁘다고. 노력하면 다 된다고는 안하겠어. 하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줘도 되잖아… 왜 아무 것도 안하는데? 너처럼, 아니 너보다 상처받고 너보다 더 인간에게 좌절한 인간 따윈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그들이 모두 너처럼 현실로부터 도피하진 않아. 다들 열심히 발버둥치고 있다고》

  난 멍하니 화면 속의 코코넛을 보았다.

  모니터 화면 속에 나타나는 그녀의 대리인은 모니터 너머에 있는 나에게 그녀의 말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만 엄청난 타자속도임에도 오타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섬뜩했다. 아니, 아름다웠다. 표현하자면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소꿉친구의 고백을 듣는 기분 같아서, 뭔가 감개무량했다. 물론 맞춤법에 맞는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뭐 코코넛은 전교 1등, 나아가 전국 꼴찌라는 기염의 소유자니까 그런 걱정은 무의미하겠지만.

  여담으로 코코넛은 수능에 진짜로 ‘코코넛’이라는 이름을 써서 냈다.

  그 덕분에 본래대로라면 전국 1위였겠지만 채점결과가 0점으로 처리되어 그 결과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한 전국 꼴찌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 학교에 기자들이 몰려와 코코넛을 인터뷰할 정도로 이슈화가 되었던, 웃기지도 않는 기담奇談 이자 학교전설 중 하나인 셈이다.

  길거리에서 수많은 카메라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코코넛은 주눅 든 기색도 없이 명확하게, 낭랑하게, 또랑또랑하게 딱 한마디만을 씹어뱉었다.

  “수능 없애세요.”

  그날 이후 교장이 사임하고 의욕 넘치던 30대 담임교사가 사표를 제출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지. S대를 넘어 하버드도 갈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하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 소녀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뒤로 자취를 감춰 3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 되었다(물론 그 직업이라는 것이 ‘해결사’라는 정체불명의 괴상망측한 직업이긴 하지만).

  훗날 거기에 대해 난 그녀에게 “왜 하필 코코넛이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 점 의심도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코코넛은 사람과 가장 닮은 과일이니까.”

  “코코넛하고 사람이? 어째서?”

  “겉에서 볼 땐 그저 딱딱하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인내심을 갖고 껍질을 깨보면 그 안엔 순백의 속살이, 달콤한 애액愛液 이 담겨있으니까. 난 사람이 너무너무 좋은데, ‘사람’이라는 명칭은 지나치게 흔하기도 하고 솔직히 좀 지루하잖아? 임팩트랄까 뭔가 이렇게 팟 하는 빅뱅 같은 충격적인 맛이 없고, 그래서 코코넛이야.”

  그랬다.

  누구보다 더 사람을 좋아하는 소녀는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코코넛으로 개명했던 것이다. 물론 코코넛 또한 한국인이었던 연유로 당연히, 그것도 아주 지극히 한국적인 향이 물씬 풍기는 ‘실명’이 존재했지만 언급한 사실을 들켰다간 난 ‘코코넛 특제 능지처참형’에 처해질 것이므로 언급을 자제하겠다.

  모니터 너머로 내가 딴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코코넛의 머리는, 입은, 손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너를 이해한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애초에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겠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저 위로차원에서 하는 말이지, 진심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하는 건 그야말로 오만이자 모순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사람인 거고 거기에서 인간관계의 묘미가 있는 거야. 너와 비슷한 시간을 살아왔을 뿐이지만 적어도 너 같은 한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난 다 죽기 전의 노인에게도 큰소리 칠 자신 있어. 너 전에 나한테, “만약 너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면 차라리 난 너를 안고 익사하겠어” 라고 했지.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어도 난 니 편이야.”라고도 했고…… 야 야 야 야 야 야 야 야 야 야, 너, 맞을래?》

코코넛의 캐릭터는 어디로 가고 빙氷 을 노래하는 ‘거리의 시인들’이 존재했다.

난 피식 실소하고는 노래의 가사를 그대로 대답했다.

《니가 무슨 중학교 2학년이냐?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이상, 아니 이상이라는 말을 쓰기도 아깝다. 그건 아예 상상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망한 생각, 망상이야, 망상. 그것도 망상의 최고 수준인 중2 급의 망상이라고. 그 얼토당토않은 쓰레기 같은 망상 나부랭이에 날 끼워 넣으려 하지 마. 현실을 직시해. 언제까지 소년으로 있으려는 거야? 응? 영원한 중학생 양반. 니가 뭐 소설가가 된다고 한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아니지. 설령 소설가라 할지라도 인간은 계속 변해야 돼.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해서 마침내 자신이 만족한 모습이 될 때까지 계속 변해야 해. 빌 게이츠도 말했지, Change에서 g를 c로 고치면 Chance가 된다고. 변화 속에 기회가 있다고 말야. 아, 물론 변화와 변절의 의미차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변화는 이러쿵, 변절은 저러쿵, 요러쿵조러쿵.》

  ‘멘토’로서의 코코넛의 설교는 그 후로도 약 30분 동안 더 지속되었다.

  나에겐 일종의 초능력이 있었는데,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말이 이러쿵저러쿵 혹은 솰라솰라, 불라불라 등등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변환되어 들리는 것이다(이것은 활자도 마찬가지). 별로 쓸모도 없고 의미도 없고 거기에 눈에 띄지도 않는, 그야말로 계륵만도 못한 별 볼 일 없는 허섭스레기 같은 능력이었다. 손해본적은 많아도 득이 된 적은 한번도 없는 이 능력 덕에 나는 실존유무도 모르는 초능력의 신을 평소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며 살고 있었다.

  아무리 코코넛을 좋아한다지만 역시 이정도로 설교를 들으면 반감과 오기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가 채팅글자수 제한에 걸려 엔터를 치는 때를 노려,

  그러는 너야말로 학창시절과 전혀 변하지 않았잖아, 라고 말했다.

  왠지 한방 먹인 기분이라 조금 흐뭇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후로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변하긴 왜 안변해! 생리도 예전보다 더 콸콸 나오고 뱃살은 늘어 가는데 가슴은 생각보다 안 커지고! 피부는 점점 푸석푸석해지고! 내가 이거 관리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하는 줄이나 알아?! 진짜 화장을 안 하고 생리를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천지신명의 초특급 축복을 받은 거라고! 알아들어?!》

  …그 뭐랄까, 그냥 제가 죽일 놈입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 많은 데선 눈치 보여서 방구도 제대로 못 뀌고! 급해죽겠는데 사내여자화장실은 만날 꽉 차있고! 그래서 남자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보고! 회식자리에서 배는 20%도 안찼는데 “저 많이 못 먹어서요.” 같은 소리나 해야 되고! 술을 못하냐고? 나 주량 3병이야 3병! 그리고 브리핑할 때 이건 뭐 내 입을 보는 건지 내 몸을 보는 건지 알 수가 없고! 커피는 또 왜 나보고 타오라는 거야! 직장 선배면 다냐! 엘리베이터에서 엉덩이 더듬지 마! 앉아있을 때 허벅지 쳐다보지 마! 여성 정장을 스커트로 정한 건 대체 어떤 놈이야?!》

  으으….

  내 안에 있던, 환상 속의 여신상이 빠른 속도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

  술을 안 먹고도 주정을 부릴 수 있는 여자, 그것이 코코넛이다.

  한참 신세한탄을 하던 코코넛은 진정이 좀 됐는지 이윽고 ‘라이벌’로서의 비아냥거림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무려 이 몸과 대등해지고 싶다고 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녀석일 줄은 내가 미처 몰랐네요, 몰랐어. 난 그저 학교에서 조금 조용한 정도의, 아니 그 정도였으면 조금이 아닌가? 뭐 어쨌든, 분명히 답은 알고 있는데 선생님의 어떠한 질문에도 항상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던 그 건방무례한 녀석이 게임을 한다길래 조금 관심을 가진 것뿐인데 말야. 고작 한다는 일이 코흘리개 애들 돈이나 노동력을 갈취하는 놈이라니 말이야. 작업장이니 해킹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떠들지만 실제론 할일 없는 백수들이 애들 등쳐먹는 거잖아? 참 내, 이럴 바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어. 정말 실망이야. 진짜 기분 더럽네.》

  미안해, 라고 대답했다.

  미워하지 마, 라고 덧붙였다.

《아아아아아악! 짜증나! 나한테 사과하지 마! 사과할거면 니 자신한테 하라고! 그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란 말야! 상처 받는 게 무섭다고 피하지마! 이 판도라의 상자 같은 놈아!》

  느낌표의 사용빈도수가 늘어난 걸로 보아 오히려 더 화를 내게 만든 거 같다.

《그리고 미워한다고? 누가? 내가 널?》

  아까 사이코패스보다 더 악질이라고 했잖아, 난 떨리는 마음으로, 떨리는 눈가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진정시킨 뒤 타자를 입력했다.

《그건……》

  원체 감성이 풍부하고, 사소한 것에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향 탓인지 코코넛의 타자에는 거칠어도 그 안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말줄임표가 많은 걸로 봐선 고민하거나 어쩌면… 부끄러워하는 듯하다.

《…아까도 말했잖아. 난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정말로 좋아해,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니가 사람일 때 국한되는 얘기고. 니가 정말로 사이코패스나 살인마 같은 괴물이었으면, 난 너와 일체 상대하지 않았을 거야. 절대 대화하지 않았을 거고, 마주보지 않았을 거야. 마주치지 않았을 거야. 니가 있는 곳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거야. 너와 말을 섞고 너와 한 공기를 마시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을 거야.》

  우와…

  예상대로, 아니 예상외로, 예상을 초월해서 훨씬 서슬 퍼런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넌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냐. 아깐 그… 내가 좀 흥분했어. 알잖아 너도. 나 화 잘 내는 거.》

  그녀를 경외시하고 싶다는 마음과 더럽히고 싶다는 마음을 동시에 들게 하는 묘한 매력의 말이었다. 난 흥분한 마음을 주체시키며 조심스레 한 글자 한 글자 쳐내려갔다.

  알아… 그리고 그 분노에 악의라곤 미세의 단위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널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나는 알 수 있어.

《어쭈? 제법 기분 좋아지는 소리도 할 줄 알잖아. 근데 그거 고백멘트로는 좀 아니지 않냐? 느끼한 게 뭔가 좀 초딩스럽고 말야. 딱히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대대적인 개조改造 가 필요한 멘트야.》

  일생의 일대까지는 아니고 그 반의 반의 반 정도의 용기를 낸 고백은 초딩 수준이었다. 매일같이 초딩을 상대로 게임의 돈이나 아이템을 팔거나 계정을 해킹해서 되팔거나 하면서 용돈을 벌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꽤 신랄한 비평이었다.

《흥,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난 별로 니가 좋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지. 착각해도 곤란해. 난 단지 사람이 좋을 뿐이고…… 사람인 니가 쓸모라곤 미세먼지만큼도 없는 일로 고민하는 거 같아서… 충고 한마디 해주러 왔을 뿐이야. 딱히 널 특별히 여긴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야, 너 지금 히죽거리고 있지? 비웃고 있지?! 그리고, 방금 전에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하긴 했지만 이거 칭찬이다? 오해하지 마. 판도라의 상자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게 뭔지 잘 생각해봐, 4번 피처 씨, 판도라 고 잔망스러운 계집년이 상자를 한번만 더 흔들어봤어도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지 말이야.》

  4번 피처.

  언젠가 뭐 잘하는 거 없냐는 코코넛의 질문에 중학교 시절 전교 4등을 했다고 하자 그녀는 “그럼 4번이네, 4번 피처.” 라고 대답했다. 4라는 숫자에서 죽음밖에 떠올리지 못하던 나로선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코코넛의 말을 보던 난 거기까지 본 뒤 잠시 눈을 감았다.

  멘토로서, 라이벌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로서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친구에게,

  진심을 담아 키보드를 두들겨 대답했다. 타닥타닥타닥 타닥타닥 타닥타닥 타닥타닥 탁, 엔터.

 

  색기 쩌네.


  이 게임엔 모든 비속어가 ‘불라불라’로 자체필터링이 되는데, 과연 코코넛이 무슨 단어로 ‘불라불라’를 써내려갔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난 곧바로 컴퓨터를 끄는 대신 모니터만 끈 뒤 마음속으로 10초를 세고, 다시 모니터를 켰다.

  거기엔 무슨 일에든 정열 넘치는 라이벌이자, 무슨 고민이든 다 해결해줄 거 같은 만능해결사이자,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더 귀엽고 소중한 나의 친구가 미칠 듯한 속도로 타자를 쳐내려가고 있었다.

《이 미친 불라불라! 불라불라 변태 불라불라!! 아아아악─!! 죽일 거야! 너 반드시 내손으로 죽일───!》

-애플님께서 게임을 종료하셨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밖을 보자 겨우내 잠들어있던 산천의 생명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는 것이 보였다.

 

 

  06

 

  친구.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친구를 만들지 않는 사람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고 그렇게 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사소하지만 자기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럽고, 떠올리기 괴로운 과거를 가진 사람도 있겠지.

  그것은 친구에게 미움 받은 기억일수도, 친구에게 배신당한 기억일수도, 혹은 친구의 말에 상처 받은 기억일수도 있다.

  비단 친구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배신당하여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인터넷이나 게임에 빠지는 건 절대로 권하지 않겠다. 그건 코코넛이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는, ‘신도 깜짝 놀라버릴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을 짓밟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행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여전히 일종의 구원자이면서 광신狂信이자 광신光神인 코코넛은 여전히 ‘해결사’ 라는 정체불명의 미스터리적이고 오컬트하면서도 판타지스러운 동시에 라이트노벨에 코믹스스러운 직업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나는 게임을 끊고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같이 불쑥 찾아온 코코넛에게 전망 있는 산업을 물어보았다.

  “전망 있는 산업? 흐으음, 엘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은 정보산업이고 그다음 제 4의 물결은 우주산업과 생명공학의 시대라고 하긴 했는데. 비스콘티 액센츄어 회장과 글렌 UN미래포럼 회장은 제 5물결을 언급하면서 혁신과 변화를 강조했고 말야.”

  “그 정도는 뉴스나 신문을 보면 알 수 있어. 여왕님, 내가 궁금한 건 어디까지나 황송하게도 너의 생각이야.”

  한 대 쥐어 박혔다.

  “…어째 해결사하면서 힘이 더 좋아진 거 같다? 마운틴 고릴라로 별명을 고치는 게 어때?”

  또 쥐어 박혔다. 아우─.

  코코넛은 주먹을 풀고 흔들며 말했다.

  “앞으로 50년을 편하게 살 거라면 제 3의 물결, 100년을 넘게 내다본다면 제 4의 물결을 서핑하는 게 좋을 거야.”

  “제 5의 물결은?”

  “그건 기업인들한테나 해당하는 이야기… 엥? 뭐야 너, 혹시 CEO라도 노리는 거야?”

  코코넛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동자를 별 모양으로 반짝이며,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무리다, 라고 생각한 순간 코코넛의 눈이 독사처럼 변했다. 눈으로 이토록 다채로운 감정표현이 가능하다니, 현대인으로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재주가 아닐까? 하고 조금 딴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코코넛에겐 통하지 않았다.

  “너 방금 무리라고 생각했지?”

  꿀꺽.

  정말 심리학 배운 거 아냐, 이 녀석?

  뭐 좋아, 여기선 일단 침착하고 미리 준비해둔──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382회의 거짓말을 하는 동안 총 380회의 침을 삼킨 너의 행동 패턴으로 봤을 때 넌 지금 아주 높은 확률로 내게 거짓말을 하려고 하고 있어.”

  …….

  정말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여자다.

  “…너 말이야, 사람인지 인공지능로봇인지 확실하게 하라고.”

  “어머, 실례인걸. 이렇게 반칙에 가까울 정도로 예쁘고 지적인 로봇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

  난 결국 할말을 잃었다.

  그 후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는 코코넛에게 나는 용기를 내어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말해보았으나 그녀는 헹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아 됐고, 그 강아지 눈망울은 이제 내게 안 통해.”

  코코넛의 유일한 약점이던 ‘눈빛 공격’이 먹히지 않자 난 낭패라고 생각하며 “어째서?”라고 묻자 그녀는 소악마小惡魔 의 미소를 지으며, 봉긋한 가슴에 주먹을 얹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 난 애플 친구, 천하무적 슈팅스타 코코넛님이시니까~ 이 몸에게 약점 없음!”

  어느 샌가 나 역시 코코넛과 마찬가지로 본명이 아닌 둥글볼록한 과일의 이름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성격상 단순히 ‘너의 아이디니까’ 같은 건 아닐 것 같아 난 또다시 “애플? 그건 또 어째서”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고, 코코넛은 씨익 웃으며 “인간─코코넛─은 선악과─애플─를 먹을 운명이다, 이거지.” 라고 대답했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안면의 온도가 달아오르는 내 표정을 보며 코코넷은 만족스러운 듯 특유의 활짝 웃는 미소를 지었다.

  그 꾸밈없는 미소를 본 것만으로 이미 일년 치 에너지를 충전 받은 듯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정신적 포만감이 느껴졌다.

  “어쨌든 이제부터 애플의 최고우선순위 목표는 최소 중소기업 취직, 이어서 다음 목표는 10년 안에 CEO!”

  “아무리 그래도 10년은 무…”

  “무리라고 하면 5년으로 줄여버릴 거야.”

  “10년 안에로 합죠…….”

  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 곤란해질 때엔 언제든 날 찾으라고, 영원한 중학생 군. 아, 그리고,”

  “응?”

  “침대 밑에 19금 잡지 숨기는 버릇은 여전하네, 킥킥.”

  그리하여 코코넛은 마치 괴도 뤼팽과 같이 은은한 달과 별빛을 날개삼아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벙 찐 모습으로 바라보며 난 조용히 중얼거렸다.

  “…1년 365일 핸드폰을 꺼두면서 대체 무슨 재주로 찾으라는 거야.”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코코넛이 사라짐을 확인한 뒤 곧바로 ‘성인 용품’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안녕, 내 보물들아……

 

  07

 

 

  훗날 여왕님 가라사대, 이후로는 “이건 뭐 별로 재미도 감동도 반전도 없는 전개”가 이어졌다. 왜 그런 고 하니, 그녀의 예상으론 갑자기 집사 일에 눈뜬 내가 재산을 몽땅 털고도 모자라 장기를 팔고 빚을 지는 등의 혼신의 노력 끝에 겨우겨우 영국으로 건너갔건만(이 부분에서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의 절망적인 영어 실력에 그만 좌절하고는 걸어서 한국까지 걸어와 슈퍼만능 해결사 코코넛님께 그 몸과 마음을 담보로 어쩌구저쩌구 불라불라…… 이하 생략.

  하는 전개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기가 막혀서, 정말, 나 참, 허 참.

  난 정말로 기가 막혀하면서 코코넛이 딴청을 피우고 있을 사이(내 방에 들어가더니 10초 후 “야한 잡지 발견!” 하는 바람에 또다시 숨이 턱 막혔다),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한 ‘집사 교본’과 ‘신사의 나라 여행기’를 재빨리 불태워버렸다.

  그 후 능숙한 솜씨(응? 왠지 데자뷰가…)로 창문을 열고 환풍기를 틀어 냄새를 뺐다.

  “너 혹시 해결사가 아니라 점술사 같은 거 아니냐?”

  “응, 뭐가?”

  “…아냐, 아무 것도.”

  그만 본론으로 와서, 재미도 감동도 없는 전개를 계속 말하자면 나는 IT업계에서 나름대로 활약하고 있는 중견 기업에 취직하였고 입사를 확정 받은 바로 전날 밤, 역시나 코코넛은 여지없이 불쑥, 뜬금없이 내가 사는 집에 찾아왔다. 그것도 원래 살던 집에서 KTX로도 최소 4시간 거리는 떨어진 집에 말이다. 다시 말해 집에서 아주아주 멀리 떨어진, 회사 가까운 곳에 위치한 20평 남짓한 오피스로 찾아온 것이기에, 평소 코코넛의 그 신통방통한 행적에도 거의 놀라지 않게 된 나로서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왔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해결사는 뭐든지 알 수 있어. 예를 들어 애플이 어제 본 야동의 제목이나 오늘 아침에 먹은 반찬 같은 것도, 한때 애플과 사고를 칠 뻔한 여자 후배의 이름도 알고 있지. 아마 ‘나나바’였나?” 라고 말한 뒤 경악하는 나에게 풋, 한 뒤 “농담이야, 농담. 그나저나 뒤집으면 바나나가 되네, 킥킥.” 하며 웃었다. 

  왠지 섬뜩한,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었다. 게다가 일단 이름은 정확하게 맞췄고 말이지….

  아마 코코넛이 실제론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해도 난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미래에서 온 초능력자거나 그냥 단순한 사이코 스토커일 수도 있다. 아마 전자 쪽이 확실하지만.

  코코넛은 오피스를 두리번거리며 어린 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호오호오오…. 대단해, 대단하잖아 애플.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대단하다니까? 이거 봐, 내가 뭐랬어. 하면 된 댔지. 그… 어디랬지……. 아 맞다, Ateneight. 얼마 전에 큰 붐을 일으킨 어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Oteneight를 주력상품으로 쭉쭉 성장하고 있는 국내신흥 IT기업이었지. 대표상품은 트위터를 포함한 각종 최신 기능이 장착된 데다 애인이 없는 솔로들에게 매달 통신료를 절반으로 할인해주는 SSB라는 단말기였고…. 뭐 그런 쓸데없는… 아니 아직까진 쓸만한 요금제지, 중얼중얼……. 이야~ 아무튼 굉장하잖아. 미래를 선도할 슈퍼미라클비전하면서도 멀티유즈풀하며 그와 함께 지극히 상업적이고 최근에는 풍부한 자본과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서양 IT기업들에게 순위를 하나둘씩 빼앗기고 있는 어두침침한 전망의 바로 그 산업이지. 아마?”

  코코넛의 말은 여전히 속사포 같았다. 하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역시 대단하다는 느낌이랄까.

  “……좋은 말은 영어로 하고 안 좋은 말은 한국말로 하기냐.”

  “착각이야, 착각.”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에게 난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것은 아주 가끔씩, 나의 장난기를 자극하여 날 곤란하게 만드는 내면의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난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코코넛.”

  “으흥, 애플 군, 자네의 그 표정은 ‘색기 쩌네’를 말하기 직전의 표정이로군.”

  홈즈의 역을 연기하는 듯한 코코넛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가장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한쪽 입 꼬리가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여기서 굴한다면 남자가 아니지.

  나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나와 결혼해주지 않겠어?”

  “───?!”

  코코넛의 눈과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 후 어버버… 하며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코코넛과의 전적, 1328전 1327패. 최후의 승리라는 영광을 거머쥔 우승자는 의기양양해지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코코넛, 오늘 몇월 몇일이지?”

  코코넛은 놀란 표정 그대로 특유의 고개를 갸우뚱 하는 깜찍한 동작을 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날짜? 그야 오늘은 4월 1──”

  일─ 이라는 발음을 하기 직전,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추가타를 먹였다. 그녀 덕에 되찾을 수 있었던,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한껏 보여주며 말이다.

  “Happy April Fools' Day~ My fair lady.”

  “야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이───!!”

  고막을 찢다 못해 열어젖힐 기세의 괴성을 지르며 코코넛은 고릴라, 아니 고질라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쿠션이 재즈댄스를 추고 컵들은 기꺼이 제 몸 던져 스스로 저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리모컨은 무선마우스와 만년필, 지갑, 안경, 젓가락, 포크 등과 함께 공중에서 강강술래를 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내가 아끼는 책들은 힘찬 날갯짓과 함께 날아다녔다. 난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산타의 웃음소리를 흉내 내며 열심히 고질라와 술래잡기를 했다.

  “Ha, Ha, Ha!”

  “영어로 웃지 마──!!” 

  막간을 이용한 여담으로 코코넛의 또 다른 입버릇, “걱정하느니 행동하고 숨느니 나서라.”는 유쾌하고 단순무식하고 용감무쌍한 덕담은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물론 이 좌우명을 실천하느라 지금 시말서를 쓰고 있는 건 그다지 웃을 일이 아니지만.



<Dear my Shooting Star>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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