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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53 Sep 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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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r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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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남자는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남자의 볼가는 이미 한참 운 사람의 그것처럼 부어있었다.

“뭐야,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왜 이런 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부터 떠올랐다. 남자의 기억으로는 지금쯤 자신은 먹음직스러운 식사와, 비록 크게 부유하진 않지만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집,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남자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던 중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이자, 각각 비행기 기장과 그 비행기의 스튜어디스로 일하고 있던 남자의 부모님은 비행기 추락이라는 이름의 불행한 사고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당시 3살배기 꼬마였던 남자 역시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지만 모든 승객이 죽은 가운데서 3살배기 꼬마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언론에서는 남자를 행운의 소년이라고 추켜 세워주며 심정은 어땠냐는 둥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둥 배려심 없는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탓인지 소년은 한동안 식물인간 같은 상태였으나 어떠한 계기를 통해 희망을 되찾고 인생에 대한 의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떠한 계기?

남자는 일단 거기서 사고를 멈춘 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위치한 장소는 벤치가 여럿 놓인 널찍한 공원이었는데 비가 쏟아지는 탓인지 인적은 드물었다.

노숙자도 아니고 애인에게 실연당한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날에 우산도 없이 청승맞게 벤치를 지키고 있다니.

“몸이 좀 허해졌나.”

부르르르르르.

그 때 남자의 오른쪽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진동음을 냈다. 핸드폰을 꺼내어 열어보니 거기에는 발신번호 제한 표시로 된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는 럭키키드 컴퍼니의 김촬리입니다.

고객님께서 요청하신 서비스가 무사히 처리되었음을 알려드리며 기타 궁금하신 점이나 A/S에 관한 문의는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러주세요.


뭐야, 스팸문자인가.

자연스럽게 삭제 버튼을 누르려던 남자는 문득 화면 아래에 추가메시지(p.s)가 더 적혀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남자는 경악을 금치 못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상으로 격추당한 핸드폰의 액정화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기억완전소거 서비스 3000000원

기억일부복원 서비스 1000000원

주변 사람들의 기억소거 서비스 12650000원

  …

  …

별도세 56000원


0


“우리가 해냈어! 해냈다고!”

서기 20XX년 어느 날.

한국의 모 대학원의 연구실에서 인간의 뇌에 대해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쾌재의 환호성을 질렀다. 인류의 오랜 숙원이자 영원한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뇌,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하던 이들은 드디어 평생의 비원을 달성하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모와 인고의 세월을 보내왔는가.

비록 그 세월의 길이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연구실에 있던 이들은 모두 서로를 위로하고 자신들이 이룩한 위업에 감격하였다. 만약 자신의 옆에 있는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일생 동안 결코 이 역사적인 위대한 발견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리라.

그러면서도 과학자들의 시선은 온통 연구실의 침대에 잠들어 있다가 환호소리에 깬 듯한 부스스한 머리의 중년여성에게 쏠려있었다. 중년여성은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28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여성과학자 김푼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중년여성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그러니까 지금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거죠?”

“워메… 이 처자 환장하겠네이. 그럼 나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신 득이 된다고 거짓부렁을 말하냔 말이오.”

“성함, 나이, 남편 분 이름, 좋아하는 음식… 아니, 지금 당장 여기가 어딘지도 말이죠?”

“아따 그렇다니께…. 근디 참말로 여기 어디당가? 혹시 당신들 인신매매단인가 그런거 아니제?”

“에이, 아니에요. 여기 병원이구요~ 아주머니 남편… 아니 아주머니께서 아프다고 스스로 찾아오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글씨… 요새 치매끼가 있는지 워낙 긴가민가 하니께.”

김푼수와 중년여성의 대화를 들으면서 과학자들은 저마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뇌에 대해 연구하던 이들은 그 과정에서 인간의 뇌에 흐르는 어떠한 ‘신호’를 발견하였다. 광속에 버금가는 속도를 가진 그 ‘신호’는 인간이 무엇을 기억하거나 무엇을 판단하려고 할 때 어김없이 뇌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연구원 모두가 어째서 이것을 지금까지 발견 못하고 있었을까 망연자실해할 정도로 그것은 분명하고 특수한 반응이었다. 이들은 이 발견을 마지막 지푸라기인 냥 필사적으로 연구하였다.

‘아이슈타인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한 천재박사가 제출한 논문을 토대로 국가가 지원해주기 시작한 이 연구의 초기인력은 무려 300명. 뇌와 인체학, 심리학계의 고명한 박사들이 모두 매달려 필사적으로 연구했지만 모두들 가망 없다며 떠나갔고 이제는 6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남들이 가망 없다며 손사래를 칠 때 이 6명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본래 연구원이란 한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사적인 시간이 거의 완벽하게 사라지는 고독한 직업인데다, 본인의 열정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중도포기를 하게 되는, 말하자면 고난의 가시밭과도 같은 힘든 길이다. 친구들을 비롯하여 친척, 가족 등 모든 지인들과 연락을 끊으면서까지 연구에 매진하던 이들의 목표는 오직 현 프로젝트의 성사였다. 그것은 가히 광기 어린 집착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넘치는 의욕과는 무관하게 연구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국가조차 엄청난 예산을 투자한 이들이 9년 넘게 아무런 성과를 보이지 못하자 결국 올해 안으로 연구를 강제중단 시키겠다는 통보를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자들의 광기를 오히려 더 부채질했다. 궁지에 몰린 그들은 과학자로서 하지 말아야할 금기의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인체실험. 그것도 아무 상호협의도 없고 국가의 인정도 받지 않은, 그야말로 완전하게 범죄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그 행위를 과학자들은 저질러버린 것이다.

돈을 들여 조폭들을 고용한 뒤 노숙자나 독신과 같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파장이 적은 이들을 주로 납치하게 한 다음 약물을 먹여 기절시킨다. 이 불행한 피해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인체실험을 당하게 되었고 마침내 과학자들의 광기는 오랜 방황 끝에 종착역에 이르렀다.

바로 인간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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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인체에 관한 연구는 성과가 나더라도 충분한 모르모트 검증을 통해 신중하게 발표해야 하는 분야이다.

하지만 초조해진 과학자들은 이미 그러한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힘든 상태였다. ‘예산도둑’, ‘돈 먹는 돼지들’ 이라고까지 손가락질 받으며 신상정보까지 낱낱이 인터넷상에 알려진 그들은 이혼을 당하거나 자식들이 가출하는 등 가정의 불화를 포함하여 어쩌면 앞으로의 사회생활 자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곧장 정부는 물론 관련기업들과 외국에까지 이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전 세계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를 방불케 하였다.

내 마음대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말이란 말인가? 비록 명확한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이 6인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그들이 발명해낸 ‘기억조절장치’는 안 좋은 기억, 일생의 상처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지식을 강제로 주입시킬 수도 있었다.

이 논문이 학술지와 뉴스를 통해 발표된 직후 6인의 과학자들에겐 온갖 문의가 쇄도하였고 이 연구가 가져올 엄청난 수익성을 간파한 전 세계 국가들은 이들에게 최소 국가장관의 대우를 약속하는 등 러브콜을 수시로 보냈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느 나라에 기술을 넘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대한민국의 예산으로 실행된 연구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에 있었다. 그리하여 6인의 과학자, 그들의 집념이 만들어낸 발명은 오랜 진통 끝에 한국을 시작으로 보급화가 된 것이었다.

정부는 ‘기억관리시스템’을 국가 최고등급의 기밀로 지정하고 6인의 과학자들에게도 비밀리에 감시를 붙여 기밀의 누설을 막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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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관리시스템’과 ‘기억조절장치’는 과학혁명의 수준을 넘어 대홍수였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불만족스러워 하던 사람들이 몰려 구청 앞은 인산인해가 되어 매일 쉬지 않고 붐볐다. 거기에 외국의 강압적인 기술공유 요청이 겹치게 되자 정부는 결국 기억관리시스템을 일부 사기업과 동맹국들에게 판매하였다. 물론 거기엔 개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숫자의 개런티가 붙었음에도, 기술을 사겠다는 기업과 국가는 줄을 이었다.

그 결과 기억관리시스템은 다양한 이름으로 시중에 판매되었는데, 그 중 업계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은 다국적 기업인 ‘럭키키드 컴퍼니’였다. 철저한 비밀주의 경영을 고수하는 이 회사는 민간인들은 물론 업계사람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어디에 본사를 두고 있는지, 사원은 몇 명 정도고 회장의 이름이 무엇인지, 심지어 이 회사가 어느 나라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이토록 거대한 자본을 가진 초우량기업이 되었는지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철저한 고객 위주의 서비스와 동종업계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들조차 곧 기업이 파산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엄청난 저가 공세.

기형적인 형태의 경영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이던 럭키키드 컴퍼니는 마침내 시장을 점령했다. ‘기억관리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기억 업계가 결국은 완전하게 럭키키드 컴퍼니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물론 타사의 제품들이 멸종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럭키키드 컴퍼니의 제품만을 선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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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키드 컴퍼니.

극한의 기밀경영을 추구하고 영어로 된 이름을 가진 이들의 본사는 얄궂게도 한국에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본사라는 것은 언제든 다른 지역, 다른 국가로 옮길 수 있는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기업의 본사 개념에 비해선 턱없이 그 의미가 희박했다. 소득이나 경영규모 등 모든 것이 정체불명이다 보니 자연히 각종 세금 같은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엔 치열한 로비활동이 뒷받침되었지만.

“여기까진 계획대로군요, 미스터 노아리스. 아니, 이 나라에선 ‘사장님’으로 불러야 할까요?”

캡모자를 쓴 여성의 말에 노아리스라 불린 남성은 와인이 담긴 잔을 통해 창밖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발밑에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품은 채 개미떼처럼 도심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래, 그리고 앞으로도 계획대로겠지… 자네만 날 배신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미스 게르니카.”

“이런… 제가 그 정도로 신뢰가 없었나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풀네임으로 부르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게르니카가 불만스럽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가볍게 실소했다.

“그저 가벼운 농담일세. 그리고 설령 자네가 배신행위를 한다고 해도 난 그걸 묵인할 생각이야.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회사가 단기간에 이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자네의 공이지 않는가. 풀네임에 대해선 뭐, 그저 늙어가는 남자의 치기어린 심술이라고 봐주게. 미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건 젊은이나 늙은이나 똑같은 거 아니겠나?”

노아리스.

철저한 기밀주의 경영을 고수하여 수많은 풍문을 낳고 있는 현 최고 주가의 다국적 기업, 럭키키드 컴퍼니의 최고 경영자인 그는 의외로 평범한, 이제 막 이마에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잘 손질한 금발의 머리는 비록 청년의 그것에 견줄 것은 아니었지만 단정한 차림새에서부터 여유 있는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이 이제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의 미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요.”

“허허, 그렇게 인상 쓰지 말게나. 모처럼의 미모가 가려지지 않는가.”

게르니카.

백인종으로 보이는 그녀는 20대 중반에서 후반쯤 되었을까 싶은 나이의 외모와 함께 표현 그대로 늘씬하고 쫙 빠진, 그러면서도 풍만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성적으로 입사한 그녀는 발군의 실적을 보이던 중 사장실의 비서로 발탁되었고 현재 회사 안에선 ‘형식상으로’ 노아리스 사장의 비서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노아리스와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의 관계는 한없이 동등했다. 단순히 고용주와 사원의 관계라기보다는 동업자 사이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더 타당했다.

“이 나라에는 아주 좋은 표현들이 많더군. 예를 들어 자네와 같은 몸매를 이 나라 사람들은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이라고 표현하더란 말이지, ‘S자형 몸매’라는 말도 있고 말이야. 참 표현력이 좋은 나라야.”

“그리고 성관련 고소 사건이 매년 늘어가는 아주 바람직한 페미니즘 국가이기도 하죠. 과거엔 이 나라 역시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했었다고 하는데 반세기 전부터 웬일인지 여성의 권익이 급상승했다고 해요. 지금은 오히려 남성들이 집안일을 도맡아한다는군요. 참 좋은 나라에요.”

게르니카의 말에 노아리스는 다시금 실소하고 말았다.

“또, 사내의 한국사원들과 이야길 나눠보니 이 나라는 남성의 입대와 여성의 임신을 동일의 문제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래? 그건 또 흥미롭군. 아마 이 나라는 아직 징병제를 한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몇 년 전에 통일이 됐으니 모병제를 하자는 여론이 우세하지만 전역을 한 기성세대들의 반발이 거세서 아직 모병제를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요. 거기에 해가 갈수록 출생률은 감소하고 있다보니 사회에서 여성들을 지탄하는 여론도 있다고 하고.”

“흠, 남자는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 당연한 이치 아닌가? 가정과 국가를 위해 군복무 하나 못 지키겠다는 남성이나 본인의 일신만을 위해 애를 안 낳겠다는 여성이나 서로 너무나도 무책임하군. 프라이드라곤 전혀 없는 전형적인 패배주의적 사상이야.”

노아리스의 무신경한 말에 게르니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미스터?”

“후후, 당연히 농담이지.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하지만 출생률이 감소한다는 건 그만큼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말 아닌가. 겉보기엔 꽤 좋은 구매층을 가지고 있는데다 경제규모 역시 나쁘지 않은 편이라 마냥 행복하기만 한 국가일 줄 알았더니 그런 고민도 하고 있었군 그래.”

“뭐 어쨌든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니겠어요? 우린 우리의 비즈니스를 할 뿐이죠. 설령 이 나라가 파산한다 한들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안 그런가요?”

“맞는 말이야, 세계대전은 유럽만의 전쟁이었을 뿐이지. 아메리카와 제팬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얘기지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사장님.”

“그 사장님이라는 호칭, 어감 좋은데.”


4


서울 시내에 위치한 모 대학 병원.

이 곳에서는 기자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펜과 손바닥크기의 수첩을 든 채 병석에 누워있는 중년의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즉, 그 이후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아 그렇다니께… 나가 암만 생각혀도 구론 병원에는 간 기억이 없단 말여. 귀신 곡할 노릇이지 원.”

“알겠습니다. 말씀 잘 들었어요, 이건 약소하지만 병문안 선물이에요.”

“아이구 뭐 이런걸 준당가? 고맙구먼, 이쁜 샥시.”

“별말씀을요. 하루빨리 건강해지시길 바랄게요.”

쾌차를 바라는 말과 함께 빙긋 웃어 보인 후 여자는 병실을 나왔다. 병실 밖 복도에는 그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선글라스 낀 남성이 여자에게 다가왔다.

“어땠어?”

“이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가고 있어. 그쪽은?”

“찾았어.”

“정말?”

되묻는 그녀의 이면엔 ‘기대도 안했는데’ 라는 말이 숨어있었기에 남자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찾았다는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자신이 했던 고생을 그녀가 알아주긴 할까? 물론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눈앞에 서있는 그녀는 자신의 희망이자 구원이었으니까.

“그래,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어.”

“호오호오…… 제법이잖아, 역시 대단해. 해.커.경?”

“……사석에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해결사.”


5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까? 끔찍한 기억, 떠올리기도 싫은 추억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연락해주세요! 080-1111-9999!"

“와, 정말 잊고 싶었던 기억이 싹 없어졌어요!”

“진짜 너무 고마운 거 있죠? ‘메모리 리무버’ 사랑해요!”

남자는 브라운관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가운데서도 브라운관 속의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끄럽고 창피한, 혹은 떠올리기 괴로운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 역시 저마다 다르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러한 치부들을 짊어지거나 혹은 간간히 잊으며 살아간다.

지금 멍하니 브라운관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조차도 물론 그런 추억이 있다. 아니, 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현 인류에겐 그러한 인간의 불변성질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과학의 대홍수격 발명품, ‘기억조절장치’가 있었고 남자는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마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가 화면 속의 광고를 모두 거짓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이 공허한 감정은 저들이 저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브라운관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호들갑을 떨며 제품을 소개하였고 마지막으로 최종판매자로 보이는 두 여성이 나왔다.

“기억조절장치, 정~말 좋죠. 그런데 이거 부작용이나 그런 건 없나요?”

“약간의 일시적인 우울증세 같은 게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과거의 아픈 기억, 치부들을 말~끔히 제거해줄 수 있다는데, 뭘 망설이겠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하긴 제가 아는 어떤 분도 이걸 한번 이용해보시더니 평소 십년 묵은 체증이 그냥 사르륵 녹아버린 기분이셨다고 해요.”

남자는 그들의 기만적인 대화에 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대체 자신은 왜 저딴 쓰레기를 거금을 처들이면서까지 구입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것도 남자의 머릿속에는 지금 눈앞에 있는 브라운관보다 더 큰 저 빌어먹을 뚱보기계를 구입한 기억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덤으로 수천만 단위의 빚까지 져버렸다.

남자는 핸드폰을 보며 결제내역을 보다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허탈함에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초보다는 길고 분보다는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한참을 웃던 남자의 볼엔 어느덧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씨팔.”


6


럭키키드 컴퍼니의 최고경영자, 노아리스는 현재 회사 내 곳곳에 설치된 수많은 CCTV의 모니터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쥐새끼들치곤 꽤 실력 있는 일당이군.”

평소와 같은 시간에 출근하여 여느 때와 같이 앞으로의 경영을 정하고 회사의 업무들을 결재하고 있던 노아리스는 잠시 휴식을 취할 겸 CCTV를 보던 중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가 지금 ‘쥐새끼들’이라고 부른 것은 평범한 사복 차림의 한 남녀. 남자 쪽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척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고 여자 쪽 역시 좀 반반한 얼굴이라는 걸 제외하곤 별다른 특색이 없는 갑남을녀였다.

처음엔 단순히 호기심 넘치는 커플이 모험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으나 경비원들의 감시를 교묘하게 피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있는 ‘사장실’에 점차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처리할까요, 미스터?”

현재는 비서를 연기하고 있는 게르니카 역시 그러한 낌새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살벌한 눈빛으로 노아리스에게 물었다.

“저런 순하게 생긴 양들을 다짜고짜 주님의 곁으로 보내버릴 순 없지 않는가? 게르니카, 자네가 적어도 목자라면 양들에게 총이 아닌 성경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지.”

게르니카가 말하는 ‘처리’라는 말뜻을 모를 리가 없는 노아리스는 조그맣게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헐크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온화한 말투였으나 게르니카는 꽤나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비꼬듯 말했다.

“하, 당신이 목자를 운운하다니. 이마에 바람 통하게 하고 싶나 봐요?”

“워워, 진정해. 난 단지 대화를 먼저 하자는 것뿐이야. 자넬 도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날 도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당신의 이름이 주의 가르침에 얼마나 위배되는지 아는 당신이, 도대체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 못하겠는데.”

“그건 피차 마찬가지지, ‘게르니카’ 양?”

철컥.

게르니카는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안쪽 허리춤에 숨겨있던 권총을 꺼내어 겨누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건만 중년의 최고경영자는 그 여유로운 표정에 일점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치 희곡의 주인공처럼 연기하듯 능청스럽게 양손을 깍지 껴 뒤통수로 가져갔다. 물론 게르니카 역시 그가 겁을 집어먹는다거나 하는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기에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리 같은 목적을 가진 동업자라지만 난 아직 당신을 인정하지 않았어, 노아리스.”

“이하동문일세.”

능구렁이 같은 노아리스의 대답에 게르니카는 입술을 깨물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비즈니스’가 아닌 이상 난 내 방식, 아니 주의 가르침대로 처리하겠어.”

문을 걷어차듯 거칠게 열고 나가는 게르니카를 보며 깍지를 푼 노아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을 지으며 특유의 실소를 머금었다.

“이런이런, 이래서 스페인 여자는. 정말 투우처럼 성급하군 그래. 물론 진짜 사람인지도 의심스럽지만.”


7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3시경, 마포구의 모 아파트에서 20대 남성이 투신자살하는…”

“긴급속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국회의원들과 정부 고위층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가운데…”

“정부는 현 사태를 허위사실로 규정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으며…”

“아주 난리 났네.”

“그러게.”

핸드폰에 연결된 DMB 방송을 들으며 ‘해커’와 ‘해결사’는 동시에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다리는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이대로 있다간 정말 전 세계가 럭키키드 컴퍼니의 손아귀에 넘어갈 거야.”

해커는 달리면서 노트북을 내밀었고 해결사 역시 달리는 와중에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노트북의 화면에는 세계 지도가 나타나 있었는데 럭키키드 컴퍼니의 상표인 ‘메롱소년’ 마크가 지도의 십중팔구 비율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으론 아직 배가 고프다는 듯 메롱소년들은 빠른 속도로 증식하며 지도의 공백들을 메우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를 리 없는 해결사 역시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여기서 초조해봐야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항상 냉정하게, 냉철하게, 철두철미하게, 집요하게, 나에게 약점은 없다.

그렇게 행동하기로 다짐해왔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해결사는 그러면서 증식의 속도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하나 둘씩 분명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자신의 동료들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비록 평소엔 서로 의견차이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지만 그것도 이런 긴급 상황에 이르자 미운정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해결사의 그런 상념을 없애주기라도 하려는 듯 두 사람이 달리던 복도의 맞은편에서부터 최소 수십 명 이상의 수많은 ‘경비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경비원?’

해결사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대체 어느 기업에서 저런 살기등등한 ‘어깨’들을 경비원으로 고용한단 말인가? 그것도 손엔 각목과 일본도 등의 흉기를 들고 말이다.

“코코넛!”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료를 보며 해결사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 일단 저 녀석들을 물리…”

“여긴 내가 맡을 테니 어서 가!”

“엥? 너 미쳤냐?”

주르르르륵, 경비원들을 향해 용감하게 몸을 날리려던 해커는 발이 꼬이는 바람에 땅바닥을 얼굴로 쓸었다.

“싸움도 못하는 게, 폼 잡지 말고 내 뒤에 숨어 있어.”

“……크흑.”

경비원들은 기가 찼다. 당연히 저 선글라스 낀 샌님 같은 비실이가 나설 줄 알았더니 비굴하게도 여자 뒤에 숨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절세의 미모를 가진 저런 아가씨 뒤로 말이다. 게다가 경비원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절세미녀의 입이었다.

“거기 깍두기들, 뭐 구경거리 났어? 빨리빨리 덤벼, 시간 없으니까.”

“…….”

“안 오면 내 쪽에서 간다? 쓰리… 투… 원…… 파이어!”

“…헉?!”

먹이를 덮치는 야수와 같은 동작으로 약 5미터가량 떨어진 경비원들을 향해 순식간에 도약한 해결사는 일기당천의 무력을 발휘하며 압도적으로 적을 제압했다. 마치 액션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십 명의 경비원들을 때론 강력하게 공격하고, 때론 부드럽게 피하며 그들을 어린애 다루듯 했다.

“이 년이!”

그녀의 뒤가 노출되었음을 간파한 경비원 한 명이 쌍코피를 흘리며 각목을 휘둘렀으나 맞았다 싶었던 코코넛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경비원들 중 한 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위다!”

자신들의 머리 위, 샹들리에에 매달린 코코넛은 씨익 웃으며 “정답~ 이건 선물~” 이라는 말과 함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던 8개의 소형 수류탄을 던졌다.

“크아가가각!”

“쿠, 쿨럭쿨럭쿨럭!!”

땅에 닿는 순간 풍선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수류탄에서 뿜어져 나온 가스가 경비원들의 시야와 호흡을 차단하였다. 가스탄의 착탄을 확인한 코코넛은 재빨리 방독면을 쓰면서 자신의 동료를 향해 소리쳤다.

“애플! 뛰어!”

“알았엌쿨럭쿨럭콜록켈렉!!”

그렇게 두 사람은 경비원들의 벽을 통과하였다.


8


“고작 6층밖에 안되면서 높이는 또 왜 이렇게 높은 거야?”

코코넛은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며 투덜거렸다. 그 뒤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애플이 겨우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평소 운동부족인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반면 코코넛은 거대한 빌딩을 오르는 동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6명의 과학자에 6번째로 조사한 건물이 정답이었고 게다가 6층의 건물이라. 우연치곤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 나는데. 딱딱 맞아 떨어진 달까.”

“작위적이라고?”

“아무 것도 아냐.”

평소 같았으면 더 물어보았겠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애플은 호기심을 꾹 참고 자신들이 현재 위치한 6층의 계단, 그곳에서 맞은편 끝자락에 있는, 겉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튼튼한 느낌을 주는 문을 가리켰다.

“헷, 척 보기에도 최종보스가 있는 던전 입구네.”

“이상해.”

애플은 당장이라도 문을 향해 돌진하려는 코코넛을 제지하며 말했다.

“뭐가?”

“조사한 바로는, 또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사장실 앞은 복병을 매복시키기 좋은 구조로 되어있어. 복도 전체가 굴절된 ㄹ자 형으로 되어 있으니까 일단은 여기서…”

“생긴 건 어리숙한 게 제법 영리하군, 하지만 헛다리짚었어.”

말을 끊듯이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은 경계의 동작을 취했다.

“코코넛, 뒤!”

노트북을 보며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애플의 외침에 빠른 속도로 반응한 코코넛은 바람 같은 몸놀림으로 등 뒤에 있던 적을 향해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발차기를 피한 적은 재빨리 몸을 굴러 일어났다.

“당신은… 당신이 바로 게르니카 씨군요.”

“…어떻게 안 거지?”

낯선 적에게 자신의 정체를 한번에 간파당한 게르니카는 평소 그녀답지 않게 주춤했다. 비록 캡모자로 가려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애플의 한마디는 그녀를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실명이 아닌 ‘가명’을 들켰다는 것은 적어도 저 아직 소년티를 못 벗은 남자가 자신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광폭의 미노타우로스’로 불리는 게르니카 씨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게르니카는 눈앞의 남자와 대화를 나눈 지 불과 십여 초 만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넌 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너 같은 꼬마는 ‘데이터’에 없었는데.”

“그야 물론이죠. 그동안 당신들이 조사해온 데이터라는 것들은 모두 우리 집 하드에 저장되어있을 정도인걸요. 그 중에서 제 정보 한두 개 고치는 것쯤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워요.”

“미친 소리!”

애플의 말에 게르니카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그에게 살쾡이처럼 달려들었다.

“죽어!”

게르니카의 양 손목에는 그녀의 팔 길이만한 날이 손톱처럼 달린 클로가 부착되어있었다. 게르니카는 애플을 향해 오른팔의 클로를 흉악하게 휘둘렀지만 곧 압도적인 완력에 붙잡히고 말았다. 게르니카가 옆을 돌아보니 코코넛이 클로의 날을 움켜쥐고 있었다. 날 하나하나가 모두 시퍼렇게 선 살기등등한 클로를 맨손으로, 그것도 단 한차례도 베이지 않은 채 순식간에 잡아 움켜쥔 것이다.

“으윽…?!”

그 순간에 게르니카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라고 생각했다.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명답게 그녀는 강철마저 우습게 우그러뜨리는 괴물 같은 근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자신의 일격을 비록 클로라지만 이토록 쉽게 잡아채다니? 분명 그것이 가능한 이들은 전 세계에 몇 명 안 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 역시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현재 자신의 일격을 허무하리만치 멋지게 막아낸, 아직 얼굴엔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이 여자는 금시초문이었다.

“헤이, 미노타우로스. 네 상대는 쟤가 아니라 나라고.”

“이거 당장…… 놓지 못해?!”

평정을 되찾은 게르니카는 히스테릭하게 외치며 붙잡힌 오른팔 대신 왼팔의 클로를 코코넛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역시도 코코넛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우연도 두 번 이상 일어나면 우연이 아니라는 말도 있듯이 ‘프로’인 자신의 일격을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능숙하게 막아낸 이 여자는 분명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게르니카와 코코넛은 서로의 양팔을 교차시킨 채로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애당초 자신의 목적은 이들의 섬멸이 아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것이 최선이었고 자신 또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지만, 눈앞의 여자는 분명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섣불리 승부를 내려하기보단 오히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며 자신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런 게르니카의 심중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코코넛은 비웃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흐흥~ 아마 이쯤 되면 ‘버티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

“어라? 그냥 찍어본 건데 정답이야? 킥킥.”

“이런 건방진…! 죽어!”

탕, 게르니카가 오른발을 구르자 그녀가 신고 있던 부츠의 발끝에서 칼날이 삐져나왔고 게르니카는 코코넛을 향해 가차 없이 앞차기를 날렸다.

“꺅! 위험하잖아!!”

“닥쳣!!”

양손의 클로와 발끝의 칼날이 빠른 속도로 바람을 찢으며 코코넛에게 달려들었지만 코코넛은 그것들을 모두 여유롭게 피해냈다.


9


두 여인이 그렇게 격투의 무아지경으로 빠져들 무렵, 애플은 살금살금 몰래 옆으로 빠져나와 굽은 ㄹ자 형의 복도를 지나 마침내 사장실 문 앞에 도착했다.

어떠한 함정이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문을 열자마자 죽을지도 모른다.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애플의 마음속을 지배했지만 그는 곧 그 감정을 털어냈다. 자랑스럽게 여기진 않았지만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은 그가 가진 특기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은 코코넛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지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자, 레이드를 시작해볼까.”

애플은 한차례 작게 숨을 들이마신 뒤 사장실의 문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역시 튼튼한 외형답게 문은 멀쩡했다. 애플은 문의 강도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이건가. 과연 최종보스……”

드르르륵.

“노크 방법이 꽤 거칠군 그래.”

“…….”

미닫이문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금발의 미중년이자 럭키키드 컴퍼니의 최고경영자, 노아리스였다.

이미 여러 차례 럭키키드 컴퍼니의 중추 네트워크에 해킹하여 사내기밀 따윈 훤히 꿰고 있는 애플은 그를 보자마자 한번에 알아보았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미스터 노아리스.”

노아리스의 고국이자 신사의 나라로도 불리는 영국.

애플은 언젠가 연습해두었던 영국 신사의 인사법─모자를 벗으며 인사─을 떠올리며 쓰지도 않은 모자를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이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음에도 노아리스는 특유의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나야말로 유능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어 영광일세, 미스터… 노네임?”

“…아, 실례했습니다, 애플이라고 합니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노아리스 경을 만나게 되서 그런지 긴장했나 봅니다. 젊은 애송이의 실수를 런던 브릿지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노아리스는 다국적 기업 럭키키드 컴퍼니를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일반인들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고 언론에서조차 취급하지 않아 잊혀져가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코코넛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웃겨서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어쨌든 열심히 예법을 준수했다.

“이런, 하하하. 제법 말주변 있는 친구로군. 자, 서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시게.”

문 앞에선 죽음의 함정을 걱정했지만 노아리스와 나눈 몇 마디에 애플은 금세 그의 온화함에 매력을 느꼈다. 워낙 철저한 보안을 자랑하는 럭키키드 컴퍼니였던지라 경영자 역시 괴팍할 거라 지레짐작했지만 노아리스는 애플이 만나온 그 어떤 사람보다 더 기품이 있었다.

약 20평 크기의 사장실 안에는 사자의 가죽으로 된 고급 융단이 깔려있었고 보기만 해도 편안한 기분을 주는 쿠션으로 된 대형 의자가 세 개 놓여있었다. 노아리스는 의자를 권하며 자신도 자리에 앉은 뒤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래, 새 시대의 총아께서 이 힘없는 늙은이에게 무슨 볼일인가.”

“대 럭키키드 컴퍼니의 총수께서 힘이 없으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르신을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오라,”

“‘기억조절장치’의 영구적 폐기와 럭키키드 컴퍼니의 해산, 이겠지?”

심중을 꿰뚫어보는 듯한 노아리스의 말에 애플은 한순간 숨이 기도까지 꽉 막힘을 느꼈다. 하지만 곧 태연한 척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역시 선견지명의 안목과 혜안을 갖추신 노아리스 경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제 요구는 그 두 가지뿐입니다.”

노아리스는 한동안 말없이 파이프의 연기를 뻐끔거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과 주전자가 놓인 탁자 쪽으로 몸을 옮겼다.

“차 한 잔 하겠나?”

“홍차로 부탁드립니다.”

애플이 정중하게 말하자 역시나 또 그 심중을 읽어냈는지 노아리스는 훗, 하고 웃었다.

“현명한 젊은이로군. 늙은이에게 난처함을 안겨주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게 둘은 한동안 티타임을 가졌다.

차 한 잔을 완전하게 비운 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노아리스였다.

“자넨 추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순한 선문답, 그러나 어쩌면 이 대화 하나로 세계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었다.

애플은 새삼스럽게 긴장감을 느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그 사람 본인임을 증명해줄 수 있는… 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증거를 운명이란 이름으로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나?”

“다소 무례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신의 총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운명이라는 것도… 분명히 믿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노아리스 경께서 생각하시는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의미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자네가 무교인 것은 알겠네. 운명을 절대적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어찌됐건 이 세상에는 운명에 의해 그 기억, 추억을 희롱당한 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 안타까운 일이지. 자네에게도 분명 있을 걸세. 아니, 자네 같은 시대의 총아일수록 과거는 더더욱 치열했던 법이지.”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 아닙니다.”

애플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간격을 이용하여 노아리스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한번 트라우마를 당한 인간은 평생을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가야 하네. 나는 이것을 주께서 인간을 만들다 하신 실수라고 보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주를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나 또한 그런 견해를 가진 부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기준에서 전능하신 게지. 신의 오묘한 경지를 우리가 어찌 다 알겠는가.”

“그건 옳으신 말씀입니다.”

“알아주니 고맙군, 그러나… 오다가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런 견해를 신성모독이라고 오해하는 목자가 있어서 말일세.”

“아주 거친 목자더군요.”

“그녀를 대신해서 사과하지. 믿기 힘들겠지만 그녀 또한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믿음이 광신이 되어버린 성기사일 뿐이지. 어찌 보면 나 또한 그녀와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겠네.”

“어르신은……”

애플은 잠시 갈등했다. 차라리 무릎 꿇고 애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유혹이 고개를 서서히 쳐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르신은 노아의 방주를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인간들의 모든 부정한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창조주에게 합당한 제물들로 개조시킬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비슷했지, 하지만 점점 회의를 느꼈다네. 방금 말했던… 자네도 정체를 아는 듯하니 말해주지. ‘미노타우로스’, 즉 게르니카 경은 사실 인간이 아닐세.”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애플의 대답에 노아리스는 옛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래, 그녀는 인간이 아니야. 목자로서 살아가며 주께 돌아갈 날을 하루하루 기다리기만 하던 나에게 그녀가 찾아왔네. 자신과 함께 ‘구원’을 해보지 않겠냐고 그러더군. 자네도 보다시피 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늙은일세. 게르니카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네. 그건 참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

“그럼 럭키키드 컴퍼니의 성장도 역시…”

“아마 자네가 생각한 것이 맞을 게야. 그리고 드디어 세상에 ‘대홍수’의 천재지변을 일으킬 어떠한 발명품이 탄생했어. 아마도 자넨 인정하지 않겠지만 난 그것에서도 어떤 운명을 느꼈다네. 그것은 정말로 황홀한 광경이었어. 아주 일시적이긴 했지만 세상이 평화로워졌지. 아픈 기억을 가진 자들은 모두 잊고 활기차게 살아갔어. 괴로운 추억을 가진 이들 역시 삶에 보람을 느꼈단 말일세.”

“하지만 어르신 그건…”

“알아, 잘 알고 있네. 이젠 이 늙은이는 그것이 거짓된 행복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됐지. 그래, 그건 기만일 뿐이었던 거야. 어쩌면 기억조절장치도, 게르니카도, 이 모든 것은 주께서 인간에게 내리시는 일종의 시련인지도 모르겠네.”

한 늙은 신부가 있었다.

그는 창조주의 가르침,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라 다른 양들을 인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혹은 철저한 이기심에 따라서만 행동하였고 그러한 것을 ‘능력’이라 부르며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인간에게 좌절한 신부에게 운명은 유혹의 속삭임을 들려줬다.

노아야, 노아야.

곧 세상을 멸망시킬 홍수가 들이닥칠 것이다.

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너와 그 식솔만은 그 멸문지화를 피해갈 것인즉 추호라도 어김이 있을 시엔 맹세코 세상에 인간의 씨를 말리리라.

기억조절장치라는 이름의 대홍수는 그렇게 세상을 ‘정화’시켜갔다. 자신의 소망이 이뤄짐으로써 기쁨으로 충만해야 했을 늙은 신부의 마음속엔 그럴수록 끊임없는 의문이 생겨났다.

도대체 신이란 무슨 연유로 우릴 이렇게 멋대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는 것인가.

그렇게 밉다면 애당초 만들지 말았으면 됐을 것을. 어째서 불완전하게 만든 뒤 살아생전 끊임없이 고통 받게 한 다음 그도 모자라 원죄를 뒤집어씌워 죽어서조차 형벌을 받게 하는가.

당신은 인간에 절망했는가.

당신은 인간을 멸망시켜야 하는가.

노아는 제 목숨을 당신께 빌었는가.

그렇다면 그 결정을, 그 운명을, 그 미래를, 이 늙은이는 바꿔 보이겠다. 이 시대에 당신이 원하는 노아는 없다. 모두를 죽여야 한다면, 차라리 노아까지 죽여라. 나를 죽여라. 우린 더 이상 당신의 장난감으로 놀아나지 않겠다.

머지 않는 훗날 죽어 지옥불에 날 담구며 왜 그랬냐고 묻거든, 나는 말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신의 종자이기 이전에,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세계 각지에 있는 럭키키드 컴퍼니의 모든 지부에 알린다. 나는 럭키키드 컴퍼니의 최고경영자이자 소유권자, 노아리스다. 지금부터 각 지부에 모든 기억관리 시스템을 강제 폐기하라. 반복하겠다, 현재 이 시각부터 럭키키드 컴퍼니에 모든 기억관리 시스템을 신속하게 폐기하라.”

“노아리스 경…….”

노아리스는 본사의 네트워크 시스템을 이용, 자신의 명령을 세계 각 지부로 전달하였다. 아직 기억관리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은 지부장들이라면, 회사를 설립했을 때부터 자신과 뜻을 함께 해온 그들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의 목소리는 닿을 것이다.

주여, 창조주여, 전지전능이여, 인간의 힘을 얕보지 마라. 당신의 말마따나 우리 비록 시작은 미약했을지언정 끝은 창대하리라.

“결국 이런 식으로 배신하는구나, 인간!!”

폭풍이 몰아닥치는 기세로 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한 괴물이 사장실의 문을 거칠게 부수며 나타났다. 괴물의 크기는 5미터 정도에 그 몸집의 거대함은 사장실의 3분에 1을 가득 메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왼손에 아무렇게나 들려있는 한 여인, 자신의 동료를 본 순간 애플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하찮은 놈!!”

이성을 잃고 돌진해오는 애플을 향해 괴물은 모기 쫓듯 팔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그 일격조차도 애플을 벽 한구석으로 처박아버리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괴물은 두 사람을 아무렇게나 내팽겨 치고는 노아리스를 향해 다가갔다.

“내 생각대로 인간들은 구원의 여지가 없도다. 역시 선악과를 먹은 그 순간부터 너흰 원죄를 지은 거야.”

“창조주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어째서 선악과를 먹는 하와를 말리지 않았지? 왜 에덴동산에 뱀이 있었나? 기억을 지우려거든 그 때 지웠으면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자신보다 몇 곱절은 더 큰 괴물이 다가옴에도 노아리스는 겁먹은 기색 없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건 신의 영역이지, 너희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너흰 그저 그 권능의 편린조차 되지 않는 나에게도 멸망당하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야. 신의 명령을 어긴 넌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고 죽어서도 지옥불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게 될 것이다. ‘대홍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남아있는 모든 인간들 또한 마찬가지다.”

“맞는 말이야, 그리고 여긴 우리의 영역이지, 신의 영역은 아니야. 그렇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본 괴물이 본 것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코코넛이었다. 의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다리는 격통에 떨리고 있었다. 괴물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장은 파열되고 팔다리는 모두 부러졌을 터, 지금이라도 신의 위대한 권능 앞에 굴복하고 목숨을 구걸해봐라. 혹시 아는가, 목숨만은 살려줄지. 어차피 부질없는 발악이겠지만.”

“놀고 있네. 뻔히 승산이 보이는 싸움을 뭐 하러 피하냐 멍청아? 이러니까 소가 미련하다는 소리나 듣지. 전 세계의 소들에게 사죄하고 죽어.”

“입을 꽤 함부로 놀리는 계집이군. 이제 그 숨통을 끊어주마.”

“괴물, 너도 어쨌든 인간의 몸을 빌려 현세에 강림한 몸, 그렇다면 당연히 기억조절장치가 먹히지 않겠어?”

당황하던 괴물은 코코넛의 자신만만한 말에 그만 히스테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히히힛! 멍청이는 바로 너다, 계집! 인간 치곤 제법이었다만 역시 힘도 그렇고 지능 역시 이 몸에 한참 못 미치는군. 니가 승산이라고 여기는 그 기억조절장치는 이미 노아리스가……”

“아직 안 없앴다네. ‘멍청이’.”

“뭐라고?!”

괴물이 놀라며 외치자 노아리스는 씨익 웃으며 애플이 날아간 벽 쪽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반성인 남성의 평균에 비하면 꽤 야윈 축에 속하는 남자는 온몸을 쑤셔오는 격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우─… 이거 두 번은 못할 짓이네. 코코넛 넌 좀 괜찮냐?”

“괜찮을 리가 없잖아, 멍청멍청아. 그리고 두 번 다시 못할 짓이라는 건 이 쪽이 할말이라고. 세상에, 가녀린 나 같은 숙녀를 저런 전설 속의 괴물과 싸움 붙이다니,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사람이야? 믿을 수 없어….”

코코넛이 투덜거리자 애플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대해선 뭐… 할말이 없군.”

“이… 이… 시건방진 인간 놈들이!”

자신을 깨끗하게 무시하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분노한 괴물이 노성을 지르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그 바위만한 주먹은 애플의 얼굴에 닿기 직전 겨우 멈추었다. 노아리스가 괴물의 기억제어를 시작한 것이다.

괴물은 도저히 이 세상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소처럼 생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날뛰었다.

“으, 으아아아아!! 이, 인간! 인간들!! 지금 날 물리쳐도 제 2, 제 3의 내가 돌아올 것이다!! 노아 역시 계속 태어날 것이고 너희 모두를 쓸어버릴 대홍수 역시 반복될 것이다!”

괴물의 표독스러운 외침에 애플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너 같은 괴물이 다시 나타나도 제 2, 제 3의 우리가 널 물리칠 거다. 노아리스 역시 계속 태어날 것이고 우리 모두를 쓸어버릴 대홍수 역시 막을 것이다. 됐지? 그러니까 이만 너희 세계로 꺼져.”

“으아아아아아악!!”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경련하던 괴물은 이윽고 지진과 같은 울림을 내며 사장실의 고급스러운 카펫 위에 쓰러졌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괴물은 게르니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0


“두 사람 다 정말로 수고 많았네. 방구석에서 핵폭탄을 만들어내는 남자와 그 핵폭탄을 분쇄하는 여자가 만나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얘기군.”

“과찬이십니다, 보스.”

“오버하지 마슈, 아저씨.”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추억의 정의를 무엇이라고 내렸나? 해커 경부터 대답해보지.”

“추억이란, 인간을 지탱하는 원동력입니다. 아무리 잊고 싶다고 해도 그건 현재 자기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불멸의 재산이자 또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보라고도 생각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제 아무리 좋은 추억이라 한들 그것이 남의 것이라면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소유일 뿐이죠. 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억관리시스템, 나아가 기억조절장치는 인류에게 불필요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한 때는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억 역시 저를 구성하는 일부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거구요. 이상입니다.”

“그렇군. 슈팅스타 경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안고 사는 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까 더더욱 기억을 맘대로 지우거나 해서는 안 되지. 그건 이미 자신이 ‘나 과거에 얽매여 살고 있소’ 하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꼴이니까. 무엇보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나약한 ‘척’ 하는 거지, 실은 어마무지하게 강한 존재들이라고.”

“과연 마운틴 고…”

“고? 아저씨, 지금 고라고 했어? 고 다음 뭐, 마운틴 고? 고? 고?!!”

“…저스 프린세스다운 고견이로군. 어쨌든 정말로 수고 많았어. 자네 둘의 공적은 아마 세상에서 곧 잊혀지겠지만… 뭐, 방금 슈팅스타 경의 말대로 과거는 나약한 사람들이나 안고 사는 거 아니겠나. 지나간 공로 따윈 쿨하게 잊을 수 있어야 진정한 대인배지.”

“크~으으으으!! 이 능구렁이──!!”

“최고의 칭찬이군.”

“……하하.”


11


잊고 싶은 추억이 있습니까?

과거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떠올리기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혹은 현재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강한 사람입니다.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축복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Noahless Oblig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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