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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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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06 Sep 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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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xester
협업 참여 동의
“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어.”

라이언 에르밧츠가 우리를 옥상에 모아놓고 맨 처음 꺼낸 말은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라이언은 우리 학년, 아니 학교 전체에서 가장 강하고 용감한 인물 중 하나였다. 지금껏 그와의 대전에서 삼합三合 이상 견딜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힘, 체력, 민첩성, 검술. 그 어느 면에서도 라이언은 일류였으며, 세간에는 그가 조슈아 검술사범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조차 있었다. 그런 그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상대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라이언의 순진한 성격을 이용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공정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해, 그를 적으로 돌릴 만한 이유를 찾기란 어려웠다. 물론 시기하는 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심지어 우리 중에도 있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러한 시기마저 대범하게 받아들여, 오히려 질투하는 상대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렇다면 주변 환경은 어떨까.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어떤 개인이 위기에 빠지는 경우는 왕왕 있는 법이다.(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래, 왕따 얘기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제국 최고의 명문으로서, 존귀하신 국왕폐하조차 에르밧츠 가문을 위한 특별한 수식어를 ‘에르밧츠’ 앞에 반드시 붙일 정도다.

영원한 우정― 그것은 시조 엘카이가 1세가 제국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에르밧츠에게 친히 내린 칭호였다. 이것이 오히려 공연한 시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겠으나, 에르밧츠 가문은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결코 정치에 발을 들이미지 않았다. 덕분에 적은 적었고, 있다손 치더라도 공공연히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 더 이상 라이언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입 아픈 일 같다. 그래도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그가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거다. 실제로 그를 만나보면 알게 될 거다. 그는 그저 선량하고 매력적인 친구고, 우리 모두는 그런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라이언을 위기에 몰아넣는 존재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같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과 함께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라이언은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때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건….”
“그, 그건?”
“여자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는 돌아서서 각자의 할 일을 찾았다. 라이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 되겠지만, 이 경우에는 그를 무시해야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위에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 라이언은 그 이름처럼 숫사자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얼굴에, 황금에서 뽑아낸 듯한 금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모습이라니! 신화 속의 영웅 같은 그의 외모를 보고 있노라면 역시 신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그런 라이언에게 뭇 여성들의 시선이 끌리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우리들이 여자친구를 그에게 소개해 주기를 꺼렸을까. 그랬음에도 라이언은 일 년에 몇 번이나 여성에 관련된 결투신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대부분은 대화로 해결했고, 일부는 우리가 되돌려 보냈으며, 끝내 결투를 고집하는 이들은 라이언이 최소한의 부상을 입혀 돌려보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라이언은 여자문제에 관해서는 결벽이라고 할 만큼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랬던 라이언이 이제 와서 여자문제로 소위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은 우리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거의 배신에 가까운 소행이다. 암, 그렇고말고.

“이건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냐.”
“사소한?”

우리는 모두 똑같이 대답하며 돌아섰다. 그중에서도 아직 애인이 없는 필과, 애인이 라이언에게 반한 나머지 헤어져 버린 바 있는 보리스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라이언은 그 기세에 눌린 듯 고개를 움츠렸다. 

“이건 한 여성, 아니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야.”
“그렇겠지.”

누군가(아마도 필이나 보리스가) 빈정대는 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사실 우리들은 라이언의 심각한 모습에서 이것이 보통 여자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라이언의 수려한 얼굴 위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한 달 전의 일이었어. 난 마법학(II)의 복습을 위해 도서관에 있었는데, 깜빡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 교실로 갔어. 너희도 도서관에서 교실로 통하는 복도의 창문에서 헤르미나 마법학교가 보이는 거 알거야.”
“헤르미나 학교 애랑 눈이 맞았다는 시시한 결말은 아니겠지?”

라힐이 성급한 결론을 내렸지만, 실상 아무도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라힐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결말은 아니지만, 눈이 맞았긴 했지.”

한숨을 내쉬는 라이언을 보면서, 우리는 차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 여자의 인생이 걸려 있을 만큼 중대한 ‘여자문제’라면 생각나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예를 들자면….

“설마 너, 그 여자애를 덮치―”
“쉿.”

필이 라힐의 또 다른 성급한 결론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을 라이언이 저질렀다면, 우리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우리들의 기분을 느낀 듯, 라이언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내가 어떤 여자애와 눈이 맞은 건 맞아. 그리고 그 애는 같은 학교 애들 일곱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지. 그들 중 하나가 그녀의 뺨을 때렸지만, 그 애는 무감정한 얼굴로 날 다시 봤어. 마치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관심 없다는 태도였지. 그것이 다른 애들을 화나게 한 것 같았어. 본격적인 집단 린치가 시작될 거 같아, 나는 창문을 열고 그만둬! 라고 외치려 했지.”

모두들 라이언이라면 당연하지 하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지. 왜냐하면 다음 순간, 그 애들은 새하얗게 얼어붙어 버렸거든.”
“설마 뺨을 맞았다는 여자애가…?”
“그 설마가 맞아.”

꿀꺽. 우리는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학교가 궁정 기사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르미나 역시 궁정 마법사들을 키우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법사가 다른 마법사 일곱 명을 몽땅 얼려버렸다는 것은 한 전사가 다른 전사 열일곱 명을 싸워 이긴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

“그래서,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그러니까….”

그때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어어이, 라이언! 학장님께서 방으로 오래!”

우리는 그 소식을 전하러 온 클라우스를 향해 바늘 끝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에 놀란 클라우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양손바닥을 하늘이 보이게 펼쳐보였다. 하아. 묘한 한숨을 내쉰 라이언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우리를 떠나갔다. 그처럼 우울한 느낌의 라이언을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 * *


라이언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아, 우리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나’를 놓고 숱한 가설을 세우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불이 붙은 논의가 내기로 번져, 그 판돈이 100크라운을 넘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가십거리가 될 만한 일에 대해서라면 놀라운 기민함을 보여주는 클라우스가 운동장 쪽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야, 저거 라이언 아냐?”

우리는 득달같이 창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라이언을 향해 아이스스피어를 던지는 한 여자애를 볼 수 있었다.

“어라, 저 애는?”
“아는 애야?”

필기용 노트보다 여학생 신상명세 노트가 더 많은 체스터가 코를 유리창에 바짝 붙이며 말했다. 

“틀림없어. 헤르미나의 언터처블, 걸어다니는 저주, 에리카 글레이셔야.”
“언터처블?”
“걸어 다니는 저주?”

우리는 다시 기이한 수식어의 소녀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별빛을 모아 빚은 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그 한 올만 손에 넣으면 어떠한 어둠도 몰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반면 성긴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에는 어떤 빛도, 어떤 의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름답기는 했으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입술은 거의 보랏빛으로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무감정한 얼굴과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그녀가 얼음마법을 난사하며 라이언을 공격하는 동안 체스터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 애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타고났대. 그게 보통 저주가 아니라서 아무도 저 애의 저주를 풀 수가 없었지. 최고 신전에서 파견된 신관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을 정도래. 그래서―”
“그래서 우리 마법학교에서 저 애의 저주를 풀기로 했었지요.”

우리는 등 뒤에서 들려온 한 여성의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동시에 발뒤축을 모아 예를 차리며 딱딱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앞에 우리학교 학장님과 헤르미나 마법학교 학장님, 마리아 대신관님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귀하신 국왕 폐하조차 한자리에 모이게 하기 힘들다는 이들을 이 누추한 3학년 교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떤 마법으로도 저 애의 저주를 풀 수 없었어요. 게다가 평민출신이란 이유 때문에 ‘따’를 당하게 될 거라고는….”
“헤르미나에게 심려를 끼치고 말았군요. 죄송해요. 이게 다 제 신심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저랍니다.”

마법학교 학장님과 대신관님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에 반해 자신감 넘치는 얼굴의 우리 학장님, 가리발디 페르잔은 손마디를 꺾으며 말했다.

“두 분, 걱정 마시라니까요. 라이언이라면 분명 저주를 깨뜨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페르잔, 그런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겠어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과 용기, 희망이 있으면 이 세상에 어떠한 악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그건 ‘악’의 경우죠.”
“저주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하하하. 어쨌든 이번에 라이언이 성공하면, 그땐 두 분 우리 학교 애들한테 한 턱 쏘시는 겁니다. 아셨죠?”

대담하달지 쫀쫀하달지, 아무튼 학장님의 배포에 감탄할 여유는 없었다. 우리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초점이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장님이 기획한 ‘그런 방법’이란 대체 뭘까?

“저런. 라이언 군 다치겠어요.”

마리아님의 목소리에, 우리는 예의를 후회 없이 팽개치며 창문으로 돌아섰다. 라이언은 에리카가 만든 빙벽에 등을 기댄 채 헐떡이고 있었다. 천천히 라이언을 향해 다가가는 에리카의 손에서 파르스름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라이언을 죽일 생각인 건가? 대체 왜? 라이언은 어쩔 셈이지? 저런 고위 마법사에게 장비도 없이 달려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오, 라이언. 제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만은…!

“라이언 에르밧츠. 넌 할 수 있어.”

학장님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묘한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중 누구도 그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라이언이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라이언의 숨도 거칠어졌다. 마침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그 두 사람이 가까이 붙었을 때였다.

“나, 난 못해!”

라이언은 돌아서서 빙벽을 맨주먹으로 후려쳤다. 빙벽은 어이없이 부서져나갔고, 라이언은 그 구멍을 통해 도망쳤다. 우리는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한꺼번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는 라이언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이언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 * *

그곳은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동산에 만들어 놓은 은신처였다. 라이언과 우리는 가끔 수업을 빼먹거나, 사감 몰래 술을 마시거나, 그 외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은신처의 덮개는 열려 있었다. 그리고 라이언은 은신처에 누운 채로 저녁놀이 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왔구나.”
“…….”
“아무 말이나 해 봐. 다들 봤을 거 아냐.”
“…굉장한 여자문제네.”

보리스가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여자가 굉장하다는 것인지 문제가 굉장하다는 뜻인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 동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전부터 이렇게 싸워왔어. 싸웠다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당하는 셈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응. 학교 안에서는 괜찮았지만, 학교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귀신같이 나타나 나를 공격해왔지. 하지만 이제 안까지 들어오게 됐네. 너희들한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빨리 결착을 내야할 텐데.”
“결착이라니, 그 여자애랑 싸울 생각이야?”
“그게….”

라이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긴 기다림에 지친 라힐이 말했다.

“학장님은 네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던데, 뭔가 방법이 있는 거지?”
“아아….”

라이언은 아무래도 그 ‘방법’이란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말하지 않게 내버려둘 우리가 아니었다. 

“잔머리 굴리기로는 영웅급인 가리발디 학장님의 방법이니 어련하겠어? 라이언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을 시켰을 것이 뻔해.”
“호오. 라이언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야?”
“라이언도 사람이다.”
“그래도 라이언한테 맡긴 걸 보면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
“얘기할 테니까 그만들 해.”

라이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는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숨기지 않은 채 라이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방법이란 건….”
“그 방법이란 건?”

한참 뜸을 들이던 라이언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왕자님의 키스야.”

…생각해보면 저주를 푸는 방법 중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상식적이며, 또한 효과적이면서도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여친조차 없었던 라이언에게 키스라니… 가 아니라! 세상에 어느 누가 빙마氷魔에게 키스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라이언은 과연 라이언이라고 할지,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그런 행위는 저주를 풀지 못해. 그건 추행이야.”
 
그런데 그 목소리에서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제대로 알기는 힘들었다…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라이언, 그 말은 다시 말해 사랑이 담긴 키스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소리잖아?”
“학장님들과 대신관님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셨어.”
“그럼 그건 너하고 에리카 양이 서로를 좋아하느냐의 문제지?”
“그렇지.”
“그럼 일은 이미 반쯤은 해결됐다고 보는데?”

엥? 우리는 하나같이 기성을 터뜨리며 필을 바라보았다. 라이언마저도 그 말에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에리카 양이 다른 여자애들을 얼려버린 것을 목격한 다음부터 그녀에게 공격받았다고 했지? 그거 말야, 에리카 양이 괜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 아닐까?”
“부끄러워서?”
“왜 인간관계에 서툰 애들이 종종 그러잖아. 좋아하는 상대에게 일부러 짓궂게 구는 거. 에리카 양의 경우에는 도가 좀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네가 좋다는 표현 아닐까?”

필의 말을 억측이라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여자친구는 없어도 남녀관계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해박한 필이다. 시문학, 특히 연인들의 사랑노래에 대한 그의 탁월한 식견이 아마도 그에게 통찰력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작은 동의에 힘을 얻은 듯, 필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절반은 라이언, 네가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겠지.”

우리들은 라이언에 주목했다. 그 시선 하나하나에는 강한 감정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기대감에 가까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감이기도 했다. 라이언이 에리카를 좋아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달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넘기지 않는 성격인 그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윽고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나도 에리카가 좋아.”

…우리는 모두 ‘인간의 심리학적 이해’ 과목에서 F학점을 받은 학생의 심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경악은 곧바로 실망으로 바뀌며 라이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너, 언제부터 그런 타입을 좋아했냐?”
“얌마, 너만 쳐다보고 있는 숱한 여자애들한테 암살당하고 싶어?”
“라이언, 뒷일을 잘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아. 이건 책임감이라던가 동정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네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넌 차근히 돌아볼 필요가 있어.”

우리는 입을 모아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라이언은 진지한 얼굴로 우리의 입을 다물게 했다.

“생각해 봐. 에리카는 강한데다가 아름다워. 필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단지 서툰 것뿐이라고.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키스하지 못한 것은 나만큼이나 그녀가 날 좋아해줄까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확신이 섰어. 나는 시도해 보겠어. 아까 너희들이 말했듯, 이건 책임감이나 동정심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말을 마친 라이언은 어느덧 예전의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 있었다. 벌떡 일어난 라이언은 머리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쫙 펴고, 등을 곧게 세우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흡사 전쟁에 나서는 장수와 같은 모습에 우리는 모종의 감동마저 느꼈다.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나던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누군가가 허탈감에 젖은 목소리와 함께 말했다.

“‘연애문제’에 돈 건 사람이 있었나?”

그날, 우리 중 누군가는 많은 돈을 벌 뻔했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돈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희노애락을 바쁘게 담았던 하루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어.”

다음날, 라이언 에르밧츠가 우리를 옥상에 모아놓고 맨 처음 꺼낸 말은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설마, 차인 거야?”
“네가 싫대? 그 아가씨, 눈도 높으시구만.”
“아냐, 이번엔 필이 틀린 거야. 그 얼음마녀가 평범한 여자애의 감성을 가졌을 리 없다고.”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

라이언의 음울한 목소리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도 그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라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말인데… 키스는 했어?”
“응.”

라이언의 얼굴이 아주 잠깐 붉어졌다.

“그래서 저주는 풀렸어. 에리카를 감싸고 있던 냉혹한 기운이 사라지면서, 그녀는 저주가 걸리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지. 머리카락은 짙은 검은 색으로 변해갔고, 흐릿하기만 한 두 눈에 초점이 어려졌어. 싸늘한 냉기가 그녀의 품에서 떠나가면서, 핏기 없던 피부도 짙은 갈색으로 변해갔지.”
“잠깐, 저주가 풀렸다면―”
“문제는 그 다음이야.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어. 그녀의 별명이 왜 언터처블인지, 왜 걸어 다니는 저주인지. 사실 그녀, 에리카는….”

그때 돌풍이 밀어닥쳤다. 사나운 바람이 후려치는 통에 우리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의지해 날려가지 않는 것이 전부였다. 동시에 우리는 시꺼먼 어둠이 머리 위에서부터 공간을 제압해나가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전사의 직감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직감이었다.

잠시 후 돌풍이 잦아들어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우리의 눈앞에는, 맙소사, 드래곤이 있었던 것이다. 어둠을 품은 눈동자를 희번득거리며, 황폐를 상징하는 갈색 비늘을 번들거리며, 그 강대한 존재는 죽음과 파괴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가릉가르릉

지옥에서부터 울려오는 듯한 소리를 낸 드래곤은 긴 목을 뻗어 우리를 쓱 둘러보았다. 그 머리가 우리 앞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화이어브레스의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머리는 마침내 라이언 앞에서 멈추었다. 라이언은 체념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에리카한테는 걸려 있던 저주가 한두 개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말인데, 누구 나 대신 에리카한테 키스해줄 사람?”

사실 그 말을 끝까지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 드넓은 운동장을 미친 듯이 질주해 학교를 빠져나왔고,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학교에서부터 6펜큐빗은 족히 떨어진 베른부르크에 와 있었다. 놀라 흩어졌던 정신을 하나 둘 주워 챙긴 우리는, 안도와 애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두 손을 모아 한마음 한뜻으로 기원했다. 

 ‘신이여, 라이언을 위기에서 구하소서’라고. <끝>



//2001년 썼던 작품에서 먼지 조금 털었습니다. 신작 단편을 언제 쓰기는 해야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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