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Double Mind, World Con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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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참여 동의
 “일어나, 오빠.”

적막을 깨는 목소리가 있다. 아마 여동생이겠지. 반쯤 열린 눈꺼풀 틈으로 밝게 물든 세상이 보였다. 오늘은, 월요일이군. 여동생이 깨우는 걸 보니 7시는 넘었겠지. 하지만 몸이 의식에 따라주지 않는다. 잠이 부족한가 보다. 잠깐만 더 누워 있어야지.

“지금 안 일어나면 학교 늦는단 말야.”
“응.”

무언가 대답을 원하는 듯해서 그렇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5분만 더 있다가 깨워달라고. 딱 5분만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날 테니까.

“이러다 나까지 늦는단 말야. 빨랑 안 일어나?”
“응.”

일어날게. 일어나. 1분만 더 있다가 일어날 테니 잠깐만 조용히 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력을 다해 눈을 감고 있는데,

“이래도 계속 누워있을 수 있나 보자.”

뭔가 응징이라도 있으려니 내심 조마조마 했는데, 어째선지 여동생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듯이. 그리고 머잖아 그 이유를 알았다. 내 바로 옆에서 터져 나온 커다란 괴음이 심장까지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살결을 울리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뜨인다.

“악!”

전기충격을 받은 개구리 뒷다리처럼 팔짝 뛰어올라 바닥에 곤두섰다. 웅장한 베이스에 잔잔한 피아노,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탄 바이올린.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클래식 연주가 나와 한 이불을 덮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제 누울 때까지만 해도 컴퓨터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는데? 설마 내가 잠든 사이 이런 짓을 해놓은 건가?

“너어~”
“나까지 지각시키려던 오빠가 잘못한 거니까~”

혀를 내밀며 얄밉게 웃는 여동생을 보니 왠지 기운이 빠진다. 부슬부슬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덕분에 지각은 면하게 됐다만, 오빠로서 한숨이 나올 법 하지.

“못 말려 정말.”


“가자, 오빠.”
“다녀오겠습니다.”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제법 따갑다. 뛰어가면 금세 땀범벅이 돼버리겠지. 이런 날이라면 녹아버리는 사람도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오빠, 빨리이.”

이 녀석은 어찌나 마음이 조급한지 빨리 자전거를 내오라 야단이다. 5분쯤 지각해도 상관없잖아? 그 정도는 선생님도 용서해줄 거라고. 왜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할까?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을 때까지 끈질기게 재촉당해야만 했다.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발길질이 경쾌하질 못하다. 바지는 땀에 젖어 다리에 착 달라붙고, 등줄기를 타고 흐른 땀 덕분에 축축하기까지 하다. 커다랗게 방울진 땀방울들이 턱끝까지 흘러내린다. 8월의 무더위란 이렇게나 무시무시한 것이다. 가로수 그림자에 가려진 인도를 보니,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내가 20분만 더 일찍 일어났다면 그럴 여유가 있었겠지. 아침잠이 웬수지, 아침잠이 웬수야.

“오빠, 오늘도 학교 끝나고 약속 없어?”

등교 시간에 딱 맞을 정도로만 적당히 페달을 밟던 중 그런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일 뿐이다.

“이 더운 날에 땀 뻘뻘 흘리며 쏘다니느니, 누워서 TV나 보련다.”
“그래…”

여동생의 목소리가 움츠러든다. 그 뒤로 말이 없는 게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그까짓 일을 신경 쓰다니, 귀여운 구석도 있다. 그렇다면 나도 가끔은 오빠 노릇을 해야겠지?

“아쉽냐? 나 없을 때 혼자 집에서 요리라도 해보려고?”
“뭐?”
“아서라. 집을 태워먹으면 당장 잘 곳이 없거든?”
“내가 오빠인줄 알아?!”

빽빽거리는 여동생을 반 무시 반 달래가면서 발길질을 하고 있자니, 어느덧 검은 칠이 다 벗겨진 허름한 학교 교문이 보였다. 최대한 땀을 안 흘리려고 노력했음에도 내 교복 셔츠는 땀에 젖어 질척해져 있었다. 이마에 맺힘 땀방울을 닦아내며 하늘 저편을 노려본다. 금세 보복하듯 눈을 찌르는 햇빛. 따가운 눈물을 흘리며 보이지 않는 적에게 보복을 맹세한다.

“태양은 적이다. 언젠가 없애버릴 거야.”
“그럼 오빠의 아군은 바람이야? 입김을 불수록 난 옷을 더 껴입을 거라고?”
“네 옷에는 관심도 없네요. 그걸 입었다간 동네 주민들한테 신고 당할걸?”

그런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으며 쓸데없이 넓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고작해야 운동부 녀석들이나 쓰기 마련인 공간에 학교 건물이나 증축하면 좋을 것을. 오늘도 학교는 아침부터 인산인해로구나. 인구밀집도가 높은 지역에 산다는 건 그 나름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 이 비좁은 건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니. 이러다가 산소농도 저하로 기절하는 건 아니겠지?

“아, 마백이 오빠다.”

교실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물들인 게 분명한 갈색 머리가 강압적으로 시야에 꽂힌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180 가까운 키에 머리엔 뭔가를 치덕치덕 발라 꼿꼿이 세웠다. 거기다 교복까지 헐렁하게 입어서는 까만 뿔테안경만 아니면 날라리로 오해받기 딱 좋은 차림새다.

“오, 화살이, 화지! 좋은 아침!

거기에 이 쓸데없을 정도로 높은 텐션까지. 좋게 말하면 분위기 메이커, 나쁘게 말하면 시끄러운 주둥이. 언제나 싱글싱글, 친구들의 곁에 기어오는 도마백이었다. 참고로 모토는 재밌으면 장땡…이 아닐까 싶군.

“굿모닝이다, 도마백.”
“마백이 오빠, 안녕.”

왜 마백이가 여동생한테 오빠가 되냐면, 내 친구니까 오빠라고 부르는 게 자기도 편하단다.

“근데 화살아, 어제 8시에 그거 봤냐?”

인사를 받은 마백이 오빠는 자리에 가방을 거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이왕이면 니 자리에 앉아라. 바로 내 앞자리잖냐.

“그거?”
“있잖냐. 어제 55번에서 한 그거.”
“아, 그거. 그냥 채널 돌렸어. 수영복 심사 따윌 보겠냐?”

나와 마백이가 잡답을 늘어놓으며 자리에 걸터앉는 사이, 일과의 시작을 울리는 음울한 종이 울린다. 사람의 마음을 우울함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이 노래에 찬사를 보낸다. 이토록 경쾌한 노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의 기분을 다운시키는지. 좋아, 내 장례식엔 이 노래를 틀어달라고 유언장에 써놓자.

“오빠, 선생님 오셨어.”

잠깐 잡담을 나누는 사이 교복을 입은 일련의 무리들이 의자를 빼곡히 채웠고, 그 앞엔 그들의 담당자가 서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사고치지 말라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별 쓸데없는 설교를 하고 있군.


“오빠, 쟤. 여길 보고 있어.”

1교시 담당인 국어 선생님의 말씀을 걸걸한 수업을 베고 잠을 청하려던 중, 작게 속삭이는 여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애교스럽게 부풀린 곱슬머리의 여자아이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10초가 넘도록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저 사랑스러운 아이가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상은… 잠깐, 나? 날 보고 있는 거야?

“이보셔, 오라버니. 지금 무슨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마악 좋은 망상에 빠지려는 찰나, 여동생이 한심하다는 듯 일침을 놓는 바람에 실패했다. 핑크빛 미래를 망상해볼 수 있었는데.

“하기사, 춘희가 예쁘긴 하지. 우리 오빠는 예쁜 여자애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말야.”

윽, 정곡을 찔렸다. 송춘희, 짙은 속눈썹과 오뚝한 코가 매력적인 여자애로 우리 반에선 꽤 인기가 있다. 참고로 남자애들끼리 정한 인기투표 순위는 무려 3위. 덧붙여서 사교성도 좋은 편인 것 같다. 쉬는 시간이면 주변 자리로 모여든 여자애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니.

“그래도 오빠, 점수 좀 땄을 거야. 지난번에 책상서랍에 개구리 넣어둔 앨 때려줬잖아.”
“그, 그럴까?”

그건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교실 한쪽에서 별안간 울음이 터졌고, 그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져나갔다. 춘희의 책상은 앞으로 넘어져 있었고, 바닥엔 떨어진 책과 노트들, 그리고 적갈색의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톡톡 뛰어다니는 엄지손가락만 한 그 개구리를 보고, 춘희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지켜보고 있자니 교실 뒤편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춘희는 워낙 화사해서 그걸 상쇄해주는 갈색이 잘 어울린다니까.”

건들거리며 비웃던 녀석은 소위 잘나간다는 양아치인데, 그 일이 있기 며칠 전부터 송춘희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나 있었다. 전말은 명확했다. 차인 화풀이로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다. 자기가 일을 벌여놓고 비웃는 꼴이 맘에 안 들어 냅다 달려들어 면상을 갈겼었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거지만, 나도 몇 대 때려주긴 했고. 명분은 이쪽에 있으니 적어도 체면치례는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전에 개구리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개구리 장식 머리핀을 생일 선물로 줬지? 그것도 우중충한 갈색 엄~청 이상한 디자인.”
“일부러 엄~청을 강조하지 말라고.”

딴에는 귀여운 머리핀으로 고른다고 한 건데 설마 개구리를 그토록 싫어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살짝 놀란 기색만 내비치곤 아무렇지 않게 받아줬지. 얼굴만 고운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곱구나.

“아, 방금 웃었다.”

여동생이 놀리고 있는 게 뻔할 뻔자임에도 나도 모르게 저쪽을 쳐다보고 마는 남자의 슬픈 심리였다. 그러니까 그만 좀 놀려먹으라고.


방과 후의 교실은 조용하다. 아니, 조용할 것이다. 사실은 청소할 때를 빼곤 한 번도 교실에 남아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지금도 종례가 끝난 지 1분도 채 안 지났는데 벌써 학교 운동장을 걷고 있잖은가. 귀갓길의 나는 칼 루이스에게도 질 것 같지 않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여동생은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 게 좋은지, 오늘도 어딘가에 들렀다 가잔다. 오는 길에 빵집에 들르자는데, 이거 혹시 빵이 주목적인 거 아냐?

“아이 참, 맨날 밥만 먹고 살 순 없잖아.”
“그래, 그래. 대신 하나씩만 살 거니까. 그리고 1000원 상한이다?”
“쳇.”

이 발칙한 여동생은 바게트 빵이라도 살 생각이었던 건가. 아쉬운 듯 꿍얼거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항상 가던 빵집으로 진로를 튼다. 나도 많이 먹게 해주곤 싶지만 그랬다간 저녁밥을 안 먹을 게 눈에 선하니까.

“오빠, 오늘은 그로운 베이커리 말고 클라운 베이커리에 갈래?”
“왜? 거기가 더 싸?”
“모르는구나, 오빠. 크림은 그로운이 나은데 빵맛은 클라운이 더 나아.”

보통은 그런 거 모른다고. 모르는 게 당연한 거지. 그래도 물어보면 또 귀 아프게 아무래도 좋을 설명을 들어야 할까 싶어 그러자 했다.

“알았어, 거기로 가자. 그래도 하나만 사줄 거다?”
“으, 치사해.”

여동생의 원망을 받으며 골목 모퉁이를 돌던 중, 무언가 바닥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의 광경이 멈춰버렸다. 내 키만한 담장이 저 밑에 있다. 발밑이 허전하다. 떠있어? 천천히, 세상이 높아졌다. 담장이 눈높이까지 다가오고, 담장의 중간, 이윽고 몸이 바닥에 들러붙는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따끔거린다. 긁히고 눌린 느낌이 여기저기에서 전해온다. 아프진 않다. 아픈 줄 모른다. 갑작스레 아픔이 찾아온다. 쓸리고 부딪치고 찢어진 상처에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 제어 안 되는 입술이 떨린다. 바닥에 흐르는 것은 내 피? 상처, 상처를 보고 싶다. 하지만 목이 돌아가지 않아.

그런데도 세상은 나 없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저 사람들을 보면서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나와 다르니까. 나와는 다른 처지에 있는 멀쩡한 사람들. TV 속의 사건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다. 아우성치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고통도 의식도 멀어져간다.


“일어나, 오빠.”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싸구려 스피커로 트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갈라진 엉성한 목소리. 하지만 친숙한 목소리.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와 함께 얼굴에 닿은 매끄럽고 차가운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뜬다.

“정신이 들어?”

그 손의 주인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어깨 앞으로 넘어온 양쪽 머리카락은 리본으로 감겨 일자로 정돈되어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살짝 솟은 콧날,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매력적이다. 척 보기에도 미인이다.

“오빠가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오빠? 그러고 보니 여동생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을 모르겠다. 저 상냥한 눈매 속에 깃든 눈동자, 빛을 반사하는 저 갈색 눈동자가 어쩐지 거부감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 이질적이란 기분이 든다. 그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그녀의 몸 전체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다. 내 팔뚝에 닿은 손가락은 지나치게 매끄럽다. 저 피부의 광택은 지나치게 번들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은 시간을 무시하듯, 멎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눈앞의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이내 체념하듯이 살짝 웃음 짓고는 허리를 굽혀 침대 위의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번들거리는 갈색 눈동자로 날 응시하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2020년에 온 걸 환영해. 난 오빠의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안드로이드야.”


내 여동생은 사람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 결코 인공 가죽으로 전신을 뒤덮은 기계덩어리가 아니었다. 나와 한 배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동생.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딜 가나 우리 둘은 함께 붙어 다녔다. 하굣길에 사고를 당한 2005년의 그날까지도.

그런 기억들이 가짜라고 눈앞의 대상은 내게 말했다. 기쁨, 슬픔, 분노, 고통 그 모든 게 가짜. 그것들은 나와 여동생의 자아를 분리하기 위해 꾸며낸 설정이며, 과거의 일을 각색한 것이다. 내 눈앞에 서있는 이 존재야말로 내 여동생, 실존하지 않았던 내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이다. 적어도 그 기억만큼은 여동생의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여동생은 내가 그 몸을 만든 장본인이기에 알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지금은 자아확립 시술의 영향으로 기억이 흐려져 있을 뿐, 시간이 지나면 차차 떠오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물어보는 말엔 막힘없이 대답해주었다.

“너는 로봇인가? 어떻게 여동생의 기억을 이식했지?”
“완전한 기계가 아니야. 난 인간의 뇌를 가졌어. 오빠에게 복제 받은 뇌와 기억, 그리고 내 자아를 품은 조그만 뇌 덩어리, 그것이 나를 나로 있게 만들어주는 거야.”

그녀는 나의 이란성 쌍둥이이자 기생 쌍둥이였다. 내 몸속에 들어온 후 발달을 멈추었다. 의식을 관장하는 뇌의 한 영역만을 제외하고는. 내 가슴 쪽에 자리 잡은 그 부분이 나의 신경계와 연결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덕분에 나와 기억을 공유하며 독립된 의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여동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동생의 말은 곧 내 입을 통해 발음되었다.

“우리 둘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혼동을 막기 위해 자아확립 시술을 한 것은 알겠어. 그런데 왜 하필 그 사고 시점까지였지?”
“그건, 그 사고까지가 우리 둘의 자아가 공존했던 마지막 순간이었으니까. 나에겐 그 후로의 기억이 없어. 그 부분은 오빠의 기억으로 보충했어.”

기억난다. 당시의 사고로 나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등 뒤로 찔러 뚫은 나뭇가지가 간신히 심장을 빗겨나갔지. 불운하게도 여동생의 뇌 조각과 내 신경계를 잇는 신경이 끊어져 그 이후 여동생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이 목소리를 재현하느라 고생했어. 기억 속에만 있던 목소리이지 실제로 들린 목소리가 아니니까.”
“네가 한 것도 아니면서 뭘. 그걸 재현한 사람은 나라고?”
“어머, 또 헷갈렸네. 우리 둘 다 기억을 온전히 되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여동생은 어깨를 으쓱인다. 미세한 기계음조차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이래서야 얼핏 봐선 사람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이다. 이제야 여동생도 평범한 생활을 누리게 된 거야. 하지만 애인이나 친구 같은 가까운 사이까진 불가능하겠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무언가 이질적이란 느낌을 받게 될 테니까. 하다못해 친구만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학창시절에 얼마나 부러움을 느꼈던가.

“오빠, 울고 있어?”
“어어?”

여동생의 손가락이 내 눈가를 훔친다.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고, 이내 물기에 젖어서 멀어져간다. 내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 왜 울고 있는 거지? 여동생의 기억과 내 기억이 혼동되고 있는 탓인가?

“괜찮아?”

여동생이 무감정한 눈으로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눈에 감정이 보이지 않으니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행동과 몸짓까지 보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은 걱정해주고 있다는 걸 알 것 같다. 눈에 맺힌 물기를 닦아낸다.

“미안해, 별 거 아니니까.”
“그래, 휴식이 필요할 거야. 난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쉬고 있어.”

여동생은 문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그제야 내가 있는 이 공간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매트리스와 옷장, 작은 책꽂이 정도만 있는 소박한 방, 그 한 구석에 뚫린 창문 너머로 창창한 햇살이 비치는 걸 보아 점심 무렵이 아닐까 싶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말이지. 그야 여동생과 나의 자아확립 시술을 시행한 이후 일주일이나 기절해 아무 것도 못 먹었으니까.

거실로 나가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이전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이 집을 구할 때의 기억, 거실에 널린 도구들을 제작할 때의 기억, 그리고 밤에 몰래 마당에 묻은 실험용 동물들의 사체. 비좁은 철제 사육장 안에서 좋아라 꼬리치며 반기는 두 마리 강아지들은 그 성공 사례에 불과하다. 손가락을 튕기니 일사불란하게 상체를 세우고 앉아서는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연습을 시킨 건 왼쪽의 점박이 강아지뿐. 오른쪽의 검둥이까지 똑같은 동작을 따라하는 이유는 점박이의 기억을 복제 받은 탓이다.

“검둥이, 엎드려.”

이 명령에 점박이가 반응하지 않는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철장의 문을 열고 두 마리 모두에게 포상으로 개 껌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필요한 만큼은 길들였지만, 그 이상은 정을 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은 그 길로 집 밖으로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상관없다. 용무는 끝났으니. 원래 개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허기를 달랠 겸 부엌 한편에 놓인 작은 냉장고를 뒤졌다. 밑반찬 하나 없이 캔 맥주와 안주거리만 즐비한 지경을 보고, 레토르트 식품이나 데워먹는 게 편하다고 말하던 과거를 반성했다. 아쉬운 대로 안주로 사둔 땅콩이나 씹으며 찬찬히 집안을 둘러본다. 내가 살았던 집이긴 해도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좁은 방 두 개와 안뜰로 이어진 작은 거실, 그리고 주방 겸 식당. 간신히 2LDK를 충족하는 작은 집이다. 나 혼자 살기엔 충분했지만 식구가 둘로 늘은 지금은 좀 비좁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전엔 방 하나를 침실로 쓰고 다른 하나를 작업실로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여동생과 한 침대에서 잘 수도 없으니, 작업실을 비워야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작업실이었던 방의 문을 열었더니, 하느님 맙소사. 누가 봐도 여자애가 쓴다고 말할 방으로 변해 있었다. 벽지도 같은 무늬고 방 구조도 비슷한데 그저 들어찬 물건들만으로 이런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인테리어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작업실의 물건들은 어디로 치웠지?’

나와 기억을 공유했던 여동생이라면 그 장비들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을 터. 버렸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박아두긴 했단 말인데, 작업실의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다면 내가 못 알아봤을 리 없다. 온 집안을 샅샅이 돌아다니다 마지막에 들어온 것이 여동생의 방인즉슨, 집안이 아닌 다른 곳에 치웠단 얘기다. 그럼 혹시 창고에?

이 집 지하에는 창고가 하나 있다. 1년 전, 집을 산 직후, 가장 후회했던 것이 바로 지하실 때문이었다. 원래는 끽해야 방 하나 넓이 쯤 될 줄 알고 작업실로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넓어 집 전체 평수에 맞먹을 정도였다. 그런데다 막상 1층의 방에 장비들을 넣고 보니 이 정도면 어떻게든 쓸 수 있겠다 싶어, 필요 없어진 지하실은 창고로 썼던 것이다.

거실 쪽 안뜰로 나가 집 뒤로 돌아가면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안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그 지하실 문의 잠금장치가 열려 있었다. 비밀번호를 아는 것은 우리 둘 뿐이니, 역시 여동생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지하실 문을 여니 계단 안쪽이 흰 전등 불빛에 물들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올 땐 불을 끄고 나왔어야지. 문도 안 잠그고. 여동생 역시 나처럼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걸지 모른다. 1.5m 가량 되는 높이를 터벅터벅 내려가니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잘 정돈된 지하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가슴팍에서 여동생의 뇌를 적출할 때 썼던 도구들이며, 여동생의 뇌에 양분을 공급하며 담아뒀던 시험관, 체내의 혈관이며 신경망 연결을 도왔던 나노머신 생성기, 나노머신의 행동패턴을 짜는데 쓴 컴퓨터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내가 만약 지하실을 작업실로 꾸몄더라면 딱 이렇게 배치되어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동선이 효율적이다.

그것들은 그렇다 치고 기다란 철제 책상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옮긴 걸까? 여동생의 힘으로 그것을 옮길 수, 가만 있자… 옮길 수 있구나. 여동생의 몸은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 힘은 성인 남성 평균의 5배 정돈 되지 않을까? 기본 골자는 상용으로 파는 로봇의 것을 이용했다고 하나, 모터 소리가 들리지 않게 튜닝하기. 기운 센 천하장사 여동생이 옮겨준 책상을 슬쩍 들어본다. 어이쿠, 한쪽만 들고 있는데도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 책상 재질이 대체 뭐야? 잡았던 손을 놓으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책상이 덜컹 소리를 낸다. 덜컹? 서랍 안의 무언가가 철판에 부딪치는 소리. 내가 뭔가 넣어 두었던가? 의아해하며 서랍 안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선 작은 수첩이 하나 나왔다. 서랍 안에 고이 모셔뒀던지 가죽 표면이 새것처럼 반들거린다. 이건 뭐였을까? 여동생의 것이거나, 아직 내가 떠올리지 못할 뿐이겠지. 열어보면 기억날지도 모른다. 펼쳐본 수첩 사이사이엔 오려진 신문조각들이 붙여져 있었다. 큰 조각은 반으로 잘라 양쪽에, 작은 조각은 한쪽에, 구김 하나 없이 정성스레 스크랩된 기사들.

-20대 여성, 아파트 옥상에서 시체로 발견
-교살당한 20대 남성의 사체, 2주일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
-술자리를 마지막으로 연락 두절된 20대 남성, 변사체로 발견

그것들은 하나같이 살인사건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누가 이걸 스크랩 했을까? 나? 아니면 여동생? 그리고 왜 이런 것을 모았을까? 관심거리? 단순한 관심거리로 살인기사만을 스크랩하는 수고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발소리가 아니었다면 한참간이나 더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밀폐공간에 울리는 발소리엔 여동생의 목소리도 실려 있었다.

“오빠, 거깄어?”

계단 쪽에서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수첩을 덮어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당황했던 것이다. 그래, 나중에 다시 살펴보자. 돌아보니 여동생이 뒷짐 진 채 지하실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난 급히 대꾸했다.

“어, 잠깐. 작업실에 뒀던 장비들을 찾아보느라고.”
“그랬구나. 저녁 차려놨는데 어디 갔나 싶어서.”

여동생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눈썹도 보기 좋게 대칭형으로 휜 것이 웃음 짓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보기 좋은 웃음을 지어도 여동생의 얼굴에선 인간미를 느낄 수 없다. 그 부자연스러운 웃음이 내 작품임을 알기에, 그것이 여동생의 최선임을 알기에, 말없이 웃음으로 답했다.

“올라가서 저녁 먹자. 오빠 좋아하던 부대찌개 해놨어. 생선구이랑 계란말이, 갈비찜, 잡채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그거 다 먹을 순 있겠어?”

방금 들은 메뉴만 해도 5개다. 자기가 생각해도 과했다 싶었는지 한쪽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고 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해주고 있었다니 기특하기만 하다.

“그치만 일주일 만에 드디어 같이 밥을 먹게 됐는걸.”

여동생은 나보다 일주일 앞서 깨어났다는 듯하다. 다시 말해 그 일주일 동안 여동생은 혼자였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공식적으로 태어난 적도 없고, 의식마저도 과거에 죽어버린 여동생이 기댈 사람은 달리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내게 매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미안해, 오늘 반찬은 다 먹어줄 테니까. 내일부턴 조금씩만 만드는 거야. 알았지?”
“응.”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여동생을 달래주었다. 여동생의 식사란 단순히 몸 곳곳에 장착된 배터리들을 하나씩 갈아 끼우는 것일 뿐이지만,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안정되는 거겠지.

“화지야, 근데 그 칼은 왜 가져온 거야?”

여동생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다 문득, 뒷짐 진 여동생의 왼손에 들린 과도를 보았다. 시퍼런 날이 번득이는 게 날이 섰다. 여동생은 손에 든 물건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몸을 움찔 떨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게 왜 여기 있지? 급하게 찾으러 가느라 놓고 오는 걸 깜빡했나봐.”
“덜렁거리는 성격은 15년이 지나도 안 고쳐지는구나. 하하하.”

오빠에게 있어 여동생이란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르던 간에 변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삐져서 팔을 꼬집곤 말없이 앞서 걷는 모습조차도 예전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일주일 만에 먹는 그날 저녁은 15년 만에 재회한 여동생과 함께여서 그런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려고 했으나 잽싸게 뒤따라온 여동생에게 주방용 장갑과 앞치마를 빼앗겼다. 난 의식이 든 당일이니 쉬어야 하며, 자신은 이 몸에 익숙해져야 하니 당분간 몸 쓰는 일은 자기가 하겠단다. 그야 여동생의 몸은 튼튼한데다 나와 비교도 안 되게 힘이 세긴 하다만, 오빠의 입장에서 여동생에게만 모든 걸 맡기는 것도 왠지 찜찜하다. 내일부턴 당번제로 나눠서 하자고 말해봐야겠군.


철렁하고 욕조 밖으로 물 덩이가 밀려난다. 일주일 만에 쓰는 욕조인데 전혀 낯설지 않다. 역시 기억은 몸으로 되찾는 게 빠르단 걸까? 뜨거운 물속에 몸을 완전히 담근다. 정신은 몰라도 몸은 늘어져 있었음을 그때서야 깨닫는다.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덜 잠긴 상반신에 물을 끼얹다 가슴에 난 흉터에 눈이 간다. 직경 3cm 가량의 봉합 자국이 나 있다. 그 사고 덕분에 여동생과 생이별을 했었지. 하지만 이런 흉터 따위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여동생까지 만난 데다, 나 역시 여동생의 정신에 간섭받던 부작용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보다 기쁜 날이 있을까? 아직 우리 둘 다 기억이 완전히 되돌아오진 않았지만, 앞으로 점점 좋아질 거야. 그리고 어떻게든 여동생이 평범한 일상을 가질 수 있게 노력해보자.

-덜컥

그때 들린 쇳소리는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삐걱하고 손잡이가 돌아간다. 그리고 천천히, 문이 열린다. 틈새가 좁아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바짝 붙으면 간신히 바깥을 내다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사이로,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씻는 거 도와줄까?”
“뭐?”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화장실 문이 활짝 개방된다. 그 앞에 있었던 건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무릎을 뒤로 접어 꿇어앉은 여동생. 인간과 다른 관절구조 덕분에 가능한 기예다. 보는 입장에선 겁나는 자세지만.

“나, 이렇게 유연하니까 몸 구석구석까지 씻어줄 수 있어.”
“됐어, 됐으니까 문 닫아!”

때밀이 수건까지 들어 보이는 걸 마다하고 손을 내젓는다. 여동생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젠장, 그저 골려먹을 속셈이구만. 욕조에 들어앉아 한숨 쉬는 내게 쪽하고 손가락으로 키스를 날리며 문을 닫는다. 저 장난꾸러기.

“아참, 오빠.”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여동생의 손이 멈추고, 가늘게 열린 틈새 사이로 두 눈동자를 내비친다.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리는 그 눈이, 내 눈과 마주친다. 인간미가 가장 결여된 그 부분으로 찬찬히 날 들여다본다.

“혹시 수첩 하나 못 봤어?”

수첩이라면 지하실에서 주운 그것밖에 모른다. 애초에 난 수첩을 쓰지 않는다. 여동생이 묻는 수첩이라면 그거겠지. 그리고 그 수첩은 이 화장실 안에 있다. 몸을 씻기 전에 입고 들어온 바지 주머니 안에 있다.

-20대 여성, 아파트 옥상에서 시체로 발견

여동생의 수첩? 그럴 리 없다. 역시 이 수첩이 여동생의 것인지 어떤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아니, 아닐 것이다. 아마 내가, 어떤 이유에서 모아둔 거겠지. 난, 거짓말을 해버렸다.

“아니, 가계부라도 쓴 거야?”
“응, 우리 생활비가 넉넉한 것도 아니니 절약해야지. 혹시 찾으면 말해줘.”

여동생은 배시시 웃으며 문을 닫았다. 다시 화장실 안이 조용해진다. 마치 혼자였을 때처럼. 욕조 속에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잠깐, 저 녀석 잠금장치는 어떻게 연 거야? 나노머신?”

이그, 그거 수량 한번 충전하는데 드는 시간이 얼만데. 현 시점에 내가 가질 수 있는 나노머신은 자가 복제, 자가 수리 기능이 믿음직하지 못해 한정된 수명의 것을 재활용해 쓰는 식이다. 그런데 제대로 활용하려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수백만 단위의 개체수가 필요하니, 초당 수백 개를 재생산한다 해도 충전에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그걸 이딴 일에 써먹은 여동생에겐 따끔한 벌을 줘야겠지. 이게 전기세가 얼마나 드는지 알면서.


씻고 나오니 내 이부자리가 정돈되어 있었다. 여동생의 업적이다. 이 몸은 자주 씻을 필요가 없다며 내가 씻는 사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치워 놓았다. 그래도 피곤하긴 했는지 벌써 자기 방 이부자리에 엎어져 있었다. 코고는 소리 없이 그저 숨구멍으로 숨만 들이쉬고 내쉰다.  한 소리 해줄 수도 없군. 슬쩍 건드려 봐도 반응이 없기에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껐다. 그리고 내 방에 돌아와 지하실에서 주운 수첩을 펼쳤다.

-20대 여성, 아파트 옥상에서 시체로 발견
-교살당한 20대 남성의 사체, 2주일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
-술자리를 마지막으로 연락 두절된 20대 남성, 변사체로 발견

세 건의 살인사건 관련 기사. 첫 번째 것이 두 쪽짜리고, 나머지 둘이 각각 한 쪽씩이다. 그중 첫 번째 것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왜 이런 기사들을 모았을지 기억을 떠올려보자고.

-2010년 3월 12일 XX동 OO아파트에 살던 22살 여성 S모 양이 회사에서 퇴근한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가족 및 친지들의 수소문에도 행방이 묘연하던 그녀는 일주일 뒤, 자신이 살던 아파트 옥상에서 발견되었다. 19일 오후, 아파트 복도에서 놀던 아이들이 옥상 문이 잠겨 있지 않음을 알고 올라갔다가 처참하게 훼손된 사체를 발견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의 신고로 일주일 만에 발견된 S모 양의 사체는 말로 다 못할 만큼 끔찍했다. 날카로운 흉기에 잘린 두 손이 입에 물려 있었고, 복부가 갈라져 적출된 내장은 팔다리에 감겨 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사체 내부엔 혈액 대신 보존액이 들어 있었고, 추출된 혈액은 근처에 버려진 페트병 속에 담겨져 있었다. 전문가들은 철저히 훼손된 사체의 상태를 보아 범인은 평소 피해자에게 원한을 가진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XX동이면 가깝지도 않다. 여기서 시외버스를 타고도 1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다. 아무리 봐도 관심가질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손이 입에 물려 있어? 두 손을 한 입에 물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입을 찢어놓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아니지, 손가락을 입에 물린다면 가능하겠군. 그건 그렇고, 범인은 과연 피해자에게 원한을 가졌던 걸까? 정말 원한이 있다면 시체를 꾸며놨을 리 없다. 특별한 관심, 비뚤어진 애정이 있어야만 그렇게 신경 써서 장기를 보존하고, 근육을 이완시킨 후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근육을 경질시켜, 그 위에 장기를 정성들여 장식할 것이다. 한데 이 기사의 어느 부분이 내게 중요한 내용이었을까? 이것만으론 모르겠다. 다음 기사를 읽어보자.

-2013년 5월 6일 XY동 근처 주민 25살 남성 D모 씨가 십자가에 매달린 사체로 발견되었다. 한 달 전,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난다고 했던 D모 씨는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선 후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D모 씨의 사체를 발견한 것은 심마니 T모 씨로 우연히 잘못 길을 들었다가 큰 십자가를 보고 다가갔다고 한다. 거기엔 사람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고, 손발엔 대못이 박혀 있었으며, 목은 굵은 밧줄로 십자가 기둥에 매여 있었다. 경찰은 평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D모 씨가 반기독교 주의자에게 납치당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근처 지역의 반기독교 집단들을 중점적으로 수사 중이다.

XY동이면 여기선 멀지만 XX동에선 가깝다. 같은 구에 속한다. 이게 문젠가? 하지만 난 DO구 근처에도 가본 적이도 없다. 거기에 아는 사람이라도 살던가? 그렇다면 연락처라도 뒤져보면 알 수 있겠지. 여기에도 관심가질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마지막 사건을 보도록 하자.

-2016년 1월 24일 YD동 LK아파트 거주자 28살 남성 K모 씨가 XT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전날인 23일, XZ동의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바람을 쐰다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프리랜서 G모 씨는 당일 XT강에서 낚시를 하던 중, 수면에 떠오른 K모 씨의 사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시체는 물에 불어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속주머니의 지갑에서 나온 신분증으로 K모 씨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K모 씨의 사체에 아무런 폭행 흔적이 없는 점과 지갑속의 현금, 카드 등에 손대지 않은 점 등을 미루어 우발적 범죄로 추정 중이다.

역시 XZ동이면 XX동과 XY동 근처에 있는 지역이다.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주거지역, 아니,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지역.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이 있을까? 성별은 아닌 거 같고. 나이? 22살, 25살, 28살로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범행일자? 2010년 3월 12일, 2013년 5월 6일, 2016년 1월 24일. 1, 3, 5? 6, 12, 24? 바보 같다. 이 또한 범행일이 아니니 의미가 없다.

“하아…”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졸음만 쏟아진다. 힐끔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가까워간다. 수첩을 덮어 매트리스 밑에 끼워두곤 불을 껐다. 침대에 몸을 누인다. 불이 꺼진 방 천장을 올려본다. 10년 전 처음 이사 올 때 봤던 얼룩이 그대로 있다. 청소도 잘 안 하고 살았으니까. 난 오늘을 위해 지난 15년을 악착같이 살았다. 그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 대가로 일주일을 잠들어 있었지만. 깨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상황에 너무 욕심 부리는 건지도 모른다. 당장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불러낼 필요는 없는 걸지도. 오늘은… 이만 자자.


다음날 아침, 여동생이 차린 식사는 간소한 빵과 계란 프라이였다. 원래 아침을 간단히 먹던 습관을 알고 있단 뜻이겠지. 빵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고 TV를 틀었다. 딸기잼이 뒤섞인 빵맛을 음미하며 아침 뉴스를 본다. 현재 시간은 7시 46분, 오늘 날짜는 화요일. 어제가 월요일이었구나. 오늘은 주목할 만한 소식이 없다.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채널이 멈춘 곳은 영화전문 채널. 바보상자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TV는 섬광같이 2시간을 앗아갔다. 내용도 주제도 없는 대단찮은 영화였지만 캐스팅과 연출만은 압도적이었다.

TV 전원을 끈 후엔 고민에 빠졌다. 이제 뭘 하면 좋지?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노는 법을 잘 모른다. 책도 게임도 취미삼아 해본 것은 먼 과거의 일. 여가 시간엔 TV를 보는 게 소일거리였다. 다시 TV나 볼까? 리모컨에 손을 뻗는 내 눈 앞에 납작한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플라스틱 판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일정 간격으로 틈이 새겨진, 가로세로 8칸짜리 슬라이드 퍼즐. 한창 물이 올라서 흩트려 놓곤 맞추다가 싫증나서 던져버린 듯, 뒤죽박죽 순서가 뒤섞여 있다. 이래서야 무슨 그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맞춰달라고?”
“응, 며칠 전에 샀는데 한번 섞었더니 다시 맞추질 못하겠어.”
“원래 그림도 안 보여주고?”
“응.”

여동생의 긴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찰랑거린다.

“이런 장난감이라도 갖고 놀면 두뇌회전이 빨라진다고 하잖아.”
“까짓, 해보지. 어차피 오늘 당장 할 일도 없는데.”

이건 여동생 나름대로 신경써준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해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그래, 어차피 오늘 하루는 아무 일정도 없잖아. 난 체념하며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고,

“오빠, 아직 멀었어?”

1시간이 지나도,

“괜히 부탁했나봐.”

이 망할 놈의 퍼즐은 풀리지 않는다. 손대면 손댈수록 점점 멋대로 섞일 뿐, 반도 맞추지 못했다. 3분의 1쯤 맞췄다 싶으면 나머지를 맞추는데서 꼭 그림이 헝클어진다.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 이 퍼즐을 풀 수 있겠는데.

“오빠, 이제 그만해.”

여동생의 손이 퍼즐을 낚아챌 때까지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멍하니 고개를 드니 여동생이 시계를 가리킨다. 큰 바늘이 12, 작은 바늘도 12.

“어라?”
“정말, 이게 그렇게 빠져들 일이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여동생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대로 싱크대 앞까지 걸어가 찬장 손잡이에 걸어뒀던 앞치마를 집어 두르며 묻는다.

“점심은 뭐 먹을래?”
“시켜먹을래.”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따라가 막 입으려던 앞치마를 가로챘다. 그렇게 대답한 건 마침 전자레인지 옆에 붙은 중국집 전화번호가 눈에 띄어서만은 아니다. 지금이라면 또 여동생이 혼자 식사준비를 도맡아 하려 나설 게 불 보듯 뻔하다. 간만에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기도 하고.

“난 자장면. 넌 뭐 시킬래?”
“나? 난, 나도 똑같… 잠깐, 내가 먹을 필요 없다는 거 알잖아?”

물론 알다마다. 맛도 느끼지 못하지. 하지만 적어도 같이 먹는 기분은 낼 수 있다. 그게 중요한 거라고 본다. 15년간 최저한의 인간관계만을 유지했고, 그마저도 업무관계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젠 바꾸고 싶다.

“혼자 먹는 건 쓸쓸하니까.”

여동생이 눈에 띄게 동요한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포커페이스지만 안절부절 못하고 움직이는 팔이나, 좌우로 흔들리는 어깨 등을 보면 안다. 뭔가 내키지 않는 낌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맛도 모르는 음식물이 몸 안쪽으로 넘어가는 감촉이 싫은 거겠지. 무엇보다 생돈주고 음식을 주문해서 쓰레기통에 처박는 비합리성이 마음에 안 드나보다.

“네가 맛을 모르는 건 알아. 억지로 삼키기도 싫겠지. 그래도 같이 먹는 기분은 들 거야.”
“으으, 알았어. 나도, 같은 걸로. 대신 반은 오빠한테 덜어줄 거니까. 남기면 용서 안 해!”
“이쁜 여동생이 주는 거니 국물 한 방울 안 남길게.”

여전히 시큰둥한 기색이 있는 여동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곤, 내 휴대폰을 찾아 거실 곳곳을 찾아 헤맸다. 필요 없을 땐 잘 보이더니, 필요할 땐 안 보이는, 그 이름 휴대폰이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에서 휴대폰을 찾아다준 여동생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더라. 그런데 이게 이사 오고 처음으로 시키는 음식 배달이지?


외진 마을인데도 배달해주는 음식점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늦을 줄이야. 그것도 점심시간에,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는 게 아쉬운 일이다. 진작 좀 주문해봤으면 미리 시켜놓는 센스를 발휘했을 텐데. 인터넷에서 대량으로 주문한 레토르트 식품으로만 끼니를 때워온 내가 오늘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딩동

벨이 울리자마자 누가 가로챌세라 머리털 휘날리게 현관으로 뛰쳐나간다. 그 요란한 소리에 놀랐는지, 내 표정이 그만큼 험악했는지 몰라도, 배달부의 얼어붙은 표정만은 인상적이었다. 아니면 이런 데로 배달시키면서 달랑 자장 두 그릇만 주문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도. 그래도 군말 없이 철가방에서 음식을 내놓곤 맛있게 드시라며 대금을 받았다.

“자, 자 먹자. 그런데 신문이 어딨었지?”

신발장이며 거실 구석이며 뒤적이는데 여동생이 그릇을 식탁 위로 나르며 핀잔을 준다.

“오빤 신문 안 봤잖아. 짜장 두 그릇 먹는데 무슨 신문을 깔아? 그냥 먹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그러자하고 나무젓가락을 집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먼 거리를 오느라 식은 것은 물론, 면이 불어터진 걸 감안해도 면발에 힘이 없다. 여동생에게 받은 것까지 1.5그릇, 아까 한 말 조금 취소하고 싶어졌어. 지금까지 안 시켜먹었던 게 다행이군.


문 앞에 그릇을 내놓은 후 여동생은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나갔다. 근처에 논과 밭밖에 없는데 어딜 산책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좀 걸을만한 반반한 길도 10분은 걸어 나가야 나오는데.

집에 혼자 남은 나는 시간이 남을 때 나노머신의 개체수를 불려두기로 했다. 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부품은 마모되기 시작할 테지만, 가동시키지 않고 휴면상태로 보존한다면 훨씬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당분간은 이것을 주기적으로 관리해줘야 할 텐데 나노머신 생성기와 컴퓨터를 1층으로 옮겨 놓도록 하자.

내 뇌의 신경망 연결 상태를 스캔할 때와 여동생의 뇌의 잘려나간 신경들을 접합할 때 썼던 프로그램들, 그 스캔 자료는 3중으로 백업해뒀으니 점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 프로그램들을 바탕으로 원상복귀용 프로그램을 짠다. 이것은 혹시 나나 여동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남아있는 축색의 전도속도를 이용해 길이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은 미리 짜두었기에 다시 만들 필요는 없다.

1. 여동생의 잘린 신경망에 이은 새로운 신경망을 제거하는 프로그램
2. 내 신경망에서 제거한 여동생의 잔재들을 복구시키는 프로그램
3. 내 신경망과 여동생의 신경망을 사고 직후의 상태로 되돌리는 프로그램

신경세포는 미리 배양해뒀다 써먹을 수 있지만, 그를 구축하는 나노머신의 개체 수는 주기적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프로그램별로 적정량의 나노머신 개체수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나노머신 생성기를 순서대로 가동시킨다. 작은 플라스크를 꽂아두면 알아서 그곳에 생성된 분량을 채운 후 소리를 낸다. 비싼 만큼 편리한 물건이다. 이것을 3차원 나노입자 프린터로 쓸 생각이나 하다니, 물건을 쓸 줄 모르는 개발자로군.

삐 소리가 나면 플라스크를 교체하길 2번. 3번째 소리가 난 후에야 일련의 작업이 끝났다. 이제 언제 둘 중 하나에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 아직은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지.

컴퓨터와 나노머신 생성기의 전원을 끄니 온몸이 찌뿌둥하다. 이것저것 신경 쓴 탓일까? 잠깐 소파에 엎어져 TV나 보기로 했다.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면 그렇지도 않은데, 다른 놀 거리는 전혀 모르니까 어쩔 수 없다.


-딩동

벨이 울린다. 그 녀석 열쇠 안 갖고 갔나? 한숨 푹 내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TV를 보는 중간 중간 몸을 풀어준 탓인지 아까보단 개운해졌다. 기지개를 켜며 현관으로 향하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릇 찾으러 왔습니다.”

그건 여동생이 아니라 중국집 배달부의 것이었다. 그릇? 아까 내놓지 않았나? 드물게 야생동물이 산에서 내려와 내놓은 그릇에 남은 음식을 먹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그릇 채로 물어가나? 적잖이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

“저, 그릇은 아까 문 앞에 내놨어요.”

하며 발치를 보니 그릇은 그대로 있다.

“그릇 여기 있잖아요.”

배달부는 그쪽엔 눈길조차 안 주고 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본다. 뭔가를 고민하며 이모저모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 사람, 위험한 거 아냐? 배달부를 가장한 강도? 그런 잡념이 머릿속에 떠돈다. 배달부는 걸걸한 목소리로 내 눈을 응시하며 묻는다.

“도화살 씨 되세요?”
“네, 네. 맞는데 어떻게 아셨죠?”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돈다. 놀람과 즐거움이 한데 보였다. 그는 들떠서는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린다.

“역시 도화살이구나! 나야, 나. 아덕이, 방아덕! 어쩐지 닮았기에 그릇 핑계로 보러 왔지.”
“방아덕?”

아, 기억난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그리고 나랑 싸웠던 그 양아치. 그 녀석 머리도 빳빳이 세우고 툭하면 염색하려고 하던 날라리였는데. 이젠 머리도 단정하게 깎고, 옷차림도 평범하니 알아볼 리가 없지.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지. 넌 어때?”
“나도 요즘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언제나 건들건들 남을 비웃을 줄만 알던 녀석과 이렇게 평범한 담소를 나눌 수 있다니, 세월의 힘이란 대단하군.

“저기, 화살아. 내가 미안했다.”

이야기 도중 방아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난 네게 병이 있는 줄은 몰랐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춘희 서랍에 개구리를 넣어놨을 때, 내가 널 때렸잖아.”
“이미 지난 일이야. 용서하고 자시고도 없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방아덕은 다음 배달을 나가야 한다며 내게 명함을 남기고 갔다. 다음에 한번 연락해볼까 하며 명함을 지갑 사이에 껴 넣고, 여동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철컥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어둑어둑해진 거실 안에 희미한 TV 불빛이 짧게 번지고 있다. 부스스 일어나 현관 쪽을 보니 이미 문은 열려있다.

“나 왔어.”

이어지는 여동생의 발랄한 목소리. 전등을 켰는지 거실이 환하게 밝아지고, 여동생이 내려놓은 커다란 봉지를 볼 수 있었다. 뭔가 잡다한 것들이 한가득 들어 있다. 산책하러 간다더니 읍내까지 나갔었나?

“그건 다 뭐야?”
“비밀. 이따 보여줄 테니 기대해.”

메롱 하며 내가 못 보게 내용물을 숨긴다. 예전 같았으면 억지로라도 보려고 아웅다웅 다퉜겠지만, 그건 이미 15년 전의 이야기다. 그러렴 하고 소파에 되앉는다. 여동생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말해주지 않았고, 어물쩍 캐물어도 대답을 요리조리 피했다. 그게 뭔지는 10시가 넘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뜬금없는 여동생의 부름에 안뜰로 나갔더니 생각치도 못한 물건들이 보였다.

뜰 한쪽에 겹겹이 사각형으로 쌓인 장작더미들과, 페인트 통에 꽂힌 몇 개의 장작들. 페인트 통에 든 장작들 끄트머리엔 진득한 송진이 발라져 있다.

“자자, 여기 앉아.”

여동생에게 등을 떠밀려 장작더미 앞에 준비된 낚시용 의자에 앉았다. 송진이 묻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니 고등학생 때 갔던 수학여행이 생각난다. 그날 밤에도 불타는 모닥불을 보며, 여동생과 단둘이 얘기했었지. 그때, 여동생은 즐거웠을까?

“불붙인다?”
“그래, 데지 않게 조심하고.”

장작에 묻은 송진을 살라먹을 듯 격렬한 불꽃이 인다. 장작더미 가운데 쌓인 잔가지들 위로 떨어진 불덩이가 주위를 삼키며 몸집을 불려간다. 거기에 불타는 장작들이 하나둘씩 가세한다. 워낙에 힘이 좋으니 굳이 내가 도울 필요도 없나보다. 사탕 하나 깨먹을 시간도 안 돼서 불꽃이 별점박이 검푸른 하늘로 불똥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여동생은 내 옆자리에 앉아 모닥불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솔솔 바람이 들어가니 불길이 살아난다.

“나, 오다가 삽살개를 봤어. 시꺼먼 게 돌돌이를 닮았더라.”
“돌돌이? 아, 유치원 때 주워왔던 강아지?”

누군가 상자에 버려둔 강아지가 불쌍해 집에 데려왔었다. 부모님께 잔뜩 혼나고도 키우겠다고 고집 피웠었지.

“바보, 돌돌이는 털이 하얬어.”

나중에는 검어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주워왔을 땐 눈처럼 새하얀 강아지였다.

“거짓말, 오빠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
“아냐, 진짜라니까? 언젠가 어머니께서 돌돌이 다 큰 사진을 보여주셨잖아. 그러면서 ‘우리 화살이 머리만큼 검어졌네’ 라고 말씀하셨어.”
“맞다, 그랬지…”

여동생도 그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색을 헷갈린 이유는 기억에 혼선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 불려오고 다시 기억되면 뒤섞이기 쉬우니까.

“안 그래도 당분간은 기억이 헷갈리기도 할 거야.”
“그래. 조심해야겠어. 기억이 너무 뒤섞이면 좋을 게 없으니.”

여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든다. 십자로 묶은 나무막대에 사람 옷을 입힌 그 물체는 영락없는 허수아비다.

“야, 그건 어디서 주어왔어?”
“버려진 밭에서. 주인이 버리고 간 거니까, 태워도 괜찮아.”

그 말과 함께 모닥불 한가운데에 허수아비가 꽂혔다. 그리고 하나 더. 밀짚모자를 쓴 굵은 눈썹의 허수아비와, 빗자루 머리카락을 가진 붉은 입술의 허수아비가 탐욕스러운 불길에 휩싸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타오르는 벽속에서 허물어져간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이 불에 타 죽어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모닥불 불빛에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든 여동생이 입가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잡새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사람인줄 안다는데, 지금 보니 그럴 만도 하지.”

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허수아비의 형체가 완전히 스러질 때까지, 둘 다 말이 없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먼저 입 밖으로 꺼낸 건 여동생이었다. 나에겐 그럴 용기도, 자격도 없으니까.

“이렇게 큰 불꽃을 보면, 그날의 일이 떠올라.”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밤이었지.”

여동생이 물끄러미 내 눈을 응시한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눈. 가늘어진 눈매로 심정을 추측할 뿐이다. 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대로 끄지 않은 멀티 탭에 합선이 일어나 불이 붙었어.”

그리고 여동생이 다시 내 말을 잇는다.

“우리 셋 모두 깊이 잠들어 있어서 집안이 연기투성이가 될 때까지 몰랐지.”
“내가 눈떴을 땐 거실이 온통 불바다가 돼있었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여동생은, 다시금 내 눈을 쏘아본다. 불빛에 광택을 발하며 빛나는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양손으로 내 목덜미를 붙들었다. 그리고는 코앞까지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부모님께선 안방에서 살려달라고 이쪽으로 와달라고 외치셨어.”
“하지만 나 혼자선 방문 앞에 쓰러진 장애물을 치울 수 없었어.”

그래서 도망쳤다. 부모님이 죽도록 내버려두고. 나 혼자서만! 죽기 싫어서. 부모님이 죽게 놔두고 도망쳤다. 밝게 빛나는 선명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날 원망하니?”
“아니.”

목을 에워싸고 있던 압력이 사라진다. 그 팔은 옆구리를 둘러 등 뒤로 돌아간다. 날 끌어안은 여동생은 귓가에 가늘게 속삭였다.

“그건 오빠 잘못이 아냐.”
“화지야?”

내 목소리를 못들은 척 말을 잇는다.

“오빠는 항상 생각했어.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알면 내가 얼마나 슬퍼할까 하고. 맞아, 슬퍼. 하지만 오빠, 내 기억은 오빠의 기억이야. 내가 느끼는 슬픔은 오빠가 느끼는, 지금의 흐릿해질 대로 흐릿해진 슬픔. 그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까 오빠,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난, 읍!”

여동생의 손이 내 입을 가로막는다. 여동생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 입에는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알아. 그걸 떠올린 건 저 허수아비를 보고 나서지? 나도 몇 시간 전에야 기억이 났어. 오빠는 나보다도 늦게 떠올렸겠지. 하지만 그 기억은 지워진 게 아냐. 언젠간 되살아나. 그래서 미리 풀어주려고 한 거야.”

그 말을 마치고서야 여동생의 팔에서 풀려났다. 여동생은 반쯤 꺼진 모닥불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화지야.”
“응?”

멋쩍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힘내, 오빠.”

모닥불이 완전히 꺼진 후, 우린 반쯤 타다 남은 장작과 회백색 잿더미를 치웠다. 쓰레기봉투에 재를 쓸어 담는 여동생의 몸짓이 평소보다 거침없다. 어쩐지 기뻐하는 것 같았다.


잠깐 TV를 봤을 뿐인데 벌써 10시다. 나른한 수요일 아침. 여동생은 외출하고 나 혼자 집을 보고 있다. 여동생은 2시 이후에 돌아올 예정이다. 점심은 혼자 먹어야 하는데, 뭘 먹지?

그때, 지갑에 넣어둔 명함이 생각났다.

-XD 반점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사장 방아덕
-전화번호 OOX-XIIX-OOXI
-핸드폰 OXX-XXIX-OOOX

명함을 뒤집어본다.

-자장면 3000원
-짬뽕 3000원
-탕수육 8000원

광고지인지 명함인지 알 수 없는 종이엔 아무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일단 그 번호로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철지난 가요가 좀 흐르더니 방아덕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방아덕입니다.”
“아덕이냐? 나야, 화살이. 오늘 자장 한 그릇 배달 돼?”
“화살이? 마, 한 그릇에 무슨 배달이야? 와서 먹어.”

가서 먹으면 아는 사이니 서비스도 주고 하는 게 있으렷다?

“거기 어딘데?”
“명함 뒷면에 오시는 길이 적혀 있으니 그리로 오십쇼, 손.님.”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손.님.을 특별히 강조하다니, 공짜는 없단 말이지? 그래도 막상 가면 조금은 할인해주지 않을까? 원래 중국집은 배달비가 비싸니까. 거기에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난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XD 반점에 도착했을 때, 방아덕은 배달을 나갔는지 없고, 주방장 겸 서빙 하는 사람이 대신 주문을 받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김이 나는 자장면이 그릇에 담겨 나왔다.

“어디.”

면발을 입에 넣으니 감촉부터가 탱탱한 게 어제완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이 감칠 맛 나는 소스, 유명 브랜드에서도 이런 소스는 못 만들 텐데.

“어제랑 자장면 맛이 다른데 어젠 누가 만들었어요?”
“어젠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사장님이 대신 만드셨지요.”

이놈이 그런 자장면에 제값을 받았단 말야? 오면 한 마디 해야지 다짐하며 다시 자장면을 입에 담았다. 자장면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해서, 방아덕이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

“어때? 어제랑은 맛이 틀리지?”
“이 자장면 값이랑 어제 값이랑 똑같은 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하, 미안타. 어젠 내가 배달까지 다 하느라 불어터졌을 거다. 오늘은 쪼끔 깎아줄 테니 화 풀어라.”

“그래서 이 시간엔 웬일이냐? 술이라도 걸치긴 이른데.”
“물어볼 게 있어서. 이걸 한번 봐봐.”

방아덕의 눈앞에 지하실에서 주운 수첩을 펼쳐 보였다. 이 학창시절 친구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크게 싸웠던 녀석이라 내키진 않지만, 고등학교 동창 중 연락처를 아는 건 이 녀석 뿐이다.

“뭐야, 이게? 살인사건?”
“내가 얼마 전에 머리를 다쳤거든. 아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아. 혹시 너도 아는 사람은 아닐까 싶어 물어보러 왔어.”
“흐음, 안됐구나. 아는 사람이 셋이나 살해당했다니.”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맞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사에 관심을 끄고 살던 내가 이렇게 공들여 정리해뒀을 리 없다. 혹시 모른다고 하면 다시 원점이다.

“이, 이거.”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방아덕은 첫 번째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손가락을 약간 떨고 있다. 친한 사람이었던가 보군.

“이거 춘희야.”
“송춘희?
“춘희가 살던 XX동 OO아파트.”

방아덕의 목소리가 떨린다. 유들유들하던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마에선 식은땀까지 흐르는 게 적잖이 충격 받았나보다.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춘희야, 미안해.”

방아덕은 갑자기 죽은 송춘희에게 연달아 사과하기 시작했다.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연이어 혼잣말을 하는 게 걱정돼서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야, 괜찮아? 진정해.”
“춘희야, 미안해. 그날 널 혼자 두지 않았으면.”
“야, 진정하라구!”

아무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방아덕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퍽

그리고 방아덕은 반사적으로 내 가슴팍에 주먹을 꽂았다. 불현듯 닥친 어지럼증에 쓰러질까 한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이 아픔, 기억난다. 예전부터 이곳을 맞으면 금세 어지러워졌지. 방아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곤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안, 오늘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몸을 떠는 폼이 심각해 보인다. 그저 알고 지내던 동창의 죽음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충격 받을 줄은 몰랐다. 한번 차인 후에도 계속 좋아해왔던 건가?

“나야말로 미안해. 가볼게.”

방아덕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작게 춘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서빙 하던 직원은 나를 쏘아 보고 있다. 난 말없이 계산대 앞에 천 원짜리 지폐 3장을 놓고 중국집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어지럼증은 근처 커피가게에서 10분 정도 앉아있자 진정되었다. 저 녀석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러는지 몰라도, 이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찜찜한 기분으로 털레털레 걸어 집에 왔다. 도착하니 3시가 좀 넘은 시간. 여동생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땀 좀 봐. 어디 운동이라도 하고 왔어?”
“그냥, 사람 좀 만나고 왔어.”

땀범벅이 된 셔츠를 거칠게 벗어던진다. 젖은 셔츠가 몸에 붙어 잘 벗겨지지 않는다. 머리에 셔츠를 거꾸로 뒤집어 쓴 채 말을 이었다.

“요번에 우리가 자장면 시킨 중국집 알지? 거기 고등학교 동창이 하는 데야. 방아덕이라고. 고등학생 때 나랑 싸웠던 애. 2명이 일하느라 배달도 걔가 하더라. 주방장이 만들면 맛있으니까 다음에 또 시켜 먹어보자.”

간신히 셔츠를 벗어던지고 바지까지 벗어던졌다. 이참에 아주 샤워까지 해야겠다. 방아덕 녀석 때문에 긴장했더니 온몸에 땀이 다 났다.

“오빠, 방아덕이랑 싸웠었잖아. 연락하고 지내도 괜찮겠어?”
“지난 일인데 뭘. 사과도 받았고. 오늘도 연락하고 가서 점심 먹고 왔어.”
“오빠가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걱정도 팔자다. 그 배려를 흘려들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기에 물을 틀자마자 차가운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비눗물로 꿉꿉한 땀을 닦아내어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그러다 문득 가슴의 흉터에 손이 닿았다. 약간 싸르르한 것이 아까 맞은 부위다.

“여긴 예전부터 내 약점이었지. 충격을 주면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어지러워졌어.”

그 자리엔 여동생의 뇌가 있었으니까. 충격을 받아 흔들리면 영향을 받았지. 그 감각은 나에게도 공유되었고. 하지만 여동생의 뇌와 신경망을 들어낸 지금, 나는 왜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걸까? 설마? 아냐. 아니, 그럴 일은 없다. 나는 도화살. 기생 쌍둥이 동생인 도화지와 한 몸으로 태어났다. 이 몸에서 분리되어 나간 건 여동생의 뇌이고, 그러니 내 안에 여동생의 뇌는 더 이상 없다. 충격을 받으면 어지럼증을 느끼는 건 정신적 외상일지도 모른다.

“괜찮아. 화지랑 얘기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며 마음을 다잡고, 욕실 문을 열었다. 그때, 화지는 막 현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오빠, 나 좀 나갔다 올게. 저녁 늦게 올 거니까 밥 꼭 챙겨먹어.”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이 거세게 닫힌다. 대답할 틈도 없었다. 왠지 의기소침해진다. 기억이 혼선된 것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혼선된 기억을 짚어내는 방법은 모순되는 기억을 찾아내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동생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튼다. 요 며칠 가장 재밌게 봤던 영화 채널로 돌렸지만,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저 영상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눈만 좇아갈 뿐이다.

그렇게 4시, 5시가 되어도 여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영화는 끝나고 다음 영화가 방영되는 중이다. 6시가 넘었지만 뭔가를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아 그저 늘어져만 있었다. 슬슬 눈이 감겨온다. 그래, 쓸데없이 기억을 덧칠해 혼선되는 기억을 늘리느니 잠이나 자자.


-띠리리

휴대폰이 울릴 때까지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겠다. 잠이 덜 깬 채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처음 보는 번호인 줄도 알았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도화살 씨 되세요?”
“네, 접니다만 누구시죠?”
“나야, 나. 마백이.”

전화속의 목소리는 반갑다며 톤을 높였다.

“마백이? 도마백?”
“그래, 니 옆자리 앉았던.”
“하지만 어떻게?”

나도 며칠간 도마백의 연락처를 알아보려 해봤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알고 지내는 동창 한 명 남겨놓지 않은 걸 후회했다. 졸업앨범 따윈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거기에 적힌 연락처는 수시로 바뀔 수 있으니까.

“아덕이한테 들었어. 네가 무슨 수첩을 보여줬다면서?”
“수첩? 맞아. 춘희가 죽었다고 했지.”
“그 수첩 사진 좀 찍어서 보여줄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희생자가 춘희라면 나머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순순히 수첩의 내용을 촬영해 마백이에게 전송했다. 사진을 받은 마백이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송춘희가 맞아. 다른 한 명은 당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리골. 그 셋 모두 우리랑 같은 반이었고,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그래서 내가 수첩에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 해두었던 것인가. 마백이는 이어 내게 물음을 던진다.

“화살아, 혹시 네가 춘희 서랍에 넣었던 개구리 기억해?”
“기억하지. 생일선물로 줬던 개구리 머리핀.”
“야 도화살! 그거 말고! 너 내가 장난치는 걸로 보여?!”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백이는 내가 다른 걸 줬다고 착각하고 있나? 아니다, 내 기억의 상당수는 혼선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백이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과부터 하기로 했다.

“미안해.”
“그래.”

마백이는 다시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네가 그날 춘희 서랍에 넣었던 개구리 시체 있지?”

개구리 시체? 선물이 아니라?

“해부해서 내장을 팔다리에 달아놨었잖아. 춘희의 사체가 딱 그런 모습이었어.”

그럴 리 없어. 설마 내가 이 손으로 송춘희를…? 아냐, 모순이다. 잘못된 기억이야.

“틀려. 내가 줬던 건 머리핀이야. 갈색 개구리 머리핀.”
“…그래, 개구리 내장을 말려서 만든 머리핀을 줬지. 화사한 춘희한텐 갈색이 잘 어울린다면서.”
“그러니까 갈색 개구리는 방아덕이…”
“네가 병력이 있으니 헷갈리는 건 이해해줄게. 하지만 잘 들어, 도화살. 양아치였던 그 방아덕이, 그 무식했던 놈이 화사하다는 등 섬세한 말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그건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의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방아덕의 잘못이지,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본인에게 물어보도록 해. 네가 오늘도 방아덕과 다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볼 때 수신거부 목록에까지 등록할 이유까진 아냐.”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수신거부라고? 나는 그런 기능을 써본 적이 없어. 하지만 방금 도마백의 입으로 똑똑히 들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인물로 보이지도 않는다. 내 기억에 따르자면 그렇다.

미심쩍지만 확인해볼 수밖에 없다. 휴대폰을 조작해 수신거부 목록을 확인한다. 그리고, 도마백의 말처럼, 방아덕의 번호가 등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 아침에 방아덕에게 전화를 건 이래 오늘 종일 휴대폰을 만진 적이 없어.

불길한 생각이 든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시바삐 수신거부 목록을 초기화한 후 방아덕에게 전화를 건다.

-띠리리리

송신음이 울리길 10여 차례, 평소에 듣기 힘든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불현듯 마음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지금 내 기억의 많은 부분들은 여동생의 기억들과 일치한다. 하지만 연락이 닿았던 동창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동생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깨어나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의심해볼 가능성은 둘.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와 나노머신 생성기에 전원을 넣는다. 간단한 프로그램을 짜서 소량의 나노머신을 생성시켰다. 1분도 안 되어 플라스크에 담긴 그것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컴퓨터의 결과 창을 지켜보았다. 간단한 테스트이다. 5분도 안 걸려 결과가 나왔다.

내 가슴팍엔 아직도 여동생의 뇌가 온전히 들어 있었다. 뇌까지 이어지는 신경망도 복원된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두 전전두피질이 하나의 뇌를 공유했을 때만큼 에너지 소모가 심하지 않다. 그러니 오빠의 원래 전전두피질은 다른 뇌 부위와의 신경망 연결이 끊어졌을 것이다. 나는 도화살이 아니라, 도화지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내가 여동생이라 생각했던 존재는, 화살이 오빠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전전두피질을 복사해 최초의 상태, 즉, 두 전전두피질이 하나의 뇌를 공유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 상태에선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 로봇 몸뚱이를 이끌기 부족하다. 오빠는 하루에 한 번 정도만 충전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오빠는 온전한 하나의 뇌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전두피질이 누구의 것인지가 문제다. 나의 것인가, 오빠의 것인가? 만약 내 것이라고 한다면 오빠의 기억들을 소화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수면학습을 이용한다고 해도, 아, 그 일주일의 차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그 사이 오빠는 내 기억들을 조금씩 덮어씌운 것이고.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백업 데이터들을 확인한다. 내 전전두피질 스캔자료의 백업 사본이 생성된 날짜는 10일 전. 내가 의식이 깬 3일을 빼면 7일 전이다. 그리고 내 전전두피질의 사본을 만들어 오빠의 기억을 이식시키는 데는 최소한 7일은 걸릴 것이다. 그러니 나는 도화지이고, 오빠는 도화살임이 분명해진다.


결론을 내리니 사실관계가 명확해졌다. 방아덕의 번호를 수신거부 시킨 것은 오빠일 것이다. 나 몰래 오고간 연락내역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방아덕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다른 3인의 동창들처럼.

그들을 죽인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우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미움 받았다. 마백이… 오빠 말대로 우리가 춘희에게 그런 끔찍한 선물과 말을 한다면, 미움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단둘뿐인 하굣길은 같이 갈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알던 오빠는 고작 그런 이유로 남을 해칠 악인이 아니었다. 오빠의 곁을 떠난 후, 오빠에게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오빠의 기억들을 온전히 이식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중 많은 부분들이 손대어져 회상할 수 없다. 내게 오빠의 어두운 부분을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운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한다. 자꾸만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릿하지만 컴퓨터를 조작하는 손을 멈출 순 없다. 나를 위해서도, 오빠를 위해서도 이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눈물을 닦아가며 프로그램을 만든다. 나노머신 재생기에 입력할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완성된 프로그램을 테스트할 시간도 없다. 곧 오빠가 돌아올 것이다. 그대로 나노머신 재생기에 입력시킨 후 플라스크를 채운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오빠를 배신하려 한다. 날 이 세상에 다시 낳아준 오빠를.


오빠가 돌아왔을 땐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마개를 꽉 닫아 호주머니에 숨긴 작은 병이 두 개. 검은 종이로 싼 것과 싸지 않은 것. 그 안엔 새로 만든 나노머신들이 가득 차 있다. 흐르던 눈물은 메말라 더 이상 새로운 길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내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는다.

“다녀왔어.”
“잘 왔어. 마침 그제 물어본 수첩을 찾았거든.”

살인기사가 스크랩된 그 수첩을 오빠의 발치에 던진다. 툭하고 발치에 떨어진 수첩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역시 오빠의 것이었어.

“그게 그토록 찾던 가계부야?”
“그래. 어디서 찾았어?”
“지하실에서.”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내 신경망을 제거한 지금, 오빠의 단련된 지능은 범인의 것을 능가한다. 저 수첩이 내 눈에 띄면 안 되는 거라면 그런 곳에 숨겨둘까? 거기에 굳이 내려둘 필요가 없던 책상까지 내려놓았다. 마치 내 호기심을 유발하듯이.

“날 시험해본 거야, 오빠?”

오빠는 침묵했다. 그러더니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뒤늦게 로봇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대체 왜? 왜 그랬어? 뭣 때문에?”

분노했다. 순수하게 오빠를 믿었던 내 마음이 배신당했다. 무슨 뜻에서 그랬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오빠는 무슨 이유에서건 날 속였다.

“처음엔 송춘희, 그 다음엔 당나기, 그리고 나서 고리골.”

오빠의 목이 왼쪽으로 꺾어져 회전한다. 빙글빙글. 사람이라면 한참 전에 목이 부러져 죽었을 각도를 넘어 끝없이 돌아간다.

“아, 하나 더 있지. 한 번 건진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더군. 이제 그딴 놈쯤은 아무래도 좋았는데.”

회전하던 목이 제자리에 섰다.

“내겐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있으면 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이 충동이 일기 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충동이라고? 내가 오빠의 곁에 있을 때 그런 충동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 내가 사라진 후부터?

“그래, 네가 있을 땐 나도 이렇지 않았어. 그래서 시험해봤지.”

무기질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른다. 불빛을 받아 빛나는 눈이 날 쏘아본다.

“네가 사고 이후로도 무의식 영역에서 나와 연결되어 있었는지.”

내게 퍼즐을 풀어보게 한 것도, 거짓 정보를 심어준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

“예상대로 넌 나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어. 잘 된 일이야. 쓰지 않는 신경은 사멸해버리니까. 사멸여부를 판단하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이렇게 되살려낼 수 있었지.”

아아, 오빠가 날 세상에 되살려준 이유는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내 기억을 조작해가며 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자 거짓말했어. 모닥불 앞에서 같이 얘기했던 그날까지도, 오빠는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었어.

“혹시 모닥불을 피운 날에도 날 시험해봤던 거야?”
“측두엽을 제거하면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니 말해줄게. 나야. 내가 죽였어. 집에 불을 지른 것도 나고, 안방 문 앞에 가구들을 늘어놨던 것도 나야.”

내가 떠올렸던 죄책감마저도 오빠가 덧씌운 거짓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쓰디 쓴 감정들은 이미 다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울컥하고 새로운 울분이 토해졌다.

“왜 그랬어?”
“왜라니? 부모님께 부정당한 네가, 내게 그 이유를 묻는 거야? 내가 아니었으면 넌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 사고 이후 부모님께 있어 넌 죽은 아이였어.”

오빠는 자신의 몸에서 내 뇌 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반대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의견이 엇갈렸고, 감정이 틀어진 끝에 부모님을 살해하기까지 이르렀다.

“화지야, 다시 나와 하나가 되자. 네가 있으면 난 이 충동을 이겨낼 수 있어.”
“싫어! 오빠는 미쳤어! 부모님도, 친구들도 다 죽이고 자기만 새 인생을 살아 행복해지려 하다니! 이젠 나까지도 오빠 자신을 위해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 왜 이러는 거야? 예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그 상냥하던 오빠가 이토록 이기적이고 추악한 괴물이 되어 있다. 그 괴물은 날 가리키며 쏘아붙인다.

“왜 이러냐고? 몰라서 물어? 다 네 잘못이야. 나한테 들러붙지만 않았더라도! 난 정상인으로 태어났을 거야!”

내가 충동의 원인? 그럴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이중인격으로 오해받으며 미움 받았겠지. 항상 남들과의 대화에도 툭툭 끼어들었을 게  분명하다. 거기에 나에게 돌아올 기억이 오빠에게로 섞였을 가능성조차 있다.

“말 그대로야. 내가 없었으면 오빠는 정상인이었겠지.”

오빠의 입가에 화색이 된다. 나는 오빠의 그 미소가 무색해지도록 다음 말을 이어 내뱉었다.

“하지만 싫어. 지금의 오빠를 위해 날 희생하고 싶지 않아.”

오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여전히 감정이 안 비치는 눈이지만 오빠가 화났다는 것만은 알겠다.

“죽기 싫어? 왜? 어차피 네겐 아무 것도 없어. 네 경험은 모두 내 것이야. 가족도, 친구도 없어. 심지어 부모에게도 버림받은 네가, 이제 와서 세상에 미련을 가진단 말야?”

그 말대로, 내 경험은 오빠의 눈을 통해 본 것, 오빠의 손을 통해 잡은 것, 오빠의 귀를 통해 들은 것, 오빠의 코를 통해 맡은 것, 오빠의 혀를 통해 맛본 것들뿐이다. 나 혼자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오빠와 함께 했던 그 기억들만큼은 나만의 것이야. 이것만큼은 오빠라고 해도 뺏을 권리가 없어.”

오빠는 이를 드러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이니 오빠가 저 기계 몸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겠다.

“그렇다면 그 목숨은? 내가 너에게 준 새로운 목숨조차 네 것이라 우기진 않겠지?‘
“그래, 내 목숨은 오빠가 준 거야. 오빠에게 진 빚을 갚겠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돕지는 않아. 나는 내 방식대로. 예전의 오빠라면 했을 일을 하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주머니에 넣었던 까만 플라스크를 꺼내 오빠를 향해 집어던졌다. 오빠의 발등에 떨어진 플라스크가 깨지고 안에 든 액체가 양말을 적신다.

“나노머신? 내가 널 붙잡기 전에 이것들이 날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이런 상황에서 여유라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 비뚤어진 판단력이 피질에 고정되기 전에 당장 분리시켜주마.”

고작 그것들만으론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 배의 배의 배의 나노머신들이라면 가능하다. 오빠의 주머니에서 커터 칼이 모습을 드러낸다. 살상용 무기는 아니지만 저 오빠의 능력이라면 저걸로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을 학살할 수 있겠지. 하지만 소용없다. 그 커터 칼의 날을 드러내며 이쪽으로 달려들려던 몸짓이 멈칫한다.

“이, 이게 뭐야?”

아까 오빠의 양말을 적셨던 액체가 딱딱하게 굳어가며 점점 위로 뻗쳐오른다. 그러면서 주변의 물질을 동원해 자가 복제를 하기에 오빠의 몸을 타고 오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너, 설마 나노머신에 자가 복제 기능을 추가했나? 낮은 확률로 불완전 복제가 쌓여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냐?”
“그건 오빠가 걱정할 일이 아냐. 당신은 이제 곧 사라질 테니까.”

오빠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내부에서부터 파 먹혀 푸석푸석해진 몸뚱이가 붕괴된다. 손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고 손바닥만 남은 손으로 날 지목해 가리킨다.

“이것들이 넌 그냥 지켜 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 수백, 수천 만 개체 중 한 마리만 살아남아도 다시 이만큼 불어나는 데는 금방이야. 결국 너도 나처럼 잡아먹히게 될 거다.”
“이걸로 끝이야. 안녕, 오빠.”

잘게 분해되어가는 오빠의 몸뚱이를 두고 거실에서 물러났다. 곧 숫자가 불어난 나노머신들이 전등 파장이 미치는 범위 안의 물건들을 분해하기 시작할 테니까.

“오빠를 죽일 셈이냐, 화지!”

어둠에 잠식된 침실로 걸어 들어간다. 곧 오빠의 숨이 끊어질 것이다. 이젠 내 책임을 질 차례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침대에 바르게 눕는다. 뒤척여도 떨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마지막 플라스크의 나노머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한 명의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한, 한 덩이 살덩어리의 정해진 운명. 나에겐 친구도, 가족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가질 수 있던 유일한 인연인 오빠를 이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수면유도제가 섞인 탓에 서서히 감각이 둔해진다. 이제 곧 나는 잠들게 되고, 오빠의 전전두피질과 나머지 뇌 부분들 간의 신경을 복원하는 작업이 시행될 것이다. 그리고, 내 전전두피질과 모든 감각영역들 사이의 연결은 제거하도록 했다. 남은 건 오빠의 전전두피질에 연결된 신경들 뿐. 이로써 모든 감각들을 오빠로부터 간접적으로 전달받게 된다. 거기에 오빠의 말을 가로챌 일도 없다.

마백이 오빠가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는다면 내일이 다 가기 전에 이 집에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땐 전등마저 파괴한 나노머신들이 완전히 작동을 멈추었을 무렵이다. 지하실의 장비들은 이미 해체된 후이며, 거실엔 형체를 알아볼 것이 남아있지 않겠지. 그리고 이 집에서 이 몸뚱이를 발견하고 재판을 할 것이다. 몇 년, 아니 몇 십 년의 형을 받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무기징역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빠는 내 정신에 약간씩 간섭받는 이중인격이 될 것이고, 정신 병력으로 수감 당할지언정 사형이 집행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생명은 무엇으로도 다 갚을 수 없다. 안다. 이건 내 욕심이다. 그런 죄를 같이 등에 업는 한이 있어도, 세상에 버림받은 나를 감싸준 오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다.

그럼에도 오빠는 같은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한번 쌓아온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저 오빠는 날 희생시키려 했음에도, 한편으로 날 챙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내 뇌 조각의 스캔자료를 가졌음에도 굳이 원래의 것을 손에 넣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건 오빠의 비뚤어진 애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힘내, 오빠. 이번엔 잘할 수 있을 거야. 오빠의 충동은 내가 막아줄 테니, 오빠는 오빠의 삶을 살아. 그 삶을 지켜보는 것이 내 기쁨이 될 거야.

그러니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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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아니고 판타지라는.

추천 BGM : Double Moon , World Fusion

http://www.youtube.com/watch?v=PzICCUeq8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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