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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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18 Jan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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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구시렁거려봐야 어찌 될 일이 아니었다. 두 레인저는 괜히 저들 물건이랍시고 명토가 시꺼멓게 박힌 물류상자부터 급히 땄다.


  “설상 자율기동 군장이잖아?”


  “작열탄도 넉넉해. 8작전일분인가? 이 장비 쓴다손 쳐도 반은 남겠어.”


  “노총각 타격대장이 돌았나? 이런 게 척척 올라간 보급대장에 사인했다고?”


  우울함이 싹 가셨다. 설상기동은 언제 어떤 컨디션에 해도 고된 법이나 애들레이드 하이브제 신예 자율기동 군장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장비 일체를 군장에 맡겨두고 보우건 간수에만 신경쓰면 되니까. 상등 딱지를 단 후로도 단 두 번밖에 보급받지 못한 귀물을 마주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곧 본의 아닌 낙관에 값을 치러야만 했다. 아닌게아니라 타격대 보급계가 등신도 아닌데 연료를 거저 줄 리가 없다는 생각을 빠트리고 만 것이다. 화물차는 사람 탈 것이 아니어서 난방을 할 리 없고, 가혹하게 식어빠진 쇳덩이란 여느 능선에 판 눈굴만 못하기 마련. 외풍이 히히덕거리는 가운데 일리아나가 다급하게 종알거렸다.


  “난방이 되고 안 되고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여기?”


  “원래 사람 타는 게 아니니까……. 차라리 설상기동하는 게 춥기는 덜 춥겠다. 이런 데 하루 남짓 엉덩이 깔라는 건 좀 너무한데.”


  “메르, 설상키트 당장 틀자. 진짜, 타격대본부가 인심 좋을 리 없지.”


  발차 경적이 울릴 즈음에는 벌써 설상키트 두 개에 불이 들어가 있었다. 더러운 승차감을 욕할 새도 없었다. 레일 이음매마다 몸이 손가락 한 마디 높이로 픽픽 튕겨나가는 와중 방한포를 고정하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열은 재산이요 온기는 목숨이 아니던가? 한 겹 방풍막에 한 겹 번데기를 만들어 그 안에서 서로를 꼭 껴안았다. 아침에 어떤 년이 냄새나는지 툴툴거리며 싸운 건 애저녁에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얼마간 뒤척이던 두 여인은 곧 의식적으로 의식을 놓았다. 레인저란 잠 들 환경을 골라잡을 수는 없으니 이렇게 정신 놓아버릴 때를 골라잡을 밖에.


  얕디얕은 잠자리였지만 메르세데스는 꿈을 꾸었다.


  익숙한 자각몽이었다. 눈 닿는 곳 전부가 천년설로 새하얀 곳에 그저 우뚝 서 있었다. 부란도, 삭풍도, 눈사태나 눈신기루도 없이 그저 어디까지고 깨끗했으며 그만큼 외로웠다. 메르세데스는 걸었다. 그녀가 걷는지 발자국이 따라오는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하고 자신 있는 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표가 덩그러니 섰기 때문이다. 저 꼭대기까지 드리워진 하늘사다리가.


  열 일곱일 때나 스물 셋일 때나 이런 풍경은 한결같았다. 곧 투명한 벽이 엄습해 왔다. 언제나처럼 벽에 손을 대고는 횡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하룻눈이 찐득하게 휘감기며 정강이를 끌어당겼고 서릿바람이 뺨을 갈겨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의식 위로 떠오를 채비를 하던 차에 어떤 위화감이 들었다. 이 벽이란 놈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걸까?


  측량에는 무지하거니와 보이지도 않는 걸 재어 볼 수는 없는 법. 메르세데스는 그저 손 닿는 데까지 발돋움해 볼 뿐이었다. 손 끝에 턱이 걸리지 않으니 마치 하늘 끝까지 솟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뿐이라면 그만이었을까, 이번에는 내뻗은 자세 그대로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 밑을 살폈다. 몸이 기우뚱할 땐 눈신기루에 속은 것처럼 기겁했다. 어처구니없게도 허리 아래로는 휑뎅그렁하게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놈의 벽은 허공에 둥둥 떠 있단 말인가? 법칙이 어그러진 걸까, 자각몽이 뒤틀린 걸까? 찾을 필요 없는 답을 찾으며 틈을 따라 굴러들어갔다.


  그놈의 투명 벽을 넘었지만 썩 대단한 감회가 들지 않는다는 건 제가 생각해도 제법 뜻밖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십 년을 넘게 넘지 못한 장애물이 아닌가? 하지만 그럴 법도 한 것이, 안쪽이건 바깥쪽이건 무한정한 천년설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발자국마저 재깍재깍 흩어지니 무엇도 온전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하늘사다리까지 아직 까마득하게 멀다는 사실 외에는. 


  메르세데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정표는 하나뿐이며 할 일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저 걷기만 하면 될 거라는 짐작은 알량한 경험칙에 불과했다. 얕디얕지만 분명하게, 밴시의 포효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눈신기루에 익숙한 만큼 못 들은 체를 했지만 몸뚱이만큼은 차선책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레인저였다. 낙관을 밀쳐내고 비관을 껴안아야만 오래 살아남는 족속인 것이다. 


  어느새 손에 보우건이 들려 있었다. 처음부터 무장했던 걸까, 자각몽의 도움인 걸까? 작은 노스윈드는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을 삭풍에 씻어 보냈다. 개머리판, 손잡이, 장전손잡이, 가늠쇠와 가늠쇠울……. 어느 쪽을 봐도 알렉산더에 와서 6년간 정이 든 무기가 틀림없었으니까. 활대를 전개하고 설상키트에 작열탄을 물렸다. 천년설이건 하룻눈이건, 크레바스건 빙식곡이건 어느 싸늘한 피오르드건 얼어붙은 능선이건 가야 할 길이면 돌파할 밖에. 하늘사다리가 기다리는 게 이 길 끝뿐이라면. 메르세데스의 눈이 다이아몬드처럼 까마득하게 빛났다.


  작열차가 레일 틈에서 벌컥 튀는 데 맞춰 눈이 뜨였다. 폐가 쓰라리고 아득한 게 여느 때처럼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었다. 타당, 타당, 타당……. 정신을 채 덜 챙겨 꾸물럭거리던 그녀는 이어지는 요동들에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콱 찧었다. 스펙터 똥구멍, 팬텀 오줌구멍 등 온갖 욕지거리가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메르세데스는 아직 숨이 붙은 설상 키트에 수은 회중시계를 비춰 봤다. 네 시 반, 이제 반 시진 즈음이면 버그 파이크를 지나가게 되리라. 설상화 뒤축으로 방한포 번데기를 들쑤시자 곧 일리아나가 달군살 맞은 설종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배도 채워야 하고 방한포도 갈무리해야 하니 썩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크레바스 아래 처박히고도 같이 구질구질하게 솟아난 전우조답게 어떤 부부나 연인보다 합이 더 잘 맞았다.


  이끼와 지방이 뒤섞여 끓는 냄새가 알싸하게 올라올 즈음 두 여인은 다시 엉덩이 붙이고 나란히 앉았다.


  “생각해보면 양동이나 돌격조로 따로 움직이긴 해 봤어도 애초에 둘이 외따로 임무 하나 맡아 나온 건 처음이네.”


  “눈귀신 놈들한테 한두 명으로 꼴아박을 수는 없으니까.”


  메르세데스는 섬유질을 질겅질겅 씹으며 심드렁하게 지껄였다. 타격대가 아니라 정찰대였다면 또 다를 일이겠지만 전사 노릇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 것이다.


  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듯 지나가는 투로 한 마디가 더 이어졌다.


  “설종이 아닌 거랑 싸우게 되면 더 그럴 거고.”


  설종들은 지독하지만 인간들은 참으로 여러 가지 뜻에서 그보다 더한 법이다.


  노스윈드 전우조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식기를 대강 훔쳐내고 군장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고 지고 갈 필요 없이 비싼 장비에 잘 눌러 담기만 하면 그만일 테니 마음이 편했다. 짐 결속을 단단하게 끝낼 즈음이 되자 작열차 속도가 확연하게 주는 것이 느껴졌다. 미리 화물칸 외벽 문을 열었다. 성난 외풍이 모로 몰아닥치며 하룻눈이 화물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디를 달리건 그레이트 크랙의 한쪽 빙벽밖에는 안 보일 터, 아니나다를까 구경거리라곤 없었다. 그저 얼음에 그저 눈인 철길을 작열차가 헤치고 지나갈 뿐. 선두에서 제설 로터리가 돌면서 선로에 쌓인 눈더미를 헤치는 덕에 작열차 반대편 끄트머리에서는 마치 눈폭풍이 사방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이 겨울에 정면 돌격하기 위해서는 이다지도 큰 쇳덩이를 빚어야만 하는 것이다.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그 광경을 두고 휑하니 열린 끝에 걸터앉아 장구류를 꼼꼼하게 갈무리했다.


  플랫폼이 보이자 자율기동 군장을 번쩍 안아들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장비는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고 싸늘한 바닥을 형편없이 굴러야만 했다. 대기 중이던 물류대원이 몇 허둥거렸지만 두 여인은 설종처럼 악착스레 튀어오르며 손을 내저었다. 이 정도는 유별 떨 깜냥이 못 되니까. 보급특급이 경적을 울리며 화염을 와락 토했다. 가속하며 사라져 가는 작열차를 우두커니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굴절된 선로가 빙벽 너머로 대번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버그 파이크에 주둔하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승강 컨베이어를 타는 데까지 이십여 분이 더 걸렸다. 그레이트 크랙 서쪽 사면에 올라서자 낮은 능선이 천년설로 싸늘하게 막아섰다. 반대편으로 보이는 버그 파이크, 송곳 같은 얼음산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으며 여느 작전 때 넘곤 하던 빙식곡, 거대 능선에도 견줄 만한 게 못 되었다. 메르세데스는 다리를 내뻗었다. 설상 두건과 방한포에 싸인 몸이 삭풍 앞에 홀쭉하게 나부꼈다. 반극성기인 만큼 부란에 시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칼바람과 평시의 눈발뿐이라면 협만으로 넘어가는 길은 수월할 터. 설상 자율기동 군장이 작열탄을 물고 하룻눈을 헤치며 철컥철컥 뒤를 따랐다.


  두 명과 두 개 분 발자국이 설상기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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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1.06. 17:39

상등사수에서 눈치를 채야 했는데.. 어느새 7년이 훌쩍 지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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