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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글로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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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25 Jan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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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관문수비대의 장파 통신기를 빌려 보고를 마친 두 여인은 쌍쌍이 떫은 표정이 되었다. 레인저 사령부에서는 한발 앞선 보고로 성화 교단의 돌출 행동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나 의회의 거부권 행사로 대규모 에스코트 파견이 계류된 상태라는 것 같았다. 샤르코 협만은 설종들에게서 안전한 곳이니 그런 파병은 성화 교단에 엉뚱한 빌미를 줄 수 있다는 논리로. 이쪽에 도움되는 이야기는 물류관리국의 협조로 버그 파이크에 여객 작열차가 대기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결국은 거기까지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메르세데스는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신경질적이었다. 그야 뭐 같은 상황이 분명하니 누가 되었든 툴툴거릴 만했지만 분명 그 이상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이브제니아의 짐을 인수하기 위해 같이 엄폐호로 내려갔을 때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라는 게 실을 물건이라고는 붉은 설상복 네 벌뿐이기 때문이었다. 아닌게아니라 황당하긴 했지만 쓰잘데없는 율법서니 뭐니 하는 게 일절 없어 수고가 덜한 면도 있지 않겠는가? 일리아나는 그런 생각으로 괜히 친구 쪽을 삐뚜름하게 쳐다봤다. 얘가 오늘 왜 이러지, 하는 투로.


  메르세데스는 그 빨간 옷들을 자율기동 군장에 결속하기가 무섭게 대단히 불손한 투로 지껄였다.


  “이것 보세요, 선지자님.”


  “여기 수비대원들보다는 훨씬 낫네요, 메르세데스. 이브제니아라고 불러 줘요. 전 당신 선지자는 아니니까.”


  “이브제니아, 이건 무슨 생각이에요? 미…….”


  미쳤냐고 할 심산이었겠지만 이브제니아 쪽에서 빙그레 웃으며 끊어버린 덕에 없는 말이 되어 버렸다.


  “붉은 군단이 굳이 안 나서도 될 일이니까요.”


  “공동지란 건…….”


  “날 가르칠 필요는 없을 텐데요.”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마음에 안 드는 여자, 그렇게 낯짝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브제니아는 이런 대화를 즐기기라도 하는지 마냥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과장되게 양 팔을 벌려 보였다. 밉보인 다음에야 아주 얄미운 비아냥으로 보였다.


  “제 앞에 역전의 용사가 둘이나 있는데 겁낼 거 없지 않나요? 전 이왕 불의 사도들을 위해 먼 길 떠난 김에, 불꽃처럼 즐거운 여정이 되었으면 하는데.”


  그러나 선지자께서는 영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쭉 뻗은 자세 그대로 메르세데스를 와락 덮쳐 껴안았으니까. 메르세데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주먹으로 붉은 두건 꼭대기를 내려칠 뻔할 만큼. 누가 기겁을 하건 말건 천연덕스럽게 달라붙어 설종 새끼처럼 킁킁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메르세데스는 정색했다.


  “이, 이 여자 뭐……. 이보세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흠흠, 구린내. 당신한테선 재밌는 냄새가 나네요, 메르세데스. 재미있어요. 


  순간 메르세데스의 머리가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곁에서 끼어들 눈치를 보던 일리아나는 친구가 반사적으로 울컥하는 걸 팔을 잡아 끌어 말렸다. 저가 누구 놀릴 땐 재미 실컷 보더니……. 슬그머니 흘겨보는 눈길이 지금 누구 편 드냐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누구 편이긴 누구 편이야, 똑똑한 건 다 헛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각은 오감 중 유일하게 본능에 호소하는 데가 있지요. 이성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정신이세요?”


  “야, 메르. 그런 거 하지 말라는 명령이잖아.”


  그제서야 이브제니아는 순순히 두어 걸음 물러섰다. 일리아나는 희한하게도 두건 아래로 묘한 눈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르세데스는 ‘난 냄새 안 난다고!’ 따윌 중얼거리며 친구 손을 툭 걷어치웠다. 그렇잖아도 일이 많이 엇나간 와중에 호위해야 할 사람과 기싸움이나 계속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브제니아는 양 손바닥을 샥 내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깊이 눌러쓴 방한복 두건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랬다.


  “칭찬이에요, 이거.”


  “누가 많이 하던 말이네, 메르. 앞으로 또 저래라.”


  “시끄러워.”


  환송 아닌 환송을 받으며 관문을 나와 협만 남단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세 명으로 불어난 일행은 익숙지도, 예상 범주 내에 있지도 않았다.


  수십을 넘는 배화주의자 병정들과 기싸움을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앞에서는, 하물며 일개 레인저로서는 일이 계획대로 풀리는 게 제일인 법. 사람의 적은 설종뿐이 아니다. 크레바스, 부란, 눈신기루, 눈사태……. 저들 몸만 건사하자면야 어떻게든 되겠으나 전사도 아닌 샌님을 단 둘이서 지켜내자면 어지간한 일이 아닐 터.


  개중 제일 걱정인 건 눈신기루였다. 반극성기에는 눈폭풍이 잠잠하나 역으로 눈신기루가 만연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 시뻘건 짐덩어리가 언제 지랄병을 할지, 제멋대로 크레바스에 와락 빠질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뭇사람이라도 천직에 따라 하이브 안에서 태어나 한 발짝도 경계를 넘지도 않고 죽는 사람이 숱하니 저 빨갱이 예언자라면? 그런 사람이 이 겨울의 독기 앞에 어찌 될른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으리라. 낮은 눈언덕과 약한 삭풍, 눈막대로 안전한 길에서 너무나 낯선 걱정거리였다.


  앞서 걷는 둘이 교대로 뒤를 힐끔거리는 데서야 백치라도 무언가 눈치를 챌 일, 하물며 선지자라는 자가 어련할까? 


  이브제니아는 우뚝 멈춰 서더니 별안간 방한 후드를 젖혔다.


  불을 녹여 뽑아낸 듯한 머리칼과 적색으로 반투명한 눈. 그녀는 루비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를 손짓 없이 잡아끌었다. 두 레인저를 흠칫하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저 여자 뭐야, 뭐 저렇게 생겼어? 아무래도 관문 요새 내에서도 꽁꽁 갈무리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감춘다기보다는 적절할 때 내보이기 위해.


  “저는 노예였어요.”


  “노예?”


  “당신들한텐 공동지와 물류동맹이라는 울타리 안쪽이 전부겠지만 그 바깥에도 겨울은 우뚝하지요. 그만큼 사람은 더 추악하고, 억척스럽고.”


  토악질을 하는 듯한 구담이 곧장 이어지기 시작했다.


  “파르웰 하이브라는 곳이 있었어요. 루스카야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아니, 떨어져 있던 데라고 해야겠네요. 당신들, 성이 노스윈드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거기선 그런 가엾은 치들을 ‘겨울에 씻긴 연놈들’이라고 뭉뚱그려 불렀어요. 고아나 사생아 따위는 인간이 아니어서 양수가 아니라 눈바람에 쓸려 나온다는 거예요. 그 외에 작열탄을 빚지고 못 갚은 사람, 이끼나 플라나리아, 설종 껍데기 따위를 훔치다 붙들린 사람……. 남의 열에 손해를 치고 보전을 못 해주는 그 길로 그 대열에 합류하도록 돼 있었어요. 참 사람 아닌 사람이 흔해빠진 곳이었죠. 두 번째 기회? 엔셀라티카에서 그런 건 사람의 권리지요. 다시 말하지만 그네들이란 사람이 아니라, 겨울에 씻긴 연놈들이니까. 장정들은 하루 열다섯 시간 화물을 나르고 여자나 애들은 그걸 똑같이 하거나……. 그것보다 못한 걸 받아들여야만 했어요. 설명이 너무 장황했지요? 저런 걸 노예라 안 하면 무슨 단어로 쉬이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노예.”


  하룻눈 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서 듣기에는 참으로 거북한 이야기였다. 이브제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지껄였다.


  “먹고 자는 거 외엔 중노동밖에 못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신세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신네 물류쟁이들은 냉담자들이면서도 어마어마한 세렌디피티를 누려 성화 밖에 어떤 겨울이 있는지 몰라요. 아무것도. 극저온? 부란? 크레바스? 칼바람? 눈신기루? 눈사태? 오, 진짜 겨울은 사람이라는 짐승 속에 있어요. 인간이야말로 진짜배기 설종이라고요. 메르세데스, 일리아나, 방금처럼 실소할 수 있는 건 옆에서 작열탄을 나르다 쓰러져 버린 아이가 온데간데없더니 다음 날 공회당 바깥에 알몸으로 버려져서는 하룻눈에 하얗게 뒤덮여 하루고 사흘이고 닷새고 이레고 얼어붙는 꼴을 못 봐서라고 하겠어요. 얼어죽은 시체가 무수히 짓밟히고, 천년설 안에까지 파고들어서야 겨우 안식에 드는 그 꼴을 못 봐서라고 하겠다고요. 저는 개중에선 운이 좋은 편이어서 난방탑 연료투입구에서 살았어요. 문드러진 이끼 반 탄가루 반인 끼니를 씹으며 작열탄을 퍼넣고 퍼넣고 또 퍼넣었죠. 널름거리는 불구덩이를 보면서 피차 이거 없인 다 죽은 목숨인데 다르면 뭐가 달라 누구는 연놈들을 부리고 누구는 겁탈당해 죽어 나자빠지는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몸뚱이가 부서지기 전까지 생각할 시간 따윈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멋쩍게 웃으며 설상 자율기동 군장에 털썩 걸터앉았다. 마침 이야기가 고조되려는 참이었다.


  “결국 그 불구덩이에서 저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불 앞에 평등하리라! 아닌게아니라 정말 그렇지요. 난방탑 꼭대기에 눌러앉은 돼지건 겨울에 씻긴 계집애건 불속에선 똑같이 끓는 고깃덩이가 아니겠어요? 기껏해야 숯더미로 화하는 거지요. 아, 저는 쾌감을 느꼈어요. 그리고는 그대로 연료투입구에 몸을 던졌죠. 농담처럼 들리나요? 냉담자들이란! 그렇게 되어 있었고, 그렇고, 그렇게 될 일이었습니다. 걸치고 있던 넝마가 불타 흩어지면서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 거죠. 그 길로 벨트 컨베이어를 타고 작열로 노심에 들어갔다 나왔고, 그만큼 확신으로 차게 되었어요. 성스러운 불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에. 그 길로 아주 반대편인 잿구덩이에 툭 굴러떨어졌지요. 허옇게 타버린 잿가루에 파묻혀서요. 낑낑거리며 기어나오니 온갖 사람들이 다 혼비백산해서 달아났어요. 가엾은 사람들! 마음 같아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말씀을 전하고 싶었어요. 불 앞에 평등함에 대해, 성스러운 불에 대해, 붉은 지구라트에 대해, 언젠가 이룩할 혁명에 대해……. 하지만 응당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성화란 곧 업화이기도 하죠. 이다지도 죄악에, 겨울에 휩싸인 도시라면 불길로 씻어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릴 밖에! 저는 그 길로 파르웰 하이브에 있던 모든 작열탄을 일거에 타오르도록 했습니다.”


  이브제니아는 숫제 연극투로 양 팔을 뻗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그때만큼의 황홀함을 다시 느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정말 대단하고 아름다운 불이었어요. 인간이 지은 알량한 구조물에서 버그 파이크 꼭대기보다 높이 화염이 솟고, 이틀이나 세를 잃지 않고 찬란하게 끓어올랐으니까. 잔불이 식고 잉걸불이 꺼지며 겨울이 다시 찾아드는 데 그 갑절이 걸렸죠. 루스카야 하이브에서 극성기에 무려 이백 리 길 부란을 뚫고 군단을 보낸 게 참으로 별일이 아닐 정도로. 저는 살아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었지요. 잿더미 속에서 일어난 전 전과 같지 않았어요. 같을 수가 없었어요. 전 성화 속에서 다시 태어난 거예요. 그 섭리 속 지혜를 전하기 위해. 불 앞에 평등하리라, 불 앞에 평등하리라.”


  메르세데스는 드러내놓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오랜 분들이라도 불구덩이에 투신하고서 성할 수는 없을 터.


  “원, 거짓말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기는 했지만…….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이브제니아는 불꽃처럼 웃었다.


  “지금 그 설상키트를 열어서 안에 든 걸 죄 제 얼굴에 쏟아 보는 건?”


  “그만 합시다. 너도 좀, 메르. 어디 애들도 아니고.”


  “둘이서 하나라는 건 좋네요, 일리아나.”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제 주의는 똑똑한 사람들이란 피곤하다는 거여서.”


  일리아나는 그르렁거리는 친구 엉덩이를 툭 쳤다. 짜증이 치밀었는지 순간 설종을 겨눌 때나 드는 눈빛을 흘긴 것 같았다. 이브제니아는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무슨 득을 보려고 부득부득 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기선 제압인가? 아니면 저런 식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건가? 호기심이 동하는 것도 같았다.


  휴식 아닌 휴식을 하게 된 일행이 다시 하룻눈을 헤치고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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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1.29. 22:58
멜리산드레가 생각나네요. 올 때는 무사히 왔으니 돌아갈 때에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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