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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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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1 Sep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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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이후 일정에는 부양선이 필요했다. 뭐, 고귀한 왕족이 수십 킬로미터씩 걸으며 겨울 바닷바람에 떠는 건 제법 볼만할 테지만 정작 우리도 훈련이 아니고서야 그런 무식한 짓은 않으니 말이다. 국경수비대는 선착장에서 일동 경례로 시찰단을 배웅해 주었다. 오르데나 왕태자에게 거수례라니, 두고두고 안줏거리가 되겠지.


그는 삐뚜름하니 앉아 시종이 권하는 다과도 물리치고는 심드렁하게 바다를 보았다. 강철비 무덤, 거인의 길, 어거스틴 운하와 팡테옹……. 이후 일정은 태반이 아롤터에 오르데나 왕국이 진주하던 때에도 있던 곳들로 짜여 있다(이름이야 달리 부르겠지만). 우리 국립묘지인 팡테옹만을 제외하고. 세르피냥이나 라 오르데나의 꿍꿍이는 모를 일이나, 뻔한 일로 보였다.


내가 ‘선수를 곧장 팡테옹으로 돌리는 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펠릭스 오르데나는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해도 문제구만, 그래도 절차나 수순이 중요하지 않겠소?’라며 박장대소할 뿐이었지만. 그렇게 의례적인 시찰이 끝나고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팡테옹은 지협과 대륙의 접경에 자리잡고 있으니 국경수비대 관할지에서는 남쪽 끝까지 내려온 셈이다.


팡테옹 관리위원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한 후, 시찰 행렬은 회랑을 조심조심 거닐었다. 유사 양식 건축물이 오르데나에 즐비하거늘 이곳에 무슨 미련이 있을까? 전몰자에게 경의라도 표할 심산일까? 내 상식선의 짐작과는 달리, 펠릭스 오르데나는 중앙 돔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며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진자 줄을 따라 눈을 내리깔았다.


아롤터의 진자. 우리 과학자 제레미 푸코가 고안한 물건으로, 지구의 자전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그 장치가 팡테옹의 돔에 설치되어 있었지. 군인인 내가 얼른 생각해 낼 물건이 아니지 않나……. 여하튼 그는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일 없이, 진자가 흔들리며 바닥에 놓인 막대인지 못인지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오더니 곧 멎었다.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던 모양이지. 나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이 왕족의 관심사를 괜스레 넘겨짚어 득 볼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저 진자에서 무슨 상징성을 찾는 건지, 진동의 미학에 심취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한숨 돌릴 곳이 필요했던 건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오르데나 왕태자는 한 발, 아니, 두세 발 늦게 물어왔다.


“이게 아롤터의 진자가 맞소, 베릴?”


“예, 펠릭스 전하.”


그는 끄덕거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무언가 묻는다기보다는 확인하는 투로, 또 생각을 정련하는 투로.


“이 친구는 32시간 주기로 한 바퀴를 도는 게 맞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펠릭스 전하.”


“참 재미있더군. 미리 공부를 좀 해 왔지. 사실 진자는 중력과 장력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흔들리지만 지구의 자전이 그렇지 않도록 보이게끔 한다는 게 말이오. 전향력이라고 하던가? 그래……. 자연이란 참으로 오묘하지 않나 싶소. 우리 세상의 역사가 진실을 가리우는 온갖 오해로 가득한데 하필 자연도 비등히 난해할 게 또 뭐냔 말이오. 그저 단순하면 좋았을 것을! 보이는 건 맞는 거고, 안 보이는 건 틀린 거고. 그러면 누구든, 어떤 조직이든, 어떤 나라든 참 살기 좋지 않겠소? 역사가 그런 피비린내 난리굿이 되지 않아도 되었을 거란 말이오.”


턱을 쓰다듬으며 쏟아내는 장광설이 정작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희한한 통섭에 닿아 있었다. 나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불쑥 되물을 충동이 들고 말았다.


“하나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펠릭스 전하?”


“아깐 잘만 묻더니. 물론이오.”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왕태자는 돌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워낙 시원스러워서 놀리는 걸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웃음소리에, 오르데나 수행단은 또 일이 잘못되었는지 살피며 수선스러워졌다.


그는 한참이나 웃고는 관람 펜스를 탕탕 두들겼다. 무슨 환기가 필요하기라도 한지 그 속 빈 금속 울리는 소리에 이어 다시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래. 베릴 클로스테르망, 내가 어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 아오? 다른 재주는 없어도 꼭 필요한 하나를 가지고 있는 덕이라 하겠소. 사람 보는 눈이지. 냄새 맡는 코라고 하는 쪽이 더 적절할까? 어쨌든 난 사람을 알아볼 줄 아오. 그리고 수행이랍시고 에르사예즈에서 내게 붙인 첩자를 보고선 단박에 구린 냄새를 맡았지. 나랑 비슷한 족속한테서 나는 냄새 말이오. 크핫핫, 그렇게 사람을 알아봤으면 적소에 써야 인지상정이 아니겠소?”


“……저는 오르데나 사람이 아닙니다, 펠릭스 전하.”


썩 멋대가리없는 말이었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항변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내가 뭐라고 이런 말에, 일에 휘말려야 한다는 말인가? 자진해서 끼어든 것도 아니거늘…….


그래, 사람 됨됨이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내가 사실은 이상주의자라는 것도 맞는 말일지 모를 일이니까. 무슨 대답을 듣게 될 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아니랬소? 어디 오르데나 사람한테만 쓸모가 있고, 에르사예즈 사람한테는 쓸모가 없나?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이오.”


펠릭스 오르데나는 선선한 태도로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일정도 다 끝났으니 감회나 한 번 말하고 돌아가겠소’라며 자리 마련을 부탁했다.


내 보고로 헌병대에서 팡테옹 입구에 임시 연단을 쌓고 접이 의자를 가져와 배치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 사람들은 이제 공연스러운 일에서 놓여날 수 있어 참 기꺼운 것 같았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겠지. 연설 준비가 되는 동안 곁에 서서, 시종이니 시녀니 하는 치들 낯빛을 살핀 결과가 그렇다는 말이다.


오르데나 왕족엔 달변가가 흔하다. 왕성인 엘 시드 궁의 별명이 엘 팔라시오 데 라스 우바스, 포도송이 궁전일 만큼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암투에 몸 숨길 알알이 요새 같은 전각이 즐비하니까. 그런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소굴에서 제 사람 그러모을 언변이란 총칼보다 중할 것이다. 그래, 총칼. 저 왕태자가 떠벌린 게 그저 궤변은 아니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 어줍잖은 추론이 어쨌든, 그는 채비가 다 되자 마자 증폭기를 잡고 태연하게 섰다. 내가 아는 한 원고 따위는 없었지만 태연하리만치 완벽한 연설이 시작되었다.



「우리 국모 발렌티나 여왕께서는 항시 맺고 끊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맺고, 끊음. 위대한 통합자요 철인이신 선왕께 맺음끝과 이음끝이란 개와 고양이처럼 달랐을 터이나 범인과 그 군주에게는 흐리터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호함은, 필시 불만과 유감, 오해, 곡해, 몰이해, 앙금, 원한, 시기와 반목, 염증, 분노, 증오, 차별, 분리, 배척이라는 종양으로 불거져 문드러지고 또 문드러져 왔습니다.”


이건 우리 오르데나 왕국의 이야기입니다. 또 당신들 에르사예즈 공화국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혹자는 ‘프로마주 돼지들의 왕 프랑수아가 우리를 찢었다’하며 허투루 미워합니다. 허나 그 왕조를 축출하여 무로 돌린 것이 지금 그 민족 있음이라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또 혹자는 ‘미치광이 전통주의자들은 홀린 꼭두각시처럼 전쟁질을 즐긴다’하며 함부로 비난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오르데나 덕에 반도에 흐른 피의 무게를 같은 분동으로 저울에 올려 버릇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구의 잘못입니까? 왕국? 공화국? 세레네이 민족? 아롤터 민족? 아니면 양국 전쟁군주인 에두아르도 오르데나나 프랑수아 세르피냥? 아닙니다. 모두의 잘못이며, 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전지하지 않으며 현인과 영웅만이 이따금 그 언저리에 닿는 까닭입니다. 다만 나는, 우리는 과오를 인정하고 수습할 수 있고, 그리 해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가르치는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맺고 끊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혼돈에 큰칼을 대어 끊어낸 질서의 뭉치이듯 맺음은 항시 끊음 다음에야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신 앞에, 모든 정언에, 위대한 국모께 맹세코 양안의 역사를 새로이 매듭짓고자 합니다. 나 펠릭스 오르데나는 오르데나 왕국의 첫 번째 왕위계승권에 근거하여 우리 왕국이 이 아롤터 지협에 주장하여 온 영토권 포기를 선언합니다. 이는 진정 오류로 점철된 두 나라 관계를 일신할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실은 저 핏줄에는 말솜씨가 아니라 어떤 말의 권능이 술식으로 새겨져 대물림되는 게 아닌가, 지근거리에서 듣는 웅변은 그만치 충격적이었다.


“펠릭스 전하…….”


“만났을 때 힘 빼도 좋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 어디 윗선에서 시시한 보고서 같은 데 관심을 가지겠냐 이 말이오, 베릴.”


아닌 게 아니라 참말이었다. 지금쯤 세르피냥에서는 마소 통신을 받고 왕위계승권자의 저의며 뒷배를 분석하느라 비상이 걸렸을 터……. 그 양반이 포트 아롤터 급식소에서 병영식에 관심을 보였다느니, 아롤터의 진자를 한 시간 남짓 관찰했다느니 하는 보고는 별반 화젯거리에도 들지 못할 것이다.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난 셈이다. 뭉크러진 치즈라도 된 것처럼 힘이 빠졌고 그건 피차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전대미문의 행사를 그야말로 충격적인 연설로 마무리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부양선에 올라탔고 지협 연안을 따라 에르사예즈-오르데나 국경 방면으로 돌아가는 동안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가타부타 떠들 필요도 없었을 것 같고.


포트 아롤터 군용 선착장에 사령부 장교 일동 영접을 나와 있었다. 북쪽 사람들 표정은 아침나절과는 뻔히 달라 보였다. 언제는 애송이를, 뻔한 수괴를 낮잡아보며 실눈을 흘겼다면 이제는 한두 걸음 물러서 세모눈으로 살피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지란 곧 두려움인 법. 이들이 요새를 짓부수겠다는 이웃 군주들에 익숙하며 적이란 그런 치들이라고 수백 년 곱씹어 왔다면 이제 저 왕태자를 철저히 규격 바깥의 존재로 받아들여야만 하리라.


그래, 진짜배기 적이 있다면 적어도 왕당파 명토를 박은 표적지 허수아비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펠릭스 오르데나는 ‘아주 뜻깊은 자리였소’라며 그저 선선히 악수를 건넬 뿐이었다. 예의 사람 보는 눈으로 보아 겨우 그 정도라는 거겠지. 그럼 여기서 대외안보총국 앞잡이 노릇에 만족하고 있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튼 소리나 지껄일 양반은 아닐 텐데……. 당장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결론밖에는 낼 수 없어 보였다.


왕실근위대 마중이 꼭 정각에 도착했다. 국경검문소 서너 발짝 너머에 도열한 흑의, 그 선두에 선 풍채가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 두 개 견장, 자색 망토와 허리춤의 오르데나 보검……. 저 자가 왕실근위대 사령관인 베네딕토 오르데나라는 사실이 어렵잖게 보였다. 위압이 느껴질 정도로 훌쩍 거리를 죽인 그는, 국경선에 워커 코를 꼭 맞닿게 했다.


“형님. 이런 일을 벌이실 거라면 말씀이라고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아마 내 상관에게 저런 카리스마가 있다면 곧장 읍소하고 말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왕태자는 천연스러웠으며 능청을 부리기까지 했다.


“말했으면 기를 쓰고 못 하게 했을 게 아니냐? 아, 이쪽은 오늘 나를 수행한 베릴 클로스테르망 중위다. 베릴,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동생인 베네딕토 오르데나.”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베릴 클로스테르망 중위입니다.


내 경례에 답은커녕 목례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치떠, 낯짝과 계급장을 훑을 뿐. 그 한 번의 제스처가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네딕토 오르데나라는 인물의……. 이런 자를 아래에 둘 수 있는 펠릭스 오르데나란 도대체 어떤 위인이라는 말인가? 장자라는 혈통의 우위 하나로 가당할 서열이 아니지 않겠는가?


왕태자는 나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며 ‘또 봄세, 베릴 클로스테르망!’이라는 아리송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떠났다. 이쪽 국경에서 저쪽 국경, 알량한 완충지를 도로 건너는 길에 나는 거수한 채 부동 자세로 그저 서 있었다. 오르데나 국경검문소 문이 열리고, 검은 제복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는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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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09.05. 17:23
포도송이 궁전하니 룬의 아이들 포도원이 생각나네요. 펠릭스와 베네딕토 간 생각의 차이가 그들 서로에게, 또 테레사와 마티아스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대한 연쇄로 다가가는 모양새군요. 통섭이란 낱말을 무척 오랜만에 만나봅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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