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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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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37 Mar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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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다시 시커먼 독방에 처박힌 테레사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대개는 시체, 잘하면 초주검으로 놓여나는 소굴에서 이게 어딘가 싶었다. 다음번엔 근위대가 무슨 마수를 뻗칠지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신줄부터 잘 챙기는 게 당장 상책일 터. 어떡하면 시간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지 가만히 궁리하는 정도가 전부겠지만.


헌데 이번에는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철창이 곧 열렸다. 입이 바짝 탔다. 이번에는 형틀에 묶어 아주 족치려고 끌어낼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테레사 타티아나 알마스 씨, 나오십시오.”


“……또예요?”


“석방입니다.”


“뭐라고요?”


내가 그사이 가는귀라도 먹은 건가,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위대원은 말대꾸를 들어 불쾌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석방입니다. 다만 당분간 라 오르데나를 떠나지 않아야 할 겁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십시오.”


저 말조차 심문의 일환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곧이곧대로 걸어 나가려는 걸 족친다거나, 잘 속여넘긴 뒤 취조실에 처넣어 동요하게 한다거나. 물론 여기 잡혀 들어와 생각대로 된 일이 없듯 그런 상상마저 잡생각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곧 포대를 쓴 채 비린내에 입을 찧으며 끌려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꾀죄죄한 꼴로 어느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태양이 새삼스럽다니, 참 생뚱맞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늘이 높고 또렷이 맑다는 세레네이의 가을에……. 현실은 무심하며 때로 상상을 알량히 만들고 만다. 테레사는 다리를 질질 끌었다. 힘없이 대로변을 찾아 나오자 라 오르데나는 그저 한결같았다. ‘오르데나, 다이달라이트 클리켓 결승전에서 셀든버러에 신승!’, ‘자, 이제 클리켓이 어느 나라 국기지? 세레네이 대표팀의 사자후’, ‘종합우승을 기정사실로, 초격차를 향해 진격하는 오르데나’. 사람들은 올림픽에 쾌재를 부르며, 시원스레 내던진 호외가 더미로 거리에 날리거나 하수구에 처박힌다. 그 가운데 그녀가 있다. 몇 날 며칠 묵은 블라우스에 땟국물로 칠갑하고 이제는 저가 선 거리가 어드메인지조차 모르는 채. 지금껏 유리벽처럼 느껴졌던 것에 이제는 보라색 도료가 처발린 것이다. 영광 오 영광, 모국의 대지여 가슴에 깃든 만고여. 전통 오 전통, 민족의 얼이여 피로 지킬 혼이여 이름에 두른 자색 베일이여……. 행인들은 슬금슬금 피하고 거리에 쩌렁쩌렁한 국가만이 귓전에 갉작거렸다. 온갖 기물의 어슴푸레한 방사광 무리와 함께.


여기가 어디야, 집에 가고 싶어. 테레사는 그렇게 주절거리며 어슬렁댔다. 소르티하 길이나 세레네이 길, 여타 출퇴근길 인근 어느 거리도 아니었다. 다소 한산하고 후줄근한 게 변두리 어디가 아닌가 할 뿐. 표지판이든 무엇이든 빨리 찾아야 한다. 길 위에서 해가 떨어지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으니까.


문득 저 멀리 십자로가 보였다. 그 즈음이면 무슨 표지든 명판이든 눈에 뜨이지 않을까 싶었다. 외투며 지갑이며 하나 돌려받은 것 없이 윗옷에 바지바람으로는 으슬했다. 평소라면 기자 가방에 오만가지를 쑤셔 박고도 당당했을 걸음이 후들거렸다. 춥고 배고프며 무엇보다 아뜩했으니. 괜찮은 걸까? 정말 풀려난 걸까? 누가 감시하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인지 무슨 공사 명목으로 쳐진 비계며 가림막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림자 아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이달라이트 시료, 각종 자재와 공구는 있되 인기척은 없는 곳. 아무래도 평소라면 얼른 뒤돌았을 곳을 걷노라니 삽시간에 괴한이 몇 나타났다. 그녀는 기겁하며 발버둥했지만 무슨 악다구니를 쓴들 사내들 손아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가설물 아래에는 부양정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곳에 처박히며 천 가지 가정과 만 가지 생각에 익사할 것 같았다. 이게 왕실근위대 방식인가? 이제 진짜 뭔가 시작되는 건가?


“선배, 진정하세요.”


“……일라리오?”


테레사는 그 길로 멀뚱히 굳어버렸다. 괴한들이 곧 물러나며 풀어주는 걸 보아 무슨 꿈을 꾸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납치되고 보니, 후배가 부양정 상석에 앉아 싱글거리고 있는 이 상황이. 사실 마티아스의 암호문을 수신한 그 순간부터 줄곧 악몽중이니 또 별다를 건 없으리라. 말하자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부득불 원위치한 정도겠지.


일라리오는 동그래졌던 선배 눈이 제 모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이 없었다지만 취조실 신세를 졌던 사람을 함부로 다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좀 괜찮으세요? 시간이 없으니 요점만 하죠. 선밴 지금 아주 위험합니다. 이런 게 잘못 발각되면 저도 위험해질 정도로요.”


“그래……. 그렇겠지.”


“이것 때문인가요?”


주섬주섬 나오는 뭉텅이를 보아하니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마티아스가 남긴 증거 서류. 무사히 일라리오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허나 무사는 무사고 그 다음 일은 그 다음 일인 법. 테레사는 일라리오가 일에 잘못 말려들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정이 없는 사이는 아닐 테니 말이다.


“봤어?”


“아뇨. 처신을 잘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봐 버리면 잡아뗄 수가 없게 되잖아요?”


“너, 사내놈이 회사에서 무슨 내숭을 떨면서 산 거야? 만날 띨띨해 보이더니, 지금은 사람이 아주 달라 보이네.”


“글쎄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건 진짜 위험한 게 맞나 봅니다. 안 보길 잘 했어요.”


“맞아. 아마 맞을 거야. 그런데 적어도 저쪽에선 이게 이런 데 있다는 건 모르지 않나 싶어. 그물을 원체 광범위하게 뿌리다 보니, 내가 걸려든 거겠지만.”


테레사는 뜸을 들였다.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일이었다. 아무려면 일라리오가 수사관마냥 쓸데없는 걸 캐물을 리는 없겠지만…….


“이게 내 주변에 있다는 걸 알면 물을 필요가 없는 것들만 물었거든.”


“그렇습니까……. 어쨌든 불행 중 다행이었네요. 어떻게든 선밸 빼돌릴 수 있었거든요.”


정적이 흘렀다. 누가 누굴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소짓는 꼴이 유난스러웠다.


그래, 일라리오 카를로스 소노테르. 이 친구가 명가의 후계자라는 건 익숙해지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자기 아래로 배속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네가? 날?”


“정확하겐 누님이요. 양보를 좀 크게 했더니, 좋아라 하면서 손써 주시던데요?”


“누님? 설마 메르세데스 말하는 거야?”


“안부인사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동생이 계승권이랑 바꿔서라도 살리는 걸 도와 달라는 사람이 옛날 친구라니 세상 참 모를 일이라나요.”


표정을 간수하기가 어려웠다. 억만금으로 청탁해도 안 될 일이 덩그러니 제게 굴러떨어졌으니 말이다. 테레사는 평소답지 않게, 연신 머저리처럼 뻐끔거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얼추 아시면서 뭘 물으세요?”


“난…….”


“무슨 말씀 하실지 다 압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선밴 변변찮은 사람이죠. 그렇다고 절 돌아봐줄 처지도 아니고. 생각 참 많이 해보고 내린 결론은 그런들 어떠냐는 거였습니다.”


건너편에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테레사는 이게 무슨 농담도, 수작질도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저 또렷하고 투명하게 참말이었으니까.


“전 누님이랑 다르더라고요. 그저 저한테 줄 게 아무것도 없어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았습니다. 소노테르라는 성을 달고 살다 보니 그런 사람은 지금껏 없었고요. 그것뿐입니다.”


“그, 그건…….”


“뭘요. 제 됨됨이는 타고난 건데 어쩌겠어요?”


글 좀 안다고 뻗대던 사람이지만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렇게 말 못하고 있는 게 정답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라리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러기를 원해 한 일이 아니나, 누구나 그럴 밖에 없을 테니까. 그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됐으니 이렇게 된 거라고 알아주시면 되겠네요. 여러모로 난관이 있었지만.”


“널 좀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또 이런 관계조차 못 됐겠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테레사는 더듬더듬 제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굼뜨고, 어쭙잖아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벗을까?”


“네, 네?”


“뭘 못 들은 척을 하고 그래? 할 거지? 옷, 지금 벗을까?”


“그건……. 선배답지 않은 것 같아요.”


“……나다운 게 뭐야? 그런 게 있은들 지금 나다운 걸 찾을 땐지 모르겠는데. 세상이 지금 날 가만두질 않는데 어쩌란 거야? 내가 지금 무슨 음모에 휘말린 건지도 모르겠다고. 어떡해야 되는 거야? 당장 살아난 걸 기뻐해야 돼? 너한테 고마워해야 돼? 아니면 그 사람이 죽었다며 질질 짜야 돼? 그것도 아니면, 무슨 책략가 흉내라도 내서 진짜로 살아날 방법에 대해 궁리해야 돼? 난 평범한 사람이야. 끽해야 글깨나 쓴다고 헛바람 들었던…….”


그녀는 눈물을 쓱 훔쳤다. 그래, 다 소용없을 거다. 그래도 이렇게 도움을 준 일라리오가 있고 아직 품에 남은 마티아스의 유언이 있다. 쓸모 여하보다 그런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아까 그거 말인데, 내용은 모르는 게 좋겠지만 나한테 따로 들어온 편지에 쓰인 말 정돈 들어둬. 이 나라에서 당장 도망가라고 하더라고. 문서 내용이랑 비교해 보면 오르데나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 같아, 짧은 시일 안에. 일라리오, 잠시 여길 뜨는 게 좋겠어. 마티아스는 헛소리나 하는 사람 아니거든. 네가 믿어 줄 이유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선배.”


“으, 응?”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 땐 은혜 꼭 갚을게.”


“기대할게요.”


일라리오는 예의 태도 그대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천진한 사람이다. 테레사는 그런 생각이 가슴팍에 따사롭되, 사뭇 구슬펐다. 지난 몇 년 안에 누군가에게 이런 평을 내린 적이 있었던가? 그런 사람이 있은들 다음을 과연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게 있다면, 마티아스도 이 사람에게 돌아오는 걸 기뻐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양정은 비계의 골자 사이를 미끈하게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무언가 서 있었는지, 언제 자취를 감추었는지 누구도 알아볼 수 없으며 다만 일라리오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래, 고마운 일이지만 한결 같은 데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의지와 노력 여하와는 엇나가 있다는 것. 당장 할 수 있는 건 바깥 구경뿐이라는 것.


해가 북서로 기울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제 곧 시월이 다할 테니 날이란 걷잡을 길 없이 쪼그라들리라. 눈뜨고 정신 팔면 밤이 내리는 때가 오겠지. 창틀에 턱을 괴었다. 그런들 라 오르데나는 번영과 영광으로 흥청거리고 있었다. 마도의 마자만 들어도 질겁하는 그녀조차 온갖 이기를 당연시했을 만큼. 저 모놀리토가 섬뜩하되 일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것처럼.


저 멀리, 하늘에 뻗은 모놀리토는 사람 일에 아랑곳 않고 그저 우뚝했다. 테레사는 저 시꺼먼 몸체에 뭔가 가외로 달려 있다면 크고, 이글이글 끓는 눈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1.03.29. 22:27

오랜만에 다시보는 영화는 여전히 장엄하더군요. 자막도 장엄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일라리오가 저런 인물이었나 흠칫하게 되는 편입니다. 남자가 사랑을 하면 얼빵해진다는 통설을 정면으로 뒤엎는 ㄷㄷ

초점은 다시 에르사예즈로 옮겨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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