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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의 아카식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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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54 Jan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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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여령
협업 참여 동의

프롤로그

고요하기 그지없는 공간. 일단의 무리가 무장한 채로 정면을 노려본다.

말끔한 검은 머리칼과 금색 띠로 치장된 진회색의 제복. 1미터 50에 이르는 검신과 십자모양의 가드가 특징인 크레이모어류 장검을 움켜쥔 남성이 입을 벌렸다.

“빛의 여신이여! 네 계획도 이제 끝이다.”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일갈임에도 상대방의 분위기는 침중하다. 이 넓은 구역을 다 메우듯 나풀거리는 새하얀 천에 둘러싸인 여신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머리로부턴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여신의 몸은 공중에 떠 있음에도 마치 단단한 지면 위에 몸을 의지한 것 마냥 안정적이었다. 빛에 둘러싸인 그 표정은 구분하기 어려웠다.

“잘도 여기까지 왔군요. 하지만 늦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미 ‘아카식 레코드’에 모든 일은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곧 세계는 백지(白紙)화를 맞이하겠죠.”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자는 뒤를 힐끔 돌아본다. 자신을 믿는 여러 동료들이 굳은 의지로 고갤 끄덕여준다. 이제 결판이었다. 이번 전투로 세상의 존속과 종말이 결정지어진다.

“빛의 여신이여, 리아여. 그대가 그만두지 않겠다면 우린 힘으로라도 막을 뿐이다.”

여신은 답하질 않는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훑는 것이 전부였다. 남자의 검 끝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의 뒤에 자리한 다른 이들 역시 각자 쥔 무기의 궤도를 바꾼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여력도 없다. 설령 지금껏 세상을 지탱해준 빛의 여신이더라도 지금은 그에게 있어 단지 적이자 베어버릴 대상에 지나지 않다. 무엇보다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가 등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모두들 여기까지 고마웠다. 마지막이다. 한번만 더 도와줘!”

남자의 몸이 굽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는 앞으로 튀어나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 뒤를 쫓는다.

“여신이여. 그댈 죽이고 세상은 유지될 것이다.”

여신의 입가와 눈가가 일순 가늘어진다. 잠시지만 그것은 애잔함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무서우리만치 감정 없는 태도를 되찾는다. 곧 그녀의 양 팔과 머리 위에서 종전보다도 더 강렬한 빛이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나무판자로 얽혀 만들어진 작은 집. 중년의 부부와 어린 티가 만연한 여자아이가 근심스런 기색으로 서로를 부둥키고 있다. 제법 풍만한 배와 거칠게 기른 갈색 수염의 남자는 부인과 딸을 등 뒤로 밀어 넣고선 매섭게 문을 노려보았다.

“왔군.”

쾅!

빗장으로 걸어둔 나무막대가 힘없이 바스러지며 문이 젖혀진다. 진흙이 잔뜩 묻은 밑창을 바닥에 문대며 하얀 사제복을 걸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왜소한 체격의 남자는 매부리코를 벌렁거리며 낮은 소리로 혀를 끌끌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이런 곳에 숨어있다고 모를 줄 알았습니까?”

사제 남자는 가슴 부근에 그려진 둥근 원형 속의 새 문양 주변을 툭툭 털어낸다. 먼지가 들러붙은 몰골이 썩 내키질 않는 모양이었다.

“잘도 귀찮게 만드는군요. 신성 리아교를 배반한 행위의 대가는 마땅히 치러야겠지요. 세상의 정화를 이해 못하다니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그의 뒤로 쇠사슬을 이어붙인 중경갑의 장성들이 서성거렸다. 수염의 남자는 힐끔 부인과 딸내미를 곁눈질하더니 곧 매섭게 사제를 쏘아보았다.

“웃기는군. 뭐가 세계의 정화냐. 네놈들이 하는 일 따위 누가 이해하겠어.”

“뭐, 이해 못하셔도 어쩔 수 없겠죠. 정해진 날은 다가올 테니. 여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그 결말도 잘 아시고 계시겠죠?”

사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린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오히려 더 쾌감을 가질 수 있도록 먹잇감들이 발버둥치길 바랐다. 그리고 수염의 남자는 그를 위해선지 충실하게 바람을 이행하고 있었다. 그의 손엔 어느새 단단한 모양새의 메이스가 들린 상태였다.

“이래봬도 나도 망할 교단의 프리스트였다. 그리고 네놈과 같이 이해를 해주지 못하는 자들을 이 메이스로 날려 왔지. 만만하게 봤다간 금방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될 거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다. 벌을 받아도 충분하지. 단, 네놈들에게 받진 않을 것이야. 적어도 네놈들 머리통은 날리고 그 후에 달게 받도록 하마!”

남자의 팔뚝에 근육이 서린다. 육중해 보이는 몸과 달리 그는 날렵하게 사제에게로 접근했다. 뒤로 한껏 빠진 메이스는 무서운 속도로 사제의 관자놀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욱-

“허억!?”

그러나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남자는 갑작스런 상태변화에 당황했다. 생각지 못했던 검이 사제의 뒤편에서부터 그의 가슴팍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손잡이엔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이가 강렬한 황금빛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서 있었다. 검은 이미 남자의 등까지 관통해 뒤로 삐져나온 상태였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뱉었다.

“시, 신의 사...자라니…….”

콰앙! 쾅!

순간 지축을 뒤흔들 정도의 폭음이 사방에서 귀를 괴롭혔다. 창문 너머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남자는 입가와 가슴에서 피를 쏟아내며 털썩 무릎을 찧었다.

“처, 천하의 망할 놈들. 마, 마을사람들과 처자식은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그들은 이미 죄인입니다. 이 마을 자체가 여신 리아의 손길에서 도망 나온 자들뿐이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처사죠.”

“너, 너희들은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럴 리가요. 신의 벌은 우리가 내리는 겁니다.”

사제는 킥킥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채 몇 가구가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불타 사라지는 것은 겨우 수 시간 만의 일이었다.

『아카식 레코드 발동까지 앞으로 28일』

프롤로그 종료.

「세상이 잘못되었다. 그 잘못에 대한 속죄는 새로운 미래에 의해 고쳐나가야만 할 것이다.」

- 은색의 현자 이헬즈 카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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