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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적사병이 나타났다.

이처럼 나라를 흔든 악당은 얼마 전 처형당한 반란자 호국경 밖에 없었다. 누구도 붉은 거울가면과 만난 뒤 사흘 넘어 숨을 이은 적이 없었다. 차마 묻지 못한 시체가 거리 곳곳에 내버려졌고 시궁쥐 떼거리가 들끓었다.

어느 날 멸망한 마을을 빠져나온 집시 한 명이 소문을 냈다. 그 적사병이 강을 거슬러 수도로 왔고, 황궁을 노린다는 끔찍한 소문.


안티노르 백작부인은 현명했다. 백작부인 아래 있는 천 명의 비밀경찰은 빈민가를 틀어막았다. 어린 여왕의 탄신일을 사흘 남긴 밤, 백작부인은 시종 둘을 끼고 빈민가를 순시했다. 하수도 문을 앞에 두고 젊은 경위 스미스가 백작부인의 길을 막았다.

“놈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증명하지.”

스미스는 백작부인을 막지 못할 터라 홀로 혀를 찼고, 실로 그러했다. 안테노라 백작부인은 적사병을 만날 힘이 있었다. 반란의 막을 직접 내린 황실 충성파의 정수, 신의 보석 트렌디움의 첫 번째 여기사를 누가 막을 소냐. 백작부인한테 총애 받는 시종 아가씨들마저 송곳니 아름다운 피와 밤의 자식들이니, 어쩌면 적사병의 악이 오늘 끝날 수도 있었다.

“기대 따위 않는 편이 좋겠지만.”


2.

목을 잃은 백작부인이 운하 위로 나타났다.

제국 최고 여기사가 헐벗은 채로 다리 기둥 아래 걸쳐있던 두 시간동안 많은 말이 오고갔다. 트렌디움의 힘과 흡혈귀의 마법마저 적사병한테 통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불안을 만들었고, 불온까지 불러왔다.

혁명이 성공했고 빈민가가 정비됐다면 적사병이 날뛸 곳은 없었을 진데, 호국경은 옳았다-

여왕께서 반란을 진압한다고 악마기사를 불렀을 때, 적사병도 함께 불러왔다-

스미스는 빈민들을 물린 뒤 백작부인의 시체 위에 천을 덮었다. 백작부인은 ‘아마도’ 영광된 죽음을 맞았고, 그 죽음은 나라를 흔들 터다.


3.

“안테노르 님이 그렇게 가실 줄은.”

“적사병이라니 그런 게 진짜 있을 줄은 몰랐는데.”

“트렌디움이 통하지 않는다고? 진짜야?”

“그나저나 그 꼬마들마저 죽어버렸잖아. 흡혈귀들한테 어떻게 설명할 거야?”

모든 눈이 스미스한테 날아왔다. 스미스는 위원회 13석에 앉은 아가씨들을 돼먹잖은 선원들의 단어 하나로 줄여 말할 수도 있었다. 떠올려보면 그저 엉성했다. 언제부터 이 나라 상석에 아가씨들이 하나둘 늘어났는지.

어째 보면 반란을 찬양했던 빈민들의 말이 옳았다. 호국경께서 생각한 ‘공화국’은 ‘능력자’들보다 ‘전문가’들을 상석에 앉혔을 터니. 물론 호국경은 오래 전 패배했고 스미스의 목은 짧았다. 스미스는 짧게 허리 숙인 뒤 발을 옮겼다.


“방금 보고된 프란시스 장군까지, 스무 명이 죽었습니다.”

“혁명파 잔당의 반응은?”

“마리 단장님께서 경찰국과 함께 여론검열에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까지 버텨야하네. 기념식은 취소시킬 수 없어.”

“사람을 더 늘리겠습니다. 헌데, 여왕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몰라야 하네.”

아마 그 악마기사와 탕 안에 들어가서 놀고 있을 터다-

스미스는 섭정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았고, 그 순간 의실 창 너머로 적사병을 봤다.


4.

드디어 적사병이 나타났다.

스미스는 공동묘지 언덕 아래, 증기전차 한 대만 지나가는 적막 절은 거리를 보며 쉰 숨을 뱉었다. 저 너머로 간간히 총소리, 비명, 웃음이 터져나갔다. 적사병은 백작부인, 장군, 기사단장, 섭정을 거쳐 전염되며 결국 황궁에 다다랐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창문, 문을 닫고 내일을 기다렸다. 스미스는 반란자의 묘비 앞에 꽃을 놓고 생각했다. 그는 옳았다. 모두 늦었다.


5.

“적사병이 나타나는데 이유 같은 것이 필요할까?”

섭정의 시신을 태운 의사 존이 처음 그런 말을 했을 때, 스미스는 그저 목만 내저었다. 허나 떠올려보면 존이 옳았다. 오직 아가씨한테 힘을 주는 돌, 피를 먹고 사는 마법 쓰는 괴물, 악마기사 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겨우 전염병 하나가 반칙일 리는 없지.

스미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호국경은 적사병이 나올 줄을 알고 있었는지-


6.

황궁에 빈민가가 옮겨왔다.

쥐들은 목이 꿰인 시신을 찾아 정문부터 복도까지 열을 이어 꿈틀거렸다. 경비병은 뼈만 남았고, 하녀들도 그 썩은 살갗이 서서히 짓물러 바닥 위로 흘러내렸다. 스미스는 붉은 반점에 절은 채 여기사들을 헤친 뒤 황궁 첨탑을 올라갔다.

“많이 아파 보이는데?”

악마기사는 반란 때와 마찬가지로 피를 온 낯에 묻힌 채 벽에 기대 얕은 숨을 뿜었다.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보는 대로.”

“대체 저건 뭐지?

“보는 대로.”

스미스는 칼을 꺼내 악마기사가 등에 진 철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는 분은?”

“아직까지 이상 없어.”

“궁에 이런 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랑 그 애가 처음 만난 곳이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여기 올라왔어?”

순간 끔찍한 가능성 하나가 눈을 떴다.


“여왕! 놈이 여기 왔어!!”


7.

그들은 그제야 적사병이 나타난 것을 알았다.

이제까지 즐겨 날뛰던 무리들은 하나씩 피에 젖은 방 안에 넘어져갔다.

넘어진 그 모양 처참하게 죽어 버렸다.

흑단 시계의 수명도 이 성대한 잔치가 막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뚝 끊어졌다.

횃불도 꺼졌다.

다만 ‘암흑’과 ‘황폐’와 ‘적사병’만 모든 것 위에 무한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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