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경품으로 받은 것은 여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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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권선징악을 외쳐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는 행복해져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착했던 나는 2시간 전에도 착한 일을 하고 있었다.
 퇴근, 아니 하교 중이던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보따리를 지고 계신 할아버지를 만났다.
 국사와 전통 의류 전반에 걸쳐 고루 관심이 없던 나는 잘 몰랐지만, 삼베인지 무명인지로 만든 새하얀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셨다. 길게 자란 흰 수염과 양 가르마를 탄 백발은 산신령의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덤으로 나무지팡이도 들고 계셨고.
 그 할아버지께서는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지고 계셨다. 거듭 강조하지만 착했던 나는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제가 들어 드릴게요."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시더니,

"이건 무거워서 넌 못 들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70은 넘어가 보이는 노인네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자존심을 뜯어먹고 사는 한국 남자로서 절대로 지나칠 수 없군.

"이리 주세요."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보따리를 뺏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순순히 내게 그걸 넘기셨는데, 그런데,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무리 봐도 10kg을 넘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보따리가 날 압사시킬 것처럼 무거운 게 아닌가!
 게다가 이 검은 교복 바지는 쓸데없이 길어가지고는 움직이기 불편했다. 무리하게 힘을 주자 흰색 반소매셔츠도 어깨 부분이 끊어질 듯 조여왔다.
 받아들자마자 짧은 머리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여름임에도 시원한 게 자랑인 머리인데! 순식간에 패퇴 당하다니!

"정 그렇다면 도움을 받아볼까? 홀홀."

 노인네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뛰어가는' 할아버지를 보며 난 온갖 액체를 다 흘렸다. 정말 산신령이냐! 저 할아버지는?
 내가 보통 한국 남자였다면 명백하게 20kg짜리 쌀포대 두 포대보다 무거운 보따리를 던져버렸겠지만, 자존심을 뜯어먹고 사는 한국 남자가 50kg도 안 되는 물건 때문에 좌절할 수는 없었다.

"느리구먼, 빨리 빨리 못 오겠누?"

"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괴성을 지르며 젖먹던 힘은 물론이고 자궁에서 탈출하던 힘까지 전부 끌어내어 보따리를 옮겼다. 손가락이 뜯어질 것 같고 체력은 소진된 지 오래였다, 나는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며 10km처럼 느껴지는 1km를 완주했다.
 할아버지의 집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우리집 근처에 진짜 초가집이 있었던가?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든 짐을 '가볍게' 들고 가며 말씀하셨다. 어느 근육별에서 오셨습니까? 저 호리호리한 체구에 덤프트럭 같은 힘이라니.

"그러게 무거워서 못 들 거래두."

"염장 지르지 말아 주시죠! 컥, 켁, 허윽."

"홀홀, 고마우니 이걸 주기로 하지."

 할아버지께서는 손을 내미셨다. 나는 강도로 보자면 수명을 일 년은 깎아 먹었을 노동이었기에 굉장히 기대하며 확인하였는데,

"아니 뭐 그런 걸 다……. 그, 그런 거?"

 산신령은 보통 금도끼랑 은도끼를 주지 않나요? 아니면 적어도 선녀와 맺어준다거나?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것은 종이쪼가리였습니다. 만세!

"마음에 안 드는고?"

"아뇨. 감사합니다."

 자원봉사에 급료를 내놓으라고 깽판을 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라 난 명백하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아아, 아름다운 인생이여. 내일부턴 권악징선으로 갈아탈까? 아무리 봐도 세상은 악당에게 편한 구조로 되어 있어요! 어찌 된 겁니까, 신님!

"홀홀, 그리 걱정하지 말게. 착하게 살면 분명히 복이 올 것이야."

 그 복을 할아버지께서 주시면 금상첨화일 텐데요.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다시 돌아섰다.

"안녕히 계세……, 없네?"

 할아버지께서는 역시 전투민족 사이어인이었던 것이 틀림없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사라지시다니! 나는 속으로 실컷 구시렁대며 집으로 향했다.
 종이쪼가리를 펼쳐보니 무슨 경품 행사의 추첨권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이런 행사를 했던가? 집 옆에 상가가 있기는 한데…….
 나는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상가로 향했다. 그래 봤자 5분 거리지만.

"이상해."

 이상해씨와 이상해풀과 이상해꽃을 더한 만큼이나 이상해. 보통 경품행사는 넓고 개방된 장소에서 하는 거 아닌가?
 경품권에 적힌 약도를 따라온 나는 있는지도 몰랐던 골목길에서 골목길의 골목길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미 상가를 벗어나서 보통 주택가인 것 같은데. 저기 있는 저 집은 상철이네 집 아닌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서 오렴."

 푸근한 인상에 늘어진 뱃살, 축 처진 가슴과 펑퍼짐한 엉덩이. 보라색 꽃무늬가 그려진 반팔티와 널널해보이는 검은색 반바지. 아줌마 파마.
 평범한 아줌마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평범도 수상하단 말이지. 차라리 선녀가 맞이해주었다면 덜 수상했을 텐데.
 뒷골목의 뒷골목의 뒷골목의 뒷골목에 평범한 아줌마가 있다니. 뒷골목 하략의 시점에서 평범하지 않잖아?

"여기요."

 나는 산신령 할아버지께 받은 경품권을 내밀었다. 아줌마는 경품권을 내게 돌려주더니,

"동전으로 긁는 건데, 학생? 1등 상품은 3박 4일 하와이 가족 여행! 2등 상품은 한우 불고기 3근이란다."

"아, 그렇군요."

 1등하고 2등이 차이가 너무 큰데요! 나는 주머니의 백 원짜리를 꺼내 경품권을 긁었다. 혹시 꽝이면 여기까지 온 게 헛수고인데 말야.
 뒤로부터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등. 일단 꽝은 아닌 모양이군. 100등 같은 어처구니 없는 숫자가 나오지는 않겠지?
 다 긁어보니 경품권은 3등이었다. 2등이 불고기니 3등은 불고기 양념이라도 되려나?
 나는 경품권을 아줌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3등이네요."

"축하한다. 경품은 이거."

 아줌마는 작은 상자를 건넸다. 노란색에 CD 케이스 넓이만 한 알약 상자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상자를 살펴보니 '男力喪失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읽을 수 있느냐고? 무시하지 마라. 한자문화권에 사는 이 몸이시니까!

"남력, 으으으음?"

 이게 한국 고등학생의 현실입니다! 한자 따위 몰라도 사는 데엔 지장 없습니다. '남력'이니까 정력제쯤 되겠지.
 아파트 앞에 도착한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4층을 눌렀다. 우리 집엔 나와 부모님, 셋이서 살고 있다. 아빠는 출장을 가셔서 지금은 엄마만 남아 있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벗어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 상자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교복을 벗어 옷걸이에 건 후 파란색 반바지를 입었다. 물론 반라의 상태는 아니었다. 교복 안에 파란 반팔티를 입었거든.
 나는 다시 알약 상자를 집어들었다.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알약이 들어 있었다.
 하나, 둘, 셋, 세어보니 알약의 개수는 30개였다. 한 달분일까? 정력제냐 보약류냐가 문제인데…….

"어차피 내가 먹어야겠지?"

 경품에 당첨되었습니다, 하고 아버지에게 넘긴다는 것은 아웃이다. 만일 정력제라면 그 쪽팔림을 어떻게 감수하냐.
 나는 포장된 알약의 하나를 눌러 빼내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컵을 꺼내 정수기의 물을 받았다.
 알약을 입에 넣고 물을 삼켰다. 무슨 약인 줄 알고 먹냐고? 예, 저는 설명서 따위 잘 보지 않고 몸으로 깨우치는 타입입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PMP 수리비 3만 원을 낸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커다란 재앙은 처음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욕실 앞 빨래바구니에 양말을 던져넣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양말이 갑자기 헐렁한 느낌?
 그러고 보니 갑자기 가슴이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심정적으로 말고 육체적으로 말이야.
 이 바지는 고무줄이 들어간 주제에 왜 자꾸 흘러내린다냐? 설마 아까 짐을 운반하는 새에 너무 힘을 많이 써서 살이 빠졌나?
 자꾸 목 뒤를 뭐가 찌르는데, 웃옷의 실이 풀어졌나? 아니 그러기에는 귀하고 이마도 슬슬 간지러운 것이…….

 화장실용 슬리퍼를 신고 세수라도 할 셈으로 세면대 앞에 섰는데, 거울 안에 웬 여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으엇!"

 예, 꿈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아까의 보따리 무게 때문에 아직도 팔이 뻐근했으니 애써 볼을 꼬집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냥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꼬집어본 것 뿐이지.
 나는 누구에겐 지도 정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야 이 새끼야!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한테 천벌을 내리냐!
 나는 설마, 하며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없다면 정말 큰일, 아니 이 경우엔 있어도 문제인가?
 아쉽게도랄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인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기는 없었다.

"뭐야, 이게."

 나는 힘이 빠지는 몸을 억지로 끌어 일어서서 거실로 나왔다. 씻을 생각은 싹 사라졌다. 만감이 교차했다.
 엄마에게 말해야 하나? 말하면 뭐라고 할까? 정상인이라면 안 믿겠지?

"엄마."

 하지만 나는 어린 애다. 다 컸니 뭐니 해도 고등학생, 결국 의지할 사람이라곤 부모님밖에 없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는 엄마에게로 향했다. 엄마는 꽤나 동안으로, 30대 초반으로 보인다며 주변 아줌마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뒷머리는 올려묶고 앞머리는 한쪽으로 빗어넘겼다. 옷은 노란 민소매에 초록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첫마디를 꺼냈다.

"나 여자가 되어버렸어."

"누구니?"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누구냐고 물었다. 예상한 일이고,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괜히 울컥하여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숨을 짜내 대답했다. 부푼 가슴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손톱이 조금 더 길었다면 피가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나, 강현이라고."

 엄마는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강현이한테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는지 몰랐는데?"

"여자친구가 아니고 내가 강현이라니까!"

"근데 강현이는 어디 갔니? 욕실에 들어간 것 같았는데."

"아니, 내……."

 하긴, 뭐라고 말해야 믿겠냐. 당사자인 나도 못 믿겠는데. 나는 진실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기는 대신 노선을 바꾸기로 했다.
 내가 17세 이강현이란 사실을 믿게 하는 수밖에. 그러니까 간단한, 나와 엄마만 알 법한 비밀을 주르륵 나열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다섯 살 때 차에 치일 뻔했는데 바퀴 사이에 깔려서 살았어. 그리고 여섯 살 때 백화점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는데 다행히도 금방 찾았지. 여덟 살 때는 동해 해수욕장에서 튜브에 탄 채로 아무 생각 없이 떠내려가다가 구조대원들이 와서 건져줬지. 아홉 살 때는 담벼락을 넘다가 턱이 찢어져서 꿰맸어. 열두 살에는 길을 가다가 전신주에 달린 뾰족한 것에 긁혀서 팔이 찢어져서 2주간 병원에 다녔고, 열세살에는 햄버거를 사준다는 말에 속아서 나갔다가 포경 수술을 했지."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성공!

"어머, 현이는 참, 여자친구한테 그런 걸 다 말했니?"

 할 리가 없지. 엄마가 정상인이라 한없이 슬프고 심란하다.

"내가 강현이라고요!"

 나는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거칠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짓누르고,

"아, 글쎄 두고 보라고요! 엄마 아들이 집에 안 돌아올 거니까!"

 그렇게 외치고는 내 방으로 뛰었다.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은 물론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세계로 가고 싶었다.
 문을 잠그고는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격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끄흐억, 어흑, 크흐으윽, 꺼흣, 읏, 흐, 흐윽."

 울음을 멈추는데 몇 분이 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였다. 너무 피곤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자고 일어나면 나는 언제나처럼 남자인 채고, 평소처럼 학교에 가겠지.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TV를 보며 소파 위를 뒹굴고 있었다. 세찬 물줄기의 소리가 상쾌했다. 엄마는 나보고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댔다.

"딸이었으면 설거지라도 시킬 텐데."

 나는 엄마를 돌아보며 엄마의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고쳐주기 위해 나의 확고한 신념을 전했다.

"엄마, 그거 남녀차별이야. 남자도 얼마든지 설거지할 수 있거든?"

"그럼 해."

"앗, 갑자기 공부가 너무너무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잽싸게 방으로 향했다. 물론 공부는 할 생각은 없었다. 만화책이나 보지 뭐.
 엄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언제나의 일상. 흔한 일상. 이제는 없는 일상. 내용이 없는 흰 책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꿈속에서도 나는 울고 있었다.
 깨어나 보니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는 행복한 상황은 없었……, 있다?
 그게 있다. 깨어나 보니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는 꿈 같은 상황이 있다. 내 거시기가 돌아왔다고! 거시기가아!

"꿈이구나!"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난 나의 눈에 책상 위를 뒹구는 알약 상자가 보였다. 나는 책상으로 다가가 알약 상자를 들었다.
 알약 상자에서 파락, 소리와 함께 종이가 떨어졌다. 나는 종이를 주워들었다.
 설명서였다. 일단은 약이니까 설명서가 있는 것이 당연한가? 큼지막한 글씨로 몇 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원료약품의 분량] 1g 중 소녀의 꿈……40mg 소녀의 눈물……15mg』

 뭐냐 이 정신 나간 내용물은, 눈물이야 그렇다고 치고, 아니 눈물도 뭔가 이상한데, 아니 정말로 그렇다고 치고, 꿈은 대체 뭐야?
 나는 재빠르게 내용을 읽어나갔다. 성상, 알약,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약리작용, 쓸데없이 길군.

『[효능·효과] 남력상실환만 있으면 당신도 여성! 그녀들의 마음을 알아보세요! [용법·용량] 1. 한 알 복용시 12시간 지속됩니다. 2. 지속시간 중 한 알을 추가로 복용할 경우 남은 시간에 12시간이 추가됩니다. 예시 : 6시간 남은 시점에서 한 알을 추가로 복용할 경우 18시간 지속됩니다.』

 뭐냐 이 정신 나간 약은? 어머니, 세상에는 정말로 마법이 존재했나 봐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미쳤나?
 어제 봤다면 좋았을 건데. 꼴사납게 별거 아닌 일로 울었잖아. 아니 별거 맞지만. 젠장. 내가 미쳤나? 이런 게 실존한단 말야?
 정말로 어제 일이 꿈이 아닌 거야? 지속시간이 다 돼서 풀린 것 뿐이냐고. 신님, 이 세계 뭔가 이상해요. 내일 멸망하나요?
 뒷페이지로 넘겼다. 아무래도 한 장에 양면으로 적힌 모양이었다.

『3.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생각 마십시오. 사신이 찾아갑니다. 거짓말 같죠? 약효도 거짓말 같았지?』

 뭐냐 이 설명서. 명백하게 나를 도발하고 있잖아. 물론 사신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팔 생각은 일찌감치 집어치워야겠다.
 이거 참 아깝네. 변태들한테 판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변태가 아니라도 꽤나…….



 나는 시계를 쳐다보고는 잡념을 지웠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건 말건 지금은 학교를 가야 하거든.
 나는 욕실로 숨어들듯 들어갔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우고 남자 모습으로 엄마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아아, 피곤해."

 나는 머리를 감으며 중얼거렸다. 곧 샴푸가 튈까 봐 속으로 중얼대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너무 피곤해. 그런 일을 겪으면 당연히 피곤하겠지?
 월차라도 쓰고 싶다. 왜 학생에겐 월차가 없을까? 직장인에겐 방학이 없지 않느냐고? 어른이 애들에게 불평을 하면 못써요.
 나는 한없이 늘어지고 싶었지만, 지각을 하면 곤란하므로 슬슬 씻는 일을 끝냈다. 그리고 엄마가 아침을 차려뒀을 식탁으로 향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애써 어제의 일을 부정하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에 젓가락을 들이밀려고 했는데,

"현아."

 엄마는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도 굶었던가. 굉장히 배가 고픕니다. 어머니. 조금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어제 온 여자애말야."

 으으,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 운명의 데스티니!

"네 여자친구니?"

"으응? 어."

"걔 말이야, 으음……."

 네, 잘 압니다. 정신병자냐고 묻고 싶겠죠.

"굉장히 재밌더라."

"걔가 좀 특이하지."

 우와,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제가 제 흉을 볼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도.

"근데 그 애가 입고 있던 옷, 네 옷 아니니? 그래,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거."

"걔 옷이 젖어서 빌려줬었어. 우리 집이 걔네 집보다 더 가깝거든."

"어제는 비도 안 왔는데?"

"학교 수돗가에서 젖었거든."

"근데 그 빌려줬단 옷을 왜 네가 입고 있니?"

"걔네 집까지 가서 받아왔거든."

"집요한 남자는 인기가 없단다?"

"지각하겠다!"

 난 나의 임기응변에 감탄하며 아침밥을 흡수하고 교복을 입으면서 학교로 뛰어갔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엎어져서 1교시와 2교시를 잠으로 보냈다. 정신적 피로라는 게 있거든. 9시간 수면으로는 극복할 수 없단 말이지.
 3교시는 특별실로 이동하는 원어민 수업이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는데,

"넌 뭐 하루종일 자니?"

 까칠한 공주님께서 내 짝이셨다. 깜빡했군.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이제 안 잘 건데?"

 까칠한 공주님의 이름은 윤선지. 내가 짝사랑하는 아가씨다.
 키는 163에 몸무게는 50.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주워들어 알게 되었다. 깡마르지도 않고 통통하지도 않은 게 딱 내가 좋아하는 체형이다.
 생활복이라고 불리는 편리함을 중시한 디자인의 옷, 쉽게 말해 그냥 흰색 반팔티에 학교 마크를 박아넣은 상의와 파란색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중3 때와 고1인 지금, 2년째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는 매우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떠냐면, 그녀는 날 매우 특별하게 대해주신다.

"너 국어 태도 점수 감점이래. 왜 그렇게 퍼질러자니?"

"아아, 끔찍한 일이 있었거든."

 특별하게도 내게만 가시가 돋친 말투에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십니다. 저번에 '왜 다른 남자랑 얘기할 때는 콧소리 넣냐?'고 물었다가 '너한테만 특별히 목소리 까는 거거든.'이란 대답을 들었다.
 뭐냐, 저 반칙적인 공략 난이도는? 중3 때 스타트를 잘못 끊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만회하려고 엄청나게 애썼는데. 벌써 1년째 저 상태 시다.
 차라리 첫눈에 반했다면 좋았을 텐데, 갈수록 좋아지는 건 뭐냐.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볼까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해보지만, 감히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냐 여쭤보면 호감도가 마이너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시는 공주님을 찔러볼 용기는 없습니다요.

"그래?"

 그리고 관심을 뚝 끊어주시는 새침한 아가씨. 그녀는 기본적으로 친구 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친구 카테고리에는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상한 녀석 카테고리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체 뭐가 문젤까. 저번에 너 다리 은근히 굵다라고 말했던 게 문제일까? 아니면 그전에 너 혹시 B컵이냐고 물어본 게 문제였나? 으아아아아악! 그래 난 호구야! 뭐가 문제인지 모를 정도로 문제가 많잖아!
 그렇게 두 시간 동안 그녀와 세 마디를 나눈 채로 3,4교시가 끝났다. 사실 그녀는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짜증을 내기 때문에 말을 걸 기회가 많지 않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나의 근성도 제법 감탄할 만 하지만.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그럼 내가 내가 아니면 어떨까? 예를 들어 내가 여자였다면? 그녀는 친한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의 얘기지만.
 하지만 그녀는 왕따는 아니고, 동성인 친구가 얼마든지 있었다. 같이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친구, 밥을 먹는 친구, 놀러 가는 친구.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초6? 아냐, 졸업앨범을 확인할 테니까, 초 4 정도가 좋겠어. 초 5 때 전학을 가서 졸업앨범엔 없는 걸로 하고. 그쯤이면 기억도 가물가물하겠지? 신입생 중에는 여자인데도 바지를 입는 애들이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허리띠를 꽉 조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활복은 남녀 디자인이 똑같으니까……, 헐렁하면 이상하다고 하려나? 아냐, 편한게 좋으니 크게 샀다고 하지 뭐.

"야? 야? 정신 나갔냐?"

 친구 녀석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내 눈앞에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나는 젓가락을 휘저으며 은근슬쩍 나의 소시지를 노리는 녀석을 퇴치했다.

"난 지극히 정상이니까 저리 가라. 암내 나는 남자 자식아."

"여친도 없는 놈이?"

 으으, 녀석은 승리한 병1신이고 나는 패배한 병1신이다. 녀석은 적어도 여자친구가 있거든. 내가 보기엔 주인과 노예 관계 같다만.

"후후훗, 이제 생길 테니 기대해."

"너 좋다는 애라도 있냐?"

"글쎄?"

 오후는 신기할 정도로 짧았다.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공책에 천천히 적어가는 사이 세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버렸다. 이 계획은 내일에야 실행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은 지각생이 청소다."

 담임 선생님께서 그런 선언을 하신 것이었다. 아쉽게도 지각생인 선지는 청소당번이 되었고, 원래는 청소당번인 나는 칼퇴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튀어 나간 나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걸으면 10분, 전력으로 뛰면 5분이면 될 거리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열고 가방을 침대 위로 대충 던져놓았다. 책상 위의 알약 상자를 들고 거울 앞에 선다. 물을 꺼내올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침을 모으면서 약을 꺼내 삼킨다. 그리고 거울을 응시한다. 대체 무슨 경이로운 메커니즘으로 여자가 되는 거냐?

"헛?"

 그런 것 따윈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뜨는 새에 여자가 되어 있었다. 가슴이 나오고 허리는 쪼그라들고 팔다리가 얇아지고 손발이 작아지고 얼굴 모양이 변하고 머리가 길고……, 음, 성별하고 머리길이는 상관없지 않나? 스포츠머리 여자가 되지 말라는 산신령님의 배려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침 엄마는 출장 간 아버지가 걱정된다며 아버지의 출장지로 내려간 뒤였다. 이목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시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고 달리기 시작, 아차, 여자가 되니 체력이 후달리는구나. 게다가 신발이 커서 거치적거린다.
 어떻게든 달려서 학교에 도착하니 선지는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있었다.

"해장국!"

 익숙하지 않은 가는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오후 시간 내내 짠 레퍼토리를 열심히 곱씹어본다.

"누구?"

"너 선지 맞지?"

 양손을 붙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 년 내내 스토킹, 아니 뒷조사, 이것도 어감이 별로군, 열렬한 사랑의 추적을 하면서 알아낸 정보를 내뱉는다.

"나 선아야, 이선아. 성라초 4학년 7반. 5학년 때 전학 갔잖아. 기억 안 나?"

"어? 미안."

 미안해할 것 없어. 없는 친구를 기억하려고 애써봤자지. 하지만 일부러 풀이 죽은 표정을 짓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데, 실망이야."

"그……, 그랬니?"

 아아, 멀리서 엿듣기만 하던 부드러운 음성이 앞에서 들려온다.

"어디 사니? 난 한신아파트 115동에 사는데."

 물론 이것도 계획된 것이다. 들어가는 모습을 보일 필요 없고, 가는 길은 같은 곳.

"어? 난 112동인데."

"그래? 잘 됐네. 같이 가자."

"어? 어어."

 그녀는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내 정체를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는 듯했지만, 곧 나의 철저한 스토리텔링에 녹아들었는지 과거의 얘기를 주르륵 꺼내대었다. 소꿉친구란 이렇게 편한 것이구나. 힘내라! 나의 조사력! 힘내라! 나의 임기응변!

"다 왔네. 잘 가아―."

 저 늘어지는 깜찍한 목소리가 그녀의 원래 목소리란 말인가. 감격스럽고 슬프도다. 내겐 뚝뚝 끊어지는 차가운 말투밖에 써주지 않는데.

"그래, 내일 봐."

"참, 너 몇 반이니?"

"어?"

"그거 우리 학교 교복이잖니?"

 앗,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떠올랐다. 흥분해서 잊고 있었는데, 대충 아무 반이나 말했다가 선지가 찾아왔는데 '우리 반에 그런 애 없는데?'하고 누군가가 말해주면 아웃이다.
 마찬가지로 '전학 수속 중이야.'하고 선언했는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아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조금 억지지만 납득은 할 수 있는 답을 생각해냈다.

"으응. 이건 오빠 옷 빌려 입은 거야. 고등학생 기분을 내 보고 싶었거든."

"무슨 소리니?"

"나 사실 저 앞에 여고로 전학 온 거거든. 근데 아직 수속 중이라 심심해서 오빠 교복 빌려서 놀러 간 거야."

"아, 같은 학교가 아니구나. 아쉽다."

"나도. 선지가 거기 다니는 줄 미리 알았으면 우겨서라도 거기로 갔을 텐데."

 두 소녀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산신령님. 굉장히 좋은 분이셨네요.

"그럼 이제 만나기 어렵겠네. 번호 알려줄래?"

"으음……."

 난 천재가 아니라서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는데. 뭐가 문제냐면 내 핸드폰엔 그녀의 번호가 있고 그녀의 핸드폰엔 내 번호가 있다는 거지.
 당연히 핸드폰이 없다고 말해야겠고. 이유는? 고장이 좋겠다.

"핸드폰 고장 났는데."

"그래? 아쉽네. 또 볼 수 있을까?"

"응, 집도 가깝잖아. 이번 일요일에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되겠니?"

"그래."

 사실 그녀의 집은 당연히 알지만, 모르는 척해야 완벽한 연기가 되겠지.

"몇 호니?"

"1102호야."

"그럼 일요일에 봐앙."

"잘 가아."

 으으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 나는 손을 크게 흔들며 115동으로 향했다. 왔던 길은 피해서 집으로 가야지.
 일요일이 너무 기대된다. 선지의 집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지만, 알고만 있었지 가본 적은 없다.
 나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짜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목소리도 꽤나 마음에 드는걸.



 나는 중대한 고민에 빠졌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 큰 문제를 불러올지 몰랐는데?
 여름인 데다가 전력질주를 두 번이나 한 탓에 땀 범벅이 되었던 나는 집에 오자마자 씻기로 했다.
 우리 집 욕실엔 욕조도 있으니 씻는 김에 탕에 들어가서 풍류를 즐기려고 했는데,

"우웃."

 알몸의 여자가 거울에 비치니 묘하게 흥분되었다. 사실 엄청 흥분된다.

"아, 아아. 아앙? 우으웃-."

 아니, 목소리만 해도 굉장히……. 내가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야하잖아…….
 어제는 당황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꽤나 큰 가슴, 묘하게 탄력 있는 복근, 젓가락처럼 가는 다리, 부드러운 뺨.
 한번 의식하고 나니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왠지 내 몸을 내가 씻는 것조차 커다란 죄인 것처럼 느껴졌다.
 애써 외면하기 위해 샤워기를 튼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입가로 스며든 물을 뱉어낸다. 물을 잠그고 샴푸를 짜낸다. 머리 구석구석을 비빈다. 부드럽고 긴 머리칼. 마치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는 것 같아. 어쩌면 비슷할지도?
 물을 틀어 거품을 쓸어낸다. 강한 욕정을 느낀다. 팔을 높게 들어 겨드랑이의 땀 냄새를 맡는다. 남자였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체취가 느껴진다. 여자의 몸으로 여자의 체취를 맡는 것은 성적 흥분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흥분하고 있지? 나는 반쪽짜리인가?
 몸을 더듬는다. 거울을 보니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는 손가락조차 음란해 보인다. 나는 오른손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다. 그리고 핥는다.
 왼손은 가슴을, 배를, 허벅지를, 음부를 훑기 시작한다. 손에 끈적한 무언가가 닿는다. 미끈하면서 끈적한, 미묘한 느낌.
 냄새를 맡는다. 입에 넣는다. 혀로 훑는다. 이상한 맛. 타액으로 축축해진 오른손을 아래로 향한다. 야릇한 쾌감이 전신을 관통한다.

"웃."

 그리고 공포가 머리를 지배한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남자의 뇌로 여자의 몸의 쾌감을 느끼면 복상사해버린다든가.
 마침내 역겨움을 느낀다. 나는 어째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결국은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러라고 준 기회가 아닐 텐데.

"어흐으읏. 어흐으으응. 크흐읏."

 심호흡을 하고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본다.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다. 계획을 짜야지. 산신령 영감님께 받은 기회니까.
 그녀와 확실하게 가까워지지 않으면 실례다. 아니, 이 기회에 사귀어버려야지. 물론 단순히 여자로서 친해져 봤자 진도는 전혀 안 나간 거다.
 그러니까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예를 들어 취향을 열심히 알아내서 딱 맞는 선물을 한다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몸을 씻었다. 괜히 의식하지 말자. 그녀만 생각해. 으악, 그녀를 생각하니 또 야한 생각이!

 이래저래 결국 기나긴 금요일은 끝나고 주말이 왔다. 이번 주는 주5일 수업, 쉽게 말해 놀토니까 학교는 쉰다. 다만,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에 약속을 잡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하아아아아."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니 가슴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 꽤 크지? 여자였던 적이 적어서 잘 모르겠지만.
 왜 새벽에 변신이 안 풀리고 아침부터 여자냐고? 어제 선지와 대화하기 위해 약을 먹은 것이 5시. 원래라면 새벽 5시에 풀려야 하지만 난 오늘 여자의 몸으로 외출할 예정, 인데 여자로 있다 보니 정신력이 쭉쭉 소모된다.
 그래서 12시간 전부 여자로 지내는 것보단 기왕이면 자는 시간으로 빼고 9시간 정도만 변신해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신력을 아끼자고 새벽 5시에 깨어나서 약을 먹는 것은 체력을 깎아 먹으므로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다. 그래서 나는 어젯밤 미리 한 알을 더 먹어두었다.
 시계를 보니 8시 10분이었다. 나는 간단히 우유와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고 세수를 했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열심히 말렸다.

"역시 오래 걸리네."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를 말리는 것만으로 10분이 지났다. 거실에 걸린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키는 170. 남자일 때 그대로다. 물론 내가 작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여자가 돼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라니. 꽤 충격적이다.
 가슴은 꽤나 큰 것 같다. 그래서 어젯밤에 걸치고 잔 민소매 앞부분에 유두 자국이 보인다. 이대로 거리에 나가면 큰일 나겠군.
 허리는 굉장히 얇아졌지만 골반은 거의 그대로기 때문에 바지는 엉덩이의 윗부분에 걸쳐 있었다. 물론 그나마도 고무줄이 없었으면 흘러내렸겠지만.
 앞머리는 눈썹을 살짝 덮고 옆머리나 뒷머리는 거의 허리까지 닿는다. 좀 빗어야겠군. 나는 거울 옆에 걸어둔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다시 거울을 응시했다.
 얼굴은……, 으으음. 뭐 내 얼굴이라 해도 실감이 안 나지만, 굉장히 객관적으로 말하는 건데, 엄청 예쁘다.
 굳이 표현하자면 TV에서나 본 러시아 미인? 눈썹은 가늘지만 숱이 많아 선명했고 속눈썹은 굉장히 긴데다가 풍성했다. 눈은 얼굴이 작아져서인지 굉장히 커 보였고 콧날은 깎은 듯이 오똑했다. 입술은 보기만 해도 키스하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이고, 앗, 거울에 머리를 부딪쳤다.
 나는 방으로 가 옷장을 뒤지며 고민했다. 내가 가진 옷 중에 여자가 입어도 될만한 녀석이…….

"으흠?"

 거울에 비춰보며 모델포즈를 취했다.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부끄러움사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청색 스키니진을 입으니 그럭저럭 청바지처럼 보인다. 작년 겨울에 사두고 불편해서 잘 안 입었던 거다.
 그리고 정말 쪄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웃옷은 세 개나 입었다. 하얀 민소매에 까만 티셔츠, 마지막으로 청색의 카디건.
 브래지어가 없어서 유두가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엄마의 속옷을 훔쳐 입는다는 선택지는 아웃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지.
 팬티는 그나마 가장 무난한 디자인으로 입었다. 물론 들키지 않을 것을 전제로 행동하겠지만 만의 하나가 있으니까다.
 나는 항상 철저한 남자, 지금은 여자기 때문에 주머니에 그 알약케이스를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비밀장치의 봉인, 사실은 그냥 테이프를 뜯었다.

"아아, 잘 가라. 디아블로 3."

 수많은 하드웨어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안돼! 가지마 그래픽 카드! 으아아악!
 엄마에게 뺏기지 않고 숨겨뒀던 수많은 세종대왕님들을 쓸어담는다. 세뱃돈. 추석 용돈. 생일 때 받은 돈까지 지갑에 채워넣었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현관으로 향했다. 기왕이면 전화는 안 오면 좋겠는데. 신발도 헐렁헐렁하지? 하나 사는 게 좋겠군.

 나는 일단 신발매장으로 갔다. 제일 무난한 데다가 속을 비칠 필요도 없고 쉽게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흰색 베이스에 검정색으로 덧댄 스니커즈를 사고는 그걸로 갈아신었다. 역시 발이 편하니 걷기 좋군.
 원래의 신발은 매장에서 받은 쇼핑백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대망의 속옷매장으로 향했다.
 수 분간 뚫어지게 브래지어를 쳐다본 결과, 아무리 봐도 눈대중으론 사이즈를 알 수가 없어서 치수를 재기로 했다. 물론 위만, 아래는 보여주면 큰일 나거든.
 점원은 하얀 블라우스에 파란 스커트와 조끼를 입고 갈색 머리를 업스타일로 정리한 20대로 보이는 여자였다.
 키는 나보다 약간 작았다. 역시 170이면 여자치고 꽤나 큰 건가? 하긴, 우리 학교에도 170이 넘는 여자는 몇 없는 것 같긴 한데.

"가슴 치수 좀 재주시겠어요?"

 너무 창피해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네, 이쪽으로 오세요."

 영업용 미소를 짓는 점원을 따라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칸막이 두 개를 사용해서 혹시 모를 방향도 가린 뒤에 줄자를 들었다. 나는 카디건과 티셔츠를 벗어 동그란 의자 위에 올려두었다.
 헐렁한 민소매 사이로 가슴골이 훤히 비쳤다. 으으, 여자에게 상반신 탈의를 보여주는 건 중1 때 바다에 간 이후로 처음인걸.

"어머, 손님. 가슴이 이렇게 크신데 아직도 브라를 안 하셨네요?"

"예전에 샀던 게 너무 껴서 도저히 못 입겠더라고요."

"그렇게 빨리 크세요?"

"성장기니까요."

 점원은 부럽다는 듯이 날 째려보다가 내가 흘긋 쳐다보자 시선을 피했다. 나는 민소매도 벗어들었다. 점원은 줄자를 들고 다가왔다.

"만세 하세요."

 나는 양팔을 높게 들었고, 점원이 줄자로 나의 가슴둘레를 재기 시작했다.

"75에 D컵이네요. 손님. 굉장히 몸매가 좋으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어리벙벙하게 고개를 꾸벅인 나는 점원이 추천해준 좀 곤란한 디자인의 검정색 브래지어와 세트처럼 어울리는 팬티를 산 뒤 탈의실에서 갈아입었다.
 그리고 여분의 속옷도 사서 쇼핑백을 든 채로 거리를 누볐다. 쇼윈도우 안에 딱 내 취향인 분홍색 주름진 원피스가 보였다.
 음, 저 옷 꽤 귀여운데. 나는 그 옷가게로 들어섰다. 사실 나는 섹시한 여자보단 귀여운 여자가 취향,

"사이즈가 없는데요. 손님, 고등학생이세요? 완전 어른스러우신데."

"아, 그래요?"

 나는 명백하게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고른 것은 노출이 심한 빨간 핫팬츠와 가슴이 묘하게 끼는 검정 민소매 상의였다.
 여분으로 장만한 나머지 한 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혀 귀엽지 않잖아. 나는 쇼핑백 세 개를 주렁주렁 매단 채로 거리로 나섰다.
 사실 치마에 거부감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옷이라는 게 과시용보단 자기만족이니까 저 정도 룩이라면 충분히 걸쳐볼 가치가 있는 것이 어쩌고 하략하여 나는 귀여운 옷이 좋았는데, 결국 이런 옷이라니.
 산신령님! 좀 더 깜찍한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 아뇨.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기회를 주신 것만 해도 천 번은 감사해야죠.
 왠지 괜히 찔려서 혼잣말도 취소하며 거리를 걷고 있는데,

"선아야?"

 선지를 만났다. 사복차림의 그녀를 봐서 좋다는 기쁨과 지금 손에 남자 신발 남자 속옷 남자 옷까지 들고 있는데 굉장히 곤란하지 않느냐는 생각과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느냐는 느낌과 사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꽤 가까이 사는데도 여태 마주친 적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라는 생각 등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선지는 빨간 하트 무늬가 프린팅되어 있는 핑크색 반팔 티셔츠와 검은색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만화였다면 코피를 뿜으며 감격할 텐데 현실에선 그런 일이 없다니 아쉽군. 나는 일단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선지는 나의 손에 잔뜩 들린 쇼핑백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신발매장, 속옷매장, 의류매장 것까지 세 개였다.

"뭘 잔뜩 샀네? 쇼핑?"

"응, 그렇지 뭐."

"왜 혼자니? 옷 살 거면 애들하고 같이 나오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래서 친구가 없어."

 사실 당신과 쇼핑을 빙자한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요, 속옷을 사러 좋아하는 여자애와 가기에는 정신력이 부족합니다요.
 그사이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팔짱을 끼고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있잖니? 이미 끝난 것 같지만. 시간 있으면 같이 점심 안 먹을래?"

 내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그녀는.

"그런데 너 가슴 진짜 크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국숫집에 들어갔다. 나무로 된 식탁에 까만 소파라는 꽤 괴상한 조합이었다.
 그녀는 여기 국수가 맛있느니 우동은 어떠니 하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고 나는 계속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맞장구 쳐주거나 했다.
 나는 새우튀김 우동을 먹었고 그녀는 잔치국수를 먹었다. 우리는 저번 주 주말의 TV 프로그램 같은 시시껄렁한 주제를 재밌게도 말하며 시간을 때웠다.
 여자들의 문화란 신비하군. 우리는 국수 한 그릇씩을 비우는 데에 한 시간을 소비했다. 사내놈들이랑 왔을 땐 청소기처럼 흡입한 뒤 자전거처럼 나갔는데 말이지.

"근데 넌 왜 혼자 나왔어?"

"응, 갑자기 약속이 취소됐거든. 바람 맞았네."

 아니, 아니겠지. 저번에 물어봤을 땐 분명히 남자친구 없다고 했었는데. 나는 괜스레 불안해져 머리를 검지에 감아 돌리면서 물었다.

"혹시 남친?"

"굳이 말하자면 남잔데,"

 오,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사촌오빠거든."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휴, 애 떨어질뻔 했네. 귀여워서 깨물어 뜯어버리고 싶다.

"대학교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가야 한다는 거야. 옷 사주기로 해놓고는. 칫."

"내가 사줄까?"

 앗, 반사적으로 말해버렸다.

"아니, 꼭 필요한 건 아냐."

"뭐 싫다면 됐지만말야."

 그렇게 말하며 난 카운터로 향했다. 남자였다면 뜯겨 먹히는 거지만 여자니까 괜찮아! 이건 나의 자유의지다! 그렇게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어, 그 사진."

 아차, 지갑에 학생증이 들어 있는 것을 잊었다. 당연히도 남자일 때의.

"으응?"

 애써 얼핏 스쳐만 본 거고 남자인 것만 봐서 궁금해한 것일 거라고 믿으며 돌아보자,

"우리 반 이강현 같은데? 아는 사이니?"

"응, 그러니까……."

"남친?"

"아니, 아니!"

 오늘 최초이자 최대의 패닉이다. 어서 그럴듯한 변명을,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사진을 넣어둘 만한.

"오빠야."

"그래? 걘 외동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네 그렇겠죠. 진짜거든. 나는 머리를 팽이처럼 뱅뱅 돌려서 그럴듯한 답을 이끌어냈다.

"사촌오빠거든."

"사이 좋나 보네? 사진까지 들고 다니는 거 보니."

"그냥 그렇지."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밥을 얻어먹었으니 꼭 보답을 해야겠다고 우기다가 심심하니 놀아달라고 작전을 변경한 선지에게 끌려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영화는 별로 재미가 없었지만 길었고, 나는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계를 보면서 결국 3알째의 알약을 삼켰다. 36시간 내내 여자라니, 꽤나 심란하군.
 6시 30분부터 시작하는 프로그램을 봐야겠다며 집으로 가자는 그녀와 함께 112동까지 간 뒤, 115동 방향으로 돌아 집에 돌아왔다. 괜히 115동에 산다고 했나? 체력이 쭉쭉 빠져나가네.
 영화가 너무 길어서 약을 하나 더 삼켰으니, 결국 내일 새벽 5시까지 여자인 채겠군. 그런데 생각해보니 모레는 월요일이고 학교에 가야한다. 게다가 기쁘고도 기쁘게도 내일도 선지와 놀기로 한 상황.
 그럼 결국 알약을 또 더 먹어야할 텐데, 월요일 오전 7시 30분까지는 남자로 돌아가야한다. 학교에 가야하니까.
 나는 알약을 두개 더 꺼내 먹고는 포스트잇에 『월요일 오전 5시 4분쯤에 변신이 풀림. 더 이상 먹으면 큰일 남.』이라고 적어 알약통에 붙이고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선지도 보고 있을 6시 30분부터 시작하는 TV 프로그램을 8시까지 시청하고,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과일쪼가리를 뜯어먹었다.
 오늘 이래저래 돈을 많이 쓴 탓에 엄마가 떠나기 전에 식비로 쓰라고 준 돈은 배춧잎 두장만 남아있었다. 이걸로 금요일까지 버텨야하다니. 라면만 줄창 먹게 되겠군.
 마지막으로 내일 그녀의 집에 놀러갈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씻었다. 여분의 속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향했다.

"흐아암."

 나는 하품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내 몸에 대한 호기심과 욕정이 계속 일었지만 무언가가 두려워 자제했다.
 예를 들어, 처녀막을 잃은 채로 남자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몸의 어딘가가 찢어져 있는 걸까?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나는 일단 가슴을 확인했고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욕실에 가서 씻고 아침은 어제처럼 우유에 말은 시리얼로 때웠다.
 그리고 어제 샀던 검정 나시와 알파벳 몇개가 적힌 파란색 루즈티를 입고 빈티지한 느낌의 청반바지를 입었다.
 어라? 이거 허벅지보다 위도 비치잖아? 하지만 어제 선지를 만났기 때문에 같은 옷을 이틀 연속 입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입기로 했다.
 아침부터 쳐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실례일 것 같아 나는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마침내 11시가 되어 이제 슬슬 찾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 쯤 집을 나왔다.

"이얏!"

 오늘에야말로 눈부신 진전의 기회를 잡겠다고 다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합소리가 꾀꼬리 같은 여자 목소리라 거슬린다만 상관 없겠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지의 집을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빙글 돌아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썬팅된 유리창이 내려가며 사람이 타고 있는 걸 확인해 쪽팔리기도 하고, 하략하여 기분 좋은 미친년처럼 달려간 나를 맞이해준 건 퀭한 눈의 선지였다.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응, 미안. 사실은……."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녀의 영어 숙제를 돕고 있다. 네모난 갈색의 목재 상을 펴놓고는 책과 공책, 책과 공책, 필통과 샤프 등으로 어지럽혀놓은 꼴이 꼭 3분 남은 쉬는 시간에 숙제를 하려는 사내놈들을 연상시킨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선지는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공책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 묻는다.

"이거 저저번주에 나온 숙제 아냐?"

"어떻게 알아?"

"사촌오빠가 하는 걸 봤거든."

 그녀는 예상 외로 덜렁이였는지, 저저번주의 영어 숙제, 저번주의 수학 숙제, 그리고 이번 주의 미술 숙제까지 모두 밀려놓고 있었는데, 마침 나타난 구원자인 내가 돕게 된 것이다. 설마 숙제를 2인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근데 동갑이라면서 왜 오빠야?"

"난 빠른 96이거든."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앉은 채로 다가와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언니라고 불러봐. 후후훗."

"이상한 캐릭터시네요. 언니. 어서 이 끝없는 숙제를 계속해나가시죠?"

"으엣. 힘 빠지게 하지마."

 나는 한번 했던 숙제라 죽을만큼 지루한 것 빼고는 진도를 술술 나갔다. 그에 비해 그녀는 뭉그적 거리며 뒹굴었다.
 아니 의외로 저런 모습도 귀여워서 흥분, 아니 진정하자. 아니, 아니, 아니. 으아아악! 집중이 안 되잖아!

"좀 똑바로 하면 안 되니?"

 상에 반쯤 엎어져있는 그녀는 헐렁한 노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목부분이 꽤 넓어서 속에 있는 브래지어와 가슴골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자꾸 멋대로 가슴을 향하는 시선을 억누르며 숙제에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가슴을 쳐다보았다. 결국 봤잖아! 죄송합니다! 변태라서!
 그녀는 갑자기 일어서 달려와 내 뒤에 주저앉더니 내 가슴을 마구 주물렀다.

"내 가슴을 보면서 비웃고 있었구나! 건방지다! 이 가슴괴물!"

"아뇨, 아닌데요! 그만햇!"

 내가 겨우 그녀를 떼어놓자, 그녀는 뭔가 이상한 것에 눈을 떴는지,

"언니의 손길을 느긋이 즐기면 되는 거야!"

 그렇게 외치고는 내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크흐히헤헤헤헷, 흐헤헤헤헤헤헷."

 내가 미친 것은 아니고 간지러움을 잘 타는 것 뿐이다.

"크하하하하핫, 잘못 했어요! 살려주세요! 케헤헤흐헷!"

"그래! 나 A컵이다! 보태준 것 있냐! 가슴괴물아!"

 역시 A였냐! 안타깝고도 신비롭고도 죽겠다! 그만 간지럽혀!

"크흐억, 으헤헤헤에엥, 크흐으어흣."

 내가 눈물을 질질 짜내면서 기침을 해댈 때까지 그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미안, 너무 흥분했나봐."

"참 빨리도 깨달았네. 켈록."

"주스 좀 갖다 줄게."

 그녀는 주스를 사러 갔는지 만들러 갔는지 꽤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굉장히 심란해졌다.
 혈기왕성한 소년을 여자애 방에 혼자 남기다니! 이건 속옷을 꺼내서 냄새를 맡거나 앨범 속의 사진을 훔치거나 하라는 무언의 허락인가!
 그리고 동성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하고 책상 서랍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쟁반에 오렌지 주스 두 잔과 감자칩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왜 여자애들은 감자칩을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나도 꽤 좋아하지만.

"뭐하니?"

"너무 안 오길래."

"너무 안 오길래 다이어리라도 훔쳐보려고?"

 아뇨, 훨씬 더 심한 걸 훔쳐보려고 했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진심 100%를 개방해줄 수는 없으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들은 선지는 씨익 웃었다. 오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잔뜩 알게 되었다. 좀 민망한 부분 투성이라 심란하다만.

 나는 그녀와 다이어리를 같이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을 말하라고 해서 당황하기도 하고, 다시 가슴을 주물럭주물럭 당하기도 하는 등 보람찬 하루를 보내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이제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달은 그녀와 함께 전력으로 숙제를 마무리해가기 시작했다.
 많은 숙제가 끝나고 마지막 숙제인 미술 공작품의 완성도가 90%에 달했을 때, 내가 쥐고 있던 커터칼의 마지막 날이 맛이 가고 말았다.

"이거 잘 안 듣는데?"

"그러니? 그럼 사러 가야겠는데."

"내가 사다줄까?"

"응, 고마워. 그럼 난 마트좀 갔다올게. 맛있는 거 해줄테니까 기대해."

 우와, 그녀가 직접 만든 요리라니.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아니 아직은 아니고요. 먹고 나서요.
 나와 선지는 같이 집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서 나는 문구점으로, 그녀는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나는 문구점에서 커터칼을 하나 사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왔다. 어차피 요리 재료를 사려면 꽤 걸릴테니 100원짜리를 오락기에 넣고 너무 낮아 불편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얼마나 걸리려나? 핸드폰을 없다고 말한 김에 들키면 곤란하니 집에 놓고와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대충 감으로 맞춰 가야지.

 나는 대강 10분 정도 지났다고 느껴질 때쯤 선지의 집으로 향했다. 슬슬 아파트 단지는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있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나는 아직도 마트에 있나 싶어 그녀가 간다고 말한 그린마트로 향했다.
 그린마트로 가는 길에는 좁은 골목길이 있었고,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단지, 일곱이나 되는 남자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담배를 물고 있는 녀석, 셔츠를 팔락거리는 녀석, 피어싱을 한 녀석, 어딜 보나 불량한, 일진 녀석들이었다.

 어이어이, 영웅놀이 하기 딱 좋은 장면이지만말야. 지금은 여자고말이지. 경찰이나 부르는게, 아 참, 핸드폰이 없구나.
 늘 상상하고는 했다. 드라마처럼 그녀를 위해 싸우고, 피 좀 흘리면, 울면서 다가와서, 왜 그랬어 멍청아,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얼마나 로맨틱하고 멍청이 같냐. 그런 것이 아니면 그녀를 향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바보 멍청이.

 건방진 새끼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어. 젠장!

"씨1발!"

 오른손은 주머니에 집어넣어 커터칼을 쥔다. 튀어나가며 외친다.

"꺼져!"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녀석의 팔을 발로 차서 떨어뜨린다. 그녀에게 외친다.

"뛰어! 경찰 불러와!"

 그녀를 막아서는 소년을 칼로 긋는다. 녀석은 따끔했는지 팔을 뒤로 쭉 뺀다. 한줄기 빨간 선이 생기며 피가 주르륵 흘렀다.

"이 미친년이!"

 등허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진다. 쓰러지지는 않는다. 죽을지도 모르겠네. 한국에는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 부류 있는데, 하나는 정신병자고 하나는 외국인 노동자, 마지막은 일진이다.
 녀석들의 수가 그대로 일곱인 사실을 확인하고 살짝 웃는다. 이야. 나한테도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폼 잡는데는 싸움이 최고지.
 남자라면 죽도록 맞고 끝나겠지만, 지금은 여자의 몸이다. 약을 여분까지 먹은 것은 괜한 짓이었나하는 후회가 스친다.
 볼에 주먹이 날아온다. 최대한 힘을 줘보지만 상체가 크게 꺾인다. 옆에서 다가온 소년이 말했다.

"얼굴은 때리지 마."

 그리고는 배에 큰 충격이 느껴졌다. 혼절할 듯한 충격에 애써 저항해보지만,

"이 씨1발년이 왜 칼을 들고 지랄이야? 술 먹었냐? 약 빨았냐고, 엉?"

 팔에서 피가 나는 소년이 다가와 주먹을 꽂았고, 그대로 기절했다.



 깨어나보니 어딘가의 방이었다. 벽은 전부 하얗고 장판만 깔린 채로 가구는 하나도 없는 방이었는데, 가출 청소년의 아지트 같은 것인 모양이다.
 아까 내가 팔을 그었던 곰 같이 생긴 소년이 내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 갈 생각은 없는지 팔을 붕대로 대충 싸매어놓고 있었다.

"야 이년 가슴 존나 큰데?"

 내 웃옷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남자가 내 가슴을 주무르다니 죽고 싶군.

"으읏."

 온몸이 쑤셨다. 내가 기절한 후에도 확인사살 겸 화풀이로 신나게 팼나보군.
 곰이 갑자기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그 혀를 깨물어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턱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까 맞은 볼은 심하게 부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누워있을까? 입 속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이게 뭐냐. 영웅이 아니고 공주님 역할? 그것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아서 능욕당하는 역할입니까?

"너 존나 걸레 아냐? 씹창녀 같은 속옷을 입고 있네."

 녀석은 나의 바지를 벗긴 뒤에 내 허벅지를 주물러댔다. 이놈이 끝나면 저 뒤에서 19세기 공장마냥 연기를 뿜어대는 놈들도 날 따먹겠다고 달려들겠지.

"퉷."

 나는 상큼하게 침을 뱉어줬다. 원래 튕기는 여자가 더 섹시한 법이거든.

"건방진 년."

 나는 명치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하늘이 빙빙 도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물론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은 아니었다. 그저 새하얀 천장 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권악징선. 빌어먹을 신 놈아! 양심이 있으면 날 구하란 말야! 내 여태 양심에 찔리는 일 한번 한 적이 없건만! 아니 한번도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벌 받을 일을 한 적은 없건만! 아니 잘 생각해보면 있는 것 같기도.

"경찰이다. 꼼짝마."

 진압봉을 든 경찰이 저렇게 멋있는지 몰랐다. 소년들은 경찰들에게 잡혀간 일이 한두번이 아닌지 순순히 잡혔다. 하긴, 특공무술을 배운 사람들을 일반인이 어쩌겠냐.
 나는 드러난 가슴을 가릴 생각도 못 한 채로 멍하니 경찰을 바라봤다. 그러자 경찰복이 잘 어울리는 잘 생긴 경찰이 내게 다가와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이, 경찰양반. 처녀 가슴을 멋대로 들여다보면 어쩌자는 거요.

"앰뷸런스 지원 바람. 오버."

 경찰은 무전기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온몸에 든 멍을 바라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경찰복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이러지 마요. 반할 것 같잖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보니 병원이었다. 옷은 어느새 환자복으로 바뀌어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무래도 월요일 오후인 모양이었다. 어라? 큰일이야. 그럼 남자로 돌아가, 지 않았네?

"일어났어?"

 의자엔 선지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까만 티셔츠에 검은 면바지 차림이었다. 학교에 안 간 모양이지?

"으응, 학교는?"

 선지는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도 안 우는데 왜 니가 우냐, 바보야. 난 이미 어제 울었던가?

"그게 중요하니?"

 그녀는 날카롭게 내 말을 끊어내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경찰 아저씨들이 이미 걔네들 사는 집을 알고 있었더라고, 사고를 자주 친 모양이야."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다. 깨어난 날 보고 감정이 북받쳐오른 모양이다.

"미안해, 미안해. 만약에 경찰들도 몰랐으면 난……, 미안해. 미안해. 흑……."

 나는 입가를 일그러뜨려보았다. 뺨이 좀 쑤셨지만 제대로 움직이기는 했다. 나는 열심히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무일도 없었잖아."

 사실 전혀 괜찮지 않다. 남자로 돌아갔어도 그것대로 문제지만, 왜 돌아가지 않았지? 산신령 할아버지께서 자동연장이라도 해주셨나?
 그녀는 꽤나 오랫동안 울다가 겨우 진정했다. 그리고 결심한 듯이 말했다.

"그런데, 넌 대체 누구니?"

"어?"

 나는 언제나처럼 태연을 가장한다. 일부러 눈웃음을 띠운다. 광대처럼.

"나 선아라고. 이선아."

 그리고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내 초등학교 동창 중에 누구도 널 기억하고 있지 않아."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강현이네 집에 전화했었어. 너희 부모님하고 연락하려고. 그런데 걔네 아버지께서 이선아라는 친척은 없다고 했어."

 치명적으로 들켰구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단념한 채 속삭인다. 더이상 그녀를 속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하면, 믿어줄래?"

 그리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누구도 믿지 못할 진실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띠어진다. 날 미쳤다고 생각할까?

"뭔데?"

"너는 내가 옆에만 가도 짜증을 냈지. 나는 널 좋아하는데, 많이 좋아하는데말야."

"어?"

 그녀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지금쯤 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와 언제 만났나 하는 생각? 혹시 얘는 레즈비언인가 하는 생각?

"네가 욕하는 남자는 싫어한다고 해서 3년간 달고 살았던 욕도 끊었어. 글씨 예쁘게 쓰는 남자가 좋다고 해서 연습도 해봤어. 많이 웃는 남자가 좋다고 해서 늘 웃고 다녔어. 그런데도 넌,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짜증을 냈지."

"……무슨?"

"작년 네 생일엔 선물을 고르려고 서점을 다섯 시간동안 두리번거렸어. 인터넷을 보니까 여자들은 책 선물 싫어한다더라? 하지만 넌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니까. 후훗. 하지만 난 결국 생일을 피씨방에서 보냈지. 아무리 내 생일이 겨울방학이어도 좀 심하지 않아?"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져 간다.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빠른 96이라 오빠라고 부른다고 했잖아. 뭔가 이상하지 않아? 강현이도, 나도 빠른 96년 생인거, 벌써 10번은 말한 것 같은데, 그렇게나 관심이 없었어?"

 호흡이 가빠진다. 가슴 어딘가를 다쳤는지 갈비뼈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거칠어 말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눈물을 왈칵 쏟아내었다. 폐부의 숨을 눌러짜서 전하고 싶은 말을 외친다.

"내가 강현이라고! 네가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너를 끔찍하게 좋아하는 강현이라고!"

 여자가 되고 나서도, 이렇게 엉엉 울어대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아마 일곱살 이후로 최고로 우렁차게 운 것이 아닐까.

"산신령을, 흐윽, 만나서, 흑, 여자가 되는 약을, 흑, 받아서, 크흐윽,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끄흐으, 너에 대해, 크흣, 더 알고 싶어서!"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를 쳐다보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를 차갑게 대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격하게 울었다. 마침 지나가던 간호사가 들어와서 선지를 쫓아냈다.

"환자분이 진정해야하니 나가주세요."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순순히 나갔고 곧 의사가 와서 내게 진정제를 주사했다. 나는 약기운이 돌아 피곤한 눈을 감았다.

 다시 깨어나보니 한밤중이었다. 시계는 1 다시 02를 가리켰고 TUE라는 붉은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주민등록도 되어있지 않은 여자인 나는 아침이 오기 전에 병원을 빠져나왔다. 으으, 한밤중의 병원이라는 거 왜 이렇게 으스스하냐.

"왜 남자로 돌아가지 않지?"

 멍한 머리를 애써 굴려본다. 나는 분명히 월요일 오전 5시에 여자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돌아갔어도 큰일이지만.
 집에 도착한 나는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냈다. 하나, 둘, 셋, 약통엔 분명히 24알이 남아 있었다. 멋대로 연장될 리가 없다.
 그때, 설명서가 펄럭거리면서 떨어졌다.

『[사용상의 주의사항]』

"뭐야, 이게."

 두쪽, 즉 한장일 거라 생각했던 설명서는 두장이었다. 미묘하게 접혀서 한 장처럼 보였던 것이다!

"으아아아악?"

 나는 설마하며 설명서를 주워든다.

『[사용상의 주의사항] 1. 다섯 알 이상을 연속으로 먹으면 완전히 여자가 되어버려요♡』

 뭐냐, 이 하트는! 명백하게 나를 도발하고 있잖아! 신이시여! 시련의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나요!

"돌아가는 방법이 있겠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설명서를 다시 본다.

『2. 돌아가려면 자매품 女性喪失丸이 필요하답니다. (비매품)』

"비매품이면 어쩌라고오!"

 나는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내버려두고 머리를 싸매었다. 콱 죽어버릴까.
 멍하니 수십분을 서있다가 목이 타오를 듯 해서 찬물을 마시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지은 뒤에 벽에 머리를 몇번 박다가, 일요일날 입은 상처가 덧나서 아픔에 바닥을 구르다가, 등에도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결국 엉엉 울었다.
 요즘 눈물 흘릴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세수를 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1번 선택지. 살인마. 그럴 듯 하다. 신께서 마침내 천벌을 내리시어 날 찢어죽이려고 하는 것이 틀림 없다.
 2번 선택지. 강간마. 이쪽도 그럴 듯 하다. 일진을 보내 실패하신 신께서 화가 나서 레벨 업한 범죄자를 보냈을 것이다.
 인터폰을 보니 남자였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예의상 물어는 본다.

"누구세요?"

 예상 답안 1. 나는 살인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문을 열어라. 참고로 열어도 죽일 거다.
 예상 답안 2. 나는 강간마다. 강간당하고 싶지 않으면 하략.
 놀랍게도 전혀 예상 외의 답변이었다.

"나 선지야. 문 좀 열어봐."

 나는 체인을 건 채로 문을 살짝 열었다. 칼에 찔리지 않기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섰다.

"여보세요, 전 요즘 놀라운 일을 많이 겪어서 아무것도 못 믿겠는데요. 당신이 선지라는 증거를 대 보시죠."

"여성상실환인가 뭔가라고 적힌 약을 먹었더니 남자가 되어버렸다고!"

 그러고 보니 녀석이 입은 옷은 병실에서 봤던 선지가 입었던 옷과 같았다. 굉장히 째서 찢어지기 직전이지만.
 게다가 그 상황,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상황이로군.

"너도 설명서를 안 읽는 타입이었구나."

"아냐, 이상한 할아버지가 억지로 먹였어!"

 나는 문을 닫아 체인을 푼 뒤 문을 열었다. 여기서 반전이요! 라고 외치며 날 찔러죽인 데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냥 죽이십쇼.

"그래서 그 약은 가져왔어?"

"어. 상자를 던져주고 가더라고."

 나는 그에게서 알약을 받아들었다. 그녀라고 해야하나?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있네.

"몇 알이나 먹었는데?"

"하나."

 나는 알약 상자에서 설명서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접힌 부분에 낚이지 않고 제대로 펴들었다.

『[원료약품의 분량] 1g 중 남자의 꿈……40mg 남자의 눈물……15mg 겨드랑이 털……20mg』

 야! 엄청 더럽고 끔찍한 게 들어있잖아!

『[효능·효과] 여성상실환만 있으면 당신도 남성! 남자들의 마음을 알아보세요! [용법·용량] 1. 한 알 복용시 12시간 지속됩니다. 2. 지속시간 중 한 알을 추가로 복용할 경우 남은 시간에 12시간이 추가됩니다. 예시 : 6시간 남은 시점에서 한 알을 추가로 복용할 경우 18시간 지속됩니다.』

 음, 이건 복사 붙여넣기처럼 똑같군. 여자가 남자로 바뀌었을 뿐이고.

『[사용상의 주의사항] 1. 다섯 알 이상을 연속으로 먹으면 완전히 남자가 되어버려요♥』

 앗, 하트가 검은색이다. 아니, 틀린 그림 찾기를 하려 한 건 아닌데.

『2. 돌아가려면 자매품 男力喪失丸이 필요하답니다. (비매품)』

『3.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생각 마십시오. 사신이 찾아갑니다. 거짓말 같죠? 약효도 거짓말 같았지?』

"음, 여길 보면 알겠지만 12시간 후면 돌아가."

 나는 설명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인지 그인지, 하여튼 선지에게 말했다.

"안돼! 학교 가야 된단 말야!"

 그렇게 미간을 찌푸려봤자 남자가 화내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때려주고 싶어진다.

"그럼 이거 먹어. 다섯 알."

 나는 내가 서랍에서 꺼내뒀던 남력상실환을 건넸다. 그리고 여성상실환을 들고 부엌으로 가 물을 따랐다. 그인지 그녀인지 하여튼 선지는 나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옛날에 반대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그녀는 나한테 개1새끼처럼 따라오네라고 말했었지. 으으.

"개1새끼처럼 따라오네."

"너 되게 소심하다. 그런 거 다 기억하고 다니니?"

"다이어리에 적어뒀거든. 평생 안 잊을 건데?"

 나는 다섯 개나 되는 알약을 삼켰다. 곧 몸이 남자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지, 끄악, 속옷이 끼잖아! 환자복은 널널한 사이즈라 괜찮았는데.
 그녀는 물 세잔에 두개 두개 한개씩 하여 알약을 차례로 삼켰다. 물론 첫째 알을 삼킨 시점에서 여자로 돌아갔다.

"그, 아까 한 얘기말야."

"앗, 그러고 보니 이렇게 야심한 밤에 남녀가 단둘이 같은 지붕 아래―"

"뭔 소리를 하는 거얏!"

 그리고 싸대기를 맞았다. 이건 너무 심한 장난이었나. 그런데말이죠.

"끄아아악! 여기 실컷 두들겨맞고 멍든 덴데!"

"아, 미, 미안해."

 나는 욱신거리는 뺨을 부어잡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였어? 맨날 머리 잡아당기고, 툭툭 치고."

"그건 작년 일인데요. 올해엔 열심히 자제했잖아요."

 그녀는 작게 뭔가를 중얼거렸다. 한참을 중얼거린 뒤에 생각을 다 정리했는지 말했다.

"그, 그, 그, 그렇게 좋으면 사귀어 줄 수도 있어. 일요일날 열심히 맞아준 게 불쌍하니까."

 만화캐릭터냐. 그렇게 말 더듬으면 꼭 날 좋아하는 것 같잖아. 설레게 하고 난리야.

"동정은 됐습니다. 고백했더니 왠지 후련하네. 잘 가세요."

"뭐?"

 그녀는 결심한 듯이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꼭 여자한테 고백하게 해야겠냐, 멍청아! 나도 너 좋아한다고! 반했다고! 사귀자고!"

"네? 네. 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근데 좀 안 아프게 사귀는 방법은 없었나요, 산신령님? 지금도 등허리가 쑤시네요.

"넌 여탕을 훔쳐보러 갈 것 같으니까 이건 압수야. 설마 이미 갔던 건 아니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남력상실환을 챙겼다. 그래서 나는 보란듯이 여성상실환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네가 남탕을 훔쳐보러 갈지도 모르니까 이건 압수야. 설마 이미 들렸던 건 아니겠지?"

"푸훗."

"푸하핫, 크헤헤헤헤헷, 헤헤, 크헉, 어흑."

"왜 그러니?"

"어흑, 웃었더니 멍든 데가 쑤신다. 특히 명치가."


comment (1)

aryan 11.08.1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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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자유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리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2) LgunX 2012.04.15. 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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