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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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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0 May 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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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무좌수
고통이 시작되기 전의 일은 전혀 생각나질 않는다. 강렬한 아픔과 슬픔이 그나마 평안했던 시절의 기억조차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더 어릴 적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이제는 의미가 없다. 나는 지옥에 뒹굴고 있었고, 고통은 현실이었다. 또한 시간을 역행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오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얻어맞고 질질 짰으며 꼴사납게 뒹굴었다. 그들이 내게서 원하는 것을 해 준 것이다.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 것.

왜? 왜인지 알 수 없다. 이 모든 고통이 왜 시작되었는지, 왜 끝나지 않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처음엔 알고자 했다. 이해하고자 했다. 그들이 왜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지, 이해하고, 가능하면 바로잡으려고 했다. 내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을 수 있도록. 그러나 헛수고였던 것이, 그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를 미워할 이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유가 없기에 이해도 불가능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엄마, 아빠는 관심이 없다. 내 말을 귀담아 들을 생각조차도 없다. 그들은 삶에 치어 바쁘다. 선생, 선생들이란 폭력의 전도사 같은 놈들이다. 놈들이 어디서 그런 폭력과 가학을 배웠겠는가? 전부 선생들 잘못이다. 그 작자들은 약자의 인격을 짓밟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을 가르치고 다닌다. 내겐 친구도 없다. 친구가 있겠는가? 가끔은 나를 동정하는 눈길을 느낀다. 나는 같은 학생들에게 동정이나 받는 신세인 것이다. 그들과 같지 않다. 차라리 나를 불쌍히 여겨 주면 다행일 것이, 이 약한 나를 멸시하는 놈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약하다. 몸도 마음도 약하다. 모든 저항은 헛된 노력으로 끝나 버렸다. 날 때부터 완력이 약했다. 무슨무슨 도장에라도 다녀볼까 했지만, 부모님은 헛소리 말라며 거절하셨다. 그들은 내가 얻어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내 또래 아이들이 늘 그러듯이 종종 치고받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고통을 호소하면 나를 약골 취급하며 무시하기도 한다. 당신들의 아들인데. 난 부모에게 무시당하고 이제는 싸울 기력조차도 남지 않았다.

의지, 의지력이 사라졌다. 어차피 내가 무엇을 시도해도 좌절로 끝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피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해도 소용없다. 오히려 역효과다. 부모님은 얻어맞고 다니기나 하는 못난 자식이라며 책망하고, 기껏 사준 비싼 엠피쓰리 따위의 전자기기를 어디서 잊어먹어 놓고 친구들을 팔아 핑계를 대냐며 나를 야단치셨다. 선생에게는 삥을 뜯겼다며 호소해 봤지만 친구들끼리 돈을 빌릴 수도 있는거지 그걸 가지고 삥을 뜯었다고 하면 소인배가 따로없다며 오히려 날 놀리는 것이었다. 내 몸에 남은 상처는 처음엔 다소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제 그놈들은 교묘하게도 상처가 남지 않을 부위만을 골라 주먹을 휘두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프고, 밥을 먹을때도 아프고, 수업시간에도 아프고, 잠들기 전에도 아프다.

세상에 내게 허용된 안식이나 기쁨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내게도 언젠가 편히 잠들 날이 찾아올까? 꿈에서도 얻어터지며 잠꼬대 대신 신음을 흘리지 않는 날이 올까? 학교 밖에서라면 자유로울까? 졸업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슬픔과 고통뿐인 삶을 포기하면 안식이 올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어디에 가게 되건 똑같은 신세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다른 세상을 그리는 일은 내게 희망이 되었다. 다른 세상이라는 게 정말 있을지, 거기서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나를 괴롭히는 악마들이 없을지. 그것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 희망이라는 건 없을 터였다. 내 인생은 17년밖에 안 되었지만 충분한 고통을 겪었다. 나를 낳아분 부모마저도 몰라주는 그 고통을 그 누가 알아줄 것인가?

도망치고자 하는 의지는 서서히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 고통으로 가득찬 이 현실은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내가 진정으로 속한 세상에선 나를 반겨줄 것이다. 어딘가에 내가 편안히 있을 곳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그 곳으로 가려면 우선 이 지긋지긋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세상으로의 이전......

그 계획은 확실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내가 도망치려는 것을 악귀들이 눈치챈다면 내게 쇠고랑을 채워서라도 이 지옥에 붙들어놓을 것이었다. 혹은 저세상까지도 따라와 나를 고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내 이전을 당당하게 선포하고 싶었다. 내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고 오히려 즐기기까지 하던 그 쓰레기들에게 나는 더이상 손쉬운 먹잇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화려하고 멋지게 떠나고 싶었다. 영원한 작별을 고해주고 싶었다. 부모란 작자들의 표정은 참 볼만할 것이다.

내게 합당한 세상을 갈구했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난 그저 잘못된 장소에 태어났을 뿐이다. 이 세상은 내게 응당 주어져야 할 행복을 주지 못했고, 그래서 난 내게 필요한 것을 찾아 떠난다. 나를 쓸모없는 취급하는 세상에는 나도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잘 있어라!

내 머릿속엔 그 여자애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 다음 세상에는 그 아이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는 내게 허락된 것 이상을 원하고야 말았는데, 그 애의 이름은 시내였다.

시내의 미소는 나를 쥐어뜯었다. 내겐 허용되지 않을 그녀의 옆자리. 심지어 시내를 쳐다보는 것조차 내게는 주제넘은 일이었고, 내가 말이라도 걸었다간 그 아이를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었으며, 동시에 나를 심각한 곤경에 몰아넣을 것이었다. 내가 그 애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내에게 결례인 것이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다. 시내가 웃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 지나가며 흘리는 향기, 경쾌한 발걸음. 나는 죽을 것만 같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거늘. 그런데 그건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그 모든 감정을 끊어내고 포기하는 쪽이었다. 깨끗하게 잘라내지 못한다면 미련이 남을 것이고, 다음 세상으로 도약하는 내 발목을 잡을 것이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학교 건물의 옥상에 올라와 있었는데, 내가 뛰어내릴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에도 시내는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종국에는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었는데, 시내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내 열등감과 절망감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시내를 생각할수록 나는 초라해졌고, 볼픔없는 찌질이가 시내와 어울린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상이 없는 열등감이 나를 휘어감았고, 나는 더더욱 우울해졌다. 옥상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텅 비어있비만, 나중엔 많은 사람이 저 아래에서 내 전이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나는 추락하게 될 것이다. 이 무거운 세상에서 나를 땅바닥으로 잡아끄는 그 힘이 나를 끝장내 줄 것이다. 나름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추락은 내 비참한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고, 짧은 시간이나마 모든 이들에게 떨어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직접 보여줄 것이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어두워지고 말았다. 나는 일단 집에라도 가있을까 하고 몸을 돌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주저앉고 말았다. 누군가가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했지만 여학생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시내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내가 옥상에 올라와서 앞으로의 일을 구상하는 동안 쭉 등 뒤에 서있었던 것인가? 나보다 먼저 올라와 있었을 수도 있다.

얼굴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뭐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내가 주저앉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얘.

-안녕?

여학생이 말했다. 안녕이란 말뿐인데도 나는 흠칫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안....녕?

대답은 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서툰 나 대신 저쪽에서 대화를 주도해줄 것인지? 다행히도 그쪽에서 내게 또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뭘 하니?

-그...냥 있었어. 그냥 경치를 보고 있었어...

여자애와 얘기해본 적은 거의 없다. 아예 없나? 어쨌든 한국말로 하면 통할 것이었다.

-흐흠, 그냥 있기에는 좋은 곳이지. 경치도 좋고. 나는 여기 분위기가 맘에 들거든. 너 그거 아니? 옥상은 원래 잠겨 있어.

-그, 그래? 하지만 열려 있던데. 내가 들어올때는 열려 있었어.

-너 말이 꽤 빠르구나. 내가 연 거야. 내가 선주민이거든. 원래 좀 인기척이 없는 편이긴 하다만 너는 전혀 눈치를 못 채더라고. 뭘 하나 지켜봤더니 별건 안했지만.

-니가 열었다고? 옥상문을 열었다고? 어떻게? 원래는 잠겨 있는 문이라며?

-으음, 수위아저씨는 퇴근시간에 한번 확인해보고 열쇠를 열쇠함에 두고 간단다. 당직인 선생님 눈만 피하면 금방 꺼내올 수 있지. 그런데, 여기가 평소엔 왜 잠겨있을까?

-그야... 위험하니까. 옥상은 위험하잖아. 아파트 같은 곳에서도 다 막아놓고.

-맞아요. 너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막아놓는 거야.

나같은 생각이라니. 하긴, 내 표정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렇고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을 거다. 쭉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손쓸 새도 없이 뛰어내렸으면 어떡하려고?

-난 별생각 없는데. 딱히 무슨 생각을 하고있던 건 아니야.

-힝, 그러세요? 너 완전 우울하거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평소에 복도에서 걸어다닐 때나 점심시간에도 어둠의 기운이 풍긴다고. 하긴 매일 얻어맞고 다니면 어쩔 수 없나.

전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일부러 놀리려고 온 건가? 혹시 내가 올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있다가 나를 따라왔을 수도 있다. 저 애를 믿을 이유는 없었고, 적개심이 맥없는 고개를 들려고 했다.

-내버려둬. 나 간다. 집에 간다.

-넌 희생자야.

-......

-네가 무엇에 희생당하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

-그 불한당놈들이 왜 유독 너만 못살게 굴까?

-......

-너는 왜, 무슨 이유로 찍힌 걸까?

-나한테 뭔가 충고라도 해주려고? 날 가르치려고?

-그건 아닌데, 다만 넌 도움이 필요해.

-필요없어. 날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처음보네. 그래서 못 믿겠다. 믿을 수가 없어.

-넌 지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흐름에 휘말려 있어. 정체도 모르는 적에게 표적으로 지목당해 고통받고 있다고.

-......내가 기억도 못하는데 누구한테 원수라도 졌나? 나만 기억을 못하나?

-아니, 다만 니 적이 앞으로 너의 원수가 될 거야. 넌 아직 적을 인식조차 못 하고 있지만.

-내 적이 누군데?

-내 이름은 신내린이야.

-니가 내 적이라고?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지. 그래서 넌 내 동지가 될 수 있어. 나 역시 싸우고 있거든.

-대답을 해. 적이 누구야? 우리학교야?

-우리의 적은... 그 전에 네 이름을 말해줘.

-아니, 그...... 나는 이무기야. 이무기. 빨리 대답해봐.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적이 대체 누구야?

-증오의 신.





개인적인 경험과는 관련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

comment (2)

로사기간티아 12.05.24. 23:01
우와 흡입력 있네요... 이런 묵직한 멋이 개인적으로 취향입니다!
무좌수
무좌수 작성자 로사기간티아 12.05.24. 23:56
^^감사합니다. 근데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오타는 계속 발견되네요 OTL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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