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여름 지나 다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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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48 Sep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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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가람온

『더운 여름, 귀체 강령하신지요.
저는 할머니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 생활은 항상 그렇듯이 생각과 생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치열합니다.
저로서는 따라가기에도 약간 버거울 정도이지만, 똑똑한 아이들과 지내는 것은 그만큼 즐겁습니다.
배우는 즐거움이라는 게 이런 것이겠지요?


최근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함께 엮여있는 크리톤과 파이돈, 향연을 포함한 책입니다.
플라톤이 정리한 소크라테스의 말을 소리내어 읽다 보면,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지성이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의 화법도 굉장히 흥미롭고요.
아직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더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름 내에 찾아뵙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이번 코스를 마친다면 조만간 찾아뵐 생각입니다.
곧 끝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기숙사의 종이 울렸습니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로군요.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을 담아, 에이아흐 올림』



다 읽은 편지를 조심스레 접어 봉투에 넣고, 편지를 따로 모아둔 서랍에 담고는 원목 재질의 책상을 쓰다듬는다.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가.
막 김나지움에 입학했을 때였으니, 벌써 10년이나 지났구나.
그때는 이곳저곳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그 작은 몸에 이곳저곳 생채기를 만들곤 했었는데, 변명을 읽을 정도가 된 것인가.
키가 이 책상보다 조금 작았던가.


때마다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주는 정성은 기쁘기 그지없다.
제 일로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쪼개 늙은이에게 쓴다는 것.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랑받고 있구나, 나는.


햇살이 따가운 게, 곧 시에스타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조금 서둘러야겠군.
금빛 먼지를 헤치고 양산을 찾아들고 집을 나선다.


잡화점에 들어서자, 객이 왔음을 알리는 종이 요란하게 울린다.
고집불통 짠돌이 영감 같으니라고, 깨졌으니까 좀 바꾸라고 말을 해도 안 듣는다니까.
"어서오세요! 아, 어서오세요, 할머니."
지루한 듯 빗자루로 장난을 치고 있던 점원 아이가 나를 맞는다.
시에스타 전이라서 손님이 없는 모양이다.
주근깨가 조금 있지만,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키도 훤칠한 게, 예쁜 아이다.
에이아흐만 좋아한다면 결혼시키고 싶은 처자인데, 그 아이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으니.


속으로 혀를 몇 번 차고, 가게를 둘러본다.
주인영감이 안 보이는구먼.
"주인양반은 어디 가셨는가?"
아이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열심히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금새 밝아져서 대답한다.
"크라르도 어르신은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으시다고 나가셨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제가 크라르도 어르신 돌아오시면 전해드릴게요."
"시에스타 직전에? 하여튼 별난 영감쟁이라니까."
"그러게요, 이렇게 더운데 안에서 좀 쉬시면 좋을텐데요."
"그래, 고마우이. 영감쟁이는 직접 찾으러 가리다. 혹시 어느 쪽으로 간다고 말 안했누?"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마 보리언덕이 아닐까 싶어요. 그 나무, 좋아하시니까요."
"고맙구먼, 그럼 수고하시게."
인사를 하고서 가게를 나선다.


길을 따라 걷기를 10여분, 보리언덕이 보였다.
산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미안하고, 그렇다고 둔덕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해서 언덕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곳에는 상록수 한 그루가 몇백년 째 자라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한껏 그 풍채를 자랑하고 있었던 나무는, 따가운 빛에 맞서듯이 그 잎을 무성히 드리우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신가, 아가씨."
나무그늘에 앉아, 팔을 크게 흔들며 나를 부른다.
옆으로 가 양산을 접고, 나무에 기대 앉는다.
"아가씨라니, 그 소리 듣기엔 벌써 40년이나 지났다우. 하여튼, 배려가 부족한 노친네라니까."
토라져서 대답하자, 멋적은듯 머리를 벅벅 긁는 영감쟁이.
"에, 그, 뭐냐. 사실 내 눈에 아가씨는 아직도 아리따워."
"빈 소리는 그만 해요, 이 노친네야. 가게는 손녀한테 맡겨두고,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우? 어른이 모범은 못 보일 망정, 애한테 일이나 시키고. 취미도 독특하지, 손녀한테 주인어른이라고 불리는 게 그리도 좋수?"
"사실 나는 그 애한테는 방해거든. 어찌나 머리가 좋은지, 벌써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외웠더라니까. 그리고 손녀한테 뭐라고 불리든 내 마음이지. 틀린 말도 아니잖아, 주인어른."
"아이고, 팔볼출 아니랄까봐, 손녀 자랑이 그렇게 좋수?"
"자랑할 만 하니까 자랑하는거지."
"으이구, 이 팔볼출."


바람이 불었다.
올해는 휴경을 하는 밭이 많은지, 빈 터가 조금 쓸쓸하다.
"이봐, 아가씨."
"무슨 일이유, 영감쟁이?"
"나는 아가씨라고 부르는데, 계속 영감, 영감, 할 거야?"
"영감쟁이한테 영감쟁이라고 부르는 게 무슨 대수요?"
"오빠, 라거나, 하다못해 이름으로 부르라고."
"싫수다."
"허어, 이 아가씨가."
이렇게 주고받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래,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진지한 표정이우?"
"난 항상 진지했어."
"당신을 50년 이상 봐온 나한테 거짓말 하는 거유?"


이대로 가면 끝이 안 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두어번 흔들고는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제는 주름으로 가득하지만, 아직 그 눈빛만은 죽지 않았구려.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그때를 떠올린다.


아직 젊었던 시절.
아직은 멀기만 한 미래를 기다리며, 청춘을 불태우던 그 시절.
에이아흐 눈빛이랑 꼭 같았는데.
하지만 이제 육체는 늙었고, 우리는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을 세는 게 더 가깝다.
사실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 애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귀엽더이다. 하는 짓도 싹싹하고."
"그러면, 자네 손주는 혼처가 정해져 있나?"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참한 처자가 있다면 생각해보지 못할 것도 없지."
"우리 애들끼리 결혼시키는 건 어떻겠나?"
"왜 갑자기 그런 바람이 들었수?"


고개를 돌려 산들바람을 맞는 영감쟁이.
아직도 옛 얼굴이 남아있는 이 사람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건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내 손녀가 젊은 시절의 자네를 꼭 닮았거든. 뾰로통할 때엔 입을 우물거리는 버릇까지도. 사실 나는 아직도 자네한테 미안해.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네에겐 항상 마음에 빚을 지고 있었지. 이제 우리 손주들이 나이가 찼으니, 결혼시키고 싶더라고."
"전혀 말이 안되는 거 아우? 젊은 시절 말솜씨 다 어디 갔나봐."
"어찌되었건, 결혼시키자 이말이야."
"우리가 시키고 싶다고 하나? 저희들끼리 좋아야지 하지."
"그러면 자네가 에이아흐 내려오면 우리 에프린에게 소개해 줘."
"말했잖수, 저희들끼리 좋아해야지, 우리 둘이서 아무리 생각해봤자 소용없다고."
"괜찮아, 녀석들 절대로 좋아한다니까."
"그건 무슨 자신감이우?"
"이 녀석들은 우리를 닮았거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다.




『지난번에 보낸 편지는 받으셨는지요.
이번 가을에 할머니를 뵐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다시 편지합니다.
사실 5개월정도는 더 걸릴거라고 생각했는데, 교수님들께서 제 과제물을 좋게 봐 주셔서 훨씬 빨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부교수 자리가 비어있다고 농담을 합니다만, 아직 제게는 무리가 아닐까 하고, 헛바람만 들이키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뵐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뜹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사랑을 담아서, 에이아흐』

comment (2)

사토마일
사토마일 10.10.12. 02:59

잘 읽었습니다. 따사로운 분위기가 좋네요 ^^

가람온
가람온 작성자 사토마일 10.10.15. 21:35

<저는 칭찬을 먹고 자랍니다>

아니, 이미 성장기는 지났지만 말이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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