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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딸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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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3 Jun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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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불청객이 나타났습니다.


  부르지 않은 객이라 하면 끽차점 객들이 죄 그렇겠지만 농 없이 참으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 이따금씩 나타나는 법입니다. 으레 성지수복세를 통지하고 징수하는 세무신관님들, 성전사 입대를 종용하는 성기사 징병관님들이 이 그 부류이나 오늘은 새삼스러운 양반이 문지방을 넘었습니다. 이 집 호주가 아버지라 기실 이 불청객이든 저 불청객이든 아버질 찾기 마련입니다만 “미시르미 신전에서 온 아라엄이다. 신민 미호누 있는가?”라며 댓바람에 제게 낮춤말을 지껄이니 당혹스러웠지요. 설거지감을 내려놓고 수건을 움키니 근래 신관님들 말본새에 대해 탐구하던 게 있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마니 사람들에게 신분의 유별함이란 신학적인 것이어서 그분께 헌신할 분야의 구분에 가깝습니다. 때문에 신민이 신관에게 공대함이 당연한 만큼 신관이 신민에게 공대하는 것도 마땅합니다. 헌데 대율을 음경으로 아는지 학습을 항문으로 하는지(추잡한 비유지만 첫 번째 성자님이 곧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니 너그러이 봐 주십시오) 허투루 입이 짧은 신관님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무래도 권세가 신실을 업수이여기는 시절이니 별일도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어 슬픈 일입니다. 달여신께서 용서하시길! 어쨌든 그러는 양반들의 면면을 살피면 여차저차 성기사단에 이르게 됩니다. 성기사님이거나, 성기사단 앞잡이시거나. 저 아라엄이라는 분을 보아하건대 백색 정복 차림이 아니니 후자에 해당하겠지요.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미호누입니다만.” “나는 성지주체마니회에서 나온 사람이다. 신…….” 차 자시는 손님분들 분위기를 잡쳐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집 양반 나서실 것도 없이, 안채쪽을 가리켰습니다. “여긴 장사하는 데니, 안쪽으로 드시겠습니까?” 성무 보는 신관님네한텐 ‘장사하는 데’라는 핑계가 곧잘 먹힙니다. 으레 아랫것들이나 우글거리는 일터로 생각하니까. 절 따라 들어온 아라엄 님은 곧 무슨 명부 같은 걸 넘기셨습니다. “미시르미 성기사단과 신전에서는 신민들의 신탁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아, 그렇습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딴은 비아냥거려 보았습니다. 들입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그래 미호누, 너 같은 신민들 덕분에 말이지. 성무를 게을리하고 있잖나!” “성무라 하시면?” 저는 뒤통수를 긁으며 늘어지게 지껄였습니다. “신탁의 이행 말이다! 성기사단과 성황청에 충성을 다하지 못할 망정 말대답을!” “성지수복세 덕분에 뭇사람들이 빈곤하다는 것 정도는 관에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혼인세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허나 남편 시모와 충실한 사실혼 관계에 있으니 위대하신 분의 뜻에 착실히 따른 셈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신탁을 제멋대로 해석하려 드나!” 아닌게아니라 참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말씀은 해석해야 할 것이 아니지요. 신민이든, 신관이든.


  “신탁이 무업니까? 달여신께서 하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세상 청사진의 일부를 속삭이시매 널리 마니 민족을 이롭게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전 짐짓 고개를 삐뚜름하게 하며 말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그렇지.” “아라엄 님, 그분의 청사진이란 그리 되어 있고, 그리 될 것을 일컬음입니다. 헌데 무슨 놈의 형식이 다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나다를까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어련한 말맛 그대로. “무, 무엄하다! 어디 신민 나부랭이가 신탁에 대해 제멋대로 지껄이는 겐가!” “전 다섯 번째 성자께서 집대성하신 크레센탈라기온에 언급된 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 “네가 성서들에 대해 무얼 안다고! 입조심하지 않으면 신성모독죄인이 될 수도 있어!” 그만 푸근한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 신관님은 저 유명한 신학서를 독파하기는커녕 읽어보지도 않은 게 틀림없었으니까. “시간 여유가 있으신지요? 당장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겠습니다만.” “흐, 흠! 독려해야 될 집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곧 다시 오지.” 체면이 있으시다면 응당 그러셔야겠지요. 으름장을 놓아 한 장 즈음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테지만.


  우리 집 양반은 그 꼴을 보노라니 걱정이 앞서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그렇게 창피를 줘 쫓아내면 어떡하니?” “올바른 신관님이 오면 말은 들어주죠. 어차피 저런 양반은 우리 집 성기사님 덕에 허투루 가루진 못할 게 틀림없으니까. 오빠 좋다는 게 다 뭐예요?” “네가 궁리한 일이지만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사실은 결혼도 뭣도 아니고 신전에 사기를 치는 거지 않니?” 한숨결에나마 끄덕거리실 밖에 없겠지요. 아버진 손님들이 놀라셨을 테니 과자조각이라도 한 조각씩 더 접대하는 게 맞겠다고 한숨을 쉬셨습니다. 저 같아도 차맛이 절로 떨어지겠거니 할 뿐이었지요.


  반죽할 시간이 없어 화덕은 덮어 두었습니다. 얼른 밀전병을 지져낼 요량으로 밀가루에 냉수를 부어넣었습니다. 이 정도 요리야 달문자 하나하나 외는 것보다 쉽습니다. 달군 지짐판에 콩기름을 자작하게 붓고 반죽은 얄따랗게 팥소는 톡톡하게. 마니어엔 태양티끌을 튀겨도 맛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시꺼멓고 지글지글 끓는 가루가 맛있다면 밀가루옷에 팥속을 넣은 건 아주 어련할 겁니다. 노르스름한 밀전병이 한 판에 네 개씩 나왔습니다. 보아하건대 탁자당 한 접시씩은 낼 생각이시니 꼼짝없이 불 앞 신세였습니다.


  그렇게 점심 장사 전까지 전병을 부치고서야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진 몸을 씻고 나가라며 어깨너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기름내가 풀풀 나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얼른 목욕물을 만들고는, 인중까지 푹 잠긴 채로 눈을 감았습니다. 요는 전편이라는 게 결론입니다. 미래는 여신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제가 얼마간 천기를 읽은들 불분명하며 제 손 바깥의 일이 된다면 그마저도 무의미하니 말입니다. 점쟁이 노릇이 헛똑똑이라는 게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제 주변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무서운 일을 어찌할꼬 하니 생각보다 간단하지 뭡니까? 섭리가 초월자의 영역이라면 인세는 사람의 영역입니다. 사람 영역에서야 주요한 수단이란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일 뿐입니다.


  신민이 돈을 무진 벌자면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무거운 성지수복세를 떠안고 웬만한 밑천도 없는 데서야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게 그럴듯한 장삿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 미호누가 한낱 뭇사람은 아니라는 데 착안하니 해법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신민 부호들은 징집을 면하겠다며 고등마니학교 잡학과에 자식을 밀어넣으려 든다지요. 헌데 요즈음 성기사단에서 단속을 하면서(신분의 유별함을 분명히 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신관을 개인교사로 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학자가 아니고서야 입학 필기고사의 신학 과목을 가르칠 수 없으니 발등에 강철비가 떨어진 셈입니다. 잡학과에는 신민들만 응시하는 게 아니니까.


  그 길로 미시르미에서 돈깨나 있다는 집안을 마구잡이로 찾아가 자제분을 고등마니학교에 보낼 의향이 있으신지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대번에 내쫓기기도, 빗자루 찜질을 당하기도 했지만 몇 집에서는 자기소개나마 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인 미호시의 사사로 신학을 공부했고(공부한 건 사실이니까), 미시르미 신민학교 추천으로 고등마니학교 신학과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금전 문제로 진학하지 않기로 한 사람이라고(진학을 그만둔 것도 사실이니까). 물론 신실하다고는 못하겠으나 달바다에 계신 어머니께 맹세코, 나쁜 뜻은 없으니 달벼락 맞을 일도 없으리라 봅니다. 아닌게아니라 하 수상한 시절이 아니라면 어디 어머니 당신 손수 공부를 안 가르치셨을 것이며 그깟 신학과에 못 갔을까요? 


  그렇게 저는, 다달이 전편 1천 닢이라는 거금을 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벌인 일에 대해 곧이곧대로 말씀을 올렸더니, 아버진 처음엔 농담인 줄 아셨습니다. 선금으로 받은 전편을 보여 드리기가 무섭게 까무러치셨지요. 간이 배밖으로 나온 게 아니냐면서. 제가 담담하게 오빠가 입단 결심을 한 것도 이 정도 막무가내가 아니었겠냐고, 같은 나이 되어 비슷한 판 벌인 것뿐이라고 대답하니 그저 미안하다고, 고갤 숙이고 미안하다고 주억거리실 뿐이었습니다. 우리 집 양반이 죄송스러울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과 받아내야 할 족속들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천에 횡행하고 있는데.


  여차저차 혀가 길어졌습니다만 요는 소피스트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 이런 부정타는 호칭이 제법 마음에 듭니다. 다섯 번째 성자께서 돌로 쳐죽여도 시원찮을 족속들이라며 일갈하셨던, 신학과 율법을 금전 알듯 셈하는 연놈이 바로 이 미호누이니 말입니다. 여느 승정님들이나 백기사님들보다 제가 더, 그분의 뜻에 대해 헤아리고 치열하게 지행합일을 하고자 하니, 성국에 되돌아오신다면 저 크레센탈라기온을 자못 고쳐 쓰셔야 될 테니까. 


  이런 돼먹잖은 거드럭을 피우며, 저는 몸단장을 끝내고 책보따리를 집어들었습니다. 이 짓거리로 한 탕 하려는 마음을 먹기가 무섭게 옷가지부터 말쑥하게 새로 장만했지요. 먼 옛날, 소피스트는 하얀 뱀이라 불렸다 합니다. 백의를 칼같이 다려 입은 신사들이 변론술이며 신학 강론으로 세 치 혀를 놀려 전편을 쓸어담았다 하니 그럴 만도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그 꼴을 부득부득 흉내내자는 건 아니고, 강내 저택에 드나들며 거지꼴을 하면 일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라 하겠습니다. 예의 의상점에서 요즈음 미모란제에서 유행한다는 복식으로 맞춤옷을 들였지요. 소개차 따라 나선 이오미시 고 계집애가 머리를 다쳤냐며 기겁하는 꼴이 적잖이 재밌었습니다. 새하얀 저고리에 끈적한 허리치마, 얄따란 혁대, 성기사님들 신는 물건과 비슷하다는 가죽 긴목장화까지. 아마 오빠가 제복 갖춰 입고 달곤돌라 앞에 섰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할 뿐이었지만 말입니다. 물론 하얀 뱀이나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하니 묘한 일탈인 듯해, 기분이 좋기도 하다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생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가도를 따라 걸으니 더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강내까지 반 시진은 걸어야 할 테니 고역이었지요. 사실 날씨 따위야 참으로 별 것 아닐 겝니다. 하현교를 건너려면 소리상자를 몇 개나 지나쳐야 할 테고, 그만큼 대 마니 소식말씀에 무방비로 노출될 테니까. 아니나다를까 오늘도, 기운찬 쇳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신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월 23일 대 마니 소식말씀입니다. 일디오르 공국 괴뢰들의 무력 시위가 날로 정도를 더해가는 와중, 제 144기 성기사가 이제 정식 임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영광의 나라를 이끌 용사들은 무한정의 시련을 돌파해 왔으며, 곧 성국의 적에게 달벼락이 되어 내릴 준비를 마칠 것입니다. 성기사단장 가마시엄 군단원수께서는 기무라제의 아라다마시 달전당에서의 시국선언을 통해 ‘태양티끌같이 무수한 이교도 군세가 성국을 에워싸고 있는 한 영광의 나라는 요원할 뿐이다. 이제 마니 사람 갈 길이란 하나뿐이리니 달빛길을 피로 씻어야 한다면 그분의 고결한 이름을 소리 높이며 기꺼이 피를 뿌릴 밖에. 일치단결한 우리는 창이 될 것이다. 일찍이 달여신께서 코로나를 걷어낼 때 쓰신, 이윽고 마니의 위기에 네 번째 성자께 하사하신 네 번째 성유물처럼! 성기사단이 기꺼이 선봉에 서리라. 하나되어 그 뒤를 따르라. 그분의 은총이 함께하노라!’라 밝히셨습니다. 십 분 간의 기립박수, 또 십 분 간의 성기사와 성전사의 다짐 외침으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네 번째 성유물의 이름은 달의 팔뚝이라고 합니다. 여신께서 코로나를 갈라 그 틈에 우주를 짓는 데 쓰셨다는 창세의 신물이고, 네 번째 성자께서 하사받아 히나마니에서 한 합에 십만의 태양인 군세를 무로 되돌렸다는 성유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달빛길은 피가 아니라 달빛으로 씻어야 하지, 피로 씻어 마땅한 게 아니니까. 그분께서 성유물을 그리 쓰라고 마니 사람에게 내리셨을 리 없으니까. 요는 이런 쓸데없고 우울한 생각에 잠기게 만드니 소리상자가 싫다는 겁니다. 


  하현교를 건너니 더 눈부시고 후텁지근한 것 같았습니다. 부촌의 말쑥한 건물이란 회칠을 하기 마련이고, 어디 우둘투둘한 동네와는 달리 허옇게 번쩍거릴 테지요. 조금 값나가는 옷을 걸쳐 다행입니다. 텁텁한 신민복 차림으로는 땀에 빠진 쥐새끼 꼴이었을 게 뻔하니까. 가능한 그늘에서 그늘로 숨어 다니며 십여 분 요리조리 가도를 거닐었습니다. 부호인 사사라모 씨 댁은 대문에서 종을 울리면 사용인이 마중을 나옵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라면서. 그 집 가족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간식으로 달맞이산 수박은 어떠십니까’…….


  선생님, 저는 이 호칭이 아주 야릇하리만치 마음에 듭니다. 소피스트들도 분명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썩 뻔뻔한 년이 못 됩니다. 천 닢을 받아먹고 태업을 했다가는 천 닢 치 배탈이 나버리는 인간이니까. 사사라모 씨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참으로 알 바 아니되 딱 그 값어치만큼은 신실해야 하겠지요. 덕분에 한 주에 두 번, 여섯 시간씩 죽어라 떠들어야 하여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습니다. 그나마 조금 수업 초창기에는 신학의 위안, 크레센탈라기온, 마니신학대전을 암송하며 실력을 증명해야 했으니, 조금 나아진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이 다 빠진 채로 집에 가노라니 여름날임에도 해가 기울어지고고 있었습니다. 강내의 백색 건물이 석양에 발그스름하고, 아지랑이 일던 가도는 이제 그럭저럭 거닐어 봄직했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감상에 젖기는커녕 성스러운 시간 전에 귀가하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아직 이리저리 오가는 상인들, 곤돌라 사공들, 여타 날품팔이들 심지어는 성전사들까지도 그렇고 그런 생각일 겁니다. 대개는 영광의 나라랍시고 두 손 번쩍 들어 성지주의며 가마시엄 군단원수 찬양에 앞장서더라도, 또 누구는 차마 그러질 못해 소동물처럼 슬금슬금 눈치만 보더라도……. 저놈의 소리상자가 제아무리 요란뻑적지근한들 사람 사는 소리, 그저 살아나가기 위해 내는 소리마저 깔아뭉개지는 못하리라 믿습니다. 아니면, 믿고 싶다 해야 할까요. 알량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마니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족속이다 보니.


  아버진 저녁장사를 대강 마무리하는 중이셨습니다. 제가 협잡질로 큰돈을 버니 장사하며 고생이 웬말인가 싶지만 야매인 만큼 눈 가리고 아웅이 더 중한지 모릅니다. 아닌게아니라 관에 대는 핑계가 핑계니 말입니다. 겉보기로는 성지수복세에 허덕이는 소상공인인 척을 그럭저럭 잘 해내야겠지요.


  반쯤 혼이 빠져 문지방을 넘는 절 보시고는, 아주 가게 문 닫아걸고 저녁밥을 준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해작거리노라니 아버진 수상쩍게 서성거리셨습니다. 다 된 설거지를 뒤엎으시질 않나, 탁자를 재차 닦으시질 않나. 똑똑한 딸이니 헤아려 모셔야 할 겝니다. “할 말씀 있으시죠?” “할 말이라기보다는…….” 할 말은 할 말이고 할 말이 아니면 할 말이 아니지, 무슨 뜸이신 걸까요? 아버진 우물쭈물, 손을 닦고 잠시 안방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셨습니다. 웬 상자인지 뭔지를 드신 채. “미하모한테도 똑같이 했었다만……. 미호시가 나한테 하나 시켜 둔 게 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양반이 무슨 이야길 하시려고? 괜히 긴장이 되어, 숟가락을 놓아 버렸습니다. 상자가 열렸고, 얄따란 공책 같은 게 보였습니다. “애들이 날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벌이거들랑 이걸 읽히라고 하더구나. 네 오빠가 성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한 날에 그랬고, 이젠 네 차례가 아닌가 싶다. 이건……. 일기다. 미호시가 이십여 년 전부터 쓴.” 어머니의 일기라니! 전 손이 축축할까 싶어 비싼 옷에 아랑곳않고 문질러 닦았습니다. 제목 한 자 없이 바작바작한 저 종이뭉치가 다 뭐라고……. 기쁘긴 하되, 무슨 생각으로 이럴 때나 보이라고 하신 지 모를 일이라 덜컥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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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6.12. 01:04
17화가 그런 뜻이었군요.. 진학을 포기했다기에 깜짝 놀랐네요.
찔러넣은 관용구 되게 좋았습니다. 뭐든 튀기면 맛있어지는 건 전우주적인 공통법칙이죠 ㅎㅎ.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미호시가 전면에 드러나나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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