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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브업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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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36 Aug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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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miiin
협업 참여 동의

얻는 건 어렵지만 버리는 것은 쉽다. 그 사실은 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십여 년 가량 일했던 직장, 평생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던 아내와 자식, 그리고 기타 등등과의 이별은 생각보다 너무나 순식간이라서 놀랐다. 그렇게 내 삶에 느닷없이 등장한 책임의 공백은, 텅 빈 채로 내 주위에 돌아다녔다. 요컨대 지루했다.

나는 공원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던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둔 사진기를 집어 들었다. 굉장히 비싼 녀석이다. 내 퇴직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정도지만, 이전의 나라면 절대 살 수 없는 가격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을 샀다. 그리고 이 녀석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은 놀랄 정도로 시시해서 나는 낙담했다.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틀째 나는 그렇게 공원에서 노숙자처럼 누워서 실컷 그 실망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파인더 안에 눈을 대고 공원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리고 사진기를 내려놓고 다시 눈으로 직접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한숨을 두 번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뜩 구겨진 캐주얼한 정장에서 벌써부터 쉰내가 났다. 아저씨의 냄새다. 나는 길게 하품을 한 뒤에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사진기를 한손에 든 채 공원 전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피사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진작가가 되고자 마음먹었던 학생 무렵에는, 사진기에 담기는 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늙어버려서 예술은커녕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텅 빈 왼손을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벌써부터 잡히는 손의 주름을 센다. 한숨이 나왔다. 이후에 나는 산책로를 느긋하게 따라 걸으며, 내가 아름답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몇 번이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했다면 그건 아내가 아니라 첫사랑이겠지.

그리고 그 첫사랑은 공원 울타리 건너편에서, 골목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세차게 깜박거리고 나서 손으로 비볐다. 그리고 다시 본다. 교복을 입은 소녀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내 딸아이 또래 쯤 되는 나이였다. 나는 그 소녀를 사진기 안에 담았다. 삼십년 전의 그녀가 있었다. 나는 손의 떨림을 최대한 가라앉히기 위해 길게 숨을 내뱉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소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폴라로이드라서 금방 바로 사진이 나왔다. 첫사랑의 모습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연스러운 소녀의 모습.

하지만 지금 그 소녀는 몹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당연하다. 생판 모르는, 그것도 엉망진창인 몰골을 하고 있는 아버지뻘의 남자가 사진으로 자신을 찍고 있었다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그녀는 점차 뒷걸음질 치다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마 경찰 혹은 가족에게 전화할 생각이겠지. 나는 당황하지 않고 손을 들어 소녀를 불렀다. 소녀가 나를 보았고, 나는 사진을 들어 소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이, 사진 가져가."

 

소녀는 내게 사진을 받아가면서, 내 무례함을 용서해주는 조건으로 점심을 한 끼 사달라고 말했다. 요새 아이들은 당돌했다. 내 시절에는 무서워서 사진만 받아가고 도망치고 말았을 텐데.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천천히 씹어 삼킨 뒤에 내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무슨 오해?"

"제가 그…… 아저씨 같은 사람 상대로 뭐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헤픈 애처럼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요."

"원조교제 같은 거?" 하고 말하자 소녀는 볼을 부풀리며 탁자 아래서 나를 향해 발길질했다. 나는 피했고, 덕분에 요란한 소리가 나서 소녀는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웃었다. 소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던 남자친구가 갑자기 바람맞혀서 굶고 있었단 말이에요. 다른 또래 친구들은 전부 약속이 있다고 하고."

"혼자 먹으면 될 텐데."

"여고생은 그런 게 불가능한 생물이에요."

"요새 젊은이들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하고 말하며 나는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러자 점원이 찾아와 이곳은 금연구역이라고 말하며 주의를 줬다. 나는 어디서 흡연이 가능한지 묻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녀에게 말했다.

"계산은 내가 미리 해놓을 테니 알아서 먹고 가."

입안에 음식을 가득 밀어 넣은 소녀가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가게 옆문으로 빠져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평 남짓한, 의자와 재떨이가 있는 테이블 하나 달랑 있는 초라한 공간이었다. 내가 금연을 하고 있던 사이에 세상의 흡연자에 대한 대우는 상당히 달라져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지 않고 그대로 서서 연거푸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나서 카메라를 꺼냈다. 소녀의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그 사진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때 소녀가 내 옆에 나타났다. 잔뜩 삐진 얼굴이었다.

"알아서 먹고 가라고 했잖아."

"여고생은 혼자서 밥 먹는 게 불가능한 생물이라고 했잖아요."

"나랑 같이 있으면 헤픈 여자애로 오해받는다고."

"아버지와 딸이겠죠." 하고 말한 뒤에 소녀는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찍혀있는 자신의 자신을 본다. 나는 변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지울 거야."

소녀도 사진 속에 찍힌 자신을 마주하는 게 부끄러웠는지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선 다음, 몸을 돌려 앞을 보았다. 허술한 담 사이로 한적한 도심의 거리가 보였다. 소녀는 의자를 끌어다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황급히 담배를 껐다.

"괜찮아요." 하고 말한 뒤에, 소녀는 앞을 향해 앉은 채로 고개를 틀어 나를 올려다본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소녀가 물었다.

"왜 절 찍었어요?"

나는 소녀의 물음에 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딱히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내 첫사랑과 닮아서."

소녀는 거세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녀의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진정이 되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수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내게 말했다.

", 그래서 아저씨는 절 찍었어요? 첫사랑을 떠올리면서?"

"그래. 삼십년 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그녀를 찍었지. 그리고 그녀는 너처럼 밥을 사달라고 조르는 대신 내 장딴지를 걷어찼지만."

푸핫, 하고 소녀가 웃었다. 그리고 이내 입을 가리고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이니까." 하고 말한 뒤에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뭐 이상한 게 있나?"

"담담하시네요. 저는 좀 더 그, 감상적이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나이를 먹어버리면 그렇지도 않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내가 첫사랑과 너를 겹쳐봐서 너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 나이 쯤 되면 과거를 추억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니까." 하고 말한 뒤에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냥 사진을 찍어야 해서 찍었을 뿐이야. 이틀 동안 마을을 뒤지고 다녔는데 찍을 만한 게 삼십년도 더 된 내 첫 사랑 뿐이라니 비참하지만."

나는 까칠해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바로 하고 인기척이 드문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뒤에 소녀가 말했다.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사진작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 그러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으니."

소녀는 설마, 하고 말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보고 말한다.

"설마 그 나이에 사진 찍겠다고 직장을 때려치운 거 아니죠?"

"가족도 잃었는데."

소녀는 내 말에 한동안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 거렸다. 나는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다 인내심이 바닥나 세 개비 째의 담배를 꺼려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소녀가 외쳤다.

", 미안해요.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고?"

소녀의 말이 멎었다. 나는 근질근질해진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타인의 일에 성내고 분해하고 있었다.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유난히 말이 많아진 것은, 소녀가 첫사랑과 닮은 탓도 있겠지만 소녀가 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도 철이 없기 때문이야. 철이 없어서 뭔가를 움켜쥐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어졌으니까." 하고 말 한 뒤에, 절반 쯤 탄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헤어질 시간이다.

"기억해둬. 무엇하나 포기하기 싫어서 뭐든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게 아이라면, 그걸 하나씩 포기해가며 결국 빈털터리가 되는 게 어른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도 좋아요."

식당 앞에서 나란히 나오는데, 느닷없이 소녀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도 나를 본다. 사나운 표정이었다. 나는 말했다.

"뭔 소리야?"

"제 사진, 가지고 계셔도 좋다고요."

"아까 지웠는데." 하고 말하자 소녀는 윽, 하고 신음을 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한 장 더 찍어요! 어서!"

"밥 잘못 먹었어? 소화가 잘못된 거야?" 하고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소녀를 내려다보자, 소녀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더니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제법 힘이 셌다.

"어딜 가는 거야?"

"아까 공원요! “

"동정하는 거야?"

"아니요! 화내고 있는 거예요! 철없는 아이한테!" 하고 말한 뒤에 소녀는 걸음을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소녀가 말했다.

"그렇게나 사진을 찍고 싶어서 모든 걸 때려 쳤으면, 찍으라고요! 찍을게 없다고 빈둥거리지 말고!"

확실히, 소녀는 착한 아이였다. 나는 천천히 소녀에게 잡힌 손을 빼낸 다음 울먹거리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큰 탓도 있겠지만, 소녀는 나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았다.

"고맙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울지도 않았다. 다만 울음을 꾹 참은 뒤에, 멋진 미소가 담진 사진 한 장을 내게 선물해줬을 뿐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큼지막한 코르크판을 하나 사서 벽에 걸고, 거기에 빛바랜 가족사진과 소녀의 사진을 압정으로 박았다. 그리고 텅 빈 거실 바닥에 누웠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나의 냄새다. 나는 누워서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우고 나서, 욕실로 가서 면도를 하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로 대충 식사를 한 뒤 설거지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저녁이 되었다.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며 코르크판과 같이 사온 맥주를 마시며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군."

나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졸릴 때까지 맥주를 마셨다.

 

그 뒤로 나는 소녀를 만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와 소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고, 늘려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첫사랑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순히 사진을 찍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이곳은 확실히 번잡한 도시지만 내 코르크판을 번잡하게 만들어주진 못했다. 그날 이후 차를 타고 다른 곳들을 돌아다닌 지 일주일 째 허탕이다. 나는 공원 벤치로 도로 돌아와 늘어져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늘어뜨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작은 새하얀 운동화. 익숙한 교복치마와 조끼. 그리고 낯선 얼굴.

소녀는 안경을 고쳐 올린 다음, 앞으로 모은 두 손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저기, , 혹시……."

고장 난 전구 같은 목소리였다. 깜빡거리다가 금방 사라질 것처럼. 나는 뉘였던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한 뒤에 말했다.

"나한테 볼일 있나?"

", 저기 아저씨, 혹시 제 또래 아이에게 점심을 사준 적이 있나요? “

"있지."

저보다 약간 머리도 짧고 그리고…….”

넉살 좋은, 지난주 주말에 남자친구에게 바람맞은 그 아가씨?”

소녀는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 너머의 두 눈과 입술은 단호했고, 나는 거기서 약간의 불안함을 읽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나와 그 소녀는 카페 약간 구석진 곳에 앉았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테이블의 맞은편이지만, 소녀와 나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종업원이 커피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아득한 거리에서 소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심한 이야기였다. 요는 전에 만났던 소녀의 남자친구와 소녀 사이의 불화였다. 그리고 그 불화의 원인인 소문에 내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소녀는 확인 차 내게 질문했다.

정말로 지영이랑 그런 관계 아니죠?”

그래.”

, 다행이에요. 친구를 믿었지만, 혹시 몰라서 아니길 빌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진 거야? 누가 봤대?”

저도 누가 퍼뜨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대충 이유는 알 것 같아요.”

왕따라도 당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한 거 에요. , 지영의 남자친구가 좀 유명해서…….”

인기남?”

,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자애들이 질투한 거야? 그런 원조, 아니 헤픈 여자애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거 같아요.”

나는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솔직히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소녀가 식사 할 때 먼저 자리를 비키기도 했고.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릴 줄이야.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소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다 큰 어른이 생각이 짧아 여러모로 폐를 끼쳤구나.”

, , 이러지 마세요오.”

소녀는 당황하며 두 손을 파닥거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사죄했다. 나 때문에 친구가 억울한 오해를 사서 피해를 보고 있는데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린 다음 소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내가 도와줄 일이 없을까? 직접 나서서 해명이라도…….” 하고 말하다, 나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내가 누구에게 어디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어차피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 입장에서는 진실이 뭐든지 상관이 없다. 내가 나타나면 더욱더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하고, 소녀는 더욱더 고통 받을 것이다. 나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소녀는 내 시선을 느끼고 애처롭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라도 진실을 알았으니까, 제가 말해볼게요. 저는 호민이랑 친구니까 제가 말하면 믿어줄 거 에요.”

아마도 호민이라는 이름은 남자친구의 이름일 터다. 나는 소녀에게 연거푸 사죄를 한 다음, 커피 잔을 정리한 다음 소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 또래가 없는지 확인하고 난 뒤에 소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헤어지기 전에, 커피 찌꺼기처럼 가라앉은 죄의식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내가 직접 전화를 해서 해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 괜한 오해를 살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해결할게요. 그리고 커피 잘 마셨습니다.” 하고 소녀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다음 천천히 걸어갔다. 그 위태위태한 등을 보며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소녀가 갑자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소녀는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한참동안 숨을 고르며 간신히 말했다.

혹시, 나중에 만날 수 있을 수, 있을까요?”

물론,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하고 말하며 나는 소녀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소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빤히 바라본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뜀박질로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 뒤로 소녀에게 몇 번 연락이 와서 나는 종종 소녀와 만났다. 사람이 드문 커피숍에서나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지,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때마다 소녀는 자초지종은 전부 이야기했으니 괜찮아 질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아서, 내 맘도 그리 편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 근처 상가에서 나는 지영이라고 하는 소녀를 다시 발견했다. 아는 척을 하려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들려고 했던 손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들키지 않고 지나쳐 가려는데, 누군가와 마주친다. 소녀였다. 소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와 지영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조용히 소녀에게 다가가 별일 없었다고 말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갑자기 뒷걸음질 친다. 내가 놀라서 손을 뻗자 등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뒤쫓아야 되나 생각하다, 그러면 진짜 위험한 오해를 살 것 같아 자제한다. 나는 지금 그런 처지에 있었다. 나는 대신 거리에 오도카니 서서, 하늘을 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있어야 할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소녀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 날로부터 사흘 뒤 일요일이었다. 사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는, 언제나처럼 커피숍 구석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맞은편에 앉는다. 표정이 어두운 소녀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 소녀는 한참동안 대답을 주저하다, 오히려 내게 질문했다.

혹시, 지영이와 만났어요?”

아니, 전혀. 만나지도 않았고 이야기 하지도 않았어. 나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겠어. 또 무슨 오해를 살려고.”

소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테이블 만 노려본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다 못해 종업원에게 주문을 시켰고, 잠시 뒤에 두 잔의 커피가 소녀와 내 앞에 놓였다. 소녀가 입을 연 것은, 내가 커피 두 모금을 머금고 나서였다.

, 죄송해요…….”

소녀는 갑작스러운 사죄와 함께,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는 몹시 당황했으나,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소녀에게 손수건을 건넨 다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소녀는 받아든 손수건을 꼭 쥔 채, 계속해서 눈물을 천천히 흘렸다. 소녀다운 조용한 울음이었다. 덕분에 종업원도, 몇 안 되는 다른 손님도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소녀의 눈물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피사체로. 그런 자신의 못된 생각을 저주하며 나는 침착하게 소녀의 감정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한참 뒤에 소녀가 말했다.

죄송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어요.”

마치 자신의 죄를 고해하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가 그러길 바라지 않았어요.”

소녀가 말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소녀와 지영, 그리고 호민이라는 남자친구는 서로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로 서로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리고 소녀와 지영 모두 호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저했고, 지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 사귀게 되었고, 소녀는 그 둘 사이를 축하해주었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고통스러웠어요.” 하고 소녀는 눈물 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침착하게 소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지영이랑 호민이가 싸웠을 때는, 저도 무척 속상했었는데 어느새 이상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어요. 이렇게 싸워서 헤어지면, 그렇게 둘이 헤어지면…….”

그가 자신을 돌아봐줄 것이라고, 소녀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나를 찾았고, 내게 자초지종을 묻는 것처럼 나를 공원에서 떼어놓았다. 지영이라는 소녀와 내가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렇게 소문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면 언젠가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어요. 지영과 호민은 서로 화해하고 다시 사귀었어요. 저는 그것을 보며 축하해주었지만, 기뻐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두려웠어요. 만약 아저씨와 지영이 행여나 만나게 되면…….”

내가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눈치챌까봐?” 하고 내가 말하자 소녀는 고개를 숙여 긍정했다. 나는 그제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부자연스러웠던 그 때의 소녀와, 그 전 소녀의 언동을. 내 목소리 깊은 곳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여러 번 한숨을 참고,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사과하러 온 거야?”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소녀에게 말한다.

화해했다며. 그럼 잘된 게 아닐까?”

, 그런가요.”

소녀는 눈을 내리깔며 힘없이 말했다. 아마 소녀는 이런 내 대답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속에 응어리진 죄의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 그래서 나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어른을 속였다는 사실은 용서할 수 없군.” 하고 말하자, 소녀는 놀란 눈으로 파르르 떨며 나를 본다. 나는 그런 소녀의 반응을 보고,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을 한다.

용서받고 싶어?”

소녀는 내 손수건을 꼭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 가지를 부탁해도 될까?”

 

다음 주말에, 공원에 세 명의 고등학생이 왔다. 소녀와 지영과 호민이다. 나는 그 이등변 삼각형을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다.

어이, 아저씨! 당신이야?”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삼각형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소년에게 대답한다.

맞아. 내가 네 여자 친구에게 밥을 사줬지.”

아저씨는 잘못 없어! 내가 사달라고 한 거니까!”

잘못이 없긴 왜 없어? 이 아저씨가 멋대로 네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며?”

그거 다 끝난 일이라니까! 아저씨는 사과도 했고, 사진은 날 줬고, 기록도 지웠다구.” 하고 말하면서, 지영은 남자친구 몰래 내 쪽으로 눈을 찡긋했다. 사진은 고마웠지만 솔직히 그런 반응, 부담스럽다.

솔직히, 네가 약속 바람맞힌 탓이잖아!”

그게 왜 내 잘못이야?”

둘 사이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소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 없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둘을 화해시켰다.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소녀의 힘이 필요했다.

나는 소녀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날, 소녀의 잘못을 용서해주며 소녀에게 부탁했다. 세 명이 함께 있는 날,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라고. 소녀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잠시 뒤 이해한 뒤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소녀를 설득했다. 이대로 계속가면 셋 사이의 관계는 언젠가는 붕괴한다고. 한 명만 계속 상처받는 관계는 결국 붕괴한다고. 그러자 소녀가 말했다.

고백, 거절당할 거예요.”

, 그래 상처받겠지. 슬플 거야.”

제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인가요?”

아니, 어른이 되는 과정이지.”

소녀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살짝 웃었다.

지영이에게 들었어요.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잊도록 해. 다시 생각해도 쪽팔리는 말이니까.” 하고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살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될 테니까.”

간혹 그러다 뭔가를 얻을 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며, 나는 내 방안에 걸린 사진을 떠올렸다.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그건 위로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해.”

소녀는 내 말에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소녀는 두 친구와 함께 여기에 있다. 고백을 하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실패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나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지만, 잔뜩 긴장한 소녀를 향해 미소 짓는 게 전부였다.

소녀는 둘을 화해시킨 뒤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 셋은 딱 정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 할 말이 있어서 두 사람 불렀어.”

그건 알아. 근데 왜 저런 꼰대가 여기에 있냐고?”

! 어른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소녀는 다시 시비가 붙으려는 둘을 어르고 얼렌 다음 말했다.

아저씨도 관계있으니까. 그래서 불렀어.”

두 명의 시선이 소녀에게 향했다가, 나에게로 옮겨진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 다, 내 말을 들어줘.”

소녀의 진지한 어조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소녀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말했다.


"처음에 그 애는 무척 한심했어요. 한심한 남자애의 전형이었죠. 장난 끼 가득하고,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나는 냉장고를 뒤지며 소녀의 목소리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그런 녀석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어?”

"하지만 용감했어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그래서 중학교 시절에는 학급에서 따돌림 당할 뻔 한 적도 있었어요. 저는 그게 만용으로 보여서 몇 번이나 걱정하고 충고도 했지만……." 하고 소녀는 말을 끊은 다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점차 그 때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어가는 것이다.

"사실, 저는 저한테 없는 그 용기에 반했었나 봐요. “

나는 결국 냉장고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해서, 그냥 커피포트에서 내린 커피만을 소녀에게 대접했다. 그렇다. 소녀는 지금 내 집에 있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그게 그 상황에서 그런 개소리를 한 이유랑 무슨 관계가 있지?”

소녀는 잔뜩 날이 선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소녀는 웃었다. 그 미소의 분위기는 어느새 확 달라져 있었다.

첫사랑에게 차였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억지로 대답해준다.

"꽤나 아프지만, 나 같은 변변찮은 어른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고 살만 하지."

미안해요. 그런 말해서.”

"저기, 네가 저지른 일 뒷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긴 해?"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소녀는 커피를 다 마신 다음 방안을 둘러본다. 하지만 둘러 볼 것도 자시고 없었다. 여기에는 텔레비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방안을 돌아다니던 소녀의 시선은 벽에 걸린 사진에서 멈춰 섰다. 소녀는 일어서서 그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 제 사진."

"혹시 와신상담이란 말은 아냐?"

소녀는 안다고 말했지만, 내가 왜 그런 말을 꺼내는지 모르는 모양이라서 나는 악의를 가지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한 장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지. 어린 것들을 함부로 얕보면 큰일 난다는 것을 일깨우게 해주는 용도로 말이야,"

나는 커피를 마시며, 당시의 끔찍했던 일을 회상했다.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백을 하라고 마련했던 그 자리에서, 소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말을 택했다.

, 아저씨가 싫지 않아요. 그건 진심이에요.”

개소리마. 정작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조차 못하는 계집의 고백을 믿을까보냐. 넌 정말 철없는 애송이에 겁쟁이야.”

언젠가 정말 좋아하게 될지도…….” 하고 작게 말하며 소녀는 벽에서 자신을 찍은 사진을 떼어 옆에 들고 따라 웃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정말로 불쌍한 웃음을.

 

그 미소를 우습지만, 조금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큐빅노트에 냈던거 약간 고쳐서 올림


comment (3)

Zan
Zan 13.08.31. 15:15
라노벨이라기보단 현대단편소설집 같은 데서 봄직한 글이네요.
아저씨의 시선에서 전개돼서 그런지, 도중도중 느껴지는 첫사랑의 씁쓸하면서 아릿한 맛에 더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담이지만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말했다." 다음에 문단이 갈라져야 할 것 같은데 계속 글이 흘러가서 좀 놀랐습니다. 의도적인 배치이신지 궁금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miiin 작성자 13.09.01. 00:21
실수여서 수정합니다
하늘열번보기 15.05.15. 01:12
좋은 단편 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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