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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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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17 Mar 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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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모리노
스포일러 미카게 에이지
주의사항 415

 

  고독한 소녀는 어느 날 문득 사랑을 시작했다. 사랑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바꿔 놓았으며 소녀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극 역시 갑작스레 찾아들었다. 비극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소녀는 비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바랐고, ‘상자’라는 이름의 환상이 거기에 나타났다. 소녀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그 선택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길고 처절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를 집어 든 독자가 책 뒤편의 소개를 읽고 가장 먼저 받는 인상은, 아마도 ‘미스터리 풍인 것 같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작중에서는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일종의 ‘범인’에 해당하는 인물도 존재하고, 트릭과 반전 등 미스터리의 구성요소가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어둡고 무겁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절하다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치정극이다. 작중 등장하는 모든 아픔과 분노와 그것을 표현해내는 일련의 행위까지도 지순한 해바라기처럼 하나의 벡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벡터의 이름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작가는 전작 [카미스 레이나는 여기에 진다]에서 ‘말로 하면 진부해지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예로 사랑을 들었는데, 이번 작품의 배경에는 그런 사고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수줍어서 말로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작가는 소녀를 위해 친절하게도 ‘말로 할 수 없는 상황’을, ‘말로 해도 의미가 없는 상황’을 준비해 주었다. 소녀의 시간은 루프한다.

 

  초반의 루프 묘사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전작처럼 조금 불친절한 서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지러이 놓여 있는 퍼즐 조각이 맞아 들어가는 듯한 후반부의 감각 또한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물보다는 사건과 현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다 인물상이 정착하는 것이 꽤나 후반부이기 때문에 캐릭터적인 측면은 약하다는 느낌도 받지만, 한편으로 등장인물에게서 라이트노벨 테이스트를 느끼기 어려웠던 전작에 비해서는 많이 타협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개중에도 오토나시 마리아는 꽤나 선명한 캐릭터로 남는 데에 성공했다고 여겨진다. 오오 마리아 오오…….

 

  또, 캐릭터뿐 아니라 전작이 갖고 있던 불투명하고 을씨년스러운(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대충 아무 단어나 골랐다) 느낌이 라이트노벨 풍으로 많이 개량되어 있다. “나는 널 부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같은 대사나 전작에 비해 직선적인 상황 묘사에서 익숙한 느낌이 풍긴다. 전작이 소수가 열광하고 다수가 머리를 싸매는 물건이었다면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 되었지 않나 싶다.

 

  작가 본인이 장편 시리즈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는 전작과 비교해 이래저래 많은 변화를 보인 작품이었고, 그 변화는 신선했으며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카미스 레이나 시리즈를 인상적으로 읽었던 만큼 미카게 에이지의 새 시리즈 1권은 꼭 전작과 비교해 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다음 권을 읽고 감상을 쓰게 되면 전작을 들먹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깨끗하게 홀로서기를 했고, 고민 없이 다음 권을 기다리게 되는 작품이다. (리뷰를 쓰는 게 너무 늦어서 2권이 진작에 나와 있는 시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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