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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정> 그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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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명랑하다는 말은 참 애매하다. 단순히 누가 봐도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고 쾌활한 걸 명랑하다고 (어쩌면 약간 비하적인 어조도 포함된 채) 할 때도 있고, 적당히 팔리긴 하지만 솔직히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생각이 드는 걸 보고 명랑하다고 (비하적인 어조가 주가 된 채) 할 때도 있다. 물론 유치한 게 언제나 그렇듯, 자기가 마음에 드는 유치함이면 누가 까도 좋은 거고 아니라면 진짜 역겨운 거다.


꼭 구도와 지향하는 바가 유치해서 유치하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대충 남성향 웹소설 태반이 강해진다, 우위에 오른다, 이 몇 가지를 태반에 두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게 유치하다고 느끼는 건 전자에 들어가지 않을까. 다른 유치함은 여러 가지에서 온다. 그려내는 세계와 인물의 조악함? 갈등의 단순함, 비슷한 갈등의 반복, 혹은 이 두 가지 전부? 조금 상황에 안 맞는 말이라고 느끼지만 비슷한 맥락이라고 느껴 변용하자면, ‘성숙한 글은 어느 정도 비슷하고 유치한 글은 저마다 다른 유치함을 갖고 있다.’


명랑하다는 말로 시작해 유치하다는 말로 바뀐 것이 거슬린다면, 내 어쩔 수 없는 정직함 때문이다. 유치하다는 말보다 명랑하다는 말이 좀 더 다양한 뜻을 품고 있고,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긍정적이라 이 말을 쓰려 했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잇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고 하니, 최근 읽은 두 편의 소설 때문이다. 둘 다 어느 정도 취향에 맞았지만, 전자에 비해 후자는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거 자체가 쪽팔린 글인 탓 아닐까.


전자는 말하는 게 쪽팔리지 않으니 먼저 언급하자면,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수정>이다. 워낙 한끗발 날렸던 글이라 전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고, 최근 <자유>를 읽고 누가 쓴 독후감을 보다가 마음에 들어 다시 잡게 되었고, 실제로도 다시 잡은 값어치는 충분히 한 것 같다. 후자는 이름 밝히기도 쪽팔린 2차 창작이니 굳이 이름으로 부르진 않겠다. 적당히 < >라고 하자. 아마 이 호칭을 쓰지도 않을 테지만. (물론 이 수치심과는 별개로 재밌게 읽었다는 점을 밝힌다. 못 쓴 글이긴 한데…)


<인생수정>은 엄청나게 떠벌려대는 입 가벼운 사촌 같은 책이다. 딱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돌리지 않더라도, 대충 백 페이지 정도 읽고 있으면 두 다리 건너서 아는 실존 인물보다 책의 등장인물을 더 자세하게 알게 된다. 성격이든, 겪은 일이든, 현재의 곤경이든. 인물 뿐 아니라 그 시대도, 배경도 마찬가지다. 시각 매체에서 소품을 통해(예를 들어 방에 걸려 있는 데이빗 보위 포스터 따위로) 전달하는 것들을 <인생수정>은 온갖 지문들과 암시로, 대가리에 때려박듯이 전달한다. 주인공 가족이 한 때 살았던 곳이 어떤 시대의 어떤 장소였는지, 지금 그 부모와 자식들이 각각 살아가는 세상과 인간 관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들이 어째서 이 시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이들인지 등등.


대충 옛 시골스러움을 대표하는 부모, 그런 부모의 가치관을 가장 많이 주입받아 부모가 호평가할 만한 가정을 이뤄낸 첫째, 부모의 가치관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싶어하며 방황하는 둘째,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쫓아가는 셋째. 사실 이 요약조차도 조금 문제가 있다. 이렇게 요약하기엔 너무 풍부한 인물들이니까. 하지만 여기선 이 정도로만 요약하자. <인생수정>은 이 인물들이 어떻게 속으로 썩어들어가는지를 정말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설득력을 갖고 묘사해낸다. 파국, 파국, 그리고 또 파국. 햇볕 속에 든 자신이 따뜻해 즐겁다면 지금을 즐겨라. 곧 햇볕이 너무 뜨겁다고 짜증이 날 테니.


잘 쓴 글이라는 걸 느끼며 재밌게 읽는 것과는 별개로, <인생수정>은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로 동시에 나를 피로하게 만든다. 정말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라는 걸 보여주며 얼마나 사는 게 좆같은지를 보여주다보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딱 책을 끝낸 와중에, 안 본지 거의 몇 년이 된 2차 창작-아, 시발, 그래, 체면 그만 차리고-패러디 소설이 눈에 띄었다. 조악하기 짝이 없는 루프물이다. 문장은 지랄났고, 맞춤법은 지키려는 티는 나는 게 오히려 안타깝고, 인물은 얕고, 사건 구성은 왠지 한 몇 십 화 전에 봤던 게 또 나오고 또 나오는 듯싶고…


그런 유치함에 괜히 꽂힌 걸까. 대충 2일에 걸쳐 이걸 다 읽고 나서 스스로의 한계를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동경하는 세련됨과는 별개로, 결국 내 안에 있는 유치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이걸 배제하는 건 힘들어보였고, 사실 배제할 마음도 그닥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초심을 되찾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글쓰기라는 게 유치한 일인데, 다른 사람이라면 엣퉷퉤 뱉을 유치한 글도 씹어먹는 게 뭐가 문젠가. 스스로 유치하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지.


P.S. 글에 대한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변명문에 가까워진 것 같지만, <인생수정>에 대한 요점-그러니까 이게 왜 잘 쓴 글이고, 왜 감명 받았는지, 그리고 왜 피로해졌는지-은 충분히 들어간 것 같으니 문제 없지 않을까.


P.S.S. 감상문을 쓸 땐 안 밝혔지만, 충격적인 서사와 묘사랑 별개로 암시가 아주 듬뿍 들어간 글이다. 예를 들어 배경인 세인트주드St.Jude가 실패자들의 성인이라는 점이라든가, 작중에서 첫째의 가정에서 자주 나오는 <나니아 연대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후에 어머니가 먹는 마약 <아슬란>과 엮인다거나, <아슬란>이 <나니아>에서 갖는 서사적 이미지, 그리고 메타서사적 역할(그러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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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글 잘 쓰고 싶다

comment (3)

까치우
까치우 19.08.31. 14:58
수준 떨어지는 팬픽은 재미있게 읽었고 마땅히 재미있게 읽었어야 할 고상한 소설은 피곤하게 느끼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단 이야기.,?
형이상학적 작성자 까치우 19.08.31. 15:05
어느 정도는 그런 뜻이면서 그냥 양쪽 다 어떻게든 안고 가야 한다는 체념적인 이야기...
olbersia 19.09.01. 23:51
암시가 많은 책은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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