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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군인> - 포드 매독스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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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사실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걸까? 보통 이 말을 쓸 때,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상황을 서술한 다음 거기에 대한 화자의 주관적 판단을 이야기할 때, 이 판단을 믿어선 안 된다, 올바른 판단을 하면 사실 저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이러이러하다, 하는 식이 하나. 또 하나 정도라면 A에 대해서 너무나 강력하게 주장하는 화자를 보며, 이렇게까지 열변한다는 건 어쩌면 본심은 ~A일지도 모른다, 하는 정도가 둘. 그리고 그 이상은 보통 더 나아가지 않는다.


포드 매독스 포드는 그 이상을 보여준 것 같다. 쿳시의 <청년 시절>을 읽으며 쿳시가 포드 매독스 포드를 상당히 좋아했다는 걸 알고 읽기 시작한 그의 대표작이 생각 이상으로 좋아서 기분이 좋다. 서사는 막장 드라마에 가깝다. 돈키호테스러운 영국 신사와 화자의 부인의 불륜, 그리고 그걸 신사의 아내와 다른 소녀를 통해 점차 알아가는 화자의 이야기. 물론 차별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모더니스트들의 시발점 중 한 명인 사람이다보니, 이 사람 역시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 이야기할 부분은 바로 그 점이다.


믿을 수 없는 화자에 대한 부분은 잠시 미루고 다른 점을 먼저 얘기하자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나가느냐 하는 순서의 문제다. 사건들을 B series 축에 하나하나 열거해 이를 있는 그대로, 순서대로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한 충격적인 사건을 얘기하고, 그것이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았는지를 차례대로, 인과를 맞춰가며 보여줄 것이냐? 하지만 현실에 그런 뚜렷한 인과라는 게 애초에 존재할까? 무엇 때문에 무엇이 필연적으로 생겼고, 그 필연성을 만든 무엇 이전에는 이 무엇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사건이 존재했을까? 애초에, 누군가의 주관 없는 세계의 거대한 정신이 바라보는 인과, 순서라는 게 존재할까?


이로 인해 포드의 접근법은 색다르다. 화자는 우리가 알기 힘든 사건들을 계속 나열해나가며, 그 사건들에 대해 그의 현재 인식 상태에 걸맞는 나름의 판단들을 내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사건으로부터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고, 그 일을 반추하며 생각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인식의 저평이 점차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화자의 판단도 점차 변해간다. 진실되고 참된 친구에 대한 판단이 글이 끝나가면 끝나갈수록 점차 결단 내리기 힘든 애매모호한 지평으로 확대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회독을 마친 시점에서 다시 첫 부분을 보면, 이제 모든 걸 아는 사람으로서 화자에게 있었던 일들을 완벽히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이 부분 역시 착각일지도 모른다. 유예시켰던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이야기를 꺼내보자. 우리는 이제 정말 모든 걸 알게 된 걸까? 애초에 우리랑 상관 없는 이야기를 화자로부터 듣는 입장인 만큼, 우리의 인식 수준은 화자의 인식 수준과 상당히 유사하게 된다. 화자가 몰랐던 부분을-가치 판단 같은 것이 아니라면-우리가 미리 알 수야 없는 것 아닌가. 허나 이런 생각도 들 수 있다. 화자가 우리에게 전달한 이 사실들, 이 사실들은 과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까?


약간의 스포일러를 하자면, 예를 들어 화자의 아내 플로렌스와 애시번햄 대령은 둘 다 자살했다. 자살했다고 화자가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심리 상태를 고려해보건대, 자살할 이유는 충분했다. 문제가 될 부분은, 둘 다 화자와 독대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살했다는 점이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방에 홀로 들어간 이후, 화자가 홀로 방에 들어가 그녀의 자살을 확인했다. 애시번햄 대령은 화자와 단둘이 이야기한 후-그의 아내와 저지른 부정을 고백한 직후!-스스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과연 정말로 자살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애초에 근거가 화자 밖에 없는 이야기에서, 화자가 서술한 상황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토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과거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을 읽었을 때를 연상시켰다. 존 셰이드의 유작 시에 고인의 부탁을 받아 주석을 다는 킨보트의 이야기. 글 자체로 보면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화자 킨보트를 온전히 믿지 않기에 셰이드가 킨보트에게 주석을 달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거라고 다들 판단한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킨보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 아닐까? 존 셰이드가 이 글 속에서, 자신을 선망하면서 동시에 묘한 정신적 문제로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가상의 주석가 킨보트를 창조한 건 아닐까? 나보코프의 영미 문학 편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아마 이 책은 당연히 읽어 보았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총체적으로, 간만에 읽으며 글 너머의 재미를 느낀 글이었다. 최근 비교적 단순하다고 느껴진 아프리카 문학들을 보다가 이를 잡으니 실험성이 더 자극적이게 와닿은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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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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