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작품 소개 "내일의 단편 경소설상"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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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 로빈의 지우개 노트
                - 어느 작가의 이야기 -



                   프롤로그
 아내를 죽인 남편이 시체 앞에서 일어섰다. 아내를 죽인 남편은 진짜 남편이 아니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며칠 전 아내의 진짜 남편을 죽이고 자기 마음대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내, '크리스틴'은 언젠가 프러포즈를 받았던 호텔 '아일랜드'의 옥상에서 반쯤 잘린 목이 비스듬히 꺾인 채, 고장 난 인형처럼 누워있었다. 목의 상처에서 놀랄 만큼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와 웅덩이를 만들고, 아름답던 금발머리가 피에 젖어 탁하게 이지러졌다.
 남편의 손에 힘이 빠지며 쥐어져 있던 칼이 바닥의 핏물 위에 찰박 하고 떨어졌다. 목의 끔찍한 상처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편은 겁에 질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호텔 옥상에는 널빤지와 천막들, 창문틀 따위가 잔뜩 쌓여있었다. 거친 바람에 자재를 덮어둔 천막이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소녀는 나부끼는 천막 옆에서 박스 위에 오도카니 앉아, 엄마의 일생이 담긴 양장본의 책을 읽고 있었다.

 "너……. 네가……."
 소녀의 틀어 올린 검은 머리가 흔들흔들 하더니 이윽고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풀리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밤하늘에 휘날렸다. 남편은 소녀의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소녀는 남편을 무시한 채 꼼짝 않고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소녀가 재미있는 부분을 읽는 양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책을 탁 덮으며 일어선 소녀는 자신이 앉아있던 박스를 집어 들었는데, 다시 보니 그것은 박스가 아니라 네모지고 커다란 여행 가방이었다. 갈색 가죽을 귀퉁이에 덧댄 가방에는 세월의 흠집이 가득했다.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가방을 열자 수십 권의 노트와 책들이 얼핏 보였다. 바람에 내용물이 날아가지 않도록 애쓰며 책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는, 노트 한권을 꺼내들고 찰칵 가방을 닫았다. 노트는 기성품이 아니라 낱장들을 직접 철하여 만든 수공품 이었다. 손잡이를 들어 가방을 세워두고 일어선 소녀는 검은 벨벳 블라우스에 먼지가 묻은 걸 발견하고는 가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내 들고 있던 노트로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아내의 시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체는 옥상 건물의 넓은 처마 밑에 누워있었다.

 소녀가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화려한 금발이군? 사랑스러운 머리칼인데 아깝게 됐네. 난 싫어하는 색이긴 해도."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이야기 하고는 노트를 펼쳤다. 각장의 제일 위에 누군가의 이름만이 적혀있고 아래는 텅 비어있는 이상한 페이지들이 가득했다. 가끔 내용이 띄엄띄엄 적혀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중간쯤에 이르러 남편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소녀가 이번엔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분명히 대답해. 노트를 사용할거야? 다시 한 번 기억을 지우고 싶어?"
 웃음기가 사라진 소녀는 지나치게 차분해져서 냉정하다 못해 얌전해보였다. 남편은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래.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 끔찍한 기억을 지워줘."
 "좋아. 이미 여러 번 도와줬지만 한 번 더 도와줄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기억을 지우면 또 다시 당신 역할도 바뀌겠지."
 소녀가 내리깐 눈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짙은 속눈썹이 하얀 피부와 뚜렷하게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자 검은 머리칼이 밤하늘에 녹아들 듯 휘날렸다. 그때 느닷없이 번개가 내리쳐 밤하늘이 눈부신 섬광으로 가득차고, 소녀의 눈동자가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이윽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직접 적어주겠어? 그편이 더 효과가 좋으니까."
 소녀가 바닥에 노트를 펼쳐 내려놓았다. 옥상 건물의 처마는 매우 넓어 비가 전혀 들이치지 못했다. 남편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엎드려서 펜을 받아들었다. 빗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아, 제일 위에 말고 거기 중간쯤에다가 적어."
 남편은 시키는 대로 중간에다가 적었다. '나는 크리스틴을 죽였다.'
 "그리고 내 이름, 날 만난 것도 적어. 이제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남자가 소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 이름?"
 소녀가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로빈. 로빈을 만났다."
 남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적어나갔다. '로빈을 만났다.'
 "좋아, 그럼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끔찍한 기억은 전부 잊어버릴 거야. 물론 나와 노트에 대한 것도."
 소녀, 로빈은 다시 노트를 받아들고는 가방을 들고 검은 숄을 꺼내 둘렀다.
 "그럼, 그동안 반가웠어. 잘해봐. 안녕."
 녹슨 소리를 내는 철문을 닫고 나온 로빈은 품속에서 검정색 지우개를 꺼내들고 노트를 펼쳤다. 소녀는 조금 전에 적힌 두 줄의 문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우개로 쓱쓱 대고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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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아아아아!"
 그의 고함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어떤, 어떤 자식이 이런 거야. 반쯤 잘려진 여자의 목을 부둥켜안자 남자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거야! 이따위 짓을 한 놈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남자는 분노에 휩싸여 몇 분간 진저리를 치며 울다가, 이내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경찰서죠? 제 아내가 살해당했습니다. 성폭행도 당한 것 같아요. 예, 제가 최초 목격잡니다. 여기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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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도시에 도착하여 7층의 스위트룸에 짐을 푼 마리안은 승강기 앞에 섰다. 이제 스무 살이 되는 그녀는 워낙 작은 체구 덕에 종종 오해를 사곤 했다. 좀 전의 로비에서도 체크인 과정에서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 결국은 파비앙한테 전화를 해서야 아이 혼자 호텔에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대체 신분증까지 보여줘도 왜 안 믿는 거야? 정말 한심하군. 체크인 하나 혼자서 못하다니.' 어려 보이는데 일조하는 백금 빛의 짧은 곱슬머리를 헝클어뜨리듯 긁적이며 승강기를 기다렸다.

 이내 승강기 문이 열리자 웬 소녀가 입에 실 핀을 물고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검은 머리칼을 올려 묶고 있었다. 그녀는 마리안을 힐끗 쳐다보고는 계속 올림머리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8층의 투숙객인가?'
 승강기 안에 들어선 마리안은 곁눈질로 소녀를 살펴보았다.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바닥에 놓인 가방이 보였다. 낡고 투박한 여행 가방이 오랜 여행을 짐작케 했다. 이내 머리 묶기를 마무리 했는지 물고 있던 실 핀을 꽂고, 가방을 들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어두운 숄을 집시처럼 두르고 있는 소녀는 마리안보다 키가 훌쩍 커서 머리하나는 올려다봐야 했다. 가늘게 정리된 눈썹과 아래로 찢어진 눈꼬리가 인상적이었다. 차가워 보이는 눈매와 다르게 차분한 표정 때문인지, 드세기보다는 얌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1층에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리자, 그녀는 마리안의 백금발을 힐끗 보고는 승강기 문을 나섰다. 마리안은 지하의 식당으로 가기위해 남았다. 이윽고 승강기 문이 닫히며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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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30분 후, 옥상은 호텔 관계자들과 경찰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소나기는 그쳤지만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다행히 현장 부근은 넓은 처마 아래여서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한 젊은 남녀와 현장 책임 경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들어본 적이 있어. 엔(N) 뭐라던가 하는 다국적 특수 작전 팀. 범인이 기억 면에서 이상을 보이면 협조하라는 이야길 들었지. 그곳 소속이라고?"
 "네. 저는 파비앙 입니다. 이쪽은 제 조수인 스크립터 마리안 이고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말쑥한 수트 차림의 젊은이가 경사와 악수를 마치고 잘생긴 얼굴로 시원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범인 상태가 이상하죠?"
 "이상하지 않으면? 자기 여자 친구 경추를 칼로 끊어놓겠어?"
 "여자 친구는 맞나요?"
 "모르지 뭐. 진술도 엉터리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아. 본인 말로는 함께 살던 아내라는데. 뭐, 스토커일수도 있고. 도착증에서 망상증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흔하니까. 아무튼 법적 혼인 관계는 아니야. 본인은 범행여부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긴 하지만 뭐, 증거가 명백하니까."
 "저 남자를 범인으로 해서 수사를 종결 하시게 될 겁니다. 딱히 더 수사 하실 내용도 없을 테고요. 저희는 저희대로 좀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요. 그럼."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나가고, 경관 두 명이 좌우에서 남자의 팔을 붙잡고 이동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어수선하게 현장을 돌아다니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봐라, 마리안. 우리 예상대로 그 여자가 이 도시에 나타났어. 역시 한달 전부터 페냐에 있었던 거야. 전부 기록하고 있지?"
 마리안은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병이 구속된 남자를 바라보던 파비앙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살인자보다는 아내를 잃은 남자 역할을 하고 싶었나보군."
 "기억을 못하는 쪽이 더 행복한 걸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차피 저놈은 이제 서커(sucker)니까 본부에서 조사하겠지. 어서 연락이나 해. 그 여자가 페냐 아트카샤에 나타났다고. '마녀 로빈'이 나타났으니 특급 요원들 급파하고 임시 대책반 만들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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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오후 3시
 현관 앞에 선 리처드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주차장에서부터 수트 차림의 잘생긴 남자가 눈에 띄었는데, 멀찍이 서서 리처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신경이 거슬린 리처드는 서둘러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집에 들어온 리처드는 거실의 커튼을 치고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서재 안은 어둠에 잠겼다. '달칵' 끈을 당기자 스탠드에 불이 들어오며 책상 부근이 따뜻한 빛에 휩싸였다. 늘어선 책꽂이들의 윤곽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리처드는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책상에 앉았다.
 넓고 육중한 자단목 책상은 오랜 기간 많은 책을 쌓아올려도 휘어지거나 변형되지 않도록, 지난겨울에 특별 제작한 주문 생산품 이었다. 책상과 어울리지 앉는 싸구려 의자에 몸을 묻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푸석푸석한 잿빛 머리칼이 노란 불빛을 받아 베이지색으로 보였다.
 책상 한 귀퉁이에는 원고들이 가득 쌓여있었는데, 가장 위에는 노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지급을 요함.' 리처드는 붙어있는 메모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담배연기를 한차례 내뿜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제일 위에 있는 원고를 집어 들었다.

 남의 글 읽는 것도 정말 지겹군. 내 이야길 쓰고 싶어. 애석하게도 작가 리처드는 소설보다는 평론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평론가 리처드는 문학에 관련이 있는 프로 집단이나 엘리트 대중, 혹은 열의만 가진 다수의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젊고 냉철한 평론가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업계에서는 작품의 표면과 내부에 숨겨진 코드를 잡아내고 그 양쪽을, 소위 작품의 이중코드를 해체하는 데 능한 비평으로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품의 토양 속 양분을 잡아내는데도 능하여 많은 표절 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덕분에 언제나 문학계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메이커로 관심을 받는 입장이었다. 또 하나 그가 대중의 인기를 끄는 이유는 날카로운 독설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팬들과 더불어 많은 적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소설가로서의 리처드는 수년전 단편을 몇 번 기고했을 뿐으로, 특별히 상을 받거나 업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평론가의 재능은 타고났지만 창작의 재능은 없다고 수군거렸다. 기고했던 단편들은 흔히 관념적이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을 받았으며, 이후 편집자들에게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생각의 섬이라. 작자가 누군지도 안 쓰여 있군."
 필시 신인작가의 것이겠지. 편집장은 기준이 너무 무르다. 신인작가의 작품은 웬만하면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리처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의자에 더욱 깊숙이 몸을 묻었다. 싸구려 의자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의자를 책상에 어울리는 걸로 바꾸려면 열심히 써야했다. 제목만 봐도 나올 수 있는 스타일은 대충 예상이 가는 군. 뭔가 철학적인 내용이라면 더욱 독자를 배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겠지. '이 풋내기가 제발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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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리처드는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재떨이에 또 하나의 꽁초가 추가 되었다. 그는 책상위의 책들을 거칠게 밀쳐 버리며 불쑥 일어섰다. 느닷없이 재떨이를 집어 들고 진열장 쪽으로 던지자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꽁초와 담뱃재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싸구려 의자를 들어 창문 쪽으로 던져버렸다.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프린터기가 반쯤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리처드는 숨을 몰아쉬며 격분하다가 눈을 감았다. '끼긱끼긱' 어디선가 금속성의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날카롭게 당겨지고 속이 메슥거렸다. 리처드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몰아쉬던 숨이 가라앉고, 리처드가 눈을 뜨자 서재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진열장도 창문도 깨어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후우. 내가 왜 이러지.' 리처드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역시 스트레스 때문이다. 허접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건 정말 스트레스야. 게다가 표현력이 없는 풋내기가 허세만 들어차서 이야기를 베베 꼬아놓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왜 이런 멍청한 놈의 생각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리처드는 일어나서 서재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자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속의 자신을 보자 초췌한 모습이었다. 며칠간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이 삐죽하게 자라 있었다. 리처드는 전기면도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사각거리며 매끈한 턱선이 드러나자 조금 기분이 개운해졌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날렵한 턱선과 훤칠한 키가 만족스러웠다. '나도 아직 녹슬진 않았군.' 리처드는 잿빛 머리칼을 적당히 손질하며 칫솔을 꺼내들었다. 컵에 다른 칫솔이 하나 더 꽂혀 있었다. '응? 언제 칫솔을 하나 더 사뒀지?' 잠시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양치질을 시작하며 생각에 잠겼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풋내기의 글은 언제나 흔히 마주하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아니, 다른 이유는 없어. 역시 스트레스야. 너무 힘이 들어가서 특히 더 피곤한 글이긴 했다. 입을 헹궈낸 리처드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다시 책상에 앉은 리처드는 랩톱의 전원을 켰다. '그래. 써야지. 돈이 필요하니까.' 이 작가의 글은 자기 세계에 빠져 수신자에 닿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 쓸 만한 아이디어나 괜찮은 부분은 있었다. 그런 건 누구한테나 있으니까. 서재에 타이핑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릇된 인정은 필요 없어. 이놈에겐 좌절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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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평론: 생각의 섬
(전략)
 도대체 그 이름이 뭐였더라? 쥘베츠 또는 뷔제르츠 같은, 기억하기 힘든 남부 바이칼 식 이름이었는데. 그래, 나로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벅찬 소설은 정말 사양이다. 아무튼 그냥 주인공, 아니 '남편' 이라고 하자. 이 남편은 정말 별난 인물이었다. 어떻게 작가는 이런 인물을 서술할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 확실한 건 현실 속에 이런 인물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장난질과 같다. 작가는 어쩌면 그냥 독자가 전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개연성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행동을 예측할 수 없을 테니까.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수많은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가장 명백해야 할 문장조차 마치 기교를 한껏 부려놓은 시처럼 우리에게 중층적 의미를 강요한다. 아마도 작가는 독자가 이 난해한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읽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나는 비평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 작업은 고역이었다.) 그의 메타 텍스트 전략은 실패했다. 피상적인 독자를 붙잡지 못할 것은 작가도 예상했을지 모르겠지만, 전문가 집단에게도 이 글은 단지 인내심을 갖고 풀어야 하는 퍼즐에 불과하다. 작가는 왜 이런 실패를 하게 되었을까?

 작가는 상호 협력적 텍스트의 기본조차 모르고 글을 쓰는 얼간이 일까? 아니면 텍스트의 화용론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단지 그는 인간관계가 빈약해서 친구가 없는 작자일 것이다. 지인들이 이 글을 읽어보고 피드백을 해주었다면 이런 상태로 내 책상 위까지 올라오는 일은 불가능 했을 테니까. 좋은 텍스트라면 분석자의 눈이 작가가 바라보는 방향과 어느 정도 일치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의도한 것과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처럼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암시와 장치들로만 가득하다면 이 암호를 수신할 수 있는 자는 작가 본인뿐이다.

 알아볼 수 없는 암시와 장치들 중에서도 특히 독자를 크게 혼란에 빠뜨리는 암호가 두 가지 있어서 적어본다. 그것은 모두 남편과 관련된 것이다.
 먼저 아내가 바람을 피운 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남편의 의처증인가? 그것도 아니면 남편이 바람을 피웠나? 복잡한 죄의식과 의심, 관념 과잉의 표현력 속에서 독자가 등장인물의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하기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나? 그들은 진짜 남편과 아내였나? 아니면 어쩌다 보니 함께 살게 된 남녀였나? 그것도 아니면 남편은 그냥 여자를 감금해놓고 함께 지낸 스토커였나? 결국에 독자들은 이 소설의 장르조차 판단할 수 없다. 만일 이래놓고 작가가 열린 결말 운운 한다면, 그건 독자에 대한 기만이다.
 아무튼 그는 독자, 수신자에게 관심이 없다. 아니면 교양 있는 엘리트 독자들이 내포된 의미를 샅샅이 찾아 낼 거라 기대했을까? 하지만 교양 있는 엘리트 독자라면 애초에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관념에 도취된 풋내기 작가의 글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잘 아는 자들 이니까.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남편이 작품 마지막 순간에 아내에게 던진 대사를 살펴보자.
 "널 섬으로 데려가주지."
 이 대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이 문장만 놓고 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정도의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극의 초반부터 계속해서 이야기 했듯이 에메랄드 빛 바다와 긴 해변이 있는 낙원과 같은 섬으로, 남편은 보상의 의미로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마치 아이들에게 '서커스에 데려가 줄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해석은 남편이 절정부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아내를 섬노예로 팔아넘기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건 위협의 의미가 된다. '서커스에 데려가 줄게' 에다가 빗대어 보자면 그 대상이 아이들이 아닌 원숭이가 될 것이다. 그건 원숭이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테니까.
 아, 정말 이 마지막 대사만 아니었어도, 이 책을 한 번 더 읽는 고역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안타깝다. 세 번 읽은 것도 억울한데 한 번 더 보게 만들다니. 평론가에게 30분이라는 시간은 정말 귀중하다. 하물며 30분을 투자해서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면 더욱 그렇다.
 남편은 어떤 의도로 이 대사를 읊었을까? 글을 수차례 읽어봐도 이 인물의 심리를 읽을 수 없다. 남편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엘리트 독자가 못되는 걸까? 이럴 때는 문맥을 살펴 그 의미를 구분하는 것이 정석적인 방법일진데, 이 소설 전반이 그렇듯이 문맥을 봐도 달리 명백한 맥락이 없다. 해서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굴욕적인 방식이지만, 작가에게 직접 물어본다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게 대체 무슨 떡밥입니까?"
 (T.S 리처드,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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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으로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리처드는 편집장에게 메일을 보낸 후 탁상시계를 보았다. 전자시계의 액정이 목요일 오후 여섯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피로와 함께 기묘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여섯시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었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리처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의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때 편집장으로부터 짧은 답신이 왔다. '생각의 섬? 리처드. 이건 뭐야? 난 이런걸 보낸 적이 없는데?' 혼란스런 기분이 된 리처드는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전화기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전화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떨어뜨렸나?' 비틀거리며 일어선 리처드는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2
                   목요일, 오후 2시
 뒤에서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울렸다. 핸들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건널목의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부신 태양 빛이 어지럽게 눈을 쏘았다. 리처드는 멍한 기분으로 차를 건널목 옆 갓길에 세웠다. 차량들이 휙휙 지나쳐갔다. 뒷목이 뻣뻣했다.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뀐 것도 모르고 달리다가 아이를 칠 뻔했다. 보닛이 건널목을 침범하고서야 간신히 차를 세웠다. 부주의하게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몰랐다니.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었지?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리처드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수석에 신문과 노트가 놓여있었다. 신문에는 노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카페 웨스트사이드, 2시.' 그곳은 자주 가는 바이칼 산 커피 전문점이었다. 손님이 적고 조용한 편이라 업계사람들과의 미팅에 주로 이용하곤 하였다. 커피 맛이 좋아서 가끔은 혼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기도 했다. 대시보드의 시계를 보니 오후 2시였다. '그렇군. 카페로 가던 중이었나.' 마침 건널목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리처드는 불법 유턴으로 차량을 돌려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앞에 차를 대고 입구로 들어선 리처드는 홀 구석의 피아노 옆, 칸막이가 쳐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트를 대강 테이블위에 팽개쳐두고 신문을 펼쳐 읽었다. 별달리 흥미 있는 기사는 없었다. 1면은 어젯밤에 호텔옥상에서 여자 친구를 죽인 어느 머저리의 이야기였다. 지역신문 1면을 단골로 차지하는 흔한 치정 살인이었다. 분명 약에 절은 놈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리처드가 신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보자 하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소녀가 테이블 앞에 서있었다. 짙은 회색빛의 주름진 숄이 인상적이었다. 소녀가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리처드 선생님 맞으시죠?"
 "선생님이라니 너무 딱딱하네, 나도 아직은 20대인데?"
 "저도 아직은 10대인걸요?"
 리처드는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겐 안 보이는데?"
 사실 얼굴에 남아있는 약간의 치기를 제외하면 제법 성숙해 보이기도 했다. 소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후후, 자 일단 앉아. 어디서 왔지 아가씨?"
 리처드는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놓으며 물었다. 소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출판사 소개로 오긴 했지만, 그냥 팬이에요.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온건 아니고요."
 "아, 팬인가? 어떤 걸 좋아하지?"
 "선생님이 쓰신 단편은 4개 모두 다 읽었어요. <붉은 방울>, <악덕의 수녀>, <고트프리트의 유언>, <사라진 기차> 전부요. 데뷔하실 때 잠깐 연재하셨던 짧은 엽편 두 개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리처드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잠깐, 내 평론이 아니고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네. 푹 빠졌는걸요."
 "맙소사.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정말 기쁘군."
 "설마요? 선생님 소설은 정말 깊이가 있는데요? 대중성은 좀 부족하지만 아마 골수팬들이 상당히 많을걸요."
 "하하,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진입장벽은 높지만 한 번 그 깊이를 맛본 독자들은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는 충성스런 독자가 된다고요. 저도 전부다 수차례 읽은 충성스런 독자랍니다."
 소녀가 아이처럼 웃으며 재잘거리자 리처드는 손사래를 쳤지만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로군."
 리처드는 김이 오르는 커피 잔을 입에 대고는 말했다.
 "만에 하나 내 소설의 진가를 알아보는 독자가 있다고 해도 이런 독자일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런 독자가 어떤 독자인데요?"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처드를 응시했다. 리처드는 잠시 동안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장난기 가득하던 소녀의 눈이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리처드의 의식은 빨려들 듯 눈동자 속으로 휩쓸려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눈보라처럼 매서운 절망과, 사막처럼 정처 없는 시간들이, 싸늘한 의지와 함께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거짓말처럼 짧은 환상이 깨어지며 소녀의 눈은 어느새 다시 장난기로 물들어있었다. 리처드는 눈을 비비며 아득한 기분을 떨쳐내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글쎄……. 아름답고, 지적이고, 장난기 넘치는 독자?"
 미소 짓는 소녀를 보자 리처드의 마음은 다시금 편안해졌다. 한동안 여러 가지 문학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던 리처드가 시계를 보고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
 "벌써 3시가 다 되가는군. 어디로 가지? 태워줄까?"
 "아뇨. 전 이 커피, 마저 마시고 갈게요."
 "그럼 그렇게 해."
 리처드는 테이블의 신문과 노트를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만날 수 있을까?"
 "아마 다시 보긴 힘들 거예요. 오늘 저녁 기차로 페노 바칼린으로 떠나거든요. 여기저기 여행하고 있어요."
 "그런가? 앞으로도 응원해 주겠지?"
 리처드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따라 일어선 소녀는 검은 벨벳장갑을 벗고 악수를 받았다.
 "그럼요."
 손을 뗀 소녀는 조그만 잔을 들어, 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리처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쓸쓸하네."
 소녀는 잔을 입에서 떼며 하얗게 웃었다.
 "저도요."
 돌아선 리처드는 등 뒤로 손을 한 번 들어주고는 입구로 향했다. 리처드가 돌아서자 소녀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조금씩 굳어가는 그녀의 표정과 함께, 입가에 걸려있던 쓸쓸한 미소도 사라져갔다. 이윽고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안경을 벗어 든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테이블 위의 신문을 내려다봤다. 신문 아래로 노트 한 귀퉁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잠시 노트를 노려보던 그녀는 가방에서 분리된 낱장을 꺼내 노트에 끼워 넣었다. 로빈은 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열차표의 시각을 확인했다. '페노 바칼린행. 6시.'

 카페를 나선 리처드는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밀린 원고를 읽을 생각을 해서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군.'
 집에 도착한 그는 차를 대고 현관 앞에 서서 열쇠를 꺼냈다. 주차장에서부터 수트 차림의 잘생긴 남자가 눈에 띄었는데, 멀찍이 서서 리처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신경이 거슬린 리처드는 서둘러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집에 들어온 리처드는 거실의 커튼을 치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3
                   목요일, 오후 1시
 전화를 끊고 모텔방을 나선 리처드는 화가 나서 차를 몰았다. 이윽고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린 리처드는 거칠게 차문을 닫았다.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리처드는 노트를 쥐고 안으로 들어서서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로빈! 로빈! 당장 나와!"
 검은 벨벳 블라우스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로빈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처드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올려 묶은 검은 머리 아래로 길고 하얀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연한 표정으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멈춰 선 리처드는 격분했던 심장이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공기의 흐름이 멈춘 듯 숨이 막히며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리처드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너에 대해 알게 됐어."
화를 내려 했던 리처드는 생각한 것과 달리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 나와서 당황했다. 로빈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무언가 바뀌는 게 있었어? 아, 그러고 보니 곡이 완성됐어. 들어볼래?"
 리처드가 머뭇거리고 서있자, 로빈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거기 앉아, 점심은 먹었어?"
 "바보취급하지 마."
 리처드는 맥 빠진 목소리로 내뱉으며 일단 테이블에 앉았다. 로빈이 다시 등을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
 "그런 적 없어."
 그녀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일어서려던 리처드의 앞에 카페 주인아저씨가 커피를 내려놓았다. 다시 앉은 리처드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내 커피 잔을 들고 일어선 그는 피아노 옆 바(bar)에 앉아서 로빈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리처드를 힐끗 쳐다보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영혼의 도시를 여행하네, 우울한 흙먼지의 철로를 건너.
 나는 영혼의 도시를 여행하네, 쓸쓸한 낙엽들의 기차를 타고.
 나의 깊은 상처를, 당신이 읽었더라면.
 당신이 써놓은 열정의 고뇌를, 내가 몰랐더라면.
 웅크린 나를, 못보고 지나쳤더라면.
 나는 영혼의 도시를 여행하네, 떠나는 길고양이와.
 나는 영혼의 도시를 여행하네, 리브르 에스피.

 서로 눈이 마주친 채로 연주가 멈추자 리처드는 자꾸 감상적이 되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도전적으로 물었다.
 "리브르 에스피는 뭐야?"
 "그건 바로 당신을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글쎄, 뭘까나?"
 로빈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리처드가 발끈하며 말했다.
 "제기랄. 그래, 처음부터 모른 척 지나쳐야했어!"
 로빈이 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고?"
 "집 앞에 웅크리고 있던 길고양이를 주워 기른 게 실수였다고!"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지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리처드를 노려보던 그녀는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나서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어딜 가? 아직 얘기 시작도 안했는데?"
 "화장실까지 따라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로빈이 화장실로 사라지자 리처드는 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스피커에서 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로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리처드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자네, 여자 친구 노래가 괜찮아서. 내가 부탁을 좀 했지. 목소리가 좀 작게 녹음되긴 했군."
 리처드가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주인 너머 뒷벽으로 바이칼 출신 바리스타가 어쩌고 하는 선전물이 보였다.
 "아, 아저씨 바이칼 출신이셨죠?"
 "응? 그렇지. 이 노래는 자네들 얘긴가?"
 "네? 아, 제가 리브르 에스피입니다."
 리처드의 말을 들은 주인아저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자네가 리브르 에스피라고?"
 리처드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저, 그게 무슨 뜻이죠?"
 주인아저씨는 리처드의 삐죽이 자란 수염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좀 초췌해보이긴 하는군. 이쪽말로 옮기자면 '이용당한남자' 랄까? '차인남자' 라고 해석해도 맞고."
 민망해진 리처드는 주인의 시선을 피해 바(bar) 위에 구비되어있던 지역신문을 집어 들었다.

 몇 분 후 로빈이 돌아오자 두 사람은 후미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리처드는 신문을 대강 테이블위에 팽개쳐두고, 카페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쥐고 있던 노트를 두 손으로 든 채 눈을 감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기억해?"
 "……."
 "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다 기억해. 입구의 종소리에서부터 커피의 냄새와 맛까지."
 "그야 그러시겠지. 잘난 기억력이 있으니까."
 눈을 감고 있던 리처드는 로빈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건, 누구나 기억할 수 있어. 아직 한 달밖에 안 지났는걸."
 리처드는 눈을 떠 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튼 노트를 내놔."
 "그건 당신 손에 이미 들고 있잖아."
 "내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없잖아. 낱장으로 가지고 있지?"
 "그건 여기 있어."
 로빈은 순순히 가방에서 분리된 낱장을 꺼내 테이블위에 올려놨다. 낱장을 살펴본 리처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낱장의 가장 위에 리처드의 풀 네임이 적혀있고, 두 줄 아래에 단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로빈을 만났다.'
 리처드는 이를 악물고 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만 해?"
 로빈이 마주 노려보며 대답했다.
 "당신이 그때 안적은 걸 내가 이제야 적은 것뿐이야. 그래, 처음부터 말한 대로 적었으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늘어질 일도 없었겠지."
 "어떻게 해야 되돌릴 수 있지? 이렇게 끝낼 수는 없잖아?"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되돌릴 생각도 없고."
 "그래, 좋아. 네 마음대로 해봐! 난 노트를 가져갈 테니."
 리처드는 벌떡 일어서며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고는, 뒤로 돌아서서 노트를 꽉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로빈은 돌아선 리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의 신문에 노란 메모지를 붙이고 무언가 적었다. 그리고는 리처드에게 말했다.
 "리처드, 신문은 가져가야지. 읽던 거잖아."
 돌아선 그는 잠시 로빈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신문을 거칠게 잡아채며 외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 무신경함에는 진절머리가 나!"
 다시금 뒤돌아선 리처드는 미련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거칠게 문이 닫히자 종소리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홀 안을 울렸다. 로빈은 한동안 입구를 응시하다가 5분쯤 시간이 지나자 테이블 위의 낱장을 바라보았다. '로빈을 만났다.' 잠시 적혀있는 문장을 노려보던 로빈은, 이윽고 결심한 듯 품속에서 검은 지우개를 꺼내 문장을 지웠다.
 '안녕. 리처드.'
 문장을 지운 로빈은 가방에서 검은 뿔테안경을 꺼내 쓰고 짙은 회색빛의 숄을 꺼내 둘렀다. 그리고는 양장본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카페를 나선 리처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운전대를 잡았다. 오른손에는 신문과 노트를 말아 쥔 채였다. 리처드는 신경질적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어서 그들을 만나야 해.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 그 남자를 만나면 돼.' 리처드는 쥐고 있던 노트와 신문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전화기를 꺼내 통화목록을 살폈다. 그때 격앙된 리처드의 눈앞에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이 보였다. 리처드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량은 거칠게 미끄러지다가 보닛이 반 이상 건널목을 침범한 채로 간신히 멈춰 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길을 건너던 아이가 깜짝 놀란 눈으로 리처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에게 지나가라고 손을 저어 주고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시트 밑에 떨어진 전화기가 깜빡거렸다.

 뒤에서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울렸다. 핸들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건널목의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부신 태양 빛이 어지럽게 눈을 쏘았다. 리처드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차를 건널목 옆 갓길에 세웠다. 차량들이 휙휙 지나쳐갔다. 뒷목이 뻣뻣했다.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뀐 것도 모르고 달리다가 아이를 칠 뻔했다. 부주의하게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몰랐다니.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었지?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리처드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수석에 신문과 노트가 놓여있었다. 신문에 노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카페 웨스트사이드, 2시.' 그렇군. 카페로 가던 중이었나. 마침 건널목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리처드는 불법 유턴으로 차량을 돌려 다시 카페로 향했다.

                      4
                   목요일, 정오
 리처드는 몸을 뒤척였다. 익숙하지 않은 딱딱한 침대가 불편했다. 온기를 찾아 옆자리를 더듬어 봤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눈을 뜨자 낯선 격자무늬가 보였다. 무늬를 멍하니 바라보던 리처드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낯선 천장이군.'
 어젯밤 로빈이 묵고 있는 모텔에서 나온 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근처 모텔에 방을 잡았던 기억이 났다. 리처드는 누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 밖에서 햇살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침대 옆 협탁의 시계를 보니 이미 목요일 정오였다. 밤새도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들지 못했었다. 리처드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무시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소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울렸다. '끈질기군.' 결국 헝클어진 잿빛 머리칼을 긁적이며 일어선 리처드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옷걸이의 외투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서 받았다.

 "리처드? 혹시 어떤 노트에 이름을 적은 적이 있나? 아니면 최근에 어떤 여자가 접근했다던가?"
 남자의 목소리에 리처드는 잠이 싹 달아났다.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리처드는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로빈의 경고가 떠올랐다. '언젠가 무서운 사람들이 잡으러 올지도 몰라.'
 "당신은 누구지?"
 "난 당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이야."
 남자의 짐짓 쾌활하게 대답했다. 리처드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신 지금 위기에 처한 것 같은데? 노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눈치군?"
 리처드는 협탁 위에 놓아둔 노트를 힐끗 보았다.
 "내가 무슨 위기에 처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분명한 정체를 밝히기 전에 무언가 말해 줄 생각은 없어."
 "그래, 그럼 경찰 비슷한 거라고 해두면 안될까? 우린 오랫동안 한 여자를 쫓고 있어. 아주 무서운 여자야."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데?"
 "여자를 알고 있구나?"
 "흥. 넘겨짚지 마. 그냥 물어본 것뿐이니까."
 "그래, 그럼 일단 만날까?"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전화기속의 목소리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여자는 아일랜드 호텔 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이야. 살해 용의자이기도 하다고."
 "그건 피해자의 남자 친구가 한 일이라던데?"
 "당신도 내 충고를 듣지 않으면 그 남자랑 비슷한 꼴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 여자는 사람을 홀리는 마녀야."
 "말도 안 돼. 그녀는……."
 리처드는 자기도 모르게 반박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래, 말해봐. 알고 있는 게 있지?"
 "……."
 남자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아무튼 네 근처에 어떤 여자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 만일 그 여자의 비범한 기억력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면 내가 말하는 여자가 맞을 거야."
 리처드는 로빈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문장을 인용하던 모습을 기억해냈다.
 "들어도 혼란스럽겠지만, 잘 들어봐. 그녀는 기묘한 노트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다. 기억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살인이고."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노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거기에 이름을 적은 적이 있다면, 당신도 위험해. 하지만 당신은 노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직 기회는 있어. 이미 완전히 당했다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 아무튼 이름을 적었다면 그 페이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귀속된 거야. '낱장'으로 분리되더라도 말이야. 어때? 뭔가 집히는 것이 있나?"
 리처드는 어깨에 전화기를 끼고 노트를 펼쳐 이틀 전, 화요일 저녁에 스스로 이름을 적었던 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없었다. 노트는 조임쇠를 이용한 수작업 제품이어서 낱장의 탈부착이 용이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적어도 기억이 지워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일단 이름을 직접 적었다면 말이야. 혹시 지금 노트를 가지고 있나? 만일 그렇다면 가능한 빨리 우릴 만나는 것이 좋아. 노트가 있으면 이미 무언가를 적었더라도 우리가 당신 기억을 보호할 수 있어. 지키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말이야. 어쩌면 이미 지워진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고."
 "적는 즉시 기억이 지워지는 게 아닌 건가?"
 "아니, 적고 나서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정확히 얼마가 지나야 지워지는 지는 우리도 아직 몰라. 어쩌면 무언가 다른 조건이 있을 수도 있고."
 "그녀의 목적은 뭐지?"
 "정확한건 우리도 몰라.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지. 일단 그녀는 모친의 뒤를 잇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모친이 지독한 악녀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악녀라고? 연쇄살인마라도 되나?"
 "그보다 더 나쁜 거야. 아무튼 우린 만나야 해.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상태라고."
 "그녀는……."
 리처드는 전화를 끊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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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앙은 전화를 끊고 커다란 헤드폰과 연결된 장비들을 분리했다. 그가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마리안에게 말했다.
 "틀렸어. 역시 소리만으로는 한계가 있군.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작은 방 안이라는 것 밖에는. 어쨌든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 건 아니야. 최근 한 달 동안 함께 지낸 것 같긴 한데. 이래서야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낸 보람이 없군. 일단 그의 집이라도 지키고 있어야겠는데?"
 그때 테이블위의 화면이 켜지며 중년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저 대마녀 실비아 발렌타인의 딸인데, 그렇게 쉽게 너희들 손에 잡혀줄 리가 없겠지."
 "삼촌!"
 마리안이 화면을 보고 외치자. 파비앙이 고개를 들었다.
 "아, 국장님. 요원들 급파는 안 되나요? 어떻게 힘 좀 써주세요."
 "파비앙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그렇게 하루 이틀 만에 동부까지 요원들이 출동할 수 있을 것 같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고."
 "하지만, '마녀 로빈' 이라고요. 시리아 사건 때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 따라잡은 건 처음이에요.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그녀가 많은 피해를 발생시키기 전에 붙잡아야 합니다. 정보부에서도 이미 그녀를 특급 위험인물로 규정했잖아요?"
 "아직 치명적인 문제를 저지른 건 아니잖아. 그리고 아무리 마녀의 딸이라도 겨우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아이가 그렇게 위협적일까?"
 중년 남자가 묘하게 마리안을 힐끗거리며 말하자, 마리안이 발끈하며 말했다.
 "왜 날 쳐다보면서 말해요?"
 파비앙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단순한 기억 관리법 위반 수준이 아니고, 아예 남의 기억을 지워버린다고요. 다시 한 번 악성 서커(sucker)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모친과 같은 기억술사인가?"
 "좀 다르지만 똑같은 공감각(共感覺) 기반 체계입니다. 그녀 역시 선천적인 공감각자 이고요. 사진기억 수준의 초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기억술과는 수준이 다르죠."
 파비앙이 마리안을 힐끗 쳐다보자 그녀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음, 아무튼 최근까지 함께 지낸 남자는 알아냈는데, 이 남자 위치를 알 수가 없네요. 어제 까진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제길. 심장소리로 판단하기에 노트에 대해서는 아는 눈치긴 한데, 어쩌면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고요. 아무튼 협조적이진 않았지만, 할 말은 다 해줬어요. 노트에 관해서 최대한 말해줬으니까, 아마 쉽게 당하진 않겠죠."
 "한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 안 당했다면 말이지?"
 "아, 생각보다 명석한 남자였어요. 화가 좀 난 것 같고 비협조적이긴 했지만, 지적 능력도 뛰어나고, 큰 동요가 없어요. 논리적 허점도 전혀 없고요. 아마 서커는 아닐 겁니다. 목소리로 볼 때, 북 노이칼계 폐냐인 인 것 같고요."
 "흥. 기억은 안 빨렸어도 육체적으로는 서커인지도 모르지."
 국장이 비아냥거리며 내뱉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마리안의 얼굴이 이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파비앙을 보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전화 추적은……."
 "그건 무리지. 여긴 서부가 아냐, 페냐라고. 그 남자 전화번호 알아내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어. 외부 철도를 통제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파비앙이 다시 화면속의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아직 이 도시에 있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국장님이 좀 도와주시면 승산이 있다고요."
 "좋아. 내가 그쪽 부서에 이야길 해보긴 할 테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라고. 너희들 콤비는 이미 지나치게 잘하고 있어. 아무도 너희가 그녀를 잡아오는 것 까진 기대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화면속의 남자가 이번엔 마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리안, 넌 만에 하나 그 여자를 발견해도 절대 섣불리 접근하면 안 돼. 이번엔 스크립터 역할에만 충실하라고. 마녀에게 기억을 쪽쪽 빨리고 차가운 페냐 강에서 변사체로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그건 별로 예쁘지 않을걸."
 남자가 음침한 목소리로 짐짓 겁주듯 말하자 마리안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괜찮아. 내게도 기억술이 있는 걸? 난 마녀와 꼭 대화를 해보고 싶다고."
 국장이 파비앙을 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 모양 이니까 자네가 잘 해줘야 하네. 저 애가 잘못되면 형님 볼 면목이 없어. 아마 난리가 나겠지. 물론 자네도 성하진 않을 거야. 알지?"
 "네."
 파비앙의 맥 빠진 대답과 함께 모니터가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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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를 끊고 모텔방을 나선 리처드는 화가 나서 차를 몰았다. 이윽고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린 리처드는 거칠게 차문을 닫았다.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리처드는 노트를 쥐고 안으로 들어서서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로빈! 로빈! 당장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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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늦은 밤
 비는 그쳤지만 밤공기가 차가웠다. 호텔을 나선 로빈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어두운 숄에 턱을 묻었다. 호텔 승강기에서 마주친 부드러운 백금발의 여자아이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녀는 금발머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그녀의 기분을 어둡게 만들었다.
 로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내일이면 끝이군. 이 도시도.' 그녀는 도로의 젖은 낙엽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다시 혼자가 되는 건가?' 싸구려 모텔의 어두운 방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장갑 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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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고 어두운 복도에 주저앉아 있는 리처드를 발견 했을 때, 그는 흠뻑 젖은 머리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빈은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다가, 그의 빈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자 리처드가 고개를 들었다. 로빈은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 문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열쇠를 열쇠구멍에 넣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흥. 웬 길 잃은 고양이가 한 마리 있군 그래?"
 "그래, 이번엔 내가 문 앞의 길고양이 신세네."
 리처드가 자조적으로 대꾸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좁은 복도를 울리자 로빈은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한 채 내뱉었다.
 "안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아까 보니 열쇠 없이도 잘 들어오던데?"
 "비아냥거리지 마. 로빈. 네 말과는 달리, 난 네 기억을 잃지 않았어. 노트를 살펴봐도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던데?"
 로빈은 대답 없이 문을 열었다.

 로빈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리처드가 일어서서 따라 들어왔다. 로빈은 신발장 한편에 가방을 놓아두고 부츠를 벗었다. 방안에 들어선 로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비춰 그녀의 피부가 눈부시게 빛났다. 리처드가 신발장에 머뭇거리고 서있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해? 안 들어 올 거야?"
 안으로 달려 들어간 리처드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로빈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그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로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연 리처드는 거칠게 그녀의 머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묶은 머리가 풀리며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리처드의 훤칠한 키가 방해가 되어 로빈의 목이 지나치게 뒤로 꺾였다. 리처드는 키스를 멈추지 않고 그녀를 안아들어 식탁에 앉혔다. 높이를 맞추고 한동안 입술을 탐하던 리처드는 재차 그녀를 일으켜 세워 키스하며 걷다가 함께 소파로 쓰러졌다. 리처드의 오른손이 그녀의 허벅지 뒤를 붙잡아 올렸다. 검은 스타킹 너머로 따뜻한 감촉이 손바닥을 자극했다. 리처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로빈은 차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뗀 리처드가 머뭇거리자 로빈이 입을 열었다.
 "만족했으면 비켜. 무거우니까."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은 리처드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로빈.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알잖아? 노트를 선택하면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될 거야. 노트도 일단은 잊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당신 손에 남을 수도 있겠지."
 로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에 노트를 포기한다면 날 기억할 수는 있겠지. 물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난 떠나야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
 리처드가 일어서며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꼭 내일 떠나야해? 소설 한편을 쓸 때까지만 기다려 줄 순 없어? 알잖아? 내가 얼마나 내 소설을 쓰고 싶어 했는지. 넌 이해할 수 있잖아? 노트, 노트가 있으면 나는 독자가 되어서 내 글을 읽어볼 수 있어! 남이 쓴 글을 읽듯이 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그게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로빈."
 격앙된 목소리로 리처드가 외쳤다. 로빈은 내리깐 눈으로 말했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해. 리처드. 당신은 이미……. 기다려도 달라지는 건 없어."
 "로빈."
 바닥에 주저앉은 리처드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결국 노트인가? 돌아가 리처드. 팬으로써 당신을 기억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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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 닫힌 어두운 방안에서 로빈은 숄과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그녀는 식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가방을 열고 여러 권의 노트들 사이에서, 낱장의 페이지를 한 장 꺼내 테이블에 놓고 펜을 들어 적기 시작했다. '로빈을 만났다.' 다 적은 로빈은 이내 펜을 놓고 검은 지우개를 꺼내들었다. 지우개를 문장의 첫 글자에 갖다 댄 그녀의 눈에 페이지 상단에 적힌 리처드의 이름이 보였다. 잠시 싸늘하게 그의 이름을 노려보던 로빈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그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이내 지우개를 내려두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잠시 종이를 응시하던 그녀는 담요를 가져와 어깨에 두르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로빈은 몇 번이나 지우개를 들고 종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지우개를 놓고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했다.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노트의 운명이 또 한 번 그녀를 잠식하였다. 로빈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억은 고통과 절망, 도피와 체념을 넘나들며 그녀를 휘저었다. 로빈은 마음을 다잡고 싸늘한 의지를 내비쳤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고 지우개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이 지울 수 없는 번민으로 일그러졌다. 결국 아무것도 지우지 못한 로빈은 책상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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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텔에서 나와 운전을 하던 리처드는 도저히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차를 돌려 근처 모텔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딱딱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자 낯선 격자무늬가 보였다.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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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몇 시간 전
 골목에 몰래 차를 세운 리처드는 망원경을 꺼내 길 건너편의 허름한 모텔을 살펴보았다. 초저녁의 하늘은 금세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1층 끝 방 창문의 불이 꺼지자 리처드는 작은 손전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쌀쌀한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잠시 골목 어귀에서 길 건너편을 살피던 리처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건넜다. 간간히 차량이 지나가는 한적한 도로였다. 길을 건넌 리처드의 눈에 모텔 정문을 나서는 호리호리한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깜짝 놀란 리처드는 전봇대 뒤에 몸을 숨겼다.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오랫동안 꼼짝 않고 기다린 리처드는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특별히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리처드는 외투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끼고 심호흡을 하며 모텔 정문으로 들어섰다.

 저녁시간이라서 그런지 모텔 안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처드는 어두운 1층 복도를 걸어 가장 끝 방의 문 앞에 섰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가볍게 세 번 두들겼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깐 기다리던 리처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품속에서 카드를 꺼냈다. 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그는 주변을 불안하게 살피며 카드를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금방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리처드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고는 방안에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후. 피곤하군.'
 어두운 방안에 들어선 리처드는 손전등을 켰다. 손전등을 거꾸로 잡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데 식탁에 앉아있는 검은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깜짝 놀란 리처드가 식탁을 비추자 실루엣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부시니까 꺼."
 찔끔한 리처드가 손전등을 끄자 방안이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어두운 방안에서 리처드가 잠시 우물쭈물하고 있자 곧이어 전등이 켜지고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건 무슨 흉내야? 첩보 스릴러라도 쓰기로 했어?"
 전등 스위치를 올린 로빈이 묻자, 놀란 리처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아, 알고 있었어?"
 "뭘? 몰래 기획중인 하드보일드 첩보물 시리즈 말이야?"
 "그딴 건 쓰고 있지 않아!"
 리처드가 정색하며 말하자 로빈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없네. 노트에 적지 않은 거라면 물론 알고 있었지."
 "그래! 난 아직 납득할 수 없어. 왜 이대로 모든 걸 끝내야 하지?"
 "더 이상 당신의 몰이해를 감당할 생각은 없어. 아무튼 무슨 용건이지?"
 "그, 그건……."
 로빈이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노트를 가지러 왔군? 아니, 훔치러 온 건가?"
 "……."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가방을 열어서 노트를 꺼내더니 거리낌 없이 리처드에게 내밀었다. 리처드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노트를 받아들었다.
 "그래, 내가 노트를 가지러 온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욕심 때문만은……."
 "그걸 들고 나가면, 오늘 중으로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게 될 거야."
 놀란 리처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난 오히려 노트를 가지고 있으면 기억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지우고 싶은 기억을 적어야 지워지는 것 아니었어? 난 이름 말고는 안 적었는데?"
 "그건 별로 당신이 알 필요가 없어. 어차피 난 내일 이 도시를 떠날 테고, 기억을 잃는 걸 원치 않으면 노트를 놔두고 나가면 돼."
 "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뭔가 잘못 한 거야? 왜 갑자기 이렇게 냉정하게 굴어? 네게 어떤 사정이 있든 내가 도와줄 수……."
 "아니, 당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나도 변한 게 없고. 단지 한 달간의 사치를 끝낼 때가 된 것 뿐이야."
 로빈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깔린 도시가 스산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될 거야."
 로빈은 당혹스런 표정의 리처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선택은 당신 몫이야. 난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그만 나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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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를 들고 차에 탄 리처드는 고뇌에 잠겼다. 끊이지 않는 의문 속에서 애증과 열정, 고통의 소용돌이가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때로는 욕심이 화산처럼 타올랐다가, 어느새 아련한 그리움이 차올라 깊이 가라앉았다. 리처드는 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강한 바람이 부는 밤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산하게 가로수를 흔들었다. 리처드는 폭풍같이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며 도로를 질주했다. 낙엽이 차량을 뒤따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시내에 들어선 리처드가 어느 호텔 앞을 지나칠 때, 불현 듯 밤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더니,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비바람을 뚫고 어두운 도로를 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로빈의 모텔 앞으로 돌아온 리처드는 불 꺼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동차 지붕을 두들겼다.
 창문을 바라보던 리처드는 그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절실한 욕망에 당황했다. 사실 리처드는 그녀를 연인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보다 더 따뜻한 온기로 리처드를 감싸 안았다. 바로 가족이었다. 그녀가 떠나려는 지금,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왜 이토록 절실하게 욕망이 고개를 드는 걸까?
 리처드는 조수석에 내려놓은 노트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욕망이었다. 두 절실한 욕망의 싸움이었다. 노트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던 리처드는 다시 노트를 집어 들었다. 노트를 쥔 채 이를 악물고 차에서 내리려다가, 문득 창밖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노트가 비에 젖어도 괜찮은 걸까? 작은 의문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리처드는 다시 노트를 조수석에 내려놓고 빈손으로 차에서 내렸다.
 비를 맞으며 모텔로 걸어간 리처드는 흠뻑 젖은 채 좁고 어두운 복도로 들어서 로빈의 방 앞에 섰다. 그는 문 옆에 맥없이 주저앉아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미 영영 떠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이 리처드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처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복도를 걸어오는 로빈을 바라보았다.

                        7
                   화요일, 그리고 한 달 전
 "나, 조만간 이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
 식탁 앞에 선 리처드는 종이봉투에서 둥근 빵을 꺼내 바구니에 담다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로빈을 쳐다보았다. 점심 식탁 위에는 후추를 뿌린 소고기 브로콜리 볶음과 견과류가 뿌려진 샐러드가 올라가 있었다. 로빈은 맞은편에 검은 슬리브리스 차림으로 앉아서 음식을 먹다가 리처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리처드는 그녀의 치켜 뜬 눈을 내려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종이봉투에서 빵을 꺼내 담으며 말했다.
 "그래? 그 전에 우선 그 브로콜리부터 남기지 말고 다 먹도록 해."
 "우웩."
 "그렇게 고기만 집어 먹으면 성격이 나빠질걸."
 "괜찮아. 이미 충분히 나쁘니까."
 로빈이 구운 파인애플을 입에 넣으며 대꾸했다. 리처드는 얄밉게 오물거리는 입을 보며 한 달 전의 어느 비오는 날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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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현관 앞에 선 리처드는 열쇠를 꺼내다가 담벼락 밑에 웅크린 소녀를 발견했다. 커다란 여행 가방 위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는 버려진 고양이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둘러 쓴 검은 천은 비에 흠뻑 젖어 도리어 체온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리처드는 혀를 끌끌 차며 생각했다. '가출소녀인가?'
 "이봐. 아저씨."
 리처드가 계속 힐끗거리자 소녀가 당돌하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이 집 주인인가? 담벼락 정도는 빌려도 괜찮겠지?"
 "비가 오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길 잃은 고양이처럼 남의 집 앞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집 따윈 없어."
 '그러시겠지.' 리처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 가출소녀입니다, 같은 대사로군."
 "난 가출소녀 따위가 아니야. 내겐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에서 깊은 체념의 기운을 읽은 리처드는 어쩐지 마음이 움직여서 소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우산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자 소녀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도움이 필요한가? 얼굴이 창백한데? 따뜻한 우유라도 가져다줄까?"
 "흥. 키다리 아저씨 같이 말하네. 좋아. 가져와봐. 하지만 보답을 바라진 마."
 리처드는 소녀의 눈빛에 어린 경계심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후. 할 수 없군. 좋아. 일단 들어가자. 길고양이 하나 주운 셈 치지 뭐."
 소녀가 치켜 뜬 눈으로 리처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탐색하는 눈빛이군.' 리처드는 소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리처드의 미소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흐려지더니, 갑자기 그녀가 앞으로 쓰러졌다.
 "이, 이봐. 괜찮아? 어이. 정신 차려."
 소녀를 받아든 리처드가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리처드는 그녀를 들쳐 안고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처드는 사람을 사귀는데 서툴렀고, 그것은 그녀 역시 비슷해 보였다. 깨어난 소녀는 자존심 강한 길고양이처럼, 언제든 갑자기 떠날 것처럼 굴었지만 그녀 역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일까?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있었고, 창작의 고뇌와 외로움,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리처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오래전 부모님을 잃고 쭉 혼자 지낸 리처드는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 괜찮아? 너무 뜨겁지?"
 리처드는 인상을 찌푸리는 로빈을 보고 스튜 그릇을 받쳐 들면서 말했다.
 "물론 이 정도는 괜찮아. 당신은 정말 나를 고양이 취급하려고 하는군?"
 로빈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그릇을 빼앗아 든 그녀는 김이 오르는 숟가락을 후후 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리처드는 자신이 그녀에게 그러고 있듯이 그녀가 자신을 배려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똑같이 서툴렀지만.
 "미안해. 이런 건 전혀 경험이 없어서."
 로빈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차분한 눈빛이 의외로 인간적이고 여성적이어서 리처드는 당황했다. 그 온기는 그가 몇 번인가 돈을 주고 사려고 했던 거짓된 열정과는 다르게 리처드의 공허한 마음을 금세 따뜻하게 채웠다. 그것은 바로 가족과도 같은 온기였다. 그녀도 비슷한 종류의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느리지만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가족처럼, 친구처럼, 어느새 늘 함께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처럼 몰래 침대로 숨어 들어와 자고 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몸이 회복된 그녀가 어쩌다 외출이라도 하면 리처드의 마음 한구석이 오히려 허전해졌다. 특히 늦은 밤에 외출할 때면, 그녀가 이대로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워졌다.

 작가, 평론가로서의 리처드에게도 그녀는 어느새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즈음 리처드는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가까운 독자로써 그녀의 존재는 소설 집필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리처드는 아직 등장인물을 만드는데 미숙한 편이어서 그녀와의 대화와 피드백이 많은 도움과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때론 교양 있고 지적인 독자로, 때론 감수성 풍부한 문학소녀로, 독자와의 소통에 목마른 리처드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문학적 인용과 나이에 걸맞지 않는 폭넓은 지식에는 가끔 리처드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녀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흐린 날이면 쓸쓸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아코디언을 연주하곤 하였다. 때로는 함께 단골 카페에 가서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리처드는 그녀의 연주를 홀린 듯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아코디언의 멜로디가 유독 깊이 가라앉던 어느 날, 로빈은 어떤 기묘한 노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리처드는 그 기묘한 노트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열정을 가진 그로써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자, 버릴 수 없는 욕심이었다. 작가로써 리처드의 욕심과 마주할 때면 그녀는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거나, 가라앉은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리처드는 그녀가 불안함을 감추고 있는 인상을 받았다. 항상 강하고 명석하고 결단력 있는 그녀가, 그로 인해 흔들리는 느낌이 싫어서 리처드는 욕심을 감추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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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성격이 나쁘긴 하지."
 리처드가 회상에서 빠져나오며 낄낄거리자 로빈이 가는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 거야?"
 리처드가 바라보니 브로콜리만 접시에 가득 남아있었다. 이번엔 리처드가 비슷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로빈이 집으려던 방울토마토가 포크에서 빠지며 식탁 아래로 떨어져 굴렀다.
 "그러다 나중에 뚱뚱한 아줌마처럼 되면 아는 척도 안 할 거야. 난."
 "뚱뚱? 그게 어떤 거지? 나도 한 번 경험해보고 싶기는 해. 하지만 열심히 먹어도 소용이 없는걸."
 리처드는 식탁 아래의 방울토마토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살이 안찌는 체질이라도 그렇게 야채를 안 먹으면……."
 리처드는 로빈을 올려다보다가 말을 멈췄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는 검은 슬리브리스 아래로 가터로 연결된 섹시한 실크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이 다리가 뚱뚱해진다고?"
 로빈이 꼰 다리를 도전적으로 리처드의 눈앞에 흔들며 말했다. 비쩍 말랐던 처음보다는 살이 좀 붙었다고 리처드는 생각했다.
 "그래, 보기 좋군. 내가 잘못했다. 이런 완벽한 다리가 뚱뚱해 질 리가 없지."
 "이제 와서 아부해 봤자 리처드가 뚱뚱한 아저씨처럼 됐을 때, 난 아는 척 안 할 거야. 아차, 이미 아저씨잖아?"
 로빈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종아리의 부드러운 곡선이 검은 스타킹에 감싸여 눈앞에 흔들거렸다. 리처드는 그 따뜻한 곡선을 손바닥으로 쥐어 보았다. 로빈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리처드를 내려다보았다. 종아리를 쓰다듬던 리처드의 손이 무릎 뒤까지 올라오자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그래?"
 "어, 엉덩이까지 가도 될까?"
 "이 변태 아저씨가! 뉴스에 나오고 싶어?"
 로빈이 다른 쪽 발을 들어 리처드를 밀치면서 말했다. 가슴팍을 밟히면서도 종아리를 놓지 않던 리처드가 뭔가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가터벨트에 홀스터가 달려있네? 권총이라도 갖고 다녔던 거야? 이 대책 없는 비행소녀."
잠깐 발길질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실 난 스타킹 페티시들을 죽이고 다니는 킬러다. 각오해라. 이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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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리처드가 서재 문을 열고나오며 외쳤다.
 "로빈. 로빈. 봐! 드디어 완성 했어. 마지막 마침표까지 찍었다고!"
 "헤에, 인기 평론가 리처드의 첫 장편 소설이네?"
 로빈은 희미하게 웃으며, 외투에 숄까지 두르고 가방을 든 채 리처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라앉은 표정을 본 리처드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졌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리처드의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머물 거라고 했었잖아. 이제 떠날 때가 된 거지."
 어디선가 푸드득 거리며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아직 약속도 안 지켰잖아."
 "아, 그랬지. 약속을 지켜야지."
그녀는 리처드를 지나쳐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망연자실한 리처드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돌아서며 말했다.
 "뭐해. 어서 들어와. 약속을 지키라며."

 서재에 들어선 리처드는 로빈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그녀는 다시금 리처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로, 로빈.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어."
 책상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로빈은 불쑥 리처드의 품에 안겼다.
 "로빈."
 "리처드 덕분에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웠어."
 로빈은 그의 등 뒤로 손을 올려 잿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왜 이래? 다시 안 볼 사람처럼? 나야말로 우울한 고민들을 네 덕에 많이 떨쳐낼 수 있었어."
 리처드는 민망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품에서 떨어진 로빈은 뒤돌아서서 가방을 열고는 노트를 꺼냈다.
 "어때? 노트는 꼭 써야겠어? 말했던 것처럼 일단 이름을 적으면 돌이킬 수 없어. 리처드는 이걸 사용하지 않아도 분명히 언젠가 좋은 글을……."
 리처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여러 번 말했듯이,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면 작가로서 사용해보지 않을 수 없지."
 "노트는 지독한 마물과도 같아서 한 번 이라도 사용한 사람은 벗어나기 힘들어. 사용했던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에,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고. 언젠가 무서운 사람들이 잡으러 올지도 모르고."
 리처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훗.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그래도 내 의지는 바뀌지 않아. 그게 가능하다면 분명 작가로서의 나는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야. 만일 내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 이었다면, 그 노트를 얻기 위해 악마와 거래라도 했겠지."
 "좋아. 그럼 앉아 봐."
 리처드는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뭐 별거 아냐. 사람들은 보통 해야 할 일이나 사야할 물건 같은 것을 종이에 적잖아? 그런 메모와 비슷한 거지."
 "메모랑 비슷하다고? 그건 기억을 잃는 게 아니고, 잃지 않기 위해 하는 거잖아?"
 "흥. 종이에 적는 순간 그 기억은 훨씬 엷어지게 되어있어. 기억할 일을 외부의 종이에 적는 순간 그 내용은 이미 그 사람의 마음을 반쯤 떠난다고. 뭐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해 둬."
 로빈은 노트를 펼쳐 리처드의 앞에 놓았다.
 "자, 리처드. 당신의 이름을 적어."

 이름을 적은 리처드가 로빈을 바라보자 로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1348년. 생애 첫 장편 소설을 완성하다."
 리처드는 로빈이 부르는 대로 한자, 한자 적어나갔다. 로빈은 그런 리처드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리처드가 첫 문장을 다 쓰자 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해 가을. 로빈을 만났다."
 종이 위를 미끄러지던 팬이 뚝 멈춰 섰다. 리처드는 고개를 들고 로빈에게 말했다.
 "왜 그런 걸 적어야 하지?"
 "그건 노트를 사용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야. 그럼 나와 노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로 노트를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악마와 하는 거래의 대가라고 봐도 좋아."
 "그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라. 나는……."
 "아무튼 일단 시키는 대로 적어. 어차피 당신이 적지 않아도 바뀌는 건 없어."
 리처드는 고개를 숙이고 적는 척 펜을 들었지만 차마 적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로빈은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리처드는 날 잊어버려도 돼. 난 곧 이 도시를 떠날 테니까."
 리처드는 다시 고개를 들고 동요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왜 그래야 하지?"
 "은혜 갚은 길고양이는 떠나야지. 내게도 사정이란 게 있어."
 로빈은 조여드는 추적자들의 손길을 떠올리며, 그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로 하던 일도 내일이면 끝이나, 이제는 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원래 한 달 동안만 이 도시에 체류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미 계획보다 오래 머물렀어. 리처드의 장편도 완성됐고 약속도 지켰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지."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농담하는 거야?"
 리처드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고 움직였다.

 로빈은 리처드의 손에서 노트를 받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제대로 적었다면 이제 곧 나를 잊어버릴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조금 있으면 기억이 안날거야. 어때? 재밌지? 이 기회에 한 대 때려놓을까?"
 로빈이 짐짓 쾌활하게 말하자 리처드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노래, 거의 완성했어. 제목은 길고양이의 발라드야. 언젠가 카페에 오면, 들어볼 수 있도록 해 놓을게."
 그녀는 책상위의 원고더미를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생애 첫 장편을 그렇게 팽개쳐놔도 괜찮아? 잊어버리고 버려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글을 썼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텐데?"

 그녀는 노란 메모지를 꺼내 리처드의 장편 원고에 붙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도 적어두지 그래?"
 리처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팬을 들어 메모지에 휘갈겨 적었다. '지급을 요함.'
 "이렇게 하면 가장 먼저 읽어 보겠지."
 "생각의 섬? 재미있어 보이네. 나중에 출판 되면 읽어볼 수 있겠지?"



                     에필로그
                   목요일, 오후 6시
 로빈은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황무지를 따라 끝없이 뻗어있는 철로에서 흙먼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로빈은 개찰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화기를 찾아 집안을 뒤지던 리처드는, 쓰레기통에서 원고에 붙어있던 노란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이건 내 글씨체랑 비슷한데?' 잠시 생각에 잠긴 리처드는 코트를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 리처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열차에 탑승해서 자리에 앉은 로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긴 꼬리를 남기며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로빈은 엄마의 책을 꺼내고 가방을 닫으려다가 리처드의 이름이 적힌 노트를 보았다. 비로소 혼자라는 게 몸서리치게 느껴졌다.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다시 한 번 개찰구를 바라본 로빈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누군가가 만류하는 역무원들을 해치며 난간을 넘어 열차를 따라 잡으려는 듯 달려오고 있었다. 로빈은 창문에 바짝 붙어 손바닥을 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무는 태양빛을 받아 일순간 잿빛 머리칼로 보였던 남자의 머리색이 검은 색으로 돌아왔다. 수트 차림의 남자는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열차는 점점 속도가 붙어서 황무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열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황무지의 어둠속을 달렸다. 어두워진 대지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 혼자가 된 로빈은 쓸쓸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위로하듯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두 사람의 기억을 지워줬구나. 로빈.'
 지우고 싶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서, 로빈은 또다시 길고 외로운 여행길에 올랐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몸을 떨었다. 로빈은 고개를 숙인 채 엄마의 책을 꼭 쥐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하지만 내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엄마는 어떻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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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ster

October 15, 2011
*.11.239.55

아... 인상 깊네요. 로저 젤라즈니의 <성스러운 광기>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 순서의 나열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읽기 편하게 만들어주었다면 하는 점과 파비안과 마리안이 중반 이후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점이 아쉽지만, 이야기가 매력적이라 큰 흠처럼 보이지 않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수상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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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ster

October 15, 2011
*.11.239.55

어라, 추천기능이 있었네. 추천 한 표 꾹 누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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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cs

October 28, 2011
*.37.15.63

아직 모든 작품을 다 보진 않았지만 저도 인상깊게 봤습니다. 정말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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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xx

November 08, 2011
*.61.23.42

정말.. 예상밖의 수확이었습니다. 깊은 여운이 남는 글이네요. 시간 순서때문에 처음엔 좀 해매긴 했는데.. 뒤로 갈수록 착착 이해가 가네요. 나중에 시간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뒷이야기도 계속 써줬으면 좋겠는데. ㅎㅎ 아무튼 추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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