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작품 소개 "내일의 단편 경소설상"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은 '알라딘과 요술램프'였다. 6살 때 그 동화를 읽은 이후로 줄곧 내 앞에 갑작스럽게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소원들은 오랜 시간 동안, 누가 봐도 흠잡을 수 없도록 계속해서 수정되어왔다.

사실 그 소원들을 고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램프의 요정 '지니'는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거기다 소원의 개수를 늘이는 것마저 금지되어 있으니 제대로 알고 보면 어지간히 불친절한 요정이다. 어쨌든 저 중 특히 세 번째의 제약조건은 꼭 빌고 싶었던 소원이었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한동안 제법 침울해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빠가 못 사게 하는 인형을 굳이 사겠다고 울고 불며 떼써서 매를 버는 어리석은 꼬마아이는 아니었기에 곧 포기하고 다른 소원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그 제약조건들 외에 또한 고려해야 했던 것은 램프의 요정이라는 작자가 성격이 아주 무지막지하게 비뚤어져 있을 경우였다. 사실 그 좁은 램프 안에서 햇빛도 못 본채 몇 백 년의 세월을 갇혀 있었는데도, 그저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실실 웃으며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 아닐까?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면 어딘가에서 훔쳐온 돈을 던져 주어서 나를 감옥에 보낼 수도 있고, 예쁜 얼굴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빌면 대신 가슴 크기를 줄여 버리는 심술을 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소원을 수정할 때면 되도록 구체적인 조건들을 붙여두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고심 끝에 고른 세 가지의 소원은 우선 첫 번째가 이번 주 로또 일등에 혼자 당첨되는 것, 물론 나는 미성년자이니 번호만 내가 찍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우리 가족은 합법적인 부자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가슴사이즈가 양쪽 모두 고르게 한 컵 정도 더 커지는 것, 얼굴은 이대로도 나름 살아갈 만하니 굳이 더 예뻐지길 바라진 않는다. 대신 몸에 약간의 굴곡을 주고 싶었다. 이런 소원을 빌었다고 해서 내가 가슴에 집착하고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저 조금 신경 쓰일 뿐이다, 아주 조금.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지니'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냥 무작정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고 소원을 빌면 무슨 트집을 잡을 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결과를 바꿀 수 없다면 원인을 바꾸면 된다. 즉, 내가 그 사람들의 행복의 원인이 되면 간단한 것이다.

아빠는 내가 끙끙거리며 소원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 '걱정도 팔자다'라고 말했지만 뭐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미리미리 대비해 두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그리고 바로 지금, 늘 기다리던 그 날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     *       *

지루한 여름방학이었다. 아빠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한 달 반 동안 미국으로 출장을 다니러 갔고, 친구들은 하나같이 가족들과 피서를 떠났다. "갔다 와서 연락할게." 마지막 통화마저 이전의 세 번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버리자 아란은 에라 모르겠다! 한탄조로 외치며 대청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어두운 갈색의 마루 위로 엷은 하늘색의 원피스가 마치 물결처럼 번져 흐트러졌다.

 잠시 뒹굴 거리던 아란은 이내 다시 벌떡 일어나 양 무릎을 세운 채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았다. 쇄골 근처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머리는 아랫부분만 살짝 컬을 준 듯 자연스럽게 말려 있었고, 오른쪽방향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된 앞머리는 살짝 눈썹을 가리는 정도였다. 머리의 왼쪽 부분은 아이보리색과 와인색이 겹쳐진 코사지 머리장식으로 고정하여, 덕분에 위쪽이 살짝 뾰족한 하얀 귀도 시원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초저녁 무렵의 선선한 바람이 잠시 소녀의 주위를 훑고 지나치자, 그 뒤를 따라 작지만 맑은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마치 소녀의 주위에 원을 그리듯 번졌던 그 영롱함의 정체는 머리 왼쪽을 치장한 코사지 아래로 길게 늘어진 두 줄의 끈 끝, 조그만 옥장식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였다.

조심성 없는 태도와 달리 소녀는 제법 선이 고운 생김이다.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예쁜 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고 한 오 분 정도 흐른 후에 '아까 그 애 괜찮았는데 한번 말이라도 걸어볼걸 그랬나?'라고 문득 생각날법한 얼굴, 그리고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집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누웠을 때 잠들기 전의 몽롱한 기운 속 다시 한 번 눈앞에 아른거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얼굴이다.

아란의 아빠는 딸의 이 얼굴에 대하여 '하나하나 뜯어보면 B+정돈데 합쳐놓으면 A가 되니 신기하네.'라고 고슴도치답지 않게 사뭇 냉정한 평가를 내렸었다. 즉, 이목구비의 조화가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다른 부위와 달리 눈만은 매우 아름답다. 아마도 눈 하나로 다른 부위의 평범함을 모두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 커다랗고 맑은 두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그 반짝거리는 빛이 소녀의 모습에 건강하고 산뜻한 인상을 덧칠해주었다.

가만히 앉아 보랏빛 하늘 위 하얀 조각달의 움직임을 쫓던 것도 잠시, 아란은 주름 잡힌 원피스의 아래로 쭉 뻗은 하얀 두 다리를 바동대며 "아, 심심해!"라고 소리쳤다. 조금 낮지만 맑은 목소리가 초저녁의 어슴푸레한 푸른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집까지는, '이왕 늦은 거 어쩔 수 없지'란 대범한 마음가짐으로 싱그러운 아침햇살을 즐기며 느긋하게 등교하던 아란이 '내일부터 지각하는 놈들은 1분당 100원이다'라는 선생님의 종례시간 이야기를 갑작스레 기억해내고는 교문 앞 언덕길을 지나 3층에 자리 잡은 교실까지 필사적으로 달려갈 때 ─ 덧붙여 말하자면 그 날 이후 아란은 자전거를 구입했다 ─ 의 그 속도로도 3분 정도가 걸린다. 아마도 평상시 속도로 걸어가면 족히 15분은 소요될 것이다. 이 15분이란 시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감이 안 올 때는 축구경기에서 전·후반 중간의 휴식시간이 바로 그만큼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전반전 경기 후 그 하프타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후반전의 승패가 결정될 수 있다. 그 15분은 아주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즉 아란이 이웃집에 한번 놀러 가는 그 시간, 어떤 이들은 인생의 향배가 결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임아란의 집이 이렇듯 마을에서 동떨어져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집을 설계한 외할아버지의 탓이다. '경관이 훌륭하구먼!'이라는, 풍류인답지만 달리 말하면 대책 없게 느껴지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산의 입구 바로 아래쪽에 터를 잡은 외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에 기어이 전통한옥 한 채를 지어 올렸다. 아란이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은 다섯 살 무렵부터, 그러니까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다.

친구들에게 한옥에 산다고 말하면 요즘 시대에 한옥이라니 불편하지 않냐 걱정들을 하지만 사실 애로사항이 꽃필만한 부엌과 화장실, 욕실은 현대식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괴로웠던 점은 딱히 없었다. 그 곳들을 제외한 다른 구역은 모두 전통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이게 또 겉에서 보기에는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제법 실용적이라, 특히 널따란 대청마루에 누워서 뒹굴고 있으면 여름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 없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선선하여 아란은 이 집을 꽤 맘에 들어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심심함까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 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는 이 넓은 집에 아빠와 아란, 단 둘뿐. 아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정확하게는 세 식구였다. 언제나 발밑에서 애교를 부리던 엷은 상아색의 샴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던 활발한 녀석이라 함께 있으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만 있었어도 이렇게 여름방학이 지루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집에 있는 것이 외롭다. "밥 먹을까? 그래, 맛있는 거 먹자!", "잠깐 만화책이나 볼까? 안 돼 숙제부터 해야지." 날마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방학 일주일 째 줄곧 홀로 이런 짓을 반복하고 있다 보니 이러다가 결국 방학이 끝날 때쯤엔 내 안에서 또 다른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란은 슬슬 걱정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날마다 거울에 대고 너는 누구니 라고 물어보면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된다고 했지…….' 갑작스럽게 소름이 끼쳐 아란은 부르르 떨었다. 예전엔 별로 무섭지 않았던 이야기도 혼자 있을 때 생각이 나니 새삼스레 겁이 난다. 거기다 곧 어두워질 시간이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아란은 괜히 손뼉을 마주쳐가며 하늘에서 새똥이라도 떨어져 자신의 관심이 그쪽으로 집중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초인종 소리에 신이 나서 달려 나갔던 이유는. 기껏해야 방문판매 혹은 종교권유 정도겠지만 지금 아란은 누군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절실했다. 그런데…….

 

 

*     *     *

문을 열자 눈앞에 보인 건 아란 또래 정도인 소년의 옆모습이었다. 소년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손 안의 종이와 아란의 집 주소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일단은 마주 보인 그 날카로운 콧날에 감탄했다가 이내 '이놈은 뭔데 남의 집 주소를 확인하는 거지?'라는 의심이 샘솟아 올랐다. 한마디 하려는 순간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아란은 입을 다물었다. 절대 옆모습보다 앞모습이 더 수려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단 사람의 말은 먼저 들어보는 게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잘난 얼굴이다. 아니, 잘 생겼다기보다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할까? 온몸을 감싸고 있는 나른한 분위기가 소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이마를 덮은 자연스러운 검은 머리와, 암녹색의 깊은 눈은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거기다 가느다란 목선이 남자답지 않게 아름답다. 가슴 쪽에 문양이 있는 얇은 녹색 긴 소매 티셔츠에 블랙 진과 갈색 컨버스라는 너무나도 간단하여 성의 없는 차림인데도 저 소년이 입으니 패션잡지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 같아 보인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건가. 이건 정말 반칙…….' 약해 보이는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하는 아란이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음울한 미소년의 정석이라 할 만한 외모다.

"임아란 씨네 댁입니까? 본인이세요?"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딱히 처음 있는 일은 아닌지, 소년은 아란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물었다. 정신을 차린 아란이 맞다 대답하자, 소년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말해 보세요."

 

 

*     *     *

아란은 시원하게 한바탕 웃었다. 분명 1분전까지는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 하늘에서 새똥이라도 떨어지길 바랐었는데 지금은 빨리 눈앞의 이 자식을 떨어뜨려내고 혼자만의 명상 시간을 갖고 싶다. 이건 대체 뭐지? 신종 사기 수법인가? 아란이 소원 세 가지를 말하면 소년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거다. "그 소원들은 조만간 이뤄질 거예요. 그런데 그 소원이 이루어지려고 하는데 임아란 씨네 집안 22대조 할아버지께서 방해를 하고 계세요. 그걸 풀기 위해 치성을 드려야 하니 제사비용 5만원을 주세요." 아란은 소년이 수상한 종교단체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했다. 미소년을 고용하여 여고생을 현혹시키려 하다니 도쟁이들도 세일즈 포인트를 아는구나, 여유를 되찾은 아란은 새삼스레 현대인의 상술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팔아먹을 만한 급우 목록을 머릿속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안 믿으시나 보죠?" 그때 아란의 귓가로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거에 속아 넘어……." 고개를 돌리자 소년의 얼굴이 마치 닿을 듯 바싹 다가와 있었다. 기세 좋게 말하던 아란은 평온한 소년의 눈동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채 말 끝을 흐렸다.

'사기꾼 같지는 않은데……. 아니지, 생긴 걸로 사기꾼이 구별되면 세상에 사기 피해자가 왜 있겠냐! 정신 차리자 임아란! 아니야, 그래도 눈이 슬퍼 보여!'

아란이 이미 방학 동안 익숙해진 자신 안의 또 다른 임아란과 싸우는 동안, 혼자 머리를 싸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란을 소년은 오지탐험 중 신기한 생물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안 믿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그냥 가겠습니다, 좋은 기회였는데 임아란 씨는 겁이 많군요."

그 놀리는 듯한 말투가 아란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그래, 어릴 적부터 늘 대비해 온 그 순간이 찾아왔는데 그동안 상상해왔던 '지니'의 모습과 눈앞 소년의 생김새가 좀 다르다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램프의 요정으로 취업 가능한 자격 요건이 1. 나이는 만 30세 이상, 혹은 그 정도로 보이는 외모를 지닌 자 2. 램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유연성 필요 3. 콧수염 있는 자 우대 4. 신체건강, 이런 식으로 정해진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아란은 돌아서는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기다려! 소원 세 개 까짓 거 말하면 되잖아. 누가 못할 줄 알고?"

 

 

*     *     *

"그러니까……, 좀 천천히 먹지?"

"그냥 남은 소원이나 빨리 말하세요."

임아란, 고교 1학년 현재 16세의 나이로 이 세상은 평범한 인간이 살아나가기 녹록하지 않은 곳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사건의 진행은 이러했다. 아란이 한순간의 호기로 돌아서는 소년을 붙잡아 집 안으로 들인 후, 두 사람은 대청마루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이제 소원을 말해보십시오."

"좋아. 첫 번째 소원은 이번 주 로또 일등에 내가 생각한 번호로, 나 혼자 당첨되는 거야."

"네, 이뤄드렸습니다."

"진짜? 뭐 증표 같은 건 없어?"

어째 일이 쉽게 풀린다 생각했다. 소년은 갸우뚱 하더니 "증표요? 로또용지는요? 그거랑 이따가 발표할 이번 주 당첨번호랑 맞춰보시면 되잖습니까. 오늘 발표로 알고 있는데요." 라고 대꾸했다.

"용지? 그거 안 샀는데?"

"그래요? 저런, 소원 하나는 그냥 날려 보내셨네요."

"잠깐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죠. 로또 일등을 바라셔서 임아란 씨가 생각한 번호대로 로또 일등이 나오게 해뒀습니다. 번호 어떤 거 고르셨어요?"

"03 12 20 27 33 38"

"그럼 그게 당첨번호겠네요. 지금이라도 사서 마킹하시든가요."

아란은 시간을 봤다. 오후 7시 40분,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로또 판매점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봐야 30분은 걸린다. 마감시간은 오후 8시, 틀렸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소원을 다음 주로 미루는 거야. 그러니까 다음 주 로또 일등. 그거 가능하지?"

"안 되는데요. 한번 말한 소원은 그걸로 끝입니다, 수정 불가능."

지금까지 16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어본 표정 중 가장 비굴한 표정으로 부탁했지만 소년은 생글생글 웃으며 거절했다.

"야, 보통 로또 일등이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을 때 램프의 요정 정도 되면 일등 번호가 표기된 용지를 가져다 줘야 되는 거 아니야?"

"거참 눈을 떠야 별을 보고, 하늘에 올라가야 별을 따는 법이죠. 자기는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려는 건 나쁜 습관입니다. 노력을 한 다음에 부족한 나머지를 행운에 맡기는 게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죠. 그리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전 요정계에서 오긴 했지만 램프의 요정은 아닙니다."

한 순간에 날아간 버린 일확천금의 꿈 때문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억지를 부리는 아란에게 무슨 도덕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옮겨 온 것 같은 훈계조의 말을 던지며 소년은 빨리 두 번째 소원이나 말하라며 아란을 재촉했다.

"가만 있어봐, 지금 그거 내가 십 년 동안 생각해 놓은 빈틈없는 소원 중 첫 번째였단 말이야. 첫 번째부터 틀려버리다니……. 이렇게 되면 지금 나머지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하긴 이해할 만합니다."

"뭐가?" "임아란 씨는 별로 머리가 좋아 보이진 않으니까요."

건방져 보이는 그 잘난 얼굴을 향해 화를 내려던 아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인생은 처세술이지. 살살 구슬려서 괜찮은 소원이 있으면 추천 받자.' 그리하여 아란은 한 시간 째 과자를 내온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봐라, 하며 소년의 비위를 맞추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먹을 때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비워대는 주제에 빈 그릇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에 맞추어 소원을 말하라며 재촉해댔다. 덕분에 아란은 저 소년이 '먹을 거 더 없어요?' 라는 말과 '소원이나 말하세요.' 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헷갈리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저, 그러지 말고 우리 얘기나 해볼까?"

"하십쇼." 스푼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소년은 대답했다. 차가운 것을 먹은 탓인지 한층 더 빨개진 혀가 귀여워 보인다.

"아까 네 이름은 송세한이라고 했지." 대답하기도 귀찮은지 고개만 끄덕, 성의가 없다. "나이는?"

"일단 임아란 씨보다는 훨씬 많을 겁니다. 100년 이후부터는 세기 귀찮아서 안 셌지만."

"어, 그래……."

또다시 침묵. 세한은 시리얼 통을 들어 흔들어보고 있었다. "우유 부어서 먹어." 라고 말한 후 어쩐지 흘리기라도 할까 봐 안심이 안 되어 아란은 손수 시리얼 볼에 우유를 부어 담아줬다.

"임아란 씨는 요리를 잘 하네요."

"이런 걸 요리라고 하기엔 좀……. 어쨌든 세한이 너는 요정이라고? 그럼 요정이 사는 곳에 대한 얘기 해줄 수 있어?"

"딱히 얘기할만한 것 없는데. 인간계나 비슷합니다." 입 안 가득 우물우물 거리며 송세한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이 위쪽에 천계가 있고……"

 

 

*     *     *

혹시 요정계라는 곳은 음식물이 부족한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송세한은 마치 한 사나흘 굶은 사람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란은 이 소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믿어도 될 것인가 살짝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소년의 말에 따르면 임아란이 살고 있는 이곳은 인간계,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요정계라 불린다 했다. 두 세계는 서로 같은 시간 축을 공유하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는 공간이 다를 뿐이다. 두 세계의 사는 모양새는 거의 흡사하며, 사실은 서로 오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요정계에는 인간계의 존재가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인간계에서는 요정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소수의 관계자들뿐이다. 또한 요정계에서는 사무국에서 적절한 법적인 절차를 거치면 누구나 인간계에 올 수 있지만, 인간계에서 요정계로 바로 넘어가는 경우는 두 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 외에는 극히 드물다. 보통 인간계에서 요정계로 넘어갈 때는 대개 그 사이에 천계를 거치게 된다.

이 천계는 요정계와 인간계를 비롯하여, 모든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곳이다. 인간계에서 생물이 죽으면 반드시 천계에 자리 잡은 영혼관리소를 거치게 된다. 천계의 영혼관리소는 본점 한 곳과 수백 개의 지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를 들어 인간계 A구역에서 죽은 생물은 본점에 들러 A구역을 담당하는 관리소 지점을 찾아 그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그 영혼을 다시 인간계로 보낼지 아니면 요정계로 보낼지, 그도 아니면 천계에서 쉬게 만들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한은 천계에서 당분간 쉴 예정이었는데, 수명이 좀 더 남아 있었던 것을 전산오류로 잘못 불러들였다는 사실이 서류작성 과정에서 밝혀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은 수명만큼을 더 살기 위해 인간계로 돌아오던 중 요정계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와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라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요정계에는 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뭐 어쩔 수 없이 남은 기간 동안 일해주기로 한 거죠. 근데 원래대로라면 남은 수명을 인간계에서 보냈어야 되는 거라 이주 신청서를 작성해야 했는데 그게 또……"

"그 얘기는 됐고,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나 좀 말해줘. 그건 그렇고 혹시 요정계에서는 요새 기아문제가 심각하니?"

결국 송세한이 아란의 마지막 간식이었던 초코바마저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을 보며 아란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정확하게는 따지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그래 뭐 까짓 거 굶은 지 한참 된 거라면 불우이웃돕기를 한 셈 칠 수도 있었다. 아란은 마음씨가 넓은 소녀이니 아마 쌀독에서 쌀도 퍼줬을 것이다. 그러나 세한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아 문제요? 글쎄요……뉴스에서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럼 원래 그렇게 잘 먹는 거야?"

"아, 단걸 먹어서 에너지를 채워야 되거든요. 경계를 돌파하는 게 좀 힘든 일이라 저 같은 출장 직원은 에너지 보충 명목의 보너스가 나오죠.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임아란 씨 덕분에 돈이 굳었습니다. 요정계 음식보다 인간계 음식이 더 달고 맛있네요. 그래, 두 번째 소원은 이제 생각났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야무지게 배어먹은 후 입을 싹 닦더니 소년은 다시 정색하고 물었다.

"아까 하던 얘기 남았잖아.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 좀 말해줘."

"그게 소원?"

'정말로 한 대 때리고 싶다.' 아란은 어금니를 꽉 문채 웃으며 "어지간하면 먹은 값은 해라." 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폭력은 좋지 않으니 넣어두세요. 그러니까……음, 뭐부터 말해야 하나. 일단 제가 일하는 곳은 우체국이고, 하는 일은 말하자면 소원배달입니다."

"소원배달?"

"예, 인간계의 택배나 등기 같은 걸 생각하면 쉬워요. 아까 인간계의 생물이 죽으면 천계의 영혼관리소를 거친다고 했잖아요? 그 중 유난히 강한 마음을 가진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 영혼들은 서류를 꾸밀 때 누군가를 지목해서 그 사람의 소원 세 가지를 이뤄주길 부탁할 수가 있어요. 그 작성된 서류가 천계에서 요정계 중앙우체국으로 전해지고, 우체국에서 구역별 담당직원에게 분배를 하죠. 직원들은 그 분배된 부탁을 들고 인간계로 내려가 배달을 하는 겁니다. 임금은 보너스 포함해서 요정계 돈으로 15000머흘(작가주:자갈의 제주방언, 여기선 요정의 화폐단위) 정도를 인간세계 환율에 맞춰서 지급 받게 되죠. 예를 들어 그 달 말에 요정계의 1머흘이 한국 돈으로 200원이었다면 전 삼백만 원을 받게 되는 거고, 미국으로 배달을 간 직원의 경우는 요정계와 달러 간 환율에 맞춰 달러화로 지급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환위험을 줄이고 싶어서 최근에는 환율변동보험 쪽을 알아봤었는데, 이게 저는 가입자격이 안 된다지 뭡니까. 이주민 차별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 소원 배달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가 천계에서 부탁을 해야 이루어진다는 거지?"

다문화 사회에 걸맞지 않는 요정계의 배타성에 대한 송세한의 열변을 무시한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던 아란은 문득 떠오른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세한을 향해 물었다.

"네, 어떤 영혼이 임아란 씨의 소원을 이루어 주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제가 여기 나타난 거죠."

"그럼 나한테 그 소원을 배달시킨 게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

"그게 두 번째 소원?"

"내가 아으 동동다리(작가주:고려가요 ‘동동’의 후렴구) 소원이야 라고 말하면 그게 진짜 소원이야. 그전까지는 소원 아니니까 제발 그놈의 소원 소리 좀 그만해."

빨리 일을 마치고 싶은지 아란이 무슨 질문만 하면 소원이냐고 되물어 보는 세한을 견디다 못해 아란은 언젠가 문제집에서 봤던 고려속요의 후렴구를 소원발동 주문으로 내걸었다.

"뭐 좋습니다. 동동다리, 입에 달라붙고 괜찮군요. 그렇지만 배달시킨 게 누군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외부유출금지거든요."

"외부유출금지라면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우체국 직원뿐이라는 것?" 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요정 우체국 직원이랑 천계 영혼관리소 사람들입니다."

"좋아, 그럼 나 두 번째 소원 결정했어. 아으 동동다리 소원이다, 날 요정우체국 수습직원으로 만들어줘."

 

 

*     *     *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옛말이 있다. 아란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한 차례 실패했지만 아직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두 번의 찬스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란은 그 중 또 한 번의 기회를 화려하게 걷어차 버렸다, 그저 무언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렇지만 반드시 확인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지금 아란에게 필요한 것은 로또 일등 당첨복권도 아니고, 한 사이즈 자라난 가슴도 아니다. 자신에게 소원을 배달시킨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세한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소년의 번듯한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란의 소원이 그를 제법 곤란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송세한은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 같은 것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하듯 빠르게 넘겨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여태껏 그런 소원을 빈 사람은 없었나 봅니다. 불량 고객 매뉴얼에 안 적혀 있네요."

"그래서 들어줄 수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건 그렇고 난 불량고객이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아란이 재촉하자, 소년은 수첩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거 같으니 일단 가 봅시다."

"어디를?"

"우체국이요. 국장님께 여쭤보자고요."

결국 이런 연유로 두 시간 전까지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평범한 16세 고교 1학년생 임아란은 엉겁결에 요정계 우체국으로 수습사원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     *     *

"그러니까 저 거북이가 국장님이란 말이지?"

"머리가 나빠 보인다고 짐작은 했지만 대체 같은 걸 몇 번이나 물어보실 작정입니까. 국장님 맞고 성함은 레오나르도, 그냥 편하게 레오라고 부르셔도 된다 하십니다."

'거북이에 레오나르도라……. 어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한데……아, 맞다 그거!' 임아란은 머릿속에서 떠오를 듯 말듯 하던 어떤 기억 하나를 잡아챘다. 레오나르도라면 분명 언젠가 봤던 만화영화에 나왔었다. 아란은 세한의 귓가에 소곤댔다.

"혹시 저 분 방사선에 노출되신 적 있지 않아? 뭐 쌍검 같은 거 휘두르시지?"

"면접관한테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그냥 평범한 거북이십니다."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주 안 좋은 버릇이라며 세한은 또다시 일장훈계를 할 태세를 갖췄다.

'겉모습으로 평가하기 이전에 일단은 사람이 아니라 거북이고…….' 세한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싸우기 싫어 아란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름다운 겉모습과 달리 왠지 이 소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해서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골라 하고 있다. 세한이 입을 열 때마다 아란의 안에서 요정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쌓이고 있었다.

국장님께 여쭤보러 가자 말한 후 세한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꼭 잡으셔야 합니다. 이동 중에 제 손을 놓치면 어디 조각난 세계로 떨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면 구하고 싶어도 구하러 못 갑니다."

"조각난 세계?"

"예, 요정계와 인간계 사이의 균열 어디인가로요. 그쪽은 아직 이동할 수 있는 정식루트가 없거든요. 아마 그쪽으로 떨어지면 불법침입자로 취급되어서 잡히는 순간,"

세한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란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세한의 손을 잡았다. 아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굉장히 위험한 곳을 통과해야 되는가 보다. 이건 계산에 넣지 않은 부분인데, 살짝 긴장한 아란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세한은 기운 내라는 듯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건 위험한 상황에서뿐이지 않습니까? 물론 임아란 씨가 균열로 떨어지면 전 절대 구하러 가지 않겠지만 제 손만 꽉 잡으시면 제가 임아란 씨를 버리고 도망갈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 난 너한테 도마뱀꼬리 같은 존재구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다."

"맘이 좀 편해지셨나요? 긴장하신 거 같아서 농담 좀 해봤습니다."

'절대'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써가며 대놓고 거추장스러우면 잘라내고 도망가겠다고 선언한 주제에 농담이라니, 괘씸해진 아란은 세한의 왼쪽 손을 으스러져라 양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찰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갈 테다.'

"자기신체부위가 잘려나가는걸 기뻐할 동물은 없습니다. 게다가 새로 난 꼬리는 처음 것보다 짧고 멋지지도 않죠. 그러니 너무 염려 마세요."

아란과 마주잡은 소년의 왼손에도 어느새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손아귀 힘이 생긴 거답지 않게 꽤나 세다. 그 억센 힘을 느끼며 아란은 '이 아이 조금은 믿음직할지도'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눈은 감고 계시는 게 좋아요. 직접 바라보기엔 빛이 좀 세거든요. 그럼, 갑니다."

눈을 감자 몸이 붕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몸이 공중에 떴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약간 아찔했고 머리가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릴 적에는 만약 하늘을 날 수 있다면 분명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바람에 가볍게 몸을 맡긴 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의 푸른 하늘 속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기분은 제법 근사할 거라고,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할 때 아란은 언제나 그런 이미지를 그렸다. 허나 첫 비행은 그런 산뜻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썩 기분이 좋진 않네.' 눈을 꼭 감은 채 불안에 떨며, 아란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소년의 한쪽 손뿐. 그렇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그 와중에도 아란과 마주잡고 있는 제법 크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소년의 그 손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한가지의 확실한 존재가 감긴 눈의 눈꺼풀 너머로 느껴진 너무나도 따뜻했던 빛과 더불어 아란의 불안감을 잠재워줬다.

 

 

*     *     *

"이제 눈 뜨시고 손 놓으세요."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란의 몸을 감싸고 있었던 묘한 부유감이 사라진 듯싶더니 소년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본 아란은 자신들이 어느 건물 안에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다. 세한은 아란이 필사적으로 쥐고 있었던 자신의 왼쪽 손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임아란 씨가 무거워서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네요. 보통은 5분이면 오는데 10분도 넘게 걸렸어요. 손이 저려서 중간에 놔버릴까 생각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간혹 말 한마디로 애써 쌓은 공덕을 날려버리는 사람도 있다. 바로 아란의 눈앞에 이 소년처럼. 눈을 뜨기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고마움과 믿음직스러움은 마치 봄날 얼음이 녹듯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어이없어 하는 아란에게 소년은 "농담이었는데. 어쨌든 무사히 도착했으니 된 거죠."라고 전혀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변명했다. 도저히 어디에서 웃으면 되는 건지 유머코드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래 쟤는 요정이니까, 아란은 분명 요정계의 유머코드는 인간계와 좀 다를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고마웠던 기억만 떠올리자 다짐했다. 대신 "너는 될 수 있으면 그냥 농담을 하지 마. 아니다, 그냥 입을 안 여는 편이 좋겠다."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건넸다.

"저쪽 카운터에서 입국수속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3번 게이트로 나가면 셔틀트레인이 있는데, 그걸 타면 바로 우체국 앞까지 갈 수 있어요. 특별히 모든 비용은 제 사비로 처리해 드릴 게요."

'사비'라는 말을 강조하며 송세한은 카운터를 향해갔다. 나중에 갚으라는 무언의 협박으로 들린다. 아란의 간식을 고스란히 자신의 입에 쑤셔 넣은 지 분명 한 시간도 채 안됐을 터인데 배은망덕한 요정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셔틀트레인에 올라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설렘에 가슴 두근거려 하며 '그래도 면접인데 교복을 입고 올걸 그랬나.'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던 아란은 세한의 안내에 따라 우체국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후,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이었는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의심해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장 명패 앞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저 거북이는 대체 뭐란 말이겠는가.

"저기 나 너 한번만 꼬집어 봐도 돼?"

"꿈꾸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꼬집으려면 본인을 꼬집으셔야죠."

"그럼 저 거북이가 국장님이라고?"

그래 뭐 생각해보면 특이할 것도 없다. 아니 분명 특이하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고양이 역장이라든가, 해외토픽에서 그런 걸 보았던 기억도 있다. 요정계라고 그런 게 없으란 법은 없다.

"그러니까 저 분은 명예국장님 같은 거지? 실제 일 처리는 그럼 누가 하는 거야?"

"진짜 국장님이시라니까요. 지금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안 그래도 임아란 씨는 요정계 주민이 아니라 핸디캡이 있다고요."

이렇게 하여 여전히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임아란은 세한이 국장에게 사정 설명을 할 동안 '저 거북이가 국장님이란 말이지'라는 중얼거림만을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몇 번이고 반복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도사리고 앉은 거북이와 지금처럼 마주보고 있게 된 것이었다.

"잠시 실례."

십여 분의 어색한 침묵 끝에 거북이, 아니 레오 국장은 한마디 말을 남긴 채 열심히 몸을 움직여 어딘가로 사라졌다. 왠지 기운이 쫙 빠지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 방금 저 거북이 말을 했어! 아란은 레오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워 하는 동시에, 이 비상식적인 상황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자신의 판단력이 멀쩡하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저기, 이곳의 우체국장은 월급으로 어느 정도를 받는 거야?"

"저랑 똑같이 받습니다. 이곳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공평한 대접을 해주거든요."

"그래? 그럼 차라리 나랑 인간계에서 진기명기쇼 같은걸 하는 편이 좋을 텐데, 말하는 거북이와 조련사 콤비로. 이따 오면 한번 물어볼까?"

"오로지 돈만을 잣대로 하여 직업을 결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직업을 선택할 때는 각자의 고결한 이상과……"

"거기까지. 그보다 어디 간 거야? 면접 중에. 게다가 말도 할 줄 알면서 왜 나한테 아무 질문도 안 하지?"

"아마 몸에 물을 적시러 가신 거 같습니다. 여자와 만나본 경험이 별로 없으시거든요. 그리고 저 분은 그저 영혼의 됨됨이를 보기 때문에 질문 같은 건 안 하십니다. 저 때도 그저 눈으로만 대화했었죠."

"눈으로 대화를?"

"그렇습니다, 요정계와 인간계 사이의 우호증진 방안에 대하여 눈 한번 깜짝할 시간도 없이 열렬한 토론의 시간을 가졌었죠. 임아란 씨도 국장님 눈을 잘 바라보세요. 분명 무슨 말이든 걸어오실 겁니다."

"눈 한번 깜짝할 시간도 없으셨다고?"

"당연하죠, 눈으로 말을 전하기에도 바빴으니까요."

어째 면접방식이 뭔지 알 거 같았다. 아란은 세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직감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레오를 기다렸다. 잠시 뒤, 세한의 추측대로 정말 몸에 물을 적시러 갔었는지 흠뻑 젖은 레오가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혹시라도 뒤집어지지는 않을까 걷는 품새가 영 걱정스러워 속으로 '힘내라' 응원하며 지켜보게 된다. 한참을 걸려 용케도 의자 위에 다시 올라앉은 거북이 국장은 "면접 다시 시작합시다."라고 말했다. 아직 아란은 진기명기쇼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이곳 직원이 되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파충류 특유의 투명하고 또릿한, 유리알 같은 눈이 아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란은 최대한 눈을 부릅뜨고 그 끈덕진 시선에 응하였다. 3분 정도가 지나니 눈이 뻑뻑하고 마치 자신의 눈이 아닌 것처럼 이물감이 느껴졌다. 절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은 채 필사적으로 눈을 더 크게 떠 보였다. 그러나 고생하고 있는 아란과 달리 상대방의 그 둥근 공 같은 동공은 여전히 촉촉한 채로 아까와 다를 바 없다.

'그러고 보니 파충류는 눈에 막이 있어서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자신의 직감이 틀린 것 아닐까라는 생각에 아란의 눈빛이 흔들리려 할 때, "합격."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흐려졌던 아란의 초점이 다시 레오에게로 맞춰졌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신기한 경험들뿐이다. 말하는 거북이를 보았고, 웃는 거북이도 보았다. 물론 두 경우가 모두 동일한 주체로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란은 넉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레오와 다시 대견하며, 이곳의 면접방식이 눈싸움이었음을 확신했다.

 

 

*     *     *

"그건 좀 불합리한 결정입니다."

합격이라는 얘기에 함께 기뻐해주던 세한은 계약서를 쓸 때가 되자 얼굴을 굳힌 채 계약서의 조항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레오에게 반박했다. 이해할 만하다, 첫 번째 계약조건이 '상기 수습사원 임아란의 월급은 송세한의 몫에서 20%를 떼어 따로 지불한다.'라니 저리 파르르 떨며 화낼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야! 불합리하기로는 나도 만만치 않거든?"

아란 역시 두 번째와 세 번째 계약조건에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조건, '임아란이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 조로 활동하며 그 기간 동안 송세한은 임아란이 제공한 숙소에 머무른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어차피 집에 남는 빈방 하나 내어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세 번째 조건, '인간계에서 송세한의 에너지원 보충은 임아란이 책임진다.' 이건 대체 뭐냔 말이다. 아란의 삼일 치 간식을 반나절도 안 되어서 다 먹어치운 저 녀석의 간식비를 대라니, 임아란은 요정계 노동청에 이 불공정한 계약서에 대해 신고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제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우와 이 뻔뻔한 인간, 아니 요정이! 너 오늘 먹은 것만 얼만지 계산 때려볼까?"

"어차피 요정계로 왔다갔다 안 하면 에너지가 빨리 닳을 일도 없고, 아무리 따져 봐도 제 쪽이……"

갑작스러운 쾅 소리에 두 사람은 말다툼을 그쳤다. 고개를 돌리자, 거북이 국장께서 화가 나셨는지 앞발로 거칠게 책상을 퉁퉁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은 넘어가죠. 나머지는 나중에 저희끼리 이야기 하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왠지 레오가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쌍검을 휘두르진 않을까 라는 묘한 압박감에 아란도 "그래."라며 재빠르게 동의의 의사를 표했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잠자코 계약서에 사인을 하자, 레오는 "그럼 계약 성립을 위한 마지막 의식을 진행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마지막 의식은 뭐야?"

"임아란 씨랑 제 피를 섞어서 서로 링크시키면 됩니다. 그러면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정식계약이 맺어지는 거죠."

"피를 섞어?"

"그냥 체해서 손 따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세한은 피라는 단어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질색하는 아란의 오른쪽 손을 잡아챘다. 뭐라 할 사이도 없이 곧바로 따끔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검지 끝에 선홍빛 피가 금세 작은 돔 모양으로 몽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제 입술에 바르세요."

세한의 말에 따라 아란은 손가락을 소년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얇은 입술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자 손끝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하얀 얼굴 위에 새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번에 제 차례입니다."

소년이 입을 열자, 아란은 그 움직임을 보며 마치 한지 위에 그려진 붉은 나비가 살아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아란의 입술 위에 마치 연지를 발라주듯 세한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놀렸다. 얇은 피부를 통해 상대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분명 자신의 입술 역시 뜨거워졌을 것이리라 아란은 생각했다. 겸연쩍어 눈을 감자 어쩐지 은은한 솔잎향이 맡아졌다. '향수 뿌리나? 냄새 좋네…….' 이때 귓전에 내려앉은 세한의 나직한 속삭임이, 그윽한 솔 내음에 취해있었던 아란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이제 입술이 머금고 있는 피를 삼키면 됩니다."

눈을 떠보자 가볍게 혀로 입술을 핥아 그 위에 머무르고 있던 피를 모아 삼키는 세한의 모습이 보였다. 아란도 똑같이 따라 해보았다. 약간 비릿한 쇠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앞발로 박수를 치며 레오가 모든 절차가 제대로 끝마쳐졌음을 알렸다.

"요정우체국의 수습직원이 된 걸 환영합니다."

레오의 말이 끝나자 세한은 수려한 낯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아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 이제 관계자가 된 거니까 나한테 소원 배달시킨 게 누군지 알 수 있지?"

"예. 송장이랑 관련서류 보여드릴게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란은 세한을 재촉하여 서류를 가지고 오게 했다. 외부유출금지라고 딱 잘라 거절한 아까와 달리 순순히 그러마 대답하는 세한을 보니 정말로 자신이 요정 우체국 직원이 된 게 맞구나 라는 실감이 생긴다. 세한은 요정계 숙소에서 가지고 온 가방을 열어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서류철 하나를 빼들었다. 서류철의 앞부분에는 '지역코드 tw-K4, 수신자 임아란, 담당 집배원 송세한' 이라고 쓰인 라벨이 붙어 있었다. 아란은 괜히 긴장되어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조심스럽게 파일을 넘겨보았다.

"발신자 인디고, 분류는 고양이네요." 어느새 다가왔는지 옆에서 송세한이 참견하고 나섰다. 임아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와 발신자 정보, 그 밑쪽에는 '바라는 말(500자 이내)' 이라고 적힌 칸이 있었다. 그 칸에는 별다른 말 대신 고양이의 조그만 발자국이 하나 찍혀 있을 뿐이었다. 아란은 그 갈색 잉크로 찍어낸 듯한 얼룩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빙그레 잔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바라는 말에 이 발자국 밖에 안 찍혀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보통 동물의 말은 영혼관리소에 상주하는 통역사가 따로 풀어 적어주거든요. 혹시 궁금하시면 통역사한테 찾아가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으응, 괜찮아. 난 무슨 뜻인지 아니까."

"고양이의 언어를 알 수 있습니까? 의외의 재주가 있으시네요."

"아니, 이것만." 임아란은 고양이의 앞발을 눌러보듯, 서류에 남겨진 그 살짝 번진 갈색 발자국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말을 이었다.

"고양이를 키웠었어. 이름은 인디고, 부를 땐 그냥 '고우'라고 불렀어. 눈이 예쁜 청색이었거든, 파란색 보석 같았지. 정말 말썽쟁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를 치는 바람에 나한테 혼나기도 많이 혼났었는데, 그래도 '고우'하고 부르면 금세 달려와서 그르렁거리며 매달리는 애교 많던 녀석이라 꽤나 예뻐했었어. 어쩌면 그 말썽도 일부러 그랬던 거였는지도 몰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꼭 내가 외로워 할 때만 일을 만들었던 것 같아. 근데 아마 한 달 전쯤이었을 거야, 사진첩에 그 녀석이 물을 엎었는데 그 안에 우리 가족사진이 있었거든. 그게 딱 한 장 남은 사진이라 좀 심하게 나무랐었어. 다행히 사진은 바로 빨랫줄에 걸어 말렸더니 망가지지는 않았더라고. 그 다음에서야 '아까 너무 화냈던 거 아닌가?' 인디고한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 그래서 '고우'하고 불러봤는데 녀석이 보이지 않더라. 뭐 평소에도 자주 밖에 나가 놀다 들어오곤 했던 놈이라 딱히 걱정은 안 했었어. 그래도 분명 시무룩해져 있을 테니 돌아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꼭 안아줘야지 생각하면서, 녀석이 좋아하던 통조림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었지."

아란은 초조한 기색으로 어깨 아래로 내려온 연갈색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날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을 말로 표현하려 하니 힘이 든다. 아마도 기억을 말로 엮어내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애써 숨겨두었던 그 기억을 꺼내어 자신의 입으로 되뇌며 머릿속에서 그 날을 재구성함으로써, 마치 그 날의 일을 다시 겪고 있는 것 같아져 괴로울 뿐이다.

"근데 그날 밤이 지나도 인디고는 돌아오지 않았어. 한동안은 문을 열어놓고 지냈었지, 내가 아직 화가 안 풀린 줄 알고 겁을 먹어서 안 들어오는 걸까 봐. 그러다 문득 '나쁜 놈, 뭐라고 했다고 바로 집 나가버리고…….'라는 생각이 들면 혼 좀 나보라고 문을 걸어버리기도 하고, 금세 '혹시 그 사이 집에 왔다가 풀 죽어 돌아서진 않을까' 허둥지둥 다시 잠긴 문고리를 풀어 놓고……그런 식의 반복이었어. 근데 일주일 전에 출장가면서 아빠가 그러더라, 이번에 갔다 오면 새로 고양이 한 마리 사다 줄 테니까 이제 인디고 기다리지 말라고. 문 열어놓을 필요 없다고 말이야."

무언가 예상을 했는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한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고뇌하는 듯한 표정이 꽤나 잘 어울린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 음울한 미소년이라고 생각했었지.' 아란은 몇 시간 전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언뜻 떠올리며 세한을 향하여 살짝 웃어 보였다.

"나 아빠가 그 말을 하기 전날, 동네 아줌마들한테서 이런 얘기를 들었거든. 옆 동네에서 철장 문이 열린 틈에 투견 한 마리가 탈출해서 어린 길고양이들을 공격하려고 했대. 그런데 어디서 꼬질꼬질 때가 탄 아이보리색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겁도 없이 그 앞을 막아섰다더라고. 다행히 금방 구조대가 와서 개도 포획했고 다른 피해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해. 대신 앞을 막아섰던 그 고양이는 목에 크게 상처가 나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나 봐. 아마도 엄마 잃은 아기 고양이들을 대신 돌봐주고 있었던 거였는지, 그 녀석이 쓰러지니까 흩어졌던 길고양이들이 모여서 한참을 울었다네. 그 고양이 코끝이랑 귀가 초콜릿색이었다고 그러더라, 우리 인디고처럼. 아마 아빠도 그 소문을 들었겠지."

아란은 바닥에 펼쳐놓았던 서류를 들어올렸다. 발신자 인디고, 항상 불렀던 이름인데도 어쩐지 낯설다. 소리가 아닌 글자로 표현된 자신의 이름을 난생 처음 보았을 고우도 아마 같은 기분이었을까, 소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확인해보고 싶었어, 그냥. 그게 정말 인디고였을지, 아빠 말대로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건지……. 아니다, 진짜로 확인해보고 싶었던 건 아마 그거였을 거야. 고우가 내가 화내는 바람에, 그래서 내가 싫어져서 집을 나갔던 게 아니라는 거……."

이거 봐봐, 어쩐지 울어버릴 거 같은 기분을 감추기 위해 아란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세한 쪽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내가 아까 무슨 뜻인지 안다고 했잖아? 알려줄게."

바라는 말이라고 적힌 칸 안에 자리 잡은 작은 발바닥. 기분 좋았던 그 약간의 무게감, 말랑말랑 부드러웠던 그 감촉……. 손을 대 보아도 아란이 그리워하는 그것들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 알 수 있었다, 인디고가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내가 울고 있으면 고우는 다가와서 이렇게 한발로 꾹 손을 눌러줬어, 위로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마주 대고 있으면 어느새 눈물도 그쳤었지. 이거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러니까……안 울래, 고우의 마지막 부탁이니까."

처음 세한에게 서류철을 받아들었을 때처럼 아란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아니, 웃으려고 노력했다. 이도 저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표정일 것임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전에 어떤 이가 그랬습니다. 네 녀석의 등은 눈물을 숨기기에 좋다고."

그런 아란을 바라보던 세한이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바로 옆에 앉은 아란에게 바듯이 들릴 정도의 그런 크기였다. 아란은 그 조용한 목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가벼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잠시 빌려 드릴 테니 쓰셔도 좋습니다. 이 곳이라면 보지 못할 겁니다."

"그럼 조금만, 조금만 숨어있을게."

세한의 곧은 등은 생각보다 넓었다. 아란의 눈물을 담기에 충분할 만큼이었다. "화내서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나쁜 놈." 그날 밤,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아란은 그 너른 등에 얼굴을 묻고 그 곳에 눈물을 숨겼다. 아마도, 조금 오랜 시간 동안이었던 것 같다.

 

 

*     *     *

"뭐 하시는 겁니까?"

"별거 아냐. 그냥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 해."

자신의 핸드폰으로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세한의 모습을 한참 동안 골똘히 바라보던 아란은 이내 무언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세한에게 다가갔다. 한 손에는 헤어 왁스를 든 채였다. '예쁜 얼굴인데 가리고 있으면 섭섭하지.' 혼자 중얼거리며 아란이 열심히 세한의 앞머리를 위로 세우고 있는 동안, 딱 한번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던 세한은 신경 쓰지 말라는 아란의 말에 이내 곧 그 작은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세한과 같이 지내면서 아란은 이 소년이 꽤나 무심하면서도 의외로 무던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도 본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것에는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게임 속 폭탄설치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다. 마치 얌전한 애완동물을 데리고 노는 기분이다. 뭐 물론 세한은 반대로 세한 자신이 비글 같이 성가신 애완동물과 놀아주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일주일 전 아란의 눈물이 마른 후, 세한은 "세 번째 소원은 혹시 계약 파기입니까?"라고 물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소원배달의 발신인을 알고 싶으셔서 두 번째 소원을 비셨던 거 아닙니까? 그 궁금증이 풀렸으니 요정우체국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할 이유는 없으신 것 같아서."

"세 번째 소원은 일단 보류해두면 안될까? 방학 끝날 때까지는 나도 해보고 싶은데. 어차피 나 요새 별로 할 일도 없고……. 아, 물론 네가 싫으면 그냥 끝내도 돼. 내 소원이긴 했지만 우리 두 사람의 계약이었으니까. 혹시 나랑 있는 거 불편할 거 같니?"

아란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던 세한은 의외로 순순히 "전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시 동안이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여 원피스의 한쪽 끝자락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가볍게 웃어 보인 아란에게 세한 역시 마주 웃어 주는 것으로,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시작되었다.

"됐다! 이거 봐, 예쁘지? 잘생겼지? 멋있지?"

머리정리를 마친 아란은 신이 나서 세한에게 거울을 들이밀었다. 이마를 드러내니 한결 시원스럽고 깔끔해 보인다. 그러나 세한은 흘끗 눈을 돌려 거울을 보더니 자신의 정확한 안목에 뿌듯해져 뽐내 하는 아란에게,

"뭐 좋아 보이긴 합니다만, 그래 봤자 제 얼굴인데 왜 아란 양이 자랑스러워하십니까?"

이런 기운 빠지는 대답만 들려줄 뿐이었다.

"이럴 때는 그냥 '와 덕분에 인물이 훤해졌네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와 덕분에 인물이 훤해졌네요, 감사합니다."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국어책 읽기 톤으로 말하긴 했지만 눈은 웃고 있다. 오늘도 약간 소란한, 어느 여름날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요정의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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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

October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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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잘 봤습니다. 평화롭고 굉장히 아기자기한 느낌이네요. 보면서 많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소원 세가지 미리 고민 좀 해볼까 봐요. 저한테도 이런 일이 올 수도 있으니까. (웃음)

투닥투닥 거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정겨웠고, 재밌었어요. 의외의 요소라고 할까, 갑자기 거북이가 나왔을 때도 즐거웠고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소설을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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