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작품 소개 "내일의 단편 경소설상"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친구들한테 구걸해서 아낀 돈으로 집을 살수도 있지 않을까? 하하. 미안. 너무 허무맹랑한......"

"젠장, 들켰나!"

 

-어딘가에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대화.

 

 

 

고등학생이 가장 빛나는 시간을 물어본다면 당신은 뭐라 대답할 텐가.

"자, 수업 여기까지."

공부할 때? 연애할 때? 유감스럽지만, 틀렸다.

"우워어어어어!!!!!!!!!!!!!!!"

그 답은 물어볼 것도 없이, 급식 받으러 달려갈 때다!

방금 수업을 끝마친 애들은 꼭 텍사스 소떼들을 연상케 하는 발소리를 내며 급식 실을 향해 날려나가기 시작했다. 애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성전에 참여하는 비장한 표정으로 진심을 다해 급식 실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강서국도 끼어있었다. 강서국은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도... 나도 급식 먹을 거야!"

.......저래뵈도 본인에게는 중요한 일인 거 같으니 뭐라 하지 말자. 하여간, 서국이 죽기살기로 달리고 있었지만, 역시 밥이 중요한 건 서국만이 아닌지라 다른 애들도 서국이 자신을 추월하게 놔두고 있진 않았다. 아니, 되려 서국을 추월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졸다니, 이런 불찰이! 거기 앞에! 비켜라!"

안 그래도 정신 없어 죽겠는데 뒤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키라니, 지금 비킬 곳 따윈 없단 말이야!

"다시 말하지, 비켜라!"

서국은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그렇게 잠시 달리자, 스릉. 뒤에서 살벌한 칼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국은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발도를 준비하고 있는 장검의 칼날이 보일 뿐이었다.

"비키지 않으면.. 벤다!"

"흐그갸갸아아악!"

진짜로 내리칠 기세였다. 서국은 경악하고는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매정하게도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방해가 된다면서 서국을 치고 가고, 서국은 정신 없이 튕겨나갔다. 그 와중에도 억지로 아락바락 달려나갔지만, 왠걸. 벌써 식당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단 식당뿐만 아니라 식당 앞 복도도 반이 넘게 줄이 서 있었다.

"........"

머-엉. 분명 종치기 1분 전에 끝나서 칼같이 달려왔는데도 이놈들은 어떻게 달려온 건지 급식 줄은 벌써 더럽게 길었다. 요즘 특히 급식 받는 속도가 느려져서 이 줄이 줄어들려면 족히 20분은 걸린다. 굼벵이다 굼벵이. 대충 계산해봐도 까마득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

"...포기하자."

그 줄을 멍하니 보던 서국은 그렇게 약간 서러운 기분으로 혼잣말을 하고는 미련일랑 털어버리고 밥 먹는 대신 친구들이랑 흔히 모이는 옥상 폐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밥이야 나중에 먹으면 된다. 식당 바로 아래에 있는 조리실 에 직접 쳐들어가서 달라고 사정해 볼 거 아니면 빨리 먹을 수도 없고...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계속 궁시렁궁시렁대고 있었다.

"정말... 급식 좀 빨리 받기 위해서 칼을 꺼내는 게 어딨어."

이 학교는 뭔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상하다. 어제는 어떤 애가 '아드레날린!!! 부스터!!!'라고 외치더니 남들 두 배의 속력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추월해 가질 않나, 오늘은......

"아-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열만 받을 뿐이었다. 서국은 머릿속에서 그런 사실을 전부 깡그리 잊으려고 하며 걸어갔다.

"정말이지...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     *      *

서국은 되게 만만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여기서 만만하게 생겼다는 건 호구처럼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여차할 때 선생님들이 일 시키거나 할 때 왠지 시키고 싶게 생긴 얼굴이라는 거다. 거기다가 그런 주제에 목표로 한 일은 끈덕지게 하는 성격이었다. 그 덕에 일만 죽어라 하고, 대단한 괴롭힘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갈굼 당하는 생활이었다.

"불행해......"

그나마라도 운동신경이 좋기라도 하면 말을 않겠는데, 운동신경도 좋은 축엔 안 들어갔다. 그렇다 보니 서국은 주위에서 킹오브 만만함으로 손꼽히고 있었고, 괴롭힘 같은 건 없었지만 은연중에 만만하게 치이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자신감도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고.. 근데 어쩌겠나. 그 만만함이 사실인걸. 거봐. 그러니까 학교의 아이돌 검도소녀께서도 친히 날 베려고 들잖아. 이렇다니까. 맞고 사는 건 아닌데 아무나 한 명 당해야 한다면 당하는 건 꼭 나야. 그 덕에 난전이 일어나는 급식소 가는 길에는 꼭 어떤 불상사가 생기곤 했다. 안 그래도 요즘 급식 줄이 끔찍하게 안 줄어들다 보니 조금이라도 일찍 먹고 싶었는데. 억울해 죽겠다.

친구들이랑 아지트로 쓰고 있는 옥상 폐 교실에는 아직 아무도 안온 모양이었다. 솔직히 아지트니까 짱 박혀있지, 안 그랬으면 더워 죽겠다고 탈출을 시도했을 거다. 왜 에어컨은 있는데 돌리지를 못하니. 오늘은 어쩐지 운이.... 좋다고는 절대 말 못하겠군. 뭐 어쨌건 말이다.

하여간, 급식 줄 설 때 뭔 일 생기는 걸로 볼 때 진짜 급식에 진짜 뭐가 끼어도 단단히 꼈다. 이건 뭔가 있어.

"그래... 이건 음모야."

서국은 아무도 안 듣는다고 막말하고 있었다. 남이 보는 앞에서 이런 소릴 했으면 뭘 잘못 먹었냐는 반응만 돌아 왔겠지. 하지만 서국은 왠지 서러워서는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었다.

"이건 음모야. 분명해!"

서국은 그렇게 말하고 나자 새삼 억울해 죽겠는지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쌓인 게 많았는지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표정은 말 그대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게 전부 다, 내가 급식을 못 먹게 만들어서 급식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게 만들려는 학교의 음모야! 급식에 대한 열망을 불타오르게 해서, 그 열망을 이용해 매점의 매상을 올리려는 학교의 음모라고! 안 그래도 요즘 급식 배식이 알게 모르게 느려지는 거 같던데! 으아아아아!"

서국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진심으로 분했던 것인지, 아무도 듣지 않고 있건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 없이 진지해서, 만약 누가 듣고 있었다면 그 불쌍함 때문에라도 그의 말에 동의를 해 줬으리라.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한심해 보였다는 거다.

"................"

서국은 열변을 토한 직후에 허무해져서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말할 때는 묘하게 말이 되는 거 같더니 정작 말하고 나니까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안 그래도 서국은 음모론 을 남에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싫어하는 축에 들었다. 아니,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 자신이 앞장서서 음모론 을 말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코미디다.

서국 스스로 생각해도 왜 이 딴 소리나 하고 사는 건지 모를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드라마 같은데 에서는 연애도 잘하고 재밌는 이벤트도 많은 삶을 사는 애들이 나오는데 왜 내 인생은 그렇지 못한 걸까. 좋아하는 여자애는 있는데, 고백은커녕 오늘은 그 애한테 베일 뻔 했다. 그냥 매일 매일 사소하게 기분 나빴던 일들 가지고 망상이나 하는 나날. 비참하다. 그는 자조적인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서 교실 문으로 향했다.

"....응. 그래. 잊자. 매점이나 가서 빵 사먹어야....응?"

그리고, 그 문 앞에서 그를 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모델 같은 훤칠한 키와 굴곡이 확연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교복치마는 반 치수 정도 짧은 건지 아니면 개조한 건지 아슬아슬한 사이즈. 엉덩이까지 오는 흑색 생 머리카락은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고, 또한 한쪽 눈 위를 가린 앞머리는 그녀의 무표정과 맞물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최대 특징은 비대칭 형으로 하고 있는 왼쪽 다리의 스타킹과 오른쪽 팔의 아대, 그리고 허리춤의 검. 왜 학교에 검을 들고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허리의 검은 그녀 자신을 상징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교내에서는 유명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아이돌격 존재인 검도소녀 한세하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서국은 그대로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들었나? 한심한 놈 취급 받으려나?

"너......"

세하가 입을 열었다. 서국은 평소였다면 세하와 가까워질 찬스가 온 거라며 바짝 긴장할 테지만, 워낙 상황이 기묘해서 그런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당황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너...... 어디까지 눈치 챈 거냐!"

세하는 특유의 딱딱한 어투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뭐... 라고...? 서국은 순간 벙 쪄버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눈치 챈거냐니, 도대체 뭘?"

"시치미 떼지 마라!"

"히익?!"

스릉. 세하가 칼을 뽑아서 서국의 목 끝에다 가져다 댔다. 서국은 칼의 위압감에 온몸이, 심지어 허벅지에까지 힘이 들어가 버렸다. 서국은 억울했다. 도대체 뭘 눈치챘길래 이러는 건지? 아... 어... 잠깐... 내가 한 말은 되도 않는 음모론 한마디뿐인데...?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이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추잡한 음모에 대해...!"

"어... 잠깐. 그럼... 급식을 못 먹게 해서 매점 매상을 올리려는 게 정말이라고?"

"그래! 바로 그거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해이트?"

"뭐야 뭐야 뭐야, 난 그딴 거 모른다고! 전혀 몰라! 해이트가 뭔데!"

"......정말 모르는 건가?"

"그렇다니까!"

서국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딴 거 내가 알게 뭐야. 애초에 음모니 뭐니 지껄인 것도 되는대로 주워섬긴 건데!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세하는 칼을 도로 칼집 안에 집어 넣었다.

......근데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학교에 칼 가져와도 되는 건가?

"일단 믿기로 하지."

서국으로서는 일단 믿기로 하고 자시고 간에 그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게 뭐 하는 거냐 진짜.

"그래서, 왜 나에게 칼을 겨눈 거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네가 정말로 음모에 대해 알고 있다면 너의 안전을 위해서 입막음을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급식 때문에 입막음을 당할 판이었다.

"그럼..."

"그래. 음모를 모르는 너는 더 이상 볼일 없어. 아니, 나랑 엮이면 위험해. 얼른 가. '조직'에게 엮이기 전에...!"

......그러시겠죠. 서국은 한없이 허무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일단은 좋아하고 있는 세하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캐물어 봐야 대답도 못 듣고 이미지만 깎일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난 나가봐도 될까?"

세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비켜주었다. 서국으로서는 이게 어찌 돌아가는 영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여 튼 세하가 얼른 가라니까 얼떨결에 쫓겨나듯 나와 버렸다.

 

 

*     *      *

"하아..."

쉬는 시간, 서국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얼떨결에 재대로 이야기도 않고 나오긴 했지만, 역시나 너무 황당한 이야기였다. 아니 식당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게 밥을 못 먹게 하려는 매점의 음모라니. 그렇게 따지면 역사 수업이 따분했던 건 교사가 우리를 재우려는 음모고 로그함수가 까다로운 건 수학에 학을 떼게 만들려는 세계의 음모인가. 말이 안돼도 너무 안되잖아.

"뭘 그리 한숨을 쉬시나?"

그리고 그의 친구, 안동훈은 그런 한숨을 푹푹 쉬는 서국을 보며 말했다. 서국과 달리 동훈이는 체격도 좋고, 운동도 잘해서 급식 줄 맨 앞을 놓친 적이 거의 없었다. 취미가 건물 타기다. 그 덕에 요즘은 밥 먹고 있다가 뒤 돌아보면 종종 동훈이가 창 밖에서 까꿍할때도 있다. 여 튼 그러니 운동 신경이 안 좋을 리가 없지. 물론 수업이 늦게 끝날 때는 운동신경이 암만 좋아도 줄에 늦는 건 별수 없고.

"동훈아."

"응? 왜 그러냐."

"넌 어떻게 급식 줄 맨 앞에 설수 있는 거냐?"

"X나게 달려 임마."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새삼 그건 왜 물어 보냐."

"아니.. 요즘 해도 너무한 거 같길래. 어떻게 하루도 앞에 설수가 없는 걸까."

"트레이닝을 해."

"그럴 줄 알았다."

이놈과의 대화는 늘상 이런 식이었다. 결론은 내가 비실비실한 게 문제란 거 아니냐. 그래 그래. 체격 좋은 녀석이 비실비실한 사람의 고충을 이해하겠냐.

"짜식, 너 영 풀이 죽어있는 거 같은데? 매점 가서 뭐라도 사먹을까?"

"네가 사주면."

"으... 알았어. 사줄게. 가자!"

동훈은 서국의 등짝을 팡. 하고 친 뒤 친히 서국을 끌고 매점으로 질질 끌고 갔다. 친구끼리니까 뭐라 하진 않겠지만... 등짝이 아프다.

"...동훈아."

서국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지나가는 말투로 동훈이에게 물어봤다.

"응? 왜 그러냐?"

"설마... 내가 급식 줄에 재대로 서지 못하는 게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서 그런 건 아니겠지?"

순간 동훈이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 바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서국을 보며 말했다.

"......뭐 약 잘못 먹었냐?"

"하, 하하... 역시 그렇지?"

서국은 그런 면박을 들으면서도 안심했다. 역시 세하가 한 말이 이상한 거야. 서국은 역시 상식을 중시 여기는 인간이었기에, 암만 좋아하는 애의 말이라지만 세하의 말은 헛소리로 치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매점까지 끌려가고 있는데, 서국의 앞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안녕?"

"........."

"저... 세하야. 나는 김오덕이라고 하는데 학교 끝나고 같이 어디.."

"........."

"세하느님 여길 봐달라능!"

"........."

아무래도 그 한 무리의 인간들은 의도하고 모인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한세하를 중심에 두고 한세하의 관심을 갈구하는 무리들이 이래 저래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시도를 해 보고 있는걸 보면 확실히 의도하고 모인 건 아니겠지.

"이야, 여전하구만. 얼음공주 씨."

동훈은 지나가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역시 그렇다니까. 한세하는 교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애초에 교복이라고는 해도 비대칭으로 코디하고 다니는데다, 칼까지 휴대하고 다니는 시점에서 생긴 게 고만고만해도 관심을 얻기에는 충분했을 텐데, 거기다가 교내에서 손꼽히게 예쁜 주제에 그 어느 누구하고도 오래 이야기 한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추종하며 따라다니면서도 목소리를 못 들어본 사람까지 있을까.

"저런 애가......"

서국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저런 애가 급식에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며 나에게 칼을 겨눴단 말이지... 솔직히 아직도 안 믿긴다. 추종하는 애들은 세하가 그런 망상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 동훈이 지나가는 말투로 서국에게 물어 보았다.

"너 쟤 좋아하고 있잖아? 뭐가 좋은 거냐?"

"그냥 예뻐서 좋아하는 것도 잘못이냐?"

"아서라. 저런 절벽 위의 꽃을 바라보다간 평생 애인 안 생긴다."

"누가 들으면 넌 애인 있는 줄 알겠다?"

"그러게. 너나 나나 모태 솔로인데."

정말로 무의미한 평범한 모태솔로들의 대화였다. 대개는 관심도 안 생기리라. 하지만 그것을 들은 건지, 그 순간 세하가 몸을 돌려 강서국을 보았다.

"......"

"...?!"

순간적인 정적.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세하의 시선은 서국으로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당황스러운 시선이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너, 거기 짧은 미역. 내가 한 말 잊지 않고 있겠지."

"어, 아...... 응......"

"항상 조심하도록 해. 네 목숨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수가 있다."

세하의 말은 그 뿐이었다. 참으로 단순한 말. 세하는 그렇게만 말하고 도로 갈 길을 갔다.

하지만, 그 말의 파장은 단순하지 않았다.

"...방금... 뭐라 그랬나...."

"저... 저... 자라다 만 미역 머리가... 나으 여신님께 걱정을 끼치고 있어!"

"용서 못해... 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

소위 '추종자'들의 사고 패턴은 단순하다. 자기 말고 다른 놈팽이가 그녀에게 다가가는걸 용납 못한다. 끗. 그런고로, 추종자들 앞에서 아주 친근하게 걱정을 해주는 꼴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AV다. 서국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간절한 표정으로 구해달라고 친구인 동훈을 보았다.

물론, 정작 동훈은 아주 살벌한 표정으로 서국에게 그냥 콱 나가 죽어버리라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얘도 아이돌하고 대화 한번 했다고 질투 하나 보다.

"우워어어어어!"

"사, 살려줘!"

급식의 음모에 휘말려 죽기 전에 추종자들에게 휘말려 죽을 판이다! 서국은 본능적인 위기감으로 강화된 속도로 신나게 도망쳤다. 물론 뒤에서 좀비같이 달려 오는 추종자라는 족속들에 대해 원망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건 당연지사. 이거야 말로 날 교살하려는 세하의 음모인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반쯤 진지하게 하며 소년은 달렸다. 달려라 강서국.

 

 

*     *     *

"...또 만났군."

"........."

옥상의 폐교실. 오늘도 급식 줄 안에 들어서는걸 실패해서 폐 교실에서 책상 위에 누워서 궁상 짓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인가 세하가 와서는 그런 서국을 보고 있었다. 서국은 좋아하는 애하고 수시로 이야기를 하는데도 좋아하기는커녕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런 표정인 거지?"

"미안하지만 내가 너 때문에 좀 당황스럽거든. 어제부터."

"...당황?"

서국은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좋아한다 해도 막 없고는 못사는 팬질 도 아니다. 그냥 아이돌을 보고 예쁘네.. 하는 수준이었지. 그리고 그런 거 다 제껴두고 서국은 세하에게 따지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암만 예쁘게 생겼다지만 점심도 못 먹고 기분 나쁘게 생긴 남정네들에게 쫓겨 다니면 기분 안 나쁘겠냐!

"그래. 너 말야. 어제 뭐 급식에 음모가 있다 했지?"

"응. 그렇다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말이 무진장 황당하거든. 그런데, 넌 남들이 보는 앞에서 추가로 경고하기까지 했어. 그렇지?"

세하는 뭔 말을 하려는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서국으로서도 너무 황당해서 어디부터 찔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만, 일단 따지고 봐야 할거 같았다.

"그래서, 난 그 음모에 대해서 알고 싶어. 그 음모가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그러는 건지 말야."

세하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국을 바라 보았다. 그 눈빛은 어쩐지 이것저것 재고 있는 표정이었다. 서국은 속으로 이게 다 무슨 짓인가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진심? 걸리면 목숨이 위험할 텐데."

"위험하고 어쩌고 하기 전에 들어나 보자."

"...안돼.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어. 비밀을 알게 되면 '조직' 에서..!"

"내 위험은 내가 책임질게."

매점에 대한 음모라면 설령 잘못된다 쳐도 기껏해야 매점 못 가는 정도겠지 뭐. 좋아. 뭐든지 말해봐. 어찌됐건 알고나 보자. 물론 그런 서국의 생각을 알리 없기 때문에 세하는 그런 서국을 무슨 생각하는 건지 빤히 바라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에는 괴인이 있다."

".............."

그리고 세하의 첫 마디는 서국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괴인? 딱딱한 말투로 저런 말을 할 줄은 꿈도 못 꿨네. 그니까... 막 파워레인저 같은 데에서 나와서 꾸워엉 하다가 쳐발린다음 거대화 하고 또 발리는 그 괴인 말야?

"혹시, 세상에 불합리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나? 왠지 나만 손해를 보는 거 같다는 생각 안 해 봤나? 세상의 일이 너무나도 절묘하게 자신에게만 나쁜 쪽으로 돌아간 적 없나? 하지만 우연이니까 뭐라 불만을 가질 수도 없고 화만 삭인적 있지 않나?"

"어... 응. 있....지."

사실 이건 없다면 그게 거짓말일거다. 조금만 운이 나빴어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사람 심리인걸. 특히 재수가 없는 축에 드는 서국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생각만 해도 화딱지가 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꼭 자신만 심부름 시키는 선생은 볼 때마다 화가 난다.

"그게 전부 사실은 사회에서 암약하는 괴인들 탓인 거다."

"...뭐?"

괴인?

"그 괴인들의 이름은 '해이트.' 세상에 흩뿌려져서 사람에게 깃들어 사람의 욕망을 직접 흡수하지. 욕망의 달성을 방해함으로써 욕망을 증폭시킨 다음 그걸 흡수한다. 흡수한 욕망은 힘이 되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세상에 재앙을 일으키지. 그래. 꼭 사려는 한정상품이 내 앞에서 품절되는 것도, 버스 정류장을 헐레벌떡 달려가면 꼭 한발 앞서 버스가 떠나가는 것도 전부 해이트의 탓인 거다!"

"......."

서국은 순간 할말을 잃어버렸다. 이... 이 말 못 따라가겠어. 뭐라고 했지?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열 받는 일들이 다 음모라는 거..? 서국은 너무 막 나가는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에 따라가 버렸다. 그래서 이것 저것 따지기 시작했다.

"그... 그럼 꼭 내가 사는 헤드폰만 순식간에 줄이 끊어지는 것도...."

"그래!"

"꼭 내 자전거만 꼬맹이들이 꼬여서 망쳐놓는 것도..."

"그래!"

"꼭 내가 받은 교과서만 뭔가 찌그러져 있는 것도..."

"아니... 그건 아닌 거 같다."

묘한 기준이었다. 계속 맞장구 치니까 신나서 말했던 서국도 중간에 가로 막자 맥이 빠졌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전부 그런 게 아닌 건가. 그냥 세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 학교에도 그 해이트라는게 존재한다는 거야?"

"그래. 이번 해이트는 급식에 대한 욕망을 조종하고 있다. 그래서 난, 그 해이트를 뒤쫓고 있지."

서국은 어이가 없어져서 멍하니 세하를 보고 있었다. 이럴 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거기다, 그 해이트를 퍼트리는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을 뒤쫓는 나 같은 사람이 모인 조직이 있어서 해이트가 물밑에 올라오지 않게 할 수는 있었던 거지. 그러니 얼른 이번 해이트를 잡아야 해. 이건 아주 중요한 임무다. 해이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불행해져. 거기에 해이트는 오래 있을수록 힘이 강대해지니... 최대한 빨리 찾아내서 대항 조직의 요원인 나의 손으로 처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계속 불행해지고 해이트는 강대해져 만성적인 불행에 빠지게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거다. 그것이야 말로 해이트를 퍼트리는 조직이 원하는 사태. 사람들은 해이트에게 불행을 바치고, 해이트는 조직에게 힘을 바친다. 그리고 힘이 충분히 모이면 조직은..."

세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세계 정복을 하겠지. 그 힘으로 말야."

......그리고 정적. 뭐랄까...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서국은 앉아있던 책상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뭐랄까, 재밌는 말이긴 한데..."

서국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건 아니지. 사람이란 게 원래 이미지가 언동 한번에 확 바뀐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순도 100퍼센트의 망상 아냐. 단숨에 세하에 대한 호감도가 쫙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나는 음모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 되게 싫어하는데 말야.

"안 믿는 건가?"

어쩐지 실망한듯한 세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그런걸 믿어주리라 생각한 건가. 서국은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세하를 보고 말했다.

"안 믿고 자시고 간에..."

"...! 위험해!"

아니, 말하려 했다. 갑자기 세하가 그렇게 외치며 서국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서국을 교실의 벽까지 밀어 붙이고는 자신도 서국의 몸에 밀착시켜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쉿. 조용히 해라! 추잡한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 쫓아온 것이 분명하니까!)"

세하는 서국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솔직히 나 이 전개 못 따라가겠어. 그나저나 밀착이라니... 어 음 그러니까... 세하 보기보다 가슴 크네. 뭉클한 감촉이... 허허. 허허.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에. 설마 아까 말한 음모니 뭐니 하는 게 사실이었나?!

"(내가 요원인 것을 여기서 저들에게 들키면 안돼. 미안하지만 이렇게 좀만 더 있어주겠나. 저들은 기척이 안 느껴지면 그냥 돌아갈 거다.)"

애초에 서국의 몸 자체를 세하가 자신의 몸으로 압박하고 있었기에, 서국은 그 말을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근데... 그런걸 감안해도 미안한 건 세하가 아니라 나일 텐데. 서국도 남자인지라(그리고 그 와중에도 다른 남자들보다 1.372배 더 엉큼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슴팍에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는 지금이 그리 싫진 않았다. 게다가 세하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하지만, 바깥에 있는 누군가의 기척이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건 좀 골치가 아팠다. 누가 됐건, 안에 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이 꼴을 보게 되면 이래 저래 골치 아파 질 거다. '학교에서 유명한 미소녀와 몸을 밀착하고 나참.jpg'라는 게 알려지면..... 그나저나 얼굴을 둘 데가 없다. 정면을 보자니 세하의 얼굴이 있고, 위로 보자니 머리 뒤가 벽이라 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아래를 보자니... 가, 가슴이...

"(왜 이리 꾸물거리나! 이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세하는 자각이 없는 건지 그렇게 다그치기나 하고 있었다. 서국은 괜히 억울했다. 이건 내가 나쁜 게 아니라구.....

덜걱덜걱. 그 순간, 바깥에서 문을 열려는 시도를 하는 건지 문고리가 절걱거렸다. 문은 세하가 잠궈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옥상 교실은 잠겨있으면 대충 동전을 열쇠대신 써서 열수 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었다.

"(들....켰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데?)"

바깥의 상대방도 그걸 아는지 덜걱거리는게 딱 동전으로 문을 따는 중인 듯 했다. 그것을 본 세하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조금만 더 나에게 맞춰줘.)"

"(으, 응. 근데 뭐 하려고...)"

문이 완전히 따이고,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순간,

세하는 서국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

서국은 완전히 패닉에 휩싸여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리 추잡한(급식을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에게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는 거라지만 이렇게 키스를 해도...?! 하지만 세하는 지금 들어온 사람이 나갈 때까지 계속 이렇게 하고 있을 기세였고, 서국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서국이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일단, 서국이 여기 있었던 건 여기가 서국과 그 친구들의 아지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친구 녀석들이 밥을 다 먹고 올 정도의 시간이라는 것. 즉...

".....헉."

그런고로, 오늘도 신나게 보드게임을 즐기러 왔던 강서국의 친구 안동훈은 친구가 학교의 아이돌과 찌이이이이인한 키스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너무 놀라 들고 왔던 보드게임을 손에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

뭐라 하기 힘든 정적이 지나간다. 서국은 뭐라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있는 터라 그것도 재대로 되지 않았다. 손짓을 해서 오해라는 말을 하고 싶긴 했으나, 대체 어떻게?

"아...어....아..."

갑자기 동훈은 말을 잊어버린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계속 석고상 놀이를 하더니만,

"삐...삐... 삐뚤어질테다아아아아!"

불쌍하게도 이런 말을 내뱉으며 교실 밖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찌이잉. 뭔가 나가버리면서 순정 만화의 주인공 마냥 눈물 비슷한걸 흩뿌렸던 거 같은데, 제발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으아아아아앙! 죽어버릴거야아아아아! 아니 죽여버릴거야아아아!"

뭔가 굉장히 아름답지 않은 목소리가 바깥에서 울려 퍼지고, 세하는 서국에게 맞췄던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서는 멋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왠지 몰라도 굉장히 충격 받은 모양인데, 괜찮나? 방금 눈물을 흘린 거 같은데...."

"어...음... 뭐, 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이미지는 좀 깎인 거 같은데.."

"응? 왜?"

"..아냐. 됐어."

오늘은 운이 좋다 해야 할까, 나쁘다 해야 할까. 17년 인생 동안 여자와는 별 인연이 없던 서국으로서는 이래저래 의도치 않게 스킨십을 잔뜩 받은 건 일견 좋은 일인 거 같긴 하지만, 왠지 막상 당해보니 별 감흥이 없다. 배부른 소리 같지만 마냥 스킨십 한다고 좋은 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잊도록 하자.

"그럼 난 볼일 다 봤으니 가볼게. 바이바이."

그런 의미에서 쿨하게 나가 보려고 서국은 걸음을 옮겼다. 보드게임? 알게 뭐야. 내팽개친 녀석이 알아서 수습하겠지. 그리고, 세하의 말은 재미는 있는데 현실성이 너무 없다. 내가 망상을 좀 자주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진지하게 음모론 을 늘어놓는 시점에서 나에게서는 아웃. 난 신경 안 쓸래.

그런데, 나가려는 서국의 뒤통수를 세하가 대뜸 붙잡았다.

"켁! 케엑.... 뭐, 뭐야?"

서국은 세하를 보고 말했다. 난 매점을 갈거라 구. 이거 놔. +악. 악.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그냥 가려는 건가."

"그... 그럼 가지! 여기 있으라고?"

서국으로서는 당연한 항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하로서는 당연하지 않은 항의였나 보다. 세하는 너무 당연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말을 들은 이상 너도 내 활동에 동참하는 게 당연하잖나."

뭐?

 

 

*     *     *

"자, 도착이군. 뭐하나, 빨리 오지 않고."

세하는 복도에서 당당하게 서국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세하는 인기가 좋은 학교의 아이돌이었고, 의욕 없이 터덜터덜 따라오고 있는 서국을 세하가 연거푸 부르는 모습은 그들에게 쇼크를 주기에 충분했다는 거다. 세하는 안 그래도 말 안 하기로 유명하다. 필요 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안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미소녀가 연거푸 부르는 저 자라다 만 미역은 뭔가.

"네에..."

서국은 속으로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하 네 생각은 너무 오버한 거라니까! 그냥 좀 라이트하게 의도적으로 사람을 고용해서 급식 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고 하는 정도 까지는 믿어주겠는데 말야!(참고 사항 : 일반인은 그것도 안 믿는다) 그래도 괴인이니 뭐니는 너무하잖아! 뭘 하려는 거야 정말! 서국은 식당 바로 앞의 복도 한가운데에서 급식 줄을 둘러보고 있는 세하의 뒤쪽으로 쫄래쫄래 따라갔다.

물론 서국으로서는 가급적이면 눈에 안 띄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다만, 이미 그런 소망도 성취되는 것 따윈 그에게 있을 수가 없는 일인 상황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 최소한... 해이트니 뭐니 하는 소리를 대놓고 하진 말아줬으면 하는데.... 남들이 보잖아.. 아아. 시선이 따갑다...

"왜 그러나. 힘이 없어 보이는군."

"저기 말야. 난 네 말 하나도 못 믿겠거든?"

에이씨잉. 막 나가자. 서국은 세하에게 정면으로 맞설 각오로 대놓고 까기 시작했다. 왜 나까지 여기로 끌고 오는 건데! 하지만 세하는 별난 놈 다 보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왜 못 믿겠다는 건가."

"황당무계한 이야기면서 증거가 없잖아! 증거를 보여 줘!"

"증거라면 지금부터 찾으러 갈 거다만."

"애초에 증거가 없어서 안 따라가겠다는 건데 그게 무슨 모순된 이야기냐?!"

서국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어제 세하 때문에 그 추종자들에게 쫓겼던 원한까지 합쳐서 좀 과장되게 화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여태 서국을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세하에게도 전달 되었는지, 세하는 살짝 공허한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믿기 싫나."

"아니, 믿기 싫고 좋고 이전에 말야.. 억지로 끌고 왔는데 좋아할 리가 있나?"

"........"

세하는 말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서국을 보았다. 세하는 여태까지처럼 표정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표정의 차이가 없어도, 어쩐지 서국이 보기에는 세하의 표정이 서국의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을 못한 채 멍해져 있는 표정 같았다. 좀 말이 과했으려나.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만 도와줬으면 한다. 그 이상 폐를 끼치진 않을 거야."

"어...아.. 그래."

의외로 세하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서국은 재대로 대답을 못하고 얼빠진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챙겨 주나 보다. 근데 이런 거 챙겨줄 바에야 그냥 보내줬으면 하는데. 이런 음모론 놀이에 오랫동안 껴 있고 싶진 않지만...

"그건 그렇고, 여기에 이번 해이트가 있다."

"그래서... 그걸 내가 어떻게 해보라고? 뭔 수로?"

서국은 이제 비꼬아대기 시작했다. 세하가 나쁜 애는 아니라는 건 이해했지만 서국도 한계다. 이제 이걸 끝으로 더 이상 서로에게 관여 되지 말자고.

뭐... 다른 애에게 이렇게 굴었다면 학교 내에서 안 좋은 소문 퍼질게 걱정이긴 하지만 세하는 진짜 친구는 거의 없어 보이니 그것도 안심. 그런고로 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하는 신경 줄이 굵은 건지 비꼬는걸 못 알아 들은 건지 평범하게 대꾸했다.

"찾아내야 하는 거지. 급식을 방해하는 해이트를."

"그니까 그걸 어떤 방식으로!"

서국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박을 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다. 사실 줄이 아직도 길어서 잘 안보이긴 하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괴인 따윈 안 보였던 것이다. 암만 음모론에 준한 이야기에 끌려 왔다 해도, 식당은 식당이다. 괴인이 급식을 먹고 있다거나 하는 초현실적인 일은 애초부터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서국은 슬슬 눈치 챘어야 했다. 세하는 의외로 막 나간다는 걸. 세하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행돌파 한다."

"그래야 내 세하 답지....가 아니라 잠깐 너 멈춰봐.. 이걸 어떻게 강행돌파 한다는...?!"

이곳은 급식 실. 그리고 급식 실이 으레 그렇듯, 상당한 난장판이었다. 선생님 한 분이 보고 계셔서 두 줄은 지켜진다만, 그래도 이래저래 뭉쳐 있는 애들이 많다. 게다가 중앙으로 달려가려면 선생님께서 태클을 거실 게 뻔하다. 강행돌파가 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세하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서국은 당장은 그게 뭔지 못 알아 봤지만 이내 어릴 때 봤던 기억을 되살려서 추측해 보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달릴 준비해라."

"계란 과자?! 그거로 어떻게..."

그가 기억해 내고 말하는 순간, 세하가 냅다 계란 과자 2봉입 짜리를 여러 개 꺼내 흩뿌리듯 던졌다.

"어... 저, 저거!"

"먹을 거다!"

"내가 먹을 거야!"

"에엑따!"

급식을 기다린다는 말은 굶주리고 있었다는 말과 동의어. 과자가 흩뿌려지자 순간적으로 주위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비명이 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광기에 휩싸여 난장판을 벌였다.

"이 녀석들! 줄을.. 줄을... 으악!"

선생님이 제어를 하려 했으나, 되려 선생님조차 휩쓸릴 뿐이었다. 저거 맛있어 보인다.... 서국 또한 무심코 과자들에 손을 뻗으려 했으나(서국도 밥 굶은 처지다), 세하가 갑자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틈에!"

"어어어어?!"

세하는 착실하게 말하고는 다들 혼란에 소음에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서국의 손목을 잡고 냅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물론 서국은 덤으로 끌려갔다. 날 제발 내버려둬. 서국의 혼의 절규가 들리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식당 하나 가는데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당연한 말은 무시당할게 뻔했다.

"도착이군."

세하는 식당 한복판에 와서는 멈췄다. 질질 끌려 오던 서국은 툴툴거리면서 옷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슬슬 뒷 수습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응? 뭐라 그랬나."

"별거 아냐."

뭐, 내가 뒷수습하는 게 아니니 상관 없겠지. 먹을 거에 눈이 먼 저놈들 탓이야. 난 몰라. 서국은 밥줄이 난장판이 된 건 자기 탓이 아니라고 그렇게 쿨하게 패스하기로 하고 세하의 말에 대꾸했다. 그나저나... 들어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든다. 뭔가 이상한데.... 서국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곰곰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어지간히 이상했는지 세하가 서국을 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나?"

"..아니, 별거 아냐. 그건 그렇고 이제 해이트인지 하는 건 어떻게 찾을 거야? 눈 씻고 찾아봐도 괴인이 궁상 떨고 있는 건 안 보이는데."

서국은 일단 위화감은 넘기기로 했다. 별거 아닐 거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이제 해이트가 유발한 현상을 기반으로 있을 곳을 추정해야지."

"무슨 현상인데?"

"기억해내 봐라. 최근에 뭔가 이상한 일이 있었을 터. 그것이 내가 네게 바라는 조력이다. 나는 눈치를 못 챘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끌려 올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속으로 이제 태클 거는 것도 포기했다만.. 여 튼 서국은 최근에 급식 관련해서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라?

"어디 보자.. 최근에 급식 실에서 있었던 이상한 낌새라면.. 그냥 줄이 요새 끔찍하게 느리게 줄어든다는 거 정도?"

서국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에 대충 평소의 감상을 주워섬기면서 밥이나 구경하고 있었다. 먹고싶드아..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별 차이를 못 느꼈었는데.."

"급식 줄 뒤에서부터 서 보면 확연히 차이를 느낄 수 있어. 내가 요즘 그냥 안 먹은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그런가.. 그럼, 왜 줄이 안 줄어들었지?"

"나야 모르지. 알게 뭐야. 근데 그냥 왜인지는 몰라도 배식 자체가 느린 거 같기도 한데.."

"그런가..."

세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서국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그냥 보기만 하면 참 예쁜 애인데 행동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애일 줄은 몰랐는데... 뭐, 알았으면 좋아하지도 않았겠지.

착. 고민하던 세하가 결론을 냈는지,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배식이 느려졌다면 배식 냄비에 해이트가 있겠군! 베어보면 답이 나올 거다!"

세하는 묘하게 밝아진 말투로는 그렇게 말하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서국은 외모는 좋아하고 있는 세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터라 반사적으로 따라가면서 대답했다.

"그래. 배식 냄비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뭐?!"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그 직후였다. 뭐? 벤다고..?! 세하는 급식 통을 향해 달려가면서 칼을 뽑았다. 스릉. 그리고 칼을 들며 외쳤다.

"거기 학생들, 비켜라!"

"히이이익?!"

"에구머니나?!"

밥 받던 애들이 도망친다. 급식 아주머니도 경악하고는 뒤로 물러서서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그리고...

"이 바보야! 멈춰!"

서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하는 국 통을 내리 베어버렸다. 샤-악. 국 통은 절묘하게 잘려 나가서는 안에 들어있던 국을 쏟아내 버렸다. 콸콸콸. 국이 바닥에 흘려져서 퍼져나간다. 하지만 세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칼을 들이대가며 찾았다.

"해이트는 어디 있나!"

"........."

정적. 해이트는 커녕 주위 사람들조차 말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는 끈질기게 주위를 둘러 보며 해이트를 찾으며 외쳤다.

"나와라! 어디 있나!"

하지만, 역시 나올 리가 없었다. 계속 정적. 계속 여기 저기 칼을 겨누고 있던 세하도, 이내 그 해이트가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팔에 힘이 빠져서는 검을 아래로 내렸다.

"없는..건가?"

"당연하지!"

서국은 얼떨떨한 세하의 반응을 보고 저도 모르게 외쳐 버렸다. 세하는 그런 서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바라보며 착검했다. 그리고 서국에게 물었다.

"왜 당연하다는 건가?"

"네가 말했지? 그 해이트인지 뭔지는 인간에게 깃든다고. 근데 왜 애먼 국 통이나 베어 버리고 있는 건데? 앞뒤가 안 맞잖아?"

"아...."

세하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서국은 이제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체념한 듯 세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층 더 비꼬려고 했으나, 뭔가 알기 힘든 위화감이 계속해서 느껴지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뭐지.... 이 위화감? 기분이 이상했다.

"뭐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마침 식당 안에 있던 선생님들 중 한 분이 세하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리고 상황을 둘러 보더니, 상황을 눈치 챈 듯 세하를 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학생. 이게 무슨 짓인가!"

"...죄송합니다."

"위험하게 사람들도 잔뜩 있는 곳에서 그런걸 휘두르면 쓰나...."

세하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선생의 꾸중에도 대꾸 안하고 고개를 숙인 채 일일이 다 듣고만 있었다. 사실 이만한 일을 벌이고는 국 통을 베어버린 뒤에야 꾸중을 듣기 시작한 것도 용하긴 했다. 암만 밥에 미쳐 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싶은데.

"어쨌건, 한세하양. 교무실까지 따라오게. 이건 중징계 감이야."

"..네."

세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눈치였지만, 급기야는 교무실까지 끌려갈 상황에 처해져 버렸다. 선생님은 서국이 있는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세하가 따라갔다. 아마 교무실로 가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겠지. 명백하게 이유 없이 국 통을 하나 작살낸 거니까. 서국은 동정심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찝찝하단 말야.. 위화감이 그치질 않는다. 암만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데.

"가만...이대로 끝날 리가 없는데.."

묘한 위화감. 정체가 뭘까.. 이 시간대면 동훈이가 벽 타기를 한다고 건물 벽등에 보일 법도 한데 오늘따라 통 안 보인다. 식당에서 자주 보이더만.

하지만, 선생님은 그가 느긋하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 따위 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가만히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뭐하나. 너도 따라 와야지."

"...네?"

순간적으로 서국은 선생님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국이 이해하는 것과 선생님이 말하시는 건 거의 동시였다.

"너도 한세하양과 같이 왔잖나. 책임도 같이 져야지."

"....네에에에?!"

 

 

*     *     *

"아아... 드디어 끝났네.."

교무실을 나서는 서국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몇 시간이나 벌을 서 있다가, 그 뒤에야 돌아온 선생님이 또 한 시간 가량 설교를 늘어 놓는걸 듣는 것을 끝으로 벌 받는 건 끝났다. 말이야 심플하지만 몇 시간이고 벌 서고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하고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세하는 괴물인가. 서국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로 벌은 끝이군."

"그래."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걸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봐야 화만 더 날 거 같았다. 서국은 그렇게 툴툴거리며 걸어갔다.

"내 불찰로 수사가 많이 늦어졌군."

세하 쟤는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서국은 아직까지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세하에게 솔직하게 화가 났지만, 이제 더 이상 상관 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참자.

"이제는 다른 쪽에서 찾아 봐야겠다."

"아, 그래? 그럼 잘 해봐."

서국은 그런 의미에서 두말 않고 한마디로 쏘아 준 뒤에 교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세하는 이상하다는 듯 서국에게 말했다.

"너는 안 따라 오는 건가?"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런 세하에게 서국은 척 들어도 느껴질 정도로 싸늘하게 말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지금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어야 정상이건만, 세하는 그런 눈치가 전혀 없는 듯 계속 물어 보았다.

"이번만큼은 협력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한번은 해 준다 했잖아. 그건 이미 끝났고."

"이번 사건은 같이 협조해 준다는 말 아니었나."

"아냐."

"조금만 더 하면 해이트가 나올 거다. 조금만..."

"안 한다고 했잖아!"

급기야, 서국의 감정이 폭발해서 세하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세하는 하던 말을 저도 모르게 멈추고, 동시에 서국의 말에 압도되었는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리고 서국은 여태까지 쌓인 감정을 단숨에 쏟아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사람을 강제로 동원했으면서 뭐? 조금만 더? 처음부터 난 싫다고 했잖아! 애초에 말야, 뜬금없이 칼을 휘두른 게 누군데? 그래서 황당해서 그걸 따졌더니, 말도 안 되는 시 덥잖은 음모론 을 펼치지 않나, 그래 놓고 날 강제로 동원하고, 그래서 방금 전까지 억울하게 몇 시간이고 혼나고 있었는데, 사과는 못할망정, 조금만 더?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세하는 그렇게 따지는 서국의 말에도 대답 할 말이 없는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서국은 어쩐지 그런 얼굴을 보니 되려 더 화가 났다.

"애초에 말야. 그런 거 하는 요원이라면, 쓸데없이 국 통은 왜 벤 건데? 자기가 말했던 괴인의 특성도 재대로 모르고 있는 게 말이나 돼? 이 딴 장난 그만 하고, 그냥 반으로 돌아가. 무슨 놈의 수사는 수사야. 내가 건물 기어오르는 학생은 봤어도 괴인은 못 봤거든? 말해봐. 변명해 봐. 지금이라도 괴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면 내가 믿어줄게! 왜 말이 없어! 없으니까 그런 거잖아!"

서국은 그렇게까지 말하고 감정을 거진 다 쏟아 냈는지 숨을 몰아 쉬며 세하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적. 세하는 한참을 서국의 시선을 느낀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난 말야, 진지하게 음모론 을 믿는 애가 가장 싫어. 그러니까, 다시는 나한테 말 걸 생각 하지마. 이제 싫으니까."

서국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서 주저 없이 교실로 향했다. 반면에 세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는 서국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려다가 멈칫하고는 도로 내려 버렸다.

"............"

그리고, 세하는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거기에 가만히 있었다.

 

 

*     *     *

이래저래 일이 많았지만, 여 튼 정상궤도로 돌아와서 7교시가 끝났다. 이제 한 시간만 더 지나면 저녁밥이다. 점심도 못 먹고 여태까지 쫄쫄 굶은 서국으로서는 저녁이 그렇게 고대될 수가 없었다. 밥 생각에 수업에 집중이 안될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급식 특유의 저질 카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 이전에 화장실이나 갔다 와야지.

"읏차."

그는 몸을 일으켜서는 교실 문을 향해 가서는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동시에 문을 향해 뻗은 손이 있었다. 서국은 그 손의 주인을 보았다.

세하다.

"........"

서국은 냉정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표정의 차이가 거의 없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시선 처리가 능숙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벌 받은 뒤 복귀한 수업 시간에 서국이 집중할 수 없던 이유 중 하나도 종종 세하의 시선이 느껴지고, 게다가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알게 뭐냐 만, 왠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 증거로 세하는 지금도 왠지 서국이 앞에 있으니 멈칫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국은 그런 세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 앞의 정적. 주위 애들이 뭔 일 있나 구경할 만큼 노골적인 적대였다. 부담스러운 정적이 지나간다.

"얌마, 서국아? 길 막지마."

서국을 데리러 온 동훈이가 정적을 깼다. 동훈이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건지,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말하고는 서국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서국을 보고서도 태연히 히히거리며 세하를 보고는 말했다.

"미안. 헤헤. 얘 좀 데려갈게."

세하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동훈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서국을 끌고 갔다. 그리고 서국도 더 이상 세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말 없이 동훈을 따라갔다. 세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혼자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세하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서국에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말이야 이리 저리 말했지만 여 튼 좋아했었는데.... 이젠 나도 몰라. 서국은 동훈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렇게 툴툴거렸다.

"아... 정말! 오늘 풀리는 일이 없네 그냥!"

"...시끄럽다. 애인도 있는 놈이."

물론, 돌아오는 건 매정한 대꾸뿐. 진짜 걸리긴 잘못 걸렸다. 왜 하필이면 이 녀석한테 그런걸 걸려서. 아니.. 잘 생각해 보면 왜 키스까지 해가면서 위장한 거야? 이유가 없잖아? 서국은 무슨 생각인지 옥상의 교실로 올라가고 있는 동훈을 보면서 괜히 화를 담아서 대꾸해 줬다.

"애인 아니거든?"

"그럼 아무도 안 보는 데에서 찌이인하게 키스 하고 있는 사이가 애인이 아니면 뭔데?"

...읏. 확실히 그렇...긴 하지? 하지만 서국은 더 이상 세하와 연관되고 싶지도 않고, 거기다 저 말은 엄연한 오해였기 때문에 일단 반박하고 보기로 했다.

"그건.. 오해다!"

"무슨 오해라는 거냐?"

"그게.... 멋대로..."

"세하가 멋대로? 그런 변명을 믿을 거 같아?"

어떻게 변명을 해 보려고 해도 동훈은 완고했다. 하지만 역시 오해는 풀어야 했기에, 일단 옥상 교실까지 들어가서는 평소 앉던 책상 위에 앉아서는 동훈을 향해 말했다.

"차근 차근히 설명해 줄게. 거기서 들어."

"오냐."

동훈은 의외로 얌전하게 서서는 그를 보고 있었다. 뭐 다행이지. 서국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사실만을 말 해줄게. 거두절미하고, 밥줄 놓친 내가 여기 와서 툴툴거리고 있는데 세하가 왠지 여기로 와서는 내가 농담 한마디 했던 거 가지고 나를 보고 이상한 소리를 해 대는 거야."

"...세하가 왜 여기 왔길래?"

"내가 어떻게 아냐 그걸. 여 튼 해이트가 어쩌고 음모가 저쩌고 한참을 이야기 하더라고. 그러더니 바깥에서 네 기척이 나니까 갑자기 음모를 꾸미고 있는 애들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기척을 숨겨야 한답시고 갑자기 나를 벽에 몰아 붙이더라? 그래 놓고도 네가 들어 올 거 같으니 위장 전법인지 그 키, 키스를 해 버린 거야. 난 결백해!"

"그래서... 의도치 않게 당했다? 뭔가 터무니 없어 보인다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했길래?"

"그게.. 뭐랬더라? 세상에 해이트란 괴인이 있어서, 욕망의 달성을 방해하고, 그에서 발생된 부정적인 욕망을 흡수해서 세계를 지배한다...였나? 그랬어. 거 참 괴상한 이야기지?"

"그러게.. 되게 괴상한 이야기네."

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서국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 해주는 사람이 생겨서인지 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라도 동의해주는 사람이 생기면 자신감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말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학교의 급식에 숨어들어서 급식 받는걸 방해해서 매점 사용을 촉진 시키려는 해이트가 있다나? 웃기는 이야기야 정말."

"호오............"

"애가 예뻐서 좋아했는데... 솔직히 좀 실망이네. 역시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건가..."

서국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심 동훈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사람 까는 게 다 그렇다. 동의하는 사람 구하는 거지. 하지만, 동훈의 대답은 좀 달랐다.

"...그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응?"

예상 외의 대꾸에 놀란 서국이 잠시 멍해져 있는 사이, 동훈이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예컨대, 이런 거지."

"이게 무슨...악?!"

동훈은 냅다 서국을 밀쳐 버려서 서국을 넘어뜨렸다. 우당탕. 책상 위에 앉아있었던 지라 커다란 소리가 나며 넘어져 버렸다. 게다가 바닥에 머리도 박아 버렸다. 아프다.

"야 이게 뭐 하는 짓....."

넘어진 서국이 항의하려 했으나, 동훈은 품 속에서 꼭 악취미적으로 해골 풍으로 장식한, 원 위에 직사각형을 겹쳐놓은 것 같은 실루엣의 탁한 녹색 단말을 꺼냈다. 그 순간, 서국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실이 있었다.

우선, 어찌됐건 실제로 급식의 배급이 느려졌다. 배급을 느리게 하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일심동체 해서 슬로우 모션으로 급식을 받으면 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아래 층의 조리실 에서 급식의 보충이 재 때 올라오지 않는 것. 당연한 소리지만 후자가 편하다. 그렇다면, 조리실의 화력을 슬쩍 슬쩍 조종함으로써 비교적 간단하게 급식의 수급을 늦출 수 있겠지.

하지만 역시 너무 단숨에 팍 느려지면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럼 식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겠지. 하지만 괴인은 대개 눈에 띄고, 그런 게 창 밖에서 눈치를 보면 다들 경악할게 뻔하다. 하지만, 건물 타기가 취미인 애가 붙어 있다면? 물론 선생님들이야 꾸짖을 테지만 대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 선생들이 말려도 꾸짖어도 벽을 타던 친구 녀석이 요 며칠 새 밥 시간에만 보이질 않았던 게 기억났다. 이게 가리키는 사실은...!

"설마 너...!"

"하! 그 말대로!"

동훈은 기세 등등하게 단말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단말의 원형 액정에 불이 들어오고,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주르륵 스쳐 지나가더니 갑자기 음성이 들려왔다.

[Hate conspiracy activated.]

그리고 단말 밖까지 전자 문자들이 퍼져 나오더니 동훈을 감쌌다. 동훈을 감싸던 문자들은 일종의 빛이 되어 동훈의 새로운 실루엣을 보여주더니, 한 순간에 사라지고 동훈이 괴인이 되어 튀어 나왔다. 초록색의 파충류 인간. 전신이 파충류 특유의 피부로 덮여있고, 전반적으로 초록색인 몸뚱아리에는 약한 줄무늬가 있었다. 또한 머리 위에는 닭 벼슬 비슷한 게 달려 있었고, 등줄기에는 가시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래. 꼭 마치..

"카...멜레온 괴인 인가? 설마, 세하가 말했던 해이트?!"

[후후. 그래. 세하의 말을 듣는 게 좋았을 텐데.]

서국의 눈 앞에 해이트가 등장하자, 서국은 여태까지의 자신의 생각들이 모두 부정되는 것을 느끼며 부조리한 기분에 속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게 무슨 초현실적인 전개야! 그러니까... 세하의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그러니까... 괴인들이 세상에 퍼지고 있고 그들이 욕망의 달성을 방해 한다.. 같은 게 전부 사실이라고?! 서국은 이를 악물고는 일어나려 노력하며 동훈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는 건 맨날 망상이나 하던 사건들이 눈 앞에 등장했다는 거겠지. 괴인 에게 위기에 처하는 식의 망상은 제법 자주 했었다. 실전은 처음이지만...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동훈은 당장 아무 이야기나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왜 이런 짓을....."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모르니까 물어 보는 거잖아?"

[정말로 모르나? 실망이군.]

"모른다니까 왜 자꾸 물어! 거 모를 수도 있지 말 한번 되게 많네!"

[그럴 리가. 친구 부모님께서 뭘 하시는지도 모르냐!]

"....알게 뭐냐! 니네 부모님 직업에 관심 없어!"

[내 어머니께서 학교 매점을 운영하신다고! 이 정도는 좀 알아라!]

"웃기고 있네! 넌 그럼 우리 부모님 직업이 뭔지 아냐?"

[알게 뭐냐!]

...아무래도 시 덥잖은 소리를 과장해서 말하는 거 보니 진짜 동훈이가 맞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전혀 위안은 안 된다. 어쨌거나 지금 안 좋은 상황인건 변함이 없으니까. 되려 이런 시 덥잖은 놈한테 죽을 판이라는 게 화가 났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정확하겐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할 심산으로 서국은 말을 이어나갔다.

"피차일반이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말살해야지. 당연하잖아?]

그러나 동훈... 아니, 동훈이였던 카멜레온 괴물의 논리는 지극히 단순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저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희생되고 말 판이다.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한 서국은 이제 감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고 되는대로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말살?! 무슨 되도 않는 음모론 하나 들었는데 그게 우연히 맞아떨어져서 친구한테 말살 당한다고? 뭐야 그게! 그딴 게 어딨...?!"

[하.]

하지만 그런 말을 듣던 카멜레온 괴물이 내뱉은 웃음에 압박감을 느끼고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훈은 나지막하게, 하지만 굵은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라고 했나.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그는 한걸음 결코 우아하지 않은 괴인의 모습으로 짐짓 우아한 척 손짓을 하며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곤란하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이야, 친구라는걸 진지하게 믿고 있을 줄은 몰랐어. 세상은 어차피 다 혼자 사는 거야. 몰랐어? 친구 따윈 없어. 사람끼리도 여차하면 다 뒤통수 치고 사는데, 무슨 친구? 난 말이지, 네가 나보다 모자라기 때문에 같이 다닌 거야. 이미지 관리지. 순진하게 그런걸 다 믿고 있었나? 세상은 다 혼자 사는 거야! 멍청한 자식!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왜 그러나. 너무 무서워서 말이 안 나오나?]

카멜레온 괴인은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서국은 넘어진 채로 카멜레온 괴인을 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이 딴 놈에게 죽다니 내 인생도 참 서글프다..."

[무슨 소리냐!]

"거...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친구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는 건 잘 알겠는데, 우선 물어보자. 너 저번 모의고사 반에서 몇 등?"

[2....22등.]

"그리고 난 전교에서 22등이지. 참 우연의 일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자, 다시 말해봐. 네가 나랑 같이 다닌 이유가 뭐라고?"

녀석이 말하는 게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얘가 참 쓸데없는 데에 우월감 느끼고 있었네. 여태까지 경험에 따르면, 이 딴 곳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놈은 원래 열등감이 쩌는 놈들이었다. 설마 이 녀석이 열등감 느끼고 놀 줄은 몰랐네. 평소대로라면 상관하기도 싫어서 그대로 우월감을 느끼도록 내버려뒀을 테지만, 생명이 걸린 문제라서 열등감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진장 열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단 걸고 넘어지기로 했다.

[닥쳐라! 어차피 애들이 축구도 끼워주지 않을 정도로 비리비리한 놈이면서 허세 부려봐야 소용 없어!]

"아니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운동 신경이 후달리는 편 인건 인정하는데 말야, 내가 하려고 해도 안 끼워줬던 애들은 다 동아리 놈들이었다고. 내가 좀 무리하게 들이댄 거지."

[난 잘 받아 줬잖나? 그게...]

"넌 그 동아리 소속이잖아 밥팅아."

[다, 닥쳐라!]

"닥치라는 말 밖에 못하냐?"

[닥쳐, 닥쳐!]

"기가 차 죽겠네 이 새끼가. 고작 이정도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 드냐? 그딴 식으로 굴면...."

[닥치라고 했지!]

혓바닥이 날아든다. 서국은 재빨리 반응하려 했으나 카멜레온의 혓바닥의 속도는 장난이 아니다. 재대로 인지도 못하는 사이, 혓바닥이 날아들어서 어깨를 후려쳐 버렸다.

"윽!"

채찍을 맞은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 데미지를 받은 통에 상반신과 하반신의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서 도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없다만, 이렇게 넘어지면 도망치기가 힘들다. 게다가... 혓바닥에 쳐 맞으니까 기분 더러워.

[네 녀석 따위가 감히 나한테 함부러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안될 건 또 뭐가 있길래?"

[다.. 닥쳐! 셔틀이나 할거 같이 생겼으면서!]

"셔틀 따윈 해 본 기억도 없으니까 공갈은 그만둬. 그건 그렇고, 슬슬 우리 찾으러 사람 올 거 같은데 돌아가야 하지 않냐? 네 말마따나 허약한 놈 하나 처리하는데 천하의 안동훈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아, 진짜로 혓바닥이 길구나? 미안."

서국은 비위 맞춰줘 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간파한 뒤로는 주구장창 도발만 했다. 그리고 카멜레온 괴인은 유감스럽게도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격렬하게 혓바닥을 휘날리며 외쳤다.

[에...에잇! 죽어! 그냥 죽어 버려!]

"크으으...아악!"

그가 마구 혓바닥을 휘날리자, 그 앞에 있었던 서국은 인지하기도 힘든 속도로 날아드는 혓바닥에 자비심 없이 구타 당하기 시작했다. 마치 채찍을 마구 휘두르는걸 정면에서 맞고 있는듯한 고통.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에 서국은 본능적으로 얼굴만 가리고는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구타 당하고 있었다. 팡! 팡! 팡! 채찍을 휘두르는듯한 소리와 함께, 주변 지형지물, 그러니까 정리되어 있는 폐 책상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후우..]

카멜레온 괴인은 구타를 멈췄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려서는 쓰러져 있는 서국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윽... 큭! 하아... 하아.."

서국은 온몸에 달리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 상처는 제법 깊숙이까지 파고든 것도 있었다. 젠장. 아프잖아.

[후후.. 잘도 살아 있던 입도 드디어 다물어 졌군. 이제 ㄲ....]

"닥치고 있으시지..... 더럽게 혀나 써대는 인간이 말이 많군."

[역시... 네놈은 죽기 직전까지 입만 살아있을 놈이군. 그만 뒈져라.]

카멜레온 괴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에 널브러진 책상을 하나 들었다. 그가 들자, 갑자기 그 책상이 카멜레온의 등 마냥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 저고 빼곡하게 가시가 돋더니, 꼭 가시로 사람들을 찢어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이 되어갔다. 이거 맞으면 분명 골로 간다.

"제기랄..."

서국은 씹어먹을 듯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도망 치려고 해도, 맞는 와중에 무너졌던 책상이 발을 묶고 있다. 하지만 그걸 빼내기 전에 분명 저걸 맞겠지. 카멜레온 괴인은 서국 앞에서 가시 돋은 책상을 높이 들었다.

[이걸로 끝이다!]

묵직한 책상이 서국을 뭉개버릴 듯 날아든다. 서국은 눈을 꾹 감으며 양 팔로 얼굴을 본능적으로 감쌌다. 이대로 끝인 거야? 그 순간, 서국의 눈앞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 숙이고 있던 세하의 얼굴도 기억났다. 세하의 말을 들었으면 이리 허무하게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구차하게 빌어서 살아날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이 후회가 되고 세하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세하에게 미안해지고, 거기다 자신의 바보 같음에 눈물까지 나려 했다. 세하야... 미안...!

쿵! 공기까지 떨리는듯한 묵직한 타격 음이 들린다. 이제.. 죽는 건가.. 책상에 머리가 부서져서... 이렇게 죽기는 싫은.... 응? 서국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서국의 몸에는 전혀 충격이 전달되지 않았다. 응... 그럼 뭐지? 서국은 의아해하며 빼꼼이 실눈을 떠서 앞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공격을 대신 받고 쓰러지고 있는 세하가 있었다.

"크...하..."

세하의 입에서 그런 신음소리가 나오며, 세하의 몸이 서국의 몸 위에 힘 없이 쓰러져 간다. 낮에 세하가 밀착했을 때 났던 향기가 났다. 그제서야 서국은 눈앞에서 쓰러진 사람이 세하라는 실감이 났다. 서국은 저도 모르게 그런 세하를 부축해 줬다. 풀썩.

".....세....하야?"

서국은 멍하니 자신의 위에 쓰러진 세하를 보았다. 세하의 옆구리에는 교복이 무참하게 뜯어져 나가고, 범상치 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마치 굵은 가시에 의해 파인 것만 같은 상처. 내상이 심해 보였다. 세하는 얼굴을 살짝 들어 서국을 보며 말했다.

"괜....찮은가 보군... 다행이야.."

"왜.. 왜 날 지켜준 거야?! 난 너에게 심한 말까지 했는데!"

"처음...이니까..."

"뭐가.. 처음이라는 거야?"

"내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아... 따라준 건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날 믿어준 건...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어..."

"...그런...!"

서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은 한참을 욕을 해댔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건가. 매도하고, 계속 매몰차게 대했는데도...!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뭐하고 있었던 거야. 진실을 말해주고, 걱정해 주고 있던 세하를 매몰차게 매도나 하고..... 눈물이 나려 했다.

"미안... 미안해..!"

"네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하, 내 앞에서 신파극이나 찍고 있을 셈인가!]

하지만, 역시나 느긋하게 사과를 할 틈 따위 없었다. 카멜레온 괴인이 여전히 바로 뒤에 있었던 것이다. 서국과 세하는 서로를 꾹 안은 채로 카멜레온 괴인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책상을 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려 칠 기세. 세하는 그런 카멜레온 괴인을 보더니 이를 악물더니 슬쩍 자신의 가슴 아래에서 무언가를 서국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미안하다. 한가지만 더 부탁하지. 이런 상태로는.. 내가 싸울 수 없다. 부상당한 나 대신.. 싸워줄 수 있겠나?"

"으...응. 그런데.. 어떻게?"

"신호하면 일어나서 지금 내가 네게 준 단말의 위에 칩을 꽃은 다음 액정을 위에서 아래로 슬라이드 해라. 그거면 너에게 싸울 힘이 생길 거다."

"아...알았어."

이상한 설명이었지만, 서국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세하를 의심하느니 자신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서국은 단말을 슬쩍 보았다. 일견 해이트가 썼던 단말과 비슷한 단말이었다. 하지만, 악취미적인 장식이 없이 훨씬 매끄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탁한 녹색이었던 해이트의 단말과는 달리 맑은 적색이었다.

[자, 둘 다 죽어라!]

마침, 카멜레온 괴인이 공격을 하기 직전이었다. 세하는 이를 악물고는 몸을 돌리며 칼을 칼집째로 휘둘러서 괴인의 발목을 후려쳐 버렸다.

[크악?!]

세하는 서국에게서 몸을 최대한 띄웠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허리에 상처를 감싸서 서국에게 말했다.

"지금이다!"

"아, 응!"

서국은 재빨리 일어나 세하가 준 단말과 그 칩을 서로 꽂았다. 그러자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Ensio system enabled.]

음성이 울려 퍼진다. 해이트가 당황해서 그를 제지하려고 그의 오른손을 향해 혓바닥을 날렸다. 하지만 서국은 날아오는 그의 혓바닥을 보고 반사적으로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팡. 오른손이 혓바닥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크윽...!"

서국은 왼손에 전해지는 고통에 신음소리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오른손으로 둥근 액정을 슬라이드 했다. 액정에 프레임으로만 이루어진 검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해이트가 비웃듯이 말했다.

[의미 없는 발악이다! 관둬라!]

"의미 없지 않아. 이건 세하에 대한 내 속죄다!"

하지만, 서국은 해이트를 보며 고함을 지르듯이 반박했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는 단말을 꾹 쥐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의미 없지 않아. 왜냐면... 나는 여기서 끝날 리가 없거든!"

[또 그 놈의 말버릇!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고 말한 거 치고 거기서 안 끝난 적이 없으면서! 뭐가 안 끝난다는 거냐!]

"글쎄, 내가 실패한 것만 네가 봤을 뿐이겠지. 자, 간다!"

그리고 단말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얼굴 앞까지 당기고는 버튼을 눌렀다.

[Sword refuter chip Activated.]

버튼을 누르자 마자, 단말에서 빛의 줄기가 펼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의 줄기는 서국의 주위를 크게 돌기 시작했다. 서국은 예상도 하지 못한 그 모습에 경악하고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서국은 순간 당황했지만, 단말에서 나온 빛은 한 바퀴 돌아서 그를 감쌌다. 그리고 전신을 감싸더니, 그대로 전신에서 갑옷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치, 현대의 기술로 만들어낸 기사의 갑옷과 같은 모습. 은백의 갑옷은 가슴팍부터 시작하는 번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안에 붉은 색으로 강렬한 강조를 주고 있었다. 그 형상은 마치 붉은 번개 그 자체를 형상화 시킨 듯 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단말은 어느 샌가 단말을 중심으로 형성된 칼이 되어 있었다.

"이건...?"

서국은 자신에게 장착된 갑주를 둘러보며 놀라서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별안간 갑주가 자신의 몸에 장착 된다면 놀라리라. 어리둥절해 하는 서국의 뒤에서 세하가 설명해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 해이트전용 장착 병기 프로토타입 '엔시오'다."

세하는 어느 샌가 뒤로 빠져서 그를 보고 있었다. 세하는 자신의 상처를 꾹 누르며 벽에 기대고 있었다. 서국은 생소한 이름을 들은 터라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고개를 돌려 세하에게 반문했다.

"엔...시오?"

"그래. 해이트를 섬멸하기 위해 조직에서 개발한 병기. 네가 그 병기를 이용해 싸워줬으면 한다. 나는... 지금 싸울 수 없으니까 말이지. 미안하군."

그 말을 들은 서국은 잠시 자신의 몸에 둘러져 있는 갑옷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싸우기 위한 갑옷?

"이게... 내가 널 대신해서 싸울 수 있는 힘?"

"그래. 지금은... 너의 힘이군."

서국은 믿기지 않는지 재차 세하에게 물어 보았다. 그리고 세하의 대답을 듣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로 칼을 꾹 잡으며 외쳤다.

"정말.... 처음부터 이거 보여줬으면 내가 믿었을 텐데!"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이런걸 진작에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그대로 섞여 있는 한마디였다. 서국은 고무된 목소리로 해이트를 향해 외쳤다.

"자, 너의 음모, 여기서 끝내주지!"

[헹. 그런다고 비실비실했던 네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나!]

해이트는 그런 서국을 노려보면서 외쳤다. 하지만 서국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서국은 양손으로 검을 쥐고 해이트를 향해 겨누면서 외쳤다.

"글쎄...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그래? 그럼 죽어라!]

해이트가 혓바닥을 채찍처럼 날려서 서국의 머리를 노렸다. 서국, 아니 엔시오는 칼을 내림과 동시에 자세를 낮추면서 왼쪽 대각선으로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그리고 오른발로 다시 스텝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 해이트에게 달려 들었다. 단숨에 바짝 접근해서 해이트가 그에게 혓바닥을 날릴 수 없게 되자, 해이트는 당황하고 그에게 주먹을 날리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방이 싸우기엔 좁았던 지라 곧장 벽에 막혀 버렸다. 서국은 몸이 가벼워 진걸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만큼 맘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힘이 넘쳐 흘렀다. 평소라면 동훈의 반사신경을 상회하는 속도를 낼 수도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교란까지 섞어가면서 순식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서국은 자신감과 함께 차오르는 힘을 담에 당당하게 눈앞의 해이트를 향해 검을 위로 베었다.

"아자앗!"

재대로 빠지지 못한 해이트는 당황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슴팍을 베여 버렸다. 그는 가슴팍이 베이는걸 느끼면서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벽에 부딪혀서 굉음과 함께 벽에 균열을 만들어 버렸다. 갈비뼈 부근에 충격이 온다.

[큭.... 젠장,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맞은 적이 없었는데!]

해이트는 베이고 날아간 자신의 고통을 곱씹으며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또 신체를 숙이고 달려오는 서국을 향해 본능적으로 무릎 차기를 날려 버렸다. 동시에 서국도 검을 휘둘렀다. 검과 무릎이 부딪힌다. 서국의 검에서도 순간적으로 손이 저릿해지는 충격이 왔지만 그뿐. 검과 무릎의 대결은 검의 승리였다. 엔시오의 검, 소드 리퓨터가 해이트의 무릎을 갈라버릴 듯 아래로 베어 버렸다. 해이트의 무릎이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웠다. 해이트의 무릎을 기점으로 세로로 긴 상처가 났던 것이다.

[흐악!]

해이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다리를 부여잡았다. 서국은 연이은 성공적인 공격에 고무되어서 그 자리에 서서는 검을 양손으로 높게 들었다. 그리고 힘을 모아서 검을 해이트에게 내려 치려고 했다.

"하아앗!"

서국이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해이트가 본능적으로 서국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 들었다. 휭. 서국이 내려친 검이 호를 그리며 허공을 가른다.

"..아?"

[이 새끼... 잘 걸렸다!]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 해이트는 서국의 다리를 양손으로 감싸듯이 잡았다. 서국은 그제서야 자신의 공격이 지나치게 빈틈이 많았음을 눈치챘다. 해이트가 잡은 다리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억지로 빼내려 해도 늪에 빠진 다리처럼 빠지질 않았다. 순간 해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국은 그 눈빛을 보자마자 뭘 하려는 건지 감이 오기 시작해서 등골이 서늘해 졌다.

[죽어라...!]

해이트는 서국의 다리를 잡고 돌렸다. 서국은 자신 몸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획 돌더니,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등에 벽이 부딪히는걸 느꼈다. 해이트가 서국을 벽에다 처박아 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균열이 생기고 있던 벽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참하게 부서져 나가 버렸다. 벽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과 함께, 벽에 처박힌 서국은 허무하게 벽을 굴렀다. 서국은 가슴팍에 왔던 충격에 의해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큭.... 하아... 하아...!"

서국은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끼며 명치 부근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 했다. 숨쉬기가 괴로웠다. 움직여야 하는데...! 해이트는 서국이 그렇게 무력해 져 있는 틈을 타 주저 않고 서국을 걷어 차 버렸다. 벽의 잔해에 반쯤 파묻혀 있던 서국은 튕겨져 나가 교실 밖에 있는 옥상으로 날아가서는 데굴데굴 굴러 버렸다. 하지만 걷어 차인 덕분에 숨이 막히는걸 극복하고 긴장을 할 수 있었다. 되려 몸에 힘이 들어온다. 서국은 옥상에서 구르던 중에 몸을 일으켜 굴러가는 데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해이트는 이쪽으로 곧장 돌진하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서국은 돌진해 오는 해이트를 보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리고 피하지 않고 자신도 칼을 아래로 내리고 해이트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팡. 바닥을 약간 파일 정도로 밟으면서 해이트에게 달려들었다. 해이트가 먼저 가시투성이의 강화된 주먹을 날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국이 칼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금속끼리 격렬하게 부딪히는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로 부딪힌 반동으로 둘 다 뒤로 멀리 튕겨 나가 버렸다. 서국은 바닥을 긁어버리듯이 바닥에 미끄러져서 옥상에 큰 흔적을 남겨 버렸고, 해이트는 공중에 떠서는 하늘 높이 날아서 한 바퀴 돌며 착지해 버렸다. 서국은 재빨리 태세를 정비하고 해이트를 보았다.

"후우...후우..."

서국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무래도 재대로 싸워 본 적이 없는지라 호흡을 재대로 조절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국은 원래 체력적으로 약간...이 아니라 제법 안 좋은 애였던 터라 스테미너 적으로 문제가 제법 있었다. 지금은 잠깐 호흡이 흐트러진 정도지만 장기전으로 끌면 서국이 불리하다. 그리고, 그걸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역시 허세 부려 봐야 서국은 서국이군. 벌써 지친 거냐, 약해 빠진 놈.]

"후우... 숨소리 정도는 너도 내는 거 같은데?"

[그.. 그건 네놈이겠지!]

"긴말 말고 덤벼. 혓바닥 길어지니 말도 길어지냐?"

[...윽!]

하지만 처음부터 알다시피, 심리전으로는 서국이 유리하다. 그렇다 보니 어설프게 심리전을 걸려 했던 해이트는 되려 역으로 밀리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해이트는 밀리기 시작하자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과거를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대치상태가 계속 되는 동안 해이트는 속으로 이것 저것 회상해 보았다. 집에서 있던 일들, 학교에서 있던 일들. 그리고.......

[...하아. 이렇게 서로 매도하는 건 관두도록 하자.]

".....?"

해이트는 갑자기 회상 중에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어조를 바꿔서 독기를 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서는 서국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히, 한참 대치상태에 있던 서국은 그가 이렇게 나오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해이트는 그에게 갑자기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있잖아, 친구 따윈 장난이었느니 어쩌니 해도 나는 너를 처리하고 싶진 않아. 같이 다니는 게 나름대로 재밌기도 했고 말야.]

"동훈...아?"

[그러니까 말야.. 이런 싸움은 관두자. 나도 그만 둘게.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열 내고 있던 거 같아. 너랑 싸우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

해이트, 아니 동훈이 서국에게 허심탄회하게 늘어놓는 말에 서국은 그만 할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러지?

"어... 그러니까... 나랑 싸우는 게 가슴 아팠다고?"

[응. 너무 심하게 굴었던 거 같아.]

"...."

[이제, 싸움은 그만하자. 수업 빼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제 같이 변신 풀고 내려가는 거야. 내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줄게.]

서국은 멍하니 동훈을 보고 있었다. 헬멧 때문에 표정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동훈으로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역시 알 도리가 없었다. 서국은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하고 있더니, 나지막하게 동훈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그만 두는 거지?"

[응! 내 말 못 믿어?]

"무슨 아이스크림 사줄 거야?"

[드릴 바.]

"에이, 화해 하는 김인데 좀 통 크게 쏴라. 기가 드릴 바, 어때?"

[...좋아.]

괴인과 히어로의 대화였지만, 내용은 영락없는 고등학생들의 대화였다. 그리고 친구들의 대화였다. 완전히 화해하기로 합의를 본 시점이라고 봐도 되겠지. 그들은 석양 비치는 옥상에서 서로를 한동안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동훈이 먼저 오른 손을 앞으로 뻗어서 악수하자는 제스처를 해 보이며 서국에게 걸어갔다. 서국도 칼을 조용히 옥상에 꽃아 놓고 오른 손을 내밀고 동훈에게 걸어갔다. 그렇게 둘은 노을 아래서 악수를 하기 위해 가까워져 왔다. 서로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 지자, 서로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화해 하는 걸까.

하지만 그 순간, 동훈은 왼손으로 서국의 손목을 꾹 잡았다. 동훈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띄워졌다.

[내 함정에 걸렸구나!]

그는 그렇게 외치면서 서국의 오른 손목을 꾹 쥐고는 자신의 오른팔을 뒤로 젖혀서 주먹 날릴 준비를 했다. 그의 오른손에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해! 그는 그렇게 환희 하면서 주먹을 서국의 머리에 날렸...

빠악! 그 순간 갑자기 동훈의 앞이 캄캄하고 아득해졌다.

[커...헉!?]

"다 읽혔다. 밥팅아."

동훈이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걷어차는 발이 있었다. 서국이 되려 자신의 잡힌 손을 중심으로 삼아 점프해서 동훈에게 양 발을 모아 하이킥을 날렸던 것이다. 동훈은 한껏 몸을 젖힌 상태에서 하이킥을 맞아서 순간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고 중심을 잃고는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서국은 거구가 쓰러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넘어지는 순간에 동훈의 왼팔에 모음발로 니킥을 날려 버렸다.

"이건... 세하의 복수다!"

[크아아아악!?]

심각한 고통에 동훈은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팔에 힘이 빠져서 서국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쳐버렸다. 서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점프해 단숨에 꽃아 놓은 칼이 있는 쪽까지 뒤로 빠졌다. 그리고 칼을 가볍게 뽑고는 어깨에 살짝 걸치면서 정말로 황당하다는 듯이 동훈, 아니 해이트에게 말했다.

"뭐랄까나.... 그렇게 뻔한 함정을 깔아놓고 당당해 할 줄은 몰랐다?"

[어... 어떻게 안거냐!]

"간단해. 싸우기 싫었으면 너부터 변신을 풀었겠지. 네가 변신 안 하면 내가 싸울 이유도 없으니까."

[겨.. 겨우 그런 넘겨짚기로?!]

"그리고.... 잘못 엇나가고 있는 애는 큰 코 다치기 전까지는 자기가 맞는 줄 알더라고. 싸우다가 갑자기 반성할 리가 없다는 거지. 특히 너 같은 인간은."

당황해 하고 있는 해이트에게, 서국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해 주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숨.

"뭐 물론, 나도 그렇고 말이지. 그래서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세하 대신 싸우고 있는 거 아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자책하는듯한 말을 하고는 자세를 바꿨다. 재대로 싸울 태세. 해이트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럼과 동시에 서국은 말투도 냉정해 져서는 말했다.

"자, 이제 끝을 보자. 네 말대로 학교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네가 잘못 나가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게."

[크으...]

해이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절망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왼 팔이 확실히 아작 나 버렸다. 이대로는 싸워봐야 별로 승산이 없다. 팔 하나를 못쓰면 그만큼 균형이 안 맞기 때문에 싸우기가 굉장히 힘들다. 이대로 싸우면 아무리 상대가 서국이라 해도 재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해이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끝인가? 아냐...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 있을 거 같나! 흐아아아아아!]

해이트가 그렇게 외치더니만 옥상 한중간에서 갑자기 탁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연기가 퍼져나가더니 학교 전역을 감쌌다. 그리고 학교 전체가 연기에 휩싸임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 어? 이거 뭐야. 최후의 발악? 이러면 안 되는데?! 서국은 여유롭게 끝내려 했다가 갑자기 복병을 만난 기분이 되어 당황했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이.. 이런 건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한세하! 이거 무슨 일이야?!"

"크... 큰일이다! 해이트가 현실 개변을 시작했어! 해이트 상태일 때는 어지간해서는 현실 개변을 안 하는데!"

"현실 개변? 그러니까 이 녀석의 경우에는.. 급식이 나도 모르는 새에 뭔가 달라지는 건가?"

"그래!"

잘 생각해 보면 해이트가 현실 개변을 쓸 것을 서국이 예상을 하고 있었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흡수한 욕망은 힘이 되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킴으로써 세상에 재앙을 일으키지.'

낮에 들었던 세하의 말이 새삼 기억이 났다. 욕망을 실현 시키는 괴인.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이 현실 개변이야말로 해이트의 본질. 최후의 발악이라는 거겠지. 그 일례로, 안개가 퍼져 나가면서 매점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 뭐야. 그럼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잖아! 빨리 막아야 해! 서국은 재빨리 상황 파악을 끝내고는 세하에게 급하게 물어봤다.

"한.. 한세하! 이거 필살기 어떻게 써!"

"필...살기?"

"이럴 때 한번에 끝내 버릴 수 있는 기술 말이야!"

"..아, 그거 말인가! 검 중심에 있는 단말에 꽂혀 있는 칩을 뽑아서 검 맨 밑에 꽃아. 그리고 단말의 액정에 떠올라 있는 문양을 눌러라!"

"알았어!"

서국은 주저하지 않고 칼을 들고 칩을 뽑아서 맨 밑에 있는 단자에 꽂았다. 그러자, 단말에 떠올라 있는 문양이 검 문양에서 처음 보는 마법 기호 같은 문양으로 변했다.

"그리고..."

서국은 그 문양은 주저하지 않고 눌렀다.

[Final Refutation!]

단말에서 힘찬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에 번개와도 같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검신 전체에 감도는 뇌신의 번개와도 같은 기운. 좋아. 자.. 간다!

"허무하고 헛된 음모는.... 이제 끝이다!"

서국은 힘차게 땅을 밟아 돌진해서 제자리에 서서 현실 개변의 안개를 뿌리고 있는 해이트에게 향했다. 그리고, 전신에 번개가 감도나 싶더니, 그 전신이 하나의 번개와도 같은 모습이 되어 해이트에게 닥쳤다.

[이, 이대로 끝날 수 없어...!]

"하이야아아아압!"

쿵! 벤다기 보다는 한번에 날려버린다는 표현이 더 가까운 공격이 해이트에게 작렬했다. 서국은 해이트의 몸에 강력한 공격을 날리고 그 뒤까지 날아가서 착지했다. 해이트의 몸에는 깊은 검흔이 남고, 전신에 전기가 흘렀다. 해이트는 몸부림치며 격렬하게 괴로워하더니 몸의 전신이 디지털적으로 분해되는듯한 모습이 지나갔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아아!]

콰아앙. 몸이 격렬하게 폭발해 버렸다. 폭발 속에서 해이트가 하늘로 붕 뜨나 싶더니, 해이트는 원래의 모습인 동훈이로 돌아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품 안에서 해이트 변신 단말이 튀어 나와서는 동훈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팡- 하고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후우... 이제... 사건 해결?"

서국은 손을 털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단말이 박살 났으니, 설령 아직도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또 달려들진 않겠지. 서국은 그런 생각으로 알게 모르게 안심하며 검에서 칩을 뽑았다. 피유웅. 한참 가동되던 기계를 끈 것 같은 소리가 나며 검이 전뇌공간으로 분해되듯 사라지고 칩과 단말만 남았다. 그리고 그 직후에 서국을 감싸고 있던 엔시오의 갑주도 검과 동일하게 사라져 버렸다. 서국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서 동훈과 눈을 맞췄다.

"젠장... 젠장!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내 세상이 왔을 텐데! 왜 발목이 잡힌 거지!"

동훈은 이를 갈면서 분한지 바닥을 주먹으로 치고 있었다. 쿵. 쿵. 서국은 한심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말했다.

"글쎄. 그런 거 가지고 요행을 바래봐야 그거로 이룬 모습이 진짜 원하는 네 모습은 아닐 거야."

"그게...무슨..."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 좋은 이야기지. 하지만 말야,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닌 자신의 모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남 탓으로 돌려봐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남의 불행을 조장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이란, 결국 지금의 자신에게 책임을 질 줄도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 아닐까?"

"네 녀석도... 더 좋은 상황을 꿈꾸고 있지 않나!"

동훈은 그렇게 말하며 이를 갈면서 서국을 노려 봤다.

"아아. 그렇지. 나도 지금의 내가 싫어.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고 오는 복 같은걸 진지하게 바라지는 않아."

"그런 주제에 맨날 '여기서 끝날 리가 없는데' 라면서 불만만 말하고 있나? 한심해 죽겠군."

"그래. 한심해 해도 돼. 그 말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면 한심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말이지, 그 말은 자기 암시 같은 거야.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바꿀 방법을 생각해 내라. 이런 거지. 다른 무언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 재대로 하는 게 거의 없던 나지만, 이 한가지만큼은 성실하게 지켜 왔다고 자부 중이야. 그래서 내가 진지하게 음모론 을 떠드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거고. 아, 아니다. 이젠 음모론 을 현실로 만드는 괴인이 있으니까 해이트가 가장 싫다고 해야겠네. 해이트가 가장 싫다라. 뭔가 말이 웃긴걸."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동훈은 멍하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서국을 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라서 생소한 걸까. 아니면 허세라고 생각하는 걸까. 서국으로서는 동훈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었다. 동훈은 짐짓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날리며 대꾸했다.

"헹... 그럼 얼른 꺼져라. 난 네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상이니."

"그러지 뭐."

서국은 두말 앉고 일어났다.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해 놓고 가볍게 일어나자, 동훈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서국을 올려 보았다. 이러고 말 거면 왜 말을 그렇게 길게 한 거야? 서국은 주저 않고 걸어가더니, 짐짓 이제 생각났다는 듯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동훈을 보고 말했다.

"혹시 너, 세하를 잊은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당연히 심문을 해야지. 고문도 할지도 모르고. 나는 그걸 위해서 비켜주는 거야. 옛 우정을 생각해서 도는 안 넘게 지켜 봐 줄 생각이었는데... 뭐, 네가 필요 없다니 난 갈게. 자, 세하야. 바톤 터치."

서국은 그렇게 말하며 세하를 힐끔 보고는 무너진 벽 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동훈을 보고 있는 세하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세하 의외로 감정이 풍부하더라. 자기 해코지한 사람에게는 안 좋은 감정 팍팍 가지고 있을걸?"

"...무슨 소리냐."

한번 죽어봐라. 서국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뒤 돌아 보면서 대답해 줬다.

"그러니까... 심문 중에 너 고생 좀 할 거라고."

스릉. 그 타이밍에 맞춰서 세하가 칼을 슬쩍 뽑아 들었다. 안 그래도 매섭게 쏘아보고 있는데 타이밍 맞춰 칼까지 뽑으니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동훈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좀 퉁퉁 부어 있는데 표정까지 굳으니 뭔가 안쓰러웠다.

"자.... 잠깐. 진짜로 칼로 뭔가 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 뭐 어때서?"

"그... 그런 건 너무하지 않..."

"너는 세하 부상 입혔거든? 지가 해코지한 건 생각 안 하지?"

"어..."

동훈은 할말이 사라져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얼굴은 창백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꼭 화장실 가고 싶은 표정이군 그래. 서국은 한대 더 때려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하고 동훈에게 가는 세하와 교대를 하고 잔해를 넘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인 시점에서 기정 사실이 된 거였지만 이건 구멍이 커도 너무 크다. 이거 수리비 많이 들 거 같은데... 뭐, 세하가 들어가 있다는 조직이 알아서 해 주겠지. 조직이 하는 일이 다 그런 거니까.

"자... 잠깐 서국아! 이거 안 말려 줄 거야? 친구잖아! 친구가 죽을 판인데 쿨하게 넘기기냐?! 살려줘요! 악! 악! 다신 안 까불게! 강서국님!"

서국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동훈은 다가오는 세하를 보고 눈물 콧물 질질 짜고 있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절하게 서국을 부르고 있었다. 피식. 서국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이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게다가 사람은 한번 크게 고생 해 봐야 정신차린다는 내 신조상 쟤는 마저 고생 해 봐야 해. 자... 일단 내 교실로 돌아가기로 할까. 서국은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동훈이의 비명을 뒤로하고 교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살려줘-!!"

 

 

*     *     *

"다 끝났어?"

옥상의 교실에서 나오던 세하는, 교실 문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국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세하에게 말을 걸었다. 세하는 뭔가 후련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다 끝났다."

음. 벽 뒤에서 듣기로 뭔가 맞았다간 남자의 존엄성이 파괴 되는 부위까지 후려쳐 가면서 심문한 거 같은데.. 그리고 지금 눈치를 보면 아무래도 기절한 거 같고. 음........ 알게 뭐냐.

"아, 근데 너 부상당했잖아. 그렇게 움직여도 돼?"

"이 정도는 괜찮다. 너야말로 괜찮나? 친구하고 싸우는 건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닐 거 같은데.."

"괜찮아. 잘못 엇나가고 있으면 친구고 뭐고 없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서 고쳐 줘야지. 아니, 친구니까 고쳐 줘야지. 뭐, 아직도 쟤랑 친구인지는 미묘한 문제지만... 하여간에 말야."

"그런가."

"그런 거야. 뭐, 내 개인적인 신조니까 이해하기 힘들 거 같지만."

"그렇군. 잘 알았다. 그리고...."

세하는 서국의 말을 대답하고는 서국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국이 놀랄 만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마워. 부상 당한 나 대신 잘 싸워 줬어."

"....!"

세하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몸동작을 하며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이다. 양 손을 뒤에서 깍지 끼고는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숙이고는 빤히 서국을 올려다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여태까지 전까지 세하가 보여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말투도 완전히 달랐다. 사근사근한 귀여운 말투였다. 듣는 것 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세하...야?"

"나도 너에게 미안한 짓 많이 했는데... 너 없으면 나도 큰일이 났을 거야. 해이트를 뒤 쫓는 요원으로서가 아니라, 한세하로서 감사할게. 고마워."

"어... 음.. 그럼 여태까지의 말투는..."

"일하고 사생활은 구분 해야지. 안 그래?"

세하의 그런 모습은 여타 다른 애들하고 다를 게 없는 여자애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의 딱딱한 모습은 전부 연기였던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세하가 진심을 보여주고 있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해 줘야겠지. 서국은 약간 머쓱한 기분은 느끼며 뺨을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어...음... 고마워 할거 없어. 내가 너의 진심을 안 믿어줬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헤헷. 그건 괜찮아. 그리고... 네가 해이트랑 싸우면서 나에 대해 했던 말... 그거 좀... 큥 했을지도."

세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국을 빤히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큥 이라고 말하면서 가슴팍을 콩. 하고 두드려 보이고는 살짝 뺨을 붉혔다. 포옹. 서국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솟아오르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 느껴졌다. 달린 것도 아닌데 가슴이 별안간 뛰었다. 이.. 이 기분 뭐지? 뭔가.. 세하가 귀여워서... 아니, 그냥 귀여운 거하고는 또 다른데...!

"응? 왜 그래?"

세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서국을 보았다. 으.. 으으으... 뭔가.. 세하를 보고 있자니 쉬지 않고 가슴이 뛰었다. 숨을 고르자.. 그래. 소수를 세는 거야! 2, 3, 5... 후우....

"아... 아. 아냐 아냐. 별거 아냐."

"??"

서국은 세하에게 어설프게나마 해명을 했다. 세하는 아직도 의문이라는 표정이었지만, 서국은 그런 자신의 기분을 감추기 위해 짐짓 과장된 손짓을 하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얼른 내려가자. 넌 얼른 양호실이라도 가 봐야지."

"아, 그렇지.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지?"

서국은 고개를 돌려서 세하를 보았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서국. 강서국이야."

"서국... 이상한 이름."

"뭐, 내 이름이 좀 이상하긴 해."

그렇게 서국과 세하는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세하는 남들도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그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서국이 봤던 건 거짓이 아니었기에 서국은 새하를 양호실에 바래다 주고 수업에 돌아가서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괜히 계속 그때 생각이 나서 피식 피식 거렸다.

물론, 그러다가 분노한 선생님의 분필 던지기에 맞아 떨어져 나가 버린 건 덤이다.

 

 

*     *     *

그리고 그날 밤,

"...어... 가져와 버렸네.... 변신 단말...."

서국이 깜빡 하고 엔시오 변신 단말을 가져와 버렸다는 걸 집에 와서야 깨닫고는 꺼내 보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계속 세하의 미소만 생각하고 헤헤거린 결과가 이거다. 정신 좀 차릴걸. 그나저나.. 이거 중요한 거일 텐데. 세하 얘... 겉보기 보다 얼빵한 거 아닐까? 이거 돌려 달란 말을 왜 안 해?

"아.. 정말... 내일 돌려줘야지."

서국은 그렇게 툴툴거렸다. 그런데... 저거 돌려주면 이제 세하와의 접점은 없어지는 거네. 왠지 아쉬운걸. 그렇다고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역시 좀 아쉽지만 내일 돌려줘야지. 서국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가방에 단말을 집어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단말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진동이 일어났다. 우우웅.

"...엉?!"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잘못 눌러서 불이 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근데 이거 지금 칩도 안 꽂았는데 하는 생각들이 스트레이트로 서국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건드렸나 하고 여기저기 뜯어 봤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잘못 건드린 부분 따위는 없었다. 그럼... 무슨 문제지?

[아. 아. 한세하. 한세하. 대답해라.]

단말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리는 말투를 보니 이건 아무래도 통화나 무전인 것 같다. 안 그래도 서국이 이제야 정신 차리고 단말의 액정을 보니 통신 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고. 하지만 단말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응답 안 하는 것이 어지간히 답답한지 서국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재차 말했다.

[한세하. 대답해라. 한세하!]

"아.... 저..."

서국은 일단 말은 해둬야 하겠기에 단말에 대고 해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나 다를까 세하가 아닌 이상한 남자애 목소리가 들리니 당황한 목소리가 되었다.

[이게 무슨?! 자, 자네는 누군가!]

"강...서국이라고 하는데요.."

[이 단말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음... 믿어 주시려나 모르겠는데... 한세하가 부상을 당해서 부득이하게 제가 이 단말을 써서 해이트와 싸우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돌려주는 것을 깜빡 했네요."

[뭐?!]

얼굴도 보이지 않았건만, 목소리만 들어도 당혹감이 팍팍 느껴지고 있었다.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서국은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내일 재대로 주인에게 돌려 줄게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지금 출동해야 한단 말이다!]

"...네?"

서국은 그 말에 벙 찐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지금... 뭐라고?! 당장 출동해야 한다고?

"해이트는 사람 사이에 깃들어서 몰래 음모를 꾸미는 거 아니었어요?"

[대놓고 활동하는 놈이 있으니까 이러지! 안되겠다. 강서국이라 했나? 자네가 대신 출동해 주게!]

"저는 조직원이 아닌데요?!"

[그럼 지금부터 명예 조직원으로 임명하지! 당장 출동해서 세하와 합류해 해이트를 뒤쫓아라!!]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그 조직 순 가라네! 게다가 전 세하가 어딨는지도 모르는데! 지금부터 찾아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어."

서국이 한창 남자랑 말싸움을 하는데, 갑자기 세하의 목소리가 창 밖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의 유리가 깨져 나가며 밖에서 세하가 들어왔다. 세하는 예의 딱딱한 표정으로 서국을 바라보았다.

"세, 세하야?! 어떻게 들어온 거야?!"

"잊은 게 있어서 너희 집 저택 안뜰에서 죽 너를 관찰하고 있었다. 걱정 마라. 샤워 하기 직전에 야한 영상 봤다고는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

"그거까지 다 보고 있었냐?!"

"네 취향도 나만 알고 있을 테니 문제 없다."

"문제 많아!"

"자, 출동하자. 이러다가 해이트를 놓칠지도 모른다."

세하는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서국의 글래스 하트에 크리티컬 공격을 날려대더니 멋대로 서국의 손목을 잡았다. 서국은 머릿속이 복잡해 지기 시작했다. 비록 부상 당한 것 치고는 쌩쌩한 것 같지만 세하는 엄연히 부상자다. 그런 애가 또 해이트랑 맨 몸으로 마주친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하지만 더 이상 도와줄 이유 같은 건 없는데... 음... 어...에이 씨, 몰라!

"갈게, 가면 되잖아!"

"그런가? 고맙다."

"그러니까 지금 나갈 테니 대문 밖에서 기다려! 다음부턴 창문으로 들어오지 말고! 그리고, 저 창문 값, 배상해 주기다! 그, 그리고!"

"그리고?"

"그....어... 아... 지금은 일 하는 중이니까 그런 모습 보여준다 해도, 일 끝나면 원래 모습으로 대해줘. 아, 아, 알았지?"

서국은 그 말만 남기고는 노골적으로 얼굴 빨개져서는 후다닥 방을 나섰다. 나서는 순간 서국의 눈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세하가 보였던 거 같지만, 차마 그 모습을 보고 있기 부끄러워서 서국은 곧장 문을 닫고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달려 나오는 서국을 보고 당황하셨지만, 서국은 그런걸 신경 쓰지 않고 바로 현관에 나가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서국아.. 어디 나가니?"

"급한 일이 있어요!"

"무슨 급한 일인데 그렇게 실실 웃으면서 나가니?"

"..에?"

서국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입가에 손을 대어 봤다. 분명히 웃고 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당황하고 있던 서국은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신발을 신고, 현관 문을 열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좋아하는 애 만나러 가요!"

서국은 그렇게 말하고 문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뒤로, 서국은 정식으로 엔시오가 되어서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음모들과 싸우게 되지만, 그건 이것과 조금은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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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산지

October 15, 2011
*.250.181.19

히어로물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처음 봤지만 매우 읽기 편하고 재밌네요. 처음에는 쿨한 성격에 여자 히로인 같았지만, 중후반에 나오는 귀엽게 돌변하는 부분이 좋네요. 하지만 좀 더 초반인만큼 주인공과 이렇고 저런 시츄에이션이 있으면 슬슬 미소지으면서 더욱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도 조금만 더 개성을 넣어줘도 될 거 같아요. 점점 히어로로서 각성해가지만 언제나 반(反) 음모론적인 시니컬한 성격의 모순된 히어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전투 묘사할 때 조금 뚝뚝 끊어지는 감이 있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히어로물+라이트노벨이 적절히 자~알 섞인 느낌이라 매우 재밌게 봤습니다
profile

lyul

November 06, 2011
*.78.176.147

잘 봤습니다. 쉽고 재밌네요. 전개도 좋고. 가끔씩 너무 무리한 패러디를 날리려는 노력은 약간 줄여도 될듯 합니다.
profile

투톤

November 15, 2011
*.250.181.84

히어로물을 자주 보는 사람으로서 약간은 기성 레퍼토리를 따른 것 같아 아쉽습니다만 히어로물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쓰인 점이 맘에 듭니다. 주인공의 개성을 좀 더 살렸으면 하고 윗분 말씀대로 무리한 패러디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니아로서도 일반 경소설 독자로서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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