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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by 선작21 posted Jul 05, 2017 (21시 38분 49초) Replies 1 Letters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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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말해두겠는데, 나는 게임에서 져 본 적이 없어."


말을 옮겨 테이블에 놓는다. 건너편의 의자에서 들리는 흥, 하는 짧은 콧소리. 너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 주사위를 굴린다. 잘그락잘그락. 힘없이 굴러가는 보라색 20면체. 구르고 구르다 끝내 멈춰선 주사위의 정면에 새겨진 숫자, 20.


크리티컬. 곧 들려올 너의 비명에 나는 미소를 짓는다.


"이, 이,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무참히 쓰러져 넘어가는 너의 말에, 덧없이 습기에 먹혀가는 너의 목소리에, 가엾게 떨어지는 너의 고개에 짓는 나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겠어. 20인데. 크리티컬인데. 아무리 생각을 오래 해봐야 운이 함께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노라.


"패착은 맞았지. 20이 나온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계산한 건데!"


어그러진 판세. 패착 중의 패착이 역전의 한 수로 변하는 기적. 다 그런 법이 있는 거야, 하고 얼버무리던 나는 창 밖을 본다. 물기 묻은 유리 바깥의 풍경은 가라앉은 아름다움이다. 비가 내리는 서울의 하늘. 물이 고인 골목의 바닥. 우산과 유리창을 때려대는 빗소리와 토라진 너. 나는 다시 웃는다. 너는 테이블을 들여다보며 고민한다. 아마, 이런 고민이겠지.


어떻게 얘는 처음 하는데 이렇게 잘 하지. 어떻게 거기서 20이 나올 수가 있지. 능력을 써서라도 이겨야 되는 걸까.


"..."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 둘 뿐. 지축을 울리는 투쟁의 고함은 빗소리. 양 진영에서 수도 없이 싸워 온 노련한 지휘관은 고등학생. 17개의 말이 싸우는 전장은 나무 테이블. 그 서사시에 몰입한 너를 가만히 쳐다본다. 턱을 괴고 빗소리를 들으며 고민한다. 이런 고민이다.


너는 자존심이 높은 타입. 게임이던 뭐던 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아. 하물며 도망이야 칠 생각도 없겠지.

너는 머리가 좋은 아이기도 해. 초능력자들 사이에서 리더를 맡을 정도로. 많은 아이가 네 등을 바라보고 있어.

너는 정신이 강한 사람이야. 마음의 상처도 신체의 아픔도 내색하지 않아. 죽은 친구들을 위해서라며 항상 웃겠지.

그리고 너는.


"좋아."


상념을 끊는 건 너의 선언이다. 스윽, 탁. 너의 손이 단호하게 움직인다. 이내 테이블에 다시 주사위가 던져진다. 데구르르. 멈춘 주사위의 숫자는 12. 기댓값 이상이다. 나쁘지 않아. 내가 주사위를 잡을 차례다.


데구르르.


나의 숫자는 15. 주사위를 바라보며 빙긋 웃자 너가 머리를 싸매며 계산에 들어간다. 나는 다시 생각을 이어본다. 그래. 그리고 너는.


너는 내일 죽는다.


네가 누구와 싸우는지는 알지 못한다. 네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른다. 너가 지켜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기 싫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다. 너는 마법소녀라는 이름을 짊어졌다. 내일, 비가 내리는 서울의 하늘에서, 추락한다. 역전의 용사인 너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적에게 맞선다. 도무지 이길 수 없지만 너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다.

죽어갈 것이다.


"이렇게 움직여볼까."


탁.


너가 다시 한번 말을 옮긴다. 이 생각은 하지 못했지, 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너의 주사위는 17. 나의 주사위는 18. 내가 한번 더 이긴다. 너는 바락바락 대들다가 포기하고 패배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진다. 내일 오후까지 내가 더 이상 살아있는 너를 만나는 일은 없다.


"역시 게임은 너를 못 이기겠어. 분명히 오늘 처음 하는 걸 텐데. 너 곁에 게임의 신이 붙어있는 거 아냐?"


내 힘으로 더 이상 너를 살아있게 할 방법도 없다.


"그럴리가. 운이 좋았던 탓이겠지."


"한 번도 게임에서 져 본 적이 없잖아, 너 말야. 그거 사기라고."


손 안에서 주사위를 굴려 본다. 서울을 지키는 초능력자들 안에 나는 없다. 동기가 부족해서, 가 아니다. 나의 능력이 너절한 탓이다. 내가 너를 위해 돌릴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하루 뿐. 너를 막을 힘도. 너와 싸우는 무언가를 막을 힘도. 상황을 바꿀 머리조차. 없다.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단지 확률이 전부. 나는 너의 운을 시험한다. 결과는 오늘도 같았다.


너는 패배한 채로 멀어져 간다.

나는 승리한 채로 남겨져 간다.


단지 시간을 한번 더 돌릴 뿐.


그것이다.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시간을 돌린다. 텅 빈 보드게임 카페에서 너와 내가 벌이는 한 판의 게임. 비가 내리는 오늘과 어김없이 나오는 숫자 사이에서 어쩌면 영겁이 될 지도 모르는 도전. 너는 압도적인 위력의 적을 상대한다. 나는 내일이면 너를 앗아갈 세계와 게임한다. 굴리고 굴려서 20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주사위를 굴린다. 너가 아득바득 우겨서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돌린다. 정해진 확률이 변할 때까지 반복하고 반복한다. 한 판이라도 이긴다면 나의 승리. 내일 오후에도 계속되는 너의 미래가 그 보상. 나는 이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말했잖아, 나는 게임에서 진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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