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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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추운 밤이었다. 장독대 위에 내려앉은 흰 눈이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모두가 차갑게 빛나는 달밤에 옅은 온기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깨끗하게 다림질한 소복을 차려입고, 세 번에 걸쳐 담은 청수를 양손에 받치고, 혹여나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염려하여 조심스럽게 걸어온다. 주름진 볼에 희미한 홍조가 돌고, 하얀 연기가 코끝에만 맴돌다 사라진다.

 평평한 돌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상차림 하면서 수없이 많이 해 보았던 동작이지만, 오늘만큼은 처음인 것처럼 조심스럽다. 양손으로 공손히, 혹여나 어긋나지 않도록. 쟁반은 눈송이처럼 천천히 돌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쟁반을 아주 미세하게 돌렸다. 약간 어긋나있던 달이 청수 한가운데 담겼다.

 여인은 무릎을 꿇었다. 눈과 뒤섞인 흙이 저고리에 번지고 땅의 냉기가 뼈를 타고 차오름에도 개의치 않았다. 이름으로 불린 것보다 더 오래 어머니라 불린 그 여인은 그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저를 어여삐 여기시거든 제 원을 들어주소서. 저는 슬하에 다섯 아이를 두었고, 넷을 먼저 묻었습니다. 이 늙은 몸은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지만은, 지금껏 해아 하나만 보고 이 비루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천명이야 하늘의 뜻이옵건만 하나 남은 자식을 어미보다 먼저 데려가시는 것이 하늘의 도는 아닐 거라 믿습니다. 일월성신이시여, 제발 우리 해아가 몸 성히 돌아오도록 하소서.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고 해아를 살려주소서.”


 여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매일같이 반복된 기도에 목이 쉬었는지. 처량한 목소리가 청수 속에 잠긴 달을 흩뜨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법이라. 여인의 기도는 하늘을 움직이고 달마저도 눈물짓게 만드는 절박함이 있었다.


“부처님, 미륵님, 보살님, 해아는 어려서부터 피를 보면 경기를 일으켰고, 제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어여삐 여겨 살생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였으며, 제 몰래 탁발승에게 두 홉씩 시주하였습니다. 해아는 세상 그 누구보다 죄 없는 아이입니다. 그 여린 아이가 피와 죽음이 가득한 전장에서 하루라도 버티리오까? 미륵보살이시여, 그 아이를 지켜주소서.”


 하나 닿지 않는다. 하늘은 그저 두꺼운 공기요, 달은 세상을 도는 거대한 땅덩어리일 뿐이니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노인의 작은 목소리는 일 리도 가지 못할 것이고, 시린 빛은 의미 없이 우주를 떠돌 것이다. 천지신명은 늘 그렇듯 소원을 듣지 못할 것이요, 스스로 도운 자 외에는 돕지 못할 것이었다. 여인의 간절한 기도는 지금까지 있던 다른 모든 어머니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고 사라질 터였다.


“해모수와 하백이여, 동명왕이여. 오랑캐를 무찌르소서. 왜란 때 그리하였던 것처럼 충무공을 내려 오랑캐가 감히 이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하소서.”


 어깨에 하얀 눈이 쌓이고, 머리는 원래 그러하였는지 희끗희끗하고, 이제는 다 타버린 숯처럼 창백한 뺨을 덥힐 생각조차 하지 아니하고.

 짐승도 울지 않는 겨울 밤. 청수 속 잠긴 달만이 시린 빛을 내며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비비며 그저 빌기만 하였다.

 들어주는 이 없이 차디찬 눈바람을 맞으며,

 양손의 살갗이 닳아 벗겨질 때까지. 

 표정 없는 달 아래에서.

 그저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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