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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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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 Feb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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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신시연
협업 참여 동의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불과 얼음이 휩쓸고 지나간 대지에서 늙은 오크 족장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이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클클, 살다 살다 검은 현자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듣다니. 나도 오래 살기는 산 모양이야.”


“매번 말하지만 어디 현자라고 해서 세상사 모든 일은 아는 건 아니잖습니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지.”


검은 현자라 불린 이가 실금투성이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영롱하게 빛나던 마력수정은 군데군데 부서진 채로 간신히 붙어있었고, 깐프들의 축복받은 어머니 나무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는 그 싱그러움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자네는 언제나 우리들의 올바른 길잡이였지 않는가.”


“고작 그 정도 밥값도 못한다면, 어디 글줄깨나 읽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참... 그럴 기운이 있나봐요?”


킥킥대며 만담을 나누는 모습에 앳된 하이깐프 궁수 이루릴이 새침한 얼굴로 그들을 흘겨보았다.


“클클클, 이미 다 끝나버린 와중에 무얼 더 긴장할 것이 있다고 그러나.”


“하하하!”

“맞는 말이지! 거, 깐프 처자가 어리긴 어린 모양이야!”


흉하게 파괴된 들판 곳곳에서 목소리들이 터저나왔다. 드워프, 오크, 인간, 트롤. 그 중에서도 한 드워프 성기사가 반쯤 부숴진 전쟁 망치를 손에 쥐고 착잡한 얼굴로 그들 앞에 나섰다.


“이단 대가리를 깰 시간은 이미 끝나버렸다네. 깐프 처자.”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이단이고 나발이고, 다 같이 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와중에 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나...”


이내 드워프 성기사는 쥐고 있던 전쟁 망치를 내던져 버리며 하이 깐프 궁수 뒤에 앉아있는 현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방법이 있나?”


“있다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죠.”


“그런가.”


“그렇습니다.”


빙긋이 웃는 현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드워프 성기사는 그의 말을 몇 번 더 곱씹어 보는 듯 하더니 그의 드워프 생 마지막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다면야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군.”


“안녕히.”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드워프 성기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먼지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아... 아버지... 당신의 여섯 번째 종이 ...”


“대부, 나, 저렇게 죽기 싫어. 응? 대부. 대부는 알고 있잖아. 항상 그랬잖아. 응?”


“...”


먼지가 흩어지는 것처럼. 세상에서 지워지는 드워프 성기사를 코앞에서 바라보던 하이 깐프 궁수가 창백한 얼굴로 현자의 팔을 붙잡았다.


“대부도 알잖아. 나 아직 제대로 성인식도 못 지내본거. 나, 나 데리고 황궁 구경도 시켜준다고 했잖아.”


“......”


“왜, 왜 말이 없어? 대부가 모르는 건 없잖아. 세상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면서! 전지전능하진 못해도 전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대부라고 말했잖아...”


고통과 피로에도 빛이 바래지 않던 하이 깐프 궁수의 얼굴이 공포심으로 일그러졌다. 아랫땅의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고고하다 불리던 하이 깐프의 마지막 딸이 저렇게 망가질 줄 누가 알았을까.


“나 저렇게 죽는건......”


아득한 공포가 현실을 잊게 만들었던 것일까. 제 몸이 먼지로 화하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현자를 향해 공허한 입술을 달싹이다 스러졌다.


“미안하다. 이루릴.”


“...자네 딸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왜 말하지 않았나.”


“가는 길에 알아봐야 무엇하겠습니까.”


“두려웠나?”


“기억이란 것이 참... 무섭지 않습니까?”


탐탁찮은 눈으로 늙은 오크 족장은 현자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한들, 자네도, 그녀도. 서로 사랑했었잖는가.”


“도려내진 기억을 인지하면 할수록, 고통받을 것이 뻔한데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마지막 순간...! 쿨럭, 이라도.”


“그건... 정말 제 자기만족일 뿐이잖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이 이상은 욕심이지요.”


희미한 미소를 보며 늙은 오크 족장은 갈라지는 웃음을 간신히 내뱉었다.


“자네, 방법이 있구먼?”


“어림도 없지요. 방법이라니.”


“그...”


늙고, 상처입은 몸이 스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자는 이내 주변의 모든 생명체들이 다 먼지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만신전의 온갖 신들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운명이거늘, 되다만 불멸자 따위가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


“과분한 기대를 매번 받고 있다 보니.”


강대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태초의 용이 흔들리기 시작한 대지로 내려왔다.


[허나, 미약한 존재이기에 보이는 것도 있겠지. 만약 정말 네게 방법이 있다면... 용들을 도와다...]


“노력하겠습니다.”


하늘 위의 하늘. 만신전에서 벗어난 고룡은 그 위대한 이름에 걸맞게 형체를 유지하는 것 같았으나, 현자의 앞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먼지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현자를 제외한 아랫땅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을 맞이했고, 현자를 제외한 만신전의 모든 신성이 그 종막을 맞이했다.


하나의 세계가 끝을 맞이하는 순간.


검은 현자는 바스라지기 시작하는 지팡이를 매만지며 하책 중의 하책에 불과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 주문으로는 자신의 연인도, 전우도, 하다못해 관계없는 어린아이 하나조차 구하지 못하였지만.


또 다르게 본다면 그들 모두를 구할 수도 있다. 


이극고 풍화하여 먼지로 돌아가던 세계가 점점 줄어들어 텅 비어버리기 직전.


현자는 공허로 돌아가는 세계와 함께 사라졌다.




***



“저기요, 아저씨. 여기서 주무시면 안되거든요. 어, 뭐야. 오빠잖아. 야! 일어나!”



Writer

신시연

자에픽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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