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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끝.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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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5 Sep 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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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묘졸
협업 참여 동의

 "이제 겨우 끝났네요."

 "그러게."

 

 그건 그렇지.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머릿속을 다시 한 번 헤집어 살폈다. 길다면 긴 길이었지만- 모든 길엔 종착점이 있기 마련이고 각고의 노력과 고난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했다. 정말, 도달해버렸다.

 

 하늘은 맑다. 밝기도 하고. 이제 머지 않아 저물어갈 듯한 태양은 그 빛을 약간 뉘어 온후함을 대지에 넓게 퍼뜨렸고 그에 순응하듯 부드러운 바람은 미미하게 끊이지 않아 머리카락을 살랑인다. 나는, 이제는 그저 너른 벌판이 되어버린 평평한 대지에 앉아 팔로 받쳐 몸을 뒤로 뉘였다. 나른함이 땅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몸 속에 스며든다.

 

"길었죠."
  "정말."

 

 대화기도 애매한 말을 주고받는다. 한쪽 눈을 떠서 옆을 흘긴다. 대화의 상대, '실'은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별다른 손질을 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끌려 흐른다. 두 눈은 자연스레 감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혀 있다.

 

 "그나저나 넌 정말 안 변하네."

 

 무심결에 그런 말을 흘린다. 이 녀석이야 애초에 인간이 아니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변화가 없다. 나는 이렇게 변해 있는데 내 과거 시절 모습 그대로인 건 너무하잖아. 실은 그런 내 말에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웃음소리를 곁들여 미소지었다.

 

 "그런가요?"
 "그래. 너희들은 도무지 변화란 걸 모르잖아. 지겨울 정도로 같은 것만 반복하고."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건 어쩔 수 없는 걸요? 제가 마스터에게, '마스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꼬리가 나지 않으니 너무하네요!'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사람한테 꼬리 같은 게 날까보냐."
 "정령에게 변화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바로 맞받아치는 실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뭐, 결과야 뻔하다.

 

 "없지."
 "없네요."

 

 그리 말하면서도 왠지 미소가 지어지는 건, 아마 날씨가 너무 좋은 탓일 거다.

 

 "그럼 이제 뭘 하지."
 "할 일은 많지 않아요? 마스터는 그동안 '이 일만 끝나면-' 으로 시작되는 걸 몇 십 가지로 말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왠지 기분이 두루뭉실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드네. 막상 닥쳐온 나른함에 계획 같은 건 의미가 없나봐.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평화에 감싸여 그런 걸 말했다. 계약 후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으니, 이 감정은 아마 실에게도 닿고 있을 거다. 덕분에 우리를 맴도는 공기가 이렇게나 온화한 걸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호흡 한 번 한 번을 느끼며-

 

 "게으르시긴."
 "…애매하게 존대로 험담하지 마."
 "게으르긴?"
 "반말하란 게 아니잖냐!?"

 

 확, 하고 시선을 돌려 실을 바라본다. 그러자 장난이나마 소리친 게 바보같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반칙이야. 나는 애매하게 몸을 숙이고 있다가 그냥 누워버렸다. 그리고 눕는 김에 실의 무릎을 빌리기로 했다. 실체화한 정령이라곤 해도,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단 게 새삼 느껴진다.

 

 "마스터."
 "왜."
 "저희가 이렇게나 한가한 건 계약한 이래로 처음인 것 같아요."
 "우리가 좀…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지."

 

 실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아무 의미도 없는 손장난.

 

 "마스터는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하셨죠?"
 "응. 뭐 그렇지."

 

 딱히 부정할 필요는 못 느낀다. 실제로 지금은 단지 이렇게만 있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무얼 하든 별로 상관은 없겠지-. 그러고 보니 정말 내게 삶의 동기 따윈 없구나. 반성하자. 가장 큰 걸 막 해치운 참이라는 변명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만지작거리는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그래도 그 손길이 부드럽다는 생각 이상은 들지 않아서 정령은 정령이구나, 같은 감상을 품게 된다.

 

 "왜 그분을 포기하셨어요?"
 "그분?"

 

 뭐냐는 듯 되물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실과 나는 계약으로 이어져 있어서, 이런 사소한 변화도 제대로 주시하고 있으면 못알아챌 리가 없다.

 

 "네, 그분."

 

 성격 좋고, 집안 좋고, 아름답기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그거야, 포기라면 포기다. 포기지.  먼저 대단한 애정 표시를 해오셔서 당황스러웠던 과거가 머릿속을 스친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실과는 상당히 사이가 나빴었다.

 

 그야, 계약 파기란 말까지 나왔었으니 단순히 나빴다기보다 최악이었다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생각과 동시에 당시 실을 대하는 내 태도에 대한 부끄러움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서 무한한 쪽팔림이 느껴진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따위의.


 쪽팔림의 근원은 '그 사람'처럼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사람이 날 좋아해주는 것으로, 자의식 과잉이 된 어린 내 모습이다. 당시에 실에게 많은 상처를 입혔던 것도 떠올라 미안함까지 품게 된다.

 

 "아름다웠고, 똑똑하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왜요?"
 "그 사람은 내게 과분한 면이 많았어. 그리고…"
 "말 돌리지 마요."

 

 실의 눈이 찌릿 하고 내 눈과 마주친다. 이 부분, 마음에 두고 있었나.

 

 "그냥. 똑똑한 사람이었어. 당시 세상이 내게 내린 평가는 어울리지 않게 위대하기 짝이 없었고, 똑똑한 사람은 꿈과 현실을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마련이지. 그 사람은 자기 꿈을 이룰 적당한 수단으로 날 택했던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수단이라고 해서 아예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 왜냐면 그 사람은, 딱 한 번이지만 정말로 목숨을 걸었던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역시-"

 

 할 말을 떠올리다가, 하나밖에 없단 걸 알고, 또 그 말이 조금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머뭇거리다가, 말 했다.

 

 "겉보다는 안을 봐주는 쪽이 더 좋겠다 싶어서."
 "흐응-"

 

 실이 묘한 소리를 낸다. 뭐냐고. 불편을 가득 담은 그-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걸요. 당시에 저한테 한 말을 생각 해보면-"
 "아아-니- 잠-깐만요- 실-님-!!"

 

 슬금슬금 저쪽으로 밀어두었던 쪽팔림 대폭발.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실의 말을 막아버렸다.

 

 으악.


 말 하지마.

 

 미안해.

 

 "후후후…"

 

 사악한 웃음 같은 거 흘리지 말란 말이야… 너 첫 장면에는 꽤 부드러운 케릭터였다고….

 

 "눈 감아요."


   넵.

 

 눈을 다시 감았다. 해가 지고 있는, 노을이 짙게 퍼진 하늘이 망막에 남았다. 잉크로 찍어낸 듯 선명히. 눈을 감고, 그 빛이 흐려졌다. 곧이어 무언가의 그림자 안에 들어선 듯 노을빛의 불그스레한 기운이 사라졌다.

 

 "눈 떠요."

 

 -불과,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실의 얼굴이 있었다. 너무 가깝고, 실이 내게 무릎 배게를 해주는 모양새이니 만큼 눈과 바로 앞에는 실의 입술이 있었다.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예쁘다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과 공유하게 될까 싶어 얼른 훔쳐내고는 시선을 내려 눈을 맞췄다.

 

 "저는 하고싶은 게 있어요."
  "뭐, 뭐, 뭔데?"

 

 실이 눈을 감았다. 뭐래. 얼굴이 다가오잖아. 뭐야. 뭐람? 뭐지?

 

 "연애란 거- 어떨까요."

 

 눈을 감았다.

 

*

 

 뜬금 없는 엔딩.

 

 저녁하고 첨 씁니다. 어드밴티지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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