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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비밀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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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3 Sep 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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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SB.K
협업 참여 동의

거울 앞에 서서 최종점검을 했다.
긴 머리를 말아서 모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잡고 늘어지기 방지대책 OK.
이어서 올이 굵은 카디건을 장착했다. 잡고 늘어져도 좋은 복장대책 OK.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짧은 청치마를 장착했다. 행여나 맨 무릎 위로 느껴질지 모를 극상의 감촉용 대책 OK.
마지막으로 오늘을 위해 준비한 비밀무기를 가방 인벤토리 속에 넣었다. KO승을 얻어내기 위한 대책 OK.

“음후후.”

음산한 웃음소리가 현관에서 낮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단순한 변태에 불과한 몰골을 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상관없어.
굳이 곧 다가올 순간을 위해서 준비한 부드러운 고무소재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 만물이 자신의 사명을 잊고 한없이 늘어진다는 초저녁 6시. 의 십분 전.
드라마 다시보기에 심취해 있는 엄마의 시선을 피해 살며시 현관을 나섰다.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도중에 어머니와 같이 탄 남자아이가 미소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울먹이며 엄마의 치마폭으로 숨어들어간 것 같기도 하지만 분명 기분 탓이다.

그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최고로 가벼운 기분이다.
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누구든 붙잡고 큰 소리로 선언하고 싶다.
지금부터 나는 인간 외 고등지성 생명체들과의 조우에 나선다.
그들은 비교적 상냥하니까 딱히 인류의 운명이 내 양 어깨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그동안 사소한 소통 미스로 얼마나 숱한 실패를 경험했던가. 설움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간은 진화하는 존재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반드시 발전한 나다. 실패를 경험삼아 숱한 이미지 트레이닝과 전략 수립에 매진해 왔다. 심지어 지금의 나에겐 이 비밀무기가 있다.
안녕, 어제까지의 꼴사나운 나. 어서와, 무지 강해진 나.

평소라면 30분은 걸렸을 거리를 5분 만에 느긋하게 주파했다. 지난주부터 복지센터 아주머니들 틈바구니에 끼어 경보를 배워둔 보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도착한 곳은 우리 동네의 하천부지.
품위 없는 같은 반 남자애들은 그 미묘한 갈색 물줄기 때문에 X천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나는 여기에만 오면 모든 것을 잊고 새롭고 신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애와 우아함을 담아 레테의 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첨벙거리며 정체모를 갑각류를 대량 포획하던 꼬맹이들도 슬슬 저녁을 먹으러 돌아갈 시기인지라 하천부지엔 인적이 드물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점점 발걸음이 빨라진다.

조금 더 걸어내려가자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하나가 나왔다.
그냥 부지 위 도로를 걸어 다닐 때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다리 기둥 밑의 절묘한 각도. 그 곳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원해왔던 이상향이 펼쳐져 있는 비밀의 장소다.
아아, 느껴진다. 지적이면서도 상냥한 그들의 오라가.

“이크, 안되지.”
나도 모르게 풀어져버린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내며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초장부터 그들을 놀라게 해선 그동안의 혹독한 준비가 헛것이 되어버린다.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마치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 들렸습니다. 건강하세요? 같은 느낌으로 가야지.
기둥 뒤편이 점점 가까워 온다.
자아, 대체적으로 평온하고 무해하게. 딱히 당신들 따윈 관심도 없었다는 풍으로.
주먹은 가볍게 말아 쥐고, 양 입가를 올려서.
하나, 둘, 셋.

“냐아아아앙~~~~”
대 야옹이 조우전술 그 35번째 장. ‘해치치 않아요.’ 살법!

그러나.

“후냐앗!?”
“샤아아아!”
“음?”

그곳에는 나의 친애하는 고등생명체들 이외에도 불법 선약자가 하나 있었다. 놀라거나 화난 듯한 이런저런 대 여섯의 쁘띠 보이스 속에, 하나의 불쾌한 인간의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또, 또 너냐.”
분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죽 찢어진 포악한 눈매를 하고 있는 주제에 이를 둥그스름한 안경으로 카모플라주하고 있는 얄미운 면상. 타고 올라가기도 힘든 숏컷을 한 주제에 갈둥이 1호랑 삼색둥이 3호 두 마리나 올라가 있는 머리 위. 무릎 위에 친히 하양둥이 0호가 올라가 있는데도 그 감촉 따윈 느낄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다는 듯 철통같이 감싼 청바지를 입고 있는 이 여자는 분명.

사랑의 라이벌이다.
“뭐야, 너 또 왔구나. 변변찮은 곳이지만 앉아.”
그 방약무인한 태도에 그동안 간신히 유지해왔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니가 세낸 곳도 아니면서 잘난 척 하지마아아아!”
““냐아앗!””
나의 분노의 외침에 정작 아무 반응 없는 당사자를 내버려두고, 그 주변에 모여 있던 야옹이들이 전원 털을 곤두세우며 튀어 나가버렸다.
“아……!”

님은 갔습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내 인생 종료.
하늘이 노래진다.
아니, 실제로 노을 땜에 노르스름하지만. 암튼.
이 변변찮은 여자 때문에.
그동안의 힘들었던 지옥훈련의 나날들이 떠올라서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윽……. 흐극.”
“?”
야옹이가 튀어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내 라이벌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다 너 때문이야.”
“뭐가?”
그 열 받을 정도로 평온한 면상을 노려보고 있노라니 결국 시야가 흐려졌다.
“흐그극. 너 때문이라고! 야옹이들이 다 도망가 버렸잖아! 돌려내! 내 안식의 시간! 돌려내! 경보 레슨비!”

짜증나서 발버둥치는 내게 라이벌은 주섬주섬 동전지갑을 열어 뭔가를 내밀었다. 흥, 그렇다고 진짜 변상할 것 까지는…….
“별 것 아닌 물건이지만 드리겠습니다.”

개다래 풀이었다.
“필요 없어!”
이거였냐! 너의 비밀무기가!
그걸로 구워삶은 거구나! 순진한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가정교사처럼!
“자아, 자아. 꽤 기분 좋다고.”
살랑살랑.
“턱 밑 간질지마!”
이런 간악한 병기 따윈, 이렇게 해주마!
뺏어서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씁쓸했다.
단 한 번도 야옹이들한테 간택 받지 못한 나의 인생처럼.
“흐아아앙. 항상 이런 식이야. 어째서 너야. 어째서 내가 다가가면 항상 도망쳐 버리는데 항상 너만 사랑 받는 거냐고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노을 진 저녁 무렵의 하천가에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단순한 바보에 불과한 몰골을 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상관없어.
내 오늘치 희망 포인트는 이미 제로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경사진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내 심정과는 반대로 상쾌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간질였다.
약 한 시간동안 펼쳐질 예정이었던 야옹 페스티벌은 10초 만에 끝이 났다. 해가 질 때까지 남은 59분 50초 동안 나는 아무 할 일도 없이 이곳에 남겨져 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여자와 함께.

저 유유하게 흐르는 레테의 강물에 이 여자를 쳐 넣고, 나도 이 어떤 묘도 따라주지 않는 저주 받은 몸뚱이를 던져버릴까 싶은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변기에 빠뜨린 휴지 같은 몰골로 돌아가서 엄마한테 받을 온갖 처벌을 생각하니 그럴 기분도 싹 가셨다.

결국 오늘도 이 모양이구나.
나는 가방을 뒤져 오늘의 비밀무기를 꺼내 아무렇게나 봉지를 뜯었다. 봉지를 양분하며 그 위에 그려진 만화풍의 냐옹이의 얼굴과 ‘냥푸드 – 까쓸까슬한 짝사랑맛♡’의 하트마크도 나란히 두 동강이 났다.
“까득. 까드득.”
입 안 가득 까끌까끌함이 퍼져간다.
대충 입안의 것을 씹어 삼키고 다시 봉지로 손을 뻗었을 때, 차가운 손가락이 맞닿았다.

“너는 먹지 마. 내 비밀무기야. 뭐가 이쁘다고.”
“너도 내 비밀무기 먹었잖아. 딱히 그것 때문에 걔들이 몰려든 건 아니지만.”
내가 조금만 기력이 남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저 면상에 냥푸드를 봉지째 던져주었을 텐데.
“후우. 멋대로 하세요.”
“고맙, 까득, 까드득.”
이미 먹고 있구만 뭘.

나도 다시 냥푸드 봉지에 손을 넣었다. 좀 무리해서 1킬로 짜리로 사왔으니 아마 해지기 전의 한가하기 짝이 없는 시간동안은 내내 먹을 수 있겠지.

“까득, 까득. 야, 근데 넌 어디 쪽 사냐?”
“까드득. 까득. 개다래 왕국.”
“죽는다? 까드득.”
“고양이를 10초 만에 뇌살시키는 방법. 가르쳐줄까?”
“진짜?! 뭔데!?”
“그런거 없다.”
“……꽈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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