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한대

[라한대] 회귀 매니저, 그녀

by 삼온 posted Sep 17, 2017 (22시 31분 33초) Replies 2 Letters cou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회귀 매니저, 그녀

   

나는 회귀했다.

몬스터도, 검선도, 게이트도, 없는 평범한 세계지만 그래도 회귀했다.

일 년 전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그 때와 달라진 것은 뭐 하나 없다.

평범한 몸에, 평범한 목소리다.

딱 하나 이질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건...

   

“꾸물대지 말고 빨리 여친한테 차이기나 하세요.”

내 옆에서 투덜거리는 키 큰 아가씨일까.

안경이 어울릴 법한, 그러나 안경을 쓰지는 않은 미녀다.

전체적인 인상은 차갑다.

내게 향하는 태도가 차가운 탓도 있겠으나.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지금 여친이 없는 상태인데요.”

“그럼 아무한테나 고백해서 차이든가. 회귀하면 그게 기본이에요. 설명 못 들은 건 아니죠?”

“듣긴 들었는데요.”

“그럼 뭘 망설여요? 얼른...”

“저랑 사귀어주세요, 경리 씨.”

“일단 저는 여기 인간이 아니라서 회귀 포인트 가점 없고요, 진짜 기분 더러운데다가, 이거 성희롱이니까 감점 5점 들어갈게요.”

“네...”

장난이 영 안 통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회귀 포인트 몇 점이 움직인다고 해서 딱히 곤란한 것도 아니라, 나는 기지개를 한 번 펴고 말았다.

경리 씨는 오히려 초조한 듯 말을 덧붙였다.

“오늘 안에 회귀 포인트 100점 못 쌓으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 알죠? 기껏 회귀했던 게 다 무용지물 되는 거예요. 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거고.”

“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한여름 밤의 꿈이라니.”

“이제 가을인데다가 저한테 말대답한 것도 감점 주고 싶지만... 한 번만 참을 게요. 여친한테 차이는 거 못하겠으면 얼른 다음 단계로나 넘어가요.”

“다음 단계요?”

“갑질요. 매뉴얼 대충 보셨나본데, 그러시면 고객님만 손해라고 약관에도...”

“갑질이라고 해도 갑질할 게 있어야 하죠. 저 지금 아무 것도 없는 휴학생 신분인데 뭘로 갑질을 해요?”

“갑이 아니어도 갑질은 할 수 있거든요? 좀 알고 말하시든지.”

그 정확한 실례가 바로 내 앞에 서 있다.

회귀 서비스의 고객은 나, 매니저는 경리 씨니까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갑인데.

“포인트는 짚으셨네. 어디든 손님은 왕이란 거예요.”

경리 씨는 나를 근처 분식집으로 떠다밀었다.

그리고 내게는 메뉴판도 건네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라면에 떡국을 시키는 것이다.

뭐, 딱히 먹고 싶은 게 없긴 하지만.

물이나 따르고 있자니 경리 씨가 내 쪽으로 얼굴을 붙여왔다.

“왜 이래요, 남사스럽게? 아, 혹시 아까 고백 다시 생각해볼 맘이 들었어요?”

“자꾸 지랄하시면 제가 지랄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고요, 고객님.”

“지금 쓰신 거 같은데...”

“안 닥치시면 제가 닥치라는 말도 할 수밖에 없어요, 고객님.”

나는 가만히 닥쳐드렸다.

경리 씨는 그대로 내게 소곤거렸다.

“떡국 나오면 거기에다 몰래 파리 시체를 넣을 테니까, 그걸로 핑계로 식당 주인한테 갑질해요. 알았죠?”

“경리 씨, 파리 시체를 들고 다녀요?”

“...”

“아니 그냥 궁금해서... 됐어요, 대답 안 해도.”

경리 씨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깨끗한 이마 위로 선명하게 혈관이 잡히는 게, 저 분도 고혈압을 조심해야겠다.

그걸 주의 드리려고 막 입을 떼었을 때, 타이밍도 안 좋게 라면과 떡국이 날라져왔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간만에 듣는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기분 좋게 대답하고 수저를 떴다.

“잠깐. 여기 뭐가 들어 있는 거 같은데요?”

경리 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듣기만 해도 ‘어, 내가 뭘 잘못했나?’하는 죄책감을 들게 하는 목소리였다.

주인아주머니와 나는 동시에 떡국으로 시선을 향했다.

새하얀 떡국의 가장자리에 동동 떠 있는 것은...

“낼름.”

나는 수저로 그것을 집어 들어,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 뒤로 떨떠름한 신음이 연달아 들렸다.

“응?”

“... 어?”

나는 계속 수저로 떡국을 입에 퍼다 넣으며 말했다.

“맛있네요, 아주머니. 옹심이도 넣으셨나, 씹히는 맛도 일품이고.”

“고마워요, 학생. 근데 아까 거기에 이상한 게...”

“아녜요, 아녜요. 이상하기는 뭘. 저 치과도 안 가고 윗니 아랫니 전부 건치인데요. 촤하하!”

“으응, 그래요. 학생. 식사 맛있게 들어요.”

주인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뒤로 돌아섰다.

동시에 허벅지에 찌릿, 전류가 흘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경리 씨의 하이힐에는 내 피가 조금 묻어 있을 거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경리 씨는 가차 없이 따져 물었다.

“고객님, 병신이에요?”

“아니었는데... 지금 경리 씨 때문에 곧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진짜... 진짜... 진짜 화나려고 하니까 조금만 닥쳐 봐요.”

경리 씨의 콧구멍이 벌렁벌렁했다.

예쁘신 분은 뭘 해도 예쁠 줄 알았는데, 저건 좀 깨는 광경이다.

그걸 말해줄까 하다가, 경리 씨가 닥치라고 말했던 걸 떠올리고, 나는 잠깐 닥쳐드리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한 법이니까.

회귀 매니저라도 다를 것은 없겠지.

라면과 떡국이 슬슬 불기 시작할 무렵에 경리 씨는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요?”

“뭘요?”

“파리 시체 처먹은 거요. 고객님이 갑질 못하겠다고 해서 제가 밥상까지 차려드렸는데, 거기서 왜 그걸 쳐드신 거냐고요.”

“경리 씨한텐 진짜 미안한데...”

“저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설명을 하시라고. 고객님.”

“여기 얼마 뒤에 문 닫거든요. 곧 식당 문 닫는 아주머니한테 안 좋은 기억 남겨드리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진짜... 개병신...”

“네?”

“아니에요, 아무 것도.”

“네?”

“... 개병신이라고요. 아, 잘 안 들리셨으면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고객님은 개~ 벼엉~ 시이인~”

“진짜 안 들려서 물어본 건데...”

“그러니까 다시 말해준 거잖아요, 고객님, 아니, 개병신씨.”

나는 거기서 장애인을 희화화하는 욕설에 대한 부적절성에 대해 지적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그녀의 무지함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여전히 굽이 날카로운 하이힐을 신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걸로 다시 다리를 찍히긴 싫다.

   

얼마 뒤 식당을 나와, 내가 슬쩍 물었다.

“그런 신발 신고 있으면 다리 안 아파요?”

“지금은 다른 데가 더 아파서 괜찮아요.”

“어디가요?”

“골통이요.”

“혹시, 저 같은 꼴통 때문에? 촤하하!”

경리 씨의 미간에 그로테스크한 혈관이 다시 일어났다.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내 유능한 회귀 매니저는 설명을 재개했다.

“여자한테 차이기 실패, 갑질 실패. 보통 여기서 60점은 따고 가야하는데 고객님은 지금 마이너스 점수에요. 이럼 진짜 위험하거든요? 이대로 아무 것도 안 하고 돌아가긴 고객님도 싫잖아요?”

“그렇죠.”

“다음 단계는 진짜 진지하게 해주세요.”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리 씨는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고객님은 이능 특전이 없으니까 인정받기 단계는 건너뛰고... 지금은 효도하기가 제일 손쉽겠네요.”

“효도라면 저도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제가 사실 지금까지 여친을 사귀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경리 씨가 제 여친인 척하고 부모님한테 인사 한 번만 드리면...”

“성추행 두 번. 이제 회귀 포인트 감점이 도합 십 점이에요. 한 번 더 그런 발언하시면 회귀국에 연락해서 강제 송환 시킬 테니까 알아두세요, 고객님.”

“넵.”

하지만 효도하기라니.

소설 속 주인공처럼 집 하나, 차 하나씩 딱딱 사드리는 그런 효도는 생각도 못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

“집에 가서 설거지랑 청소만 하고 오신다고요?”

“어머니는 인천으로, 아버지는 과천으로 출근하셨거든요. 거기로 왔다갔다 왕복하려면 하루 그냥 지나가지 않겠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경리 씨는 조금 자포자기한 눈빛으로 손을 들었다.

   

그녀를 근처 카페에 데려다주고, 나는 얼른 집으로 뛰어갔다.

두 시간 타이머를 맞춰두고, 나는 얼른 집안일을 시작했다.

빨래에 화장실 청소에, 옷장 정리에, 쓰레기통을 비우고, 내친 김에 저녁밥까지 해두자.

빨리 움직인 덕에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엎드려서 편지 세 통을 썼다.

두 통은 부모님께, 한 통은 지금 PC방에 가 있을 나에게 쓴 것이다.

하지만 그 세 통을 풀로 봉해 붙인 순간, 그것들은 하얗게 변해 사라져버렸다.

회귀국 방침에 따라 타인에게의 정보 발설은 금지되어 있다는 거다.

나는 조금 기죽은 채로 경리 씨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이제는 화도 내지 않는다는 듯이,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개병신 씨~ 한글을 못 읽으시는 유인원 이하의 생명체라서 약관을 이해 못 하셨을 수도 있겠지만요~ 회귀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시면 안 되는 거거든요~”

“죄송합니다. 깜빡했어요.”

“아, 깜빡하셨구나. 그러실 수 있지, 그러실 수 있어요.”

그녀는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아니, 투탁투탁이라는 의성어가 조금 더 어울릴 수도 있었겠다.

솔직히 좀 아팠으니까.

“회귀 포인트는... 삼 점은 올랐네요. 그래도 마이너스 칠 점이에요. 이제 여섯 시간만 지나면 오늘 하루도 끝인데, 사실상 끝난 거죠.”

“그렇군요.”

“이제라도 반성하시겠다면, 마지막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경리 씨는 눈빛을 이글이글 밝히면서 말했다.

노련한 세일즈맨의 기상이 담겨 있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서 물었다.

“그 방법이란 게 뭔데요?”

“복수!”

경리 씨의 손에 들려 있던 커피 컵이 단숨에 쭈그러들었다.

그녀는 열렬히 설명했다.

“잘 성공한 복수 하나면 회귀 포인트 수백 점을 얻는 것도 꿈이 아니에요.”

“막무가내로 복수라고 하셔도...”

“부모님의 원수는?”

“두 분 다 잘 살아서 출근 하셨다니까요.”

“고객님을 왕따시키거나 괴롭혔던 나쁜 놈들은요?”

“아싸긴 한데 왕따는 아녔죠.” 

“살면서 배신 한 번도 안 당해봤어요?”

“배신... 글쎄, 당하긴 당했겠죠. 다음번에는 자기가 밥 사기로 약속 해놓고 다시는 안 만난다든가, 그런 거.”

“고객님은... 진짜 답이 좀... 없네요.”

경리 씨 손아귀에 커피 잔이 완전히 꾸겨진 채로 들어갔다.

화나는 건 알겠는데, 욕만 줄창 먹는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솔직히 회귀한 나를 제일 괴롭히고 있는 건 경리 씨인데, 그녀한테 복수를 한다면?”

... 아니, 아무래도 그건 뒷감당이 너무 무섭다.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는데, 경리 씨가 질문을 던졌다.

“고객님은 대체 왜 회귀하시려고 했는데요? 보니까 원한 가진 것도 없고, 이루고 싶은 것도 없는데다가 의욕까지 없으신 거 같은데.”

“글쎄요. 보고 싶은 경치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경치?”

나는 경리 씨를 데리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상가 뒤쪽으로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조금 어두웠다.

경리 씨는 가슴께를 두 팔로 가리고서 소리쳤다.

“다 틀려먹었다고 이상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어차피 싸우면 저 이기실 거 같은데요.”

“그건 그렇긴 해요.”

“네... 어쨌든 가죠. 여기 혼자 남아 봤자 할 일도 없잖아요?”

경리 씨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양쪽에 단독주택과 게딱지 집들을 낀 길은 가팔랐다.

시멘트로 바른 계단은 군데군데 깨어져 있었고, 도로가 반듯하다 싶으면 뭔가가 발라져 있는 듯이 미끄러웠다.

나와 경리 씨는 차례대로 숨을 헉헉 거리면서 오르막을 올랐다.

열두 번쯤 한탄 소리가 터져 나오고, 다섯 번쯤 내 머리가 쥐어뜯길 위험에 처한 다음에야,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사장을 빙 둘러 있는 작고 평탄한 샛길.

그 끄트머리는 가설 펜스를 대충 세워 놓은 낭떠러지였다.

아래로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다 보였다.

시간은 대략 여덟 시나 아홉 시쯤 되었을 것이다.

어슴푸레한 저녁의 서울은, 보기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만큼 아름다웠다.

“와.”

경리 씨도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른 헛기침을 하는 척 했지만.

“예쁘죠?”

“네. 하지만 고작 경치를 보려고 회귀를 했다고요?”

“글쎄요... 보려고 한 게 맞긴 한데.”

나는 펜스 쪽으로 다가가 기대서는 뒤를 돌았다.

경리 씨가 약간 머뭇거리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거기 서 있으면 위험해요.”

“저, 일 년 전에 여기서 자살하려고 했거든요.”

뜬금없이 닥쳐오는, 낙차가 커다란 자백이다.

이걸 굳이 입에 담는 게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나는 어쩐지 담담했다.

물론 경리 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실 건 없어요. 그냥 흔한 얘기에요. 열패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휴학생이 한 번쯤은 떠올릴 법한 이야기고.”

“그렇... 군요.”

“어쨌든 안 죽고 살아서, 여기 있잖아요?”

“그건 그러네요.”

경리 씨는 살짝 입 꼬리를 올렸다.

예쁜 미소다. 

“실은 이번에도 또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요.”

“...”

“그래서 회귀를 해 본 거예요. 이런 비현실적인 서비스, 어떻게 나한테 주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죽지 않았던 일 년 전의 그 때를 다시 떠올려 보고 싶어서. 그 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런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경리 씨는 손가락을 꾸물거리다가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 혼자 성급하게 고객님을 다그쳤네요. 사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럴 것 없어요, 경리 씬 이게 직업인데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사정을 어떻게 일일이 다 알겠어요?”

“그래도...”

“전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하루 종일 혼자였다면 오히려 다른 맘을 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경리 씨랑 툭탁 거리면서 돌아다니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시 이 자리에 서니까 확실히 알게 됐어요.”

“어떤 게요?”

“일 년 전의 제 판단이 잘됐다는 걸요.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미인이신 매니저님을 뵙지 못했을 테니까요.”

경리 씨는 싱긋 웃었다.

“그럼요. 탁월하신 판단이십니다, 고객님.”

“그건 너무 홈쇼핑 문구 같은 말인데... 여하튼. 요는 고맙다는 거예요. 다시 살아갈 의지를 주셔서.”

“결정하신 건 고객님이에요.”

공을 다시 넘길 필요는 없었다.

그녀 말대로, 결정한 건 나였으니까.

나는 펜스를 살짝 밀어 틀곤,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러니 앉아서도 시내 전경이 보였다.

경리 씨는 그 옆으로 앉았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이 다 갈 때까지 조용히 한담을 나누었다.

물론 별 시답지 않은, 그래서 조금 따스한 이야기들이었다.

   

자정을 일 분 남기고, 경리 씨가 일어섰다.

“고객님. 이제 정산을 할 시간이에요.”

“네. 부탁드립니다.”

“매니저에 대한 성희롱 두 번, 소소한 효도 한 번에 회귀국 경고 한 번. 도합 회귀 포인트 마이너스 칠 점에 경고까지 붙었네요.”

초라한 성적표다.

하지만 조금도, 털 끝 하나만큼도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일 년 전에 망한 단골 분식집에 들어가서 떡국을 먹었고, 간만에 효도도 한 번 했으며, 뭣보다도 미녀 매니저와 하루 내내 붙어 다녔다.

인생이란 거, 적어도 일 년 쯤은 더 살아갈만하지 않나.

경리 씨는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를 검지로 살짝 밀었다.

“고객님의 이번 회귀는 실패에요.”

“당연한 결과겠죠.”

“그래도... 다음번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 때도 아마 실패할 걸요?”

“그러길 바라고, 다시 뵙자는 거예요.”

경리 씨는 검지로 내 미간을 톡 쳤다.

조금 어지럽다가, 일순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온 세계를 차지한 것은 경리 씨의 다정한 목소리뿐이었다.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돌아오세요. 다시 돌려보낼 날들을 향해, 한여름 밤의 꿈을 보여드릴 테니.”

이제 가을인데요.

마지막으로 말대답을 하려 했으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가 조금 웃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겠다.

완전한 성공이 아닌가.

나는 만족스럽게 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난 날의 아침은 일 년 뒤의 아침일 것이고, 어쩌면 하루 뒤의 아침일 것이고, 혹은 일 년 뒤의 내가 회귀한 날의 아침일 수도 있겠다.

그 모든 날에 돌아갈 수 있는 한 번에 기회가 있기를.

내가 살아온 날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끝.

RECOMMENDED

  • profile
    Rogia 2017.09.21 21:39
    여러 글들을 읽다보면, 회귀하면 반드시 예전보다는 더 좋아져야 한다는 강박증이 느껴지곤 하죠. 이 작품은 흔히 접할 수 있는 회귀물의 안티 테제에 들어갈 법한 내용이었습니다. 경리가 사무적인 태도 치고는 너무 까칠한 걸 보니 다른 회귀자 한테는 클레임을 한 번은 먹겠네요. 물론 이 작품의 '나'는 그러지 않겠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삼온 2017.09.24 11:32
    확인이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리 씨는 다른 회귀소설에서는 깐깐하게 굴다가 정의구현 당하는 조연이 될수도 있고, 츤데레 히로인 1이 될 수도 있는 인물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지아 님 말대로 '나'는 그러지 않겠지만요 ㅎㅎ

라한대

라이트노벨 1시간 쓰기 대회. 구글 크롬/파이어폭스 최적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라한대 공지 이제 텔레그램에서도 알림을 받으세요! file Admin 2017.01.19 178 1
공지 라한대 공지 라한대 주최자 분에게 건의사항 드립니다 4 Admin 2016.08.14 414 0
공지 라한대 공지 라한대(라이트노벨 1시간 쓰기 대회) 공지사항 - 대회신청은 여기 댓글로! 176 file 수려한꽃 2012.06.02 86102 7
2323 라한대 공지 17.9.14 라한대 마감합니다. Rogia 2017.09.24 100 2
2322 라한대 [라한대] 제논 루프 1 SH 2017.09.18 97 1
2321 라한대 [라한대] 리틀 시스터, 타임 크러쉬 1 영드리머 2017.09.17 91 0
2320 라한대 [라한대] 중고장터 3 Pip 2017.09.17 119 0
2319 라한대 [라한대] 쿠웅. 1 라뮤니카 2017.09.17 66 0
2318 라한대 [라한대] 답은 있어 1 HARPY 2017.09.17 60 0
2317 라한대 네가 아닌 내 시간 1 킹갓초원 2017.09.17 73 0
» 라한대 [라한대] 회귀 매니저, 그녀 2 삼온 2017.09.17 99 1
2315 라한대 낡은 우산 3 99도 2017.09.17 85 0
2314 라한대 비익연리 1 eunicewinstead 2017.09.17 70 0
2313 라한대 용사 후보생 : 개복치 1 칸헬 2017.09.17 88 0
2312 라한대 선택받은 『ChoseN』 1 네크 2017.09.17 108 0
2311 라한대 리세마라 1 메이사이 2017.09.17 82 0
2310 라한대 공지 17.9.17 라한대 시작합니다 Rogia 2017.09.17 196 0
2309 라한대 공지 2017년 8월 4일 라한대 마감입니다. 4 아님이 2017.08.05 160 0
2308 라한대 세상의 끝 1 네크 2017.08.05 118 0
2307 라한대 [라한대] 일주일간 데이트 칸나 2017.08.05 71 0
2306 라한대 가로수길 아래서 달빛꽃 2017.08.05 86 0
2305 라한대 증거03 유혈이 2017.08.05 64 0
2304 라한대 공지 2017년 8월 4일 라한대를 시작합니다. 4 아님이 2017.08.04 104 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7 Next
/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