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라한대] 주방 용품 코너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협업 참여 동의

 "저기요, 혹시 여기 그, 어 뒤집개 있나요?"

 점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 뒤집개가 있지 않느냐.'라고 무언의 시선으로 째려보고 지나가버렸다. 확실히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뒤집개라는 표찰은 달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뒤집개 같은 모양새는 아니지 않은가?

 자고로 뒤집게라 하면, 넓적하고 얇은 쇠조각에, 길다란 손잡이가 달려 기름이나 열기 따위가 닿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봐도 이게 어딜 봐서 뒤집개인지 감이 안잡힌단 말이야.'


===


 내 나이 스물 한 살, 늦깍이로 도쿄 소재의 대학에 유학하여 문예를 공부하고 있다지만, 뒤집개가 뭔지도 모르는 천치는 아니다.  나리타 국제 공항의 상공에서 내려다보며, '이국의 풍경이랄 것도 없구나, 좀 널따랗긴 해도 다 비슷비슷하네.'라는 심심한 감상을 표했었다. 이삿짐을 미리 보내둔 구식 아파트에 도착하자 눈 안에 들어오는 풍광은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 속 와르르맨션과 똑 닮은 모습이었다.

 "와! 진짜 똑같네!"

 허접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꿍얼거리는 버릇은 없었지만, 그 묘한 광경에 속마음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숙집은 조금 연식이 오래되어 마모된 부분이나 칠이 벗겨진 탓에 그다지 훌륭한 것은 아니었으나 가난한 유학생의 눈에는 썩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저, 아주머니? 혹시 이 근처에 식자재나 생활용품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나요?"

 아, 좋은 울림이다. 연습한 보람이 있다. 막힘 없이 술술 풀려나오는 일본어는 정확한 발음과 적절한 단어 선택. 어떻습니까 아주머니?

 "+)@%32^" 

 ? 뭐라는 거야 이 아줌마.

 "조금만 천천히, 천천히 말해주세요."

 "+ ) @ % 3 2 ^"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자 아주머니는 내 소매를 잡고 이끌었다. 맨션 앞 골목을 지나서 오른쪽, 오른쪽, 왼쪽. 모퉁이를 지나자 주택가의 마트  치고는 조금 커다란 마트가 보였다. 가타카나로 꽉꽉마트라 써있는 간판에는 이른 저녁임에도 전등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마트 앞에 데려다 놓고 곧장 맨션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래, 저녁밥을 위한 쇼핑이다. 고학생에게 외식은 사치!

 이런 연유로 마트 안에 들어섰는데, 그리고 계란을 부치기 위한 후라이팬은 찾았는데, 뒤집개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자, 이건 튀김용 젓가락이라고 써있는 표찰이 붙어있고, 기다란 나무젓가락 두 짝. 자, 이쪽엔 멋들어진 찻잔 세트가 있고, 그 위에는 찻잔이라는 표찰이. 그런데 왜 뒤집개 표찰 아래에는 뒤집개가 아닌 것이 메달려 있을까?

 창피를 무릅쓰고 다시 점원을 부른다. 

 "아까 이게 뒤집개라 말씀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쓰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실 수 있나요?"

 점원은 표정을 감추려하지만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이 멍청한 새끼는 뭔데? 조센징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이면 좋겠다. 발음은 훌륭하다고. 검은 마스크가 문제인가? 그러고보니 다들 왜 추운데 흰 마스크만 쓰고 다니지. 검은 게 보슬보슬하고 좋다고... 

 점원이 뒤집개의 손잡이 -손잡이처럼 보이진 않지만 점원이 쥐는 모습을 보니 아무튼 손잡이인가 보다.-를 쥐고 팔을 퉁기는 시늉을 한다. 뭔데, 네가 쥐고 있는 거 끝에는 아무것도 안달려있다고. 그냥 플라스틱 봉을 쥐고 위아래로 흔드는 걸로만 보인다고.

 속으로는 온갖 말이 소용돌이치지만 얼굴은 예의바른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뭐 조금 당황해서 입꼬리가 떨리는 건 봐줬으면 하지만.

 "&%-_=23%"

 점원도 뭔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데, 그도 퍽 답답한 모양이었다. 점원이 다시 무어라 말하건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우리는 잠시 마주보며 묘한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수염이 좀 깎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지저분해 보이는 걸. 일본은 이런 거 칼같이 지킨다던데, 아니었나보다.

 점원이 무언가 결심이 선 듯 가슴주머니에 걸어놓은 볼펜을 쥐고 딸깍, 하고 단추를 누른다.

 흰 형광등 빛으로 밝던 마트가 잠시 암전하더니 지잉, 하고 전압이 걸리는 소리 후에 불이 딱딱딱 하고 연달아 켜지고 있었다. 흔한 괴담처럼 피나 고깃덩이로 덕지덕지 묻은 광경이었다면 잠깐 흥미로웠겠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조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저 매대 끝, 멀리 걸레짝이 된 회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주저앉아서 실뜨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까진 없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자,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바람 앞의 향불처럼 훅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라진 건 그렇다 쳐도 웬 실뜨기람.

 매대에 걸린 상품들, 뭐 주방 용품이니 다 조리도구니, 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구석엔 세정용품 등... 그런데 아까까지 플라스틱과 금속, 나무 따위로 이뤄진 그것들이 왜 사람 꼴을 하고 있냐 그 말이다. 후라이팬이라는 표찰 아래에는 난쟁이의 면상이 넓적하게 펴져있었는데, 그 넓적하게 펴진 눈이며 코가 깜빡거리기도 하고 벌름거리기도 하고, 혀를 붸, 하고 내뱉는 모양인데 그림처럼 면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젓가락은 양털같은 무언가로 바뀌어 흐물흐물하고 쥐어보니 방귀 소리가 울린다.

 내가 하는 꼴을 조용히 지켜보던 점원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뒤집개 찾으시는 거 맞죠?"

 점원의 손에는, 와인색의 멋들어진 뒤집개가 있었다. 실용적이면서도 단순한 선의 아름다움을 살린, 다이소에서 이천 원에 팔 법한 그런 싸구려 플라스틱 뒤집개. 왜 손잡이 모양이 아예 달랐던 건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뭐, 뒤집개를 찾았으니 됐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예, 그거 주세요."

 내가 그리 말하자 점원은 내 손에 뒤집개를 건네주었고, 미리 가격표를 떼어 주었다. 처음 인상과 달리 꽤 친절한 점원이었다. 이제보니 조금 예쁘기도 하고. 생머리가 예쁜 여자였다. 아.

 "육백 엔입니다."

 미리 환전해두었던 동전을 건네자 점원은 '안녕히가세요.'하고 일찍 인사를 해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자동문을 지나쳐 골목길에 들어섰다. '아차, 계란을 깜빡했네.'라는 생각으로 돌아보자, 마트의 간판은 히라가나로 '뭐든지 있어요! 찍찍 마트'라고 써있었다.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이제 텔레그램에서도 알림을 받으세요! file Admin 2017.01.19. 646
공지 라한대 주최자 분에게 건의사항 드립니다 (4) Admin 2016.08.14. 908
공지 라한대(라이트노벨 1시간 쓰기 대회) 공지사항 - 대회신청은 여기 댓글로! (188) file 수려한꽃 2012.06.02. 87051
2370 라한대 (시간외) 악의 우주군단 데스코로니 MK 2020.02.13. 26
2369 라한대 공지 2020.2.12. 라한대 컷 Chikori 2020.02.13. 21
2368 라한대 [라한대] 화가 일리야 샤이닝원 2020.02.13. 25
2367 라한대 [라한대]리볼버의 총성이 멎은 후 네크 2020.02.13. 41
2366 라한대 [라한대] 모든 판타지의 도입부는 일탈 신시연 2020.02.12. 26
2365 라한대 [판한대] 운명의 별 현안인 2020.02.12. 43
2364 라한대 공지 [라한대] 2020.2.12. 라한대 시작합니다. (3) Chikori 2020.02.12. 41
2363 라한대 공지 [분재배 라한대] 2020.02.09 라한대 마무리 (1) 분재 2020.02.09. 45
2362 라한대 [라한대] 전당포 자살희망자 2020.02.09. 28
2361 라한대 이계마트의 인간점장 (4) 밀크커피 2020.02.09. 55
2360 라한대 [라한대] 60초 코비F 2020.02.09. 28
2359 라한대 내가 이계마트의 주인이 된 사연에 대하여 ㄹㅍ 2020.02.09. 20
라한대 [라한대] 주방 용품 코너 샤이닝원 2020.02.09. 15
2357 라한대 공지 [라한대] 2020.02.09 라한대를 개최합니다. 분재 2020.02.09. 29
2356 라한대 공지 02.04 라한대 닫는 글 (3) errr 2020.02.08. 57
prev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160'이하의 숫자)
of 160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