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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화가 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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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언제나 같은 일을 했다. 스승이 깨어나기 전에 공방을 청소하고, 전 날에 스승이 주문한 물품을 쓸 수 있게 옮겨놓고, 스승의 식사를 준비하고, 스승의 보조를 하고, 스승의 잠자리를 준비하고.

 지루할 법도 하건만, 소년은 언제나 성실하게 그 의무를 다하였다. 스승이 길거리에서 굶어 쓰러진 자신을 주워 도제로 삼고, 다른 장인들이 '길거리에서 주워 쓴 녀석을 무얼 믿고 가르치느냐.'라고 내쫓으라 말할 때, 자신을 제자로 인정하고 믿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도제와 비교하여 자신의 실력은 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우둔한 두뇌는 스승의 기술을 따라하기에 급급하였다. .

 소년은 스승을 실망시킬까 두려웠다.

 아니, 일리야는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


 "녀석, 나중에 한 명의 장인이 되어 일감을 받으려면 그림은 잔재주일 뿐이다. 귀족들이 원하는 것은 계집의 초상화 따위가 아니야. 그들의 교양을 증명해 줄 경전 속 교훈과 고상함을 담은 웅장한 화폭이다.

 소년이 그리는 인물화를 보고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가벼이 흘려들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소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기 좋아하는 인물화나 풍경화는 아무런 지식도 필요 없는 잔재주일 뿐,

 그러나 일리야는 사람의 웃음을. 

 만물이 찬란히 빛나는 것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들고 웃음을 짓는 것을 그리는 게 좋았다. 

 새가 노래하고 이삭이 익어가는 것이 좋았다. 

 도시가 노을에 붉게 물들어 뽐내는 것이 좋았다. 

 여러 사람이 거리에 가득차 귀족의 보무도, 이국의 상인이 진기한 짐승을 이끄는 것이, 장인과 상인이 열띤 흥정을 벌이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런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자신은 당당한 장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


  "당신, 매일 여기서 뭘 그리는 거예요? 일리야 맞죠? 호르헤 아저씨네,"

  "왓!"

  일리야의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귀족가의 여식인듯 꽤나 잘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호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치안은 훌륭한 것 같아 보여도 언제든지 뜨내기들이 사고를 칠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호위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 제가 방해가 된 것 같네요. 그리던 거 마저 그리세요."

 일리야가 의자에서 일어나 어설픈 예법으로 인사를 하자 소녀는 손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버렸다. 

 "어? 내 그림! 어디갔어! 다 그린건데!"

 소녀와 함께 그림이 사라진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일리야는 침대에 누워 잠에 들 때까지 소녀의 얼굴을 곱씹었다.


===


 "스승님."

 "왜."

 "아닙니다."

 일리야의 스승은 붓을 세심히 내려놓고 옆에서 회반죽을 바르던 일리야의 흙삽을 빼앗아 들었다.

 팍,

 뒤통수가 얼얼한 소년은 스승이 건네준 흙삽을 받고서 묵묵히 회반죽을 섞었다.

 "프레스코 그릴 땐 헛소리 하지 말랬지. 반죽이 말라버리면 네가 다 벗겨서 다시 칠할 테냐?"

 "그게... 이번 의뢰인은 그롬보 씨였죠."

 "그렇지."

 "그 분이 따님이 있던가요?"

 스승은 일리야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어찌됐든 일리야는 셋 뿐인 도제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제자였으니까. 그러고보니 의뢰인에게 하나도 닮지 않은 딸이 있다던가. 아버지의 모발은 갈색인데 딸은 북쪽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환한 금발이라고 했다. 그것 때문에 딸이 태어났을 때 아내는 처가로 쫓겨나듯 가버렸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보통이라면 귀족의 아이가 태어나면 시골로 보내 어느정도 자라게 하건만, 아내를 쫓아보내다니. 우스운 일인지라 도시에 소문이 파다했었지.

 "하나 있다고 하더지."

 스승의 손은 능숙하게 움직여 도안을 그려간다. 다음 장인이 색을 칠하고, 그 다음은 명암을 그려넣고, 그 다음은 세부적인 장식을 그려넣고, 또 다음은 인물을 완성하고...

 장인들은 손만 바삐 움직이던 중 차례 차례 떠들기 시작한다.

 "머리가 황금처럼 밝은 빛이라더지."

 "나이가 열하나 쯤 됐다던가."

 "맞아 그 정도 됐을 거야. 저번에 석호 근처에서 보았는데 호위도 없이 다니더군."

 "내가 보았을 땐 겁도 없이 선원들에게 다가가더군, 녀석들도 귀찮은 기색으로 툴툴대는데 고집스럽게 뭘 물어보더라."

 "크크크, 버려진 거야. 제 어미처럼 말야. 의뢰주가 매일 같이 고급 창녀를 찾아다닌다더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작자들이 입이 저리 가벼워서야. 일리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인들은 폐쇄적인 사회에서, 심하면 도시에서 평생 살다가 죽는 건 예삿일이요. 만나는 사람이 스물이 채 안되는 협소한 인간들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궁금하던 것은 웬만큼 알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


 "일리야,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있나요?"

 "예, 저번에 브루야 가문에서 세운 기둥을 그리겠다 마음 먹었는데, 이제야 그리게 되었습니다."

 "어머, 저 기둥이 들어온 지 일 년은 더 되지 않았나요?"

 "빛깔이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에 드는군요."

 수평선 너머로 잠겨가는 태양은 피처럼 붉은 광선을 뿜어내며 흰 광장을 푹 적시는 것이었다. 우뚝 솟은 사자 기둥도 그 빛깔에 가득 물들어 마기(魔氣)마저 풍기고 있었다. 저번 만남 때 소녀가 이른 대로, 계속해서 색을 더해갈 때 귓가에 작고, 떨리는 숨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일리야."

 "예."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제가 이뤄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이름도 모를 소녀의 부탁을 응낙하는 것은, 자신 또한 어스름의 마기에 취했기 때문일까. 스스로도 이해가 안되는 대답이었다.


===


 "축하해! 일리야! 드디어 제 몫을 하게 되었어! 영감도 표정 좀 풀어! 기쁘지도 않아?"

 이웃한 공방의 장인, 다니엘라 씨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오늘은 자신이 한 명의 장인으로 거듭난 날이었다. 조합이 드디어 자신을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 님은 그다지 기쁜 눈치는 아니었다. 일리야가 아직 한참 모자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지만, 주위의 장인들 중 스승에게 동의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일리야, 자신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장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성실하게 일해온 것은 스스로에게 부끄럼 한 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장인이 될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도제가 장인이되었을 터이다. 자신이 최근 몇 년간 이름이 알려져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었고, 그것을 조합에 상납하는 것 또한 짐작가는 요소기는 했어도 장인으로 인정받기엔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도제가 되어 성실히 일했다. 도망가지 않은 것은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적은 급료를 감사히 여긴 것은 배고픔을 알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길 밖에서 발버둥쳤기에, 길 안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는 길 위를 떠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닦여있는 길을 걷는 것은 쉽다, 어렵다. 가타부타 말할 것이 아니었다. 길이 있었고, 길 위를 걷는 것은 당연하기에.

 "이 모든 영광을 저의 스승 님께 돌리겠습니다! 저의 아버지였으며, 존경스러워 마지 않는 스승이여!"

 일리야는 술잔을 높이 치켜올리며 건배했다. 예술조합의 장인들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즐겼다. 덕분에 조합에서 축하금으로 내어준 돈도 몽땅 써버리고 모아둔 쌈짓돈 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


 거리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소년은, 여전히 성화 한 장 그릴 줄 모르지만 조합에서 손 꼽을 정도로 부유한 장인이 되어 있었다. 턱수염을 기르고, 가늘었던 뼈대는 굵어지고 가슴은 탄탄히 부풀어 올랐다. 이마는 햇빛에 반짝였다. 녹빛으로 염색한 비단옷은 금실로 수가 놓아져 있었다. 색과 부감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꽃을 피워 절정에 이르러있었다.

 '플로렌스 공의 초상화 대금을 받는다면, 저택을 더 큰 곳으로 옮길 수 있겠어... 울트라 마린도 더 사두어야지."

 일리야는 백색 광장을 걸으며 셈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귀족가의 공자들이 줄을 이뤄 따라오고 있었다. 일리야의 도제였다. 일리야의 명성은 해가 갈수록 드높아져 상속권이 없는 공자들은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화가의 제자를 자청했다.

 일리야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길! 자신은 길 끝에 다다라있었다. 젊고, 유능하고, 부유하고, 명예 마저 손에 쥔 인생 아닌가? 

 일리야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장 무겁게 전하는 충고는 <자신의 길에 충실하라.> 단 한가지였다. 너희들도 나의 길을 따라오라, 너희가 원하는 것이 길 끝에 있으니.

 그런 생각을 되뇌이며, 광장 서편에 있던 저택이 매물로 나왔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수평선 아래로 잠기는 노을은 무척이나 붉어, 희미해진 언젠가의 기억을 선명히 염색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 일리야."

 농밀한, 그리고 고혹적인 음성이 노을을 등지고 들려왔다.

 "레이디..."

 눈 앞의 여인은 자신의 그림을 가장 먼저 알아보아준 사람이었다. 그때와 같이 아무런 호위도 없이.


===


 "차 맛이 좋군요."

 일리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접실의 벽면은 수 많은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자신의 화풍을 따라한 것 같은 풍경화였다. 색채가 매끄럽지 못하다든가, 구도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다든가. 그런 미숙한 점이 눈에 걸리고 있었다.

 "풍경화를 좋아하시는 줄 몰랐군요. 제가 언제 한번 그림을 선물해드리지요."

 조금 오만하게 들리는 그 음성은 얼굴 위로 떠오른 웃음과 더불어 기꺼운 데가 있었다.

 눈 앞의 여인은 일리야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고 차향을 즐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 여인이 차를 반쯤 마시고 집사를 내보내며 말을 꺼냈다.

 "마스터 일리야, 혹시 어릴 적 이야기를 해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 때도 오늘처럼 백색광장이 붉게 물든 날이었지요. 제가 당신의 그림을 선물 받았던 날은. 기억하시나요?"

 "...죄송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워낙 많은 그림을 그렸던지라."

 실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그렸었다. 매일 하나 씩 그리느라 얼마 되지도 않는 급료를 다 써버리곤 했었으니까. 언제쯤을 말하는 건지도 헷갈렸다. 자신은 눈 앞의 여인에게 단 한 점의 그림도 선물한 적이 없던 것 같은데.

 "그러면 그림을 보면 기억하시려나요?"

 여인은 그렇게 말하곤 손가락으로 벽면에 걸린 한 그림을 가리켰다. 십오 년전 쯤인가. 한 귀족가문이 세웠던 기둥을 주인공으로 한 풍경화였다. 붉은색의 오묘한 흐름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그것이 마음에 들어하자 당신이 선물해주었지요."

 "...예."

 여인은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웃음기를 지우고 차를 자신의 찻잔에 따라내었다. 그런데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귀족 여인이 자신에게 시덥잖은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잠자코 있는 일이었지만.

 "그리고, 저 그림 모두 당신이 그린 것이지요. 이제 보니 모르는 눈치군요."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열렬한 팬임을 은근히 드러내었는데도 정작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으니 그녀는 필시 '감사합니다. 레이디, 이러한 열렬한 애정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군요.'라는 말이라도 기대했을 테지. 귀족이 원하면 이루어 주는 것이 예술가의 도의가 아니겠는가?

 "레이디, 감사합니다. 예전부터 제 그림을 사랑해주셨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자신의 감사인사에도, 여인은 탐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으며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 아닌가?

 "레이디, 제가 무언가 실수라도 했는지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면, 이 일리야.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변했어요. 당신은 변했어요. 이제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같군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기대한 것이 잘못된 건가요?"

 "그게... 무엇을 말씀하는 건지, 이 일리야는 잘 이해가 되지않는군요."

 "그만! 그만! 아무런 영혼도 담기지 않은 사탕발림은 그만해요. 당신의 혀는 이제 설탕에 썩어 문드러졌어요. 당신의 눈은 사막의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졌고요! 당신은... 어째서, 당신은..."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일리야를 계속 비난하였기에 견디다 못한 일리야는 떨떠름한 인사를 올리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일리야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저택도 자신의 것보다 크고 훌륭한 것이, 탐이 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팔려는 의사가 있는지, 나중에 운이라도 띄워보아야겠구나. 하고 셈을 해보다가, 자신의 저택에 들어서 여러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꼼짝 않고 침대까지 옮겨져 잠에 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리야는 꿈속으로 깊숙히 가라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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