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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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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23 Feb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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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limo
협업 참여 동의

0.

마침내 까다로운 선발과정이 끝났다.

차후 유전자 결함 발생확률이 가장 낮은 300쌍의 배아가 결정되었다.

이들은 곧 쉘터에 무사히 안치될 것이고, 500년 뒤에나 눈을 뜰 것이다.

쉘터에는 배아들 뿐만 아니라 차후 이들에게 영양을 공급할 장치, 쉘터의 전력을 500년간 유지하기 위한 장치,

500년 뒤 인류가 새로운 물건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 등 다양한 물건이 실렸으므로,

이제 쉘터 안에는 남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서랍 하나 크기의 빈 공간.

수천, 수만년간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해온 인류가 그들의 후손에게 할당할 수 있는 양은 오직 그 뿐이었다.


다툼과 분란과 화합과 배신의 역사.

인류가 지난세월 겪어온 그 모든 희노애락들.

과학과 철학, 사회와 종교. 그 모든 빛나는 인류의 유산들.

저 하늘에 떠오른 수천 개의 별들에 아물아물 아로새겨진 그 무수한 신화와 전설들.

별들보다 더 빛나던 천재들이 한땀 한땀 쌓아올린, 때론 무너뜨려야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더욱 견고히 재건되건 하던, 진리.

그리고 마침내. 어째서 우리 인류가, 끝에 다다라 실패하고 말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 모든 이야기들이 전부 서랍 하나에 정리되어야만했다.



1.

모든 전자 기록매체는 기각되었다.

500년이란 세월을 견딜 수 있을까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정말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인류는 선택해야만 했다.

마지막 남은 인류가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하는가.


그 작은 서랍 안에 그들의 성서를 넣는 사람의 종교가 신인류의 종교가 될 것이고,

그 서랍안에 역사서를 넣은 사람의 국가가 곧 신인류의 국가가 될 것이었다.

그 서랍 안에 마르크스를 넣으면 신인류는 빨갱이가 될 것이고, 아담스미스를 넣으면 시장 자유주의자가 되리라.

인류의 멸망 경위를 적어 넣는다면 신인류는 극단적인 환경 보호론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인류 마지막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한 토론이 시작됐다.

각지의 석학들이 얼마남지 않는 삶의 끝을 불태워가며 토론을 벌였다.


토론은 휴정따위 없이 밤낮으로 이어졌고, 석학들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 그 자리에서 지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리를 지켰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서로의 멱살을 잡아가며 멍멍꿀꿀 소리를 질러댔다.

다 늙어 죽어가는 이들이 어디서 힘이 났는지, 토론장에서는 하루에도 몇 건의 살인이 일어났다.


신경쓰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외쳐대기 바빴기 때문이다.

어차피 얼마있으면 모두가 죽을 판인 것을.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들이 후에 기억되는가, 아니면 영원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가였지.


마침내 그들이 누군가의 주장을 귀기울여 듣게 된 것은 토론을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지쳐 늘어진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와 연단에 오른 것은 초라한 중늙은이었다.


그때까지도 기절하지 않고 버틴 노교수 몇 명은 그 늙은이가 한때 시대를 풍미한 히트곡을 부른 가수임을 알아봤다.

다만 그 가수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전형적인 원히트원더 가수였던 것이다.


이 토론장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는 노가수는, 회의장의 그 누구와도 다른 침착한 눈으로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꼭 뭔가를 넣어야 합니까?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한 인류를 그렇게까지 구속하고 싶으십니까?"



2.

그 순간 그 남자가 살해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7일이라는 시간 탓이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은 총을 꺼내들고, 탄창을 확인한 뒤, 남자를 조준하고, 검지 손가락을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그건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었다.


사람들의 무기력함을 틈타, 남자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가 어릴 적, 인상깊게 읽었던 고전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한 소년이 베푼 작은 선행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이야기죠.

 선행의 결과로, 소년은 유명해지고 마침내는 대통령과 오찬을 같이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됩니다.

 대수롭지도 않고 흥미로울 것도 하나 없는 그런 이야기지요.

 이야기 결말에서 소년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는다는 것과, 소년의 어머니가 그걸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요."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소년의 어머니가 말하더군요. '저는 그 아이가 그날 죽어서 기뻐요.

 아이의 인생에서 두번 다시는 그런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을테니까요. 아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에 죽은거에요.'"


아직 기운이 남은 늙은이 하나가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래서 어쩌자는건가! 인류는 전성기를 맞이했으니까, 여기가 인류가 끝이니까 그냥 조용히 멸망하자고?

 저 공룡이 포유류가 지구를 점령하기 전에 멸망하기 전에 자멸햇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물러가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하고 싶은건가?

 쉘터고, 아이들이고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그게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인가!"


잠자코 듣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가 그 어머니와 똑같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이 인류의 전성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3.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 소년의 어머니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한거겠죠. 소년은 이제 두번 다시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같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소년의 작은 선행이 그런 기적으로 돌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고. 소년의 삶은 쇠락하고 쇠락할 것이며, 평생을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하며 살았을거라고.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죽은게 맞는 일이었다고."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서 굳이 소년의 미래에 어떤 가능성이 펼쳐질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저희 모두 유니콘을 꿈꾸기에는 너무 늙은 사람들이잖아요?

아마 그 어머니 예상이 맞았을 겁니다. 기적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면 기적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애초에 소년에게 그런 기적같은 날이 없었다면?"


남자가 문득 자신을 삿대질했던 교수를 돌아보고는 되물었다.


"교수님께서는 500년 후의 인류가 여전히 세계의 지배자로 자리잡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교수는 답을 어물거렸다. 그는 한 소수 종파의 지도자로써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뇌가 돌아가는 상태였다면 달변으로 상대를 무릎꿇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생각을 이어가기조차 힘들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사내는 애초에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작 300쌍의 어린 아이들. 어쩌면 해동된 지 채 하루도 안 되서 맹수들한테 사냥당하고, 그걸로 끝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몇 명 정도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인류가 지금 쌓았던 것과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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