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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대] 그녀는 원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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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28 Aug 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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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아님이
협업 참여 동의

"난 네가 싫어졌어."


며칠째 폭염이 계속되고 있는 여름날이었다.


그녀는 딸기쥬스를 시켰다. 단맛을 좋아하는 어린애같은 입맛이기 때문이다. 나는 핫초코를 시켰다. 열로 열을 제압한다는 이론의 신봉자라서는 아니다. 나도 단맛을 좋아하는 어린애같은 입맛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사거리 모퉁이 이층에 있는 카페였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밖을 구경했는데, 왜냐면 단순히 밖을 보고 있기만 해도 더워질 정도로 뜨거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냉방이 빵빵한 카페에 앉아 있었으니까, 더운 기분 정도는 들어주는 것이 예의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

"그거 노래 가사잖아."


아마도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때 나온 노래다. 아니, 유치원 때였던가? 사실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노래가 언제 나왔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 나이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 여자의 나이는 물어보지 않는 것이 예의다.


물론 난 남자지만. 그녀는 재미없어졌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고는 계속 흥얼거렸다.


"다른 여자가 생겼어."

"나보다 훨씬 좋은?"

"당연하지."

"소개시켜줘."

"뭐?"


그녀가 딸기쥬스 잔을 탕! 하고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어떻게 날 놔두고 다른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할 수 있어?"

"아니… 우리 농담하고 있는거 아니었어?"

"농담이라도 할 농담이 있고 안할 농담이 있잖아! 헤어져!"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노래 가사가 아닌 모양이다.


솔로생활 1일차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불합리한 땡깡에 휘둘리지도 않고. 괜히 비싼돈 주고 딸기쥬스를 사다 바칠 필요도 없고. 사실 태어날 때부터 커플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는 태어난 그대로의, 태초의 상태로 돌아온 것 뿐이다.


그냥 이대로 계속 지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하루를 열흘로, 열흘을 십년으로 늘려도 괜찮지 않을까.


여름은 해가 길다. 일곱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아직까지 창 밖은 그럭저럭 밝았다. 내 방에는 에어컨이 없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사실 하루종일 열려 있었다. 열어놨다고 해서 딱히 더 시원해지거나 한건 아니었지만, 방이 더우면 시원할 것 같은 기분이라도 들어주는 것이 예의다.


뒷산 너머로 햇님이 퇴근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 보고 싶었지?"


아니. 전혀.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 후련했어. 감옥을 탈출한 쇼생크의 기분이었어. 비만 왔다면 하늘을 우러러보며 프리덤을 외쳤을텐데.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이름은 쇼생크가 아니니까. 가끔씩 그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나쁜 작품들이 있다. 플란더스의 개나 젤다의 전설 같은 것들. 대체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대.


"음, 조금?"

"조금?"

"조금… 만 더 참았으면 상사병으로 죽었을지도 몰라."


전화기 너머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답지 못하게시리."

"실망하지는 마. 난 원래 이런 놈이니까."


목소리에 웃음기가 좀 더 진해졌다. 내가 반해버린 목소리다. 사실 목소리에만 반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멋있다는 것이다. 특히 웃고 있을 때.


"뭐, 어쩌겠어. 잘난 내가 이해해야지."


나와 그녀는 통닭을 먹으러 나왔다. 우리는 맥주를 먹으면서 목청껏 god 노래를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목청껏 부른 것은 그녀고, 나는 눈치껏 코러스만 넣었지만. 사장님은 맥주 삼천을 하나 공짜로 갖다주시면서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조용해졌다. 정확히 오분 동안.


결국 사장님은 우리를 쫓아내셨고, 내게는 삶과 우주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두가지 생겼다. 왜 그녀는 맥주 한병에 정신을 못차리는 주제에 술을 그렇게나 좋아하는가. 어째서 그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결국 내가 늘려가기로 선택한 것은 이런 하루인 것이다.


"…더럽게 무겁네."

"죽을래?"

"어차피 내일이면 기억 못할걸?"


그녀는 대답 대신 기묘한 신음소리를 내며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녀를 다시 고쳐 업었다.


보통날이었다,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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