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라한대] 여름은 병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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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11 Aug 3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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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맛?"
"응. 병맛."

지나가던 하복 블라우스를 입은 여고생이 우리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멀쩡하게 생긴 년놈들이 여름 마지막 극성 더위에 정신줄이 엿가락처럼 휘었나? 딱 그 정도의 표정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말 너무 덥거든.

"내게 있어 여름의 맛은 병맛이야."
"크응."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쇳소리 섞인 콧소리를 낸다.

덥다. 
아스팔트가 녹을 것처럼 모락모락 열기를 뿜어낸다. 나는 턱 아래에 고인 땀을 쓱 닦는다. 
버드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가드레일 위에 앉아서 운 좋게 지나가는 바람을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박거리는 소리에 고갤 돌리니 내 옆에 있던 꽁지머리 여자애 - 그냥 뭐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해두자. 불알친구라 하기엔 쟤는 불알이 없거든 - 가 뻘뻘 흘린 땀 때문에 뺨에 착 달라붙은 옆머리를 살짝 쓸어넘기고 있다. 젖은 검은 머리와 하얀 뺨의 흑백대비에 머쓱해져 다시 옅은 채도의 하늘을 올려다 본다.

"물론 피싯- 소리를 내며 열리는 캔음료의 묘미를 무시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래도 여름 하면 역시 병음료랄까."

어쩌다 이런 얘기가 나왔더라. 
그래. 그랬지.

"너, 아까 쓰레기통에 던지기 내기로 캔음료 사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러냐?"
"꼼생이 같긴."

여자애 역시 내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병음료는 음식점이나 술집 같은 데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니깐."
"술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우리집 치킨집하잖아."
"아. 그랬지. 얼마 전에 업종 변화했더라. 분식집하는 줄 알고 갔다가 너희 엄마한테 바가지 쓸 뻔 했어."
"헤헤, 우리 엄마 짱이지?'
"넌 그런 거 배우지 마라."

아무튼 통계는 됐고, 눈대중으로 봐서 피씨방, 편의점 다음으로 많은 가게다.
대체 그 많은 치킨은 누가 먹었을까.

"확실히 캔음료에 비해 병음료가 따기가 힘들긴 해.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병따개가 있어야 열 수 있으니까 말야. 거기다 병 자체 무게까지 합치면 엄청 무겁지." 
"거기다 버리기 힘들다는 점도 잊지 마라."
"응, 이 몸은 바로 치킨집의 딸인 거야. 한 궤짝 채운 콜라병의 무게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거."
"그래서 그렇게 팔 힘이 셌구나. 굵기도 굵고."
"얼마 전부터 들기 시작했다구!?"

언제 챙겼는지, 아까 내기하다 남은 구긴 종이조각에 관자놀이를 맞는다. 
거봐.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니까 씩씩 대지.

"휴우, 그렇지만 말야. 요즘 들기도 쉬운 종이팩 음료가 점점 대중화되고 있는 중에도 병음료는 사라지지 않아. 않을 거야."

얘가 더위 먹었나?
살짝 그런 걱정이 들고 만다.

"너, 그 눈은 뭐니?"
"네가 생각하는 대로."
"으헤, 조금 부끄럽다야."

굳이 평소처럼 정정해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우니까 다 귀찮다.

"자, 그러니까 여름의 진리를 이 누나가 알려줄게."

어깨에 매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두 개의 병콜라를 꺼내든다.

"……좀 전에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뛰어갔다온 게 이거 때문이었어?"
"헤헤헤."
"브이 그리지 마라. 얼마나 더웠는지 알아?"
"헤헤, 그래도 내기는 내기잖아."
"집에서 가져오는 건 반칙이라고."
"나중에 내 가게가 될 건데?"
"……미래가 보였다."

장래의 바가지 치킨집 아줌마가 가방에서 병따개를 꺼내들어 뿅- 소리를 내며 병뚜껑을 딴다.
시원하게 따진 병뚜껑이 슝 날라가 딸그랑딸그랑 아스팔트 위를 구른다. 

"이거, 의외로 기술이 필요하더라."
"크응. 그 전에 던지기나 연습하시지 말이다."
"……베에-"

혀를 내밀며 손수 병따개로 따준 콜라병을 내게 내민다.
볼록한 병이 손에 착 감긴다. 
차갑다. 

"아-앗, 잠깐! 먼저 마시면 반칙!"

뿅-
이제는 자기가 든 콜라병의 병부리를 내게 내민다.

"자, 짠!"
"짠?"
"응, 짠!"
"……좋아, 짠!"

짤랑-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유리구슬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청명하게 울린다.

"캔음료나 종이팩으로는 이런 시원한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거야!"

여자애는 병을 입가에 대고 고개를 뒤로 확 넘기며 꿀꺽꿀꺽 시원하게도 들이킨다.
마침 개운한 바람이 운 좋게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긴다.

"캬아! 이 맛에 산다니까! 헤헤."
"……."

역시 넌 앞머리를 넘기는 것이, 그리고 해맑게 웃는 것이 참 예쁘다.
절대로 말 안해줄 거지만.

"앗, 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었네."

뒤늦게 앞머리를 수습하는 모습을 안주 삼아, 입꼬리를 올리며 병을 입에 대고 홀짝인다.

혀 끝에 병의 맛이 남는다.
혀에 닿은 차갑고 맨들맨들한 유리의 감촉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어쩐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까끌한 탄산의 맛이 더욱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쩐지 그립고 아련한 느낌이 나는 건, 왜일까……?

"앗 차가!"
"으히히!"

순간, 목덜미에 차가운 병이 닿는 감촉이 느껴진다.
그 냉기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병이 몇 번 빙글빙글 병을 목, 어깨 위에서 구른다. 오돌토돌한 병의 감촉이 매끄럽게 몸의 라인을 떠돌며 한기를 흩뿌린다.
간신히 정신차리고 보니 하늘하늘 춤추는 교복자락은 벌써 저 멀리까지나 도망친 상태다.

"나 잡아봐라아!"
"야, 너 유치하게 이럴거야!?"

차마 병을 던져 맞춘다는 선택은 고르지 않는다.
바가지 치킨집 아줌마의 미래를 지우긴 조금 아깝거든.

그 대신, 땅바닥에 나뒹굴던 병뚜껑을 집어들어 멋지게 집어던진다.
깔끔한 호선의 궤도를 그린 병뚜껑은 여자아이의 뒤통수를 따꽁, 쥐어박는다.

"꺄오!?"
"야……!?"

잡초밭을 구르는 꽁지머리의 여자애를 보며, 달리다가 양손으로 뒤통수를 부여잡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 나는 확실히 깨달고 만다.

……참 꼬숩구나.
네 말대로 여름은 병맛인가 보다.

comment (4)

미르
미르 11.08.31. 23:31
11시 11분...21분 지각이네요
미르
미르 11.08.31. 23:33
감평까지 끝내서 탈락시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도 7시에 시작한다고 해 놓고 8시 30분에 시작한 잘못이 있으니...일단 다 보고 감평은 여기 덧글로 달겠습니다
미르
미르 11.09.01. 00:00
담백한 묘사가 여름날에 어울리는 글이네요. 하지만 대화체에서 미묘하게 일본체 느낌이 나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치미 11.09.01. 21:10
아.. 시간 제한을 잘 몰랐네요. 저도 9시 끝날 무렵에 발견해서 10시부터 1시간 쓰고 올리려고 보니까 감평이 없길래 괜찮은가 싶어서 몇 번 더 훑어보다가...ㅠㅠ

의식적으로 후다닥 말본새에 뽀인트를 주려다보니 일본식 라노베스러운 어투가 된 게 역시 문제였을까요!? 아무튼 마감 넘긴 글에 너그러운 감평 감사합니다.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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