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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 시대의 캐릭터 표현법─설정, 시츄에이션, 스토리 단계의 테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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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28 Apr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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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 시대의 캐릭터 표현법─설정, 시츄에이션, 스토리 단계의 테크닉

by 크로이츠 2009/11/24


   많은 사람들이 현재는 ‘모에’의 시대라고 합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의 오타쿠컬처는 ‘모에’를 의식한 미소녀 캐릭터로 가득 차 있고, 상업적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일본 오타쿠컬처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는 이상 한국에서도 ‘모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라이트노벨 등의 창작의 영역에서도 ‘모에’를 의식한 시도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죠.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미소녀 캐릭터를 활용하는 창작기법은 ‘모에’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옛날에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캐릭터라는 건 수십 년 전부터 계속 만들어져왔고, 캐릭터를 띄워주기 위해 이야기를 구성한 작품도 허다했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추세는 단순히 비중의 문제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체 시장에 있어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있을 뿐이며, ‘모에’ 열풍이라고 해서 창작과 소비의 기본적인 성격이 변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미소녀 캐릭터를 등장시킨다고 해서 ‘모에’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간혹 미소녀를 많이 등장시켜서 노출을 시키거나 아양을 떨게 하면 충분히 ‘모에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그럴 경우 오히려 한국의 무협이나 판타지 쪽의 발상에 가까워질 뿐, ‘모에’에서는 멀어질 뿐입니다.
   캐릭터에 대한 욕망 내지는 정서의 차이가 ‘모에’를 그리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창작기법의 측면에서 ‘모에’를 그리려고 한다면 좀 더 다른 방법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캐릭터를 의식하는 방식 자체는 예전부터 존재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모에’의 일반화와 함께 발전되어 뿌리를 내린 ‘기법’이 있으니까요.

   90년대 말부터 지금에 이르는 ‘모에의 시대’ 속에서, 오타쿠컬처에서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캐릭터 표현이 발달했습니다. 이 기법은 예전에는 없었던, 혹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만, ‘모에’의 유행과 함께 발달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며 ‘모에’를 기술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하고 있죠.

   과거의 캐릭터 조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창작기법 레벨에서의 ‘모에’ 캐릭터 표현.
   이 표현 방식은, 대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설정, 시츄에이션, 스토리의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설정 단계의 모에 테크닉

   이른바 ‘모에 요소’를 조합해서 캐릭터를 만드는 기법입니다.
   메이드, 무녀, 소꿉친구, 금발, 빈유, 고양이귀, 말버릇, 츤데레 등의 요소를 조합해서 해당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의 흥미를 유도하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요소에 대한 ‘모에’란 단순한 페티시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메이드 요소를 지닌 캐릭터라고 할 경우 오타쿠는 단순히 메이드라는 존재 자체에 호감을 갖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만화나 게임 등을 통해 접해온 메이드의 이미지, 시츄에이션 등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메이드라는 ‘장르’를 나타내는 ‘기호’로서 메이드 요소를 애호하는 것이죠(이와 같은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메이드지만 가사에 서투름’, ‘소꿉친구지만 쌀쌀맞음’과 같은 표현도 효과적이게 됩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모에’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논했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이와 같은 모에의 특성을 ‘데이터베이스 소비’라고 정의했습니다. 작품이나 캐릭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것이며, 모에 요소란 이와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기 위해 제시되는 기호라는 것이죠.

   이와 같은 캐릭터 조형 및 소비방식이 20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반화되면서 오타쿠컬처에서 캐릭터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스토리 등 작품 자체의 힘만으로 승부하지 않아도, 캐릭터에 기호를 삽입함으로써 오타쿠컬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그 결과 특이한 현상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만 존재하는 기획이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죠. 캐릭터상품 판매점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데지코, 미소녀게임잡지의 독자참가기획인 『시스터 프린세스』의 여동생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가 없는 상태에서 판매하고 소비되는 캐릭터라는 건 예전에도 존재했습니다만, 상업적으로 의미 있을 정도로 유행하기 시작한 건 이 시기부터입니다. 이윽고 캐릭터 인기를 바탕으로 하여 없었던 스토리를 구성한 작품이 제작된다고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죠.
   모에 요소를 잘 조합한 캐릭터만으로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과거에는 작품의 배후에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요성이 저하하는 것과 함께 오타쿠계 문화에서는 캐릭터의 중요성이 증가했고, 그 다음에는 그 캐릭터를 생산하는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가 정비되게 되었다. 이 10년 간의 오타쿠계 문화는 그런 커다란 흐름 속에 있었지만, 90년대 말에 나타난 『디지 캐럿』은 그야말로 그 흐름이 갈 데까지 간 지점에서 나타났다.
실제로 이 작품의 캐릭터는 전부 의도적으로 모에 요소를 과도하게 조합해 만들어져 있다. 데지코는 ‘프릴이 잔뜩 달린 메이드복에 하얀 고양이귀 모자, 고양이 장갑, 고양이 신발, 그리고 고양이 꼬리. 완전무결한 모에모에 옵션 장비’이며, 푸치코는 ‘점박 무늬의 고양이귀 모자를 쓰고, 세라복에 호박 부루마. 엉덩이에는 점박 고양이의 꼬리가 달려있다. 팬에게 있어서는 매우 흉악하면서 반칙적인 모에모에 코스튬’이라고 소설판에서는 묘사하고 있지만, 이런 자기 패러디적인 기술이 이 작품이 놓여진 위험한 위치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데지코는 고양이귀를 달고 ‘그렇다뇨’ ‘지쳤다뇨’하고 말하는데, 그건 고양이귀와 ‘뇨’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양이귀가 모에 요소이며 특징적인 말버릇 또한 모에요소이기 때문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90년대의 오타쿠들이 그것을 요소라고 인정하고, 그리고 현재는 그 구조 전체가 자각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하지만 이와 같은 전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모에 요소를 조합한다는 창작기법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퇴색된 상태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특정 요소를 지닌 캐릭터를 찾는 사이트까지 성행할 정도였지만, 요새는 ‘메이드 속성’이라든가 ‘네코미미 속성’이라든가 그런 말조차 듣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억지로 이것저것 갖다 붙인 노골적인 캐릭터, 전형적이고 뻔한 캐릭터의 난립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츤데레’가 유행하면서 모에의 중심이 속성이라는 ‘설정’의 단계에서 ‘시츄에이션’의 단계로 이행되었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2) 시츄에이션 단계의 모에 테크닉

   ‘츤데레’는 모에 요소의 일종이긴 합니다만, 기존의 속성들과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모에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기호’의 역할은 거의 없으며, 그 매력은 실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츄에이션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츄에이션이란 장면장면에 있어서 캐릭터가 보여주는 대사 및 행동을 가리킵니다. 전형적인 예로는 츤데레 캐릭터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건네주면서 “따, 딱히 널 위해서 준비한 건 아니거든!”라고 말하며 얼굴을 붉힌다, 라는 것을 들 수 있겠죠(너무 전형적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걸 원형 그대로 사용하면 개그가 됩니다만).

   설정 단계의 모에 요소, 속성은 ‘기호’로서 전형적인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양식미이자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죠.
   하지만 시츄에이션 단계에서는 그 캐릭터의 행동양식에 부합되면서도 ‘의외성’이 있는 행동이 중요해집니다. ‘이 캐릭터는 이런 성격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할 것이다’라고 기대하면서도, ‘그런 짓을 다 하다니!’하고 의표를 찌르는 상황에 ‘모에하는’ 것이죠.

   한때 일본의 대형게시판에서 유행하던 ‘신(新)장르’ 시리즈를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신장르’란 츤데레처럼 어떤 행동양식을 갖는 성격을 설정하고 시츄에이션을 적어나가는 놀이(?)입니다만, 스토리는 물론 이름이나 외모 등 캐릭터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일반적으로 女와 男의 대화만으로 진행됩니다) ‘모에’가 성립하고 있습니다.

신장르「자학적 츤 마지막에 데레」

1
女「저기 男, 넌 진짜 여자 보는 눈이 없다!」
男「어? 갑자기 뭐야」
女「니 여자친구는 키도 작고 가슴도 작고, 성격도 엉망이고
  요리라든가 여자다운 건 하나도 못 하잖아」
男「……뭐 그렇지」
女「머리도 말버릇도 나쁘고……그……」



女「이런 나하고 사귀어줘서……고, 고마워」 


4
女「슬슬 男 생일이지?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男「글쎄, 케이크 만들어주지 않을래?」
女「당연히 못 하지. 계란후라이도 못하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男「어, 그럼 직접 만든 아무거나」
女「안 돼! 나한테 요리나 바느질 재능 같은 건 하나도 없어!」
男「그럼, 나 갖고 싶은 게 있는데」
女「안 돼! 내가 매일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낭비벽이 있는 무계획녀라는 거 알면서 하는 소리야?」
男「…그럼 뭐면 되는데?」



女「나, 나는……어때?」 

─신장르「자학적 츤 마지막에 데레」(출처: 신장르 정리)

   캐릭터가 귀여운 행동을 하는 시츄에이션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의외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귀엽다기보다는 엉뚱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실세계에서라면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될 정도인 경우도 흔하죠.
   그렇기 때문에 시츄에이션 단계의 모에를 추구하다보면 개그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라이트노벨이나 에로게에 러브코메가 많고, 시리어스한 작품이어도 ‘모에한’ 장면에서는 러브코메 분위기가 되기 쉬운 것도 이것 때문이죠(여성향에서의 모에는 진지한 분위기에서도 잘 성립됩니다만, 남성향에서 시리어스한 시츄에이션으로 모에를 추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또한 캐릭터가 쉽게 특이한 짓을 해줘야 시츄에이션을 구성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캐릭터의 성격도 특이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착하고 얌전한 ‘정통파 히로인’은 줄어들고 그 대신 난폭하거나 제멋대로인 츤데레 히로인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추세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겠죠.

   이처럼 스토리에서 완전히 분리된 한 장면의 시츄에이션을 소비한다는 건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으로, ‘모에’가 소비되고 연구되면서 새롭게 일반화된 것입니다. 특히 의외성을 중시해 개그처럼 되는 건 과거의 미소녀캐릭터 묘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만화에는 이와 같은 시츄에이션에 특화된 신생장르가 존재합니다. 바로 ‘모에4컷’이라는 장르로, 4컷만화의 형식을 취한 미소녀물입니다. 아즈마 키요히코나 모모세 타마미 등을 원조로 하는 장르입니다만, 2002년에 『망가타임키라라』가 창간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죠.
   일반적으로 모에4컷은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소녀 캐릭터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죠. 4컷만화의 한계상 캐릭터의 설정은 단순화되어 있는 편이기 때문에, 결국 시츄에이션을 얼마나 재미있게 구성하느냐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게 됩니다. 즉 시츄에이션의 모에를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장르인 셈이죠.
   앞서 말했듯이 시츄에이션 단계의 모에는 개그에 가까워지기 쉽고, 캐릭터에게 의외성 있는 행동을 시킨다는 점도 4컷만화의 기승전결과 친화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녀캐릭터를 이용한 시츄에이션의 모에 및 개그를 추구한 모에4컷은 하나의 완성된 장르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고, 최근의 『케이온!』처럼 애니메이션화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도 나오게 되었죠. 모에한 시츄에이션만으로도 충분히 승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모에 요소의 조합을 통한 캐릭터 설정과, 모에 캐릭터를 활용하는 의외성 있는 시츄에이션. 이렇게 놓고 보면 역시 ‘모에의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건 캐릭터이며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스토리 없이 캐릭터의 설정이나 시츄에이션만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에의 시대’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중요성은 더 커졌고, ‘모에’에 특화된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스토리 단계의 모에 테크닉

   ‘모에’에 특화된 스토리라는 건 단순히 미소녀 캐릭터가 우르르 몰려와서 주인공을 좋아해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발상은 오히려 시대에 뒤쳐진 고전적 방식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 단계에서 ‘모에’를 극대화시키는 기법, 그건 바로 모에 작품을 접하는 수용자(독자, 시청자, 플레이어 등)가 작품 세계 및 캐릭터에게 애착을 갖고 감정을 쏟도록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이입하기 쉽도록 주인공은 평범한 소년으로 설정한다’ 같은 레벨의 얘기가 아닙니다. 최근의 라이트노벨의 경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개성이 없는 평범한 주인공은 오히려 몰입도를 떨어뜨릴 뿐입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투영할 수 있도록 평범한 주인공으로 설정한다는 ‘약속’은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렸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수용자가 감정을 쏟도록 한다는 것일까요? 사실 그 원리는 간단합니다.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히로인에게 느끼는 것처럼, 수용자도 캐릭터에게 정을 붙이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정은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네, 마치 현실에서도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에게 정을 느끼는 것처럼, 작중에서 ‘(주인공이) 히로인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비중 있게 묘사함으로써, 이를 계속해서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간접체험하게 되는 수용자에게도 유사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작품들에 있어서 이야기의 플롯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낙제점일 정도로 무의미한 장면으로 가득한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토리를 구성하는 데 필요 없어 보이는 일상생활 장면이 다수 삽입되어 있지만, 이건 단순히 구성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미소녀를 어필하는 시츄에이션을 억지로 채워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수용자가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이와 같은 애착은 굳이 연애감정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간을 들여 애착을 갖게 함으로써, 비로소 ‘모에의 시대’의 스토리는 진정한 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캐릭터에게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과 유사한 애착을 갖게 된 수용자는 작중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갈등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스토리를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누군가로서 등장인물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 캐릭터가 사건을 겪을 때 수용자는 몰입하면서 감정이입하게 됩니다.
   『Kanon』등을 제작해 모에 캐릭터를 내세운 스토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히사야 나오키, 마에다 준의 방식은 이와 같은 창작기법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모에 캐릭터의 일상을 정성들여 길게 묘사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애착을 갖게 만들고, 나중에 그 일상을 붕괴시키는 비극적인 클라이맥스를 가져옴으로써 그 파괴력을 극대화시킨 그들의 창작기법은 이와 같은 스타일을 정착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죠.

먼저 이야기의 전반 부분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묘사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히로인과의 교류입니다. 사소한 대화나 에피소드 등을 잔뜩 넣어주는 것으로 주인공, 즉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히로인을 소중하고 내버려둘 수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 『모에하게 만들기』 부분에 잔뜩 시간을 들이는 게 포인트입니다.
(중략)
후반의 슬픈 장면의 나열은 오히려 2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너무 길다는 생각도 드는 전반부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히로인의 존재를 플레이어에게 익숙하게 만드느냐가 포인트인 것입니다.

─스즈모토 유이치 『(노벨게임의) 시나리오 작성기법』

   이와 같은 스타일은 1편의 완성된 형태로 시장에 출시되며 그 형식상 작품세계와 수용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에로게(전형적인 AVG 혹은 노벨 타입), 그리고 라이트노벨에 가장 적합합니다. 에로게에서는 이미 옛날부터 이와 같은 스타일이 주류였고, 라이트노벨에서도 현재는 일부 자기색이 강한 작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죠.
   주인공과 히로인의 인상적인 만남, 티격태격하면서도 공유되기 시작한 두 사람의 일상, 이런저런 이유로 인한 갈등이나 사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거나 사건을 해결, 다시 시작되는 일상... 
   현재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며 가장 무난하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분위기를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시리어스한 청춘물도 되고 라이트한 러브코메도 되고, 전투를 넣으면 학원이능물도 됩니다만, 그 본질은 결국 ‘캐릭터와 보내는 시간을 유사체험하게 함으로써 애착을 갖게 한다’에 귀결됩니다.
   고전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면 ‘제멋대로인 미소녀에게 휘둘리는 내용만 계속 이어질 뿐으로, 특히 중반에는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플롯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있다.’같은 말만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중의 주인공과 함께 히로인과의 시간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 전개에 대한 호응을 극대화시키는, 철저하게 연마된 창작 테크닉인 것이죠.

   ‘모에의 시대’의 작품들이 여성 혹은 성을 상품화한 기존의 작품과 차별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미소녀 캐릭터를 내놓고 노출을 시키거나 아양을 떨게 만드는 건, 말하자면 한번 쓱 보고 지나가는 섹시화보와 비슷한 효과밖에 없습니다(물론 섹시화보에 큰 애정을 품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말초적인 소모품으로서 캐릭터를 소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친근하며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죠(적어도 작품을 접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리고 이 애착이 작품을 끝까지 즐긴 뒤에도 계속될 때,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 모에캐릭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캐릭터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모에의 시대’에 새롭게 제시된 캐릭터 표현이란 모에 요소를 조합한 캐릭터 설정, 캐릭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의외성이 있는 시츄에이션, 캐릭터와 함께 보낸 시간을 간접체험시키는 스토리, 이 세 가지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예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모에’의 유행과 함께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창작에서 활용되게 되었죠.
   기호적 요소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캐릭터의 설정을 만들고, 의표를 찌르는 행동을 연발시켜 질리지 않고 즐거운 기분을 맛볼 수 있도록 장면장면의 시츄에이션을 짜고, 애착의 감정을 갖게 하여 이야기에 깊게 호응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구성하는 기술. 이것들이야말로 ‘모에의 시대’를 유지시키고 있는 창작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국내에서 ‘모에’를 해보려고 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또한, 이와 같은 테크닉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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