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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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날 아침, 문자가 왔다.

[점심시간에 여고로와 직접보고 얘기하겠대]

이게 무슨 말이냐. 나더러 여고로 가라고? 나는 요청의 비현실성을 들어 답문을 보냈다. 하지만 유미는 이렇게 답장했다.

[그럼 3학년보고 오가라고할까?]

“음…….”

타당한 반론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도 조금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였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남학생이 여고에 기웃거리겠느냐, 라고 누가 가르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내가 입학하고 나서 제일 먼저 느낀 암묵적인 룰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머리 위를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며 학생 하나하나를 감시하기라도 하듯, 남고 여고는 완전히 나뉘어서 서로 얼씬도 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녀석들끼리 만나거나 아니면 만남의 장소라고 운동장 한가운데에 있는 쉼터에서 서로 얼굴이라도 보는 등의 접촉은 있지만 운동장 가운데쯤에서부터 진입로로 이어지는 국경선은 분명히 존재한다. 단독으로 그 선을 침범하는 녀석은 결단코 없다. 공을 일부러 여고 쪽으로 차서 괜히 기웃거리는 녀석은 가끔 보이지만.

시커먼 남자들만 모아놓음으로써 얻는 효과, 학교가 주장하는 교육적인 점은 내 알 바 아니지만 요 며칠간 내가 관찰한 가장 큰 효과는 바로 동질감이었다. 남자라는 동종끼리만 있다는 유대감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 때보다 더욱 야만스럽고 추잡하고 해지는 것이 바로 남자들이었다. 남자들끼리만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들은 한 군체였다. 여학생이라고 다르겠는가. 남학생 혼자 여고에 떨어진다면 얼굴에 난 사마귀처럼 거북한 존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모두 그것을 알기에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록커다. 그 어떤 시련이나 핍박에도 코웃음 쳐야만 하는 것이 바로 록커다. 어쩌면 이것 역시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장애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미나 그 3학년이 내 포부를 떠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가야 한다.

 

“너 요새 기타 치냐?”

등교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평소에는 나보다 일찍 출근하시던데 오늘은 느긋하게 아침을 드시고 있었다.

“기타? 무슨 기타요? 내 기타는 아버지가 태워버렸잖아요.”

아버지와는 대화는커녕 얼굴 보는 일도 드물다. 별 문제 없이 기타를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 네가 등에 매고 있는 건 뭐냐?”

아버지는 내 기타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거요? 책가방인데요. 넉넉한 수납공간과 튼실한 내구성의 아주 효율적인 가방이죠.”

“그래? 그렇다면 내구성을 한번 시험해봐도 되겠지?”

아버지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안방에서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더니 배트를 휘두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잠깐! 뭐하시는 거예요!”

“그 안에 뭐가 들었나 확인하려고 그런다. 고교야구 청룡기에 빛나는 이 방망이로!”

“불만이 있다면 말로 합시다. 애꿎은 기타 괴롭히지 말고.”

나는 양손을 뻗으며 아버지와 대치했다. 고등학교때부터 야구를 했고 지금도 직장인 야구단의 4번타자인 아버지의 스윙이면 이번에야말로 이 기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야 말 것이다.

“기타는 분명 외고 간 다음에 치기로 했을 텐데?”

“그때 아버진 분명 이 기타 알아서 하라고 하셨죠?”

“그때 기타가 아직 덜 탔던 모양이구나. 이번에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주마. 그때 알아서 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나 이제 밴드도 만들 거고 이 기타 없으면 안 되니 더는 간섭하지 마시죠?”

“밴드? 이 자식아. 공부도 못 하는 게 무슨 밴드야? 네 할 일을 한 다음에 취미생활을 하든가 하랬지!”

“취미? 흥. 공부야말로 기타를 치기 위한 구실이었는걸!”

나는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밥도 먹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너 이 자식!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

아버지껜 죄송한 일이지만 야근과 출장이 잦은 아버지를 집에서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렇게 기타를 쳐 왔다. 기타는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두고 아버지 없을 때만 골라서 연습하곤 했다. 어머니는 이런 날 눈감아주었지만 곧 모의고사가 다가오니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간, 나는 살기를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밥그릇이 날아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창밖에 반쯤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나는 반동을 이용해서 가방을 벗었다. 그리고 긴 넥 부분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순간적인 회전.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단련된 타격폼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 정도 느린 볼쯤이야. 나는 내 얼굴을 향해 오는 밥그릇을 기타 가방 채로 쳐냈다.

쨍그랑, 가방에 맞은 밥그릇은 그 자리에서 깨졌다.

나이스 샷. 야구공이었다면 적어도 외야 플라잉은 되는 타격감이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밥풀이 덩어리째 달라붙어 있었다.

아주 잠깐의 격차를 두고 후끈한 열기가 얼굴에 전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와의 일 때문에 오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코끝이 내도록 얼얼했다. 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몽둥이부터 올라갔다.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멋대로 정한 것도 아버지였다. 전부 아버지한테서 배운 것이다. 인생 멋대로 사는 법을.

4교시가 끝나갈 즈음 유미한테서 음악실로 오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같이 가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1학년 6반으로 오라고 한다.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위압적인 여고 건물을 올려다보며 품속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어디서 났냐고 묻지는 말라. 이것은 록커의 필요조건이니까.

솔직히 고백하는데, 맨 얼굴로 쳐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긴장한 눈은 감출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전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나는 그저 내 발이 닿는 지형적 벡터 값을 변경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냥 떳떳하게 걸어갔다가 걸어 나오면 끝나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던가.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 내 마음이라도 속일 수밖에.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여학생이다.

나는 여학생이다.

나는 여고생이다.

나는 상큼 발랄한 여고생이다.

그래.

나는 여고생이었다.

불현듯, 마음 어딘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소녀지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폐 속에서 치밀고 올라와 마침내는 콧구멍을 뚫어버릴 정도로 내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여고생이었어. 나의 몸은 소녀로 되어 있다. 나는 여고생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내면에는 이미 소녀의 실마리가 잠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나의 각성은 나조차도 놀라웠다. 까르르 웃으며 폴짝 뛰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르는 게 깻잎이라도 달아놓은 게 아닌가 했다. 이제 마음껏 여고에 출입할 수 있다. 여고생이 발을 딛을 곳이 여고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발을 내딛었다.

여고생이 가는 곳에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복도며 계단에 여학생이 많았지만 누구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여학생이니까. 나는 왠지 모르게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걸었다.

마침내 선생님과도 마주치고 말았다. 새하얀 머리를 위로 빗어 넘긴 남교사였다.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대뜸 화를 냈다.

“너 여기 왜 들어왔어? 선글라스는 또 뭐야?”

나는 다소곳하게 웃으며 말했다.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것이 학생 아니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뒤에서 야! 야! 하고 부르는 것 같았지만, 다른 복장이나 두발이 불량한 학생을 잡으려는 것이겠지.

나는 유미가 기다리겠다는 생각에 달렸다. 만남은 서두를수록 좋은 법이다.

1학년 교실이 있는 4층에 다다랐다. 선생님도 따돌린 것 같았고 이제 6반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왠지 주변이 시끄럽다. 괜히 비명 지르는 녀석도 있고 왠진 몰라도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녀석도 있다. 급식 배식 줄을 서 있다가 내가 지나치자 호들갑 떨며 놀라는 녀석도 있다. 나는 주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목을 꼿꼿이 세우고 6반만을 향해 걸었다.

마침내 1학년 6반 문 앞에 섰다. 무슨 구경이라도 났는지 복도에는 우글거리는 여학생은 점점 불어만 갔다. 여기 무슨 연예인이라도 다니나? 어쨌든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

그 학급 분위기는 지금까지 지나온 교실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급식이 배급되지도 않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며 그렇게 떠들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몇몇은 옷을 벗거나 입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교실이 유난히 어수선한 것이 책상 위에 교복이며 체육복 등 옷가지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몰리고 나는 곧 현 사태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몇몇 살갗이 눈에 들어오고,

“음…… 아…….”

마치 폭풍처럼 쏟아지는 눈빛.

“저…… 그게…….”

나는 식은땀을 흘린다는 표현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꺄아!”

“변태다!”

“나가아!”

불시에 지금까지 듣던 것을 모두 합한 것과도 같은 괴성이 터져오며 뭔가가 잔뜩 날아온다. 나는 얼굴을 감싸며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이 반은 4교시가 체육시간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미였다. 다행이다! 날 초대한 것은 유미니까 뭐라고 해명을 해주겠지. 나는 유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미는 나를 보고 웃음지어 주었다.

잠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돌이켜보니, 실내화 바닥이 내 턱에 꽂혔던 모양이었다. 내가 무릎을 꿇자 이번에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릎이 날아와 관자놀이에 꽂혔다. 그 뒤로는 볼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철썩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 변태는 내가 처리할게. 문 닫고 있어.”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머리채를 붙잡힌 채 음악실까지 질질 끌려갔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악실은 남고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조금 넓은 교실에 책상이 있고 피아노가 있고. 피아노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나는 다리가 부러져 코끝에 건들거리는 선글라스를 걷어 올려 그를 보았다. 얼핏 봐서는 음악 선생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유미 못지않게 긴 머리카락이 올곧게 펴진 허리 위로 가지런히 내려앉는다. 아무 특징 없는 흰 머리띠가 묘하게 인상적이다. 뒤쪽으로 살짝 비치는 얼굴빛은 백도처럼 새하얗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그는 공부를 하는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왠지 인기척을 내면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여서 나는 유미를 돌아보았다. 유미는 교실 문을 잠그는 중이었다.

“응? 누구세요?”

솜사탕마냥 푹신푹신한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나는 다시 피아노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눈이었다. 나는 그 눈에 시선을 뺏긴 채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유미가 내 옆에 와 말했다.

“소개할게. 얘가 걔. 저 언니가 그 언니.”

유미는 나와 피아노 앞의 누님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참 간편한 소개긴 하다만.

“안녕. 난 소란이라고 해. 이야기는 유미한테 들었어.”

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멍히 누님을 쳐다보다가 유미에게 팔뚝을 찔리고는 정신 차리고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잠시, 좀 눈이 부셔서요. 하하핫.”

“미리 말하는데 언니한테 치근덕대면 곤란해질지도 몰라.”

유미가 말했다.

“응? 아니, 난 딱히, 그냥…… 근데 왜 곤란?”

남자친구 있어? 하고 슬쩍 귀엣말을 했다.

“그건 아닌데, 마법소녀거든. 언니는.”

“마법소녀? 그건 뭐야?”

나는 그게 뭔 상징적 의미인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유미야, 그건 말하면……”

소란 누나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별명 같은 것인 듯했다.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면 미리 말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유미는 말했다.

“아직 정한 건 아니잖아.”

동료가 되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지. 여기서 내가 캐물을 것은 아니라고 보아 입을 다물었다. 잠시 둘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무슨 마법 어쩌고 하는데 여자들끼리만 아는 얘기겠지. 잠시 후 소란 누님이 내게 말했다.

“그럼 얘기를 들어보자. 밴드를 하고 싶다고? 그런데 여고까지 오다니 대단하네. 그냥 운동장에서 보자 하지 그랬어. 선생님한테는 안 혼났어?”

“네? 여기서 보자고는 누님이…… 3학년이라 바쁘다며…….”

“응?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소란 누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유미가…….”

“내가 언제? 그냥 여기서 모이자고 하니까 네가 온 거잖아.”

나는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누님이 그랬다고…… 적혀 있지는 않았다. 속았다! 유미는 그저 애매하게 문자를 보냈을 뿐이었다.

“나, 난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스릴 넘치는 침투를…….”

“그러게 말이야. 다음부턴 분수가나 등나무 밑에서 보자.”

소란 누님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유미는 나를 보며 키득거린다. 언젠가는 되갚아 주리라. 나는 몰래 속으로 다짐했다.

“그럼 밴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유미가 말했다. 소란 누님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하고 싶긴 해.”

난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 얘기 다 됐네요. 하는 걸로.”

“아니, 아니. 유미 통해서도 들었겠지만 드러머가 없잖아. 무턱대고 할 수는 없어.”

“그럼 드러머가 생기면 할 수 있는 거예요?”

“잠깐, 잠깐.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언니는 좀 더 생각해 봐야 되잖아.”

우리는 재빨리 한 마디씩을 던졌다. 시선이 차례대로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소란 누님에게 모였다. 잠시 침묵. 누님은 흐응, 하고 소리를 냈다.

“사실 난 공부할 필요가 없어.”

“왜요?”

훗, 내게 공부 따위는 여흥에 불과하지, 따위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누님은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시험 같은 건 그냥 마법 써서 컨닝하면 되거든.”

“……그거 진심이에요?”

“말했잖아. 난 마법소녀라고.”

난 이 사람이 위험한 사람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뭐야. 언니 시험에서도 마법 쓰고 있던 거야?”

유미가 말했다.

“헤헤. 쪼오금.”

누님은 실실 웃으며 손가락 대중을 한다.

“저기, 장난 하지 말고요. 수험생일수록 더 딴짓 하고 싶다는 거 외고 준비해본 나도 아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제가 강요할 수 없는 처지니까 결정은 전적으로 누나한테 달렸어요.”

나는 말했다. 누님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고민하는 듯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누님이 입을 연다.

“좋아! 하도록 할게. 단, 드러머 구한다는 게 조건이야. 그때까진 난 안 하는 걸로 알고 있을 테니까 드러머 구해서 다시 와.”

“와아! 고마워요! 그런데 다시 여기로 오라고요?”

“아니이. 전화번호 가르쳐줄게 연락해. 아님 유미 통해서 해도 되고.”

나는 휴대폰을 내밀었고 누나의 번호를 저장했다. 누님의 휴대폰은 조금 특이한 모양이었다. 분홍색에 인조 보석 같은 게 달려있는 것이 마치 애들 장난감 같았다.

“그런데 정말 공부 괜찮겠어요? 내가 하자고 해놓고 물어보기 뭣하지만 그래도 3학년인 게 조금은 걸리네요.”

“괜찮아. 컨닝하겠단 건 장난이고 내가 가려는 학교가 그리 높은 덴 아니라서, 어, 그래. 거기로 가면 되겠다. 응. 그래서 느긋하게 해도 충분해.”

“설마 진로를 지금 이 순간 결정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니.”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갈 거야? 이제 복도며 운동장이며 여자애들이 우글거릴 텐데.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기다릴래?”

유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갈 길이 문제다. 유리구슬 같았던 내 소녀지심은 유미의 니킥으로 인해 흩어지고 말았다. 다시 모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직 예비 종도 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유미에게 퇴로를 지켜달라고 하는 방안이나 눈 딱 감고 뛰쳐나가는 방안이나 혹은 벽을 타고 내려가는 방안이라든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남자인 것을 봐서는 선생님인 듯했다.

“안에 누구야? 빨리 문 열어!”

“이런, 선생님이 오셨네.”

유미가 말했다.

“성마에잖아. 곤란하게 됐네.”

소란 누님이 말했다.

“성마에라뇨?”

바깥 선생님의 별명이겠거니 했다. 문 바깥에서는 바리톤쯤 되는 듯한 걸쭉한 목소리가 연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음악 선생님인데 고지식한 분이야. 걸리면 아마 무지 골치 아플걸?”

“어떻게 되는데요?”

“보통은, 바로크시대의 음악사와 악곡 형식에 대한 레포트를 열 장 정도 분량으로 써야 하는데, 넌 남학생이니까 특별히 낭만파까진 써야 하지 않을까?”

누님은 끔찍한 소리를 했다.

“응. 그런데 저 선생님이 록이니 대중음악이니 무척 싫어하잖아. 그거 때문에 모인걸 알면 현대음악까지도 써야 할걸?”

듣기만 해도 공포와 경기를 일으킬 법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아는 걸 보면 유미도 직접 겪어봤다는 뜻일까?

“또 남고 쪽에도 알려지고 송치되겠지?”

소란 누나는 말한다.

“응. 이름도 알려져서 소문 다 날 거야. 여고에 침입한 발정 난 원숭이가 있다고.”

유미도 악담하듯이 말했다.

“보통 이런 소문은 정말 빨리 퍼지던데.”

“정말 그러면 불쌍해서 어떡하니.”

“게다가 리수 군은 눈에도 잘 띄잖아.”

“그러니? 하긴.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남학생은 흔치 않지.”

“선글라스는 평소에 안 끼는 모양인데 기타를 들고 다니거든.”

둘이 번갈아가며 말한다. 이거 남의 일이라고 막 말하는 거 아냐?

“그보다 빨리 도망갈 길을 찾아야죠…….”

“응. 나한테 맡겨. 이리로 와. 유미가 선생님을 잠시 상대하고 있어.”

소란 누님은 윙크를 하며 말했다. 유미가 문으로 가고 우리는 창가로 갔다. 창가라니, 정말 벽을 타고 가야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누님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이게 무슨 전개죠?”

누님은 창밖의 밧줄을 팽팽 잡아당겨 보았다.

“이걸 타고 내려가. 할 수 있지?”

“할 수 있긴 한데 뜬금없이 웬 밧줄? 설마 우리는 어릴 적 헤어진 남매였다든가?”

“썩은 동아줄은 아니니 어서 내려가.”

음악실 위는 바로 옥상. 누가 있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지만 따질 시간은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나가 밧줄을 잡고 매달렸다. 음악실 문은 유미가 열심히 수성 중이었다.

“일단 가볼게요.”

“응. 만나서 반가웠어. 좋은 소식 전해줘.”

어쨌든 탈출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나는 밧줄 강하를 시도했다. 친절하게도 중간 중간 매듭이 지어져 있는 밧줄이었다. 상쾌한 낙하감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떨어져 갔다. 선글라스가 날아갔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발을 딛은 곳은 도로에 맞댄 담벼락 안이었다. 구석이라 눈에 띄지도 않는 곳이었다. 나는 곧바로 우리 학교로 달려갔다. 딱히 주목받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운동장에는 많은 남학생이 땀에 젖은 채 흙바닥을 다지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 무사히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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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작가의 경험이 반영돼 있지 않음.

 

Writer

존모리슨

존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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