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1.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3.

 

가끔 그런 적이 있잖은가. 막상 마주쳤을 때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느끼던 일이 고개 돌리고 다른 일에 열중하던 중 느닷없이 생각 나서는 어디 풀 데도 없는 화딱지만 불러일으키는.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거부할 수 없는 거대 로봇의 현전 앞에 당시에는 별다른 불만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분노까지 이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어떻게 그런 로봇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뜬금없기로도 이 세상 어느 것을 갖다 붙여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 실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아아, 아마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모순이 아닐까.

그런 고상한 생각을 하면서 휴대폰만 자꾸 만지작거렸다. 다시금 강철에게 전화해서 몇 번이고 진위를 확인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역시 알았다. 집에 오고도 몇 시간을 뒹굴거리며 현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나서야 나는 다음 해야 할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소란 누나와 유미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다. 다음 날인 일요일 낮 정도로. 사실 동료 중 거대 메카가 있든 전설의 용자가 있든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밴드가 아닌가. 그냥 특이한 동료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인 일이다. 이를테면 동료 중 히피 무당이 있다든가, 탈옥수가 있다든가, 게이가 있다든가 하는 밴드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동료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하고자 하는 음악만 열심히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우리는 학교 근처 여학생들이 자주 다니는 카페에 모였다. 오후 두 시로 느긋하게 시간을 잡았다가 너무 여유를 부렸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두 시가 다 돼가 일어나서는 허겁지겁 약속 장소로 달려 나가야 했다. 사람을 모아둔 자리에 주선자가 빠졌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안다. 내가 갈 때까지 서로의 어색함만 빨며 멀뚱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겠지. 그래서 책임감을 느끼며 달렸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닥친 광경은 딴판이었다.

“어머, 정말이야?”

“요샌 초등학생도 빠른 게 아니라니까.”

“우리 때도 그런 게 없던 건 아니었지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

“응. 그래서 반에 소문 다 났어. 그래도 걔네는 상관없다고 하지만. 막 교무실에도 불려가고 그랬어.”

이미 여자 둘과 강철은 같은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화기애애해 보인다.

“어? 왔다.”

소란 누나가 먼저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자리로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강철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의자에 앉았다. 언제나 들고 다니는 기타는 한쪽 벽에 세워 놓았다.

“어떻게 만난 거야? 지금, 서로 왜 왔는지 알고 앉은 거지?”

나는 세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얘가 먼저 말을 걸어왔어. 혹시 밴드 때문에 온 거 아니냐고.”

소란 누나가 말했다. 학교에서와 똑 같은 하얀 머리띠에 심플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알아본 거야?”

강철에게 물었다.

“형이 한 말 듣고 그냥 물어봤어. 그러니까 기타 들고 다니는 형 만나러 온 게 맞다고 했어. 그렇지? 누나.”

“내가 딱히 설명한 게 있던가?”

“형이 그랬잖아. 예쁘고 글래…… 어쩌고 한 누나 둘이 있다고.”

말투가 뭔가 달라진 것 같다. 너 이전엔 좀더 버릇없고 유창하게 말하지 않았냐? 하고 말하려는데 유미가 말했다.

“호오, 리수 군, 우리를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글래머라니, 그런 말은 쓸데없이 왜 꺼내는 거야?

“별다른 뜻은 없어. 얘 꼬시려고 한 말이니까.”

이 녀석, 누나들 앞이라고 순진한 척, 어눌한 척 말하는 것이렸다. 나이는 안 물어봤지만 강철은 대충 3, 4학년쯤으로 보인다. 그 나이면 꼬맹이가 가장 영악해지는 나이이다. 어린이라는 입장을 이용해먹을 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나이란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또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데 글래 어쩌구 하는 게 뭐야?”

“왜 모르는 척이야? 그땐 대화가 된 걸로 기억하는데.”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때에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형이 그냥 넘어갔잖아.”

녀석은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며 날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현실의 고뇌 따위는 아직 담기지 않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표정이었다. 그야말로 악마가 아닌가! 대체 얼마나 많은 순진한 어른이 이 녀석에게 속아 넘어갔을까. 사람은 자라면서 자기가 이만할 때 얼마나 교활했는지를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그것은 이 가증스런 이미지에 넘어간 두 여성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람을 그렇게 부르다니 실례야.”

소란 누나가 말한다.

“그래. 음흉하다니까.”

유미도 말한다. 나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 그건 이 녀석이 순진한 척 하는 거라니까. 이봐, 다 알면서 왜 그래?”

“어쨌든 그런 말 했어, 안 했어?”

유미가 심문하듯 말했다.

“물론 안 한 건 아니지만, 그건 말이지…….”

“어쨌든 우릴 ‘그런 눈으로’ 본다는 거네. 안 그래?”

“아냐. 그냥 하는 말이니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얘가 지금 알면서 물어보는 걸 보라고. 난 이 나이 때에도 알 거 다 알았는데…….”

“흐응, 그래? 그 말은 너는 초등학생 때부터 음흉한 생각만 골라 했다는 뜻이네.”

“그렇게 되나…… 가 아니라,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렇지. 문제는 ‘지금’ 네가 음흉한가 아닌가, 지.”

“아니 그것도……”

“그럼 넌 글래머한 멤버랑 안 글래머한 멤버랑 어느 쪽이 좋아?”

“기왕이면 글래머한 쪽이 좋긴 하지만…….”

“거봐. 그쪽으로밖에 생각 안 한다니까.”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냐!

“아니, 선택지가 주어졌잖아. 둘 중 고르라면 그 쪽이라는 거지 꼭 그런 게 좋다는 게 아냐.”

“그으래? 언니는 그럼 어떤 멤버를 받고 싶어?”

소란 누나 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누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거봐. 리수 군이 음란한 거라니까.”

“누나는 여자잖아! 또 표현 수위가 미묘하게 심해진 것 같다?”

나는 유미에게 손가락을 던지며 말했다.

“그럼 네가 선택해봐. 근육질의 핸섬한 남자 기타리스트랑 남고에서 대충 하나 집어온 녀석이랑 둘 중 누구와 밴드 하고 싶지?”

유미는 언뜻 사악해 보이기도 하는 웃음을 지으며 여보란 듯 말했다.

“입후보가 둘이라면 당연히 실력을 봐야지.”

그, 그런 수가 있었구나……. 나는 망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동료에게서 몸매밖에 안 보는 리수 군. 아마 그러니까 여고로 오라고 했을 때 옳다구나 하고 온 거겠지?”

“유미야. 이 또래 남자애들이면 그럴 수 있지. 난 이해해.”

뭘 이해한다는 겁니까!

“그럼 대충 결론지어지는 건가? 초등학교 때부터 호기심이 왕성하던 리수 군, 훌륭한 변태로 자라다.”

“결론은 무슨 결론이야! 또 단어 수위는 왜 점점 세지는 건데!”

나는 도저히 이 대화의 수렁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강철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은 도망치고 보는 거다. 강철은 끌려 나와 발버둥 쳤지만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디 가?”

유미가 말했다.

“화장실.”

“화장실? 남자끼리 화장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무래도 암묵적으로 내가 놀림거리가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빨리 손을 써야 한다. 나 없이 이 꼬맹이가 무슨 얘길 했는지, 또 우리 사이의 위계가 어떻게 될 지 분명히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강철을 붙잡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거 놔!”

여자들과 있을 때에는 순진한 척 눈을 동그랗게 굴리던 녀석이 우리 둘만 남게 되자 본성을 드러낸다.

“너, 무슨 속셈이야?”

나는 녀석을 세면대에 밀어붙이고는 물었다.

“속셈이라니?”

녀석은 잡아떼고 본다.

“난 너 같은 꼬맹이의 속셈을 잘 알지. 순진한 척 해서 누님들에게 귀여움 받겠다는 수작 아니야. 안 그래?”

“무슨 헛소리야? 약 먹었어?”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녀석은 말했다.

“그럼 어째서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이 꼬맹아. 누나들 앞에서도 나랑 똑같이 버릇없게 굴어보란 말야.”

“내가 왜 네 말 듣고 버릇없는 아이가 돼야 돼?”

“지금도 내 앞에선 버릇없잖아.”

“그건 네 앞이니까.”

순간, 내면의 어두운 힘의 봉인이 풀려날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너, 맞는다.”

“때려봐. 울 거니까.”

나는 주먹을 삼키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참자. 초딩 상대로 화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얘야. 잘 들어. 네가 이렇게 버릇없이 굴 수 있는 것은 이 형이 이처럼 훌륭한 성품과 인성의 사람이기 때문이야. 만일 다른 허접한 놈이었다면 넌 바로 얻어맞고 울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니겠어?”

참자, 참자. 정말 속을 박박 긁어대는 녀석이다. 나중에 커서 훌륭한 정치인이 될 재목이다.

“너도 솔직히 말하지 그래?”

녀석은 말했다.

“응? 뭘 말이냐?”

“내가 착한 척 하는 게 왜 불만이야? 혹시 누나들 중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냐?”

녀석은 안 어울리게 한쪽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만난 지도 얼마 안 됐고, 무엇보다 밴드에서 연인관계는 금기야. 그게 밴드의 가장 큰 적이라고.”

“그래도 관심은 있는 것 같은데? 네 말대로 누나들은 제법 글래머하잖아.”

“너 역시 다 알면서…….”

“아님 이거 아냐? 뭔가 딴 맘먹고 여고랑 같이 밴드 하려고 한 거는. 남고라서 여자 만날 일 없을 거 아냐.”

“뭐라고? 이게 정말!”

난 결국 못 참고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내도록 조소만을 보이며 이죽거리던 녀석은 대번에 울상을 짓더니 심지어 눈물을 그렁거리기까지 한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놓았다. 아무리 나라도 애가 눈물을 찔끔 보이는 데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달리 심하게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달래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세면대 거울로 누군가가 보였다. 유미였다. 유미가 팔짱을 끼고 화장실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철은 나를 밀치고 유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누나아!”

녀석은 유미의 허리춤에 가서 안긴다. 유미는 녀석의 뒤통수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쫓아왔는데 애나 울리고 있었어?”

“아, 아니야! 그건 저 녀석이…….”

“형이 막 큰소리 치고 무섭게 하고…….”

녀석은 이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아주 못됐구나. 말로 안 되니까 애를 위협하는 거야?”

“아냐, 아냐. 넌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딱히 울리려고 한 게 아니란 말야.”

“그럼 뭐 하고 있었는데?”

“그건…….”

이 영악한 녀석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버릇없었던 녀석인데 내 앞에서만 그러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달하냐는 문제이다마는 어차피 그 얘긴 앞서 줄곧 맥없이 내가 외치던 말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뭐라 말하든 변명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얽힌 가운데 나는 말했다.

“내가 협박당하고 있었다!”

“…….”

…….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한 거냐!”

라고 나는 스스로 외쳤다.

“잘 아네.”

유미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유미의 구둣발이 내 코를 강타했다.

강철의 입을 통해서 대략적이나마 대화의 경과를 유미에게 전달하고(물론 내용은 상당부분 각색되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강철은 “내가 봐주는 줄 알아”라고 건방지게 지껄였지만 그나마 수습된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나중에 한번 제대로 손을 봐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주문을 했다. 이런 알록달록한 가게에는 처음 와보는 터라 뭘 시켜야 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강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인상을 쓰며 메뉴에 얼굴을 붙이고 있다가 결국 각자 앞 사람이 시키는 것을 따라 시켰다. 밀크셰이크라면 왠지 무난하고 전형적으로 보이는 메뉴였지만 나에게는 소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던 음식이었다.

“흐흠.”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밴드가 결성됐으니 이제 실질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통성명은 아까 했다고 하니 자기소개 시간 같은 괴상망측한 의식은 치르지 않아도 될 듯했다.

“우리가 왜 모였는지는 대충 얘기 했지? 우린 삼주 후에 있을 지역 대회에 나가야 돼.”

그러자 강철이 말했다.

“그런데 대회 나가는 거야? 아까부터 무슨 대회 얘기야?”

나는 강철에게만 대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대회 이야기는 유미에게만 했었지만 소란 누나에게는 유미가 전해줬을 테니까.

유미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리수 군, 설마 자세한 사정도 설명하지 않고 데려온 거야?”

“사정이라 봐야 별 거 없잖아. 대회 나간다는 거 빼곤 다 말했어.”

“그럼 다 말한 게 아니지. 데리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건지 정확하게 설명해야지. 미성년자라고. 얘네 부모님이 안다면 우리가 밴드를 하는지 수상한 비밀 서클인지 어떻게 알겠어.”

유미는 말한다.

“저기, 일단 우리도 미성년자인데.”

“무슨 상관이야. 자넨 계약관계를 더 확실히 해야 했어. 그게 제대로 안 돼가지고 뜬 다음에 지분 다투다가 해체하는 밴드가 나오는 거야.”

“그건 너무 멀리 나간 거 같은데…….”

나는 가져왔었던 대회 전단지를 꺼내 내려놓았다. 세 사람은 전단지 위에서 머리를 맞댔다.

“꽤 큰 대회네. 서울시 전체에서 여는 건가봐.”

소란 누나가 말했다.

“네. 각 구별로 예선 따로 치르고 그 뒤에 한꺼번에 본선 치르는 식인 거 같더라고요.”

“저, 그런데,”

강철은 전단지를 집어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말했다.

“이거 접수 어제까지인 거 같은데. 접수 했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찬 물을 끼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듯했다. 서로의 창백해진 얼굴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우리는 서로서로의 시선을 흘려 넘길 뿐이었다.

물론 시선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은 내 쪽이었다.

“자네, 지금까지 접수일자도 확인하지 않은 거야?”

“기간 지났어도 잘 부탁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밴드 여기 나가려고 만든 거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이 조아리는 내 위로 한 마디씩 떨어졌다. 저언부, 순전히 완전무결하게 한 점 변명의 여지도 없이 내 잘못이었다. 내가 대회를 위해 밴드를 모집해놓고 접수 마감일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멤버를 구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참가 신청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라면 이유지만 변명거리도 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쩔 거야? 이제 와서 다 무르고 해산할까? 아니면 주최측에 찾아가서라도 매달려 볼래?”

유미는 재판관이라도 되는 듯한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빌다가 손이 발이 되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정도론 부족하지. 당장 가서 삼전도비에 네 이름을 새기고 와.”

“그,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일단 그쪽에 전화해서 사정이라도 해봐야지. 안 되면 정말로 찾아가서 빌기라도 해야겠다.

그때 소란 누나가 조용히 일어났다. 나는 화가 나서 돌아가려는 줄로 알고 황급히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누나는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일단 내가 해결해 볼게.”

누나는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네? 누나가 어떻게…….”

유미는 말했다.

“괜찮겠어? 이런 일에 나서도.”

“응?”

나는 유미 쪽을 돌아보았다. 유미는 소란 누나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는 것일까?

“괜찮아. 이런 걸로 누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명단에 살짝 이름만 끼워 넣는 거니까.”

“혹시 누님 서울시에 연줄이나 스폰서라도 갖고 있나요?”

“그건 말야.”

누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있다가 말해줄게.”

누나는 전단지와 휴대폰을 챙겨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떻게 할 생각인지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비장의 무기가 있다 한다면 누나의 깜찍한 목소리와 말투 정도일까? 나라면 소란 누나가 전화해서 애원한다면 장담컨대 각막이라도 떼 줄 것이다. 전화기와 전단지를 가져갔으니 그렇게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가 하려는 작업은 가정하건대 아날로그 데이터 연산 과정에 조작을 가하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녀보다 내가 적격인데 지원이 필요하다면 말하라. 얼마든지 도와주겠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침착함을 애써 가장해야 했다. 에코가 잔뜩 들어간 기계음. 그 로봇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강철 녀석의 손목시계에서 옆 테이블에까지 들리도록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유미가 알아챈 것은 아닌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유미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강철의 손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고 냅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또 무슨 짓이야?”

화장실에 들어서서 강철은 내 손을 뿌리쳤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다시 쥐어 잡고 말했다.

“헤이, 이리 나와. 변신로봇 17호. 거기서 난데없이 끼어들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리 좋게 쳐줘도 비싼 플라스틱 장난감 이상으로는 볼 수 없는 손목시계에서 LED같은 불빛이 깜박거리면서 소리가 났다.

“내 이름은 체리버스터. 변신로봇 17호가 아니다.”

“어쨌든 간에 말야. 이 사태를 어쩔 거야? 모르는 사람 앞에서 네 걸쭉한 목소리를 내뱉었으니. 뭐라 변명할 거리도 없잖아.”

“변명을 왜 해야 하지? 같은 자리에 앉은 여성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그들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뭐, 뭐라고?”

“내가 말했거든.”

강철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왜! 그거 비밀 아니었어?”

“동료라며?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한두 사람한테는 비밀을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 그 정도라면 소문나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 우리는 동료였지. 동료끼리 서로 신뢰하는 게 원칙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건 좀 엄청난 비밀이지 않은가. 동료라고 해서 집안 사정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또, 이게 비밀이면 네가 이용해먹을 거잖아.”

녀석은 말했다.

“무슨 소리냐?”

“이걸 가지고 협박할 거 다 알거든?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타당한 판단이었다. 데이터로 판단하건대 인간의 믿음, 신뢰라는 개념은 물질적, 정치적 힘을 담보로 할 때에 주로 발현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깡통 로봇이 또 거든다. 물론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난 화장실 문 바깥으로 슬쩍 여자들을 보았다.

“정말 다 말했단 거야? 로봇으로 변신하고 말까지 하는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고? 그리고 네가 그것을 조종한다고?”

“그래.”

“그걸 또 믿고?”

“이런 걸 보여줬으니까.”

강철은 시계를 들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려는데 갑자기 뚜껑이 열렸다. 거기에서는 홀로그램이 튀어나왔다. SF 영화 같은 데에서 나올 법한 완벽한 홀로그램이었다. 그것은 지구를 비추고 있었는데 강철이 버튼을 누르자 태양계, 우리 은하를 넘어서 이제는 상상하기도 아득한 드넓은 우주 공간을 보여줬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 지구에 이런 수준의 홀로그램 기술은 개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납득 가도록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로봇 목소리가 말했다. 그 정도를 보여주는데 믿지 않을 수 없었겠지. 굳이 로봇의 실체를 보지는 않더라도.

“너, 사실 이거 비밀도 아닌 거 아냐?”

“동료니까 알려준 거라니까.”

“동료라…….”

동료를 강조한 것은 나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먼저 이 사실을 알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서로를 믿고 무대에 설 수 있는 밴드가 될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결과적으로 다른 멤버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었잖은가.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통로를 걸으면서 나는 뒤따르는 강철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 나를 동료라고 생각하는 거지?”

“응? 그건 왜?”

왠지 그것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은 듣지 못하고 자리에 도착했지만.

 

“또 둘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유미는 우리가 돌아오자 힐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강철이 비밀을 밝혔다면 그것은 내가 오기 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미와 소란 누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언반구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알게 되면 떠들어대고 싶어지는 게 보통 아닌가? 어쩌면 당시에는 믿어주는 척 하면서도 실은 어린애의 허풍 정도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해가 쌓이기 전에 사실관계를 말끔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알고 있었어?”

“뭐를?”

“이 애의 정체 말야. 그, 뭘 키우는지.”

“아하. 그 로봇 말이야? 넌 몰랐어?”

“아니, 난 실제로 보긴 했는데, 그거 안 이상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거 아냐?”

“그럼 뭐 어떤데? 이미 직접 본 일인데 부정해서 어쩔 거야?”

“그게 아니라. 너무 담담하잖아. 이런 놀랍고 신비한 존재를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그럼, 그렇다면…….”

사실 내가 불만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대 로봇이 실제로 나타났는데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망이 없잖아!”

나는 외쳤다. 변신 로봇이라면, 모든 남자애들의 꿈과 희망. 현대 문화의 원천. 바람직한 인격형성의 토대. 앞으로 살아가게 될 모든 삶에서 석양과도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루 종일 수식을 갖다 붙여도 모자랄 만큼 중요한 것이 변신 로봇인데 그렇게 간단히 인정해버린다면 환상도 경이감도 사라져버리지 않은가! 내가 그 로봇을 봤을 때 느낀 불편함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은밀한 어릴 적 동경을 그렇게 고스란히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박탈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로봇은 어쩌면 TV 안에 있을 때에야 멋있는 건지도 모른다.

“로망은 무슨 로망이야. 너 몇 살이야? 현실과 상상은 구분해야지. 로봇이 상상 속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게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더 이상 신비고 뭐고 없는 거야. 그냥 현실인 거지.”

유미는 잔인하게도 말했다.

“으으, 여자애들이란…….”

“지금 로봇에 대한 관점 차이를 성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격상 시키는 거야?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에 비해 로봇에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에 앞서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리수 군의 태도가 문제가 아닐까?”

“으으, 못 알아들을 얘기는 그만 하자.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소란 누나가 돌아왔다. 누나는 조금 지친 표정이었고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바깥에서 갑자기 돌풍이라도 불었나. 누나는 말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해결하고 왔지!”

“에, 어떻게요?”

“신청서를 몰래 서류 속에 끼워 넣고 왔어.”

“그, 그걸 어떻게요?”

“그건 말야―”

누나가 말하려는데 유미가 끼어들었다.

“아무튼 됐다니까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자. 아직 결정해야 할 게 많이 남았다고.”

“아니, 어떻게 했는지 안 궁금해? 정말로 해결된 거 맞아요?”

유미는 말했다.

“언니가 그랬다면 그런 거야. 아직 리수 군은 몰라도 되는 일이고 차차 알게 될 거야.”

뭐야, 그건. 정말로 소란 누나가 서울시에 수상한 영향력이라도 끼칠 수 있는 것일까?

“바보 같은 대화나 나누다가 결국 아무런 논의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잘한 문제보다 일단은 밴드의 일이 먼저니까. 하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차에 소란 누나는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미안한데 나 아르바이트 가봐야 하거든.”

“하지만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내가 말하자 유미는 눈을 부라렸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지각한데다가 일처리도 제대로 못한 게.”

“죄송합니다…….”

“아무튼 미안해. 이야기는 학교에서나 있다가 메신저에서 마저 하자.”

소란 누나는 말했다.

“잠시만요. 그럼 중요한 것만 빨리 정하고 가요. 일단 연습은 다음 주 토요일, 괜찮죠?”

누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 나가려면 예선 두 곡 본선 두 곡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곡은 그냥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나씩 하기로 해요. 하다가 안 되는 거 있으면 제시한 사람이 바꾸는 걸로 하고.”

다들 좋다고 했다.

“그럼 일단 이번 주는 내가 제안하는 곡을 연습해오는 걸로 해요. 악기 구성도 딱 인원 수대로고 그리 어렵지 않은 곡이거든요.”

“잠깐, 보컬은 누가 하는 거야?”

유미가 말했다.

“남자 곡이니까 일단 내가 할게. 악보는 내가 오늘 전부 보내줄 테니 문자로 메일주소 보내줘. 알았죠?”

그렇게 성급하게 연습곡이 정해지고 우리는 해산하게 되었다.

 

 

 

 

 

---------------------------------------



Writer

존모리슨

존모리슨

Moonlight kiss
Otherwhere you are
By november
I remember

comment

권한이 없습니다.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2'이하의 숫자)
of 2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