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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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누나의 아르바이트라. 어떤 일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고3이 밴드에 아르바이트까지 한다니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미스터리한 것뿐이다. 음악실에서의 일 하며 오늘 일 하며. 아직 소란 누나와는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밴드가 만들어진 기분이다. 이게 밴드가 되는지는 합주를 해봐야 아는 일이지만 이렇게 빠지는 파트 없이 멤버가 모였다는 점만 해도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드럼에 강철. 그 녀석은 내가 유일하게 실력을 본 멤버인데 녀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는 느낌이다. 드럼은 밴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 되바라진 성격만 빼면 말이다. 기타에 유미와 나. 나야 말할 것도 없고, 유미가 직접 치는 것을 본 것은 잠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난 알 수 있었다. 본래 피크 잡는 법만 봐도 아는 법이다. 유미는 틀림없이 나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베이스에 소란 누나. 소란 누나는 뭐,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유미와 함께 밴드를 했었다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베이스야 기본만 되면 어지간한 것은 다 되니까.

나는 몇 가지 정리가 되지 않은 문제를 생각했다. 밴드 이름도 정해야 되고 리더도 정해야 한다. 리더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밴드가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최종 결정권자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밴드를 모집한 내가 돼야겠지? 그것은 다음에 만났을 때 확실히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습 장소를 구해야 한다. 학교에서 연습실을 제공해줄 리가 없으니 우리가 찾아봐야 한다. 그것은 내일 점심시간에 바로 얘기해 보도록 하자.

나는 밴드의 미래와 이 나라의 평화를 생각하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두어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떠들썩하게 보내고 나니 오늘은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밴드를 기획하고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부터가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의 하루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냐!”

소리가 나는 곳은 가로등 위였다. 누군가가 가로등 위에 서 있었다. 가로등 위였다. 가로등 위.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게 현명한 판단이겠지.

“잠깐! 어딜 가! 부르고 있잖아! 으아악!”

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난 내 밴드 일로 바쁘단 말야. 더는 골 아픈 녀석이랑 얽히고 싶지 않다.

“…….”

으음.

으음, 으음.

“제길! 그런데 그 ‘으아악!’은 뭐란 말야!”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아이가 고꾸라져 있었다. 많아야 중학생 정도일까.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한 녀석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옷은 초록색과 연초록색 일색인 게 마치 삐에로 같았으며 얼굴에는 문신인지 스티커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이 있었다. 한국인 같아 보이긴 했으나 얼핏 봐서는 국적을 짐작하기가 어려운 인상이었다.

다행히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된 거지 뭐. 다른 친절한 사람이 일으켜주든가 병원에 데려다주든가 하리라 기대하며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거기 서! 너! 공주와 대체 무슨 관계지?”

“공주?”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옷을 탁탁 소리 나도록 털며 일어섰다.

“아까부터 지켜봤거든? 네가 공주와 같이 찻집에 있는 걸.”

“공주? 찻집? 뭔 소릴 지껄이는 거냐?”

“인상을 보아하니 공주 옆에 붙어서 뭐라도 뜯어먹으려는 협잡꾼 같은데 포기하시지! 공주는 내가 지키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데 무시하고 넘어가줄 수는 없었다. 나는 녀석 앞으로 다가갔다. 몸집이 작은 녀석은 뒤늦게야 나의 위세를 실감했는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헤이, 그게 무슨 말인가? 이해가 가게 설명해 보시지. 이렇게 시비를 붙였으면 어물쩍 넘어가진 못할 거야.”

그는 다시 한 걸음 나서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헹. 설마 공주라는 것을 모르고 접근했다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려는 거야? 아까 너희들 앞에서 변신하는 것도 봤는데? 꼬맹이 하나랑 계집 하나랑 같이 있던 걸.”

꼬맹이 하나와 계집 하나, 나, 그리고 공주라면, 그려지는 그림이 달리 있겠는가. 우리 밴드 모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미와 소란 누나 중에 누가 공주인가? 분위기로 봐서는,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설마 소란 누나를 말하는 거야?”

“너희 이름으론 그렇게 되는 것 같더군. 허나 그분은 메르헨의 체르노빌라 라이온하트 셰리엔느 공주님이시다. 네깢 놈이 함부로 할 분이 아니야!”

“체르…… 뭐라고? 얼핏 듣기에도 아무 거나 갖다 붙인 것 같은 이름은…….”

“뭐어라고? 무엄하다! 이노옴!”

“이봐. 난 바쁜 몸이야. 이상한 설정은 그 꼬맹이만으로 족하다고. 공주고 뭐고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넌 그만 돌아가라. 담부턴 옷은 좀 잘 입고 다니고.”

“시끄럽다! 공주는 내가 지킨다!”

그러더니 녀석은 뒤로 껑충 뛰어 물러났다. 싸울 생각인가 싶었는데 녀석은 양 손을 내밀어 이리저리 교차하며 기합을 넣는다. 나는 멀뚱히 서서 녀석이 하는 동작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곧 녀석의 몸에서는 형광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고 머리는 바람이라도 분 듯 솟아올랐다. 나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소환! 신수 자미라이온 콰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밤이 왔다거나 일식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사방에 짙은 보랏빛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어두워진 것이다. 그 가운데 빛을 내고 있는 녀석만이 또렷이 보였다. 녀석의 발밑에는 둥그런 무언가가 빛났다. 가느다란 선으로 원 안에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그건, 마법진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만화나 게임 따위에서 마법사 캐릭터가 마법을 쓸 때 발밑에 뜨는 그런 거 말이다!

곧이어 내 주위를 똑같은 마법진이 감쌌다. 녀석의 발밑에 있는 것은 맨홀보다 약간 큰 것이었던 데 반해 내 밑에 있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컸다. 나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껴 그 자리를 피했다.

그것은 타당한 선택이었다. 큰 마법진에서는 엄청난 왜곡을 보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시커먼 무언가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연기 같기도 진흙 같기도 한 그것은 점차 모양을 갖춰가더니 빛을 한번 발하고는 색이 입혀지고 나서 커다란 동물이 되었다. 사자를 기본으로 긴 이빨이라든지 붉고 땅에 끌리는 갈기라든지 몇몇 추가 옵션이 달린 짐승이었다.

그러니까, 그 장면이 지금 내 눈 앞에서 일어났단 말이다.

“가랏! 콰터! 저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줘!”

사자인지 신수인지 하는 짐승은 목에 진공관이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울부짖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사자보다도 훨씬 큰 녀석이다. 눈에 홍채가 없는 게 여간 위험해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라니까.

턱 밑까지 내려온 송곳니나 내 손바닥 만해 보이는 발톱까지. 그런 녀석이 나에게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자, 잠깐! 내가 뭔 잘못이냐고!”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그렇다면 너무 황당하잖아! 차라리 공사장을 지나다가 H빔에 머리를 얻어맞고 즉사한다면야 그럴 수 있는 일이니 납득이라도 하지. 나는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웅크려들었다.

그때였다.

“매지컬 멜로우, 샤이닝 프로텍터!”

맑고도 경쾌한 목소리가 들리며 내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빛이 내 앞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빛 사이로 한 명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짐승은 그에게 막혀 접근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 가닥으로 묶은 포니테일이 풍성하게 휘날린다. 짧은 스커트 밑으로 길고 가는 다리가 땅을 딛고 있다. 그리고 한쪽 어깨로 길게 뻗은 뿔.

아니다. 그것은 뿔이 아니었다. 록커의 영혼을 가진 내가 그것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것은 베이스였다. 내 앞에 선 사람은 베이스를 메고 있었다. 베이스를 메고 있는 사람을 두 팔을 뻗어 빛을 내고 있었고 빛은 짐승을 막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짐승이 튕겨져 나가고 빛은 사라졌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포니테일로 묶었음에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빛의 머리. 테가 없는 커다란 고글. 마이크가 연결된 헤드셋. 그는 다름 아닌, 소란 누나였다.

“흐음…….”

나는 그 꼬맹이와 소란 누나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란 누나는 뭐시기 뭐시기 별의 메르헨인가 하는(별나라 이름이 독일어인 이유 따위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나라의 공주이고 그곳의 공주는 성인이 될 때까지 다른 세계의 주민으로 살면서 마녀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혼인 적정기인 18세에서 24세 사이에 결혼을 하면 고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를 자격이 생긴다고 한다. 왕이 되는 건 공주든 사위든 그때의 정치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소란 누나 그러니까 체르노빌라 라이온하트 셰리엔느 공주는 왕위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고 돌아갈 생각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릴 적에 서로 결혼을 약속한 이웃나라의 왕자인 아몬(내 앞에 있는 꼬맹이 말이다)은 가족의 간곡한 부탁이며 부추김을 받아 공주를 데리러 이 세계로 왔다나. 소란 누나는 그게 자기나라를 침범하려는 이웃나라 정치인들의 음모라며 아몬 왕자란 녀석을 달래는 모양이었지만 왕자는 아직 그런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건 어릴 적 일이잖니! 스콜라에서 같이 소꿉놀이처럼 지내면서 한 약속이야. 정말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고.”

“공주! 아무리 어릴 적이라 하더라도 약속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고결한 입에서 나온 말은 어느 하나 허투루 흘러가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나요?”

이러고 있는데 중간부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난 옆에 앉아서 기타나 꺼내 치고 있었다. 하나 발견한 것은 왕자 녀석이 펼친 보랏빛 공간은 바깥을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이었다. 건물이며 도로는 대충 윤곽이 보이지만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흔히 나오는 설정이잖는가. 결계 같은 것으로 바깥과 안쪽의 차원을 다르게 만들어서 도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아무튼 몇 분을 이어지는지 모르는 대화가 끝나고 왕자는 결계를 풀고 돌아갔다.

“쳇, 네놈 두고 보겠어!”

하고 나에게 인사를 남기고서.

“저기, 미안해.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소란 누나는 말했다.

“아뇨. 조금 놀랐지만, 괜찮아요.”

“이, 이상했지? 내가 그거…….”

“변신해서요?”

“으, 으응. 사실 내가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런 모습으로 남 앞에 서는 게 좀…….”

부끄럼이 많은 성격이구나. 나는 솔직하게 포니테일의 당신은 눈이 뒤집히도록 멋졌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곤란해 하겠지.

“괜찮아요. 전 이제 익숙해 졌는걸요. 뭐, 변신로봇이 있으면 마법소녀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죠.”

“마, 마법소녀……. 우린 보통 마녀라고 불러.”

소란 누나는 귀가 빨개져 고개를 숙인다. 아무래도 그런 표현은 안 쓰는 것 같다. 하지만 변신한 모습이며 주문 같은 것이 영락없는 마법소녀이다. 마법봉 대신 베이스를 든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왜 하필 베이스일까? 베이스를 쳐서 그럴까?

“그건, 변신 모습은 처음에 내가 세팅할 수 있거든. 주문 쓰는 방식이라든지. 크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복장도 교복 비슷하게 했어. 베이스도 봉이나 하프 같은 것보단 익숙하니까.”

그러고 보니 변신했을 때의 복장이 교복과 비슷했던 것 같다. 괜찮은 선택이다. 풍광 여고 교복은 근방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교복이니까 마법소녀 복장으로도 적절하겠고 변신 후에도 교복인 척 돌아다닐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누나는 고글은 번쩍번쩍하는 특수효과 때문에, 헤드셋은 변신 후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달았다고 했다. 베이스에 자체 스피커가 달려 있다고 했다.

“그럼 이 베이스로 연주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가능은 해. 하지만 보통 베이스랑은 달라서 합주용으론 어려울걸? 또 변신한 채 합주할 일도 없고.”

누나는 정말로 미안한 듯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까지 미안할 일이 아닌데.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나도 되도록 가까운 사람에게는 감추고 싶지 않지만,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서 말이야.”

누나를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변신로봇 다음은 마법소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조합인지 모르겠다. 다음은 뭐지? 나야 미토콘드리아 하나까지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보장해도 된다. 그렇다면 유미 역시 이상한 설정 하나 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미는 소란 누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눈치다. 그렇다면 유미 역시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전개상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스파이더맨이라든가 헐크, 아니면 대 유기생명체 접촉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 같은 것이라도 놀라지 않게.

단 하나 분명한 게 있다.

변신로봇을 모는 한 절반은 천재적인 드러머, 베이스를 치는 마법소녀, 조금 위험해 보이는 기타리스트, 그리고 이몸이 이끄는 우리 밴드는 무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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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프로텍터는 차원의 손상 없이 대상에 대한 논리적 배재를 하는 기술로 메르헨 시민이라면 아카데미의 교양 필수 과목을 이수하여 반드시 익혀야만 한다.

Writer

존모리슨

존모리슨

Moonlight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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