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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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문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타가 불탔을 때에는 직접 수리했고, 동료와 헤어지게 됐을 때에는 재기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으며, 새로운 동료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곳에서 구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우리 앞에는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합주를 할 연습실이 없었던 것이다. 그 어디에도!

학교에서는 당연히 일절 도와주지 않았다. 근처 문화센터에 알아보았는데 합주실을 제공하는 곳은 없었다. 유미는 여고 밴드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합주실을 빌렸다고 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공사 중이란다. 결국 남은 것은 멀리 유료 합주실에 가는 것인데 그것도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일이었다. 유료 합주실은 대개 서울 중심가에 있을 테니 이동 시간 문제도 있고 한 시간에 만오천 원은 하는 대관료도 걸렸다. 계산해 보라. 합주는 적어도 두 시간은 해야 할 텐데 예선이 삼 주 남은 시점에서 일주일에 이틀은 모여야 할 테고 그러면 각 멤버가 일주일에 만 원은 넘게 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난 일주일 내내 연습실을 구하려 돌아다녔다. 심지어는 옆 동네 문화센터나 옆 동네 학교에까지 문의해 봤지만 허사였다. 결국 나는 극단적인 상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학교 운동장 같은 데서 작은 엠프 갖다놓고 패드나 깡통 따위로 드럼을 대신하여 연습하는 것이다. 그렇게 처량한 꼴은 피하고 싶었지만 수가 없다면 어쩌겠는가.

목요일 점심시간, 나는 운동장 등나무 밑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세 학교가 붙어 있으므로 서로 만나기는 편했다.

“드럼은 빌릴 수 있어. 어차피 드럼부는 나 말곤 거의 활동 안 하는데다 드럼세트가 두 개 있거든. 상태 안 좋은 건 빌릴 수 있을 거야.”

강철은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뜻밖의 지원이었다. 이 녀석이 처음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려움을 먼저 알고 방법을 찾아오다니.

“내가 알아보라 했거든. 연습장소를 구하기 어렵다는 건 선배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유미가 말했다.

“그래? 정말 잘 했어. 나머진 작은 엠프 놓고 하면 되니까, 적절한 장소만 있으면 되겠군.”

“그냥 아예 너네 학교 음악실에서 하면 안 돼?”

유미는 강철에게 물었다. 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밖으로 옮겼다가 쓰고 다시 갖다놓는 것만 된대.”

조금 고된 조건이군. 하지만 지금 우리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럴 땐 한국 같은 좁은 나라에서 태어난 게 원망스럽군. 왜, 어째서, 와이 더즈 잇, 한국엔 게라지가 없는 거냐? 그게 문제란 말야. 게라지가 있어야 밴드를 하든 게라지 세일을 하든 할 게 아냐.”

“드럼 옮겨놓을 장소라면, 거기가 좋지 않을까?”

소란 누나가 말했다. 맑고 차분한 그 목소리는 이목을 모으는 효과가 있었다. 마법이라도 쓰는 걸까.

“거기 있잖아.”

세 사람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철이네 로보트 있잖아. 그거 변신하기 전엔 컨테이너 박스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되는 거네!” “그러면 되잖아!”

유미와 나는 외쳤다.

문제는 한 순간에 해결돼 버렸다. 컨테이너 박스도 보통의 박스가 아니다. 변신해서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슈퍼 박스란 말이다!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 걱정할 것도 없다. 컨테이너 자체가 움직이면 되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산속 같은데서 연습할 수도 있고 고층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연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드럼은 누가 옮기지?”

강철은 말했다.

“응?”

나는 멤버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왜 모두 나와 눈을 마주치는 거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런 거군. 초상화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눈을 마주보는 것처럼 보인다잖아. 그것과 비슷한 효과가 아닐까?”

“아니. 이건 너 말곤 드럼을 나를 사람이 없다는 인식에 우리 모두가 도달했다는 뜻이야.”

“그래? 그럼 난 여기에서 날아가겠어. 잘 있거라 지구여. 인류여.”

불현 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이제는 나를 놓아줄 때가 되었구나. 이 욕심 많은 땅덩어리여. 나는 솟아올랐다. 태양을 향해 새하얀 날개를 펴고. 날자, 다시 날아 보자꾸나.

“여기서 남자는 너 밖에 없다는 거 알고 있지?”

유미는 내 볼을 잡아당겨 나를 땅으로 끌어내렸다.

“잠깐! 드럼세트가 얼마나 큰데! 그걸 나더러 혼자 나르라고?”

“평소 자랑하던 슈퍼 파워가 있잖아. 뭐라고 했더라? 내면의 붉은 눈을 뜨는 순간 봉인 돼 있던 마계의 파워가 개방된다고?”

“내가 언제! 그런 중2병스런 설정은 없다고!”

“락의 파워니 뭐니 평소 떠들고 다니던 건 뭐야?”

“그, 그건 그냥 멘탈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그럼 그 락 스피릿으로 나르면 되겠네.”

“스피릿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란 말야.”

“내가 보기엔 똑같아. 안 그래, 언니?”

소란 누나를 보며 말한다. 누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응? 으응. 우리도 나르는 거 도와줄게.”

도와준다고 해도 가장 큰 부분인 베이스와 탐탐은 내 몫이 될 게 뻔하다. 또 매번 연습할 때마다 옮겨야 한다는데 그 때마다 내가 육체적 노동을 해야 하겠지. 이 멤버 중 내가 유일한 성인남성이라는 점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아, 누나가 마법으로 옮기면 어떨까요? 그런 마법은 못 쓰나요? 경량화 마법이나 부유 마법이나."

“우웅, 미안한데 그쪽은 내 전공이 아니야.”

마법에도 전공 같은 게 있었냐.

강철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녀석에게는 나중에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참고로, 누나는 자기 정체를 강철에게는 가르쳐줘도 좋다고 말했었다.

하여간 별다른 수가 없었다. 강철의 말에 따르면 드럼을 쓸 수 있는 기간은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뿐이다. 대신 그동안은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해가 기울 때 드럼을 미리 와 있던 컨테이너에 옮겨 싣는다. 로봇 녀석은 어둠을 틈타 한적한 산중에 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를 쉬는 토요일 곧바로 그곳으로 가서 합주를 하면 된다. 엠프나 전력은 걱정 없었다. 로보트 녀석의 자체 동력은 아마도 모든 과학자가 꿈꾸는 최상의 순수 에너지일 테고, 유미와 소란 누나는 각자 엠프가 있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드럼세트를 옮겼다. 드럼 세트는 크게 베이스와 탐탐, 스네어, 오른쪽 탐탐, 심벌들로 구분할 수 있다. 예상대로 내 몫은 그중 질량의 핵심을 이루는 베이스와 탐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드럼의 무게를 얕잡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럼은 그야말로 장난―아니게―무거웠다. 무엇보다도 이 베이스 드럼이란 녀석은 어디를 쥐기에도 애매했다.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없어 나는 몇 번이고 도중에 자세를 바꿔야 했고 스네어와 하이 헷을 가뿐하게 양 어깨에 짊어 멘 유미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빨리빨리 못 가? 어디서 엄살이야? 내가 남자라면 그런 건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고 다녔겠다.”

“그럼 바꿔주든가! 이게 얼마나 무거운데.”

“어허, ‘내가 남자라면’이라고 단서를 붙였잖아.”

“그건 여남차별이라고, 여남차별! 남자는 뭐 안 힘드나?”

“알았어. 정정하지. 내가 리수 군이라면 그런 건 가슴 트래핑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

“그런 게 가능하겠냐!”

“아니면 브릿지 자세로 배 위에 올려놓고 옮긴다든지?”

“……그걸 한다면 먼저 인간으로서 회의감이 들 것 같다…….”

“흐음…….”

유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 뭐야?”

“리수 군.”

나는 따라 멈춰 마주보았다. 앞서가던 소란 누나와 강철은 우릴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망이야.”

“뭐, 뭐엇?”

그러면서 유미는 앞장서 멀찍이 걸어가 버렸다. 아니, 이 커다란 드럼으로 가슴 트래핑을 못 한다고 내가 왜 실망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냐고.

하여간 나는 옷이 등짝에 달라붙을 정도로 땀을 빼며 드럼을 날랐다. 컨테이너 녀석은 학교 뒤쪽 한적한 수풀 속에 와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드럼을 옮겨 놓으면 녀석은 밤새 몰래 더 깊은 산중에 가 있겠다는 계획이지.

컨테이너 안은 의외로 넓었다. 모두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 했지만 드럼과 네 사람이 모두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엠프와 케이블 등은 내일 각자 가지고 오기로 했지. 매번 이런 노고를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아찔해졌다.

산을 내려오려니 노을이 학교를 비껴가고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시작할 시간인지 운동장은 한적했다. 일학년도 이제 슬슬 자율학습을 시작할 시기인 것 같다. 그러건 말건 난 신경 쓰지 않지만. 아침마다 담임이 무어라 잔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아마 그것 때문인 듯싶다. 알고 보면 이 텅 운동장도 서글프다니까. 야자 하니까 하는 말인데 유미는 나처럼 담임이 뭐라 그러든 신경 안 쓰는 타입 같고 소란 누나는 담임이 오히려 자유롭게 놔두는 편이라고 했다. 고3이라서 공부할 곳은 스스로 찾아가라 배려를 해 준다나?

교문을 나가자 우리처럼 야자에 구애받지 않는 녀석들을 더 볼 수 있었다. 다른 학교 녀석들이었다. 설마 하고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려 했지만 그쪽에서 먼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거기. 대회 준비는 잘 돼 가냐? 낄낄낄.”

듣기만 해도 살인충동이 이는 그 목소리를 내가 어찌 잊을까. 서광 어쩌고 하던 학교에서 밴드를 한다고 깝죽대는 스킨헤드 녀석이었다.

“뭐야? 저건.”

강철이 말했다.

“지지! 저런 거 보면 안 돼. 넌 아직 어린이잖아.”

유미는 강철의 눈을 가려주며 말했다.

“뭐라고? 저게 또!”

스킨헤드는 팔을 걷어붙이며 달려들 것 같은 시늉을 냈다. 그런 허세 따위야 내 눈에는 쉽게 간파된다. 진짜로 덤빌 용기는 없어서 옆에서 잡아주길 바라는 거지. 이번에 데려온 녀석들은 그래도 급이 낮은 녀석들인지 놈을 잘 보호해 주었다.

“그런데 너네, 아직까지 나한테 볼일이 있냐? 왜 자꾸 말을 거냐?”

나는 말했다. 녀석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대답했다.

“뭐어? 잊어버린 거냐? 대회에서 우리 밴드랑 붙기로 했잖아.”

“응? 아아…….”

“아아가 뭐야! 설마 잊어버리고 있던 거냐!”

“으음, 사실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네랑 붙으려고 대회 나가는 거였지.”

“저 자식! 완전히 날 무시하고 있어!”

놈은 다시 덤벼들려 했지만 옆의 똘마니들이 충실히 하지만 별다른 힘은 들이지 않고 놈을 붙들었다.

“음, 누나. 사실 말 안 한 게 있는데요. 으음, 저렇다는데요 괜찮죠?”

“대결? 응! 동기부여도 되고, 건전하게 서로 겨루는 정도면 난 오케이야.”

스킨헤드는 이제는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심복들이 고생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녀석들을 놔두고 갈 길을 갔다.

-삐빅.

어디선가 전자음이 들렸다. 강철이 손목시계를 들어 보였다. 로보트 녀석한테서 신호가 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강철이 말했다.

-아니다. 리수에게 할 말이 있었으나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때가 되면 다시 말하겠다.

“‘때가 되면’이라니. 언제 말하겠단 거야?”

나는 말했다.

-적절한 때에 말하겠다.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신호를 끊었다. 로봇도 실없는 소리를 하는군.

하여간, 이제 내일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합주할 곡을 조금 연습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내일 충실한 합주를 위해서는 휴식을 충분히 취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단비와 둘이서 가볍게 맞춰보는 것 말고는 합주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헤드폰을 쓰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음악을 듣다가 다시 침대에 눕자 그때에는 잠이 든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오싹한 기분에 머릿속을 차가운 물로 헹군 것처럼 눈이 번쩍 뜨이고 말았다.

오밤중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 보라.

2층집에서 말이다. 나는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정신을 집중했다. 만일 몇 분이 지나도록 다시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내 착각이거나 바람에 실려 온 무언가가 부딪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소리는 다시 들렸다. 아까보다 훨씬 큰 소리로.

나는 창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로지 시커먼 어둠만이 그 너머에 비춰질 뿐이었다. 심장 소리가 귓구멍을 가득 채웠다. 무서워하지 말자. 너는 록커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바깥에 있는 것이 귀신이든 도둑이든 키가 5미터가 되는 처자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베이더 경을 끌어안고 살금살금 창문으로 다가갔다. 노크는 다시 한 번 들렸다.

나는 문을 단번에 열었다.

“늦은 밤에 미안하다. 하지만 반드시 전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

그것은 귀신도 도둑도 키가 큰 여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키가 큰 로봇이었다. 달빛도 없이 온 동네를 둘러싼 어둠 속에 키가 집채보다 큰 로봇의 윤곽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불을 켜려 했다. 하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등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이 지역의 전력을 잠시 차단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걸 말하러 이 밤중에 굳이 여기까지 온 건가?

“용케도 여기까지 왔군. 컨테이너 주제에.”

“나의 모체는 컨테이너 박스이지만 본모습으로 변신했을 때에는 너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나는 브릿지 자세로 이동할 수 있다. 네가 못 하는.”

“그딴 거 하나도 안 부럽다!”

“그 자세에서면 비상시에는 육교로 위장할 수도 있다.”

“아무도 안 믿을 거거든! 차라리 멀뚱히 서서 나무로 위장한다 해라!”

“그 제안, 검토해 보겠다.”

“하지 마!”

“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 나는 이따금 인간에게서 경이감을 느낀다. 어떻게 그런 비논리적인 의사소통 체계로 소통이 가능한 건가.”

이 자식,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여긴 왜 온 거냐? 브릿지 자세로.”

“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난 브릿지 자세로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뭔데?”

“나는 이 지구에서 수만 년 간 인류를 관찰해 왔다. 그 이유는 전에도 말했듯 이 별에 잠복해 있는 스타 디스트로이어를 색출하기 위해서지.”

지난번 처음 만났을 때 잠깐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너넨 꽤나 오래 사나보군.”

“수명은 생명의 기준일 뿐이다. 유기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라니? 너 같은 녀석이 또 있단 말이야?”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지구를 감시하기 위해 존재해왔고 그렇다면 다른 별로 파견하기 위한 ‘동족’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기 때문이다.”

“다른 별이라. 그럼 지구 말고 생명이 사는 별이 있단 얘기?”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스타 디스트로이어는 생명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지구를 위해서만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생명이 사는 다른 별의 존재도 충분히 가정 가능하다.”

“흠, 그렇군.”

그렇다는군. 그렇다는데 그렇다는 줄 알아야지. 로보트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최근, 나는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래서 나는 깨어나 용사를 선택하고 이 차량에 깃들었던 것이다.”

차량은 아닌 것 같지만.

“아직 스타 디스트로이어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로보트가 돌아다니는데도 조용했던 거로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구의 데이터를 스캔하던 도중 비정합물질이 복수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그 수는 지금 정확히 추산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 네 종에서 최대 이백스물여섯 종으로 그 가짓수의 범위를 설정할 수 있다.”

“무슨 말이야? 그게.”

“한 마디로 지구상에 원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최소 네 종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스타 디스트로이어는 그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 현상의 원인 또한 스타 디스트로이어라 보고 있다.”

점점 골 아픈 이야기로 빠지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 덩치라든가 깜찍한 마법소녀 같은 존재가 어쩌면 이백스물여섯 가지나 있을 수 있다는 말이잖은가.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지만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일이다.

최고의 록커는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 록스타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여야만 한다. 그게 아니면 록스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자리를 갑자기 지구에 떨어진 슈퍼 로봇이라든가 마법소녀가 차지한다면, 꼭 그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능력자가 지구에 바글댄다면 상대적으로 록커의 위치는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이 지구가 슈퍼히어로의 각축장이 되어버린다면. 안 된다. 이 세계의 주인은 나 하나만으로 족하다. 나 하나여만 한다.

“걱정하지는 말라. 우리 비정합물질은 대체로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각 주체는 현상유지가 최적의 전략적 지향이라는 공동의 인식을 갖고 있겠지. 인간의 생활이 위협받는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만일 어느 한 쪽이 변혁을 꾀한다면 그것을 막으려는 쪽 역시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부류 말이다.”

“그거 참 든든한 얘기군. 그런데 그런 이상한 놈들이 왜 갑자기 이 지구에 나타난 거지? 너도 그렇고. 차원이동이라도 한 거야?”

“차원이동의 개념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너의 나이와 신분을 고려한 이해도에 해당하는 개념을 찾자면 몇 종류 허구적 서사 텍스트에 등장하는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세계 간 이동을 뜻하는 것 같은데 맞나?”

“으음…… 그럴걸?”

“그렇다면 그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차원이동은 하나의 허구에서 다른 허구로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다른 차원이 있다면 그곳은 이곳과 동일한 법칙 나아가서는 두 차원이 하나의 동일한 우주 법칙 하에 존재해야만 한다.”

“으, 뭔 말이냐.”

“한 마디로 비정합물질은 이 우주에 생겨난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들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 아닌 이 우주 자체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우주 자체의 문제라니?”

“이 우주의 위상공간에 변이가 일어나 존재할 수 없는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에, 이건 내용 이전의 문제 같다.

“모르겠다. 어떻게 된 거든 간에 너네들끼리 해결할 문제지. 그보다 그런 얘기 하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온 거야?”

“물론 아니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강철 모르게 너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강철이 모르게?”

“그렇다. 나는 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나의 목적은 앞서 말했듯이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색출과 파괴. 허나 아직 데이터의 부족으로 어떤 부정합물질이 나의 적인지 판단할 수 없다. 너는 앞으로 정보의 즉각적인 교류와 나의 목적에 대한 고려를 보장해 주었으면 한다.”

“내가 너의 부하가 되라는 거냐?”

“아니다. 네가 직접적으로 할 행동은 사실상 거의 없으리라고 판단한다. 명령 계통도 나와 너 사이에서는 형성되지 않는다. 다만 내 행동의 의미와 목적을 파악하고 고려해달라는 것이다. 직접적인 도움이 아니더라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도움이 된다. 이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네 자유이다. 하지만 만일 네가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나 역시 너에게 가능한 한의 도움을 주겠다. 이것은 직접적인 도움까지도 포함한다. 예를 들면 브릿지 자세로 걷는 방법이라든지.”

“그딴 건 필요 없거든!”

나는 녀석의 깡통 같은 몸뚱이를 걷어찼다.

“암튼, 그래. 이해했어. 도와줄게. 그런데 왜 그걸 강철이 모르게 해야 하지? 그 녀석이랑도 말해서 같이 방법을 찾아보면 되잖아.”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너 역시 비정합물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내가?”

내가 그, 뭐냐, 아무튼 그런 거였다니! 초등학교 시절 주먹다짐을 하다가 힘으로는 내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수단으로 초사이어인 변신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로 나는 철저한 비 능력자로서 살아왔다. 그런데 나에게 나도 모르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특정 비정합물질 집단에서 너를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다.”

“뭐야. 김새게…….”

잠시나마 기대 했었단 말이다.

“아직 그 집단의 정체나 목적은 파악하지 못했다. 너를 노리는 이유까지도. 하지만 곧 너와 접촉이 있을 것이다. 그때 네가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 주었으면 한다. 너의 신변에 위험이 생긴다면 내가 지키겠다.”

“그런데 그걸 왜 강철한테는 비밀로 하는 거냐니까.”

“만일 그들이 스타 디스트로이어가 아닐 경우에는 나는 그들의 운명에 간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여할 수 없다니?”

“나와 그들 존재 간 개별적 접촉은 가능하다. 허나 나는 그들을 절멸시킨다거나 지구에서 쫓아낸다거나 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매듭지을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스타 디스트로이어뿐이다.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강철이 간여할 경우 이 일은 이존재간의 대결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이존재와도 관련이 없으면서도 그들의 표적이 되었으며 강철과 친분이 있는 너야말로 이 일을 하기 적격인 사람이다.”

“너랑 강철은 너랑 관계없는 생판 남한테는 관여할 수 없단 말이야?”

“그렇다. 정확히는 누가 나의 목적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 이외에는 직접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흐음. 말은 그렇게 해도 말이지.”

나는 말했다.

“아직 실감이 안 나거든? 이물질 어쩌고야 너랑 소란 누나를 봤으니 그런 게 있다 쳐도, 뜬금없이 날 노리는 또 다른 정체불명의 초능력자라니? 뭘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말야.”

“단서를 주자면 오늘 학교에서 만났던 일군의 무리에 있던 한 자가 비정합물질과 관계되어 있다.”

“뭐? 그 양아치 놈들이?”

“그중 하나이다. 너와 대화를 나누던 자였다.”

나와 대화를 나눴던 녀석이라면, 스킨헤드를 말하는 것일 테지.

“그 녀석 영 수상해 보이던데 역시나…….”

“그 자도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직, 간접적으로 명령을 받고 있는 거겠지. 그 자와 갈등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주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요약하자면, 이 로보트는 스타 디스트로이어라는 녀석을 무찌르기 위해 태어났는데 그자가 누군지 알 길이 없고 수상쩍은 녀석들이 있기는 한데 섣불리 접촉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이리저리 만만한 날 떡밥 삼아 던져두고 지켜보겠단 말씀이군. 아니, 차라리 이건 사전 통보라고 봐야 할까? 나를 그렇게 써먹겠다는. 어차피 지금까지와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얘기, 강철은 어디까지 알아?”

“사실 대장에게는 더욱 개략적인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 아직 대장의 정신 성숙도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부적절하니까.”

그렇겠지. 초딩한테 비정합이니 뭐니 얘기해 봤자지.

“이것을 받아라. 나와 대장을 이어주는 통신기다. 지구인이 쓰지 않는 파장을 쓰므로 보안성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로봇의 가슴팍에서 시계처럼 생긴 물건이 날아들었다. 강철이 차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난 원래 시계를 차지 않으므로 그것은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다음 손님이 기다리는 것 같으니까.”

“다음 손님이라니?”

로봇은 고개를 위로 까딱 움직였다. 몹시 세밀한 움직임인데 로봇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왠지 어색하다.

하늘 높이, 무언가가 맴돌고 있었다.

창밖으로 고개 내민 나를 보았는지 그것은 머리 위를 크게 한 바퀴 돌며 내려오더니 다시 솟구쳐 올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불빛을 빼앗긴 어두운 밤이었지만 얼핏 보이는 그 모습이 무엇인지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길쭉한 막대와 두툼한 꼬리를 한 그것은 플라잉 V2)가 아니면 빗자루임이 틀림없었다.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나풀거리는 옷과 커다란 챙의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일컫는 다른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마녀. 혹은 마법소녀. 하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등으로 비스듬히 베이스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소란 누나는 환상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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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테드 맥카티가 디자인한 기타. V모양의 바디가 인상적인데 실루엣만 보면 빗자루가 연상되기도 한다. 가이낙스의 프리크리(2000)에서 니오타가 뽑아낸 기타나 케이온에서 사와코가 쓰던 기타가 이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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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모리슨

존모리슨

Moonlight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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