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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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예선 대회 날이다. 왜 이렇게 건너 뛰냐 하면, 그간 이렇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새로운 이능력자도 나타나지 않았고 공주님의 정략결혼 상대나 행성파괴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서광고의 스킨헤드 일당도 더는 출몰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로지 연습, 연습, 연습뿐이었다. 합주는 드럼을 빌릴 수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했다. 물론 드럼은 매번 옮겨야 했다. 그 때마다 내가 겪는 고행도 따로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대회를 위해 준비해야 할 곡은 모두 세 곡. 예선 때 두 곡과 본선 때의 새로운 한 곡까지이다. 우리는 예선까지는 예선 곡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고른 곡과 회의를 통해서 고른 강철의 추천곡을 하기로 했는데 합주는 기가 막히도록 잘 됐다.

예선전은 그리 멀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이뤄졌다. 예원여고라는 그 근방에서는 명문 미션스쿨로 유명한 학교다. 지역 예선이기 때문에 위치가 좋고 그리고 시설이 괜찮은 학교가 선정된다고 들었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나는 결석계를 내야 했다. 담임은 호쾌하게 허락해 줬다.

“자율학습도 다 빼먹더니 빼앤드 하느라 그랬던 거냐? 빼앤드도 괜찮지. 그것도 한 때니까. 대신 대회 끝나면 야자 다시 해야 된다. 이것도 나름 학교를 대표하는 거니 잘 해!”

‘다시’라 해봤자 난 야자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담임이라는 것이 몹시 다행인 일이다. 하여간 나는 결석계 문제로 뒤늦게 대회장에 합류했다. 우리가 나갈 시간은 대략 정해져 있었으니 늦을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도착하니 이미 예선이 시작되어 있었다.

무대는 교문 안쪽 넓은 광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학교도 아니고 그렇게 큰 교문과 교정은 처음 본다. 관중은 대개 그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시간으로 봐서는 수업시간인 것 같은데 수백 명은 나와 있는 것을 보니 행사 차원에서 수업을 하지 않는 듯 했다. 지금 무대에 오른 팀은 멀리서 보기에도 나약해 빠진 녀석들이었다. 곡 제목은 모르겠지만 어설프게 펑키한 리듬으로 폼을 잡는 것이 영 어색해 보인다. 폼만 잡는다는 게 눈에 보인달까. 이 대회의 수준을 알 것만 같군.

“큭큭큭.”

나는 남몰래 소리 죽여 웃어주고는 동료들을 찾아 나섰다.

참가자들은 무대 오른편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기타 케이스가 잔뜩 쌓여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테프 목걸이를 목에 건 진행 요원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리 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이쪽이야.”

유미와 나는 서로를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수험생인 소란 누나는 이 와중에도 책을 보고 있었고 강철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대를 지켜보는 것은 유미뿐이었다.

“어때? 오다가 들은 걸로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인 것 같은데.”

나는 유미에게 앞선 참가자들의 감상을 물었다.

“응. 눈에 띌 만한 참가자는 없어. 하지만 이제부터지. 그 녀석들은 아직 안 나왔으니까.”

“흠. 정말일까? 이 년 연속으로 우승했단 게.”

“허언은 아닌 모양인데.”

유미는 뒤쪽을 가리켰다. 스킨헤드 일당이 거기 있었다. 기타리스트가 손을 풀고 있었다. 단순한 크로메틱이었지만 움직임이 놀랍도록 간결하고 일정했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기타는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알 만 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에디 반 헤일런의 시그네쳐 기타이다. 에디는 대표적인 80년대 속주 기타 히어로. 그의 시그네쳐를 쓴다는 것은 그의 스타일을 동경한다는 뜻이겠지. 스킨헤드 녀석도 이쪽을 힐끗 봤지만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이 그 녀석들, 서광&북양 연합 밴드 순서였다. 간단한 소리 점검이 끝나고 마이크를 잡은 스킨헤드 녀석은 말했다.

“우린 서광고 북양고 연합 밴드 멘탈리카라고 해요!”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녀석들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던 것 같다.

“우리 알죠? 2년 연속 이 대회 우승 팀인 거. 게다가 올해는 무지막지한 기타리스트까지 합세했다는 거!”

프랑켄슈타인이 기교를 부린다.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이거 알아요? 겁도 없이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민 밴드가 있어요. 이름 하여 풍광고 밴드! 작년 무대 기억할라나 모르겠네. 아, 워낙 듣보잡이라서 전부 잊어버렸을라나? 하하하하하!”

녀석은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진행요원이 어서 진행하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녀석의 멘트는 대충 얼버무려지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체 어느 정도 하는 놈들일지 드디어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첫 곡은 아니나 다를까, 반 헤일런의 Can't stop loving you였다. 영리한 선곡이다. 보컬을 충분히 뽐낼 수 있으면서도 팝적이고 기타도 적당히 화려한데다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곡이니까.

‘There's a time for place for everything, for everyone. We can push with all our might but nothing's gonna come…….’

스킨헤드의 보컬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썩 괜찮았다. 적어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말이다. 확실히 녀석의 창법에는 어디선가 착실히 배워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다만, 그것이 반 헤일런에 어울리는지는 의문이었다. 녀석의 목소리는 하드록보다는 R&B에 어울릴 것 같았다. 게다가 놈은 블루스 따위는 들어본 적 없는 게 분명하다. 녀석의 목소리는 감성 따위는 전혀 담기지 않은 팝 발라드 흉내에 그치고 있으니까.

“후후훗. 저런 걸 공연이라고 하는 건가? 마치 관객을 잠재우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 같군.”

나는 간단하게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연주력은 저쪽이 위야. 결과는 나와 봐야 알아.”

유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승리다.

“이거 원, 전혀 긴장감을 주지 않는 놈들이군. 난 손이나 풀어야겠어.”

나는 구석에 앉아 기타를 꺼내들었다. 우리 순서가 다가오고 있으니 손을 미리 풀어두는 것이 좋다.

다음 곡은 미스터 빅의 To be with you였다. 그 곡은 더욱 엉망이었다. 달짝지근한 슬로우 템포의 곡인만큼 스킨헤드의 목소리는 제법 어울렸지만 코러스가 문제였다. 보이그룹 같은 하모니가 중요한 그 곡에서는 오로지 스킨헤드 혼자 튀고 있었고 코러스를 맡은 베이스와 기타는 메인 보컬을 영 따라가지 못했다.

다음은 더욱 별 볼일 없는 팀이어서 나는 아예 신경을 끄고 손 푸는 데 집중 할 수 있었다. 강철이 보여준 순서표에 따르면 우리 순서는 두 팀 뒤였다. 지금 나오는 북산 경영정보고, 그 다음은 명월외고, 그 다음이 우리이다. 명월외고라는 이름에 잠시 눈길이 갔다. 내가 중학교 때 시험을 봤던 학교였다. 보다시피 보기 좋게 일반계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녀석들에게는 일종의 억하심정이 있다. 녀석들이 기가 질리도록 끝내주는 무대를 만들어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어디 한 구석에 있었을지 모른다. 첫 합주 날 꿨던 꿈 때문일까. 나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한 눈에 발견하고 말았다. 그 애가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건지. 이제는 먼 것이 되어버린 명월외고의 교복을 입은 무리 사이에서 우담바라처럼 피어있는 단비의 모습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왜 그래?”

유미가 말했다.

“다, 단비…….”

나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단비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아하, 친구가 밴드 한다기에 응원 나온 거구나. 하지만 여기에 자기 학교를 응원 나온 학생은 거의 없어 보인다. 고작 예선전일 뿐이고 지금은 수업시간일 테니까. 또 단비는 성실한 학생이다. 이런 일로 땡땡이 칠 애가 아니다.

“단비라니? 너랑 약속했다는 그 애 말하는 거야?”

유미는 나와 단비의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심경을 헤아리지는 못할 테지. 단비가 내가 아닌 다른 녀석들과 밴드를 한다. 그 의미를 너는 모른다. 단비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의 약속이 어떤 의미였는지. 단비는 내가 계속 기타를 잡을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었다. 그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까지 나기도 했었는데.

나는 기타를 내려놓고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순서가 되어 명월외고 팀은 무대로 올라가 버렸다. 단비도 함께였다.

무대에 올라간 단비는 키보드 앞에 섰다.

베이스가 아니었다.

원투 펀치에 이어 스트레이트를 맞은 기분이었다. 베이스를 내려놓고 다른 악기를 잡을 정도로 그 밴드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일까? 나와의 약속은?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야?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어떠한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비는 자기의 동료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같은 리듬과 화음을 연주한다는 교감. 오로지 밴드원끼리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눈빛이었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재즈 풍의 전주가 진행되나 싶더니 익숙한 멜로디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 on Jupiter and Mars…….’

Fly me to the moon이었다. 이제는 원작자가 무의미해진 노래. 재즈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소절 정도는 너끈히 따라할 수 있는 노래. 진정한 노래. 편곡은 모르겠다. 누구 것을 따른 건지, 아니면 자체 편곡일 수도 있다. 하여간 그들은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심스런 베이스의 리드로 포인트만 간결하게 잡은 단비의 보사노바 리듬이 뒤따르고 거기에 절묘한 기타의 커팅이 리듬을 나눠주면 그 위로 포근한 느낌의 드럼이 채를 뿌려준다. 그것은 이미 고등학교 밴드의 수준이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화음이 아니라 단비였다. 단비가 어렸을 적에 피아노를 했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어릴 적에 체르니 좀 친 것 가지고 재즈 키보드를 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피아노와 키보드는 전혀 다른 분야이다. 내 기억으로 단비는 키보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단비마저 저 팀에 완벽히 녹아들었다는 것은, 팀 전체의 실력과 그 팀을 이끄는 리더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뜻했다. 대체 누구일까. 누가 단비를 회유하고 단기간에 저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지도한 것일까.

왜 나는 단비를 저렇게까지 이끌어주지 못했나.

어느새 두 곡이 모두 끝났다. 나머지 하나는 어디선가 들어봤지만 제목은 모르는 곡이었다. 마찬가지로 재즈 풍의 깔끔한 편곡, 완벽한 하모니를 보여준 무대였다. 연주가 끝나자 나는 무작정 무대 위로 달려 나갔다,

“야!”

뒤에서 유미가 외쳤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를 본 단비는 놀라서 얼어붙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단비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고 거리마저도 느껴졌다. 명월외고의 교복은 짙은 톤이라 전체적으로 무거워 보였다. 모범생 이미지를 표방하는 건지, 그래서 더욱 생소해 보였다.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추궁하려고 묻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비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푹 떨구곤 대답했다.

“미안해.”

“나랑 한 약속은 어쩌고. 나랑은 못 한다고 해놓고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미안해…….”

“베이스는? 또 왜 베이스가 아니라 키보드야?”

“미안해. 난…….”

단비는 답답하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말 못할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미안한 일을 한 것일까. 이제서야 생각이 났는데 단비의 어머니는 베이스 치는 것으로 뭐라 그럴 분이 아니었다.

단비의 뒤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이 새하얀 남자였다. 무대에서는 베이스를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볼일이지? 우리 동료한테.”

“동료…….”

그 말에서 미묘한 강세가 느껴졌다.

“잠깐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배.”

단비는 말했다.

“다음이 우리 무대야.”

나는 말했다. 우리 팀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내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무슨 곡을 준비했는지 알아? 들어봐. 너를 위해서 고른 곡인데.”

“잡담은 나중에. 우린 바로 미팅이 있어서.”

남자는 그렇게 말을 끊어버렸다. 단비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내 쪽을 몇 번 돌아보긴 했지만 단비는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 안으로 섞여 들어가 버렸다.

저 자일까?

단비에게 키보드를 치게 한 사람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냥 무언가가 꽉 막힌 듯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이 우리 무대인가? 벌써 그렇게 됐어? 거기서 난 뭘 하면 되는 거지?

내 앞에 유미의 화난 얼굴이 나타났다. 유미는 내 멱살을 쥐어 잡고는 말했다.

“정신 차려!”

유미는 나를 기둥 뒤 구석으로 끌고 갔다. 소란 누나와 강철은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수 없었다. 나는 그저 혼란 속에 있었다. 이렇게 첫 실전의 문턱에서 나는 목적을 잃고 말았다.

유미는 나를 구석에 처밀어 놓고 양 어깨를 붙들었다.

“네 적은 누구지? 저 애야? 아님 저 감자 머리야?”

“내 적…….”

나는 멍하니 유미의 조금 화난 듯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나른해 보이던 눈을 다부지게 치켜뜨니 꽤나 매서워 보인다. 내 적 말이야? 예술가의 적은 오로지 자신뿐이지. 스승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다. 유미도 그 말을 아는지, 아니면 다른 뜻으로 물은건지 몰라도 나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마치 추궁하듯 그 눈동자 속에 내 얼빠진 얼굴을 비춰준다.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털었다. 일단 무대에 오르자. 일단 최고의 무대를 보여준 다음 단비와 차분히 이야기해 보자. 나는 굳건히 유미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유미는 씩 웃는다.

“덕분에 눈을 떴어.”

“그럼 어서 올라가라고.”

우리는 손을 한데 모았다. 유미가 힘차게 기합을 넣자 모두 함께 아자를 외쳤다. 잠시 발목을 잡은 것 같아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작은 트러블은 최고의 무대로 보답해 주지. 내가 동료를 믿는 만큼 동료의 믿음을 배신해서는 안 되니까.

나는 기타를 고쳐들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올라가야 할 무대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웬 녀석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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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본제는 <<본격 밴드 배틀 물>>이었으나 이것을 그대로 제목으로 쓸 수는 없었다.

Writer

존모리슨

존모리슨

Moonlight kiss
Otherwhere you are
By nov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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