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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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지? 저러다 누나가 당하겠어.”

유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미는 소란 누나가 내려놓은 베이스까지 두 개의 기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젠 많이 지쳤을 것이다. 고된 수행으로 단련된 나조차 이제는 뛸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유미는 말했다.

“한번 시도해 보자. 내가 방금 생각한 수를.”

“수? 어떤 수?”

“리수 군. 자네는 강철의 로보트 군을 본 적이 있지?”

“응. 로봇을 부르자고? 뭐, 이젠 어쩔 수 없나? 로봇을 들키더라도 당장 급한 게 먼저니까.”

“아니. 로보트 군을 들켜선 안 돼. 거긴 우리의 소중한 연습실이라고.”

“그럼 어떻게 하자고?”

“이 보랏빛 공간을 이용하는 거야.”

“이 공간을?”

“될지 안 될지 모르니 일단 언니랑 접촉해보자.”

유미가 말한 작전은 기발하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가능할지조차도 지금 우리로선 알 수 없으니 마법소녀 당사자와 먼저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그런데 벼룩처럼 튀어다니는 누나를 따라잡을 수 있어야지. 우물쭈물하다가는 거대 거북에게 밟혀버리겠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앞으로 나섰다.

 

“어이― 이 덩치만 큰 파충류 자식아! 여기 봐봐!”

거북의 주의를 끌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들리지도 않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 멍청한 괴물 자식아! 이리 와보라고!”

벽돌 조각을 던져 보았지만 역시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녀석은 오로지 소란 누나만을 잡으려 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와 비슷한 곤경을 겪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이 멍청한 소환수 자식아! 그쪽이 아니라 이쪽을 공격하라고! 공주를 다치게 하지 마!”

아몬은 영 녀석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무방비인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무엇이든 머리부터 잡고 보는 법이지.

“으앗!”

녀석은 기습적인 플라잉 니 킥에 가슴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곧바로 일어나 반격하려 했지만 그래봤자 어린애일 뿐, 나는 녀석을 조르기로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

“후후훗. 이럴 때 체크메이트라고 하는 거지? 빨리 저 괴물을 없애버려. 안 그럼 다신 멀쩡한 하늘을 못 볼줄 알아라.”

“큭……. 이거 놔!”

“네가 먼저 우릴 놔주면 놔주지.”

“못해. 못한다고! 저 강화 소환수는 나도 이제 어떻게 못 한단 말야!”

“뻥치시네!”

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으아아악! 진짜야! 지금도 내 말을 안 듣고 공주만 쫓아다니고 있잖아!”

나는 힘을 더 주었고 녀석은 더욱 괴로워했다. 녀석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녀석은 소란 누나와 결혼하는 것이 목적인데 소란 누나를 죽게 할 수는 없잖은가. 저 미친 소환수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보였다. 조금 전 자신을 상하게 한 소란 누나만을 노리고 무지막지한 앞발을 휘둘러댈 뿐이었다. 이대로 둔다면 이 동네 전부를 파괴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럼 방법은 없는 거야? 어떻게든 해보라고!”

“이, 이거 놔! 다시 집중해서 명령을 내려볼게!”

나는 할 수 없이 녀석을 풀어주었다.

“쓸 데 없는 짓 하기만 해봐. 그냥 잠시 멈춰두기만 하라고.”

“쳇.”

녀석은 눈을 감고 낮게 주문을 읊조렸다. 발밑에는 희미하게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녀석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소란 누나는 점점 힘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고 숨을 고르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힘내, 마법소녀.

“됐다!”

아몬은 눈을 떴다. 동시에 소환수의 움직임도 멈췄다.

“성공한 거야?”

거대 거북은 소란 누나를 쫓기를 멈추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사이, 소란 누나는 유미에게 다가갔다. 우리에게 생각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유미는 소란 누나에게 말을 전하는 것 같았고 누나는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베이스를 연주했다. 뭔가 주문을 외우는 거겠지. 누나에게서는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뭘 꾸미는 거지?”

아몬은 물었다.

“이 상황을 뒤집을 계책이지.”

“음. 뭔진 모르겠지만 공주 일은 이 다음이다. 지금은,”

아몬은 뒤로 풀쩍 물러선다.

“네놈 차례닷! 가랏! 에스케!”

아뿔싸! 내가 이 녀석을 너무 놓아주고 있었다. 괴물을 멈추는 주문이 아니라 날 공격하는 주문을 걸었구나. 거대 거북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몬은 고소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쿵. 쿵. 거북은 점차 속력을 높였다. 쿠쿵. 쿠쿵. 그 누가 저돌적인 무언가를 말할 때 탱크를 언급하는가. 저 괴물의 질주는 그야말로 산이 쇄도해 오는 것 그 이상이었다. 거북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풍압으로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쿵쿵쿵쿵. 그것은 차라리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자, 잠깐…….”

그렇게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몬은 출렁거리는 바닥을 붙든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제야 깨닫다니 멍청한 놈. 저 덩치 눈에 네가 보일 것 같냐?”

나는 그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놈을 질책했다.

“머, 멈춰!”

“흥. 거기 있다가 밟혀 죽든가 알아서 해라.”

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몬도 허겁지겁 일어나 달렸다. 녀석은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나는 녀석을 뒤쫓았다.

“따라오지 마!”

“싫지롱!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다!”

“저리 가!”

녀석은 팔을 마구 휘두르며 달렸다. 난 정말로 이대로 밟혀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분으로 달렸다. 저 녀석을 괴롭힐 수만 있다면. 녀석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와하하하하하! 이리와!”

“싫어어―!”

너무나 짜릿한 배후 압박감이었다. 거북은 앞다리를 높이 들었다가 바닥을 찍었다. 그때의 풍압에 우리는 멀찍이 날아가 버렸고 그때의 울림에 건물 여러 대가 무너졌다. 우리는 나뒹굴고 나서도 다시 일어나 달렸다.

체력에는 결국 한계가 왔다. 숨에 겨워 잠시 멈춰 바닥에 모든 호흡을 토해냈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나의 키는 거뜬히 덮어 버릴 만큼 넓은 발바닥이었다. 나는 몸을 날려 그림자를 피했다. 하지만 주위에는 콘크리트가 뒤집어지고 철골이 나뒹굴고 있었다. 발목이 철골에 걸려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발목에 격한 통증이 왔다. 뭔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발목을 만져보니 다시 쓰라린 아픔이 열차처럼 지나갔다. 나는 철골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이, 이젠 못 뛰어…….”

“나도…….”

나보다 조금 위에는 아몬이 쓰러져 있었다. 녀석은 단순한 체력 고갈인 듯했다. 나는 내 위로 떨어지는 발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이야!”

유미의 목소리였다. 유미는 드러누워 있는 나를 걷어 차버렸고 나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왜 벌써 포기하는 거야! 누가 피떡이 된 시체 따위 보고 싶대!”

유미는 소리쳤다. 평소와 다르게 평정심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시 머리 위로 발바닥이 내려왔다. 나는 힘을 더 짜내어 자리를 피했다. 유미가 부축해 주었다.

“더는 무리야. 발을 다쳤어.”

“조금만 버텨! 지금 언니가 최선을 다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으니까.”

“그래? 다행이네. 얼마나 걸린대?”

“대충 1, 2분은 걸린다고 했는데, 2분은 이미 지났지?”

“아니. 안 지났어.”

시간 따위는 모르지만.

“안 지났군.”

“그래.”

“그럼 2분이다!”

우리의 바로 뒤쪽으로 괴물의 앞발이 떨어졌다. 우리는 함께 부서진 콘크리트 바닥을 뒹굴었다. 괴물은 목을 위로 빼며 괴성을 질렀다. 대충 파악한 패턴대로라면 저 다음에는 입에서 불을 뿜겠지 하고 생각한 순간 괴물의 입가에 불이 이글거렸다. 이런 예감 따윈 맞을 필요 없는데 말이야. 절체절명의 위기. 이번에는 바로 머리 위에서 불벼락이 떨어진다. 소란 누나는 아직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

“커엉, 커엉.”

거북이 불을 뿜으려다 말고 기침을 한다. 사래라도 들린 것 같다. 운이 좋았다. 불을 뿜다 사래 들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일어났다. 우리는 다시 뛰었다. 유미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한쪽 다리를 아예 놀릴 수는 없었다. 통증 따위는 잊어버리고 나는 열심히 뛰었다. 뛸 수 있는 데까지라도. 그게 나를 일으켜준 유미에 대한 예의니까.

“구오오오오―――――――――――――”

괴물은 다시 울었다. 이번에는 진짜겠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마치 길게 가래를 뽑아내는 듯한 소리가 찔러 들어왔다. 이내 등 뒤에서부터 화끈한 열기가 우리를 앞질러갔다. 등을 데인 것 같다. 우리는 화력에 밀려 또 다시 앞으로 굴렀다. 이젠 소용없었다. 아마도 수천 도는 될 법한 화염은 우리를 그대로 집어삼킬 기세로 달려들었다. 나에겐 불길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유미야!”

나도 모르게 유미를 와락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모르게.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유미를 감싸고 등을 내밀었다. 이번엔 유미도 밀쳐내지 않는다.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느낌. 천국에서 존 레논을 만난다면 그는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샤이닝 프로텍터―!”

샤베트처럼 경쾌한 목소리.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강렬한 빛. 그와 함께 열기가 사라졌다. 어느새 소란 누나가 불길을 막아선 채 마법의 보호막을 펼치고 있었다.

“누나!” “언니!”

우리는 외쳤다. 하지만 누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혼자 불길을 막아내기가 벅찬 듯 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베이스를 쥔 양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발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뒤로 점점 미끄러지고 있었다.

“차원 맺기는 성공했어. 하지만 거기까지 차원장이 펼쳐지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거리가 있으니까.”

누나는 간신히 말했다.

괴물은 잠시 방사를 멈추었다가 다시 굉음을 내며 불을 내뿜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강렬한 기세였다. 하지만 마법 방어벽의 색은 조금 옅어졌다.

“미안해. 마법력도 체력도 이제는 한계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모르겠어.”

누나는 말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누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유미도 내 뒤를 따랐다. 잠시 유미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우리는 소란 누나의 마법 베이스에 손을 갖다 댔다.

“마법은 도와줄 수 있지만 체력은 조금 보탤 수 있다고.”

유미는 말했다. 베이스의 압력은 무시무시했다. 마법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불을 내뿜는 물리적인 힘은 오로지 체력으로 버텨야만 했다. 나는 우리가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고마워…….”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유미는 말했다.

“우린 밴드잖아.”

내가 말을 이었다.

“잠깐! 날 잊은 건 아니지?”

웬 초딩 목소리가 들렸다. 아차, 너도 있었지.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금 출발했대! 보랏빛이 도착하니까 바로!”

“좋았어! 그 녀석 최대 시속은?”

“그딴 거 몰라! 하지만 무지 빠르지!”

“암튼 베니어링이 닳아 없어지도록 달려오라고 해!”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그 녀석이 올 때까지. 작전은 간단했다. 차원 맺기는 마법이든 뭐든 간에 그 안에서 떠들썩한 잔치를 벌여도 바깥 세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마법이다. 당연히 거대 로봇이 설치더라도 그 안이라면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로봇은 우리 동네에서 꼼짝도 못 한다. 여기서 해결 방법은? 차원장을 로봇이 있는 곳까지 펼치면 되는 것이다! 유미에게서 브리핑을 받았을 때에는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지만 소란 누나는 그것을 해냈다. 조금 시간이 걸리고 마법력을 많이 사용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마법은 성공하여 로봇 친구가 여기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멀리서부터 땅이 울리고 있었다. 거북이 한 발짝 한 발짝 쿵쿵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였다. 그것은 단거리 육상선수가 발을 땅에 딛는 것과 같은 리듬이었다.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지구 크기의 북을 커다란 스틱으로 난타하는 것만 같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땅이 흔들려 베이스를 받치고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울림이 멈추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우리의 머리를 타넘어 간 것은 커다란 사람 모양의 물체였다.

불길이 멈추자 소란 누나는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거북은 새로 나타난 덩치 쪽을 신경 쓰느라 공격을 멈춘 듯했다.

강철이 나섰다.

“가라! 체리버스터! 저 괴물녀석을 날려버려!”

-라저!

붉은 색의 변신로봇은 양 다리를 뻗으며 날았다. 공중에서 무릎을 웅크렸다. 그리고 다시 온몸을 쭉 뻗는다. 그것은 틀림없는 드롭킥이었다. 거북의 덩치가 훨씬 컸지만 키가 18M는 족히 되는 쇳덩이의 드롭킥을 멀쩡히 받아낼 수는 없으리라.

하늘을 가르는 18미터짜리 우아한 드롭킥이 커다란 거북의 등짝에 가 꽂혔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타격음과 함께 거북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로봇은 또다시 엄청난 소음을 내며 바닥에 착지하더니 몸을 데굴데굴 굴려 일어났다. 물론 그 와중 바닥이 한 번 더 뒤집어지고 온갖 먼지와 돌덩이가 튀었지만 소란 누나의 얇아진 방어막이 막아주었다.

거북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하지만 로봇에게 흠씬 두들겨 맞더니 다시 검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로봇이 펼친 DDT나 잭나이프 파워 밤, 파워 슬램, 사모안 드롭 등은 일일이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내내 궁금했는데 이쪽 세계에서 일어난 이 난리법석이 바깥 세계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설명을 간단히 듣긴 했지만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곧 볼 수 있을 테지만 차원막이 걷히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했다. 로보트 녀석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나서 마법을 거둬야 한다. 그 잠깐 궁금한 걸 못 참고 소란 누나에게 물어보았다.

“생명체를 제외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 이거 원리가 현실세계를 그대로 복사해서 그 안의 생명체들을 옮겨놓는 거거든. 여기서 부숴진 건물이나 길은 전부 가짜란 얘기야. 그리고 대부분 생명체들은 그대로 옮겨가는데 기억은 전부 없어져. 기억을 유지하는 사람은 차원장 내에서 시전자와 오래 접촉을 한 사람 뿐이야. 또 이 안에서 시전자와 접촉을 했다 해도 시전자와 관계없는 활동은 기억되지 않아.”

“그거 좀 이상한데요.”

나는 날카로운 이성을 발휘해 보았다.

“기준이 생명체라면 미생물이나 단세포 생물도 포함되나요? 로봇 녀석은 그럼 생명체 취급을 받은 건가요? 또 시술자와의 접촉을 판정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판정하나요?”

“리수 군.”

유미가 말했다.

“응? 으헉!”

유미의 텔레캐스터가 물레방아 같은 반원을 그리며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흠. 기타 샷이란 게 이런 느낌이군.”

유미는 기타를 매만지며 말했다.

“기타 함부로 휘두르지 마!”

“자네 기타도 흉기로 쓰이잖아.”

“내 기타는 이미 많이 망가졌고…….”

“내 것도 뭐, 이제 깨끗한 미관은 포기해야지.”

유미의 기타는 군데군데가 그을었고 소프트 케이스가 눌러 붙어 너저분했다. 반면 소란 누나의 베이스는 깔끔해 보였다. 그것도 유미가 같이 들고 뛰어다녔는데 마법이라도 걸어놓았을까?

“이게 원래대로 돌아가더라도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기타를 빌려서라도 해야지.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래야겠지. 피곤해서 죽을 것 같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우리는 밴드 할 자격이 없다. 로봇이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푹 쉬었다. 문득 이 난리 통에 죽은 사람은 없나 걱정이 되었다. 죽은 사람은 복원되지 않는다고 했잖은가.

“그건…… 어쩔 수 없어. 나도 그래서 피해가 최대한 안 가게 하려고 했는데…….”

마음씨 착한 소란 누나는 눈물까지 글썽이려고 한다.

“이제 이 보라색 하늘을 걷어야죠? 그럼 나머진 다 원래대로 되는 거죠?”

“응.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

“아까도 좀 걸렸잖아요. 이 지역 전체를 덮은 거니 어쩔 수 없죠.”

“아니, 좀 더 걸려. 왜냐하면 여긴 아몬이 쓴 마법이 겹쳐 있거든.”

맞다. 보라색 막을 펼친 건 아몬이 먼저였지. 아몬은 지금 어디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로봇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고 했다. 누나는 차원막을 거두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니 천천히 가도 좋다는 말을 했다. 강철은 하품을 하며 그때까지 조금만 자겠다고 했다. 로봇은 떠나고 누나는 적당한 데 앉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쉴 만한 곳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폐허 한 구석에서 눈에 익은 차가 뒤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킨헤드 녀석들이 타고 왔던 다마스였다.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당한 걸까? 나는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거기서 사람들이 꼬물꼬물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쩌다가 차가 뒤집혔는데 이 난리 통에 밖으로 나갔다간 오히려 파편 따위에 휩쓸리기 십상이니 차 안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기어 나오고 있던 것일 테지. 그중에는 내 기타를 안고 있는 스킨헤드도 있었다. 내 기타를! 잘 걸렸다. 나는 절뚝거리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허겁지겁 일어났다. 놈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녀석은 발도 절었고 이마에서 피를 흘려 등짝까지 적시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이내 나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녀석은 콘크리트 더미에 가로막혀 더는 도망가지 못했다.

“내 기타 내놔!”

그는 내 기타를 끌어안고 고개를 저었다.

“몇 대 맞기 전에 내놔라. 내가 지금 많이 위크니스해졌지만 너 같은 비리비리한 놈 정도는 근성과 열정으로 죽기 전까지 패줄 수 있으니.”

“안돼. 이것은, 이것만은…….”

“이게 확!”

손을 치켜들자 녀석은 눈을 감고 웅크린다. 이 녀석 대체 뭐야? 왜 이렇게 내 기타에 집착하는 거지?

“야. 배후가 누구냐?”

“뭐라고?”

“배후가 뭐하는 놈이냐고. 너 혼자 이런 일을 꾸미진 않았을 거 아냐. 뭐가 목적이지? 아니, 내 생각이 맞다면 넌 훨씬 수상한 녀석의 끄나풀 정도일 텐데 그래도 너한테 이런 걸 시킨 녀석은 있을 거 아냐.”

“몰라. 나 그런 거 몰라.”

“이게 정말!”

난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이건 네가 가질 만한 기타가 아니니까.”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틈에 나타난 건지 딱 봐도 수상한 녀석이 콘크리트 더미 위에 서 있었다. 짙은 초록색 후드와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수상하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제 이 세상은 이백이십 개나 되는 불가사의가 어디선가 빈둥거리는 곳이 되었으니까. 방금 무지막지한 싸움을 목격한 터라 이젠 뭐가 나타나도 놀랍지 않다. 시공 착오적인 망토 정도야.

그렇게 간단하게 감상을 하고 있는 찰나, 그는 콘크리트 더미에서 뛰어내리더니 스킨헤드로부터 기타를 받아들었다.

“어어, 그건 내 거야.”

녀석은 말했다.

“아니, 이건 네 것이 아니다. 응당 가져야 할 자의 것이지.”

후드 속으로 드러난 얼굴은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좀 전에 단비와 같이 있었던 선배라는 자였다. 얼굴이 새하얗고 베이스를 쳤던. 옳거니. 이 자가 원흉이었다. 이런 수상한 옷을 입었다는 건 어딘가의 수상한 존재라는 뜻일 테고, 유미의 추론대로라면 그 녀석들이 서광고 녀석들을 꼬드기고 아몬을 부추겨서 내 기타를 빼앗으려 이런 일을 일으켰을 것이다.

“골 아픈 기타지. 제 주인을 선택하는 기타니까. 주인이 소유권을 양도하지 않는 한 아무도 가질 수 없어. 그렇다 하더라도 이 녀석이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돼. 어째서 널 인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애송이가 이 블러디 몽키를 가져선 안 돼.”

“주인을 선택하는 기타라면 그건 두 말 할 필요 없는 내 기타잖아! 돌려줘! 이 오타쿠 자식아!”

“이젠 아니라니까. 차원장은 물질계를 복사해 공간을 만들지. 그건 개인 소유물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 안에 있었던 중요 사건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생명체처럼 사건의 영향을 받지.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이 기타를 뺏고 차원장이 걷히고 나면 소유권이 이전되는 거야. 힘들었다고. 이런 무대를 만드는 거.”

“뭐, 뭔 말이야, 그게.”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이제 이 기타는 네 것이 아니란 얘기야.”

“시끄러! 그건 내 거야! 이리 내!”

나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스킨헤드가 내 허리로 파고들어왔다. 분명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어디서 힘이 났는지 레슬링 선수처럼 저돌적으로 날 막아선다. 눈을 보니 초점이 나가 있었다. 설마 조종을 받는 건가?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붙잡고 다친 쪽 다리의 무릎으로 올려 찍었다. 잔인한 기술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몇 번을 그렇게 치니 녀석은 축 늘어져 버렸다. 손이 녀석의 머리에서 흐르던 피로 범벅이 되었다.

“너 이 자식, 이걸 뺏기 위해 단비까지 끌어들인 거냐?”

나는 뒤돌아 걸어가는 녀석에게 외쳤다.

“보험이지.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그는 뒤로 돈 채로 고갯짓을 해 오른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단비가 있었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 몇 명에게 붙들려 있는. 그 녀석들도 스킨헤드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 녀석들은 단비의 옷을 잡아 뜯으려 하고 있었고 단비는 몸을 비틀며 저항하고 있었다. 후드를 입은 자는 보고 있기라도 하듯 손뼉을 쳐 주의를 끌었다. 이번에는 왼쪽. 거기에는, 아몬이 있었고 식물 덩굴에 몸이 묶여 공중에 매달려 있는 유미가 있었다. 아몬 역시 지금까지 상태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 지금 내가 네 녀석을 짓밟아버리고 갈 수도 있지만 눈에 뵈는 게 없는 네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말이야. 날 따라와 기타를 뺏으려 시도할지 아님 히로인 중 하나를 구하러 갈지 알아서 하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걸어 나갔다. 그야말로 선택의 순간이었다. 나는 한쪽 발을 다쳤고 거리상 한 쪽으로밖에 갈 수 없다. 그 사이에 다른 쪽 인질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다. 시간 또한 없었다. 후드 자식은 매 순간 걸어가고 있었다. 유미와 단비. 제길, 하필이면 어째서 이렇게 인질을 고른 거지?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수법도 참 고전적이다. 액션 무비에서 여자의 자지러지는 비명은 히어로의 등장을 알리는 전주곡이지.

나는 꽤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액션 영화 따위를 보면 말이다. 종종 느낄 때가 있다. 이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히 이뤄진다. 악당은 자멸하고 잘생긴 주인공은 승리하고 여자는 붙잡힌다. 아니, 여자는 붙잡히고 잘생긴 주인공은 그 여자에게 키스를 한다. 경비원이나 배 나온 경찰은 밤중에 총을 맞거나 “누구야?”라고 말하다가 총을 맞는다. 주인공의 총에 죽어나가는 스페셜리스트들을 보자. 그들은 고글과 마스크를 쓰고 소총을 들었지만 이름 한 번 말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들도 나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그중에서도 선발된 스페셜 중 스페셜일 텐데 말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돼 있는 거지? 어째서 가장 잘 생긴 녀석만 주인공을 하는 거고 주인공은 모든 걸 혼자 다 해먹는 거지? 영화니까. 그래. 대개는 그렇게 답할 것이다. 그건 영화고 영화는 원래 그런 거지. 그 말은 영화는 일말의 진심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모두 영화를 보며 속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잠시나마 기쁘고, 슬프고, 짜릿함을 맛보더라도 그건 전부 가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더 이상하다. 여기서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유미, 단비, 그리고 나의 소중한 기타 중에서. 어째서 나인가. 영화로 치자면 내가 주인공이니까 이 자리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참 화려한 주인공이다. 별나라 공주 출신 마법소녀. 전설의 용자 로봇을 갖고 있지만 열혈과는 거리가 먼 초등학생. 그리고 유미. 유미는 뭐지? 이게 정말 영화라면 유미도 균형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능력도 비밀도 없는 내가 주인공일 리가 없지 않은가.

시나리오 작가 나와 보라고 해. 이렇게 엉망인 시나리오가 어디 있어.

남자는 그 순간에도 점점 멀어졌다. 유미와 단비는 정말로 고통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냐 공주냐. 그리고 공주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제길! 이러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잖아!”

“바보야! 빨리 움직여!”

유미가 외쳤다. 덩굴이 구렁이처럼 몸을 조여 오면서도 유미는 악을 쓰며 말했다.

“뭘 고민하고 있어? 네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빨리 가란 말야! 모두 놓쳐버리기 전에!”

하지만 난 정말 모르겠는걸. 뭐가 내 진짜 마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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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구하는 문예사조는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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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모리슨

존모리슨

Moonlight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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