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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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는 자기 밴드원이 급하게 불러서 돌아갔다. 객석 의자에 앉아 있던 유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해.”

기운이 발바닥 밑까지 떨어져 무슨 말장난인지 생각도 하기가 싫어져 대충 대꾸했다.

“그래, 그래. 고맙다.”

나는 앞줄 의자에 앉았다. 경연은 모두 끝난 듯했다. 사회자가 나와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심사 중이라는 것 같았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나야 뭐 그런 적도 없고 앞으로 겪을 일도 없을 테지만.”

“뭐라는 거냐?”

나는 몸을 가능한 한 비스듬히 누인 채 말했다.

“음? 아직 이해 못했어? 자넨 지금 차인 거잖아.”

난 의자 채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뭐, 뭐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으이구, 둔하다니까. 자네는 지금 차였다고. 저 소녀한테. 이름이 단비라고 했지?”

“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무슨 일이 진행된 거야?”

“그런 건 지금 모르면 말해줘도 평생 알 수 없네요.”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다!”

뭔가 미묘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유미는 하핫, 하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여전히 맘이 있던 거였어?”

“응?”

“그 애한테 말야.”

“뭐야, 그냥 떠본 거였냐?”

“반 정도만. 너도 은근히 순정파네? 헤어진 옛 여자친구를 혼자서 그리워하며 끙끙 앓을 정도면 말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애초에 사귀던 거도 아니었고.”

“어쨌건 간에.”

“그보다 넌 얘기를 다 들었냐? 그 거리에서.”

나와 단비는 유미가 앉은 자리에서 오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목소리는 거기까지 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귀가 밝아. 조상 중 나메크인이 있거든.”

“나메크인은 단성생식을 하거든요?”

그런 시답잖은 농담이나 나누고 있자니 유미도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얼굴에서 피곤함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강철은 의자에 웅크려 자고 있었고 소란 누나는 살포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일단 단비와의 대화를 들은 건 유미뿐이군. 그것이 어설피 드러난 내 마음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든 유미의 설레발이든 간에 목격자는 많이 만들어두지 않는 편이 낫겠지. 거꾸로 말하면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유미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한가? 여하튼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단비와는 다시 차분히 이야기를 해봐야 할 일이다.

누나와 강철에 대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야기를 달성한 세력이 세계를 지배한다.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일지 아니면 날 좀 골려주려는 암호문일지 아니면 아무 뜻도 없이 머릿속만 헝클어놓으려는 공작일지 알 수가 없다. 일단 그들에게는 확실해지기 전까진 말하지 말도록 하자. 예민한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할 열쇠가 될지어니.’

스승님의 마지막 말도 귓가를 멤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로 이어진 일일까? 스승님은 과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운이 좋군. 설마 그가 여기 와 있었을 줄은.”

좀 전에 단비와 같이 있었던 선배라는 자였다. 얼굴이 새하얗고 베이스를 쳤던. 놈이 무슨 볼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유미는 그를 보고 경계하듯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 저 사람 알아?”

“몰라. 왠지 기분이 나빠져.”

유미는 낮게 말했다.

“그 안에서 빠져나온 건 아마도 그 자의 도움이겠지? 그 자가 있어선 우리도 방법이 없지.”

“뭐라는 거야?”

“어쨌든 기억해 두지. 하지만 다음엔 그리 만만치 않을 거야.”

놈은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고는 돌아가 버렸다. 유미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대회의 막바지. 사회자의 웃기지도 않은 수다가 끝나고 드디어 수상자가 발표될 시간이다. 결승에 진출하는 팀은 두 팀. 예선전 일위에게는 부상으로 회식비 정도의 상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결과야 볼 필요 없이 일등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물론 나의 밴드에게 일등 이외에 다른 순위는 고려조차 되지 않지만 그래도 순위권 팀을 꼽아보자면 서광고 밴드, 명월외고 밴드, 그리고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연주가 제법 깔끔했던 한 팀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이중 결승 진출 확률을 반반에 일위를 할 확률은 다시 반. 이런 확률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게 어차피 우리가 일등이겠지만. 잠시 피로조차 잊어질 만큼 사회자의 썰렁한 개그 하나하나가 교통체중처럼 흘러갔다.

사회자는 당장 1위 발표를 할 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마이크를 심사위원에게 넘겼다. 오디션 프로그램 흉내라도 내는 건지 심사평이 있단다. 심사위원장이라고 소개를 받은 한 남자가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나는 기타 케이스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저, 저건!”

쓰러진 기타에 머리를 얻어맞은 강철이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무슨 문제 있어? ……어어? 저건?”

유미도 알아보는 듯했다. 멀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치렁치렁한 회색빛 머리와 수염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프릴 달린 메이드 복을 입고 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스승님이었다. 내게 기타를 가르쳐주고 이 기타를 물려주신 스승님이 심사위원장이랍시고 올라가 있는 것이다!

“몰골은 여전하군. 그네히메.”

유미는 말했다. 그의 등장으로 장내는 일순 들썩였다. 아마 그네히메의 위업이 평범한 여고생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저렇게 노출되어도 되는 건가? 저 사람한테 관심 가질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 글쎄……. 여긴 카메라도 음악 관계자도 없지만……. 그보다 저 사람이 왜 이런 데서 심사를 보는 거야?”

“들어보자…….”

스승님은 마이크를 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에, 공연 잘 봤습니다. 하나같이 고등학생이라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연주와 퍼포먼스를 보여줘 제법 놀랐습니다.

스승님 치고는 멀쩡한 멘트였다.

-일등 발표부터 할게요. 에? 이등부터? 꼭 그럴 필요가…… 알았어요. 이등부터 하겠습니다.

사회자와의 잡담이 도중에 섞인다.

-에, 이등은. 아니, 그보다 끝까지 고려 대상에 남은 팀이 네 개 있는데 그것부터 발표할게요. 나머지 두 팀은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그럴 자격이 충분한 팀이죠. 결승에 올리고 싶은 팀이 네 팀이나 있어 본인은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그 네 팀은 내가 꼽은 그대로였다.

-에에, 이게 말하기 좀 애매한데요, 그냥 일등부터 말하면 안 됩니까?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원래 일등 팀이 기권을 해버려서요. 그 팀은 명월외고 밴드 진월담입니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죠. 고풍스런 영국의 전설 한 줄기가 생각나는 이름입니다. 이 팀은 내분이 생겨 결승 진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비네가? 하긴, 연주력만 따진다면 그쪽이 한 수 위였으니까. 또 그쪽에 수상쩍은 인간이 섞여 있으니 놈의 계획이 틀어진 지금 밴드를 지속할 수는 없겠지.

-그럼 다음은 2등 같은 1등. 풍광고 밴드 벨리 스팅스! 내 제자가 기타와 보컬을 맡은 밴드죠. 내 제자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다니 스승으로서 몹시 기쁩니다그려.

하고 스승님은 뻔뻔하게도 말했다.

“자, 잠깐! 대놓고 오해받을 만한 말은 하지 말라고!”

주변에 있던 다른 참가팀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재빨리 모르는 척. 여기서 그걸 밝힐 건 뭐냔 말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고 있어.

“이쪽 보고 손 흔들지도 마!”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스승님.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 외치고 말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하여간 참으로 감격스런 재회다.

그 다음 순위는 멘탈리카였다. 나는 상장을 받으러 그리고 스승님을 만나러 무대로 달려 나갔다. 서울시 청소년 동아리 제전 결승 참가권을 받아들고 대충 사진을 찍어주고 스승님과 2년 만의 대면을 했다.

“잘 지냈느냐. 그래, 이제는 길을 발견했느냐.”

“길은 얼어 죽을 길. 대뜸 그렇게 떠나놓고 무슨 소리예요? 그보다 이거부터 설명해 보세요. 이 기타. 스승님이 준 이 기타 정체가 뭡니까?”

나는 케이스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 켕기는 게 있어 꺼내들지는 못했다. 내 기타 상태는 스승님께 받은 그대로가 아니다. 아마 무대에서부터 알아봤겠지. 실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따져야 했다.

“허허, 내 내도록 가르치지 않았느냐. 물은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질 못하다. 네 마음이 이끄는 길. 그것이 진리이니라.”

“여기까지 와서 그런 소리예요? 내가 이 기타 때문에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걱정 말거라. 그것도 다 지나가는 일. 네가 올곧은 마음만 간직한다면 너는 결국 네가 바라는 곳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조금이라도 잔수를 부리려고 한다면 그땐 네 마음이 너를 아비의 미궁에 빠트리고 말 것이니.”

그러면서 스승님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무대를 내려가 버렸다.

“알 만 하군.”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알 만하겠다는 건지.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 붙잡아서 반드시 캐물어야겠다. 이 기타의 정체에 대해서. 어째서 내게 이런 것을 물려줬는지를.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내 오른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발목은 사람 발인가 싶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시큰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발목 속으로 뱀이 지나가는 듯한 섬뜩한 통증이었다. 나는 걷기는커녕 일어날 수도 없어 비명을 질렀다.

 

결국 나는 병원에 실려 가고야 말았다. 뼈에 금이 가 있었단다. 검사 받고 이것저것 하느라 하루를 입원해 있어야 했다. 때문에 공연 뒤풀이는 병실에서 과자 따위를 쌓아두고 치러야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성공을 축하하고 일찍 헤어졌다. 하루 입원이라니 집에서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나는 일찌감치 잠에 들어 다음날 의사가 쫓아낼 때까지 퍼질러지게 잠을 자다가 점심시간 즈음 학교로 바로 출근했다.

모처럼 푹 쉬면서 나는 향후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보았다. 일단 본선에 진출한 뒤 더욱 완벽한 연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거야 뭐 시간문제니 고민할 거리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이 대회는 서울시 주관인 만큼 참가 규모도 최대이고 당연히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한다. 전국에 밴드 이름을 알리고 미디어 장악을 바탕으로 메이저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을 낸다. 아마 우리 음악이라면 밀리언셀러는 보장될 것이다. 그리고 국내 활동으로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우리는 영국에 진출한다. 록의 본고장 영국에서 최초로 차트에 오른 한국인 밴드가 되는 것이다.

음. 완벽한 계획이다. 내 스스로도 감탄이 다 나오는 성공 스토리이다. 아카데미 각본상 감이야. 이 원대한 계획의 첫 단추를 끼우기 위해 나는 밴드 소집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 어째서 매번 자네가 소집을 하는 거지? 마치 리더라도 된 것처럼.”

유미는 가장 늦어놓고도 나타나자마자 대뜸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모인 건 사흘 뒤 금요일 점심시간. 각자 일이 있고 휴식 기간이 필요하기도 해서 모임이 미뤄졌다.

“‘리더라도 된 것처럼’이라니. 실질적으론 내가 리더잖아.”

공언한 적은 없지만 내가 이 밴드를 만들었고 내가 전부 내 발로 뛰어다니며 멤버를 구했고 연습실을 찾았으며 심지어 드럼까지 날랐는데 당연한 일 아닌가.

“실질적인 게 어딨어. 나도 급하게 준비하느라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했는데 이런 문제일수록 확실해 해야 하는 거야.”

“그런가. 그럼 리더는 당연히 이몸이…….”

“기각.”

유미는 딱 잘라 말했다.

“가차 없이 기각이냐!”

“입후보자는 더 없는 거지? 그럼 나 혼자 입후보하고 투표 들어갈까?”

“어이, 왜 나는 배제하는 거야? 후보라도 시켜달라고!”

“그럼, 내가 이 밴드의 리더가 되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

“아예 무시하는 거냐? 이 투표는 원천 무효다! 부정선거야!”

나 말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거 참 시끄럽네. 얌전히 거수만 하라고. 민주주의 몰라? 절차적 정의 안 배웠어?”

유미는 눈을 흘기며 말한다.

“절차? 지금 네가 그걸 운운하고 있어?”

여기엔 뭔가 음모가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유권자들을 직접 설득하고 나섰다.

“초딩아. 소란 누나.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건 폭거예요. 쿠데타라고요. 이렇게 리더를 정하는 게 어딨어요.”

강철은 말했다.

“네가 대장을 하겠다고? 차라리 우리 체리한테 시키겠다.”

음, 이 녀석은 원래 도움이 안 되니 넘어가고.

“누나. 저 좀 지지해주세요. 이건 중대 사안이라고요.”

하지만 소란 누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난 사실 이미 유미한테 포섭당해서. 헤헤.”

사전공작이었냐!

결국 찬성3 기권1로 유미가 밴드의 리더로 선출되었다. 전 임시리더인 나는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간단히 나는 리더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간단히. 이로써 내 밴드를 만들어 세계 제패를 한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 신임 리더로서 첫 업무 보고를 하겠어. 우리 결승전 말인데. 내가 미리 조사해 왔어. 향후 일정이나 장소, 규모, 참가 팀 등을 알아보려고 말야.”

유미는 벤치 위에 올라서서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그거 취소됐어!”

그게 그렇게 당당히 말할 내용이냐!

“어쩌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니?”

소란 누나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 형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강철이 말했다. 왜 또 날 갖고 뭐라 그러냐. 스승님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해봤다만.

“그게 대회 자체가 무산됐대.”

“대회 자체가?”

“응. 완전 취소는 아닌데 무기한 연기. 취소나 마찬가지지. 몰라. 그냥 주최 측 사정이라는데 내 생각엔 그 녀석들 때문인 것 같아.”

“내 기타를 뺏으려는 그 놈들?”

“응. 그 대회조차도 놈들의 계략이었다는 거야. 그 기타를 뺏으려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기타 하나 뺏는데 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그보다 조금 더 한 짓을 생각해도 상관없을 듯했다.

“하지만 이 대회는 십 년 가까이 된 대회인걸.”

소란 누나가 말했다.

“그러네……. 그럼 그건 아닌가?”

유미는 꼬리를 내린다. 하긴, 그런 유서 깊은 대회에 함부로 관여할 수는 없겠지. 놈들 세력이 정도를 넘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놈들이 현실 권력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 기타 하나 뺏는데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썼겠지.

“그럼 우리 상금은?”

강철이 유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상금은 다음 대회를 위해 킵해둔대.”

“뭐야? 이게. 상금을 받으면 엠프를 사려고 했는데.”

난 중얼거렸다.

“드럼이 먼저야! 계속 드럼을 들고 다니고 싶어?”

강철이 말했다.

“드럼이야 몇 번 날라보니 익숙해졌지. 엠프가 먼저야. 저 조그만 엠프 쓰다가 큰 엠프 쓰니까 완전 딴 세상이잖아. 진정한 내 실력을 알겠더라고.”

“진정한 실력 좋아하네. 이번엔 어쩌다 잘 나왔을 뿐이잖아. 지금까지 연습한 것 중에 자네가 한 번도 안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거 알고 있어?”

유미가 말했다.

“그, 그건…….”

“어차피 물 건너 간 건 생각하지 말자고. 그보다 다음 안건이 있어.”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또 유미에게 끌려 다니다가 해야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잠깐, 내가 먼저 말할게. 우리 밴드 이름 말인데,”

“기각.”

“또 왜!”

유미는 벤치 위를 뚜벅뚜벅 걸으며 말했다.

“난 리더고 이 이름, 벨리 스팅스가 맘에 들거든. 뭐, 그래도 이건 밴드원 의견이 중요하니까 투표를 해볼까? 이거 말고 딴 거 하고 싶은 사람?”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벨리 스팅스라니 왠지 배를 쿡쿡 찌르는 것 같은 색다른 기분이 드는 게 좋아.”

소란 누나는 말했다. 당연하죠. 뱃속 가시라는 뜻이잖아요.

“잠깐 잠깐! 내 안도 들어보라고. 이거 어때? 울트라 소닉 하이브리드 인버전.”

“기각!” “기각!” “기, 기각.”

세 사람의 만장일치로.

정말 너무들 하는군.

“좋아. 그럼 이것으로 결정? 그런데 새 멤버 의견도 들어봐야지. 그쪽은 어때?”

새 멤버라니? 유미는 교문 쪽을 보며 말했다. 등나무 쉼터는 교문 진입로에 면하고 있어서 교문을 오가는 사람을 다 볼 수 있다. 교문에는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어서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다름 아닌 단비였다.

“내 다음 안건이 새 멤버 영입에 관한 거야. 이쪽으로 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

유미가 손짓하자 단비가 걸어온다. 이게 무슨 느닷없는 전개란 말인가. 단비는 설마 학교 땡땡이?

“개교기념일이네―요.”

단비는 장난스레 말했다.

“단비가 어떻게……?”

“지난 대회 일로 그쪽 밴드가 산산조각 났으리란 건 뻔하지. 그래서 내가 영입을 제안했어. 당장은 키보드로 쓸 수 있고 원래 베이스를 쳤다니까 나중에 소란 언니가 시간 안 되면 베이스로도 돌릴 수 있고.”

“하지만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긴 한데 단비랑 얘기해본 게 바로 어제라서 말이야.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 있어?”

전력이 보강되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철도 좋다고 했고 소란 누나는 반갑다며 단비의 손을 맞잡았다.

“자네는 어때? 단비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며?”

“그렇고 그런은 무슨!”

단비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악의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겠지. 중학교 때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얼굴이 귀까지 빨개져서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아이였는데. 역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바뀐 것일까?

“잘 부탁해요. 단비라고 해요. 학교가 멀어서 자주 모이지는 못하지만 연습은 열심히 나올게요.”

단비는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우리는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피차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니 간단히 자기 정체까지도 언급해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단비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고 또 이렇게 같이 밴드를 하게 되다니. 올해가 시작될 때에는 모든 것이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의 동료들과, 그리고 단비와도 함께이다. 시작이 좋다. 오늘따라 날씨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다. 봄빛이 저물어가는 시기였지만, 오늘은 내가 알던 최고의 날이다.

 

뭔가, 빼먹은 듯한 기분이다.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자. 그때 우리는 보라색 세계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지? 소란 누나가 주문을 외우고 나는 쉴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 다음 기억은 없다. 무언가를 잊어버렸을 때의 기분이 아니라 그야말로 기억 한 구석이 뚝 끊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다음 생각나는 장면은 바로 하늘도 건물도 행사장도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에서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었다.

조금만 더 집중을 해보자. 어렴풋이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소란 누나로부터 떨어져서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문인 것 같다. 그 공간에서 시전자와 관계없는 기억은 저장되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누구를 쫓고 있던 걸까? 쫓는다고? 그래. 스킨헤드 녀석이다. 그 녀석이 내 기타를 가져갔었지. 하지만 공연을 무사히 마친 것을 보니 기타를 되찾는 데엔 성공했던 것 같군. 어떻게 되찾았더라? 나는 기로에 서 있었다. 기로? 갈림길? 선택?

그랬었다. 자세한 장면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었고 어떤 말을 했는지도.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유미와 내 기타와 그리고 단비. 나는 이 셋 중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었다.

나에게 묻고 싶었다.

그때 난 무엇을 선택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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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존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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