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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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13 Mar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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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Low Flight
低空飛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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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처럼 지하철에 탔다. 역을 향해 한참 걷고 나서, 지하철에 올라타면 늘 5시 반 정도가 되어있다. 가끔 거기에 한 시간 정도가 더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그날그날 있는 일이라거나 일정이 들쭉날쭉한 것에 비해서 그건 꽤 규칙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에는 언제나처럼 사람이 많았다. 언젠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사정이 있다고 하는,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말이 불가해하게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그때까지 내 세계에는 그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능동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몇 없었으니까. 그런 느낌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그런 감상도 거의 증발해버렸다. 기억의 저편에서 그 때의 생각 따위를 끌어올려서, 그렇게 생각했었지 않은가, 라고 말해보는 정도일 뿐. 나는 그 기억에 잠깐 실소를 붙였다. 사람들의 사정이 제각기 다르다고는 하지만, 결국 나하고 비슷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류에 거의 포함되는 것이리라.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을 당연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어쩌면 단순한 매너리즘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많았던 통에 앉을 자리는 잡을 수 없었고, 서 있는 와중에도 사람이 빽빽해 조금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 지하철은 이내 목적지에 닿았다. 이번 역에 내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2번 출구로 나와 길을 따라 걸었다. 밤은 하늘에 애매하게 걸쳐 있었다. 여름이었고, 이 시간에는 늘 비슷한,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지표면을 딛고 올라서있는 건물 위로 하늘엔 옅은 어둠에서부터 짙은 어둠까지가, 그라데이션을 채워 넣은 것처럼 차올라 있었다.
 내 자취방은 역 입구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있었다. 언덕에 가까운 그 길을 올라가다보면, 한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의 모서리들이 휘청이듯 다가왔다가, 다시 지나쳐간다. 그 그림자 같은 건물들은, 밤의 어두움이 내려앉고 나면 마치 도시라는 웅덩이에 회빛 재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 칙칙한 색의 재 때문에 주위 풍경의 채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자취방의 문 앞에 서서 문에 열쇠를 꽂았다.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자그마한 금속제 조각이 자물쇠 안에 들어가서, 사각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잠깐 샤워하고 나와서는 노트북을 켰다. 사실, 정확한 선후관계는, 노트북의 전원을 누르고 나서 샤워하러 들어갔다 나왔다는 것이 맞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내 일과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컴퓨터 없는 일상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부류에 속했다.
 그렇게 앉아있는 동안 어딘가 문이 열리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던 것 같다. 사실 이곳에서 그런 부류의 소음은 드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소리가 유독 가깝게 들렸다. 그대로 잠깐 고개를 돌려보는 것도,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미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키지 않는 것이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옆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처럼.
 창문도 열지 않아 막혀있던 공간에 잠깐 바람이 불었다. 이번 여름에는 열대야가 심했고, 불어온 바람도 그만큼 습하고 온도가 높았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앉아있던 그대로 묶어놓았다. 영화는 그리 좋아하지도, 자주 보지도 않았다. 그런 주제에 지금 이 상황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온 것은 남자 셋이었다.
 내 입에는 집에 없었던, 그래서 아마 그들이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은 수건이 물려졌다. 묶여있는 손목을 비틀어보았지만 역시 그 정도로 풀리게 묶여 있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그걸 풀어냈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대 얻어맞고 멍하니 멈춰서버리는 것처럼, 몸도, 생각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진정해. 일단."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몸짓이나 어조나, 무언가 상당히 조급해하는 느낌이 많이 풍겼다.

 "솔직히 그렇게 편하지는 않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뒤의 둘에 비해서 그는 자잘한 몸짓이 많았다. 한 마디 이야기를 하거나, 잠깐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로 불안정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렇게 조급한 척을 하면서도 뜸을 들이는 이유를, 나로서는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여느 때라면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을 시점이었지만, 수건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먼저 이야기할게. 너한테 무슨 해꼬지를 하겠다거나 할 생각은 없어. 목적에 비해서 조금 강압적인 방법을 쓰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꼭 악의 같은 것이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

 그 문장에는, 다행히 반전 같은 것은 없었다.

 "……물론 묶어놓고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하자면 조금 강제성이 필요해서. 사실 우린 이런 단순한 짓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부득이하게 단순한 방법을 동원해야 할 때가 있지."

 지나치게 말이 많은 남자였다. 그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반응을 기다리는 것인지 잠깐 말을 멈췄다.
 말이야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나는 차마 그를 노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생각으로는 그러는 것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생각 까지는 닿아도 몸이 그러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청이 있는지 확인해."

 남자는 자신의 뒤에 서 있었던 두 명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그러자 한 명은 방 안 이곳저곳을 뒤져보기 시작했고, 다른 한 명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대로 집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의자 뒤에 있었던 노트북을 가리키며 물었다.

 "공유기 쓰고 있나?"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던 물건이라, 별 생각 없이 쓰고 있었다. 남자는 공유기에서 랜 케이블을 뽑아내고 그걸 분해하기 시작했다.

 "고장은 내지 않을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 늘 이런걸 하다보니까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하는 건 이젠 나름 익숙해졌어."

 그는 그걸 분해하면서 뭔가를 한참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의자에 묶여있는 처지다보니 책상에 놓여있는 공유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었다. 대신 나는 그동안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둘 곳이 너무 없었다.
 그가 한참 공유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중에, 바깥에 나갔던 남자와 방안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던 남자가 돌아왔다. 바깥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방 안에 있었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그게 어떤 정도의 의미인가 하는 것은 나도 알 수 있었다. 공유기를 붙들고 있었던 남자가 말했다.

 "음성 도청은 하고 있었던 건가. 인터넷은……그래, 네가 인터넷으로 뭘 하는지 같은 건 별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거겠지."

 그는 집안을 뒤졌던 남자를 향해 물었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나? 여기서 하는 이야기도 들릴 정도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정도로 됐다는 듯, 다시 공유기를 붙들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재조립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공유기를 다시 조립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걸 끝내고, 그는 다시 내 앞에 섰다. 잠깐 말을 고르려는 듯하다가, 그는 고갯짓으로, 아마도 그들이 열고 들어왔을 문을 가리켰다.

 "그런데, 사실 저런 자물쇠는 안 쓰는 게 좋아. 쉽게 열리니까. 그 외에도 안전의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뭐 그렇다고 당장 크게 위험한 것 까지는 아니니까 상관은 없겠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잘 느끼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는 방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몸짓에 비해서 오히려 표정은 드문 남자였다. 말을 할 때, 마치 막 생각났다는 듯 어깨며 얼굴을 움찔할 때를 빼고는.

 "혼자 사는 방 치고는 잘 정리해놨네. 잡다한 것 하나 없고. 난 이런 집을 좋아해. 이것저것 쌓아두면 아무래도 그 물건들 밑으로 그림자가 지기 마련이지. 그런 음침한 구석이 사람 사는 집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말이 아무리 이어진다고 해도,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상황도 그랬고, 그가 늘어놓고 있는 말 자체도 무어라 판단을 세울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시답잖은 말은 그만두고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그러냐, 자기들이 제일 음침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할 처지냐, 그런 생각 하고 있지? 안 그래?"

 별로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뒤에 서 있었던 남자 하나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의 말 한 마디 없던 모습 때문에 그 웃음은 어울리지 않다 못해 부조리하게까지 느껴졌다. 내 앞에 선 남자는 이제 가느다란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비위가 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릿한 느낌이 조금 묻어났다.

 "아니라고 하고 싶으면 고개를 저으면 되잖아."

 나는 여태껏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바로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입에 물려있는 수건에 침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고, 그리고 그 스며든 정도만큼 불안해졌다.
 그렇게 순순히 반응한다는 것도, 사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여운 아가씨네."

 그러고 나서 그는 뜸을 들였다. 무어라 대답하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말에 대해서 예, 아니요 라고 답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잠자코 있었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어디부터 시작해볼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하기에는 복잡하고 이런저런 설명이 많이 필요한 이야기다보니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단 말야. 미리 생각은 해뒀었지만 막상 말로 하자니 만만하지 않네. 일단 줄거리부터 이야기 해주지. 어때?"

 잠깐 멍하니 있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최대한 간단히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네가 필요하고, 그것 때문에 너한테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있다, 뭐, 그런 이야기지. 그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넌 상당히 특이 체질이라서 말야. 그래서 우리……아니, 우리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우리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필요해. 대충 입장이 이해가 가지? 첩보 영화 같은데 자주 나오는 클리셰잖아. 안 그래?"

 그가 말한 줄거리는, 확실히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뜸을 들였지만, 나는 잠자코 기다리는 이상의 무엇을 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이야기 도중에 상대가 괜히 나의 반응을 기다리는 상황을 나는 어려워했다.

 "사실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다 그렇지. 다른 게 아니라 학술적인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과학이라거나 공학이라거나, 뭐 굳이 이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해도 일반인들 입장에서 그런 학문들 속에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잖아? 아니, 사실 연구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가 맡고 있는 딱 그 분야 밖에 모르는 경우가 흔하니까. 자기 연구실 바로 옆 칸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있잖아. 그렇지?"

 그가 말했다. 말이 많은 동시에, 이 부분 저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하는, 듣고 있기 괴로운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첩보 영화 같은 건 그냥 재미로만 봐."

 사실 영화는 재미로도 잘 보지 않는다.
 어쨌건 그는 자신이 늘어놓고 있는 이야기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마치 내게도 그런 반응을 바라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어쨌거나 개략적으로는 그런 사정이야. 체질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무슨 생체 실험 같은 것은 아니야.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몸 어디가 망가지는 연구는 아닌 것 같더군."

 남자는 말을 도중에 끊고 냉장고 앞에 섰다. 그러고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물었다.

 "물 마셔도 될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냉장고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 컵에 따라 조금 마시고는, 절반쯤 찬 그 물 컵을 들고 내 앞으로 돌아왔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고 실없는 상상을 했다가 떠오르는 결과가 내키지 않아서 생각에서 밀어냈다.

 "자네들도 좀 마실 텐가?"

 그는 뒤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한 명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한 명은 끄덕였다. 아마도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나름 재미있는 모습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인 그 남자는, 물 컵을 받아들고 그대로 쭉 들이켰다.
 남자는 물병에서 물을 더 따르고는 한 모금 더 삼켰다.

 "뭐, 사실 더한 짓도 하는 친구들이니까 이정도면 상당히 신사적인 게 아닌가 싶은데. 여하튼 프로젝트 자체는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지. 국가 주도 하에 움직이는. 나도 말단이라 연구의 세부나 그걸로 무얼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 알아도 이해할 자신도 없지만."

 그는, 정리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이 이상을 상상하지 않는 쪽이 나한테는 편해. 내 생각에는 아마 너한테도 그쪽이 편할 것 같은데."

 그러고 나서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자가……혹시 하나 더 없나?"

 나는 고갯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는 거기에서 의자를 끌고 와서 거기 앉았다.

 "역시 그건 좀 불편한 구도였어. 이쪽이 훨씬 낫군. 꼭 무슨 안내 방송이라도 하는 것 같았으니까. 잠깐……네가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던가?"

 남자는 말을 잠깐 멈췄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머지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안내 방송에 불과하다는 것은 의자를 끌어오는 정도로는 바뀌지 않았다.

 "연구의 세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사람의 의식 구조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라더군. 조금 응용이라고 할까, 공학적인 거라고 해.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냥 심리학 연구라고 하면 되겠네. 그러니까 우리는 심리학 실험 참가자를, 조금 거친 방법으로 모으려고 하고 있는 거지. 제대로 듣고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단순히 그 뿐이라면 조금 더 평화적인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쪽에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남자가 말했다.

 "어쨌건 그래서 위쪽에서 널 필요로 한다는 거지. 그리고 그러자면 앞으로 별 일 생기지 않게 신변을 보호해야 하는 거고.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그거야."

 그는 자신의 뒤편에,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남자들을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이 친구들도 잠깐 어디 앉혀놓아도 되겠나? 계속 세워놓자니 아무래도 미안해서……침대에 잠깐 앉아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나는 이번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조로 말을 걸어오고 있지만, 실은 명령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 앉아도 되느냐는 말 하나에 붙이기에는 과다한 해석이지만, 어쨌건 전체적인 어조가 그런 식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사정이라는 건, 우리뿐만 아니라 이권을 위해서 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집단이 있다는 거야. 그쪽에서도 우리가 이렇게 나선 것처럼 나설 거라는 거지. 아마 우리 이상으로 강압적으로 나올 거야."

 그가 말했다.

 "상황 설명은 거의 다 된 거 같네. 그러면 질의응답 시간을 가져볼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소리 지른다거나 하지는 말고."

 남자는 말해놓고서도 미덥지 않았는지 주머니에서 칼 하나를 꺼내들고 내 목에 갖다 대었다. 칼날이 살갗을 살짝 누르고 있다. 그 사이로 숨이라도 한 번 지나가면 그대로 베일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그다지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우리는 하자면 더 한 짓도 할 수 있고, 실제로 해왔다는 정도만 알아주면 좋겠어. 그러면, 조용히 있어주면 좋겠군."

 내가 답 없이 시간을 잠깐 흘려보내자 그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 몸짓으로, 남자는 자기는 성격이 급하고, 지금은 더더욱 기다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 되는 거야."

 남자는 물음이라는 껍데기조차 뒤집어쓰지 않은 채로 명령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칼을 집어넣고 내 고개 뒤로 손을 넣어 수건의 매듭을 끌러냈다. 한참동안 입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사라지자 또 다른 느낌의 이물감이 들었다. 숨을 몇 번 몰아쉬어본다. 그는 슬쩍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삼십 분 정도 지났군. 괜찮아. 한 시간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런저런 말이 많기는 했는데 이정도면 금방 끝난 거겠지. 그래, 뭔가 궁금한 게 있나?"

 자기들 마음대로 시간이 적당한지 어떤지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그런 감정들은 마치 절제되어 떨어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나 잠깐 생각해보았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부분들 투성이었으니까.
 내가 물었다.

 "당신들 말을 어떻게 믿지?"
 "아, 역시 그런 문제인가?"

 그는 그래, 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말했다.

 "네가 믿느냐, 어떠냐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우리가 굳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했던 건 아무래도 잘 타일러서 끌어들이면 네 입장에서도,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던 것뿐이지.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끌고 가면 되니까. 우리는 네 조력이 아니라 너 자신이 필요한거라서."
 "그래서 자물쇠까지 뜯어낸 건가?"

 굳이 그것이 정말로 기분 나쁘게 느껴져서 그랬다기보다는, 그저 갑자기 떠올라 나온 문장을 던진 것뿐이었다. 기분이 나쁘다, 어떻다 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잘 잡히지 않는 느낌들이었다.

 "음……확실히 입을 열어놓으니까 반응이 확 달라지네. 환대 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부드러운 반응을 바랐는데 말야. 지금까지는 표정이나 반응 같은 게 고분고분해 보이길래, 오랜만에 조금 부드러운 여자가 걸렸나, 싶었는데. 어쨌건, 솔직히 저런 자물쇠 달아놓고 못 들어오기를 바라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거나 널 지금까지 묶어놓았다거나, 물론 지금도 묶여있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내가 이 이상 뭘 하길 바라?"

 나는 어쩐지 아무렇게나 말을 쏘아붙이고 있었다.

 "아, 그거 좋은 질문인데.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손가락 몇 개나 팔다리 한두 개 정도는 없어도 연구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입만이 조금 자유로워져 있을 뿐이고, 내가 묶여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 어떨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런 가능성에 굳이 내 몸 몇 곳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지.

 "물론 당장 그럴 생각은 없지만, 어쩌면 그게 필요하게 될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증명서 같은 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어. 예를 들면, 뭐 이런 거."

 그는 옷 속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석연치 않기는 했지만 남자의 사진과 정보원의 요원이니 하는 단어가 나란히 들어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얼마간 그 카드를 내게 보여주다가, 도로 집어넣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의심하자면 이것도 썩 좋은 증명은 아니니까. 위조한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 물론 이건 위조가 아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충분한 증명이기도 해. 내가 이런 말 해봤자 안 믿을 거라는 게 문제지만."
 "그러면, 그 다른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어?"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그 친구들에 대해서도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기는 한데. 연구 자체가 마음먹고 줍기만 해도 될 것 같은 연구라서, 그걸 노리고 있는 집단이다, 그 뿐이야. 요즘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같더군. 아, 큰 상관은 없는 부분이지만 그 친구들은 스스로 코뮌이라고 불러. 재미있는 작명 아냐? 코뮌이라……."

 남자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 친구들도 이 프로젝트를 탐내는 모양이더군.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던데, 아직 뭐라고 확신이 가는 단계는 아니고."
 "그런 걸 가만히 두는 이유는?"
 "그걸 하는 자체를 우리가 막을 수는 없는 거니까. 예전에는 정부 기관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서면 그런 것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한계가 있어. 거기다 실제로 어떤 마찰 같은걸 일으켜서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걸 표면으로 끌어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끌어올려서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을 것 없는 프로젝트지. 괜한 음모론 같은 것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국가가 나서 비밀리에 이런 것을 하고 있는 게 알려지면 나라가 뒤집히고도 남지 않겠나?"
 "그런데……연구 참가 정도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나? 그냥 해달라고 하는 정도만 해도 충분할 텐데."

 내가 물었다. 사실, 멀리 갈 필요 없이 그러지 않았다는 자체가, 어떤 말 못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근과 채찍, 아니, 채찍과 당근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군.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좋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그래서 확실한 방법을 찾다보니까,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군."
 "내가 외부에 이런 일을 알린다면? 당신 입장에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과대평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아니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소리내어 웃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조소였다.
 그런 모습을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아, 나는 일단 화제를 넘겼다.

 "그러면, 나는 뭘 해야 되는 거지?"
 "제일 중요한 질문이 나왔군. 뭘 해야 하는가……."

 남자는 잠깐 서성이다가 말했다.

 "당장 네가 특별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 그냥 평소처럼 살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물론 조금 조심하며 다닐 필요는 있겠지."
 "자물쇠를 고쳐단다거나?"
 "망가뜨린 건 아니니까 고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그가 말했다.

 "어쨌거나 근시일 내로 우리가 다시 찾아올 거야. 그때 순순히 동행해줬으면 좋겠군.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은 우리가 대신 처리하지. 그렇다고 무슨 실종 처리를 해버린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눈치 챘겠지만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거야. 미안한 이야기지만."

 물론 그들은 내가 순순히 말을 듣게 하기 위해 이런 자질구레한 짓을 하고, 어떻게 보면 쓸데없을 뿐인 이런 이야기를 길게 잇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생각을 모두 정리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건 이 이후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게는 순순히, 라는 표현이 유난히 내키지 않았다. 순순히 무엇을 한다는 것은 보통 좋은 의미가 아니니까. 어쩌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속내를 내보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내가 순순히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강제로라도 끌어들일 작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나섰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아직까지 의자에 묶어놓고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인간들한테서 말이다.

 "그 코뮌이라는 자들은 가만히 있을까?"

 나는 일부러, 그들의 존재를 가정하고는 물어보았다.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건, 그래서 선전포고 같은 것이지. 우리들이 이미 나섰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리는 거야. 그러면 그들도 간단히 뭘 하겠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남자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해놓고는 잠깐 뜸을 들였다. 시선 가운데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너는 회사하고 코뮌 사이에서 처신에만 조금 신경 쓰면 거의 안전하다고 봐도 될 거야. 냉정하게 말하면 실험 재료로서 너는 가치가 있고, 그래서 최소한 프로젝트가 마칠 때까지는 온전해야 하니까. 회사 입장에서나 코뮌 입장에서나. 그러니까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사실상 세 가지야. 회사 쪽이냐, 코뮌 쪽이냐, 도망치느냐, 정도겠지.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그리 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건 지금쯤이면 눈치를 챘겠지. 당장 우리가 여기 와서 한 짓을 봐도. 이해하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자유로웠지만, 그 정도 질문에는 고개를 까닥이는 것이 편했다.

 "생각해보면 이정도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이야기하다보면 괜히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 어쨌거나, 회사냐 코뮌이냐 하는 문제인데.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 쪽에 합류시키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넋 놓고 있다가 놓쳐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단정이었다. 그 밖에는 다른 수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런 말 때문에 생각에 제한이 걸리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네가 선택한다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드는군."
 "그런데, 그런 일이라면 나한테 이렇게까지 설명하고 있을 필요가 있나? 말 그대로, 그냥 잡아가버리면 되는 일 아냐?"
 "그러기를 바라?"

 물론 그건 아니다.

 "코뮌이 있는 이상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냐. 사람 몇 명 움직인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이지. 그럴 거면 차라리 대대적으로 나서는 게 좋다고 판단했어. 오늘 굳이 너한테 이렇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선언 정도가 되는 것이지. 그리고 여러 가지로, 또 연구를 위해서도, 이정도 시간이나 친절 정도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었고."
 "친절하기도 하셔라."

 나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지?"

 남자는 실없는 웃음을 띄웠다.

 "당장 우리가 이렇게 나선 이상, 그들도 널 가지고 직접적으로 뭘 하지는 못할 거야. 우리가 이렇게 나서는 건, 너를 확보하는데도 필요하지만, 그들의 행동반경을 그렇게 줄인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어. 그러는 동안 너는 알아서 잘 있으면 될 테고. 대충 이해가 됐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빨리 집에서 밀어내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견디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러자면, 이야기를 질질 늘일 것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서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도 있었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말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내가 그의 말에 맞추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가 말하는 것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들을 집에서 밀어낸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생각에서 밀어낸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떠들어댈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냥 실험에 참가 해 달라, 그것뿐이야. 더 질문이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있나?"

 갑자기, 상황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질문이 날아왔다.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애초에 집 안에 있는 물건이 몇 없다보니 특별히 거기서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을 가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가치의 무게 같은 것이 서로 비슷했다고 할까.

 "노트북 정도?"
 "더 없나?"
 "아무래도……."

 확실히 특별히 라는 말을 붙일만한 물건은 노트북 정도 밖에 없었다. 방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특별히 값나가는 물건이라면 노트북을 빼고는 특별히 없었으니까.

 "여자들한테는 가방이라거나,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아?"
 "별로……나한테는 아냐."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 뭐, 그런 것들의 숫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거니까."

 내가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묻지?"
 "도망친다거나, 어딘가로 피한다거나 할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소한 것들부터 제대로 정리해둬야 하는 법이지. 지금 너한테는 그게 필요할 것 같았어. 도망치든, 어디로 따라가든, 준비하자면 필요하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는 이만 돌아가지. 다음에 또 볼까……가 아니라, 다음에 또 보게 되겠지. 그러면 그때까지 별 탈 없이 잘 있어주면 좋겠군."
 "그런데, 이거 풀어주고 가야 되는 거 아닌가?"

 한참 묶여 있었다보니 스스로도 자신이 묶여있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팔을 움직여보이자, 그들은 기꺼이 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문득,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묶어둔 채로 가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들이 나가자마자, 집에 없어진 것이나 혹은 그들이 뒤지는 동안 부서진 것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내가 모르는 방법으로 무엇을 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어쨌건 내 눈에 띄는 흔적은 없었다.
 그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 문제에 대해선, 사실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은 건 날 유인해내기 위함일 터다. 그렇지만 그럴 것이었다면 굳이 그런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들고 와서 내게 시시콜콜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보다 간단하고,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차라리 더 쉬웠을 테니까.
 혹시나 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을 생각해보려고 해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 말들 위에 그럴 리 없잖아, 라고 스스로 레이블을 붙여버린 것처럼.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분명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연구에 내가 관련이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말 같지 않았다. 거기다 그 연구를 둘러싸고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경쟁하는 집단이 있다는 지점에서는 거의 픽션을 헤매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사실 이 모두가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생각들이 아닐까. 영화 시나리오 같은 이야기에, 괜히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따지고 들춰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런 쓸데없는 놀이는 그만두고 이렇게 누가 집에 멋대로 들어왔을 때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부터 생각하는 게 맞다. 그렇게 문제를 전환하고 나면 결론은 간단했다.
 경찰에게는, 근시일내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이야기를 문제 삼아 어떻게 보호 요청을 한다든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으로도 불충분할 수도 있고, 혹은 아주 무시당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그 둘 모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경찰은 어쨌건 바로 이쪽으로 오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남자들이 있었던 흔적 같은 것들이 내키지 않았지만, 수사 같은 것에 필요할지도 모르니 닦아내지는 않고 침대에 누웠다.
 멍한 느낌이 들었다. 일어난 일 자체가 현실감 없기도 했고, 한참 들었던 말들이 또 더 현실감 없는 이야기여서 그랬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정리가 안 되서 종잡을 수 없게 된다거나, 그러도록 유도하는 과정들이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에 의도가 있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무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계획 정도는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끔 현실에 서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현실감이 흐릿해질 때가 있다. 지금, 이 네모난 공간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 꼭 그랬다. 마치 중력이 약한 공간 위에 서서 걸어 다니는 것처럼, 구체적인 느낌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 현실감이라는 것은 생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극히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이마에 팔을 얹었다. 손목에는 묶여있었던 자국이 붉게 남아있다. 너무 오래 묶여있었던 건지 움직이는 게 약간 불편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사소한 것이었다. 그보다는, 피곤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잠깐 자고 싶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전등은, 얼마 전에 갈아 끼웠던 덕인지 확실히 밝았다. 밝은 그 하얀색 빛이 명멸하고 있다.
 잠깐 눈을 감고 있었을 동안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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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은 떨어졌네요.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아까운건 사실...
최대한 고쳐보기는 했습니다. 분량에 눌려서 그런지, 이 이상 고치는건, 아주 다시 쓰지 않는 이상 힘들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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