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 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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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13 Mar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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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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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흔적을 많이 남겨놓지 않았다. 내 입에 물려놓았던 수건이나 발자국 몇 개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침입의 흔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여부 확인 같은 부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문제는 침입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한 내 진술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그들에게도 사건 경위는 이상했던 모양이다. 도리어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일단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디 정부 기관 요원이라는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아가씨를 묶어놓고는, 한참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근시일내로 다시 오겠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거죠? 그 다시 오겠다는 말의 의미는 아가씨를 어딘가로 납치하겠다는 뜻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하고 나면 줄거리는 그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이상한데요."
 "네?"

 순간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깐 갸웃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뇨, 아뇨. 아가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상한 일이잖아요?"
 "아……그건 그렇죠."

 아마 다른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비슷하게 반응할 거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무슨 요원 같은 것일 리는 없고. 영화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여기 문까지 열고 와서는 특별한 신체적 위해 같은 것 없이 위협만 하고 갔다라……무슨 목적인지 저로서도 감이 안 잡히거든요. 정신이 좀 이상한 친구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네……저도."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잠깐 짓고 있다가, 마무리하듯 말했다.

 "그러면 일단 진술서를 작성하시고, 신변보호 요청을 하셔야겠네요."

 한 시간 넘게 그들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줄곧 잡다한 말을 했던 것뿐이라서 진술서는 그다지 길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한 말의 내용이라고 쓴 것도 들었던 말 중 일부뿐이었다. 쓰자면 한참 늘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상술한다는 것이 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들의 인상착의 같은 것도 몇 줄 정도 밖에 쓸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데 약한데다, 줄곧 뒤에 서 있었던 두 남자에게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절차들이 끝나고 나니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평소보다 피곤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청했다.


 근시일 내라는 말이 의미하듯, 내일부터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날에도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나갔고, 여전히 비슷한 시각에 돌아왔다. 그러는 내내 확실히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기는 했지만 지치기만 했을 뿐, 그 날카로워진 감각에 특별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혹시 정말로 미행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길을 가다 이따금씩 주위를 돌아본다거나 하기도 했지만, 물론 내 눈에 띌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확연히 눈에 띄기에 대학가라는 공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알아챌만한 짓을 할 리도 없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애초에 그들이 나를 미행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거의 없다. 어딘가로 도망간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그다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근시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주일일 수도 있었고, 한 달 일수도 있었다. 나는 사흘 정도를 생각했지만, 거기에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영 별 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 별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야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고 흐지부지되어버리면 그것도 마음에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든 마무리가 지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할까.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거기다 내가 그것에 대해서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저 손 놓고 진행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실 무슨 진전이 있을 지 없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가, 지금 너무 예민해져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지나가는, 그리고 지나갈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인 것은 아닐까. 특별히 해결되지 않아도, 별 일 없이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이번 일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리게 될 텐데.


 어제와 비슷하게 집에 돌아와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어제 바로 그 의자에 묶여있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나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억눌렀다. 계속 그런 식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기 이전에 나 스스로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인터넷에는, 물론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 따위는 없었다.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에 그것이 특별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마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정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일을 당하고 났으니 하루 정도는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둘러대 봤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중에, 문득 휴대 전화에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나는 이전부터도 문자 메시지라거나, 전화라거나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게 오는 것들이 대부분 나에게 반가울만한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뭘 하라느니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무슨 일이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메시지가 떠오른 액정을 흘끔 바라보았다. 메시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단어 하나에 불과했다.

 - 경찰?

 섬뜩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돌아간 이후에도 이 주위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이쪽으로 찾아온 경찰들과 마주쳤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그냥 짐작으로 그랬으리라고 추측하고 메시지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경찰이라도 부르는 쪽이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말이다.
 몇 가지 추측을 해보는 동안에,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 물론 그게 잘못된 건 아냐. 특별히 우리를 자극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네가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현명한 축에 속하는 것이기도 해. 실질적인 의미는 없더라도.

 그 메시지를 받고 나서 몇 분 동안 기다려보았지만 더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일단 그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이름을 뭐라고 붙여놓아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회사라고 등록했다. 그러면서도 우습지도 않은 작명이라고 생각했다.
 의미가 없다, 라는 말을 곱씹어보았다. 아마도 그 말은, 경찰이 제대로 수사한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나, 아니면 그들의 수사가 자신들을 방해할 수 없으리라는 의미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라거나. 물론 그 둘 다 나한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내게도 경찰이 이런 일을 가지고 제대로 수사를 할 지, 그들이 내게 도움이 될 지가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신고한다거나 하는 것은 처음부터 일단 해놓기는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했던 것일 뿐, 그것이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잠깐 어딘가로 가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인하라면 일주일 정도 있는 것은 허락해주지 않을까, 미안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아직 의심스러웠다.

 - 저기, 며칠 동안만 네 자취방에 있어도 될까?

 확신하지는 못하는 채, 일단 그녀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내보고는 잠깐 기다렸다. 답장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 비슷해.
 - 어쨌건, 언제든 환영이다.

 나는 대충 가져가야 할 물건들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아마 그 남자의 우습지도 않은 친절은 이런 경우를 준비하라고 그랬던 것이지 않았을까.

 - 어딘지 좀 알려줄 수 있어?

 그녀가 자취를 하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 자취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놀러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녀도, 나도, 그런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는 서툴렀다.
 그녀는 간단하게 주소를 보내고는, 생각났다는 듯 뒤이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언제 올 건데?
 - 내일 6시 정도?

 답장을 받고나서 나는 필요할만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냥 잠깐 놀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이유를 따져 물어오면 뭐라고 해야 할지, 그것도 생각해둬야 했다. 하려고만 한다면 적당히 있을법한 사정으로 둘러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뒤편으로는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에서는 거의 이번 일과 관련된 생각만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여름방학 중이니까 며칠 정도는 딴 생각을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 떠올랐다. 어찌저찌 학교에서의 시간을 견디다가 할 일들이 끝나고 나자 나는 터덜터덜 대학가를 가로질러 지하철역에 닿았다. 대학가나, 지하철이나, 온통 사람들 투성이다.
 지하철에 타려는데,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인하의 것이었다.

 - 지금 오는 거 맞지?

 그렇다고 짧은 답장을 보내고 나서, 나는 내가 선 반대편 지하철로의 벽면을 바라다보았다. 지하철은 여느 때와 비슷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구석에 기대어 서 있자니 조금 졸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 하나를 지났을 때 메시지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갑자기 또 뭐지, 하는 기분으로 나는 주머니에서 전화를 끄집어냈다.

 - 친구?

 발신인은 회사로 되어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역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다시 추측에 매달렸다. 넘겨짚기이기는 힘들 테고, 나와 인하 사이에 오갔던 메시지를 읽었다는 것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짓궂은 취미다.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메시지 같은 것은 애써 무시하고, 인하가 기다리기로 했던 역에 내렸다. 그녀는 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찾아내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보는 입장에선 민망할 정도로 손을 높게 들고 휘저었다. 그쪽으로 가자마자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웬일이냐. 네가."
 "내 일은 아니고 집일인데."

 인하는 장난스레 웃었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그나저나 오랜만에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
 "반가울 것까지 있어?"

 그렇지만, 어쨌건 여름방학 동안 거의 보지 못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목소리부터 시작해서 그녀는 확실히 들뜬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에는 딱히 그런 성격도 아니지만, 그녀는 가끔 그렇게 둥둥 떠 있을 때가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어쨌건 싫어하지는 않는 분위기라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야?"
 "뭐, 이런저런 일들이……."

 순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버리고 싶다, 그런 충동이 치민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이고, 차라리 모두 말해버리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럴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구체적인 것을 묻는 물음에 얼버무리는 것으로 답했지만, 인하는 특별히 더 따져오지 않았다. 그저 그래, 라고 하는 한마디를 거치고 그 화제는 우리 사이를 지나쳐 가버렸다.
 그녀가 말했다.

 "어쩐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아하하,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미안할 게 뭐 있어."

 짐짓 표정을 가라앉히고는, 그녀가 말했다.

 “넌 그런 쪽 아냐? 일이 동시에 하나 이상 닥치면 당황해서 정신없는. 지금 좀 그런 거 같은데.”

 어디서 나온 짐작이었는지는 몰라도,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그녀의 말은 내 의표를 찔렀다.
 내가 갑작스럽게 이런 부탁을 했던, 진정한 이유를 안다면 분명 꺼림칙해할 것이다. 아니,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입 속에서 여러 가지 문장을 떠올리고, 삼키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말 하나를 골라 끄집어냈다.

 "저기,"
 "응?"

 앞서가던 인하는 뒤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다른 일이 있었어. 그저께 누가 집에 들어와서 다시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느니, 그러고는 돌아갔어. 그때는 별 일 없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불안해서……거기다가 꼭 감시당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잠깐 다른 곳에 있을까 싶어서 부탁했던 건데……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무슨 스토커 같은 거야?"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그러고 나가버린 거니까, 대체 뭔지 잘 모르겠어."

 나는 어렵사리 웃었다.

 "나는 또 뭐 별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고는 했어?"
 "일단 신고는 했는데……."
 "미덥지는 않다, 이거지?"

 나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는 마."

 인하는 장난스레 웃으며 다시 앞서 걸어갔다. 내가 자취방으로 올라가는 길과, 지금 이 거리의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건물의 복잡한 표면을 따라가다가, 거리가 비틀리는 대로 방향을 꺾어 걸어간다. 그녀는, 문득 내가 들고 있었던 가방 하나를 대신 들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더 이야기해줄 수 있어?"

 그녀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걸터앉고는 말했다.

 "글쎄, 정말로 특별한 일은 없었어. 묶어놓고 한참 이런저런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더라고. 내가 무슨 연구에 꼭 필요한데, 그것 때문에 신변에 위협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한다면 특별히 해치지는 않겠다, 그런 이야기였어. 갑자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말 모르겠는데, 이유를 모르니까 아무래도 더 불안하더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할 지 예상이 안 되니까."

 나는 한쪽 벽에 몸을 기댔다.

 "그건 그렇지. 한 명이었어?"
 "세 명. 그냥 한 명이 왔으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다 라고 하고 말 텐데. 세 명이나 되니까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하여간, 나도 잘 정리가 안 되네. 일단 집에 있기는 불안하고, 나와 있으면 그래도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지만 얼마나 더 나은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알기 어려웠다.

 "그렇겠지. 당장 여기 있다는 건 아마도 모를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내게 왔던 메시지를 기억해내고는 불안해졌다. 인하가 말을 이었다.

 "하필 왜 너였는지, 그리고 굳이 집까지 찾아온 이유가 뭔지가 좀 궁금하기는 한데."
 "그날 이후로 메시지가 왔어. 신고하고 나니까 경찰에 신고했지, 그렇게 문자가 왔고, 방금 전에도 친구한테 가는 건가, 하는 식으로 문자가 왔었어."
 "그냥 있을법한 일들을 말한 거 아냐?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꼭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첫 번째 메시지까지는 확실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 메시지를 받고 나서부터는 그런 식의 추측도 의심스러워졌다. 지금은, 특별한 판단은 서지 않았지만 불길한 느낌은 잔뜩 드는, 그런 상태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역시 꺼림칙해. 그런데 그쪽에서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뭐, 상관없어."

 이상하리만큼 태연하게 그 말을 받고 나서, 인하는 짐짓 화제를 틀었다.

 "다른 건 하나 없어도 노트북은 챙겨가지고 왔네."
 "제일 비싼 물건이잖아. 없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주로 뭐 하고 있어? 너 메신저에도 잘 안 들어오잖아.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메신저를 자주 썼었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러는 것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인터넷으로도 떠들지 않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게 없어지고 난 뒤로는 사실 컴퓨터로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별 거 안 해. 그냥 컴퓨터로 뭘 한다는 자체가 좋은 거 같다."
 "그럴 거면 컴퓨터 공학 같은걸 하지 그랬어."

 그런 생각은 나도 해본 적이 있었다.


 여기 올 때 까지는 그냥 바닥에서 자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런저런 잡담 같은 것을 한참 잇던 중에 그녀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1인용이기는 한데, 두 명이 누워도 그럭저럭 잘 수는 있을 거야. 잠버릇 심한 건 아니지?"

 확실히 1인용이기는 해도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물론 자신은 없다.

 "그러면 됐어."

 그렇지만 실제로 잠버릇이 심한 건 그녀였다. 나중에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는 잠결에 기여코 팔다리를 내 몸 위에 올려놓으려고 들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걸 되돌려놓으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잠을 청했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아니면 누군가가 다리를 올려놓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선잠을 잤다. 그 외에는 별로 다를 것 없이 학교에 향했다. 이번에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초조했던 것도, 그러는 동안 가라앉아 학교에 있는 동안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인하의 방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지하철역을 향하는 것도 보통보다 30분 정도 늦어졌다. 내가 늘 돌아가는 시간에 비해 하늘이 확실히 어두웠다.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어렸을 때부터 길을 찾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런 도시로 나오고 나니 가끔 그 기억력으로도 충분치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길 자체가 복잡하지 않다보니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자취방은 2층에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집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싶었다. 돌아서 아래로 걸어 내려가려고 하자 바로 앞 나타난 남자가 길을 가로막았다. 모르는 척 억지로 그를 피해 내려가려고 했을 때, 그의 손이 뒤에서 나의 팔을 붙잡았다.


 집 뒤편의 공터로 끌려 나갔다. 인적이 없는데다 구석에 몰린 채로 두 명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누가 지나간다고 해도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누군가가 눈치를 챈다고 해도 나를 도와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팔을 붙잡았던 한 명의 남자가 막무가내로 입을 막았다가, 나를 벽에 몰아붙이고는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살갗에 그 금속질의 단면이 닿는 느낌이 그저께의 기억에 맞물려 떠올랐다. 당장에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살갗이 눌리는 그 생생한 느낌 앞에서 그런 생각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 감각에 일순간 정신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상태로 몇 초 정도가 흘렀으리라. 고작해야 그 정도겠지만, 내게는 마치 수십 초 정도가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렇게 물어볼 겨를이 있었다는 게 나로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회사……인가?"
 "알고 있었어?"

 뒤쪽에 서 있었던 여자가 물었다. 그렇게 묻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러고 보니까 모를 리가 없지."

 여자가 말했다.

 "회사에서 나와서 아주 대대적으로 난리를 치고 갔던 거 같던데. 맞지?"

 대대적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건 나는 긍정했다. 그 말은, 실은 남자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자는 잠깐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는 말했다.

 "대충 이야기는 전부 들은 거 같던데. 그러면 특별히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그럴 생각도 없긴 했지만. 그런데, 회사가 어째 잠잠한 거 같은데. 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

 물론 그런걸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바로 전까지 회사라거나, 코뮌이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 여자도 나에게서 무슨 답을 바랐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일이 예상처럼 전개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자평을 붙인 것일 뿐이리라.

 "아무래도 이상한데……뭐, 그쪽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면 이쪽에서도 나쁠 것 없지. 그러면 이대로 데려갈까? 어차피 회사 쪽에서 방해하지 않을 거라면 특별히 더 지체할 이유도 없잖아?"

 여자는 남자에게 묻고 있었다. 남자는 한동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니 코뮌이니, 사실 정말로 있는 것인지 어떤지도 모르겠지만,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건 간에 당장 나에게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어떻게 기회를 잘 잡으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내가 그럴 수 있으리라는 자신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도망친다는 답이 쓸 만한 것이 못 될 것이라는 남자의 말은 이런 식으로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됐으면……."

 남자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발이라도 밟고 바로 돌아서 뛴다면, 어쩌면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 하나가 길 반대편에 세워져 있었고, 그들은 나를 그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내게는 그 시간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고, 걸음걸음이 질질 끌리는 것 같이만 보였다. 심박이 뛰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런 일도, 그리고 긴장하는 것도, 또한 그런 느낌도 모두 처음 겪는 것들이다.
 순간 그 길목 사이로 갑작스럽게 차 한 대가 들이닥쳤다. 나를 잡고 있었던 남자와 여자는 반사적으로 그걸 피해 몸을 뒤로 빼쳤다. 남자의 자세가 잠깐 불안정해졌을 동안, 나는 그의 배를 발로 밀어 찼다. 남자는 크게 기우뚱하다가 쓰러졌고, 나는 돌아서 무작정 인하의 자취방으로 뛰어올라가려고 했다.

 "빨리 타!"

 설마 싶었지만, 분명한 인하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면 거기에는 넘어진 두 사람을 걷어차고는 스프레이를 뿌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있다. 나는 곧장 방향을 돌려 차의 조수석을 잡아탔다. 그러자마자 그녀도 차에 올라타고는 스프레이를 몇 번 흔들어보더니 뒷자리로 집어던졌다. 인하는 서둘러 시동을 걸고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나는 뭐라고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멍하니 대시보드만 바라다보았다. 그냥 운이 좋았네,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걸까. 뒤쪽을 돌아다보았다. 특별히 그 차가 따라온다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따라오는 거 아냐?"

 내가 물었다.

 "스프레이 때문에 금방은 운전을 못 할 거야. 이쪽은 길이 복잡하니까 아마도 괜찮겠지."

 인하는 흘끔 사이드 미러에 시선을 주었다. 긴장해서 거칠어졌던 호흡은 이내 가라앉았다. 일단 지금은 어떻게 넘긴 것 같지만, 이후에 이런 일이 있었을 때 이번처럼 넘어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런 일들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도대체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말한 위협이라는 게 현실적으로 닥쳤다는 정도만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고마워."

 정신이 없다보니 떠오르는 감상이 그 정도 밖에 없었다.

 "글쎄……이런걸 가지고 고맙다고 하니까 뭔가 이상한데."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운이 좋았네."

 나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려 보았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가지고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좋지 않았어도 특별히 나쁠 것은 없는 상황에나 걸맞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는 했지. 마침 내가 딱 그때 왔으니까 그렇지, 조금이라도 늦거나 일찍 도착했으면……."
 "그러게. 지금은……."
 "지금은?"
 "이번에야 네가 왔으니까 어떻게 됐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싶어서."
 "꼭 다른 사람 일처럼 말하네?"

 나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삼켰다. 자기가 엮여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이, 그것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일어나서인지 내 일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듯한 느낌으로 물끄러미 일들을 바라보며, 따져보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이 마음에 박혀 느낌을 그렇게 비틀어놓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차는 그 거리에서 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더 달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 집에 잠깐 가 있을까 싶은데. 어때?"
 "나야 상관없는데……."

 그러고 보면 나만 어디 갈 곳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울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은 이것저것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어딘가의 사무실이었다. 한참 시내를 돌다보니 시간은 이미 8시에 가까워졌고, 그만큼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사무실은 건물의 3층에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열쇠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아스러웠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 인하는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내부는 어떻게 봐도 평범한 사무실에 가까웠다. 그냥 처음부터 사무실이었을 뿐이고, 사무실과 집이라는 말을 별 구분 없이 쓴 것일 수도 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집으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누군가가 여기서 자는 일이 있었는지 간단한 모양의 침대가 한쪽 구석에 몇 개 있었다. 사무실답게 책상과 칸막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그걸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상 위에는 이런저런 글이 프린트 되어있는 종이가 몇 장 흐트러져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는지 여기저기가 아무렇게나 잘려있는 것이 많았다.

 "여기는 대체 뭐야?"
 "말 그대로 집이야. 사무실이긴 한데……그 사람이 거의 집으로 썼어."
 "그 사람이라면?"

 그녀는 특별히 답해주지 않았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이런 곳을 자기 거처로 쓰는 사람과 그녀를 엮을만한 관계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다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여간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여기 잠깐 있어도 될 거야. 하루나 이틀 정도 있다가 돌아가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너는?"
 "나도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는 좀 그런데. 같이 있지 뭐."
 "……미안해."

 내가 왜 괜한 짓을 했을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러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녀를 일에 끌어들인 것이 되어버렸다. 기껏해야 내 문제 정도에서 끝나리라는 식으로, 나는 상황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미안해 하냐."

 인하가 말했다.

 "미안해 할 거 없어. 거기다 난 예전에 여기서 지내기도 했으니까……별로 상관없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는 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무실에 한 대 있었던 컴퓨터를 켰다. 뭘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가만히 모니터만 바라보며 얼굴에 초조해하는 듯한 빛을 띄웠다. 그렇지만 사실 초조해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하릴 없이 사무실을 서성거리다가 블라인드를 들춰보았다. 얇은 금속 사이로 어두움이 들어차 있다. 바깥에는 가로등 몇 개가 있었지만, 조도가 부족해서인지 전등이 올라와있는 주위의 허공을 허무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나,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기는 했지만 부자연스럽지 않은, 현실적인 반응이 무엇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일에 처하면 다른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런 걸 안다면야 거기 기대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조금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하는 한참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나도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이 늘 최선대로 따라갈 수는 없지 않아? 지금 너 같이 정신 없는 상태면 더 그럴 수 밖에 없지."


 스스로의 말처럼 이곳이 익숙하기 때문인 것인지, 인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는 표정이 어쩐지, 지금 참 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집에서처럼 지금도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깨고 나니 잠이라는 수단으로 지금까지 의무적으로 시간을 지나보낸 것 같다는 느낌만 잔뜩 들었다. 부스스해진 채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 안 공기가 차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제 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블라인드를 들춰보았다. 창문은 건물의 뒤편을 향하고 있었고, 양 옆으로 건물의 빛 바랜 벽면이 보였다. 나는 그런, 시간의 자취가 스며든 듯한 건물의 모습을 좋아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추억이란 빛바랜 건물의 모습에서 떨어져 나오는 감상들은 아닐까,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7시를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창가에 기대서서 오늘은 또 뭘 해야 할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은 이대로 집에 돌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사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추려내면 집에 있느냐 아니면 바깥에 나와 있느냐 정도다. 그런 생각을 잇다보니 그제야 경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불평이 떠올라왔다. 그들로서도, 딱히 뭔가를 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늘 생각을 한다고는 말하지만, 자칫 생각이 흘러가는 자체에 생각을 맡기고 있다 보면 특별한 진전 없이 비슷한 문장만을 반복하고 있을 때가 있다. 지금이 꼭 그랬다. 이것도 저것도 시원찮다는 생각만 잔뜩 채워 넣고 있었다.
 문득 사무실의 문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열쇠를 꽂고 돌리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지만, 나는 그동안 눈으로 주위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면서 문이 열리는 반대쪽으로 몸을 붙였다. 딱히 쓸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잡아 뜯듯 컴퓨터의 키보드를 잡아들었다.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서 제대로 휘두르기만 하면 순간 움찔할 정도의 일격은 날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는 동작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문의 아래쪽이 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순간을 선명하게 인식했다. 어제처럼 심박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익숙하지도 않았고,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감각이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아마도 상대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되자마자 나는 그 앞으로 뛰어들어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던 키보드를 내리치려고 했다.
 거기 서 있었던 것은 조금 작은 듯한 느낌이 드는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내가 들고 있었던 키보드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 못지않게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온다고 이야기 하지 그랬어.“

 여자가 고개로 이쪽을 가리키자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녀가 말했다.

 "저거 무거워서 맞으면 아픈데."
 "꼭 맞아봤다는 것 같다?"

 인하와 여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혼자 한 발짝 떨어져서 멍하니 키보드를 들고 섰다. 그녀가 어제 말했던 아는 사람이라는 게 바로 저 사람이었던 것일까. 인하가 말했다.

 "그냥 오늘 아침에 이야기하려고 했지. 자고나면 서로 조금 진정이 되기도 할 테니까……그런데 수현이가 너무 일찍 깨버려서……."
 "일찍 깬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늦게까지 자버린 거겠지."

 여자는 문득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잠깐, 키보드 좀 주세요."

 여자가 시키는 대로 키보드를 내밀었다. 그녀는 케이블 쪽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거 비싼 건데……."

 멋쩍어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가 키보드를 휘두를 생각을 했는지, 지나고나니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하가 끼어들었다.

 "케이블만 다시 연결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럴 것 같기는 한데……글쎄."

 그녀는 키보드를 잠깐 더 뜯어보다가 옆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김여름이라고 합니다……."

 여름은 잠깐 뜸을 들이면서, 내 반응 같은 것을 살피는가 싶더니, 살짝 웃으면서 물었다.

 "윤수현 씨죠?"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반사적으로 놀라기는 했지만, 인하와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녀를 건너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 어제 인하가 컴퓨터로 뭔가를 했던 것도 혹시, 여름이라고 하는 이 여자를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특별히 어디 전화를 거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나에 대해서 모를 리도 없다.
 여름이 말했다.

 "그나저나 여기도 오랜만이네. 몇 달 됐지?"
 "세 달 정도 전이었던가?"
 "그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정신없이 바빠……."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인하가 장난스레 말했다.

 "누가 들으면 십 몇 년 전 일인 줄 알겠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잖아? 요즘 세상에 주기를 몇 년 단위로 잡는 건 사치야."
 나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생김이나 말투나 조금 특이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그래서……어쩌지?"

 인하가 말했다.

 "급하다고 해서 서둘러서 오기는 했는데, 나라고 딱히 방법은 없어. 물론 어느 정도 상대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쪽에서 대대적으로 나서면 나도 장담 못해. 이야기 들어보니까 머지않아 그쪽에서 먼저 나설 거 같은데……글쎄."

 여름이라는 여자는 마치 사정을 다 꿰뚫고 있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하면, 스스로 회사나 코뮌이라고 말했던 자들을 가리키는 걸까. 나로서는 위치가 애매해졌다. 그녀나, 혹은 인하라고 해도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떻게 못할까?"
 "나도 거의 도피중이잖아. 물론 아예 손 쓸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나로서도 자신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이야기에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내 위치를 어디쯤에 세워두어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던 나는 그들 사이에 애매하게 서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네가 봤던 게 두 명이었다고 했어?"
 "그래. 남자하고 여자 한 명씩."
 "두 명이라. 애매한 숫자네. 아니, 애매한 게 아니라 적어. 겨우 그 정도 숫자로 나설 녀석들이 아냐. 맞다, 처음에 회사에서 나왔다는 녀석들, 몇 명이었죠?"

 여름은 돌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상대이다 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인하가 그런 식으로 나에 대한 것들을 이것저것 이야기 했다는 사실이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답했다.

 "세 명이었어요. 남자 셋."
 "확실히 그것도 적어. 나머지는 어디 숨어 있었던 건가?"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면, 어쩌면 수현 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서로에 대한 견제 수준에서만 나서고 있는 거 같아. 지금 상황에서 더 중요한 다른 게 있다는 건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
 "아니, 없어. 어쨌거나 정말로 그런 거라면 다행인거 아냐?"
 "그건 그렇지."

 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거라면 다행이기는 했다. 거기다 이전에 회사에서 나왔다는 남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서로가 견제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 사이에 있는 내 입장은 차라리 나아지는 것일 수 있었다.

 "문제는 관심이 별로 없다고 해서 그쪽에서 아무 것도 안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어쨌거나 그쪽으로서는 여전히 수현 씨가 중요할 테니까, 일단 확보를 하기는 하려고 들 거야. 지금 당장은 달리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거기에 신경을 더 쓰겠다, 그러고 있는 거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야. 지금도 뭔가를 하기는 할 테고."

 그 말에 인하는 또 그건 그렇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정하는 듯한 표정을 띄워 올렸다. 나는 그들에게서부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는 데에는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숨겨둔 뭔가가 있다기에는 둘 다 지나치게 태연하게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야기 안 했었지."

 정말로 이제야 눈치 챘다는 식이었다. 인하도 결국 그들과 관련이 있었던 걸까. 확실히 어제나 오늘이나 너무 친절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친했었던 기억 때문에 그런 의심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이제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어떤 비틀린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꼭 내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지금으로서는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저기, 키보드는 휘두르지 마세요. 지금이라면 고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한 발짝 물러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이 바로 그 키보드였다. 그걸 눈치 챈 듯 여름이라는 여자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러고는 인하를 돌아보는 표정이 만만찮게 날카로웠다.

 "뭐야, 왜 이야기 안 했어?"
 "별 문제 아니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지……."

 여름은 다시 내 쪽을 바라본다.

 "잘은 모르겠지만, 수현 씨가 생각하는 게 거의 맞을 거예요. 우리는, 악연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회사하고 코뮌하고 엮여있는 처지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들하고 손을 잡고 있다는 건 아니고, 차라리 그쪽하고 적대하고 있는 처지라고 해야겠죠. 그러니까, 우리는 수현 씨 편이라고 할까……물론 회사나 코뮌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기는 했겠지만."

 내가 물었다.

 "증거 댈 수 있어?"
 "증거? 증거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아니 인하가 한 행동을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네들 좋은 짓을 하자면 굳이 이런 것까지 할 필요가 없죠. 그쪽에 붙어있는 거라면, 어제 수현 씨한테 그런 일이 있었을 때도 가만히 있는 게 맞잖아요? 괜히 나서서 그 친구들한테 미움 받을 짓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근처의 책상에 걸터앉고 나서, 칸막이에 팔을 기대고는 손으로 뺨을 받쳤다.

 "물론 그것도 수현 씨를 방심시켜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시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서 할 만한 게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회사와 코뮌의 중간에서 나를 가지고 줄타기를 하는 정도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런 중요한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인하만 해도 어제 나를 도와준, 아니, 구해준 것은 사실이니까, 그들의 말을 믿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따져보는 것에 대해 지쳐버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이러지 말고 그냥 우리가 어떤 쪽인지 이야기하는 게 낫겠네요. 회사나 코뮌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의식,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현상을 해석하고 그걸 실체화하는 기술을 개발해냈던 연구자들하고 이어져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돕겠다고 기꺼이 나서는 이유는, 어쨌거나 연구와 기술 개발에 있어서 수현 씨를 중요하게 사용했고, 그리고 그랬던 것 때문에 수현 씨가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죠. 그런, 일종의 책무감 때문이에요. 물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얼마나 믿음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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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수려한꽃
비밀글입니다. 수려한꽃 11.03.29. 11:20
[비밀글입니다.]
Kaleana
Kaleana 작성자 수려한꽃 11.03.29. 11:42

만들어주시면...감사하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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