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4.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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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0 Mar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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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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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있을 곳은 2층의,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정해졌다. 인하와 여름도 차례대로 그 방의 옆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쓰이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 안에는 침대나 책상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나는 별 것 없이 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겉옷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가끔은 이대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방에는 큰 창문이 붙어있었는데,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거리와 그 뒤로 늘어선 건물들의 일부가 비쳤을 뿐이다. 그 자체야 상관이 없었지만 창문이 방에 비해 조금 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커튼을 치고 전등을 켰다. 그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바닥을 바라다보았다.
 어제도 학교에 노트북을 들고 갔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하나 없어도 노트북은 가지고 있었다. 오늘 같은 일이 있는 동안에도 그걸 챙겨온 내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노트북을 켰다. 무선 랜을 확인해봤더니 수신 강도가 강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접속에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그걸로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전원이 꽂힌 그대로 침대 곁에 있었던 탁자에 올려놓았다.
 방의 한쪽 벽에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걸려있었다. 딱히 달리 둘 곳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그 그림은 침대 바로 앞에 있어서, 침대에 누워있자면 특별히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 한 그 그림이 시야의 한가운데를 오롯이 채웠다. 그런 것들이 들어찬, 그리고 바깥으로는 적벽돌로 둘러싸인 이 공간을 어떤 말로 정리해 표현할 수 있을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특이하다고는 할 수 있을 터다.
 공기가 선선해서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그 안에 누웠다. 그 온기가 어쩐지 그리운 감상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에 감싸여있는 사이에는 지금, 혹은 미래의 일 같은 것들은 그 선명한 빛을 잃어버린다. 마치 그 위에 한 겹 바랜 빛이 내려앉는 것처럼.
 그러고 있자니 인하에게나, 여름에게나 몇 가지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이, 아니면 물어봤어야 했었던 것들이 스쳐 떠올랐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물을 시기를 한참 놓친 후에야 그런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도 이젠 그다지 절실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차후에 기회가 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걸로 좋은 것이다. 그래서 역시 이대로 잘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몸의 느낌에 구실을 붙인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나서 깬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특별히 잠을 설쳤던 것도 아닌데, 무언가 정신없는 꿈을 꿨다. 꿈이 원래 개연성이 없는 것이라지만, 이번 꿈은 그 정도가 심했다. 어떠한 줄거리도 없이 이미지와 이미지들, 예컨대 어제 봤던 사람의 모습이라거나, 이 건물의 내부,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벽돌이나 소품 같은 것들, 혹은 문자열, 풍경의 일부 따위가 한데 뒤섞이거나 교차해나갔다. 꼭 이런저런 사진들을 오려다 도화지 위에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듯한,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정신없는 한 장면이 지나고 나면 다시 마찬가지로 정신없는, 그리고 도대체 이전 장면과 아무런 연관도 찾을 수 없는 장면이 나타났다. 당장 꿈속에서 그런 이미지들과 마주하고 있었을 때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깨어나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꺼림칙한 꿈이다, 싶었다. 이런저런 일도 많았고, 그만큼 피곤하기도 했고, 거기다 낯선 곳에서 잠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런저런 이유는 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꿈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꿈 때문인지 자고 일어났는데도 졸렸다. 눈을 감으면 꿈에서 봤던 장면들이 눈꺼풀 아래로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근처에서 시계를 찾았다. 6시. 평소보다는 확실히 빠른 시각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잠깐 더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할 만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정민과 여름이 가운에 놓은 탁자에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영하라는 남자가 뭘 하고 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인하가 아직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가, 옆에서 내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고는 손을 들어보였다. 그 둘과는 아직 어색해서 곁에 서있기만 했다가, 그러고 있는 것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결국 여름의 옆에 앉았다.

 "커피 끓여올게요."

 정민이 커피포트 앞에 있는 동안 나는 멍하니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 깔린 보에는 체크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걸 하릴없이 헤아려보던 중에, 여름의 말이 들렸다.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저녁동안."
 "괜찮았어."

 꿈이 별로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불편하다는 기준에서는 사소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긴 원래 무슨 건물이었던 거야?"
 "기숙사 건물이었다고 해요. 그걸 여기저기 고쳐서 쓰고 있는 거죠. 원래 어땠는지 사진 같은 것도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상당히 많이 고친 것 같아요. 부엌 같은 게 바로 1층에 있는 걸로 봐서는."

 커피 잔을 가져온 정민이 대신 답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커피 잔을 받아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스테인리스제의 잔을 입술에 갖다 대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깨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하 씨였던가? 다른 분은 아직 이에요?"
 "걔 일과는 10시 부터 시작해."

 그렇게 말하면서 여름은 짓궂게 웃었다. 이제 8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방학이니까, 10시부터 시작하는 일과라고 해서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회사하고 코뮌은 서로 마찰 중일 것이다……그런 이야기야?"

 정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을 화제로 방향을 돌렸다. 그 이전의 이야기가 빠져있다 보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는 남은 커피만 홀짝였다. 여름은 자못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 안 내키실 거 같은데……."
 "상관없어.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싫으니까."

 내가 말했다. 나름 신경써준 것이겠지만, 나라고 회사나 코뮌이 얽힌 이야기 자체 때문에 특별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그건 아니에요. 어차피 다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니까."

 여름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정민의 물음에 답을 달았다.

 "결론은 그래. 그 일이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아마도 이쪽에 관련된 일이 아닐까. 물론 아예 관계가 없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요즘 그네들이 그것 말고 달리 신경 쓰는 일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렇기는 힘들 거야. 지금까지 시종일관 프로젝트 때문에 난리였으니까."

 정민은 말없이 커피 잔을 기울였다. 그녀의, 웃음기가 어려 있었던 눈초리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쩌면 셋 중에서 문제를 가장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여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열쇠가 이쪽하고 관계가 없을 리 없다는 거지. 뭘 그렇게 확보하려고 하는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건 자료 아니면 연구자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거야 그쪽에서 계속 해왔던 거 아닌가?"

 정민이 물었다.

 "그건 그래. 그러니까 아마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뭔가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게 아니었다면 수현 씨를 두고 둘 사이의 마찰이 심해졌을 테니까. 장난처럼 두세 명 보내서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거기까지는 확실히 내가 이미 들었던 이야기의 연장 정도였다.

 "선생님이 사라진 게 일주일 전이었고, 그러기 이틀 전에 나를 포함한 몇 명을 초대하셨지. 그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의문스럽고, 도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 건지도 궁금해. 초대까지 하셨으면서 이렇게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게 이상하니까. 거기다 수현 씨한테 회사가 접근한 게 닷새 전이었거든. 시기가 비슷한 거 같지 않아?"

 그 때, 영하라는 남자가 다가왔다. 정민이 일어나려는 걸 제지하며 그가 말했다.

 "커피는 괜찮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면 초대하고 어딘가로 훌쩍 가버리기까지의 이틀, 그리고 사라지고 나서 회사가 수현 양에게 접근하기까지의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정확히 언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전 여름의 이야기는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여름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진 것은 사실이니까, 지나가던 도중에라도 귀에 뜨였을 수 있다.
 여름이 답했다.

 "중요할 수도 있고, 중요하진 않더라도 의문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일세, 나로서는 의아스러운 게 한 가지 더 있는데……그 친구는 왜 우리를 여기 초대했을까, 하는 것일세. 그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 단순히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한 걸까? 우리를 초대하고 사라지기까지 이틀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초대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사라진다는 것도 의도한 것이 될 수 있지. 무언가 바라거나 노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면 말일세."

 가능한 가정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 이젠 왜 자기도 없는 이곳에 초대받은 몇 명을 모아야 했는가라고 하는, 풀어내야 할 의문이 하나 더 생긴다. 물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가정도, 그 일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내가 그걸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건……그 친구가 아는 사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다 초대한 게 아니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초대를 받아 여기 온 건 자네와 나, 둘 뿐일세. 자네도 그렇고, 나도 그 친구하고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친분이 기준이었다면 유현이나 명진 같은 친구를 부르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거든. 친하기는 그쪽하고 더 친할 텐데도."

 그가 말했다.

 "물론 이것도 이상하다는 것뿐이지 어떤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건 사실일세. 그렇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네. 회사나 코뮌이 엮여있다면 그 친구에게도,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까 말이네. 물론 아무런 관계도 없고, 우연적으로 겹친 일을 우리가 끼워맞춘 것뿐이라면 좋겠지만……어쨌거나,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겠나."

 거기까지 말을 잇고 나서 영하는 자기 옆의 정민에게로 몸을 틀었다.

 "자네한테 집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했었던가?"
 "네. 일이 있어서 잠깐 집에 못 들어오니, 그동안 오는 사람은 다 받아주라고, 그런 이야기만 하셨어요."

 생각해보자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러기에는 잡히는 사실이 너무 적었다. 혹시 그는 집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붙잡혔고, 그게 계기가 되어 내가 일에 엮여버린 게 아닐까. 회사와 코뮌은 그를 확보하거나, 혹은 지키기 위해서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나를 그 관계 속에 집어넣기가 어렵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는 서로에 대한 견제 수준으로만 움직인 이유와, 그리고 내가 그 일에 엮인 구체적인 이유와 과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혹시 그들 입장에서 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회사, 코뮌 양쪽이 저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저에게 접근하면 다른 한쪽의 주의를 끌게 할 수 있을 테니, 그 정도 목적으로만 절 끌어들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아마 처음에 접근한 회사 쪽이 일종의 주도권 같은걸 갖고 있는 거겠죠. 코뮌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그 주도권이라는 게, 이경진이라는 분의 신변을 먼저 확보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겨우 그런 목적으로 쓸 만한 수는 아닐 텐데, 수현 씨는……."

 여름이 말했다. 겨우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그 정도일 뿐이라면 나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나머지 한쪽이 자신들이 놀아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그들과 나의 인연도 끝이 날 터다. 그리고 그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 한 쪽이 가만히 넋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영하가 말했다.

 "그쪽이 생각하는 중요성과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성은 다를 테니까 말이네."
 "그러면, 코뮌 쪽에서도 그리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정민이 물었다. 확실히 코뮌이라고 밝히고 나온 것도 둘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지만, 그들도 전면적으로 나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고, 회사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으니 대대적으로 나설 필요는 못 느낀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코뮌 쪽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나를 향한 물음이기는 했지만 여름이 그것을 대신 받았다.

 "확실히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해.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설명을 댄다고 해도 확증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겠지. 그러면 확증할 수 있을만한 증거를 찾아야 될 텐데……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정민은 말을 마치고는 일어서서,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일단 아침부터 들고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전 계속 생각한다고 해도 딱히 좋은 생각이 날 것 같지 않은데요."

 그 말에는 다들 공감했다. 이런 일 덕분에 평소에는 늘 거르던 아침을 챙기게 된 것은 나름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라, 그 미묘한 어감에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웃음을 삼켜버렸다.


 여기 있는 것은 거의 갇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건물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사실 나는 평소에도 집 밖에 나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선택이 아니라, 강제의 모습을 띠는 순간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괜히 거리의, 바다의 공기가 마시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럴 수 없었으니 대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위에 엎드렸다. 특별히 다른 것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이경진이라는 연구자와 관련되어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내 처지도 어떻게든 바뀔 것 같은데, 그 문제라는 게 만만하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애초에 행방불명인 사람을 찾는다거나, 그게 아니라도 어떻게 되었는지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일 리가 없다. 그저, 자기가 스스로 무슨 일이 있다고 말을 했으니 어떤 단서가 남아있지 않을까 기대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저 시간이 답일지도 모른다. 뭘 한다고 해도, 때가 오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정말로 내키지 않는 상황, 예를 들면 영영 알 수 없게 되는 경우 같은 것도 가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인하였다.
 나는 이불 사이로 눈만 내밀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인하 뒤로 여름도 같이 들어왔다. 인하는 한숨을 내쉬며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시야가 잠깐 하얗게 바스라졌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잠깐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들어보였다.

 "뭐하냐, 대체."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우스워져서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내가 뒤집어쓰고 있었던 이불을 걷어내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쩐지 수현이라는 인간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 같다."
 "아직 망가지진 않았어."

 그녀가 말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가능하겠다 싶기는 한데, 뭔가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게 문제겠네."
 "그렇지 뭐. 거기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나는 몸을 추스려 앉았다. 얼마 누워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부스스한 느낌이 든다. 잠을 제대로 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몸에 기운이 없기도 했다. 그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이 나른한 오후에 낮잠이라도 잤을지 모른다.

 "그 이경진이라는 분, 연구 주제가 어떤 거였는지 알아?"

 문득 내가 물었다. 단순한 궁금증 뿐만 아니라, 그 남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의식 해석이었어요."
 "거창하네."

 인하가 거의 반사적으로 그렇게 반응했다. 여름은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사실 더 거창한 주제도 많아요. 의식 분석, 의식 기록, 더 나아가면 현실 분석, 현실 해석 등등……요즘 시대에 너무 거대한 주제 같기는 한데,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나눠서 진행됐으니까요."
 "의식 해석하고 의식 분석은 나눠져 있었던 거야?"

 서로 다른 분야라기에는 단어가 지나치게 비슷했다.

 "네. 그랬죠. 의식 해석은 의식을 읽는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고, 분석은 읽어낸 결과를 해석해서 내재해있는 의식의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었어요. 현대판 정신분석이죠. 실제로 초기의 결과물은 정신분석의 가설들을 증명하는 것도 많았어요.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산출된 결과가 그 가설들을 지지했으니까요."

 문득 그렇게 읽어낸 의식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하나의 서사일까, 아니면 파편화된 사실과 이미지들의 나열인 걸까. 어쩌면, 가장 재미없는 경우겠지만, 일련의 수치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내가 물었다.

 "그 의식 해석이라는 걸로 어떤 사람 의식을 읽었는지 알고 있어?"
 "물론 수현 씨가 처음이었어요. 그 이후로 사실 몇 명 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수현 씨 다음으로는 정민 씨가 했다고 해요. 그리고, 자원한 사람 몇 명 정도……."
 "별로 많지는 않네? 관심 있을 사람이 많을 거 같은데."

 그녀가 말하는 의식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정신을 읽어서 해석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거기다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많은 사람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었을 텐데.
 여름은 물음을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답하기를 껄끄러워 하는 듯 했다.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런 식으로 반응한 이상 어떻게든 말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현 씨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그 데이터를 본 적이 있는데, 의식 해석으로 읽어낸 결과물, 즉 의식의 내용이라는 게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어요. 정신분석에 대해서 아신다면 이해하실 것 같은데……."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전공이 사회학이다 보니 이래저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순간, 여름이 말을 끊었다.

 "아, 사회학과셨죠?"

 가라앉아 있었던 경계심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대체 나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여름도 그걸 눈치 채기는 한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어쨌건, 처음에는 그 정신분석의 가정들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왔죠. 그것도 사실 좋은 내용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보다 더 어두운 면, 그리고 그 사람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울 부분들이 끌려나오기 시작했죠. 의식이 남김없이 분석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을 때, 그 결과물이라는 건……그걸 보는 건 꼭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니, 의식의 중심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득한 심연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러면, 죽음 충동 같은 게 드러난 건가?"

 그 이상으로 어두운 면이라는 것은, 그 연구에 대해 모르는 나로서는 알기도, 그리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네. 그랬죠. 물론 실제로 의식 해석에서 드러난 건 그 죽음 충동의 구체적인 표현들이었어요. 그걸로 죽음 충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끌어낸 건 의식 분석에서 했던 작업이죠."
 "나는 그래도 궁금한데. 내가 직접 데이터를 보지 않아서 그런가?"
 "글쎄……그럴 거예요."

 여름이 답했다.

 "그런데, 그러면 너는 내 의식 해석의 결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아냐?"
 "그건 몰라요. 수현 씨의 의식 해석 결과가 데이터에 들어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데이터가 수현 씨의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할 짓 못할 짓 다 해놓고는 그런데서 사생활을 보장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도 궁금하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런 건 없는 척 넘기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것을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니까.

 "특이한 데이터가 하나 있기는 했는데, 그게 수현 씨 것이었을지도 몰라요."
 "특이한?"
 "사실 그 해석 결과를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은데……다른 의식의 모습들이 어두운 내면이 들어찬 심연 같은 느낌이었다면, 그런 것 없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였어요. 꼭 적막한 들판 같은 느낌?"

 그녀는 비유를 끌어들이고는 멋쩍은 듯 웃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내가 말했다.
 그런 풍경을 끌어들인 것은, 의식 자체가 그런 모습이었다기 보다는 그걸 본 여름의 감상이 그랬다는 의미일 테니까. 어쨌거나 심연보다는 적막한 들판 쪽이 나은지도 모른다. 물론 내 의식이 심연에 가까웠다고 해도,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막연한 설명을 들어서는 그다지 충격 받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여튼, 모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궁금해지는데. 수현이의 정신 상태라……."

 그렇게 말하며 인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정민 씨는 어땠는데? 어쩐지 그 결과를 봤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인하가 물었다. 분명 정민이라는 여자도 여름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두 명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경진이라는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 테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이 없는 동안 집을 맡긴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나는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 떠올려보았다. 어쩐지, 희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나 인상이 희미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모습 자체가 어쩐지 희미한 것이라는, 그런 느낌. 그녀의 조용한 모습에, 사람 얼굴을 떠올리는데 약한 내 한계가 엮여 그런 느낌을 자아냈는지도 모른다.

 "글쎄, 데이터를 봤는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고, 또 정민 씨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 사실 예나 지금이나 겉으로 보이는 행동의 차이 같은 건 없어. 그러면 데이터를 안 봤다고 하면 되겠지만, 정민 씨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데이터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무슨 관계였어? 그 사람하고 이경진이라는 분하고?"

 내가 물었다.

 "그 분 조수였어요. 정민 씨는. 사실 조수라고는 하지만, 거의 연구 동료나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니까 궁금했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입장인거죠. 물론 그걸 궁금해 했을지 어떨지가 문제겠죠."

 자신의 가운데에 있는 심연이라는 게 그 정도로 꺼림칙한 것이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정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도덕성에 관련된 실험에 참가했다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한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보고하거나, 혹은 그 결과로 우울증에 걸렸다는 참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스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그보다 더 어두운 모습에 관한 것이라면,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충격적일 수도 있을 터다.

 "그러면, 그 분은 자기 의식도 해석했을까?"
 "글쎄요. 정민 씨 이후로 어떤 사람들이 의식 해석에 참여했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아마도 하시지 않았을까요. 물론 저는 그 분이 자신의 데이터를 봤을지 어떨지, 그리고 봤다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그런 건 몰라요. 제 기억에 있는 그 분의 모습은, 그냥 좋은 이미지로만 남아있어서 그런 건지도……."

 여름이 말했다.

 "글쎄, 그게 그 분의 행방불명하고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드라마틱한 이유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확실히 있으니까요."
 "어쩐지 추측이 하나 더 늘어나는 기분인데. 그런데, 일이 있었다면 무슨 일이었는지, 그런 게 남아있지 않을까? 일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아있는 자료들 같은걸 보면 무슨 단서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인하가 말했다.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래야겠다 싶었어. 이 상태로는 나가서 찾아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찾아다닌다고 해서 뭔가 수확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여기서라도 뭔가를 하기는 해야겠지."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기는 했어?"

 인하가 물었다.

 "혹시 뭔가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말은 해뒀어."

 이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히 성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가 그저 연락했다고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연락하면서도 특별히 상대방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는 의미다. 말투로 봐서는 여름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한 것이겠지.


 1층에 내려와서 탁자 근처에 앉아 있다가 정민과 마주쳤다. 사실 그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어떻게 반응할지를 보고 싶었다. 거기다, 별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이경진이라는 남자와 가장 가까웠던, 그리고 그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부분에 관해서 조금 떠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 저기……."
 "네?"

 나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잠깐 멈췄다. 그 말 자체라면 그러지도 않았겠지만, 그 뒤로 그녀에 대해서 바라는 게 있다 보니 쉽지 않았다.

 "이경진이라는 분이 남긴 자료 같은걸 볼 수 없을까요.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정민은 살짝 웃음을 띄웠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여름이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같이 하면 아무래도 쉽겠죠."

 여름이 이미 그런 이야기를 해놓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녀에게서 특별한 기색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꺼림칙한 데이터가 여기 남아있으리라는 법도 없고, 그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갔다. 이 건물은 다섯 명이 머무르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조감도에 그려 넣듯 이 공간 속에 놓아보았다. 사람이 없는, 건물의 남은 공간에는 쓸쓸한 적막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나는 의자에 길게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삼각 꼴의 천장이 유난히 아득하게 떨어져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하냐?"

 몸을 일으켜보니 바로 앞에 인하가 있었다.

 "너야말로. 너도 할 일 없지?"
 "그건 그렇더라. 나도 방 안에 있으니까 너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망가지는 거 같던데."

 그냥 하릴없이 뒹굴고 있게 되더라고만 해도 좋았을 것이다. 나는 웃음을 삼켰다.

 "답답하지 않아? 여기……."

 내가 말했다.

 "바깥에 나갈 수 없다는 게 이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여기 이렇게 있으니까 나가서 뭐라도 하고 싶다. 정말."
 "그거야 강제로 해야 되는 거니까 그렇지. 거기다, 너 긴장하고 있는 거 아냐?"

 그거야 특별히 물을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조금 있으면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질걸."

 확실히 시계를 볼 때마다 시간이 이것 밖에 지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잠깐 나가자. 바다까지는 못 봐도 바깥 공기 정도는 마실 수 있겠지."

 그녀가 말했다.


 저녁 7시에, 우리는 모두 1층에 있는 이경진의 서재에 모였다. 서재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책 같은 것은 없었고, 작은 방 안에 컴퓨터와 서류들, 그리고 화분 같은 것이 있었을 뿐이다.
 우선 컴퓨터부터 켰다. 신기하게도 컴퓨터에는 암호가 걸려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드디스크를 뒤져보니 날짜별로 정리된 파일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AES로 암호화되어 있었다. 그건 다른, 이름만 봐도 중요할 것 파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어떻게 해제할 수는 없을까요?"

 혹시나, 싶었는지 인하가 물었다. 정민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호를 어디 써놓으신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풀어낼 수 있다면 이렇게 파일만 암호화 해놓은 채로 내버려둘 리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좋은 선택이기는 하지만,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우리 입장에서는 꼭 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접근 제한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중요할 것 같아 보이는 문서들만 전부 암호화 되어 있다니 말이다.
 프린트되어 있는 것들도 뒤져보기 시작했지만, 거기엔 연구 결과물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사실 찾기 전에는 뭘 할 것이다, 그런 직접적인 단서 같은 것을 바랐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누군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런 것을 남길 리가 없다.
 내가 물었다.

 "뭔가 없나요?"
 "특별한건 없네. 전부 내가 예전에 봤던 자료들이야."
 "마찬가지예요."

 영하와 정민이 답했다. 다시 막막한 기분부터 들었다. 이제는 여름이 연락한 사람들이 그의 행방에 대해서 알려오거나, 아니면 그가 여기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둘 모두 우리가 뭘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아니다.
 그래도 일단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서 그의 서재에 남아있었던 서류들을 나눠 살펴보기로 했다. 어쩌면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고 그러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그런걸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붙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에서 USB로 복사해온 파일들의 목록을 대책 없이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암호화 되지 않은 파일도 있었지만, 그건 단순한 메모 정도일 뿐이었다. 마침 컴퓨터가 옆에 있었기에 써놓은 듯한, 전화번호나 어딘가의 주소 같은 것들. 거기다 그런 파일들의 최종 수정일은 그의 행방불명이 있기 한참 전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암호를 어디 적어놓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많이들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애써 AES까지 동원해 암호화 해놓고는 그런 짓을 할 리 없다. 나는 혹시 어딘가 남아있는 힌트들을 조합하면 암호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딘가의 추리 소설 같은 생각을 해보다가 그만두었다.
 침대에 누워서 이마에 팔을 얹었다. 별이 빛나는 밤이 들어가 있는 액자가 눈에 다시 들어왔다.


 그날도 어제와 비슷한 꿈을 꿨다.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만큼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나열. 단어 같은 것들이 지나가기도 했고, 어떤 풍경 사진을 좁게 세로로 잘라 내온 듯한 이미지나 층계, 이런저런 물건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 꿈 때문에 깼다. 시계는 6시에 가까운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동안 꿈을 꾸지 않다가 이런 꿈을 연달아 꾼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섬찟한 느낌이 드는 꿈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유랄만한 것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이런 종류의 서사가 하나도 없는 꿈을 꿔본 적도 없고, 이전에 들어봤던 적도 없다. 물론 꿈에 나온 이미지들에 상징적인 의미들을 붙여보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건 내 무의식 속에 들어 있을만한 것들을 늘어놓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쩌면 그게 전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무의식에 들어있는 것이 끌어올려지고 있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그렇지만 물음에 답을 달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 이야기를, 나는 인하와 여름이 모여 있을 때 꺼냈다.

 "나온 이미지들에 의미를 달다 보면 어떤 공통점 같은 거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걸 일종의 단어로 봐서 맞춰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인하가 말했다.

 "혹시 내일도 비슷한 꿈을 꾸면……일어나자마자 어떤 것들이 보였는지 써두시면 좋을 거 같은데요. 그런 꿈 자체도 이상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의 수준으로 내려가면 뭔가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죠."

 여전히 내키지 않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이대로는 특별히 더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화제를 넘길 말을 고르던 중에 인하가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늘 이어지는 꿈이나 배경이 같은 꿈같은걸 꾸면 어떤 느낌이야?"

 그러고 보면 그녀도 어떤 마을에서의 일상이 반복되는 내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내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기분 나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무서워. 꼭 내가 꿈속으로 빠져들어서 매몰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꼭 무의식 어딘가가 고장 난 거 같잖아."
 "고장 난 것까지는 아니겠지만요."

 그러면서 여름은 풋, 하고 가만히 웃었다. 어쩐지 그것까지는 아니라는 표현이 무서워졌다.

 "그런데 뭔가 알아낸 거 있어?"

 나는 화제의 방향을 바꿔 물었다. 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여름은 그저 가만히 시선을 바닥에 둘 뿐이었다. 똑같은 부정이기는 하지만 둘의 성격 차이 같은 것이 보이는 듯한 장면이었다.

 "특별한건 없었어요. 어제 이야기했던 거 같이, 전부 예전에 봤던 자료들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의식 해석이라는 걸로 뭔가 알아낼 수는 없는 거야?"

 내가 물었다.

 "별 말도 안 되는 걸 해내는 게 이 기술들이라고는 하지만……당사자가 없는데 의식을 읽는다거나 하는 건 아직 불가능해요. 물론……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하겠죠."

 여름이 말했다.

 "수현 씨는 특별히 알아낸 거 없어요?"
 "없었어. 그냥 전부 학술 논문 같은 것뿐이던데."

 오랜만에 한글로 쓰여 있는 논문을 봤다는 게 반갑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러면 또 고착상태네요."

 나는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그 분 행방에 관한 건 차치하고, 당장 우리들 문제부터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회사나 코뮌 쪽에서 나서서 여기까지 올 것이냐……하는 문제죠. 수현 씨라는 수를 단지 주의를 끌기 위해서 쓴 것이라면, 아마도 수현 씨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겠죠. 코뮌도 속는 건 잠깐이지, 조금 있으면 알아차릴 거고요."

 여름의 말에 맞춰 인하가 말했다.

 "문제는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쪽에서도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연구 자료 같은 것도 쌓여있고, 또 뭔가 이 건물을 뒤져보면 어디 중요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인도 없는 집인데, 솔직히 거의 무방비 상태야. 거기다 만약에 회사 측에서 선생님을 확보한 게 맞다면……여기 안 올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이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처음 서울을 나왔을 때 이경진이라는 사람은 큰 문제가 아니었고, 그리고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박영하나 한정민의 입장에서도 그의 실종과 나는 큰 관계가 없는 것이었겠지만, 그 두 사건이 한 곳에서 만나니 이상하게 서로 얽혀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렇게 모인 것이 문제였다면, 나눠놓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론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겠지만, 간단한 문제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옮길까요. 여기 있어도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거 같은데."
 "그렇지만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우리만 어디 가기도 좀 그렇지 않아? 거기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갑자기 도망치듯 나온다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미안하다 싶은 마음의 강도는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생각이 쉽사리 들지 않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일단은 기다려볼까요? 그래도 여길 빠져나갈 준비 정도는 해둬야겠죠."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방, 예전에는 뭘로 썼을까?"
 "기숙사라니까, 그냥 방으로 쓰지 않았을까."
 "그건 그랬겠지만……이 건물을 사들여서 여기저기 바꿨다고 했잖아. 그러면, 그 사들인 이후로는 어떻게 썼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물으니까 꺼림칙해지는데……."

 침대가 놓여있고, 정리까지 잘 되어 있는 걸로 보면 특별히 다른 용도가 있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저, 이 커다란 건물과 3층까지 들어차있는 수많은 방들을 어떻게 썼을지, 그리고 이경진이 이런 건물을 자신의 거처로 고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어쩌면 쓰이지 않고 버려진 방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건물 속에서, 그런 방과 함께 있다는 상상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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