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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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8 Mar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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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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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성과가 없었던 이후로 안 그래도 무거웠던 이곳의 공기는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료를 찾아보겠다느니 하며 서로 나섰을 때는 다들 조금 들떠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 그리고 그때까지 했던 생각들이 공허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사실로서 증명되리라는 생각. 사실 그런 기대에는 특별한 근거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어려웠던 것이다.
 그날 저녁 시간은 식기를 울리는 소리만으로 채워졌다. 생각해보면 다들 그리 떠들썩한 편은 아니었다. 정민이라는 여자도, 영하라는 남자도 그랬다. 여름이 그나마 조금 수다스러운 편이기는 했지만, 다들 별 말 없이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해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녹이기는 어려웠다.

 "물론 앞으로도 조금 더 자료들을 찾아보기는 해야겠지만 말일세……그게 잘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서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네. 자네들은 특별히 생각해둔 것이 있나?"

 영하가 말했다. 이전에 여름, 인하와 이야기했던 주제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였다. 그 남자로서도 여기서 한정 없이 이경진을 기다릴 수는 없을 터다. 여기 들어앉아 가만히 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와야 할 이야기였고, 다만 그가 우리보다 먼저 나섰을 뿐이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정민이 말했다.

 "저는 여기 있을 생각이에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만……."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민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이 됐든 제가 됐든, 어쨌건 한 명은 이 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집을 사람 한 명 없이 비워놓고 싶지가 않네요. 뭐, 그래도 별 일은 없을 거예요. 제 한 몸 처신하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영하의 말처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탁 받았다는 사실이 아직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녀의 말 자체에서는 집을 맡아놓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그런 이유는 표면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집을 비워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을 뿐이다. 확실히 이런 큰 건물에 사람 한 명 없다면 그건 쓸쓸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 감상으로 내릴만한 결정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영하는 여름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자네는 어떤가?"

 그는 여름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비슷한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름은 허락을 구하려는 것처럼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물론 내게 허락할만한 권한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건 다만 동조해주겠다는 정도의 의미였다.

 "저희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일단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조금 더 살펴보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죠. 거기다, 오래 있으면 정민 씨한테도 미안하고……."
 "미안할건 없어."

 그게 단순히 의례적인 말인지 어떤지를 놓고 나는 한동안 정민의 낌새를 살폈다. 일단, 특별히 무게를 실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그럴 생각이라네.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영하가 말했다. 결국 누군가가 먼저 나서주기를 바란 것이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였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인 주제에 누가 먼저다, 다음이다 정도를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 때문에 서두르실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표정에 늘 그늘이 져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어두운 분위기가 풍긴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은, 아마 그녀가 표정이 별로 없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또렷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따금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느낌이 든다는 자체는 분명했다.
 영하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달리 말하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짓은 뭐든지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가 말하는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내색하지는 못하고 나는 그때라는 것이 며칠 후가 될 지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이번에도 우리가 먼저 나서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나나 인하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렵다면 여름이라도 붙잡고 재촉하겠지.

 "미리 감사드릴게요. 사실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이 넓은 집에 혼자 있자니 그것도 좋은 느낌은 아니더라고요."

 정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곧장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선생님."

 사실 전화를 받아들기까지 특별히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 끝에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붙자마자 모두의 눈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와 전화 상대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네. 오셨어요. 그 분도 오셨고요."

 정민은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돌아와 앉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모두 그녀가 어떤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별 일 없다고 하셨어요. 사흘 후에 돌아오시겠다네요."
 "그런가? 다행이로군."

 영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채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지 마시고 사흘 정도만 더 있다가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면, 그렇게 하겠네."

 영하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여름은 별달리 답하지 않았다. 정민은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는 듯 했지만, 굳이 그녀의 말을 끌어내기를 바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름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조금 복잡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전화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야 실제로는 전혀 괜찮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회사니, 코뮌이니 하는 것들이 생각에 끼어있다 보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사흘이라는 시간도 애매하게 느껴졌다. 이미 일주일도 더 지났고, 그가 초대한 사람 둘이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다 사흘을 더 보태야 할 만한 일이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별 일 없으셔서……괜한 걱정만 끼쳐드렸네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걱정해주신 거니까."

 정민은 가만히 웃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 전화."

 인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가장 평범한 가능성부터 끄집어냈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다행인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말로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나처럼, 그 둘도 그다지 탐탁치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그런 전화를 한다는 것이 이상한 것은 다들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물었다.

 "정말로 별 일 없었을까?"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거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초대한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 그 사람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데도 사흘이나 더 있어야겠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일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게 문제지."

 두 사람을 초대하고 나서, 꼭 해야 하는 일이 갑자기 생겼고,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게 하루 이틀로 해결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 그런 일이 어떤 것일지, 나로서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다, 정말로 별 일 아니라면 보통은 무슨 일인지 간단하게라도 이야기하잖아. 이정도 시간이 걸릴 일이라면……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마도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물론 사람의 성향이라는 게 있으니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었던 여름이 말했다.

 "그러면, 최악의 경우부터 생각해보죠."
 "최악이라고 하면 별 거 있어? 코뮌하고 회사가 엮여있으면 그게 최악이지."

 인하가 말했다.

 "이미 회사 측에 잡혀있는 상태고, 이번에 온 전화는 회사에서 일부러 걸게 시킨 거겠지. 전화로 초대한 사람이 와 있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자기가 사흘 후에 올 것이라는 말 정도를 한 거 같은데, 그러면 이 두 가지가 회사 입장에서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면 되겠지. 여름이나 박영하라는 분은 회사 입장에서도 확보할 수 있다면 확보하는 게 좋은 사람들이잖아? 그 두 명을 여기에 붙들어놓으려고 사흘 후에 오겠다고 한 거겠지."
 "사흘씩이나 여유를 둘 이유는 뭐지?"

 여름이 물었다. 인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사흘이라고 해서, 꼭 사흘 후에 시작하겠다는 의미일 필요는 없어. 그때까지 붙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지금부터 사흘 후 까지 아무 때나 행동하면 되는 거니까. 일종의 시한을 잡아놓고, 그때까지는 일을 끝내겠다는 의사로 보면 되겠지."

 그녀는 거기까지 말을 이었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이정도가 최악 아닐까."

 확실히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겠지. 그들 입장에서는 일단 두 명을 이 집에 붙들어놓은 상태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여기 있는 자료들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오기는 해야할 테니까.
 그렇다면 그때까지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게, 바로 나오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것뿐일까. 그 전화의 목적이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 그 전화 때문에 우리들이 더 경계하게 될 가능성도 상정했을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 단순히 한 번 운에 걸어본 것뿐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도 미리 계산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될까?"

 내가 가만히 그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인하가 말했다.

 "그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대책이긴 하지."

 둘 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할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싶었다. 그 회사라는 자들이, 정말로 그저 그 자리에서 피해버리면 끝인 계획을 세울까.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잡을 수 있다면 잡겠지만, 그러지 못했어도 별 상관은 없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장 그들의 가능한 행동을 계산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늘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면 정민 씨는 어쩌지?"

 여름이 떨떠름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인하의 답은 간단했다.

 "그런다고 말을 들을까. 여기를 비워놓고 싶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했었잖아."

 여름이 말했다.
 인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여름은 내 쪽을 바라봤지만, 나도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녀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여기를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런 걱정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사흘 동안 뭘 해도 가만히 두겠다, 그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 이 시점에서 사흘이라는 시한을 뒀다면, 이미 이 근처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화제를 돌리려다가, 그렇게 나는 대책 없는 부분을 건드려버렸다.

 "어차피 여기 가만히 있어도 그건 똑같아. 그냥 정면 돌파라도 해야지."
 "어떻게?"
 "여기 왔을 때하고 똑같이."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나왔을 때도 비슷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때는 상대의 인원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추측이 맞다면, 아마 그 때 나섰던 것은 코뮌이었을 것이다. 이번의 상대는 회사다. 회사라는 상대가 그리 어수룩하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을까?"
 "어떻게든 되겠죠. 이것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으니까."
 "……더한 경우라면 어떤 거야?"

 내가 물었다.

 "달밤에 산장에서 산 아래까지 뛰어내려왔던 적이 있었죠. 그때는 이러다 정말로 죽겠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 있잖아요. 늘 일이 잘 풀리라는 법이야 없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뒷부분은 생략해도 좋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은 이상 걱정하는 것은 사치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느껴지는 것까지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면 언제 나갈까? 지금?"

 인하가 물었다. 확실히 그 시점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기는 할 것이다.

 "일단 어디로 빠져나갈지 봐두기도 해야겠고. 나가보기는 해야겠는데."

 여름이 말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밤에 뜀박질을 했다는 여름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달을 가리며, 푸른빛의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닿지는 않지만 아마 그 위에는 매섭게도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밤에 바깥에 나와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싶었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밤공기는 생각보다 쌀쌀했다. 열대야 같은 것도 없는 밤인 모양이다. 별 생각 없이 겉옷 하나만 걸치고 나왔는데, 옷 사이로 드러난 살갗은 금방 차가워졌다.

 "뒷문은 저기 있어. 아무래도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오는 것보다는 저쪽으로 나오는 게 낫겠지."

 여름은 건물 뒤로 돌아 한쪽을 가리켰다. 이 붉은색 건물 뒤쪽으로는 풀이 상당히 길게 자라있었고, 거기에 있는 문은 어쩐지 버려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양식으로 지어진 적벽돌 건물이 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보니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건가, 싶었다.

 "꼭 더 나을 것 같지도 않은데."

 인하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였다. 뒷문으로 나온다는 것은 너무 정형화 되어있는 선택이 아닐까. 물론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을 통로라거나,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긴 있어."

 여름이 말했다.

 "2층 정도니까, 그냥 뛰어내리면 될 거야.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몸을 추스리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따돌리기도 좋고."
 "……해봤어?"

 내가 묻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아니라는 투의 몸짓이었다. 언제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죽 들어봐도 재미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런 일들을 이미 겪었던 앞에서 싫다고 불평할 수는 없겠지.

 "난 자신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인하는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상 닥치면 할 수 있어. 여긴 조금 높기는 하지만."

 여름은 인하를 향해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다. 인하는 유난히도 그녀에게 약한 듯싶었다.
 나는 우리가 있는 2층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잘못해서 어디 부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거야 만약의 경우고, 지금이라도 가자면 갈 수 있잖아."

 인하가 말했다. 나서자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점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 바깥에 누가, 얼마나 있을지, 그러고 있으면 들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지만 근처의, 밤공기가 내려앉은 곳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여기저기 자라있는 풀 속에 숨어있는 것인지, 풀벌레 소리만이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서 있는 세 명의 침묵은 곧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정민 씨한테 이야기부터 하고, 정리하고 나서자. 더 있어봤자 좋을 것도 없겠어. 솔직히, 회사니 코뮌이니 하는 것들은 제쳐두고 생각해도, 사흘 후에 온다고 해서 그 사흘 동안 가만히 기다려야 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끌리지 않았는지, 여름의 말에서는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 흘렀다. 다른 것보다, 사흘을 운운하면서 이유를 붙이고 있다는 것이 그랬다. 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이상 그런 말로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여름이 말했다.

 "그러면, 차는 뒷문 쪽으로 옮겨놓을게."

 그렇지만 혼자 그러고 오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바깥까지 따라가서 그녀가 차를 끌고 오는 것을 지켜보고는 같이 돌아왔다.


 "뭐하고 오셨어요?"

 탁자 근처에 앉아있었던 정민이, 현관으로 들어오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물음에 답을 붙이는 것이 난처하게 느껴졌다. 이 집을 비우는 것이 싫다고 했던 사람한테, 거기다 잠깐 동안은 여기 있겠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말을 바꿔 나가야겠다고 말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녀도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

 "생각해봤는데, 선생님한테서 온 전화가 아무래도 미심쩍었어. 그래서 회사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 회사에서 그런 전화를 걸도록 시킨 거라고 하면, 우리가 여기 있다는걸 그쪽에서도 알게 됐다는 거고, 그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잖아. 그래서, 일단 그 사흘 동안은 어디로 잠깐 피해있을 생각이야. 정민 씨도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여름이 말했다. 정민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혹해하는 표정을 띄웠다.

 "회사가 개입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어디가 미심쩍은 건데?"

 그녀가 물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너무 지나친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차원의 일인 것인데,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까지 설득한다는 것은 무리한 짓일 수도 있다.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열흘 넘게 시간이 걸린다는 게 이상해. 그동안 집에 한번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거기다 그런 일이 있으면서 어떤 일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던 것도. 선생님이 원래 전화도 끊고 어디 가는 일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 아무런 말도 안 하실 분은 아니었어. 솔직히 나로서는 무슨 말 못할 일이 있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 거기다 시기도 회사하고 코뮌이 다시 전면적으로 나오고 있는 때이기도 하고,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긴 하잖아."

 여름의 답에, 정민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순전히 가능성만으로 이어진 것이었던 데다가, 거기다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그녀의 입장까지 겹친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정민 씨도 잠깐 피해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사흘 후에 오시는 게 맞으면, 나나 정민 씨도 사흘만 어디 가 있다가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잖아. 굳이 여기 앉아서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나는 뭐라고 더 이야기하려는 여름을 손을 들어 말렸다. 우리가 더 댈 수 있는 이유 같은 것은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은 그녀가 그 이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잖아.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건 아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고,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기도 해. 그렇지만, 그런 가능성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네가 정 그러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사실 말릴 수도 없는 거고. 그렇지만……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걱정해준 사람한테 하기는 미안한 말이지만 말야."
 "하지만……."

 여름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이어져야 했을 말을 삼켰다. 나는 정민이 저녁 시간에 자기에게는 별 일 없을 것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 집에서 나오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집을 지키려 한다는 것은, 따져보면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분위기를 끼워 넣어보면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중에 별 일 없으면 다시 와."

 그녀는 뒤로 손을 들어보였다. 내게는 그것이, 이제 그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 라고 하는 명백한 거절처럼 보였다.


 우리 셋은 다시 내 방 안에 모였다. 그 전화가 미심쩍다는 것은 단순히 가능성을 가지고 추측한 것이 아니냐고 했던 정민의 말은 옳았다. 사실 굳이 나에 대한 회사나 코뮌의 움직임과 이경진의 행방불명을 엮은 것도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했던 것이다. 그런걸 가지고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떠든다는 것은 정민의 입장에서는 우스워보였을 수도 있다. 우리끼리 생각하고 말을 맞추다보니 우리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겠지.
 결국, 결론은 내가 예전부터 했었던 생각의 반복이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이 단순히 별다른 근거도 없이, 말이 되는 것 같은, 그러나 딱히 그렇지도 않은 가정들을 위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나는 그런 애매한 근거들만 가지고 떠들썩하게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았던 그것을 어느 순간엔가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코뮌이나 회사를 가정에 자연스럽게 집어넣고 있었다. 원래는 그 둘의 존재 자체도 미덥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주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의 흐름에 별 생각 없이 발을 담그고 있었던 게 아닌가.

 "어쩔 거야? 이제……."

 흐르고 있었던 정적을 깨고 인하가 말을 꺼냈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는 물음을 얼마나 반복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이 참 답답한 물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르게 대체할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민 씨가 그렇게 나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만이라도 움직이면 될 거야. 그런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인하가 바로 다음 말을 재촉해왔다.

 "그런데?"
 "정민 씨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우리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과민반응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수현 씨가 회사하고 코뮌에 쫓겨 여기 왔다는 것하고, 이경진이라는 분이 일주일 넘게 행방불명이었다가 오늘 전화를 했다, 그것 밖에 없는 거야. 그 두 가지가 지금이라도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어진다는 게,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조금 손해보고 마는 정도면 장난이다 치고 넘길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잡히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런걸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거지."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가 처해있는 현실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아닐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미약한 가능성들만을 맞춰서 생각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혼자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말까지 듣고 나서, 나는 생각을 추슬렀다. 여름이 말했다.

 "뭐, 그래도 서두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오늘 밤까지는 쉬었다가 나서도 되겠죠. 정말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거면,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조금 여유롭게 간다고 해서 큰 일이 나지는 않더라고요. 경험상."

 그러면서, 여름은 인하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물론 인하는 평소보다 한참 일찍 일어나 줘야겠지만."
 "언제쯤에?"
 "6시쯤?"
 "……그냥 밤새는 게 낫겠다."
 "그래도 되고."

 여름은 다시 내게로 이야기의 방향을 옮겼다.

 "그리고, 오늘은 이 방에서 같이 자요. 혼자 있어서 좋을 건 없을 거 같으니까……."

 그러면 아마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어버렸더라, 그런 일은 없겠지. 그렇지만 침대 하나 밖에 없는 이곳에서 셋이 자기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침대가 조금 넓어서 두 명 정도는 올라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 명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럴 공간이 없을 거 같은데."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여름은 그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인하는 밤새우겠다고 했으니까, 인하만 바닥으로 내려가면 될 거예요."
 "그러는 게 낫겠다고 했지 그러겠다고 한 적은 없거든?"

 표정으로 보아하니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결국 그걸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역시 둘 사이에는 천적 관계 같은 게 성립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인하와 여름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서 가져왔다. 사실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는 동안 나도 챙겨야 할 것을 적당히 꾸리고는 노트북을 켰다.

 "여기까지 가져온 거야? 하여간……."

 인하는 그걸 보고 결국 한마디를 해버렸다.

 "뭐하려고?"

 메모장을 띄워놓은 채로 노트북을 침대 옆의 작은 탁자에 올려놓고는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특별히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그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길래 나는 딱히 설명을 하지 않고 기다려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녀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꿈 내용을 써놓겠다고 노트북을 켜놓는 건 너 밖에 없을 거다. 아마."
 "딱히 뭐, 종이도 없고 하니까……."

 나는 노트북을 켜놓는다는 생각을 종이에다 쓴다는 생각보다 먼저 했으니까,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이었다. 여름이 한마디를 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 꿈도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한데 말예요."
 "의식 관련 연구에 해박한 입장에서, 소감은?"

 인하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안 해박해. 그리고 그냥 그 꿈 이야기만 들어서는 뭔지 모르겠어. 어떤 이미지들이 나왔는지 알면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저 꿈 이야기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생각해준다는 것이 문득 고맙게 느껴졌다.
 결국은 인하와 여름 둘 다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미안한 느낌이 들어 괜찮겠느냐고 물어봤지만, 둘 다 이불을 깔아놨으니 괜찮다는 정도로 이야기 할 뿐이었다.
 잠이 금방 들지 않아 일어나 창가를 서성였다. 내가 온 이후로 지금까지 이 방의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도, 이 방 안과 다를 것 없는 어두움이 짙게 들어차 있었을 뿐이었다. 이곳도 가로등이 적은 거리에 맞닿아 있었고, 그나마 떠올라 있는 보름달이 그림자조차 없었을 거리에 명암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로 뛰어내리면 좋을지 보는 거냐?"

 그러는 나를 보고 인하가 물었다.

 "비슷해. 그런데 여기는 별로 안 좋을 거 같다."

 시간은 이미 한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침대로 돌아와 앉아 둘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은 어느새 잠들어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을 흘리고 있었다. 인하는 어느 순간부터 자리에서 뒤척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여름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야 말았다. 그러고 있다가, 어쩐지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 여름에게 걷어차여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이번에도 꿈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수많은 이미지들이 다가왔다가 사라져갔다. 나는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섰다. 내가 디디고 있는, 아니, 디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 위에 그대로 굳어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이미지들은 불친절하게 지나갔다.
 나는 꿈속에서도 그걸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깨고 나서 꿈이 섬뜩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개연성 없는 꿈을 꾼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꿈속에서 내가 지켜본 이미지들 자체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였다. 여름과 인하는 여전히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나도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가, 간신히 켜놓은 노트북을 생각해내고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키보드를 눌러 메모장에 짤막한 단어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를 지나쳐간 이미지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내가 기억해내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 중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우산, 층계, 사다리, 나선계단, 낭떠러지, 모자, 건물, 칼, 벽, 식탁. 내가 꿈에서 기억해내 써놓은 이미지들이란 그런 것들이었다. 어제나 그저께 그랬던 식으로, 그 이미지들이 전체, 혹은 부분적인 사진처럼 보이거나, 혹은 그런 단어 자체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하는 그 단어들의 목록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전부 프로이트가 보면 좋아할 단어들이네. 다 남성 상징 아냐."

 그건 그랬다. 이미지, 즉 상징이 나타난 방식이 특이하기는 했지만, 상징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런 정도의 의미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그저 하고 많은 꿈 중 하나였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고, 잠깐 뜸을 들인 다음에 여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꿈이 이런 식으로 명확한 상징들을 이렇게까지 많이 나열해놓을 리 없어. 그러면 이건 상징이 아니라 명백한 은유가 되어버리니까……일부러 의도하고 짜 맞춘 것처럼 나타내는 게 너무 명확해."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런데……."

 그 목록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것이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착각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 단어들만 가지고는 더 해석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요즘 남자가 필요하느냐는 식으로 인하가 두고두고 써먹지나 않을까, 그런 생각이나 잠깐 했다.
 그러고 나서, 침대 앞쪽을 바라봤다가, 별이 빛나는 밤, 그 그림과 마주쳤다. 유화 물감의 거친 질감 위에 그려진 소용돌이가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고,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에 대해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득 그 그림이 저렇게 어두운 빛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작이다 보니 색조가 다른 정도는 있을 수 있을 터다. 그렇지만, 그래서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어두워 보였다. 일부러 어두운 빛깔로 칠한 것처럼.

 "다른 방에도 저런 액자가 걸려있어?"

 내가 그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둘은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액자는……없었는데."

 인하의 답을 받아들고도 마땅찮아 나는 방에서 거의 뛰쳐나오듯 나와 인하와 여름의 방을 각각 열어보았다. 확실히, 그 둘의 방에는 그림 같은 건 걸려있지 않았다. 따져보면 그건 특별히 이상한 사실이 아니다. 어떤 방에 그림을 걸어놓는다거나, 걸어놓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주인의 자유인 것이니까.
 갑작스럽게 뛰어나간 것에 당황했는지, 인하와 여름은 나를 따라 나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그림?"

 인하는 그렇게 묻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저 그림 때문이라는 거야?"

 속으로는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인하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입체파 그림도 아니고, 고흐 그림 때문에 그런 꿈을 꾸지는 않을 거 같은데."
 "아니, 그래도 저 그림……이상해."

 그림을 바라볼 때마다, 그 그림이 여백을 남기지 않고 시야를 빼곡히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왜 진작부터 그것이 꺼림칙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그림 앞에 다가가 서서, 소용돌이치는 유화 물감의 흔적을 다시 따라가 보았다. 색조가 어두운 것 빼고는, 그림 자체가 그리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액자의 아랫부분을 잡고 벽에 박혀있었던 못에서 액자를 들어올렸다.

 "갑자기 왜 그래?"

 인하가 제지했지만, 나는 끝내 액자를 벽에서 떼어냈다. 물론 액자 뒤에 무언가가 있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액자 바로 뒤편의 하얀 벽지 위에, 문구 하나가 매끄러운 필기체로 쓰여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석한 이 세계에서 왜 불안해하는가, 라고.

 "두이노의 비가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장에 비슷한 문장이 있기는 하지만……조금 달라."

 인하가 말했다.

 "고상한 취미네."

 그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액자 뒤편도 살펴봤지만 별달리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액자 뒤판을 열어 그 안을 뒤져볼까 했지만, 인하가 손을 붙잡고 말려 그것까지는 하지 못했다.

 "왜 그러는 거냐니까?"

 스스로도 지금 드는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일단 진정하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한참 생각을 가라앉히고 나서 말했다.

 "이 방, 이상해……."
 "이 방이 이상한 거면, 하룻밤 같이 있었던 저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야 할 텐데요. 그런 비슷한 꿈을 꾼다거나……하는 식으로."

 그 말은 사실이다. 이 방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뿐이라면 그 방에 같이 있었던 인하나 여름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이 방에 액자가 걸려있었다거나 그 뒤편에 글이 쓰여 있었다거나 했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다는 의미인 것일까.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정말 과민반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쓰여 있었던 문장을 읊어보았다. 그 글을 따라가던 입술은, 한 단어 앞에서 잠깐 멈췄다.

 "해석이라……."

 바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래, 의식 해석이네. 연구 주제라고 했잖아. 의식 해석."

 떨떠름한 목소리로, 여름이 말했다.

 "그건 맞지만요, 굳이 거기에서 그걸 생각하실 필요까지는……."

 내가 말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 방이 원래 뭘로 쓰였는지 궁금하지 않아? 이 글, 그 이경진이라는 사람이 직접 쓴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이 방은 그 사람이 직접 쓰던 방이었거나, 아니면 그런 방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이런 글을 남겨놓고 액자를 걸어 가려놨다는 거잖아. 특별히 이 방에만 액자가 걸려있다는 자체가 이상해. 써놓은 것이 이경진이 아니라고 해도, 누군가가 이런 글을 벽에다 썼다는 것 자체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야."
 "그래, 이상한 건 맞아. 그런데,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반응할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인하가 말했다.

 "갑자기 액자를 떼려고 하길래 그 뒤에 정말 뭔가가 있다거나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 나도. 그런데, 그냥 글 한 구절일 뿐이잖아. 네 말대로 이상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이상한 것 까지는 아닌 거 같아. 거기다 이런 게 꿈에 영향일 미칠 정도는 아닌 거 같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는 했지만, 그걸 그 둘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몇 번이고 생각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이 방이, 정말로 이경진의 방이었다고 해보자. 아니, 그건 굳이 이경진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다. 이 방에서 머물면서, 그런 글을 벽에 남겨놓은 어떤 사람은, 그것 외에도 다른 흔적이나 단서를 방에 남겨놓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는 오늘 나갈 거니까요. 중요한 것이 아닌 이상……지체하는 건 별로 안 좋아요."

 당장 그런 흔적 같은 것을 내밀어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 그런 것이 이 방 어딘가에 남아있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걸 찾고 있었다가는 인하와 여름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짐 챙겨서 먼저 나가있어. 나는 잠깐만 더 정리하고 내려갈 테니까."

 둘 다 그 말에 편치 않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굳이 나도 같이 가야한다는 식으로 붙잡지는 않았다. 둘이 나가고, 그들이 층계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문을 닫아 잠갔다. 방에는, 바닥에 내려와 있는 액자와 나 밖에 없었다.


 침대 밑, 침대 옆에 있었던 탁자의 서랍 따위를 뒤져봤지만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벽지를 조금 뜯어내봤지만, 덧바른 것이 아니어서인지 바로 벽면이 드러났다. 막상 무언가를 찾아내려하니, 방 안에는 특별히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만한 것이 없었다. 침대, 탁자 하나, 그리고 액자, 붙박이장 하나, 그정도 뿐이었으니까.
 그러는 동안 나도 생각이 조금 가라앉았다. 내 느낌을 증명할만한 것이 없으면, 그 둘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 꿈이 섬뜩하기는 섬뜩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인하와 여름을 따라 건물 1층으로 내려갔다.


 그 둘은 1층에 있는 탁자에 모여앉아 있었다. 아직 정민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 6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하얗다기보다는 아직 파르스름한 빛에 가까웠다.
 인하는 내가 옆에 앉자마자 핀잔주듯 한마디를 했다.

 "특별한거 없었지?"

 그 말에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사실, 설령 그 방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고, 그것 때문에 그런 꿈을 꿨다고는 해도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와 그 방에서 잘 일이 없는 이상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혹시나 그 방에서 머물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주의 문구 하나 정도를 써서 남겨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아마 그 사람도 여름이나 인하가 그랬던 것처럼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이곳을 떠나가겠지.
 사실 그 둘 뿐 아니라, 나도 그 방이 이상하기는 이상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한참 착각해서 이상한 곳을 짚은 것이 아닐까. 내가 그 이상하다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거는, 내가 느꼈던 내키지 않는 기분과 지우개로 지워버리면 끝인 문구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지금 가실 거예요?"

 그때 정민이 나왔다. 우리는 말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은 들고 갈 거죠?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을 텐데."

 서둘러야 했다면 굳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가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을 향했을 때, 영하가 내려와 우리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자네들, 무슨 일 있나?"

 여름이 말했다.

 "저희는 지금 떠나려고요. 아무래도 선생님하고 회사하고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직 짐작이기는 하지만……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거기다, 이틀 후에 오시는 거면 그때 잠깐 다시 와서 뵙고 가도 될 테니까요."
 "그런가?"

 영하는 그 말에 조금 불안해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는 어제도 우리가 먼저 나서서 자기 대신 이야기 해주기를 바랐었다. 적당히 우리가 가봐야겠다고 말할 때를 기다려 자기도 끼어들 생각이었겠지만, 이경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이야기를 해버렸으니 이제 와서 우리를 따라 가봐야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로서는 곤란한 일 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곤란한 정도일 뿐이지 무슨 탈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우리가 특별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침 다음에 커피까지 한 잔씩 얻어 마시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의 일이 일이다보니 훌쩍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민이 딱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현관을 나와, 정문까지 정민과 영하가 따라왔다. 정문에 서서 우리는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 오시면 다시 오세요."

 우리는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아니,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훌쩍 떠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말로 이경진에게 별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같이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면, 가볼게요."

 여름이 인사를 마치자, 나와 인하는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우리는 그렇게 3층의, 적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뒤로했다. 3층. 나는 특별한 의식 없이 그 말을 입에 머금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건물의 3층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박영하라는 남자도 2층의 한쪽에 있는 방을 쓰고 있었으니까, 3층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고, 아마 아무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야! 윤수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말자 나는 정신없이 그 붉은색 건물 속으로 되돌아 뛰어갔다. 내 뒤로는 인하와 여름이 바짝 따라 뛰어왔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은 상관없었다. 다만 3층에 닿기 전에 그 둘에게 잡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뭐하는 거야, 갑자기……."

 나는 간신히 3층까지 뛰어올라서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 높은 높이는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지, 필요 이상으로 진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내 여름과 인하가 따라왔고, 그 아래로는 정민과 영하도 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인하는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뛰어서 정신이 없는 것인지 나를 붙잡고 어쩌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쓰던 방 바로 위에 있는 방문 앞에 서서, 정민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저기, 이 방은 뭘로 쓰고 있었나요?"

 그녀에게 물었다. 정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선생님이 평소에 어떻게 쓰고 계셨는지는……."

 그 방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대로 방문을 안으로 밀었지만, 무언가가 걸려있는지 더 이상 안으로 열리지 않았다. 나는 그 방문을 바로 발로 걷어찼다. 문 뒤에 있었던 의자가 그 충격에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방 안은 검고 푸른색의 유화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여러번 그 위에 덧칠을 했는지 벽에 들러붙은 물감들은 두껍고, 그만큼 거칠었다. 커튼은 걷혀있었다. 그렇지만 어두워진 실내를 밝히기에는 햇빛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 어두운 공간 속에서, 주의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방의 한가운데에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이 방에 그렇게 놓여있은지 시간이 상당히 지난 것 같아보였다. 아마도, 일주일 정도 지난 것이리라.

 "선생님……."

 정민은,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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