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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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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8 Mar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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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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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은 하릴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인하와 여름은 무심코 그것을 봤다가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영하도,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또한 이경진이 여기, 이런 모습으로 지금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건 부패해가는 죽음이었다. 거기엔 특별히 수사를 붙일 여지가 없었다. 우습지만, 나는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치워야 할까, 그런 것을 생각했다. 특별히 슬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허탈하다는 느낌만 한참 받았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정민이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감정이 아니라, 그저 그녀가 지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 썩어가는 공간이 그 꿈의 원인인 것일까. 그렇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걸로 내 의심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맞은편 창가에 기대섰다. 여름은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슬픈 일이라고 느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이경진이라는 남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다른 이들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간에 내게 그는 타인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의 죽음은 미디어에 떠도는 하고많은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런 소식을 마주 접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기도 하는, 그런 것.
 그렇지만 어쨌건 착잡한 것은 맞나보다, 싶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기분에 그렇게까지 장황한 수사를, 설명을 붙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가 정말로 타인이라면 착잡한 느낌이 들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굳이 그 이유를 따라가 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인하는 울고 있는 여름을 토닥이고 있었고, 영하는 걱정스레 정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 혼자 그 장면에서 두세 발짝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다시 1층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아무도 특별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에 무얼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니까.

 "일단 수습부터 하는 게 맞지 않겠나. 경찰에 연락도 하고."

 영하가 사태를 추스르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아마도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연장자로서의 책임 비슷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리 내어 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민은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전화는 도대체 뭐였을까요."

 그녀가 말했다. 어제, 우리는 분명히 이경진에게서 무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는지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일단 그가 살아있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녹음……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내가 말했다. 확실히 전화는 간단했다. 그때 정민이 했던 답으로 미뤄보면, 이 집에 초대한 사람이 있는지 묻고, 사흘 후에 오겠다고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통화에서는 상대가 반응할 답이 한정되어 있다. 거기다, 그 상대방의 성격을 알고 있다면 반응 정도는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전화는, 어쩌면 그가 남긴 유언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굳이 그런 유언을 남겨야 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자네, 그 번호로 전화해보지 않았었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통화는, 어제 왔던 그것밖에 없었지만, 그 전화가 온 다음에 그녀는 전화를 그쪽으로 걸어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꺼져있었어요."

 그런 식으로 전화를 거는 것이 가능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이경진이 어떤 식으로, 정해진 시각에 전화를 걸도록 해놓을 수 있었던 것인지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떤 컴퓨터에, 인터넷으로 전화를 걸도록 설정을 해놓는다거나 하면 가능한걸까. 그렇다면, 그 컴퓨터는 또 어디에 있는 걸까.

 "나도 이런 일을 당해보는 건 처음이라……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면, 경찰에 연락하겠네."

 정민의 승낙이 떨어지자,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경찰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경진의 죽음에 대한 말이 내게는 마치 일종의 선언처럼 들렸다. 어쩌다보니 경찰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기억만 생겨버린 나로서는 그게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찾아온 이들은 새까만 유화 물감이 무서울 정도로 두껍게 칠해져있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사체가 썩어가고 있는 기괴한 광경에 눈을 찌푸렸다. 경찰은 일단 자살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회사나 코뮌이라는 단어를 엮으면 타살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거기다 나도 더 이상 그 두 단어를 더 끌어다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 문제가 된 것은 나였다. 최초 발견자로서 내 행동 자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집에서 나오려고 하다가, 갑자기 3층을 보더니, 뛰어올라가서는 문을 열었고, 거기에 사체가 있었다. 이 과정 가운데에서 갑자기 뛰어올라갔다, 그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당사자인 나로서도 3층에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의심받기 딱 좋은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집에 온 것은 나흘 전이라고 하셨으니까요……특별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기는 합니다만, 저로서는 아무래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 어떻게, 바로 위층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여자의 직감 같은 걸까요?"

 남자가 물었다. 직감이라, 말끔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런 이유보다 특별히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 생각으로는, 바로 아래층이었으니까 명확하게 인식할 수는 없어도 어떤 이상한 기운 같은 게 느껴졌고, 그게 마지막 날까지 쌓여 있다가 그런 생각이 들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가능한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순전히 제 추측인 것이기는 하지만……그밖에는 좋은 설명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는 결국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의심스럽기는 했겠지만,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사건과 엮기에는 증거도 없었고, 나는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여기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물었다.

 "이경진이라고 하는 분하고는 잘 아는 관계였나요?"
 "아뇨, 전혀……."

 남자는 자신의 수첩에 정리한 것을 흘끔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어제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었거든요."
 "전화요?"

 그는 정민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어제 온 전화는 이 집으로 온 것이었으니 통화 기록을 보여줄 수는 없었고, 대신 그녀는 자신의 전화로 전화번호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숫자들을 자신의 수첩에 받아 적었다.

 "네……조사해보겠습니다."

 이미 자살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더 이야기가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리 특이할 것도 없었는지 조사해보겠다는 그 말을 끝으로 그에 관해서 특별히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특별히 더 지체하지 않고 집에서 나갔다.


 경찰이 돌아가고 나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럴 때는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적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그건 아마 다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도, 스스로를 그런 처지에 가져다 놓고 억지로 견디려 하는 것이다.
 정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그 방의 위치가 중요한걸까요?"

 나는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건 내가 느꼈던 일종의 직감을, 스스로에게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이유와 같다. 그 방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 위에 있는 방으로 쫓아 들어간 것이지만, 정말로 그 방 자체에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방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이상한 감각을 느낀 것인지 하는 건 아무래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른 방이 아니라 그 방에 수현 씨가 있었던 게 문제라면, 짚이는 게 있어요.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를 아직까지 안 했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이 나가시기 전에, 저한테 집을 맡기면서 부탁하셨던 게 있어요. 일이 있으니 잠깐만 맡아 달라, 사실 그 밖에 특별한 이야기는 안 하셨어요. 그런데, 하나 부탁하셨던 게……수현 씨가 오면, 지금까지 수현 씨가 있었던 그 방을 내주라고 하셨어요. 그게 좀 이상해서, 그 윤수현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윤수현 씨가 맞느냐고 물어봤었는데, 맞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사람이 여기 올 일이 없을 텐데……싶었죠. 수현 씨는 우리에 대해서 모를 테니까. 그런데 그때는 그냥 넘겨버렸어요. 그런데 정말로 온 거예요. 수현 씨가."

 그렇다면 그는 내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걸까. 그리고 정확한 시일까지는 알 수 없었겠지만, 정민이 이 집을 맡아서 기다리고 있을 동안, 즉 근시일 내로 여기 올 것이라는 것 정도까지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 터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이상했죠. 수현 씨는 초대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기 오리라는 걸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그러고 나서 어제 전화도 그랬어요. 여름이하고 박영하 선생님이 오셨는가, 그걸 묻고 나서, 수현 씨가 여기 왔는지를 묻는 전화였어요.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면 됐다, 사흘 후에 가겠다, 그런 이야기만 하시고 나서 전화가 끊겼어요. 어제는 그때는 말을 못했지만요. 미안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일이 있고나니까 지금은 아무래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집을 맡겼던 그 때부터,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 텐데, 대체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는지……."

 회사와 그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첫날부터 했었던 이야기다. 달라진 부분은, 나와 회사, 코뮌 사이의 일과 그와 회사의 관계가 평행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 교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 터다. 그래서 그는 내가 회사, 혹은 코뮌에게 쫓겨 이곳까지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그렇다면 회사는 도대체 누구를 쫓고 있는 것일까. 이경진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은 깨끗하게 어긋나버렸다.
 그가 나를 굳이 그 방에 있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그 방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뒤져본 결과 특별한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어두침침한 빛의 그림과 문구 하나가 다른 방과 그 방을 구분하는 유일한 특징이었다. 아니면 그가 자살한 곳의 바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치기였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목적 같은 것 없이, 그저 어쩌다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설명을 붙이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아주 없을지도 모르는 이유 같은 것을 언제까지고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방에 뭔가 있었나?"

 내 방을 봤을 리 없는 영하가 물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한번 찾아보세. 다시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이미 그런 이유로 한번 뒤져봤었다고, 그런 말이 입까지 올라왔지만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해도 다들 그 방을 한번 헤집어놓고 나야 마음이 풀릴 테니까. 나는 앞으로 나서는 이들을 따라 2층의 내가 쓰던 방으로 올라갔다. 그 바로 위에 한 층이 더 있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민과 영하는 내가 쓰던 방을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여름은 이제 조금 진정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내키지 않았는지 방 한쪽에서 인하와 같이 서서는, 바닥 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영하는 방 한쪽에서 내려놓은 액자를 찾아냈다.

 "액자는 원래 이렇게 되어 있었는가?"

 그가 물었다. 나는 간단히 부정했다.

 "아뇨. 뒤에 꼭 뭔가 있는 거 같아서 잠깐 내려놨어요."
 "뭔가 있는 것 같았다고……?"

 말 대신 그림이 걸려있었던 벽을 가리켰다. 물론 그곳에는 여전히 펜으로 쓰인 짤막한 글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걸 읽어보고 나서야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걸 붙들고 늘어지자면 자못 의미심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특별한건 없는 것 같은데요……."

 한 바퀴 돌아보고 난 정민이 말했다. 나도 나름 뒤져본다고 뒤져봤으니,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눈에 띄기는 어려울 것이다. 침대 한쪽 구석에 걸터앉았다. 무엇보다 조금 쉬고 싶었다. 여전히 이 방에서는 내키지 않는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신경을 날카롭게 갈았다.

 "굳이 수현 양에게 이 방을 주라고 했던 거니까 말일세, 수현 양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게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로 모르겠나?"
 "그냥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것 밖에는……."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라거나, 하는 따위를 여기 가져다 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게 여기 있다고 해도 그의 얼굴조차 모르는 내가 그걸 그와 연관 지을 수 있을까. 그것부터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왜 자살하신 걸까요……."

 이제 와서 알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확언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나는 결국 그런 것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가 그 방에서 자살한 이유는, 이 건물에 그 방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 같은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도록 지어내지는 게 아닐까. 그 이유라는 것은, 단지, 마지막 계단 하나를 오르도록 도와준 것 정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는 말이 아닌가. 착잡한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냥 드는 생각인데요,"

 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여 있다. 어지러웠다.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한 하려는 것이 나라는 감각이 그리 강하게 들지 않았다.

 "제 느낌이 단서라면, 제 의식을 읽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말을 꺼내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들도 그런 생각을 이미 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로는 꺼내지 않은 것일지도. 그건 그 의식 해석이라는 연구에서, 해석에 참가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하고 비슷한 선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닐 거 같네만……."

 영하가 말했다.

 "거기다, 자네의 생각이 낱낱이 알려진다는 것도……싫은 일이잖은가."
 "글쎄요, 전 괜찮을 거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어차피 이전에 의식 해석을 시도했었다고 하니까,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뿐이지, 그 내용에 관해서는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와서 굳이 가려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심층 의식 까지는 하지 말고, 일단 표층 부분만 시도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일단 지금 느껴지는 정보부터 해석해서 정리하는 정도만 해도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민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서는 조금 다급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게 아닐까. 나는, 그 심층이라거나 표층이라거나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어떻든 괜찮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난 솔직히 반대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 괜찮다고는 하지만, 아예 안 하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그런데도 그런걸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인하였다. 정민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동안, 여름도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네.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굳이 하실 필요는 없거든요……표층 부분만 탐색한다고 해서 사적인 부분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해본다고 꼭 뭔가가 나오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녀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다. 목소리도, 당장이라도 울먹일 것 같이 위태했다. 나는 그 둘에게로 향하는 정민의 날카로워진 시선을 느꼈다. 그 둘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는 듯 보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꺼낼 때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망설여진다고 할까, 떨떠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하가 물었다.

 "무슨 책임감 같은 거 느끼는 거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런걸 느낄 리는 없지 않은가. 확실하게 그러고 싶은,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크게 나쁜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손해 보는 짓이라고 해도 말이다.
 정민은,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채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인하나 여름하고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별로 상관없으니까, 빨리 해보죠.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참……이해하기 힘들어."

 인하가 말했다. 아마 더 이상 나를 말릴 말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겠지. 나는 장난삼아 웃었다.

 "뭘 이해하려고 들어."

 그녀가 한층 더 딱딱하게 굳은 시선을 보내자, 나는 한참 멋쩍어졌다.

 "괜찮아요? 정말로?"

 여름은 재차 물었다. 다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자니 그것도 어색한 느낌이었다. 아마 의식 해석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모르니까 이럴 수 있는 거겠지. 나는 그 부조화에 굳이 그런 레이블을 붙여보았다.

 "상관없지 않아? 누가 아는 게 문제면 인하 정도만 같이 있으면 될 거 같은데……."

 절차나 방식 같은 것을 모르는 나는, 의식의 내용을 입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일단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말을 듣는 것이 인하뿐이라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다들 그 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사자가 되어버린 인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왜 하필 나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을 거고, 아무래도 네가 제일 믿을 만 할 거 같아서."

 어쩌면 내가 잘 모르는 영하나 정민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둘의 이름보다 그녀가 먼저 떠올랐다는 것은, 은연중에라도 그녀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이제 와서 그걸 뒤엎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여름은 주머니에서, 예의 그 금속제 통을 꺼냈다. 거기에는 여전히 하얀색 알약이 몇 개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걸 내게 내밀고, 내가 알약 하나를 집어 들기까지 기다렸다.

 "이거 원래 이런데 쓰는 거였어?"
 "주목적은 아니지만, 표층 의식 해석 정도에는 쓸 수 있어요."

 여름은 그 통을 도로 집어넣고, 바닥에 놓여 있었던 그림을 다시 벽에 걸었다.

 "일단 이 그림이 문제였던 거 같으니까……침대에 앉아서,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혀 아래에 넣고 녹이세요. 그리고, 좀 써요."

 나는 그 알약을 혀 밑에 넣었다. 내가 니트로글리세린을 쓸 일도 없었고, 그런 식의 약은 처음이다 보니 혀 밑에 알약을 집어넣고 있는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약은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녹아갔는데, 이 맛에 조금이라는 한정사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썼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그 방법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단순해서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의식, 그중에서도 억제 기제가 약해져요. 별로 통제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이제 평소에는 억압되어서 나오지 않던 것들이 말로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되는 거예요. 말 하는 건 몸이 알아서 할 테니까……."

 그녀가 말했다.

 "일단 인하만 빼고, 밖으로 나가죠."

 여름을 따라 정민과 영하는 방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 위에서, 벽에 기대 그 어지럽고, 어두운 빛이 가득한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바로 옆에는 인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 시선이, 마치 렌즈를 하나 통과한 상처럼 조금 멀리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의식이, 억제 기제가 약해진다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과정이었다. 나는 잠에 들 때 그러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의식의 내용이 뚜렷해지는 쪽에 가까웠다. 어지럽다는 느낌이 그 위에 겹쳐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들지 않던 감정들이나 생각들이, 복잡다단하게 엮이고 섞여 하나의 사슬을 이루고는,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문득 내가 세 번 꿨던 꿈을 떠올렸다.
 순간 눈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눈시울이 아니라, 무슨 불 근처에 있는 것처럼 눈동자 자체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선이 순간 하얗게 바스라지고, 대신 하얀색, 눈부시지도 않고, 빛은 없고, 다만 색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인 그것이 눈 속을 대신 채웠다.
 나는 앉혀놓았던 내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어딘가에 기대 앉아있는다는 것도 정말이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원통형의 건물 내부를 나선계단이 감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 공간의 지름은, 짐작이지만 50 미터는 넘어보였다. 건물의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은 어두운 내벽으로 가로막혀 있을 뿐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는 일단 출구부터 찾았다. 여기가 1층이라면, 여기 어딘가에 문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문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건물과 나선 계단은 지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이 밖으로 나가야겠다 싶어서 나는 그 나선 계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내부는 어두웠다. 창문도 하나 없었고, 빛이라고는 계단을 따라 간간히 붙어있는 먼지 낀 전등들 밖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전등에는 보통 칠해져있는 유백색 코팅 같은 것이 없었고, 필라멘트가 유리를 통해 바로 보이고 있었다. 주황색으로 달아오른 그 필라멘트는 바라보고 있자면 너무 눈부셨고, 그에 비해서 어딘가를 비추기에는 너무 희미했다.
 이 원형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는 은근히 차가웠다. 공기는 이 안에 갇혀 멈춰있었고, 그러니 차가운 공기가 내부를 휘젓고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둘러싸여 있자면 어쩐지 점차 체온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벽면을 짚어보았다. 암회색 빛의 벽은 칠 하나 없이 드러나 있었고, 간간히 부서지기라도 한 것인지 흠집이 나 있다거나, 돌조각 같은 것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곳곳에는 내가 딛고 선 바닥부터 내 바로 위의 계단까지 균열이 나 있기도 했다. 짚었던 손을 떼보니 먼지가 여기저기 묻어나왔다. 손을 털고는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그 지름만큼이나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계단에 올라서기 시작한 점을 기준으로 층을 세보기로 했다. 사실 이 건물에서 층을 나눈다는 것은 무척이나 인위적인 짓이었다. 단지 계단만이 있을 뿐, 이 주위에는 방도, 문도, 통로도, 그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이건 건물이라기보다는 어떤 구조물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나의 거대한 조형물에 가까웠으니까.
 계단의 넓이는, 잘못 디디기 쉬울 정도로 좁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디디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넓지도 않았다. 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물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1층, 2층, 아니, 10층, 11층을 지나면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지상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하에 있는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오로지 인공조명에 의존하고 있었고, 공기 하나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바깥으로 통하는 곳이라고는 그때까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문득 이 공간에 갇혀 마실 공기가 희박해져 의식을 잃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물론 그럴 때까지 살아있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계단을 오르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계단을 오르다보면 어딘가 출구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이 건물은 닫혀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쩐지 그 불안한 느낌에 점차 판단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꼼짝없이 여기 갇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죽는다는 것, 그건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 다가오는 죽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런 상상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만약 꼭대기까지 올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거든, 거기서 그냥 뛰어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단에 붙은 난간이 상당히 높기는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뛰어내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장 그것보다도 꼭대기까지 오른다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다. 계단의 경사가 낮기는 하지만 그 경사가 합해진 높이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고, 넓은 공간을 휘감아 돌다보니 걸어 올라야 하는 거리 자체도 상당히 길었다. 15층을 지나면서 기운이 빠져 계단에 그대로 걸터앉았다.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습했고, 이미 젖어버린 옷이 달라붙은 피부는 그만큼 빠르게 차가워졌다.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몸은 그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대신 남은 층수를 헤아려보았다. 10층이 더 남아있었다. 25층이라, 도대체 이런 무미건조한 건물, 아니, 조형물을 25층 높이까지 쌓아야 할 의미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나 같은 사람을 가둬놓기 위해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짓이지만.
 나가기 위해서나, 아니면 죽기 위해서도 어쨌건 가장 위층까지 올라야 했다. 나는 다리를 붙잡고 다시 계단 위에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24층에서는, 걸음 하나하나를 떼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한 층만을 남겨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어떻게든 걸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벽에 손을 짚고 기대 천천히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물론 이곳에서도 벽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고, 그 먼지 때문에 여전히 내키지 않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25층에 올라섰지만, 문이나 통로 같은 것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나선 계단은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올라, 천장과 맞닿은 부분으로 가까이 갈수록 계단과 천장이 가까워졌다. 한참을 더 계단을 따라 오르다가 도중에 하나 있었던 문과 마주쳤다. 철제이면서도 갈색으로 칠해져있는, 생각해보면 상당히 독특한 모습의 문이었다. 나는 일단 문손잡이를 잡아 돌려보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 다른 문이 있지는 않아 보았지만,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 문손잡이를 몇 번 더 돌려보다가, 아무래도 열릴 것 같지 않자 그 문을 손으로 두드려봤다.

 "거기 누구 없어요?"

 몇 번 그렇게 소리쳐 불러보다가, 별로 더 그러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아 대신 난간에 기대 가장 아래층, 회전하는 계단이 모이고 있는 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보통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볼 때 느껴지는 아찔한 현기증 비슷한 것에, 계단을 따라 돌며 하강하는 시선의 어지러움까지 겹쳤다. 나는 그 어지러움이 더 견디기 어려워 난간에 기댄 채로 바로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빨리 끝내야겠다 싶어서 다시 난간에 기대 올랐다.
 막상 이 난간을 올라 뛰어내리자니 그 높이가 만만하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갈수록 천장과 계단 바닥의 간격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난간은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난간을 짚고, 발 한쪽 끝을 올려보았다.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순간, 그 철문이 바닥을 끌어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면서, 조금 열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계단 바닥에 떨어졌다. 그 문틈으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당장 바닥에 부딪쳐 아픈 것보다도, 물론 그가 언제부터 내 모습을 봤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내가 하고 있었을 짓을 상상해보니 남보이기 싫은 짓이라는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뭐 하고 있어요?"

 그가 물었다.

 "아뇨, 그게……."

 그냥 이대로 죽을 생각이었다고 하면 깨끗한 답이 되겠지만, 당장 문을 열고 나온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오세요. 거기 그러고 있지 말고……."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로, 옷에 묻은 먼지를 어찌저찌 떨어내보고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그것에 붙어있는 건물과는 다르게 상당히 탁 트인 느낌이었다. 그리 넓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양 옆으로는 벽이 없고 대신 유리가 붙어있었다. 맞은편에는 또 다른 문이 있어, 아마도 저쪽으로 나가면 출구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당장에 뛰어내리려고 했었던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이런 간단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그러리라는 것을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너무 섣불렀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저쪽으로 나가면 되는 건가요?"

 나는 그 맞은편의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곧장 그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짧은 거리였지만, 방안이다 보니 신발을 벗고 나서, 그걸 다시 들고 그쪽까지 나가야 했다. 그는 탁자에 앉아서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를 멈춰 세웠다.

 "저기, 급한 게 아니라면 잠깐 이야기라도 할 수 없을까요."

 그를 바라보자, 그는 빙긋 웃었다.

 "여긴 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말이에요. 가끔 아무나 붙잡고 담아둔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가 있죠. 실례가 안 된다면……."

 나야 큰 상관이 없었다. 어쨌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특별히 급한 일도 없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적당히 이야기에 어울리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탁자의 한쪽 끝,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고, 나는 거기 앉았다. 그가 물었다.

 "점심 드실래요?"

 남자가 물었다. 지치기는 했지만, 특별히 배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세요?"

 그는 나를 그 자리에 앉혀놓은 채로 그 탁자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는 동안 창가에 다가가 보았다. 벽이 있을 자리를 없애고 그 대신 유리를 채워 넣은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가까이 다가가기는 무서웠다. 물론 쉽게 깨질 유리를 쓴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이 건물은 지하에 지어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쪽 옆으로는 내가 올라온 건물의 외벽이 보였고, 그 옆의 아래쪽으로는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도로와, 푸른빛으로 서 있는 가로수들이 보였다. 멀리에는 이 건물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높아 보이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아마 이 건물 자체가 시내에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 이해하기는 어려워졌다. 굳이 시내에 이런 구조물을 세워놓았다는 것은 더더욱 더 사치스러운 짓인 거니까.
 그 풍경들 모두에는 한 겹 비의 푸른 그림자가 가라앉아있었다. 유리창에 빼곡히 매달린 물방울들은, 그 순간에도 새로 내린 빗방울에 맞아 바스라지며 아래로 떨어져 굴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표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차가운 유리는 내 손이 닿자마자 하얗게 서렸다.
 그는 한참 음식을 차리더니 말없이 그것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로 해치운다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리고 굳이 다른 단어를 찾기 어려운, 그런 장면이었다. 그가 때때로 음식 하나를 붙잡고 있는 장면은 집요하게까지 보였다. 그러고 있는 모습을 마주보고 있자니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같이 앉아서 그러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를 아주 외면한 채로 유리창 근처를 서성이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배고프지는 않아도 그냥 그러겠다고 했을 것을.
 나는 의자를 빼어 앉아서는, 탁자에 깔린 보, 아니면 그 아래쪽에 내려놓은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보 테두리에 달려있는 레이스에 뚫려있는 구멍이 몇 개인지 세어본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의 점심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의 동작 자체는 조용했지만,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보다 신경에 거슬렸다. 물론 평소라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겠지만, 이 어색한 상황에 앉아 있다 보니 그런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민감해져 있었다. 그가 말이라도 조금 걸어주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는 끝까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나 또한 마찬가지로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것도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걸 끝내고, 그 남자는 나를 마주보고 앉아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앉은 채로 특별히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헷갈릴 때가 있으니까,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정작 그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러는 동안 그 남자의 모습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를 만난 적도 없었고, 그의 얼굴을 본 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 추측, 아니, 확신을 물음으로 꺼냈다.

 "당신이……이경진인가요?"

 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모습은, 사실 내가 상상했던 이경진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럼에도 분명 그가 이경진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쪽은 윤수현이겠죠? 물론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굳이 이렇게 물을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윤수현 씨, 아, 이렇게 불러도 괜찮을까요? 윤수현 씨라거나, 수현 씨라고 해도."

 이경진은 얼굴 가까이로 손을 들고는 휘저었다. 내 물음이 그가 원하는 이야기의 어떤 시작 같은 것이 되었던 것인지, 그는 갑자기 말이 많아진 것 같았다. 특별히 어떻게 불려도 상관은 없었으니까,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수현 씨, 사실 누구에게든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게 바람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 상대가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전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신 자신보다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정작 당신하고 직접 이야기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궁금했거든요. 당신 같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할 지. 아니면, 그런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을 것인지."
 "저라고 해서 그렇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큰 생각을 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말을 가지고 잠깐 따져보는 듯 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어쨌건, 이렇게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여하간 그러네요."

 아아, 네, 하는 식으로 나는 대충 대답했다. 굳이 더 나아가려고 해도 특별히 내가 답할 만한 말이 없었다. 그는, 오래도록 다른 사람과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나를 말로 몰아붙이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예전에는 당신이 남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내 프로젝트의 중요한 재료가 여자라는 사실이, 굳이 그걸 가지고 싫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뭔가 조금 아쉽게 느껴지더라고요."

 실험 대상자의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걸까, 내게는 그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건 별 상관이 없는 거 같네요. 오히려 당신이 여자라서 좋은 점도 있겠죠. 물론 성별이라는 것 자체가 무언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렇지만 어떤 성별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것은 그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크죠. 거기다가 성별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적다고 해도, 남녀라거나 하는 성별 구도 같은 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당히 크거든요. 원초적인 의미에서도 말입니다."

 특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남자가 이곳에서 혼자 있으면서 하고 싶다고 쌓아둔 이야기가 그런 것이라는 것이, 그리고 처음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것이라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그런데 수현 씨,"

 이경진이 말했다.

 "뭔가 제가 기억하는 인상하고 다르다 싶어서 보니까, 예전보다 머리카락이 길어진 거 같네요. 조금 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손을 어깨 위로 가져가 머리 길이를 재는 듯한 손짓을 했다.
 요 근래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이제는 상당히 길어져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 조금까지 내려와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길이를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사람 나름일 테지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길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글쎄요, 그런가요?"

 내가 물었다. 이경진은, 거의 확신에 찬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야기가 나왔으니, 제가 잘라드리죠."

 그는 한쪽에 있는 서랍에서 가위를 꺼냈다. 그러고는 내 뒤로 다가와 서서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더니, 거기에 가위를 대고 한 번에 잘라냈다. 나는, 어쩐지 이어져있었던 머리카락이 그렇게 끊겨나가는 순간을 지나칠 정도로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머리카락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걸 그대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쓰레기통. 나는 그 단어를 삼켰다.
 이경진은 손거울을 가져다가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걸 말없이 받아들고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머리카락은 이제 목 언저리까지 닿고 있었다. 그냥 대충 잡고 잘라낸 것이라 그 잘려나간 모습도 제멋대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어쩐지 우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가 가위를 들고 나섰을 때, 싫다고 말했다면 그걸로 괜찮았을 것이다. 아니, 굳이 그때 제지하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에게 따져 묻는다거나, 소리치기라도 하면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쩐지 나는 그러지 못했고, 지금 와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한 순간에 짧아져버린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좀 낫네요. 사실 전 긴 머리카락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긴 머리카락이 짧아지는 순간, 그 가위질하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단발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예요. 이렇게 잘라놓고 나니까, 수현 씨한테는 확실히 단발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 그런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가 말했다.

 "가위질하는 자체도, 그 느낌도 좋은 거지만 말이에요, 이 가위라는 물건 자체도 참 매력적인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잘 보면, 무언가를 잘라내기에 이만큼 효율적인 구조를 가진, 그리고 동시에 균형 잡힌 모습을 가진 물건이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런 모습의 가위는……뭘 특별히 자른다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그냥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죠."

 이경진은 내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썼던 은색의 큰 가위를 들고는, 내게 잘 보여주겠다는 듯 이리저리 기울여보였다. 그는 그 금속제 표면을 손가락으로 미끄러뜨리기도 하고, 뺨에 가져다대기도 했다가, 종국에는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이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그 가위를 핥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좋은데 말입니다……역시 가위는 무언가를 자를 때 가장 매력적인 법이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마땅히 자를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당신이 온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젠 당신에게도 자를만한 게 남아있지 않네요. 이거 참. 자른다는 게 이렇게 한 번에 끝난다는 게, 참 시원섭섭하죠. 여러 번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의 말은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른다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가위라는 물건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일단 아마도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에는 분명한 선후관계 같은 것이 없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갑자기 듣는 나로서는 하나도 내킬 것 없는 가위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이곳에 틀어박혀서 했던 생각이라는 게 성별 아니면 가위에 관한 것 밖에 없다는 것처럼.

 "그러면, 조금씩 여러 번 자르면 되겠네요."

 사실 그건 실없는 대답이었다. 가위라거나 뭔가를 자른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젠 사실 그와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넘기려다보니 나온 말이 그런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요. 일단 무언가를 자르면, 얼마나 잘랐건 간에 상관없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걸 다시 자른다는 건 불가능하죠. 이미 잘라내진 거니까. 그래서 수현 씨 머리카락을 자를 때도 고민했어요. 이걸 얼마나 잘라야 될까, 하고. 한번 자르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그런데, 다행이지만 딱 적당한 길이로 잘린 거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죠?"

 나는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가로젓는다거나, 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그런 것들, 내 의사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을 그렇게 잠자코라도 듣고 있어줄 상대가 있다는 것뿐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 남은 게……."

 이경진은 문득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것에 순간 움찔했다. 그는 탁자를 밀어 자기가 있을만한 공간을 만들더니, 내가 앉은 의자 아래에 앉았다. 그는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지는 못했지만, 일단 왼손을 같이 내밀어보았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는, 그 손가락 끝에 입술을 대었다가, 자신의 입 속에 넣고 혀를 가져다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굳이 이유를 붙이려고 하는 자체가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에도 끈질기게 내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기분 나쁜 짓이었지만, 나는 그가 그러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이제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경진은 내 손가락을 한마디 한마디씩 혀로 문질러 자신의 타액을 남겨놓고는, 그 다음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기분 나쁜 것보다, 간지럽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입술을 더 움직이려다 말고 내 손목을 잡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예의 그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여전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렇게 웃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 손바닥을 간지르고 나서는 일어나 돌아섰다. 내 손에는 그의 타액이 질척거린다 싶을 정도로 묻어있었다. 닦아내고 싶었지만 닦을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손을 의자 옆에 가져다놓고는 그의 타액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이경진은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탁자를 더듬어 가위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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