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7.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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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4 Mar 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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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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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가 했던, 무언가를 잘라내고 싶지만 자를 것이 없다는 말이나, 갑자기 내 손가락을 꼼꼼히도 핥았던 것, 그리고 지금 들고 있는 큰 가위를 나도 모르게 이어 붙였다. 손가락이라도 자르려고 하는 것일까. 머리카락의 길이를 가지고 취향을 논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손가락의 유무에 대한 취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건, 그는 그 가위를 집어든 채로 나를 돌아보고 있다. 나는 아직 그의 타액이 채 마르지 않은 손으로 의자 다리를 붙잡았다.

 "여기 들어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결론은 네가 죽는 것 밖에 없는 거 같단 말야. 이제야 생각났어. 머리카락 다음으로는, 너를 여기서 잘라 내버리는 방법이 있겠지."

 이경진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그는 그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는지, 집어든 가위의 한쪽 끝을 내 쪽을 향해 내밀었다. 가위 뿐이라면, 의자로 어떻게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만 해놓고는, 내키지 않았는지 가위를 탁자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렇지만……그런다고 별로 좋을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재미도 없을 것 같고……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지. 안 그래? 네가 살아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일말의 감상 같은 것 정도야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더니 그는 옷걸이에 걸려있었던 외투를 위에 걸치고, 모자를 집어 들어 썼다. 나는 의아하게 그가 그러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히려 그러고 있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 보고나서, 그는 모자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해도, 그걸 받아다 쓰고 싶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거기다, 애초에 그가 모자를 내민 이유조차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나갈 거 아닌가? 솔직히 그쪽이나 나나 더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고."

 그쪽이야 할 말이고 하면 안 될 말이고 전부 늘어놓은 것 같지만, 나로서는 아직 하고 싶은 말, 아니, 해야만 할 물음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가위를 들고 날 어떻게 해버리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떠드는 사람에게 그걸 꺼내놓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는 그의 말에 말로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말에 답할만한 말을 바로 찾아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거리를 조금 두고는, 그의 뒤에 섰다.

 "가져갈 텐가?"

 우산 하나를 집어 들고서는, 그는 내게도 우산 하나를 더 내밀었다. 거리가 있다 보니 그 우산을 받아들자면 한 발짝 나아가야 했다. 그러지 않은 채로 시간이 잠깐 지나고나니, 그런 구도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려줄 필요는 없어."

 그가 말했다.

 "거기다 필요할 텐데? 비 맞고 갈 생각인가?"

 그러고 보면,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만 생각했지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맞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서울의 어디쯤이라면 지하철역을 찾으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야 문제도 복잡해지겠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도 더 생길 터다.
 나는 겨우 그런 이유로 그가 내민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는 무표정했다. 생각해보면, 하는 말하고는 관계없이 그의 표정에는 감정이 그리 들어차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경진은 문을 열었다. 그 바깥은 비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로 자욱했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바깥에는 지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이곳에서 내려가는 계단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거기까지는 이 지붕을 건너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우산을 펼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나는 그를 뒤따라 나갔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리고 있었고, 굵은 빗방울들이 우산에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사실 굳이 그것을 우산에 한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지붕 위가, 아니, 주위 모든 곳이 하얀 장막에 둘러싸여 부서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이경진은 지붕의 한복판에 섰다. 가운데로는 좁은 통로 비슷하게 평평하게 되어있었고, 그 양 옆으로는 경사가 있어 끊임없이 빗물이 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붕의 색깔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파란색이었고, 금속제였던 탓에 유난히도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 아마도 맞은편에 있을 통로 같은 것을 찾아 걸어갔다. 중간쯤 걸어서, 그가 내 뒤에 있게 되었을 때, 이경진이 입을 떼었다.

 "출구 같은 건 없어."

 일부러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면서, 나는 지붕 끝에 붙어있었던 네모난 구조물에 닿았다.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쪽에는 문 같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나는 그것을 돌아 뒤쪽으로 가보았다. 그렇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이 아니었는지, 그 뒤쪽도 여전히 잿빛 벽돌로 막혀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주위에도, 하다못해 사닥다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딛고 선 곳이 아찔한 높이에 위치해 있었고, 그리고 내가 디디고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칫 잘못하면 바로 떨어져 내릴지도 모른다. 거기다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 더 잘 미끄러질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그런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말했잖아. 출구는 없어."

 그는 지붕 한복판에 선 채로 소리쳤다.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내려가죠?"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나는 그 말에서 현기증 비슷한 것을 느꼈다. 방금 전 건물 속에서 내가 했던 생각하고 꼭 같은 것을, 이번에는 말로 듣고 있기 때문이리라. 거기다, 이번에는 어쩌면 열릴 수도 있는 문 같은 것도 없었다. 정말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깥이니까, 열려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여긴 닫혀있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야. 미로에 출구가 꼭 있어야하는 건 아닌 것처럼, 이런 곳에서도 반드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지."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와 단 둘이서 갇혀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는 그 방에서 내가 그곳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니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혔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가 말했다.

 "그 미로 속에서 죽는 것 밖에 더 있겠어? 마찬가지로, 이 닫힌 공간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너 자신이 죽는 것뿐이지. 뭐, 굳이 자살하지는 않아도 결국은 죽겠지만……그건 좀 고통스럽겠지. 안 그래?"

 이경진은 이제 가위 대신 칼을 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지붕 한복판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의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것보다, 상대가 그 남자라는 게 싫었다. 나는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산이 무기로 쓸 만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잘하면 칼을 쳐내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산을 접고, 두 손으로 잡았다. 비가 옷을 적시는 느낌이 싫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다가, 나와 가까워지자 거의 뛰어들듯 다가왔다. 칼을 잡은 손을 제대로 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우산 끝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는지, 그는 우산에 맞고 움찔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는 정말 정신없이 우산을 휘둘렀던 것 같다. 결국 그가 칼을 놓아버리고 나서도, 이경진이 주저앉고 나서도 나는 미친 듯 우산을 휘둘러 그에게 내리쳤다. 우산이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버리자 그가 가지고 나왔던 우산으로 다시 내리쳤고, 그것도 부서져버리자 나는 그걸 지붕 아래로 던져버리고는 이번에는 다리로 걷어차 버리려고 했다. 그러다가, 소리까지 지르면서 그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워져 그만두었다.
 그는 쓰러진 채로 내가 연달아 내리치는 우산에 거의 몸을 내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휘두르는 우산이 얼마나 아팠을지는 상상이 잘되지 않았지만, 어쨌건 그는 인상을 뒤튼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정말로 죽이고 싶었으면……제대로 하라고."

 그가 나를 정말로 죽이고 싶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죽일 수 있다면 좋고,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금속성을 내며 바닥에 떨어져 굴렀던 칼을 집어 들고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섰다.

 "빨리 죽이는 게 좋을걸. 날 여기 살려뒀다간 너한테 좋을 게 없을 거야."

 이경진은 신음하듯 말을 쥐어짜냈다. 그렇지만 그러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니, 그 물음들을 모두 풀어내고 나서도, 내가 그에게 칼을 찔러 넣을 수 있을지 자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 동작 자체는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아무래도 그걸 해낼 자신이 들지 않았다. 마치 간단한 말 한마디를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때처럼.

 "당신, 왜 자살했지?"

 그는 가만히 웃었다. 이전처럼 비틀린 느낌도 아니었고, 그저 빙글빙글 웃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내가 이러고 있는 모습에 잠깐 쓴웃음 정도를 붙일 수 있었을 뿐.

 "너도 내가 굳이 자살한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왜 묻지?"
 "정말로 그런 게 없다면, 없다고 본인한테서 확답을 듣고 싶었으니까."

 이경진은 소리 내어 웃다가, 손을 조금 들어 허공에 휘저어보였다.

 "그래. 그런 건 없어."

 어떤 말을 듣기를 기대하면서,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정작 그 말을 들으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도, 이때까지 거기엔 별 이유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당장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웃기지도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우울해서? 그 정도 아니겠어?"

 그가 말했다.

 "왜 우울했는지……그런 건 묻지 마. 그렇게 묻는 게 무의미하다는 건 알겠지."

 처음부터 그 이상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 물음은 이제 그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그 이유에 매달려 말을 이어붙이는 것은 그 남자였다.

 "네가 정말로 싫어하는 게 있다고 해봐. 그걸 닮지 않으려고, 아니, 그게 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심초사하게 되는, 그런 게 있는 거야. 말이야 그렇지만 그런 게 너한테도 없을 리 없지. 그런데, 나는 의식을 해석하면서 그것하고 마주쳤어.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 잊고 싶었고, 없애버리고 싶었던 것이 내 의식 속에 있었던 거야. 아니, 물론 그게 있을 수도 있어. 이상한 것도 아니지."

 그 남자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가리켰다.

 "문제는 그게 나 자신 속에 틀어박혀서, 그걸 빼냈다간 나라는 존재가 산산이 무너질만한 것이었다는 거였지. 아니, 그런 말은 적당한건 아닌 거 같군……내가 가장 경멸하던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말이 더 나을 거야. 나 자신인데도, 그걸 나는 지금까지 싫어하고 있었던 거지. 그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거고."
 "혹시 그게 회사하고 관련이 있어?"

 나는 일단 가능한 한 이야기를 이어보려고 했다.

 "회사? 코뮌? 아, 그 친구들하고도 관계가 있기는 하지. 그렇지만 이젠 다 끝내야지. 안 그래?"

 어쩐지 그 이상 더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건 꼭 말라버린 풀을 붙잡고 다시 살아나라고 소리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실 별 관계 같은 것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쪽이 다행이기도 하고 말이다.
 우산을 박살내버린 후로, 나는 떨어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의외로 그것도 특별히 거슬리는 일은 아니었다. 점차 추워지기는 했지만, 옷이 질척거린다거나 무거워지는 것 따위는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런 구도 자체가 신경을 날 서게 하는 탓에, 사소한 것들은 거기에 눌려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죽은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그 질문을 망각하고 있었다. 분명 가장 이상한 것은 그것인데, 그가 끌고가는 대로 휩쓸려버린 것인지 지금껏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그와 내가 서 있는 이 장소도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물었다. 나는 흘끔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딘가의 도시 같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낯익은 풍경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로와 회빛 건물이 들어차있다는, 도시를 기술하는 몇 가지 아주 기본적인 특징을 제외하면 말이다.

 "모르겠는데……."
 "네 표층 의식이잖아. 물론 표층이라기에는 조금 깊고, 꿈에서나 봤을만한 곳일 텐데."

 꿈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런 풍경을 꿈속에서 본 적이 있었는가, 하고 기억을 거슬러봤다. 그렇지만 이미 기억이 흐릿해진데다가, 기억이라는 것이 끄집어낼 때마다 적당히 수정이 가해지는 만큼 그 부분을 정확히 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그러면, 내 의식에 왜 당신이 있는 건데?"
 "반응이 많이 누그러졌네. 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경진은 소리 내어 웃음을 씹었다. 조금 더 차갑게 쏘아붙일 수 있다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못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말이다. 나는 쓴웃음을 터뜨렸다.

 "별 거 아냐. 네 의식 속에 나를 집어넣은 거지. 그러면 다 설명이 될 거 같은데? 자살한 주제에 여기 살아남아서 도리어 널 죽이려고 들 수 있었던 건지."

 그가 답했다.

 "그러니까 빨리 죽이는 게 좋을 거야. 자기 의식 속에서 죽어버려서 다른 사람한테 의식 세계를 빼앗기는 게 싫다면, 아니, 그런 일이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 의식 속에 나 같은 게 있다는 게 싫지 않나?"
 "확실히, 당신이 내 속에 남아있다는 건 싫은데."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자살한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나야. 자기를 검열하고 절단해내는 것에 익숙하고, 그런 짓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나 자신이지. 그런 게 마음속에 이렇게 자리 잡고 있으면, 너도 결국은 거기에 물들어버릴걸?"

 내가 물었다.

 "그렇게 죽고 싶어?"

 그는 입 꼬리만 비틀어 올려 웃었다. 웃음소리를 낼 기운이 빠져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그런 웃음이었다. 나에 대해서든 그 자신에 대해서는, 죽거나 죽이겠다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사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건 특별히 필요나 의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불안정한 충동 같은 것에 순간 휩싸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금방 달라져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를 검열하고 절단해내는 나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주저앉고 버려지는 존재야. 그런 내가 죽는 건 운명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그런 자신이 죽기 전에 너 같은 대상을 죽이려고 들겠지만, 그게 실패하면, 그걸로 끝인 거고."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었어?"
 "글쎄, 네가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안간힘을 써서라도 널 죽일만한, 그런 강한 의지 같은 게 나한테는 벌써 없어져버렸어. 난 이미 많은걸 스스로 죽였고, 이젠 그러는데도 지칠 때가 온 거겠지."

 그는 표정을 굳히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칼을 다잡고, 그를 향해 들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칼끝이 덜덜 떨렸다. 무엇이 무서운 것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동정 같은 것이 무서움과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 속에 끼어들어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마지막까지 내가 해야 하는 건가……."

 이경진은 몸을 일으켰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 내가 든 칼을 자기 몸속으로 찔러 넣었다. 그 느낌은, 너무 쉽게 들어가는 것도, 그렇다고 간신히 꽂혀 들어갔다는 느낌도 아닌, 애매한 것이었다. 진한 피가 빗물에 맞아 바닥에 고인 수면에 맑게 퍼져나갔다. 그는 움찔거리면서 몸을 질질 끌고는, 경사진 지붕 곁에 섰다. 한 발짝, 한 발짝 그 경사를 따라 내려가다가, 결국에는 균형을 잃고 튕기듯 지붕에 부딪치며 그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의 몸이 그 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한번 시끄럽게 울렸다가, 그가 떨어지고 나서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도 남아 공기를 휘감다가 사라졌다. 대기는 다시 자욱한 비의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그 일련의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을 텐데, 아무 것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말로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기만 했을 뿐이다. 피가 들러붙은 칼은 아직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걸 바닥에 내던지고 나서, 나는 반대편의, 나선계단에 붙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이 몸과 옷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려 떨어졌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걸 말리고 있을만한 시간이 없으리라는 걸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방이 아닌, 어떤 계단 하나가 이어져 있었다.


 눈을 떴다. 나는 이불 깊숙이 몸을 기대 누이고 있었다. 그 따뜻한 느낌이 좋았고, 그래서 별로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서 결국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댔다. 조금 어지러웠다.
 옷이 물에 젖어있었다. 몸을 들어 올리는 순간, 어깨와 목에 걸려있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떨어졌다.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더듬어보았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있어야 할 머리카락이, 지금은 목덜미 근처를 간신히 덮고 있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고, 배경만 바뀐 건 아닌가, 그런 불길한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괜찮아?"

 옆에 걸터앉아 있었던 인하가 가장 먼저 물었다. 바라보면 그녀는 걱정했다는 표정을 자못 진지하게 짓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기도 하고, 재미있게 느껴져 나는 소리 내어 짧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걱정했다는데 웃기는 왜 웃어?"

 그녀는 나를 타박하면서 뒤로 쿡 밀었다. 그러는 것도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웃고 있었다간 정말로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인하 혼자만 두고 나가겠다고 했었으면서, 여름, 정민, 영하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뭐야……인하만 남겨놓겠다고 하지 않았어? 전부 이렇게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여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픽 쓰러져버리니까 그렇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야."

 몸을 더 세워놓지 못하고 기우뚱 쓰러졌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밖으로 뛰어나갔을 인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는 동안 여름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해도……."

 내가 답했다.

 "그냥 꿈을 하나 꿨어."

 결국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게 되어버렸다. 사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들 궁금해 하는 눈초리인데다가, 이 일 자체가 내가 해보겠다고 나섰던 것이니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꿈 자체가 난잡하지 않았고, 거의 일직선을 달리고 있었기에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어난 사건들을 나열해보니 전체적인 길이 자체도 그리 길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생각해내려고 하다 보니, 그러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했다.
 정리해보면 딱히 특별한 것이 나온 꿈은 아니었다. 그에게 조금 더 캐물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해도 그걸로 어떤 결말 같은 것이 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자살의 이유 같은 것이, 물론 큰 의미는 없다고 해도, 어떤 측면에서 정리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다들 나름대로 내가 했던 말들을 자기들의 생각에 맞춰보고 있는 듯 했다. 나야 현실에서의 이경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어서 더 나아갈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문득 정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꿈속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이라는 주제를 파고들었던 사람으로서는 아무래도 반가워하지는 않을 듯 했다.
 떨어져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주워들고 바깥으로 나와, 창가에 팔을 붙이고 섰다. 문을 열자 그 사이로 바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어지러웠던 중에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여름과 인하는 잠깐 방 안에 앉아있는 듯 하더니 밖으로 따라 나왔다.
 인하가 말했다.

 "너 머리카락 어쩌냐."
 "어쩌긴 뭘 어째."
 "아까워서 그런다."

 나는 그냥 가만히 웃고 말았다. 지금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에서 대충대충 잘려있었던 머리카락의 모습을 봤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거야 다듬으면 될 테고, 짧다는 자체는 그다지 상관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대체 머리카락은 왜 잘린 걸까요? 아니, 자른 걸까요?"

 문득 여름이 말했다. 나는 괜히 한마디 했다.

 "옷도 젖었는데……."

 그렇지만, 비단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자른다는 표현이 반복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반복된 만큼 아마도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겠지. 금방 떠오르는 것은 여럿 있었지만, 역시 바로 떠오르는 생각은 일단 제쳐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절단이야 꿈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니까. 그게 너무 직접적으로 나왔다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하지만."

 내가 말했다. 인하가 그 말을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꿈은 아니지. 그보다, 막연한 말 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더 문제일 것 같은데."

 모종의 문제가 있었고, 그게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내몰아갔던 것이고, 그리고 내게 남아있었던 그의 모습은 그 심리적 문제가 현현된 것이라고. 그가 시달렸었던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절단하고 규정하고 통제하고 검열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심리적 기제였고, 그것이 결국 그를 자살까지 몰아갔다고. 그렇게 정리해보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깔끔하게 해결이 되는 쪽이라고 해야겠지. 그렇지만 깔끔하면 깔끔할수록 그게 정말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단순한 결론이었으니까.

 "막연하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아니, 막연하기는 해도 맞기는 맞는 말일거야. 문제는 다들 알고 싶은 게 그런 막연한 사실 같은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추상적인 과정들을 만들어낸 사건들이 어떤 것인지 하는 것이라는 거겠지. 그렇지만 그런걸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걸 들춰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그냥 의식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우리 스스로 너무 지나친걸 바라게 하고 있는 거야. 보통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을 건데,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집착하는 거지."

 여름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옷은 괜찮아요? 많이 젖었으면 안 되는데……."

 일부러 그렇게 화제를 돌리면, 이전에 나왔던 화제들도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의 사정에 대한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이 정도나 알게 되었다고 신기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내가 말했다.

 "비는 한참 맞은 거 같은데 생각보다 젖지는 않았네."

 꿈에 있었던 일이, 마치 현실의 그것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것처럼 말하는 스스로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많이 젖어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고, 다만 옷이 전체적으로 축축해졌다는 정도였다. 그래도 바람을 맞고 있자니 추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슬쩍 창문을 밀어 닫았다.

 "그보다, 회사, 아니면 코뮌하고 관계가 있기는 있다고 말했다는 게 더 신경 쓰여요. 일단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건 확실하고, 그게 바로 이야기할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확실해 보이는데요. 뭘까요? 그게……."
 "미안. 그거 조금 더 캐물어볼걸 그랬어."

 그렇게 말하고는 별 생각 없이 멋쩍게 웃다가, 따져보면 그냥 넘어가기에는 큰 실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본다고 물어보는 게 일을 더 애매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최소한, 이젠 끝내야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물어봤어야 했다.

 "……확실히 그랬어야 했을 거 같다."

 인하가 말했다.

 "그, 이젠 끝내야한다는 말이 걸리는데……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까지 회사가 자신을 쫓았던, 그런 관계를 끝내겠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과 새로 정립한 어떤 관계를 끝내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거야. 전자라면 자살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진데……문제는 후자겠지."

 내가 답했다. 그 부분은 사실 지금까지 이경진과 회사와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는동안 문제가 됐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 꿈은, 그 의심의 대상이 실체가 있는 것이라는 것 정도를 확인해줬을 뿐이다. 무언가 관계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쨌거나 우리에게 좋을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어쨌건, 아무래도 좋은 일은 아닐 거 같다."

 그래서, 내 결론은 그 정도였다.

 "어쩔까? 다른 곳으로 옮길까?"

 인하가 물었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 그렇게 하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고속도로 어딘가에 올라가 있겠지. 이경진의 자살이라는 것이 어떤 전환 같은 것이 되기는 했지만, 그건 어떤 해결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대로 훌쩍 가버리는 건 아무래도 그렇지 않아요?"

 여름은,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굳이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경진과 나는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특별히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여기 있는 동안 한정민에게 신세졌던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터다. 회사 쪽에서 들이닥친다고 해도 우리 몸을 빼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결국 한참 따지기는 했지만 인정 비슷한 것에 얽매이는 쪽으로 기울어버렸다.

 "서두를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아."

 인하나 여름도 그렇게 그럭저럭 동의했다.
 문득, 인하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면, 수현이를 굳이 이 방에 있게 했던 건, 환경을 의도적으로 배치해서 자기의 의식을 집어넣기 위해서였을까? 그 꿈에 그 사람이 나왔다는걸 보면 말야."

 인하가 말했다.

 "그렇겠지. 의식을 해석한 데이터를 갖고 있었을 테니까, 수현 씨의 의식의 구조에 맞춰서 의식에 어떤걸 써넣도록 환경을 구성할 수 있었겠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작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이 답하자마자, 인하는 재차 물었다.

 "의식 속에서도 그렇게 죽으려고 할 거였으면서, 굳이 의식 속에 집어넣으려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그것도 다른 게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나 싫어했다는 모습을 말야."
 "유서 같은 게 아니었을까?"

 내가 말했다. 인하는 잠깐 생각해보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서치고는 지나치게 섬세하지만, 어쨌거나 유서를 남기는 이유와 이런 일을 꾸민 이유는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굳이 전화를 한 이유는 또 뭘까요? 사흘 후에 돌아오겠다고 한 이유가. 그리고, 수현 씨가 여기 올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유서라면……와서 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여름이 말했다. 이것도, 이전에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었던 부분이었다. 일단 회사 쪽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경진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집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경진은 나름대로 우리를 이곳에 잡아둘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 전화 이후로 사흘 동안, 아니면 사흘 이후 어느 시점에 작동하는 어떤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 올 것을 예측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어쨌건 회사와 코뮌을 피해 여기 온 것이니까, 아마도 그가 회사나 코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이전에 했던 추측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자살한 이상 그런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그는 자살하기 전에 회사, 그리고 코뮌을 끌어들여 내 쪽에 붙이고 나를 이곳에 오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 지나치게 불확실한 방법이고, 유서치고는 너무 거창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능한 시나리오이기는 했다.
 그 때, 근처에서 차가 여러 대 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여름은 창문 너머로 건물 주위를 살펴보았다. 차 여러 대가 건물 울타리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마치 관광객인 것처럼 차려입은 사람들 여럿이 내려 이 건물의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왔네요."

 여름은 지체 없이 예의 알약을 꺼내 입 속에 넣고는 고개를 젖혔다. 정민과 영하도 뛰어와 창문 바깥을 바라보더니, 그들의 시선에 더 이상 띄지 않도록 바로 옆의 벽에 붙었다. 초인종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 층으로 내려갔다. 정민은 가만히 정문의 초인종에 있는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 앞에 섰다. 그 옆에 있었던 우리도 정문에 서 있는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민 씨, 나야."

 상대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회사에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민은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다가, 결국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영하가 소리쳤다.

 "자네들은 빨리 피하게!"

 그는 떨고 있는 정민을 거의 떠밀다시피 해서 나와 인하에게 맡겼다.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던 여름도 손짓해 우리들에게 붙였다.

 "자네도 같이 가게. 회사 인간들을 상대할만한 사람이 자네밖에 없으니까……자네 쪽으로 전화를 걸어놓을 테니, 틈을 봐서 바로 도망치게."
 "선생님은……?"

 여름이 물었다. 나는 그 전화에서 이경진이, 아니, 회사가 나와 여름과 함께 그가 이곳에 있는지도 물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그 전화로 유무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인하 정도 밖에 없었다. 영하도, 여기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문을 연 다음에 나름대로 피해보겠네.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으니까 말일세……서두르게. 어서!"

 우리는 1층의, 뒷문에 가까운 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에 쳐져있었던 커튼을 살짝 들춰보니, 뒷문 쪽에도 몇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괜찮겠어?"

 인하가 여름에게 물었다. 이런 일은 내가 서울에서 나올 때도 있었다. 그때 여름의 덕으로 어떻게 상대를 따돌릴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일이 그렇게 풀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때의 상대는 아마도 코뮌이었을 것이지만, 지금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회사인데다가 그 숫자도 그때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뒤쪽에 배치된 사람이 적은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 어떤지는 이곳에서는 알 수 없다.

 "상대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수현 씨나 정민 씨가 문제야. 기회를 잘 봐서 어떻게 해보면 되겠지……."
 "그 약, 우리는 못 쓰는 거야?"

 내가 물었다.

 "이야기하자면 복잡한데, 제대로 쓰자면 의식 분석을 해서 나온 열쇠가 필요해요. 당장 방금 전에 수현 씨가 썼을 때도 그냥 쓰러져버렸잖아요.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어떻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영하는 문을 연 모양이었다. 전화로는 제대로 잡히지 않는 소리가 많았지만, 여러 명이 이곳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정민은 떨고 있었다. 자신은 괜찮을 것이라고 했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왜 그러세요?"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일단 접어두고 나서.

 "선생님 목소리였어……."
 "네?"

 나는,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얼굴은 달랐지만……선생님 목소리에다, 선생님 말투였어……."


 여름에게 걸려온 전화는, 영하와 상대가 하고 있는 말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 오랜만이네……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자네가 아직도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었는데 말일세. 그래도 이렇게 기다려줘서 고맙네. 그런데, 정민이는 어디 있나?
 - 자네는 대체 누군가?

 영하의 목소리였다. 그는 그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 갑자기 왜 이러나? 벌써 내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건 아니겠고……
 - 난 자네 같은 사람은 모르네.

 정민이 말했다.

 "분명히 선생님 목소리예요……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똑같다는 게 가능한걸까요……."

 나는 방금 전의 꿈에서 이경진의 목소리를 들었었나, 하고 기억을 거슬러 짚어보았다. 하지만 원래 꿈에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영하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목소리만 비슷한 다른 사람이라는 거겠지. 회사 쪽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확인할 겸 여름에게 물어보았다.

 "어때? 목소리가 정말 비슷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목소리도 그렇지만, 말투나 억양이 비슷해요."

 그러는 중에도 영하와, 이경진의 목소리를 닮았다는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 이경진 아닌가. 기억 못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 웃기지 말게! 그러면 자네를 따라온 인간들은 도대체 다 뭔가?

 적당히 상대하고, 자신의 몸을 빼칠 궁리부터 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답답해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그게, 굳이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지는데 말일세……
 - 회사하고 손을 잡았나?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 남자는, 화제를 돌려 영하에게 물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정민이나 수현 양은 어디로 간 건가? 여름이도 여기 왔던 것 같은데? 걔들은 벌써 가버린 건가?
 - 여름이나 수현 양은 사흘 후에 다시 오겠다고 갔어. 여긴 없네.
 - 수현 양은 사흘 후에도 굳이 여기 올 필요가 없을 텐데?
 - 자네가 할 이야기가 아닐 텐데……? 수현 양도 자네가 여기 오게 했던 것 아닌가?

 영하도, 점차 자신의 앞에 선 대상이 누구인지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경진과, 이경진을 닮은 회사의 남자, 그 둘에게 각각 해야 하는 말이 점차 한 문장에 섞이고 있었다. 나와 인하가 그 말에 집중하는 동안, 여름은 커튼 바깥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 상대의 남자가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그래, 그건 그랬지. 가버렸다니……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됐군. 그런데, 정민이는 그러면 대체 어디 있는 건가?
 - 여기 없네.
 - 정민이가 받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뭐, 상관없네. 아니, 그쪽이 낫겠지. 그런데, 정민이는 없는데 자네는 여기 왜 있는 건가? 뭘 하려고?

 남자는 몰아붙이듯, 짧은 말들을 이어나갔다.

 - 자네도 여기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일세. 괜히 혼자 남아서 문을 열어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 집 주인인데, 내가 이 집 열쇠 하나 없겠나? 자네가 굳이 열어주지 않아도, 들어오는 건 상관이 없거든.

 그 남자는 정말로 자신이 이경진이라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무심코 듣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그는 여름이나 정민이, 그리고 내가 여기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영하에게도 여기 없는 편이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그를 붙잡을 회사의 일원으로서 하는 일종의 조소인 것일까.

 - 그렇지만 어쩔 수 없군. 미안하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여름이 말했다.

 "지체하면 안 되겠어요. 빨리 가요."

 그녀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은 현관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도 이 근처의 복도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복도 한쪽 끝에 붙은 뒷문은 어느새 열려있었다. 그리고, 울타리 바깥에 지키고 서 있었던 관광객 차람의 남자 셋이 균형을 잃듯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어제 차를 댔던 곳으로 갔다. 여름은 쓰러진 남자들을 둘러보고는 뒤따라와 운전석에 탔다. 이경진의 목소리를 듣고 불안정해진 것 같았던 정민도, 일단은 별 문제 없이 따라와 차에 같이 탈 수 있었다.

 "뭔가 들려요?"

 여름은 내가 챙겨들고 나왔던 전화를 가리켰다. 신기하게도 전화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다만 이제 거기에서는 대화 대신 시끄러운 소리만 울려나오고 있다. 그래도 차마 끊지는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전화는 결국 몇 초 정도 더 이어졌다가 끊겨버렸다.

 "박영하라는 분은 어쩌지?"

 인하가 물었다. 조수석에 탄 나는, 여름이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물음에 특별히 낼 수 있는 답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인하도 단지 무력감에 그런 말을 꺼냈을 뿐 해결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여름은 말없이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 순간 뒤쪽에서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리고 시동을 걸고 있던 여름은 반사적으로 그 뒤쪽을 바라보았다. 소리뿐만 아니라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땅이 울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나는 문을 조금 열고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있었던, 그리고 방금 우리가 빠져나왔던 건물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폭약을 설치하고 무너뜨리는 것처럼 그 적벽돌 건물은 제자리에 그대로 주저앉듯 무너져갔다. 먼지 사이로 세월이 묻은 적벽돌 하나하나가 절반으로, 또 그 절반으로 부서져가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나를 말리던 인하와 여름도 그 장면에 멍하게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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