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8.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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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5 Mar 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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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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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고하게만 보였던 적벽돌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리는 벽돌들은 어쩐지 그만한 무게가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반듯한 직선을 세워놓은 것 같았던 그 건물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로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그건 그 소리에 놀라 거리를 에워싼 사람들도 비슷했다.
 다만 정민과 여름은 일단 건물 쪽으로 뛰어가고 봤다. 나는 그 둘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내민 손보다 그들이 뛰어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압도적인 장면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바깥쪽에 서 있었던 회사의 사람들도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럴 때는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요 며칠간 유난히도 많이 들었던 질문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결론이 내려지기까지는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가요. 어차피 더 있어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여름이 돌아서서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정민을 끌고 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리라. 내가 물었다.

 "괜찮을까?"
 "사실 전 괜찮지는 않아요. 내키지 않는 게 더 많고요. 그렇지만 수현 씨나 인하를 더 이상 끌고 다니는 것도 잘못이라고 봐요. 두 사람 다 이런 일하고는 관계가 없고, 또 관계가 없어야만 하니까요. 그러니까……같이 돌아가요. 서울로."

 그렇게 칼로 자르듯 이야기하면서도, 그녀 또한 지금 일어난 일이 마음속에서 제대로 수습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물론 그것은 늘 일어나는 일에 일정한 수준이 있다고 가정할 때의 이야기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버렸으니까. 우리가 머뭇거리는 동안 그녀는 차에 탔다.
 정민도 전화를 한 통 하고 나서는 우리와 같이 차에 올랐다.


 "정민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여름이 물었다. 정민은 뒷좌석, 내 바로 옆쪽에 타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한참 혼란스러워하던 느낌이 조금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는 내가 이때까지 봐 왔던 차분한 기운이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말했다.

 "집에 가야지. 나도."
 "강릉으로?"

 여름이 되물었다. 강릉에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랑 같이 서울에 있는 건 어때요?"
 "왜?"

 정민의 표정은 한참 더 복잡해졌다. 일단, 조금 가라앉았다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정해보였다. 여름의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었던 것이겠지. 이전부터 알고 지냈었던 것이 아니기에 나서지 못했었던 것 뿐, 내게도 비슷한 생각은 들었을 정도니까.

 "아뇨. 그냥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난 괜찮아. 강릉을 거쳐 가자면 시간이 더 걸릴 테니까……그게 좀 미안하긴 한데."

 정민이 말했다.

 "그냥 이 근처에 내려주면 내가 알아서 갈게."
 "두 사람 다 괜찮죠? 한두 시간 정도 늦어질 거 같은데."

 나와, 조수석의 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은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혼잣말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그냥 안 내려주면 되는 거지만."

 그렇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표지판에는 어느덧 강릉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거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해야 할 말, 아니, 해도 좋을 말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제야 우리가, 아니, 내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은 그곳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것뿐인 것이다. 그러지 않고 어쩔 수 있었겠느냐고 말은 해도, 그런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서울에서 나와 속초로 향할 때도, 마찬가지로 도망쳐나왔던 것뿐이니까.
 나는 창에 기대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 꿈속을 헤매었던 탓인지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지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사실 그건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잠 속에 빠져드는 순간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그 둘은 칼로 자르듯 명확한 것이 아니라 흐릿한 대역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다.
 강릉에 도착했을 때, 정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차 밖으로 나와 바깥 공기를 맞았다. 그 차 안의 공기는, 마치 몽상에 젖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공기를 빼내지 않으면, 그리고 그 공기 속에 들어있었던 우리도 피에 흐르는 몽상의 기운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 속에 침전해 들어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나는 정민의 집 앞에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도 모르게 웃음을 삼켜버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여름이 말했다.

 "별 일이야 있을까봐."

 그렇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서 걱정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회사는 이경진, 아니, 이경진이라고 자칭하는 남자를 오늘 그의 집에 끌고 왔었다. 무언가 그와 관련해서 노리는 것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집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지금은 다음 대상이 그의 조수였던 한정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난 네가 더 걱정이야."

 그녀는 여름을 손짓해 가리켰다.

 "일도 복잡해졌고, 거기다 수현 씨도 챙겨야 할 테니까."
 "뭐, 그 정도야 너끈하죠."

 여름은 짐짓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바다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나도 머리카락이 남아있었다면 그녀와 비슷하게 머리카락에 손을 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잘 있어요. 근시일 내로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녀는 먼저 손을 들어보이고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을 따라, 나와 인하도 손을 저어보였다. 사실 회사라거나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보다 앞선, 일차적인 우려는, 지금 그녀의 불안정함이 그녀 스스로를 덮치지는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만 도망치듯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우리, 잠깐 바다에 갔다 와요."

 문득 여름이 말했다. 속초, 그리고 강릉을 지나오면서 바닷물의 끝자락이라도 밟지 못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터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아마도 일어난 일에 밀려 다른 급한 일들이 그만한 무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이유가 짐작이 가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유 따위가 아무리 내키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여유를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는 정민의 집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바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지금이 여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에는 새삼 신기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런 바닷가에 스스로를 세워두고, 사람 많은 풍경에 일조할 기분은 아무래도 나지 않아 우리는 대신 바닷가를 따라 달렸다. 그렇게 한참 가다보니 사람 없는, 그러나 대신 바위가 가득한 곳과 마주쳤다. 우리는 그곳에서 내렸다. 차의 문을 열자마자 저 멀리에서부터 밀려드는 듯한 바람이 몸을 에워쌌다가, 지나갔다.

 "바다, 오랜만이지 않아요?"

 여름이 말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단정이기는 했지만, 어쨌건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꼭 바다에 가는 게 일상적이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예요.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죠. 가끔이라도 바다의 풍경 같은걸 눈에 담아둘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바다가 있는 이상 말예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사실 바다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요. 이 근처에 살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거예요. 아마. 그런데 가끔은 바다가 너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탁 트여있는 곳에서 물이 넘실댄다는 게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바다에 대한 감상은 별로 없는 나였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바다의 정경과 마주하고 있자니 이야기는 또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몇 년 만인가, 싶었다. 어릴 적 잠깐 주말여행으로 서해에 가봤던 것 이후로는 바다에 갈 일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차올라 있는 물들, 그리고 그 위에 가로질러져 있는 수평선을 바라다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듯한 바다, 그리고 동시에 정말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넓은 공간이었다. 바닷물은 조금 어두운 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의식 없이 그 검은 빛을 바라다보았다.

 "이만, 가자."

 인하가 말했다. 나와 여름은 특별히 거부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한동안 차 안에는 짠 내음이 차 있는 듯 했지만, 이내 그것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오르면서, 이제 이 꿈 같은 일도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일주일 정도가 지나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있었고, 그 중 여럿은 무섭도록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보면, 기억이라는 색채가 덧칠된 때문인지 그것을 회상한다는 것이 마치 꿈속을 더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또 어쩌지?"

 인하가 물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그 물음을 나무랐다.

 "난 그 질문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라고 안 그렇겠냐."

 인하는 짐짓 웃음을 입 꼬리에 걸었다. 그건, 어떨 때는 조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조소 같은 종류의 웃음하고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것은 사실 정말로 조소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문장 자체에 그 웃음이 향하고 있어서, 조소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무작정 서울로 돌아가자고 이야기는 했지만, 사실 정말 그래도 되는지 어떤지는 애매하긴 하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회사도 코뮌도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이제 와서 수현 씨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도 이상하긴 해요. 뭔가 선생님하고 관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수현 씨가 집에 오리라는 걸 예측하고 방을 내주게 시킬 수 있었던 것일 테고요."

 여름은, 정작 인하 대신 내 쪽을 향해 말을 붙였다.

 "그래서, 일단 짐작이기는 하지만 지금쯤에는 서울로 돌아가도 별 일 없을 거 같아요. 당장은 사무실에 있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죠. 어쨌건, 수현 씨나 인하한테도 생활이 있으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최대한 줄이는 게 낫겠죠. 저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믿으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막연한 것이기는 했지만, 나도 비슷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고. 물론 바람과 사실이 이래저래 섞여 어디까지가 바람이고, 사실인지 알기 어렵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뭘까? 멀쩡하던 건물이 갑자기 왜 무너진 거야?"

 그 뒤로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나는 짐짓 그걸 떠올리지 않고 지워버렸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부분은 일부러라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글쎄,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알고 있었다면, 아니, 짐작이라도 했었다면 그녀도 그렇게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 물음을 밀어놓고 있었을 때, 한참 운전대만 잡고 있었던 그녀가 말했다.

 "사람이 인식하는 건 현실을 분절화한 단어의 연쇄죠. 그 사슬이 해체된다면, 그것도 일종의 붕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비슷한 게 그 건물을 대상으로 일어났던 게 아닐까요. 건물을 떠받들어 세우고 있었던 것들이 해체되니까, 더 견딜 수 없게 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녀도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름은 농담처럼 말을 던져놓고는, 결국 헛웃음을 지어 터뜨렸다. 내가 물었다.

 "정리하면, 뭐야?"
 "전부 꿈이었다는 거죠."

 방금 전의 말에 비해서 그 말은 이상하게도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도 여전히 가능할 법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냥 이경진이 자신의 집에 무언가를 설치해뒀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가 집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했던 것은, 그 자신이 돌아왔을 때 집을 폭파해버리기로 작정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물론 그때 온 것이 이경진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정확하게는 이경진이라고 자칭하는 누군가가 그랬던 것이겠지. 본인이 아니라면 누가, 왜 그래야 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깔끔한 결론이긴 한데……."

 인하가 잠깐 끼어들었다. 현실성을 제쳐놓는다면, 그 말이 사실이긴 할 터다.

 "꿈과 현실이라는 게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개인과 환경이라거나, 사람과 현실이 맞닿는 부분은 여러모로 꿈하고 비슷해요. 그러니까……이야기가 샜네요. 하여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모르겠다고 하면 될 이야긴데."

 솔직히 모르겠다는 결론이야말로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깔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먼저 갈 거야?"

 인하가 물었다.

 "수현 씨 집에 먼저 가볼까 싶은데.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집을 비워놓는 동안 누가 또 들어와서 헤집어놓고 가지는 않았을까. 사실 나나, 인하의 자취방이나, 아니면 그 사무실 모두 누군가 뒤져놓고 갔을만한 곳들이기는 했다. 별 일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편지가 여러 통 와 있었다. 그걸 챙겨들고 집까지 올라가봤다. 발자국이라도 찍혀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 들어왔었다는 흔적은, 서랍이 여기저기 빼어져 나와 있다거나, 가구 문이 열려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분명히 남아 있었다. 나는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그것들을 도로 돌려놓았다.

 "없어진 거 없어?"

 인하가 물었다.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 여름은 방 여기저기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럴 일이 없어서 생각을 못했지만, 그렇게 집 안을 보여준다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있을지 모르니 나는 그러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차에 있는 동안 잠을 청하기는 했지만 거기 눕고 나니 여전히 피곤했다.

 "도청하고 있었네요. 여기."

 그녀는 어딘가에서 자그마한 기계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 보면 처음 회사에서 왔다는 남자 셋이 왔을 때 음성 도청이 되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들 나름대로 어떻게 했으리라 싶기도 했고, 다음날 바로 인하의 자취방으로 옮겼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때 그것이 아직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찾았어?"

 내가 물었다.

 "엄청 간단한 거던데요. 수현 씨가 그런걸 의심하리라고는 생각을 안 해서, 대충 설치해놓은 거겠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예상했던 것 중 하나가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코뮌 쪽에서 다 듣도록 했던 거겠지. 이쪽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그들이 도청 장비를 남겨놓은 이유에 대해서 의심이라도 해봤으면 좋았겠지만, 코뮌은 그럴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어떤 미약한 가능성도 제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론은 거의 났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둘 다 어쩔 거야? 지금 갈래?"

 조금 이른 판단인지도 모르지만, 이걸로 일은 어느 정도 수습된 것 같았다. 인하는 잠깐 생각하는 척 하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가기 싫다."
 "……저도."

 여름까지 그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싫다는 인하를 재촉하는 쪽에 서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둘이 있어도 큰 상관은 없고, 어수선한데 사람이 많으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그렇게 해."

 나는 그제야 들고 온 편지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이 별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중간에 눈길을 끄는 이름이 적힌 편지 봉투가 하나 있었다. 대충 넘기던 중에 눈에 띈 것이라서, 신경을 조금만 덜 썼어도 영영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머지 편지가 별 것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그 편지 봉투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발신인은 속초시의 이경진이라고 쓰여 있었고, 수신인으로는 이 집의 주소와 함께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주소와 이름을 쓴 그 필체가 벽에 남아있었던 문구의 필체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도 누군가가 가져가지 않았다는 걸로 봐서,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리라.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러는 손길이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안에는 편지글이 프린트된 종이가 몇 장 들어있었다. 내게 어떤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 일과 관계가 있었기에,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나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상자를 여는 듯한 느낌 정도와 비슷한 것일까. 사실 그런 표현으로도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선물을 받아 끌러볼 때에도 이정도로 긴장하고, 떨렸던 적은 없는 것 같으니까.
 반듯하게 접혀있었던 종이를 폈다. 그러자 딴 짓을 하고 있었던 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던 모양이다.

 "무슨 편지야?"

 나는 대답 대신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그 둘은 그걸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었다가, 이내 한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띄웠다. 나는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인쇄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윤수현 양에게.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있을 때쯤이면 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요. 어쩌면 제가 자살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혹시나 모른다면 이 편지를 빌어 알려드리지요. 저는 이 편지를 제 유서로 남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심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이 머물렀던 제 집의 3층을 뒤져보시면 될 겁니다.
 이런 편지가, 저와 직접 만난 적도 없는 당신에게는 실례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실례인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당신에게 끼친 실례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조금 나중으로 미뤄도 될 것 같습니다.
 유서라고는 하지만, 이 편지는 사실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리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편지는 내 아버지에게 보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고, 동시에 그래야만 했던 것이지요. 저는 아버지에게 보냈어야할 편지를 당신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사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제 아버지의 모습이 이번 일을 통해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신의 안에 있는 제 아버지의 모습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당신이 이 편지를 읽는다는 것은 당신의 안에 있는 제 아버지가 이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당신은 바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당신이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차이에 달려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가정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이해했다면, 아버지에 대한 제 이야기를 또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당신이 이 편지의 대부분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에게 따로 쓴 편지는 끝 쪽에 있으니, 그것만 읽어도 괜찮을 겁니다. 무척 실례되는 일이지만, 저는 당신에게, 제 아버지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읽는 당신에게는 그리 내키지 않을, 아니, 분명히 내키지 않고 어쩌면 경멸스러울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만, 저는 그럼에도 당신에게 이 편지를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은 반면에,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으니까요. 사실 저는 이 편지를 쓰면서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이해했을 것이며 이 편지를 기꺼이 모두 읽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국 그 비겁한 수단에 기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문단부터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가 붙어있었다.


 아버지,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는 것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요구하는 대상으로서 나를 세울 때 내가 그것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생각하게 되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알고 있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제부터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라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건 제 소심한 반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 편지에서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건, 아버지라고 부르건, 당신과 저의 관계는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소소한 반항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겁니다. 입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싫은 만큼이나, 손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쓸 때도 손가락을 잘라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정도니까요.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었고, 그 글을 쓸 재료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글을 쓰자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건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글이라는 것은 어쨌든 생각이 한층 정리되고나 서 나오는 것인데,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더 나아가서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고, 정리되기도 어려웠고,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영영 정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들이니까요. 저는 그 정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신히 가다듬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이 편지를 마치고 나면 다시는 그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할 필요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음을 통해서 제 생각과 감정에 당신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 혹은 감정을 정리하고 풀어낸다는 것은 마치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건 스스로의 검열을 피할 수 없는 생각을 또다시 검열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더 이상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의, 혹은 타인의, 그리고 당신의 생각이 되는 것이겠지요. 당신이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제가 생각을 정리하기를 바랐으니까요. 물론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제가 결국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을 모두 정리해내고 그 자리에 대신 당신의 생각을 채워 넣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그런 식으로의 정리를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최대한 정리를 거치지 않고 이 편지를 쓰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당신에게 결코 친절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가지 진실을 의미합니다. 그건 당신에 대한 저의 감정과 생각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당신이 저에게 보여주었던 모습과 행동들이 도저히 제가 순수하게 생각할만한 것이 아니었고, 복잡하게 그 의도를 해석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행동과 생각, 태도를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신이라면 인간의 행동 가운데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그 말은 늘 그렇듯, 어떤 경험이나 이론으로 검증을 거친 것이 아닌, 단지 단순한 당신의 추측이겠지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고, 또한 당신과 저의 사이에 실재해야 했습니다. 그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히 이 단어를 비웃을 겁니다. 물론 저도 이런 단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그 단어를 제외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 단어를 쓰는 것을 비웃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비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당신과 저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건 당신이, 그리고 제가 순수하게 믿을 수 있는 최후의, 유일한 것마저도 비웃고 비하함으로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제가 아무 것도 믿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도 아무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 제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 저와 우리의 가족이라는 대상이 당신의 손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진실로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당신의 가족 - 나는 가족이 당신의 것인 것처럼 표현하는 듯한 이 말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 에 대한 행동의 행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는 유력감을 통해서 스스로를 지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지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지위가, 특히 가정에서 낮다고 느꼈지만, 가족의 구성원들 모두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당신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사실 당신은 그 이상의 것을 늘 누려왔던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요구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공허함이, 어릴 적부터 채워지지 않았던 그것을 도저히, 그 누구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릴 적, 당신의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했다고 늘 투덜거렸지만, 저는 더 이상 그것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을 경멸합니다. 당신이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면, 정말로 당신이 사랑받는 것이 당연했다면, 그러지 못했던 당신이야말로 그러한 악연을 끊고 사랑받지 못한 성장이라는 비극을 끊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동정 받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단지 판단 받아야 할 사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끊지 못했던 그 악연은 저에게서 끊기게 되겠지요.
 당신이 인정을 요구했던 가족은, 당신의 요구에 침묵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마치 당신을 인정하고 떠받들면 당신이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의 뒤틀린 내면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인격을 깔아뭉개고 부수는 것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이제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인정하면 당신이 그에 걸맞게 우리를 대우하리라는 것도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만족할 만큼 인정한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 우리는 당신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당신의 반응이 한 사람의 인격체를 대우하는 종류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당신이 호의를 베풀 때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정말로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했고, 포장했으며, 그런 반응을 우리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호의는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호의를 베풀어서 우리가 당신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어떤 일관성이었습니다. 당신의 감정의 기복은 우리가 당신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이런 반응을 마치 당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기준은 무척이나 높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기준, 예절 같은 것에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예절에 대한 기준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해 해박하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그 해박한 지식의 결과는 당신에게서도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웃어서는 안 되었지만 당신은 얼마든지 남을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었지만 당신은 얼마든지 타인을, 그리고 우리를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인내해야만 했지만 당신은 아무 것도 인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해내야만 했지만, 당신은 당신의 실수를 인간적인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행동이 아니라 당신의 말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동시에 당신은 판단에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해서 마치 자신만의 결론이 있다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판단을 마치 정확하고 확실한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당신이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말들을 끌어들였고, 누군가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할 때마다 눈에 띌 정도로 불쾌해했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순수히 자신의 판단만으로 어떤 명제나 법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낸 그 법칙들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강요해왔습니다. 당신의 판단에 유보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마치 당신이 모든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생각해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가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다고 단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당신의 어처구니없는 기만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어떤 괴물인건가요. 당신은 스스로에게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것은 사고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인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요, 당신은 사실 행복한 것도,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괴물이고, 나락일 뿐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당신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당신을 저주할 따름입니다. 내가 동정하는 것은 다만 늘 당신에게, 자신의 최후의 날까지 시달려야 했던 저의 어머니이지 당신의 아내였던 분에게만 오롯이 향할 뿐입니다. 아니, 사실 당신은 동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그런 당신에게 동정을 운운한다는 것이 역설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공감과 동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아니, 그렇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비웃음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바로 그것을 지금 당신에게 돌려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마음껏 비웃고 경멸할 생각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닫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어머니는 인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래도 아버지가 있는 것이 - 물론 여기에서의 아버지는 당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대상으로서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하고 우리를 감싸왔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고, 그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어머니는, 그 분은 그러셔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셔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인내하면서 겪는 고통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당신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행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에게는 걸맞지 않을 정도로 고매한 분이셨습니다. 물론 당신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증명해보일 자신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 분이 당신과 결혼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동정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동정을,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동정이라니, 그것은 어머니의 진정한 실수였습니다.
 어머니가 진정으로 선택했어야 하는 것은, 당신과 일찍 헤어지는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분은 당신과 헤어졌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을 위해서도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지 못했던 탓에, 어머니는 마지막 날까지 당신에게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 아니, 얻어 마땅한 행복 그 모두를 빼앗겼습니다. 바로 당신에게 말입니다. 당신은 그러고도, 어머니의 모든 행복을 빼앗고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저는 이제 당신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젠 당신을 저주할 뿐입니다. 저는 당신을 얼마든지 칼로 난자할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숨통을 끊고 마지막 피를 짜내고 조각의 조각까지 살을 씹을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죽음 따위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마지막에는 제가 당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리라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최후의 순간에는 말입니다. 아니요, 저는 당신을 비웃을 것입니다. 나약해진 당신, 아니, 사실 당신은 늘 나약했지요,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신이 스스로의 나약해진 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에 당신의 나약함을 마음껏 비웃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묘비를 걷어차고 부숴버릴 것입니다. 당신이 묻힌 곳을 파헤치고 당신의 관을 열어 불태울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의 죽음을 슬퍼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우리의 마지막 활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어쩌면 그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당신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히려 행복해하며 기뻐하고 웃고 떠들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 아니,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았던 존재라는 것을. 차라리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모두에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 같이 동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아래에서 태어난 제가 동정으로 뭉쳐져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부조리한 일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애로우셨던 어머니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당신은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고통을 모르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과 그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인간의 고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가 배고프다고 짖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없는 그것들이 저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당신은 고통을 몰랐고, 따라서 그 어떤 시점에 고통스럽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우리들에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에게 분노하는 대신 고통스러워해야 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단순히 당신이 인정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당신이 인정받을만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인정받을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당신을 경멸했습니다. 당신 자체,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경멸받아 마땅한 행동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과는 달라서, 제가 경멸하는 행동을 제가 그대로 하는 것을, 제가 싫어하는 성격을 제가 그대로 물려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당신을 제가 닮아간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간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싫어한다고 하는, 그 근원적인 감정에, 자신이 담아둔 사람의 모습이 이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그 깊은 감정 속에 들어가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강하고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자신이 마음에 담아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저는 당신이 제 마음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가 점차 당신의 모습과 닮아간다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을 경멸하고, 비하하고, 비웃고, 싫어하고, 저주하고, 파괴하려고 해도 도저히 그것을 억누를 수도 없었고 거스를 수도 없었고 없앨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제 안에 들어있는 당신의 모습은 뚜렷해져만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당신에 대한 기억이 강렬해질수록 저는 더더욱 더 당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결국 우리를, 저를 파멸시킨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언제나 당신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바랐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유복한 가정, 아니, 평범한 가정 속에 제 자신의 모습을 세워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간절하고도 아련한 느낌이었지만, 저는 그것에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잡을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인 것입니다.
 그래, 당신이 어떻다 하는 것은 사실 비극이 아닙니다. 당신을 세상에서, 우리의 기억과 의식의 수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이, 없애버릴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비극인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찌르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는 글에 덧붙이는 수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 언제나 당신의 심장을 찌를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찌를 수 있었지만, 끝끝내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진작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절 희생해 다른 사람들, 제 동생과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는 길, 그런 유일한 길이었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비겁함도 당신을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걸 깨달은 지금은 얼마든지 그걸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세상과 현실에서 없애버릴 수 없었다면, 그걸 닮아가고 있는 저를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니, 저를 없앤다는 것은 당신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릅니다. 저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것은 제 의식 깊은 곳에 있는 당신의 편린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요. 드디어 당신에게 최후와 종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저의 마음과 의식에 기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 기생충 같은 당신을 절개해낼 것이니까요.
 이런 편지를 쓰고 나니 드디어 언제나 저를 괴롭혀왔던 고통도 조금은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영영 그 고통이 사라지도록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것이 저에게 가져다줄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저는 그것이 무섭지 않습니다. 지금 저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당신을 떼어내 버릴 수 있다는, 그리고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을 하려고 하고 있다는 환희뿐입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시길. 당신에게 바닥없는 나락이 기다리고 있기를 빕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나는 내 생각의 문장 속에 들어가 있었던 아버지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가슴 한쪽이 쿡 찔리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그리고 그가 그렇게나 바랐던 동정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내 안에 들어있는 그의 아버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이제 내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편지를 마저 읽었다.


 당신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런 글을 읽게 해서 거듭 미안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도 많은데, 저는 마지막까지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해버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의식 속에, 제게 남아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집어넣었습니다. 당신이 제 집에서 머물렀던 그 방에, 저는 당신이 감응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별 문제가 없었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제 아버지가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의 존재는 바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름이 같이 있다면, 여름이에게 의식 해석을 부탁해보세요. 그리 깊숙이 들어가지 않아도 당신은 제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느냐는 것은 결국 당신의 의지인 것이지만, 저는 당신이 제 아버지를 당신의 의식 속에서 죽여 없애 내쫓아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당신도 당신의 의식 속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해버린 주제에 이렇게 부탁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 밖에 없습니다. 고백하자면 제 연구는 그 어떤 공익적인 목적도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 안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지요. 겨우 그런 것을 위해서, 물론 그런 행동은 그 어떤 대의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당신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물론, 당신을 그렇게 사용했던 것은 다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을 끌어들여 저를 감싸는 짓 따위를 할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을 대신해서 저라도 당신에게 사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회사와 코뮌과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결국 당신을 또 끌어들여버렸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당신이 제 집에 와서 머무르는 것이 필요했기에, 그것을 부득이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일지도 모릅니다. 거듭 미안할 뿐입니다. 저는 결국 당신이 제 사과를 받아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잘못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편지에, 사과의 의미로 당신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에 대한 쪽지를 동봉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무엇을 가진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될 테니,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부디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름이에게 의식 해석을 부탁하신다면, 여름이에게도 제가 안부를 전했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아니, 여름이에게는 이 편지를 보여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마음밖에 옮길 것이 없는, 이경진이 씀.


 결국 마지막까지 그는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기까지, 인하와 여름은 초조해하면서도 조용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는 다 읽고 난 편지를 그 둘에게 내밀었다. 그 두 명이 그 편지를 다 읽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뭘 해야 할까 생각을 하다가, 착잡한 생각을 끌어안고 이불만 끌어올려 덮고 말았다.
 여름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정민 씨?"

 그녀가 뭘 하려고 하는 것일까, 불안한 느낌부터 먼저 들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뭐하지만……선생님 아버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디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살아있고,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을까. 이 편지를 전해줘야 할까? 그러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그건 이경진이 차마 말하지는 않았던, 그리고 말 할 수 없었던 마지막 소원인지도 모른다.

 "네,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전화를 해서……."

 우리는 답을 기다리며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 년 전에 돌아가셨대요."

 결국 답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검증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이경진이 현실이 아니라 내 의식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려했던 이유인 것이겠지. 그의 말대로 진작 이런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직접 이야기할 수 없었던 그가 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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