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9. 미로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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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6 Mar 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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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Kal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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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 해석부터 해보는 게 어떨까?"

 나는 여름에게서 편지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그녀는 편지를 들고 한참을 머뭇거리고 나서야 내게 건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것이, 그런 식으로 행동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이것저것 따져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더라도 내일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하루에 두 번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가니까."
 "무리?"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의식 해석을 하는 자체가, 하루 이틀 밤을 새는 정도? 그 정도로 무리가 가요."

 서둘러야 하는 일 까지는 아니었으니까, 하루 정도는 상관이 없었다. 무슨 급한 부분이라도 있다면 그도 편지에 남겨놓았을 것이다. 거기다, 당장 하자고 이야기를 했던 나도 조금 피곤했다. 아마 이렇게 피곤하고 졸린 것도 몇 시간 전에 했던 의식 해석의 후유증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다 잠을 안 자는 것하고 비슷하다는 그것에, 정신 사나운 일까지 겹쳐버렸으니까.

 "그런데, 꿈에서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 특별히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인하가 말했다.

 "죽는 장면을 확인하지는 못했어. 그냥 칼에 맞고 떨어졌다 정도일 뿐이지."

 물론 현실에서라면 당연히 죽고도 남겠지만, 의식 속의 일이니까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도 안 죽으면, 어떻게 죽일 수 있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기는 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니까. 그건 자살이었잖아. 내 의식 속인데, 내가 그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죽은 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말했다.

 "그것도 그렇고, 확실히 해두고 싶어.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그냥 넘어갔다간 혹시라도 남아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계속 들 거 같은데."

 그리고 편지를 읽고 난 이상, 그가 제멋대로 자살하는 걸로 끝났다거나 하는 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결말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끝나는 것이 싫다는 생각만은 분명했다.

 "그건 그렇겠다. 그런데, 만약에 만나면 죽일 거야?"
 "글쎄……."

 꿈속에서라도 그럴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쨌건 내 마음 속에 그런 부분을,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싫었고, 어떻게 지우든 쫓아내든 하기는 할 터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도 내 안에 제멋대로 들어와 있는 남자에게는 최후를 의미하는 것이다.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결국 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날까지 별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역시 나는 회사에게나, 코뮌에게나 미끼 정도였을 뿐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어제 있었던 일이, 그 두 집단의 입장에서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공백 동안은 내게 손 쓸 여력이 없는 것이겠지.
 인하는 오늘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여름은 깨기는 했지만 정신이 금방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커피 마실래?"

 일단 깨어있는 여름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깐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 피곤했던 것은 거의 가셨다. 밤을 새는 것이 일단 샐 때는 지치지만, 그래도 하룻밤 자기만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아지는 것처럼.
 여름은 그러고 나서도 한참 눈을 반쯤 감고 있다가, 물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자신의 손에 커피 잔이 쥐여지고 나자 눈을 떴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그러고 있는 것을, 특히 손에 들린 커피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엽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약, 지금 주면 안 될까?"

 그녀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두르실 필요 없잖아요?"
 "그냥 빨리 끝내려고. 지금은 특별히 피곤하지도 않고……거기다 지금은 아침이잖아? 어쩐지 그런 건 이른 시각에 해야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근거 없는 막연한 추측을 괜히 덧붙여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법 하네요."

 여름은 품속을 더듬어 그 하얀색 알약을 찾아, 한 알을 집어 내밀었다.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래."

 애초에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했더라면 아침 일찍부터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내가 약을 입 속에 넣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문득 물었다.

 "꿈은 어땠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속초에 있는 사흘 동안 꿨던 그 괴상한 꿈은 꾸지 않았다.

 "오늘은 안 꿨어."
 "다행이네요."

 그녀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면 괜찮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거나, 그런 식으로 할 만한 말이 더 있었을 것도 같은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잘 갔다 오세요, 라고 해야 될까요? 이런 상황에는."
 "그건 잘 모르겠는데……그러면, 갔다 올게."

 여름은 작게나마 소리 내어 웃었다.
 약이 녹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그 약이 무척이나 썼다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후회했다. 어차피 하긴 했어야겠지만 이렇게 선뜻 집어들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약은 몸속으로 빨리 퍼져나갔다. 약이 신경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건 카페인의 덕으로 깨어났던 정신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흐려지던 의식은 급속도로 다시 선명해졌다. 나는 어딘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곳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제 내가 이경진, 아니,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쳤던 바로 그 방이었다. 물론 보통 말하는 시간의 개념이 의미가 있는 공간은 아니겠지만, 오늘 이곳엔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날씨는 맑았고, 나는 눈꺼풀을 두드리는 정방형의 햇빛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빛에는 나른한 따스함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와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이경진이 앉아있었다. 그는 손을 깍지 끼고 그 위에 뺨을 받치고 있었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로 그는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경진은 이전에 했던 것과 비슷한 동작으로 손을 움직여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의자를 빼어 앉았다. 무심코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의자를 뺀다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거칠어져서 신경질적인 느낌을 내버렸다.

 "놀라지도 않는군."

 그가 말했다.

 "당혹스럽기는 하지만……예상은 하고 있었어."

 해놓고 보니 이상한 표현 같기는 했다.

 "네가 죽인 게 아니라서 죽지 않는 것 같더군. 아니, 죽을 수가 없었다 쪽에 가깝겠는데. 미안하지만, 내가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너 자신이 죽이는 수밖에 없겠어."
 "우습지도 않아."
 "응?"

 그는 애매한 웃음을 띄우며 물었다.

 "제멋대로 들어와서는, 이제 죽이려면 죽이라고 버틴다는 게. 사람 죽이는 게 쉬운 일이야? 아니잖아."
 "여긴 꿈속이잖아.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그렇게 예민해질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

 나도 평소의 꿈이라면 그런 세부에 대해서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겠지. 다만 이건 보통의 꿈이 아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허구겠지만,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현실 이상으로 생생했다. 죄책감 까지는 들지 않더라도 분명 트라우마는 될 것 같았다.

 "어제도 그랬잖아.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찔리고, 뛰어내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무시무시한 장면이지. 그렇지만, 네가 그에 걸맞을 만큼 반응한 것은 아니잖아? 그냥 정신없다는 말로 다 덮어버리지 않았어?"
 "그거하고 이건 다르잖아."

 정말로 그런지 어떤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직접 죽여야 한다는 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네가 예상하는 만큼 강렬한 느낌은 아닐 거야. 그건 분명해. 너는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기보다는, 반대로 잊어버릴걸."
 "그게……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국 내가 그에 대한 기억을 억압해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의식 속에서, 생각과 마음속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에 대해 잊어버린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면……."

 이경진은 서랍에서 칼을 가져왔다. 나는 그가 내민 칼을 잡고 들어보았다.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식칼일 뿐이었다. 식칼을 처음 들어보는 것도 아닌데, 그 무게감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점차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고 나니까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군.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건 싫은데. 어쨌건, 언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내키면 바로 해버려. 지금 당장 해줬으면 좋겠군. 내 바람이기는 하지만."

 그가 말했다. 나는 그러는 대신 칼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칼날이 유리와 부딪치는 소리가 이곳을 메우고 있었던 정적을 잠깐 깼다. 이경진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널 찌를지도 모르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물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못할 건 없어."
 "그러고 보니까, 당신은 예측하기 어렵다고 그러던데."

 편지에 그런 식으로 쓰여 있기도 했고, 당장 어제 있었던 일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나를 죽이겠다고 나섰다가 자살해버린다거나 하는 것은, 내가 당사자로 서 있었으니 느끼지 못했지만,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도대체 의미와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이경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사실이라고 순순히 인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정답이네. 그러니까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말야."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내키지가 않아. 자기를 그렇게 죽여 달라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뭔가 따로 바라는 게 있지는 않은가……."

 갑자기 자살한다거나, 죽여 달라고 한다거나, 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편지에서도 자신의 아버지 같은 것이 마음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내키지 않을 테니 죽여 버리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러면 끝인 것인지,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건 없어. 정말이야. 그냥 이제 더 이상 살아있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지. 또 단순히 의미가 없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내 죽음을 스스로 바라고 있는 거야. 왜냐면, 그게 내 본성이기 때문이지. 편지를 읽었다면 너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스스로의 소멸을 바라는 충동이야. 그게 바깥으로 향하니까 타인을 재단하고, 통제하려고 들었지. 그렇지만 그게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면……결론은 당연한거 아니겠어?"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유난히도 의심이 많았지.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감정이 강하게 동요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에 비해서 그런 일들을 의심하고 따지는 경향이 강해.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도 쉽사리 믿지는 않겠지."
 "그것도 의식 해석으로 알아낸 건가?"

 내가 물었다.

 "그것도 그렇고,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느꼈던 걸로 결론을 내려 봐도 그랬어. 그것 말고도 넌 이것저것 특이한 부분이 많기는 한데, 그런걸 이제 와서 특별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너도 어떤 것이 특이한지는 몰라도 네 자신에게 무언가 특이한 면이 있어서 이런 일에 엮이게 됐다, 그런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당신도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일부러 그의 반응하고는 별 상관없는 말을 끄집어냈다. 그런 식으로 길어지는 말에 따라가고 있다가는 그의 생각이나 이야기의 흐름에 그대로 휩쓸릴 것 같아서 그랬다.

 "알고 있어."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어. 공들여서 내 시선을 피한 채로 쓴 글이니까, 그게 어떤 건지 정말 궁금했지. 알겠지만 나는 그런 부분이 있다는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야.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걸, 그리고 그 부분이 나에게 불온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괴로운 인간이거든."
 "그래서, 어땠지?"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말 이전에 행동으로 바로 드러났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푹 숙였다. 꼭 당장이라도 일어나 미친 듯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땠냐고?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어. 나름대로는 나를 미친 듯 매도한 것이지만, 또 쓰면서 그러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나는 별 느낌이 안 들더군. 겨우 이런 거였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 그 녀석 말이 맞아. 나는 실패하고 무너져본 적이 없던 거지. 늘 그렇다고 불평하기는 했지만 말야. 그래서 정말로 무너지는 순간에, 어떻게 느끼고 말하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경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잘못했다는 생각은?"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는 표정이 불안정했다. 한순간도 입이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표정으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그건 웃음이라기보다는 덜덜 떨리는 것에 차라리 더 가까웠다.

 "그래. 잘못했지. 몹쓸 짓을 했어. 미안하기도 해."

 그는 이죽거렸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마음에 들어? 그런 식으로, 후회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랐어? 물론 그 마음은 진심이야. 그런데 그 미안하다는 말이 진심에서 한 말이라고 해도,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내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네 속이 시원해질 일인가?"
 "화해할 생각 같은 건 없었어?"

 나는 재차 물었다.

 "화해? 그 녀석은 그러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 싶으니까 병원에까지 찾아가보더군. 그런데,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기 마음이 그랬다느니,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러고 나서 화해해야 할 그 사람이 죽어버린 거야. 그랬으니까 너한테 자기 속에 남아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집어넣고, 너한테 자신의 편지를 읽게 한다는, 그런 복잡한 짓을 한 거지."

 그는 점차 말이 빨라졌다. 입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 말고. 당신 말야. 당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면 사과하고 싶다거나, 화해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어?"
 "그런 생각? 편지를 읽어봤으면 알 텐데. 내가 지금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그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됐고, 거기다 그 녀석이 자살했기 때문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영영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나는 그런 인간이야. 그런 인간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걸 왜 묻지?"

 이경진이 소리쳤다.

 "내가 잘못했다고, 후회한다면서 울기라도 하기를 바라는 건가? 너무 순진하지 않아? 넌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을 인간은 아닐 텐데. 왜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그런 쓸데없는 물음을 던진 것은, 어떤 감상 같은 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에 흔들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탁자에 놓여있었던 칼을 집어 들었다. 거기서는 여전히 이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것도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내가 굳이 그런걸 물었던 건……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걸 듣고 나면 기꺼이 당신을 경멸하고, 또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그런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내가 말했다. 그는 그 말이 뜻밖이었는지, 생각이 잠깐 멎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확실히 경멸할 수는 있게 된 것 같아. 그런데 그렇다고 죽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자신이 없는데. 생각해보면, 경멸하는 대상은 쉽게 죽일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그래서 이경진도 당신을 그렇게나 경멸하면서도 죽이지는 못했던 건지도 몰라."

 거기까지 말을 잇고 나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것이, 그의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이유들을 끌어 모아 풀어놓는다는 것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나는 칼을 잡아 무릎 위에 얹었다.

 "당신을 죽인다는 게, 꼭 당신 좋은 일을 하는 것 같거든. 마음 같아서는 평생, 아니, 영원히 고통 받게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죽이는 정도 밖에 없는 거야. 이경진도 그런 느낌이었겠지. 그 사람은 죽어가는 자기 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거나 했던 게 아닐 거야."

 나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당신이 스스로 저지른 일 때문에 고통 받도록 없을까, 하고. 그렇지만 그런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겠지. 거기다……내 마음 속에 당신 같은 게 어떤 식으로는 살아남아 있다는 건 싫어."

 말을 이어나가면서, 스스로도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칼을 고쳐 잡았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어떻게 됐건 당신을 죽일 거야."

 나는 의자에 앉아있었던 이경진을 밀어 넘어뜨렸다. 팔로 목을 누르고, 칼로는 심장 쪽을 겨눠보았다. 그는 다만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충동적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역시 칼을 꽂는다는 것은 쉬운 짓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이 다잡혀지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생각해봤어?”
 이경진이 말했다. 그는 눈길을 들어 나를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때는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었지만, 사실 방법은 있었어. 미로 자체를 부수는 거야.”
 그는 가느다랗게 웃고 있었다.

 "그 녀석……아무리 그래도 말야, 너한테 이런 짓을 시켜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이경진은 나를 향하고 있었던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그 눈빛에는 점차 공허한 느낌이 섞여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을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쉽게 들어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게 한번 내리치는 것 정도로도 충분히 그 안쪽까지는 찔러넣을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눈을 뜨고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똑바로 뜨고, 천장이나마 바라보고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피가 흘러나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고, 칼을 잡고 있었던 손과 소매는 순식간에 거기 젖어버렸다. 나는 손을 펴서 그 안에 고인 피를 바라보았다. 피는 생각보다 미끈거리고, 비릿한 내음이 나고, 또 따뜻했다.


 눈을 떴다. 나는 벽 한쪽 구석에 기대 있었다. 인하와 여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이야 그렇다 치고 인하도 일어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잠깐 웃음을 지어 띄웠다.

 "괜찮아?"

 어지럽기는 했지만, 특별히 그 이상 불편하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제쳐놓고 바로 세면대에 향했다. 손에 묻어있었던 피는 금방 씻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검은색 옷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피가 묻은 것인지, 물로 닦고는 있지만 정말로 지워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됐어?"

 인하는 거기까지 따라와서는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죽었어."

 이야기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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